• 로그인 회원가입 지면보기 전체기사
 
기사제목 [특별기획] 미 방위산업 변천사로 본 한국 방위산업의 미래 ③ 끊이지 않는 논란, 획득제도(상)
보내는분 이메일
받는분 이메일

[특별기획] 미 방위산업 변천사로 본 한국 방위산업의 미래 ③ 끊이지 않는 논란, 획득제도(상)

기사작성 2018.10.19 10:25
최종수정 2018.10.23 10:43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댓글 0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내용 메일로 보내기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noname011.png▲ 1957년 10월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 성공을 알리는 기사. 같은 달 미 국방부는 해군 주도의 인공위성 프로젝트 예산을 승인했다. 이를 스푸트니크 충격(Sputnik crisis)이라 하며, 미국을 국방과학기술의 중심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됐다.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 계기로 3군 독자적인 획득사업을 국방부 통제로 법제화
 
맥나마라 국방장관의 획득계약 개혁은 성공적, 반면 사업관리 개혁은 실패해  

(시큐리티팩트=김율희 전문기자)

방위사업이 시작 된지 지난 40여 년 동안 우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차례 방위사업 개혁을 추진해왔다. 개혁의 노력과 달리 방위사업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투명성, 효율성, 전문성 등에서 논란이 되었고, 이를 개혁하기 위한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방위사업에 대한 지속적인 논란은 비단 우리 국방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방위사업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미국의 획득제도 또한 효율성, 전문성 등 제도적 성과에 대한 지속적인 논란을 겪고 있다.

따라서 본 편에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2018년까지 미국의 획득제도 변천 배경과 주요한 변화를 상(上), 하(下)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미국의 국방획득에 대한 법적·제도적 필요성과 개혁 시도가 시작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다. 2차 세계대전 이전, 미국의 육·해·공군은 독립적인 예산집행 권한을 갖고 있었으며, 소요 개념을 고려하지 않은 채 방산업체가 독자적으로 무기체계를 개발하면 각 군이 필요한 것을 구매하는 형태였다.
 
1947년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은 3군의 독자적인 국방예산 집행권을 하나로 통일하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증가된 국방예산을 감축하기 위해 국가안보법(National Security Act) 개정을 통해 육·해·공군성 위에 국방부를 설치했다. 또한  국방장관의 자격을 군에서 전역한지 10년 이상 된 민간인으로 제한함으로써 3군의 국방예산 통제를 위해 겪을 수 있는 각 군의 압력이나 결탁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국방부의 초대장관으로 해군성 장관인 제임스 포레스탈(James V. Forrestal)을 임명했다. 포레스탈 장관은 각 군의 국방예산 집행 방식을 국방부 양식으로 통일하려 했으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혀 예산 양식조차 통일하지 못한 채 퇴임하고 만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무기체계 수요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미국의 방위산업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미국의 방위산업은 독자적인 제조 중심에서, 고객인 군의 요구에 따라 설계와 개발을 하는 산업으로 변모해 나갔다. 더불어 소련과 국방과학기술 개발 경쟁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수소폭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인공위성, 우주탐사까지 막대한 국방예산을 연구개발에 투입했다. 

이런 상황 속에 1957년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인공위성 스푸트니크(Sputnik)를 우주 궤도에 진입시키는데 성공했다. 당시 국방 획득사업 관리가 각 군별로 이뤄지고 있었던 미국은 육·해·공군 모두 인공위성 개발을 추진해 오면서 3군이 제안하여 경합한 끝에 해군이 인공위성 개발 주체로 선정됐다. 하지만 미국이 인공위성 개발 주체 선정을 두고 각 군이 경쟁을 벌이는 동안, 소련이 먼저 인공위성 개발에 성공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과학자들로 구성된 해군의 개발진이 인공위성 개발에 연달아 실패하자 개발 주체는 다시 육군에게 넘어갔고, 기술적으로 우위에 있던 독일 과학자를 대거 영입해 개발을 추진했던 육군은 소련이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한지 4개월 만에 인공위성 익스플로러(Explorer)를 우주 궤도에 진입시키는데 성공했다.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개발이란 타이틀을 소련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에 미국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으며, 각 군이 경쟁적으로 동일한 무기체계를 개발하는 국방 획득사업 관리 방식은 도마에 오르게 되었다. 결국 1958년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대통령은 3군의 독자적인 획득사업 관리를 국방부 통제 하에 두기 위해 각 군의 무기체계 개발, 제조, 운용의 승인권을 국방장관에게 위임하는 국방재조직법(Department of Defense Reorganization Act)을 제정했다.

또한 소련과의 과학기술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지금의 DARPA(Defens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의 전신인 ARPA(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를 설립했다. DARPA는 인터넷 · 모바일 로봇 · 음성인식 등 현재 상용화되고 있는 수많은 첨단기술을 개발했다.  
 
1947년 개정된 국가안보법과 1958년 제정된 국방재조직법에 의해 국방부가 획득예산은 물론 사업 관리도 통제할 수 있었으나, 1961년 포드(Ford)사의 사장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가 존 F. 케네디 대통령(John Fitzgerald Kennedy)에 의해 국방장관으로 임명되기 전까지 국방부의 권한 행사는 미미했다.

31.png▲ 포드 자동차의 사장인 맥나라마 장관 임용 기사. 냉전시대의 국방과학기술 경쟁을 반영하고 있는 표지 이미지로 맥나마라를 마치 서부시대의 개척자처럼 우주시대의 개척자로 표현했다.
 
               
로버트 맥나마라 장관은 각 군에 고정비율로 할당하던 국방예산제도를 폐지하고 PPBs(기획 : Planning, 계획 : Programming, 예산 : Budget  System) 개념을 도입하여 육・해・공군의 획득 예산과 사업 관리를 국방부 통제 하에 두었다. 

각 군은 임무, 적 위협 등을 고려해 무기체계 획득을 위한 기획(Planning)과 기획을 실행할 수 있는 계획(Programming)을 국방부에 제시해야 예산(Budget)을 배정받아 집행 할 수 있었다. 이로써 국방부는 획득예산을 국방장관의 완전한 통제 하에 둘 수 있게 됐다. 

로버트 맥나마라 장관은 계약과 관련된 행정 및 감사 조직인 DCAS(Defense Contract Administration Service), DCAA(Defense Contract Audit Agency)를 조직했다. 또 획득사업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통합계약 방식인 TPP(Total Package Procurement)와 운영개념 정립 문서인 DCP(Development Concept Paper)를 시행했다.

TPP(Total Package Procurement)는 계약 체결 후 변경이 자유로워 F-11, F-14A Tomcat 전투기의 획득 프로그램에 적용했으나, 비용이 많이 초과돼 1966년 중단되고 말았다.

로버트 맥나마라 장관의 국방 획득개혁은 국방부 중심의 획득예산 집행조직 신설, 조달 및 계약 절차와 방법 수립 등 획득계약 측면에서는 성공적으로 추진됐으나. 획득 사업관리 측면에서의 개혁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하편에 계속)

김율희200.png
 
로봇 Concept Design 전문가(공학박사)
광운대 방위사업연구소 연구원
‘미래전의 희망, 국방로봇’ 공동 저자
前 방위사업청 주무관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09191
 
주식회사 더시큐리티팩트· 서울시 서초구 반포대로 24길 15, 3층 (서초 중앙빌딩)· 대표번호 : 02-501-6906· 팩스번호 : 02-878-8656문의메일문의메일
대표이사 : 강남욱· 발행인 : 김희철· 편집인 : 이태희· 사업자번호 : 163-88-00857· 정기간행물등록번호 : 서울 아04835· 등록일 : 2017년 11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