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큐리티팩트=최석윤 기자] 엔비디아가 자사의 인공지능(AI) 칩에 ‘백도어’가 없다고 1일(현지 시각) 단호하게 밝혔다고 외신이 보도했다. 중국 인터넷 규제 기관인 중국 사이버공간관리국(CAC)이 엔비디아의 H20 AI 칩에 ‘백도어’가 있을 수 있다며 보안 문제를 제기하자, 즉각 반박에 나선 것이다. 이 사건은 미국의 수출 규제가 풀린 지 불과 몇 주 만에 벌어진 일이라, 세계 양대 강국의 기술 전쟁에 또 다른 불확실성을 더하고 있다.
중국 사이버공간관리국(CAC)은 지난달 31일 엔비디아 측 관계자들을 불러 H20 칩의 잠재적 보안 위험에 대해 설명을 요구했다. CAC는 미국 내에서 해외로 판매되는 첨단 칩에 '위치 추적 및 원격 제어 기능' 을 탑재하자는 논의가 있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이는 중국 사용자들의 데이터와 개인 정보 보호 권리가 침해될 수 있다는 우려로 이어졌다. 백도어란 일반적으로 보안 시스템을 우회하여 몰래 접근할 수 있는 숨겨진 통로를 의미한다. 중국 규제 당국은 "미국 AI 전문가들이 엔비디아 칩에 정교한 추적, 위치 확인, 원격 종료 기술이 있다고 밝혔다"고 전하며 엔비디아에 관련 자료 제출을 요청했다.
엔비디아는 이에 대해 성명을 내고 "사이버 보안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밝히며, "엔비디아는 어떤 사람도 원격으로 칩에 접근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백도어'를 제품에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단호히 부인했다.
이번 논란은 시기적으로 매우 미묘하다. 엔비디아는 2023년 말 미국의 AI 칩 수출 제한 조치에 따라 중국 시장을 겨냥한 '맞춤형 칩'인 H20을 개발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지난 4월 트럼프 행정부의 규제에 막혀 판매가 중단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후 몇 주 전 미국 정부가 판매 금지 조치를 철회하면서 엔비디아는 중국 시장 진출에 대한 기대감을 다시 키웠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최근 공개적인 중국 방문을 통해 정부 관계자들을 만나는 등 중국 시장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중국 규제 당국의 움직임은 엔비디아의 중국 내 사업 전망에 다시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홍콩 소재 연구 회사 가베칼 드라고노믹스(Gavekal Dragonomics)의 분석가 틸리 장은 "엔비디아 칩은 이제 중국에게 교섭 테이블에 쉽게 올릴 수 있는 카드가 됐다"고 말했다. 중국은 해외 기술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자국 기술력을 키우겠다는 강한 의지를 여러 차례 보여왔다. 이번 '보안 문제' 제기도 이런 전략의 일환일 수 있다는 분석이다.
그렇다고 중국이 엔비디아를 완전히 내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기술 및 소비자 중심의 86Research 분석가 찰리 차이는 "중국의 이번 경고가 미국의 수출 통제 움직임에 대한 상징적인 반발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그는 "중국은 아직 국내 연구와 응용 분야에서 엔비디아 칩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엔비디아의 H20 칩은 중국의 거대 기술 기업들뿐만 아니라 군사 기관, 국영 AI 연구소, 대학 등에서도 수요가 폭발적이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이미 대만 위탁 제조업체인 TSMC에 H20 칩셋 30만 개를 주문했을 정도로 시장 수요가 강력하다. 이는 중국이 AI 기술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엔비디아 칩을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상황임을 잘 보여준다.
중국이 보안 위험을 이유로 미국 기술 기업을 압박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3년 초, 중국은 자국 핵심 인프라 운영업체가 미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의 제품을 구매하는 것을 금지했다. 당시 중국 당국은 마이크론 제품이 "심각한 보안 위험을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엔비디아는 중국 내에서 독점 금지법 위반 혐의로도 조사를 받고 있다. 이는 엔비디아가 이스라엘 칩 설계 업체 멜라녹스 테크놀로지스를 인수하면서 2020년 조건부 승인 당시 약속한 내용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혐의다.
이처럼 중국은 기술 기업들을 상대로 '보안'과 '규제'라는 무기를 동시에 활용하여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미국의 영향력을 견제하려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엔비디아는 이러한 복잡한 지정학적 환경 속에서 자사의 최대 시장 중 하나인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중대한 기로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