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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 (58)] 선승구전(先勝求戰), 먼저 승리를 만들어 놓은 이후 전쟁을 해야
- [시큐리트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춘추시대에 진(晉)나라의 왕 도공(悼公)에게는 사마위강(司馬魏絳)이라는 유능한 신하가 있었다. 사마위강은 "편안할 때에 위기를 생각하십시오(居安思危). 그러면 대비를 하게 되며(思則有備), 대비태세가 되어 있으면 근심이 사라지게 됩니다(有備則無患)"라고 왕인 도공에게 건의하여 강한 나라로 유지했다는 이야기가 ‘서경(書經)’과 ‘좌씨전(左氏傳)’을 통해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도 ‘유비무환(有備無患)’이란 명언으로 회자된다. 또한 손자병법 ‘군형(軍形)’편의 ‘선승이후구전(先勝而後求戰)은 “먼저 승리를 만들어 놓은 이후에 전쟁을 한다”는 의미이다. ■ 편안할 때 위기 생각하고(居安思危). 대비태세 되어 있으면 근심 사라진다(有備則無患) 군대에서는 모든 것이 경쟁이다. 항상 승패나 성공 및 실패가 붙어 다닌다. 특히 쌍방 훈련에서는 대부분 판결이 난다. 따라서 승리하기 위해 각 부대는 자체 훈련도 강화하고 장비 손질 정비에도 최선을 다하여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당시 필자의 연대장은 전쟁시를 대비하여 교육훈련 중에 행군과 태권도를 매우 강조했다. 연대장 지침에 의해 매주 50km정도씩 주야행군을 계속했다. 그 결과 우리 중대 뿐만 아니라 전 연대원들의 행군 능력은 어느 타부대와 비교해도 월등히 우수했다. 그러나 강한 행군능력을 보유하는 대신 중대행정보급관의 고민과 애로는 반대로 늘어만 갔다. 많은 행군으로 병사들의 전투화(군화)가 빨리 닳아 구멍난 신발을 신고 행군하니 물도 들어오고 또 군화못도 튀어 나와 중대원들의 발은 상처투성이었다. 그래서 각 중대는 군화 정비공을 임명하여 군화의 바닥도 교체하고 헤져 구멍난 곳을 꿰매어 다시 신을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태권도 교육을 강조함에 따라 전 중대원을 유단자로 만들기 위해 교육을 하려면 보급되는 태권도복과 급수에 따른 색깔별의 띠도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중대행정보급관의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헌데 필자에게는 소위로 임관하여 한 개 연대에서 5년에 걸쳐 오랫동안 근무했다는 잇점이 있었다. 연대에 근무하는 부사관 및 장교들을 거의 알고 있었다. 특히 연대 군수분야를 담당한 간부들과는 각별히 지낸 탓에 연대 보급창고를 수시로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원래 정상적인 보급절차는 대대에서 각 중대를 종합하여 연대에 보고하면 연대에서 각 대대를 고려하여 분배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당시에 열악한 환경의 중대원들을 위해서는 필자는 이기적일 수 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는 안면을 이용하여 절차 준수를 잠깐 뒤로하고 연대와 직접 상대하였다. 연대창고에 남아있거나 새롭게 보급되는 태권도복이나 군화를 우리 중대가 우선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 물론 보급품 수불에 따른 문서 처리는 나중에 정리하였다. 그리고 중대원들의 사격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사격용 표적(E, F)이 필요했다. 사격연습을 많이 하면 표적에 총탄 구멍이 많아져 다시 종이를 잘라 표적구멍을 메우고 사격을 할 정도로 표적이 부족했다. 이 또한 사단에 오랫동안 근무했다는 잇점을 이용했다. 연대 교보재 창고에 표적이 없으면 대대에 5분의 4톤차를 신청하여 사단본부로 갔다. 마침 사단 교육장교가 잘 알고 있는 후배라 사단 교보재 창고에 들려 사격용 표적(E, F)과 목재, 시멘트 등을 확보하여 대대에 일부 제공하고 중대에서 활용했다. 그래도 중대원들에게 넉넉한 보급품을 제공하기에는 부족했다. 마침 육사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생도들이 사용하고 남은 태권도복도 얻어서 분배도 했다. 고교 축구부에 연락해서 선수들이 사용하다 낡아서 바꿔 신은 축구화도 협조하여 가져와 나눠주니 대원들은 훨훨 날으며 무척이나 좋아했다. 이렇게 간절한 마음에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며 필요한 것들을 적극적으로 구해서 중대원들에게 제공한 정성은 곧 상급부대 검열, 측정 및 평가에서 진가가 발휘되었다. 사단 전투지휘검열시 사격 측정은 중대가 대표선수가 되었고, 각종 행군에서도 보수 정비한 군화를 신고 자신감 있게 임할 수 있었다. 태권도 유단자는 제일 많았고, 체육대회에서도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중대원들이 마음껏 실력 발휘를 할 수 있었다. 평시에 모든 것을 앉아서 기다리면 늦어진다. 쫓아다니면서 중대원들의 보급품과 교보재들이 부족하지 않도록 확보했고, 그것이 안될 때는 군화 정비소 등을 만들어 보수 및 정비를 했다. 즉 ‘유비무환(有備無患)’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준비하여 훈련하면서 대비하고 있으니 각종 검열, 평가 및 측정에서 나가 싸우라고 했다. 손자가 강조한 ‘선승구전(先勝求戰)’을 실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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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 (58)] 선승구전(先勝求戰), 먼저 승리를 만들어 놓은 이후 전쟁을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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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 (57)] ‘무소불비 무소불과(無所不備 無所不寡)’와 ‘피실격허(避實擊虛)’는 전쟁에서의 선택과 집중을 강조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손자병법 ‘허실(虛實)’편의 ‘무소불비 무소불과 (無所不備 無所不寡)’는 “준비가 부족한 곳이 하나도 없게 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다”라고 풀이된다. 즉 “전부를 다 완벽하게 준비하는 것은 전부가 부실하게 된다”는 뜻이다. 또 ‘피실격허 (避實擊虛)’는 “적의 강한 곳을 피하여 약한 곳을 공격한다”라는 뜻으로 선택과 집중, 집중과 절약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무소불비 무소불과(無所不備 無所不寡)’와 ‘피실격허(避實擊虛)’는 전쟁시 피아가 치열하게 전투를 할 때 전략 및 전술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허나 평시에는 사단 책임지역내 심심산골에 인적이 드문 지역이 산재되어 있어 그곳에서 침투한 간첩들이 은거해 활동할 수 있기 때문에 취약지로 분류해 관리를 하고 있다. 그래서 집중과 절약을 해야 한다는 손자병법의 의미와 상충되는 전 지역을 커버하는 취약지 관리가 필요했다 이러한 취약지역에 소대 또는 중대 단위로 상주하면서 주변 수색정찰도 하고 매복 및 전술훈련을 하면서 병사들의 훈련 수준도 배양하고 침투한 간첩 및 불순세력의 은거도 거부하는 ‘취약지 상주훈련’을 시행했다. 통상 ‘취약지 상주훈련’을 시행할 때에는 부대의 지휘권을 벗어난 타지역에서 해당 소·중대장의 독단적 판단에 의한 행동이 요구되어 반드시 차상급 지휘관에게 훈련계획을 사전에 보고했다. 필자도 사전 토의와 현장 확인을 통해 1주일간의 취약지 훈련계획을 준비하여 보고하자 연대장은 해당 지역이 격오지로 도로도 불량하여 이동 및 소통에 제한이 많기 때문에 적 접촉시 작전조치와 폭우 피해 및 환자 발생 등 우발상황에 철저히 대비하며 병력관리를 잘하라는 지침을 받았다. ■ 장거리 행군에 따른 허기 심해, 설익은 밥도 꿀맛 훈련출발 당일 먼저 선발대를 보냈다. 취사장 설치와 통신선 개설을 위해 중대 행정보급관(인사계)가 취사병, 통신병들을 대동하여 4분의 5톤 통신차를 타고 화천군 백적산(883.5m) 북방 구운리 만산동 계곡으로 출발했다. 군장검사를 마친 중대원들은 취약지역인 만산동 계곡까지 30km행군을 시작했다. 다행히 이규환 연대장님이 평소 행군과 태권도를 강조하여 매주 행군 훈련을 했던 덕분에 병사들은 행군에 익숙해 있었다. 필자는 전방 GOP연대 소속이었으나 이번 ‘취약지 상주훈련’ 장소는 사단 후방 인접사단과 근접한 지역으로 최전방 부대가 사단 책임지역의 최후방으로 이동하여 훈련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행군이 시작되었다. 중대원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관불령을 넘어 신월동과 삼거리라고 불리는 봉오리를 통과해 다시 덕고개를 힘차게 넘었다. 필자가 근무한 지역은 첩첩산중(疊疊山中)이라는 단어가 꼭 맞는 산악지역이라 조금만 이동해도 길옆에 절벽과 벼랑 등 아찔하게 만드는 고개들이 산재해 있다. 행군 간에는 통상 50분 걷고 10분 휴식한다. 그러나 시간이 되어도 아찔한 벼랑 옆에서는 휴식을 하는 것이 위험하여 그나마 비교적 평탄한 곳을 정해야 했다. 쉬고 있다가 자칫 계곡 및 벼랑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중대 행정보급관과 취사병들이 선발대로 투입된 탓에 점심은 주먹밥으로 대체했다. 행군 간에는 배가 든든해야 잘 걸을 수 있는데 허기가 지면 낙오할 수도 있어 건빵을 추가로 휴대했지만 20대 청년들의 허기를 채울 수는 없었다. 오후 늦게 만산동 골짜기에 도착했다. 군장을 풀고 바로 주변 능선에 소대별로 개인 텐트를 설치하며 숙영준비를 했다. 그때 먼저 도착해 준비한 저녁식사가 분배되었다. 야전에서의 취사에 숙달되지 않은 취사병들이라 설익은 밥이었지만 꿀맛이었다. 미식별 천연동굴서 은거흔적 발견, 불온전단 회수하고 독립가옥 신원확인 박영일 중령의 노마지지(老馬之智), 정확한 취약점을 찾아내 “마음은 언제나 태양..!”, 의기에 차 정열을 불태웠던 시절 중대 상황실 텐트에 당직 소대장을 근무시키고 야간 야외점호를 한 뒤 취침에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일조 점호 후에 계획된 주변 취약지역 수색정찰을 시작했다. 모든 일에는 분명한 결과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소대장들에게 경쟁을 붙였다. 각자의 수색 책임지역에서 미식별된 은거가능한 천연동굴이나 은거 흔적을 찾으라고 했으며 북에서 뿌려진 불온전단을 가능한 많이 회수하고, 심신 산골에 홀로 있는 독립가옥은 필히 방문해서 신원을 확인하도록 강조했다. 각 소대를 수색정찰에 투입시키고 숙영지 텐트 상태를 재점검하고 있는데 멀리서 짚차 한대가 오는 것이 보였다. 사단 작전참모 박영일 중령(육사25기, 소장 예편)이었다. 필자는 취약지 상주훈련 계획과 현재 각 소대가 수색정찰 중임을 설명하면서 숙영지를 안내했다. 그런데 사단 작전참모는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 훈련 계획은 잘 수립했으나 취사장 위치가 잘못 되었다며(상단의 만산동계곡 사진을 참고로) “숙영지와 분리하여 계곡 건너에 취사장을 설치하면 만약 집중 호우 발생시에 계곡물이 불어나 식사추진 및 철수시 위험할 수 있으니 조정하라”는 것이었다. 각 텐트는 능선쪽으로 올려 있어 안전하지만 취사를 위해 급수가 용이한 물이 흐르는 계곡 건너에 설치된 취사장의 안전 취약점을 지적하며 추가로 사단에서 만산동으로 이동하는 도로가 부실하니 도로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는 지시를 하고는 어깨를 두드리며 현장을 떠났다. 작전참모는 그해 가을에 대령으로 진급하여 사단의 참모장을 거친 뒤 훗날 인접 연대장으로 취임했다. 필자보다 선배로서 지내온 많은 군생활 경험이 정확한 취약점을 찾아냈다. 노마지지(老馬之智)라는 사자성어처럼 선배는 역시 선배였다. 필자는 유선으로 대대장에게 작전참모의 방문과 지적 및 추가 지시사항을 보고했고 대대장은 즉시 시정 후 훈련에 임하라고 강조했다. 오후가 되자 소대별로 복귀를 했다. 역시 결과 위주의 훈련을 강조한 탓에 수개의 은거 가능한 천연동굴을 찾아냈고, 많은 불온전단들을 수거하는 성과도 올렸다. 저녁 식사 준비시간인 자유시간에는 아직 유단증을 못 받은 중대원들을 모아 태권도 교육도 병행했다. 주둔지가 아닌 야외라는 것이 오히려 저조자들에게 개별지도를 할 수 있게 되어 차후 심사를 대비한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날이 저물자 야간 분·소대 전술훈련도 했다. 다음날부터는 작전참모 지시대로 사단본부까지 도로 보수도 병행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타중대와 함께 대대장의 통제를 받는 것을 벗어나 중대 단독으로 훈련을 하는 것이 상급 및 인접 부대의 눈치를 안보게 되어 더 효과적인 훈련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훈련 마지막 날 밤이 되었다. 점호 후 전 중대원이 텐트로 들어가 취침을 하고 약간의 시간이 지났는데 당직 소대장이 보고할 것이 있다고 해서 상황실 텐트로 나갔다. 소대장들이 모여 있었다. 책상에는 약간의 더덕이 놓여 있었고 잠시 후 행보관이 막걸리를 가지고 들어왔다. 잠시 망설였으나 모처럼의 자리라 합석을 하였다. 소대별 수색활동시 전단과 함께 수거한 자연산 더덕 안주에 들이키는 막걸리가 너무도 좋았다. 더불어 그동안 함께 근무하면서 느꼈던 보람과 애로점들을 서로 나누며 한마음으로 단결될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칼럼을 쓰는 지금, 중대장시절 그때 고락을 함께했던 소대장 김태정, 우광호, 변상훈, 이동호들의 의기에 찼던 그때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마음은 언제나 태양..!”구호 아래 한마음이 되어 항상 신나고 즐겁게 정열을 불태웠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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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 (57)] ‘무소불비 무소불과(無所不備 無所不寡)’와 ‘피실격허(避實擊虛)’는 전쟁에서의 선택과 집중을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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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전문가들의 국회진출 늘어나야 '국민 안전'위한 입법 능력 강화돼
- [시큐리티팩트=강철군기자] 4.15총선 결과 더불어민주당·시민당이 180석, 미래통합당·한국당이 103석을 차지해 보수의 완패로 끝났다. 또한 정치 9단으로 불리우던 다선의 중진인 박지원, 천정배, 정동영, 박주선, 손학규 의원 등이 모두 충격적인 낙선을 했다. 현재 최다선은 6선인 민주당 박병석 의원이다. 전반적으로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이번에 당선된 21대 국회의원 300명을 직업별로 분석하니 현직 의원이 122명이고 전직의원이 27명으로 전·현직 국회의원들이 거의 50%이고 그밖에 의원 보좌관 출신 등 정치인이 78명이다. 평생 정치를 직업삼아 해 먹던 사람들이 계속 독식하여 다른 직업인이 정치에 진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폐쇄적인 구조로 다양한 직업군을 대표하지 못하고 있다. ■ 문턱을 쉽게 넘지 못했던 여성과 탈북민 등이 의미있는 약진 이번 총선에서 배출한 최다선은 6선인 민주당 박병석 의원이다. 5선인 의원은 최 연장자인 김진표(‘47년생)를 비롯한 변재일(‘48년생), 이낙연(‘52년생), 이상민, 조정식, 송영길, 설훈, 안민석 등 더불어민주당이 8명, 서병수, 정진석, 조정태, 주호영 등 미래통합당이 4명, 무소속이 홍준표 1명이다. 또한 그간 국회 진출 문턱을 쉽게 넘지 못했던 여성과 탈북민들이 당선됐다. 정의당 비례대표 1번으로, 헌정사상 최연소 국회의원인 28살 류호정 당선인도 게임업계는 물론 젊은 청년과 여성들의 노동환경 변화를 이끌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비례대표와 지역구를 포함하면 여성 국회의원은 57명으로 전체의원 5명 중 1명 꼴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탈북민 가운데선 태구민 미래통합당 후보가 강남갑 지역구에서 처음으로 금배지를 달았다. 그는 "세계와 북한에 우리 대한민국의 포용력과 민주주의를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고 소감을 말했다. 이와 함께 북한 인권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며 미 국회의사당에서 목발을 들어 올렸던 탈북민 지성호 미래한국당 비례대표 후보도 당선되면서 사상 첫 복수 탈북민 의원시대를 열었다. ‘21대 국회의원 직업현황을 살펴보면, 정치인 다음으로 가장 많은 직업군이 변호사, 판사, 검사 등 법률을 다루는 법조인이다. 이번에 초선은 20명이지만 전·현직 의원들까지 포함하면 법조계가 30%나 차지하는 기형적인 대표성은 우리사회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하고 대변하기에는 한계성이 크다. 그 다음 직업군은 교육자, 기업인, 경찰, 군인 순이며 이번 코로나19 사태의 영향으로 간호사, 약사, 의사 등 의료인이 약간 증가세를 보이는 직업군으로 나타났다. ■ 군(軍)출신 인사의 입법부 진출에 대한 고정관념 탈피해야/군의 정치적 중립과 다른 각도에서 접근 필요 국가안보의 첨단인 군(軍)에서 반평생을 지난 예비역 군인들이 ‘제 2의 인생’에서 국민의 선량되기 위해 출사표를 던졌으나 당선증을 거머 쥔 사람은 소수이다. ‘軍출신 국회의원 현황’을 살펴보면, 18대에 8명, 19대에 11명, 20대에 5명 그리고 이번 21대에는 6명이 여의도에 입성했다. 이를 보수와 진보로 구분하면 23대 7의 비율이다. 국가의 입법을 담당하며 국민의 대표로 행정 및 사법 기관 등을 감사해야 할 국회에 안보전문가는 반드시 필요하다. 헌데 안보 일선에서 평생을 봉사했던 군출신들이 이번 21대 국회에도 300분의 6명으로 2%이다. 너무도 적은 수가 국회에 들어가는 것이 현실이다. 공무원들은 세가지 부류로 나뉜다 청와대를 예로 들 때 그 첫째가 ‘늘공’ 이다. 각 행정부서에서 늘 열심히 근무하다가 발탁되어 청와대에 입성한 공무원으로 다시 복귀할 때에는 통상 승진하거나 승진할 자리로 보직을 받게 된다. 둘째가 ‘어공’ 이다. 어쩌다 공무원이 된 청와대 비서관, 행정관들로 주로 정권 인수위원회에서 활동을 하거나 언론인 출신들이 청와대에 자리 잡은 사람이다. 이들은 주로 차관, 장관으로 발탁되거나 이번 총선에서처럼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는 경우가 많다. 셋째가 ‘아공’ 이다. “아직도 공무원이야?” 라는 뜻으로 정권 말기까지 청와대에 남아있는 주로 대통령과 운명을 함께하는 순장조 비서관, 행정관들을 칭하는 말이다. 군출신 국회의원들은 ‘어공’에 가깝다. 이번 4.15 총선 전남 해남·완도·진도 선거구에서 민주당 윤재갑 예비역 제독은 3번째 도전만에 압승했고, 포천·가평 선거구의 통합당 최춘식 예비역 대위는 예비군 중대장시절부터 40년 동안 터를 닦아 당선됐다. 국회의 국방 및 안보전문가로 입법 및 감사를 통해 국민을 대표할 수 있도록 군출신들에게 더 많은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하지만 군에서는 현역 신분으로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며 정치나 경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터부시 해왔다. 이제는 군도 학교기관 및 군생활 속에서 인재들을 발굴해 정치적 중립을 지키면서 개인적인 정치의 꿈을 꺽지 말고 키워줄 필요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점이다. 지난해 국회에서 통과시킨 2020년 정부예산이 512조2504억원이고 그중 10%인 50조1527억원이 국방비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전문지식과 실제 경험이 축적된 더많은 국방 및 안보전문가들이 국회에서 활동해야 한다. 3권분립의 민주사회에서 안보문제에 대한 전문성을 가진 의원들이 늘어나야 제대로 국가안보정책을 책임지고 수행함으로써 국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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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전문가들의 국회진출 늘어나야 '국민 안전'위한 입법 능력 강화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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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cis M] 김정은 군사행동 보류, 문 대통령은 단호한 대응과 상생의 남북한 '대리전'
-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지난 6월16일, 개성에 있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폭파됐다. 이를 지시한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은 탈북단체인 자유북한운동연합 박상학 대표가 주도한 대북전단을 남한정부가 막지 못했다며 강한 어조로 비난하면서 남북 군사분야 합의서 등 공동선언도 백지화 되었다고 연일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이에 맞선 것은 전군 구국동지 연합회이다. 이 단체 주관으로 열린 ‘6.25남침 70주년 자유대한수호 결의대회’는 “김일성 종북주의를 척결하고 자랑스러운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자!”라고 맞받아쳤다. 김여정과 남한의 군인단체가 남북에서 각각 악역을 담당하며 치열한 대리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다. 남북한의 최고 지도자인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있다. 오히려 향후 대화재개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치열한 대리전에 담긴 '숨은 밑그림'이다. ■ 김정은 위원장은 군사행동 보류, 문 대통령은 단호한 대응과 상생의 메시지 강조 북한군 총참모부는 지난 17일 대변인 발표를 통해 금강산·개성공업지구 군대 전개 등 군사행동계획을 밝혔으나,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23일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7기 5차 회의 예비회의를 주재, 이 계획들을 보류했다. 이에 통일부 당국자는 "북한이 결정적인 단계에서 군사 조치를 보류한 것, 그 행위 자체는 긍정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며 "향후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서로 대화를 통해 상호 관심사들이 협의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면서 북한의 최근 입장 변화는 "긍정적인 신호의 출발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25일 저녁 서울공항에서 열린 미국에서 보내온 ‘국군 전사자 유해 147구의 봉환식’과 함께 열린 ‘6·25전쟁 70주년 행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기념사를 통해 "우리는 두 번 다시 단 한 뼘의 영토, 영해, 영공도 침탈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며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그러나 누구라도 우리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위협한다면 단호히 대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우리는 전방위적으로 어떤 도발도 용납하지 않을 강한 국방력을 보유하고 있다"며 "굳건한 한미동맹 위에서 전시작전통제권의 전환도 빈틈없이 준비하고 있다"고 덧붙여 한반도에서 두 번 다시 전쟁이 발발하지 않도록 확고한 태세를 갖추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으로도 해석된다. 이어 문 대통령은 "우리는 전쟁을 반대한다. 이 땅에 두 번 다시 전쟁은 없어야 한다"며 "남북 간 체제 경쟁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우리의 체제를 북한에 강요할 생각도 없다"고 밝혔다. 또한 문 대통령은 통일에 앞서 평화가 선행돼야 한다는 점을 재확인하며 "우리는 끊임없이 평화를 통해 남북 상생의 길을 찾아낼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문 대통령은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는 반드시 이뤄야 할 책무이다. 8천만 겨레 모두의 숙원이다. 따라서 세계사에서 가장 슬픈 전쟁을 끝내기 위한 노력에 북한도 담대하게 나서주길 바란다"며 북한의 태도 변화도 촉구했다. ■ 하형규 회장,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수호에 함께 동참하자!” 지난 25일 오후 4시에 교대역 부근 검찰청 앞에서 전군 구국동지 연합회 주관으로 대한민국 수호 예비역 장성단, 대령연합회, 자유대연합 등의 단체에서 500여명이 참여하여 ‘6.25남침 70주년 자유대한수호 결의대회’가 개최됐다. 전군 구국동지연합회 및 육사 총구국동지회 하형규(예비역 대령, 육사30기)회장은 대회사에서 “70년이 지난 지금도 6‧25는 끝나지 않았으며 지금도 체제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김일성을 추종하는 소위 주사파 세력이 준동하여 현충일에 국군을 추모하기보다는 김일성과 함께 적화 통일을 획책했던 김원봉을 추모하는 기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 “백선엽 장군은 미군도 존경하는 전쟁 영웅임에도 불구하고 근래에 그분을 현충원에 안장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며 “지금 대한민국은, 70년 전 6‧25 당시처럼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왔다. ‘죽느냐, 사느냐’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목소리를 높히기도 했다. 하 회장은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우리 스스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지킬 수 없다면 공산주의 전체주의 독재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6‧25 남침을 맨주먹으로 말하는 막아낸 위대한 대한민국을 다시 건설하자! 우리 모두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데 다 함께 동참하자!”라며 대회사의 끝을 맺었다. 사실 1950년 6‧25 남침 이래 북괴의 도발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서해에서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남북공동 연락사무소 폭파 등에서 나타나듯이 북한은 틈만 나면 발톱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에 대한 공갈·협박으로 일관하고 있다. ■ 문 대통령, 확고한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대화의 고삐를 놓지 않아야 김여정 부부장과 구국동지연합회 하회장 및 박상학 대표 등이 악역을 담당하며 치열한 대리전을 치루는 가운데 우리는 한가지 역사적 진실을 상기해야 한다. 과거 일본 막부시대의 치열한 전투 중 오사카 성주였던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거짓 화친을 받아들여 성을 튼튼하게 지켜주던 방어물인 해자를 메우고 비겁한 평화를 보장받으려다 결국 함락되어 자결했다. 이와 관련해 북한이 가장 무서워했던 군인인 김관진 전 국방부장관은 지난 25일 군 사이버사령부의 정치 댓글 작성관련 항소심 법정에서 혐의 내용을 모두 부인하면서도 “국방 문제의 정점에 장관의 책임이 있다”며 부하들에게 책임을 미루지 않았다. 그는 “전쟁을 잊은 군대는 그 존재 가치가 없다. 평화는 강력한 힘에 의해 지켜진다. 훈련하고 또 훈련하여 적의 어떠한 도발 위협에도 당당하고 강력하게 대응하는 정예 강군이 되기를 기원한다”며 최후진술을 했다. 김관진 전 장관의 발언처럼 '정예 강군'은 한반도 분단상황에서 가장 절실한 평화유지수단이다. 이 같은 힘의 우위를 기반으로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의 대화 고삐를 놓지 않는 것이 한반도 문제를 풀어가는 밑그림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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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cis M] 김정은 군사행동 보류, 문 대통령은 단호한 대응과 상생의 남북한 '대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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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 (21)] 중공군의 허를 찌른 월프하운드(Wolfhound)작전과 썬더볼트(Thuderbolt)작전
- 유엔군은 12월4일 평양에서 줄행랑으로 전투력을 보존, 재반격 작전 발판 마련… [시큐리트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중공군의 1차공세(’50.10.26~11.8)와 2차공세(’50.11.25~12.24)에서 호된 희생을 치룬 유엔군과 국군은 결국 ‘50년 12월4일 평양에서 도망치듯 철수했다. ‘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반격을 개시한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북진에 나서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고, 뒤이어 압록강 유역의 초산까지 나아갔다. 하지만 김일성 정권의 지원 요청을 받은 중국 공산당 정부는 펑더화이를 총사령관으로 중국인민지원군을 창설해 10월19일 대규모 병력을 한반도로 파병했다. 중국군은 압록강을 건너 산줄기를 타고 은밀히 이동해 10월26일부터 본격적으로 국군과 유엔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1월24일 국군과 유엔군은 청천강을 건너 X-mas총공세에 나서 압록강을 향해 진격했으나 중국군의 반격을 받았다. 특히 11월26일 국군 제 2군단이 담당하던 대동강 상류의 덕천·영원 지역이 중국군에 돌파되면서 배후에서 협공을 당할 위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자 서부전선의 지휘를 담당한 미 제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모든 부대를 청천강 이남 지역으로 철수시켜 평안남도 숙천과 순천을 잇는 지역에 새롭게 방어선을 편성했다. 그러나 미 제 2사단이 군우리에서 중국군에 포위되어 큰 피해를 입는 등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국군의 공격이 계속되었다. 미 제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평양 방어를 고수하다가는 중국군에 포위되어 유엔군 주력이 섬멸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고, 평양 방어를 포기하고 38선 이남 지역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12월4일부터 본격적인 평양 철수가 시작되었다. 철수 과정에서 미 제 8군은 평양의 산업시설과 군수물자 등을 모두 파괴했으며, 부상병이나 포로 등은 진남포에서 선박으로 38선 이남 지역으로 옮겼다. 그리고 38선까지의 도로에 국군 제 2사단과 5사단을 배치해 경비를 맡게 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피난민들이 함께 남하했다. 동부전선을 담당한 미 제 10군단도 흥남에 집결해서 12월 15일부터 배를 타고 38선 이남 지역으로 철수했다. 이로써 중공군의 제2차공세가 끝난 12월24일경, 유엔군과 공산군은 다시 전쟁 이전과 마찬가지로 ‘임진강-춘천-양양’을 잇는 38선 지역에서 1방어선을 구축하여 대치하게 되었다. ■ 워커 미 8군 사령관 교통사고로 순직, 미 육군 참모차장 리지웨이 중장이 임명 다시 12월31일 중공군의 제3차 신정공세가 시작되었다. 특이한 것은 이번 공세부터 전력을 회복한 북한군 2사단과 5사단이 화천 방면에서 공격에 가담했다. 중공군은 언제나 약체로 평가받은 국군을 공격하여 돌파한 다음 우회기동, 포위해서 섬멸하는 작전을 구사했고 이번에도 최소 3배의 병력으로 한국군만 집요하게 공격했는데 그 방법은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서부 전선에서는 국군 1사단과 6사단이 순식간에 와해되었고 6사단 옆에 배치된 미 24사단도 곤경에 빠지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20만명 이상의 중공군들이 골짜기와 들판을 가득 메웠고, 이러한 강력한 인해전술 공세로 1월4일 겨우 되찾은 서울이 다시 내어주었다. 일부 공산군은 수원 일대까지 남하하기도 했다. 결국 유엔군은 2방어선인 수원-양평-주문진선에서도 밀려, 평택-제천-삼척에 이르는 선까지 철수하여 3방어선을 형성함으로 1월24일 중공군의 3차 공세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위의 ‘중공군 제 3차공세(’50.12.24~’51.1.8)상황도’처럼, 전력을 보충한 북한군 10사단은 단양을 돌파해 안동까지 위협을 가한 후 다시 태백산맥을 이용하여 북으로 도주하는 사례도 있었다. 북한군의 불법 남침으로 대한민국이 위태롭던 낙동강 전선에서 전세를 역전시켰던 미 워커 미 8군 사령관이 중공군 3차 공세가 시작되기 전인 12월23일 의정부 부근에서 교통사고로 순직하자 미 육군 참모차장 리지웨이 중장이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리지웨이 사령관은 제 2차 세계대전시 유럽 전선에서 독일군을 전율케했던 공수여단 및 사단장으로 앞가슴에 2개의 수류탄을 매단 채 한국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는 중공군의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기세를 멈추는 것 보다 아군의 전투력 보존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옅보고 있었다. 위의 ‘중공군 공세기간과 주요전투 현황’표 처럼, 중공군의 공격이 1~2주 계속된 후에는 더 이상의 지속적인 공격을 못하는 것은 신장된 보급선으로 미흡한 화력과 부족한 탄약과 식량 등 전투근무지원이 취약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찾아냈다. ■ ‘칸카르데쉬(피로 맺어진 형제)’인 터어키군, 군우리·금량장 전투에서 용맹성 과시 유엔군은 12월4일 평양에서 도망치듯 다음해인 1월24일, 평택-제천 -삼척의 3방어선까지 철수하여 전투력을 보존했고 재편성과 휴식 그리고 실전 같은 훈련을 하였다. 특히 중공군의 취약점을 분석하고 우세한 화력과 기동력, 제공 및 제해권 확보를 배경으로 협조된 기동전을 수행할 훈련까지 완료하였다. 이러한 줄행랑으로 전투력을 보존하고 전투훈련까지 한 결과, 제대로 싸울 준비가 다되었다고 판단한 리지웨이 중장은 취임한지 한달 째이며 중공군의 3차공세가 멈춘 다음날인 1월25일부터 유엔군의 재반격을 위한 위력수색 작전을 시작하였다. 먼저 월프하운드(Wolfhound)작전과 썬더볼트(Thuderbolt)작전으로 서측에서 미 1, 9군단의 25사단과 1기병사단을 주공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1월30일 반월-수원-금량장-이천선까지 전진하였는데 예상대로 적의 저항은 비교적 경미했다. 특히 미국,영국, 캐나다에 이어 4번째로 많은 1만5천명의 대규모 병력을 지원해 전사800여명, 부상 2,200여명의 큰 희생을 치룬 터어키군(한국인을 ‘칸카르데쉬:피로 맺어진 형제’라고 부른다)이 중공군 2차공세시 군우리 전투와 이번 금량장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용맹성을 과시했다. 결국 미 1,9군단은 2월10일 인천-김포일대와 남한산성-양평일대까지 진출했다. 또 라운드엎(Round Up)작전은 중앙지역에서 흥남철수의 알몬드장군이 지휘하는 미 10군단과 국군 3군단이 홍천을 양익포위하기 위해 2월5일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적이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악착 같은 지연전을 기도했고, 10일 항공정찰 결과 미 10군단 정면으로 대규모 중공군이 집결하는 것을 식별하고 진출을 중지하였다. 이후 중공군은 전력을 보충한 뒤 제 4차공세(’51.2.11~18)를 시작했으나, 유엔군은 지평리전투(“[김희철의 전쟁사](3) 유엔군의 '자유전사' 프랑스 몽클레어 장군과 미국 프리만, 크롬베즈 대령”참조)에서 효과적인 사주방어 및 기동전 등 성공적으로 저지·격퇴시켰다. 그리고 계속 공격하여 3월15일 서울을 재탈환하고 4월22일 재반격작전의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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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 (21)] 중공군의 허를 찌른 월프하운드(Wolfhound)작전과 썬더볼트(Thuderbolt)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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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 (56)] 정호용 육군참모총장 은 '창끝 전투력'의 지휘자인 분대장 정예화에 주력
- 전술토의, 지식/지휘능력을 배양 등 간부교육 강화로 창군이래 가장 높은 전투력 보유 [시큐리트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필자가 중대장 근무시 육군참모총장은 정호용 대장(육사11기)이었다. 정총장은 ‘전쟁시를 대비하여 창끝 전투력 강화’를 강조했다. 창끝 전투력의 핵심인 소대장과 분대장들의 전투의지가 상실되고 훈련이 안되어 있으면 아무리 좋은 장비와 많은 병력이 있더라도 그 부대는 일거에 와해된다. 좋은 사례가 있다. 6.25남침전쟁중인 ‘51년 4월 사창리 전투에서 6사단은 중공군의 포위전술에 겁을 먹고 창끝 부대 분대장, 소대장들의 전선 이탈이 확산되어 결국 치욕스런 패배를 맛보았다. 따라서 정총장은 창끝 전투력의 지휘자인 분대장을 정예화시키는데 주력했다. 신병교육대에서 똑똑하고 체력이 좋은 신병에게 꼬리표를 붙여 자대 배치했다. 그 신병을 받은 중대장은 면밀히 관찰하여 골목대장감이라고 판단되면 조기 진급을 시킨다. 그가 상병이 되면 사단 분대장교육대에 입소시켜 교육 후 하사 계급장을 달아 분대장으로 1년~6개월을 운용하는 제도이다. 지금은 지상군사령부가 용인에 창설되어 단일 지휘체제이나 당시에는 전방을 1,3군사령부가 동서로 나누어 지휘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험한 산악지역이 많은 동부의 1군 사령부는 신교리와 과학화 된 장비가 서부의 3군 보다는 다소 늦게 전파되는 실정이었다. 필자는 ‘분대장 정예화’지시를 완수하기 위해 골목대장 분대장 시스템을 먼저 운용하는 3군 예하인 인접 8사단으로 자료수집 및 견학을 갔다. 그쪽에서 중대장근무를 하는 동기생을 만나 자료를 수집해서 대대장에게 보고하고 운용할 준비를 했다. 역시 창조적 일을 할 때에는 벤치마킹 후 좀더 새로운 것을 가미해 발전시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8사단 시스템을 참고로 먼저 현재원 중에 후보로 가능한 병사들을 선발해 관리를 시작했고 간단한 운용판을 만들어 각 소대 현재 분대장들의 전역 시기를 고려해 사전에 후보들을 조기 진급시켜 분대장교육대로 보내는 현황을 한눈에 확인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총장이 강조한 시스템은 성공적이었다. 골목대장형 분대장들은 체력, 훈련, 지휘 능력에서 탁월했고 심지어 소대장 보다도 더 많이 알고 숙달되어 병사들 교육도 일부 소대장들 보다 더 잘했다. 따라서 골목대장형 분대장들은 각종 훈련, 검열 및 평가시에도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대대별로 간부교육이 강화되어 소대장과 참모들은 대대 교육상황실에 모여 전술토의 및 작전을 수행하는 지식과 지휘 능력을 배양했다. 필자가 판단하기에 이러한 시스템의 육군은 창군이래 가장 수준 높은 전투력을 보유한 시기였다. 하지만 역작용은 어디에나 있는 법, 기존의 고참 병사 보다도 먼저 진급하고 교육 후 하사로 복귀한 분대장들은 탁월했지만 군대의 고참 서열의 벽이 문제였다. 분대장 보다도 현재 자기 분대원인 병장이 군생활을 더 많이 했고 먼저 전역했기에 고참 병장의 견제가 분대 지휘의 걸림돌이 되어 항상 갈등이 야기되었다. 첨단 과학 시스템과 태고의 원시적 활동이 병행되어야 전장에서 승리 효과적 분대장관리와 태권도 유단자화로 전반기 교육훈련 우수중대표창 받아 각고의 노력 끝에 받은 태권도 유단증은 제대병에게 주는 중대장의 전역 선물 간부교육이 강화되고 골목대장형 분대장들이 정예화 되자 창끝 전투력은 강해졌고 각개병사들도 개인훈련 만 잘하면 군생활에 걱정이 없었다. 헌데 헛고생하는 교육훈련이 일부 발견되었다. 야간 전투를 위해 안면 위장을 하고 정숙보행 연습을 했으나 첨단 과학화된 야간 투시경과 열상 장비가 개발되어 운용하자 그대로 노출되어 그동안의 야간훈련이 무색하게 되었다. 하물며 중대장 당시에 생각도 못했던 드론이 개발되어 적지역의 정보를 쉽게 수집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겼다. 그래도 전투가 지속되어 악조건이 되면 가장 원시적인 상황을 접할 수 있기 때문에 기존의 훈련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최악의 육박전에 대비한 체력과 격투기술이 반드시 필요했다. 게다가 기존 훈련으로는 필자가 무엇인가가 부족하고 배가 고픈 느낌이 들었다. 중대원들이 군생활 동안 무언가 얻어 가야하는 데,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중대에 골목대장형 분대장 중에 학창시절 태권도 선수가 있었다. 그를 활용하여 전 중대원들에게 육박전에 대비한 체력과 격투기술도 숙달하고, 제대할 때 태권도 유단증을 선물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전중대원들은 시간만 있으면 태권도 연습을 강화하도록 강요했다. 심지어 비유단자는 훈련 및 작업간 휴식 시간도 쉬지 못하고 발차기 품세 연습을 하도록 독려했다. 개인적 결함이 있는 병사들은 해당 분대장이 개인 지도를 했고 분대장 선발시에도 유단자를 우선했다. 태양분대 선발로 분대원 전원이 유단자가 될 때에는 포상휴가 등 혜택의 우선권을 부여했다. 결국 중대는 연대에서 가장 유단자가 많은 중대로 선정되어 전반기 태권도 우수중대 표창을 받았다. 또한 분대장 관리도 우수로 평가를 받아 전반기 교육훈련 우수표창까지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보람 있었던 것은 제대병들이 그렇게 귀찮아 했던 태권도 훈련이었지만 제대 신고할 때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태권도 유단증’이었고 그것은 그동안 필자의 피로를 날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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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 (56)] 정호용 육군참모총장 은 '창끝 전투력'의 지휘자인 분대장 정예화에 주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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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55) 유격훈련간 찾아온 죽음의 불청객과 신부된 정훈장교…
- 간부들의 일년 365일 중 퇴근 날은 약 150일, 힘들고 어려운 근무 여건…심신의 한계를 극복하여 자신감을 배양하는 유격훈련의 의미…잔인한 4월에 찾아온 죽음의 불청객은 결국 심장마비 훈련병을 데리고 떠남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GOP연대였지만 필자가 소속된 예비대대는 후방의 훼바(FEBA)부대와 동일하게 교육훈련 및 근무 일정이 진행된다. 대략 분기별로 3~4주 종합훈련, 독단훈련, 반기별로 4주 진지공사, 연중 통상 1회 정도인 중대 및 대대전술시험, 공지합동훈련, 연대전투단훈련, 전투지휘검열, 유격 및 특공훈련 등의 야외 활동과 당직근무를 포함하면 중대장급 이하의 초급장교가 일년 365일 중 퇴근할 수 있는 날은 약 150일도 안된다. 이런 일상은 간부들이 퇴근도 못하는GOP투입 부대와 별반 차이 없는 마찬가지로 부대원들과 24시간 생활하여 사명감 넘치는 초급장교들의 힘들고 어려운 근무 여건이다. 부대교대 후 꽃피는 4월이되자 어김없이 중대는 첫 3주 종합전술훈련을 하게 됐다. 개인훈련은 평소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분대전투부터 시작했다. 분대장들의 지휘 능력과 분대원들의 전투기술을 숙달한 뒤 다시 소대와 중대전술훈련으로 종합전술훈련을 마무리하고, 마지막 주에는 5개월전에 중대장 근무를 시작했던 대성산 대대에 있는 유격장으로 이동했다. 통상 전투 및 전술훈련시 중화기 중대는 소대별로 각 소총중대를 직접 지원한다. 그 개념으로 유격조도 12중대의 1개 소대가 필자의 중대에 배속되어 편성됐다. 1일차는 체력단련훈련으로 PT체조는 15개 동작(높이뛰기-굽혀닿기-쪼그려 뻐치기 -엉덩이 올리기-구부리기-발 벌려 뛰기-옆구리운동-온몸 비틀기-뒤로 젖히기-쪼그려 돌기-팔 들어 다리닿기-몸통 비틀기-쪼그려 뛰기-팔동작 몸통 받쳐 -노젖기)으로 이루어져 반복하여 숙달하며 피튀기는 단련을 했다. 2일차부터는 가장 먼저 첫날 숙달한 PT훈련으로 뭉친 근육과 몸을 푼 후, 기초-복합-산악 장애물코스순으로 각 중대별로 조편성하어 훈련에 임했다. 그런데 4일차 되던 날 산악 장애물코스 중 ‘수직드롭코스’가 있었다. 인간이 공포심을 가장 느끼게 한다는 약 10m 높이를 사다리 타고 올라가 위의 좌상단의 사진처럼 폭이 약 4m에 깊이 3m의 물웅덩이로 뛰어내려 대담성과 자신감을 키우는 훈련이었다. 훈련전에 웅덩이의 물을 만져보니 4월의 봄 날씨 이었지만 대성산 북향의 물을 받은 탓으로 몹시 차가웠다. 마침 현장에 연대에서 감독관도 나와 있었고 필자는 고민을 하다가 차갑다는 이유로 코스를 생략하면 심신의 한계를 극복하여 자신감을 배양하는 유격훈련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여 좀더 강한 PT로 체온을 올린 후 입수하기로 판단했다. 그래도 왠지 걱정이 됐다. 그때 ‘수직드롭코스’코스를 담당한 선임하사관이 몸소 시범을 보이며 뛰어 내려 입수했고 이어서 소대장도 뒤이어 뛰어 내렸다. 그래도 중대원들의 긴장하는 눈초리가 남아있어 필자도 사다리로 올라가 뛰어내리며 시범을 보였는데 역시 수온이 몹시 차가웠다. 중대장까지 시범을 보이자 중대원들은 한 명씩 훈련에 임했다. 훈련이 끝나고 대기하던 중대원들은 물 속에서 허부적대는 일부 요원들을 바라보면서 깔깔대고 웃기까지도 했었다. 필자 중대원들의 훈련이 모두 끝나고 배속된 12중대 지원소대의 차례가 되었다. 마지막 몇 명만 남아있어 그 코스훈련이 끝나가는 무렵 지원소대의 지공열 상병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하강 준비를 끝내고 교관의 ‘뛰어’ 구령소리에 멈짓 하다가 물로 뛰어내렸다. 지상병은 입수 후 바로 물위로 올라왔다. 그런데 물 밖으로 나와야 하는 데 그는 다시 물 밑으로 들어갔다. 순간 선임하사 교관이 바로 물로 뛰어 들었으나 못 찾고 나오자 옆의 병사들이 그를 구하러 뛰어들었다. 필자는 폭이 약 4m에 깊이 3m의 물웅덩이지만 마구잡이로 뛰어들어서는 모두 위험하겠다는 생각에 모두 나오라고 하고 수영 잘하는 요원들을 4방면에서 입수하게 했고 곧 그를 건져 내왔다. 옆에서 대기하던 군의관은 바로 심폐소생술을 했다. 군의관은 구토물이 있는 지상병의 입가를 손으로 쓰윽 문질러 딱아내고 바로 입을 맞추어 인공호흡하고 이어 흉부 압박을 번갈아 반복해서 약 40분 정도 했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흘러 내렸다. 하지만 잔인한 4월에 불쑥 찾아온 죽음의 불청객은 결국 심장마비를 일으킨 지공열 상병을 데리고 떠났다. 전출을 앞두고 옆에서 함께했던 대대 정훈장교 김종오 중위도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워 했다. 순직자의 직속 상관인 12중대장 박성규 대위는 故 지공열 상병의 장례를 치루는 과정에서 부모들에게 엄청 시달렸다고 했다. 비록 필자 중대의 소속은 아니지만 필자의 눈앞에서 훈련중에 운명을 달리한 故 지공열 상병에 대한 트라우마는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평소에 군인답지 않게 소극적이고 무관심하게만 여겼던 군의관의 순간적인 응급조치를 보면서 프로는 프로이구나 하는 감탄과 함께 최선을 다한 그의 노력에 감사했다. 하지만 의욕에 찼던 중대종합훈련은 그렇게 막을 내리며 엉망이 되었다. 연대의 감독관이 그 상황을 처음부터 지켜본 덕택에 상급부대에서는 먼저 시범을 보이는 등의 조치를 한 필자를 그 사고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으로 경고조치 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였다. 뚜렷한 사명감과 성직자 삶의 각오로 힘들고 어려운 초급장교 생활을 견디어 옆에서 축복과 기원 해주는 분들 때문에 공직에서 찾아오는 불청객들을 이겨내… 어느덧 20여년이 지난 어느 날 명동 성당에서 의아하게도 신부님 복장을 하고 있는 김종오 정훈장교를 너무도 반갑게 우연히 만났다. 그는 정훈 장교로 의무 복무를 마치고 신학교로 들어가 교육과 수련을 받고 신부가 되어 예수성심전교수도회 소속으로 해외 봉사 사목을 하다가 귀국해서 성모 병원 등에서 병원 사목을 하고 있었다. 그를 보자 다시 중대장 시절이 떠올랐다. 그는 엄하기도 했지만 병사들을 지극히 사랑하며 아꼈다. 그 당시 국회의원 부재자 투표시에도 못 마땅한 표정으로 관망했고, 그때 유격장에 불쑥 찾아온 죽음의 불청객 사건시에도 옆에서 안타까워하며 어쩔 줄 몰라 했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지금은 남태평양 오지(奧地)인 피지에서 피부색이 다른 착한 이들을 위해 사목 및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인생에는 많은 불청객들이 불쑥 불쑥 찾아온다. 필자가 37년의 군생활과 이후 3년간 준 공직생활을 하면서도 배신, 직무수행에 대한 오해, 교통사고 등 뜻하지 않은 불청객을 만나도 이렇게 살아 남은 이유는 필자의 옆에서 축복과 기원을 해주는 좋은 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종오 신부는 뚜렷한 사명감과 성직자로서 살겠다는 각오로 힘들고 어려운 초급장교 생활을 견디어 냈다. 그리고 이후 그의 생각을 실천하여 지금은 보람차게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 덕분에 필자도 故 지공열 순직자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동안의 공직 생활에서도 불쑥 찾아오는 어떤 불청객들과 싸워 이길 수 있었다. 김종오 신부와 지금도 보이지는 않지만 따뜻한 배려와 관심을 보내주시는 분들 덕택에 지금의 내가 있어 단지 그들께 감사할 뿐이다. 또한 훈련 중 아깝게 순직한 故 지공열 상병의 영전에 다시 한번 더 명복을 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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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55) 유격훈련간 찾아온 죽음의 불청객과 신부된 정훈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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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54) 회자정리(會者定離)와 굼벵이의 '구르는 재주' 발견
- ‘생자필멸(生者必滅),거자필반(去者必返),회자정리(會者定離)’는 세상사의 진리 사단 구원투수로 칭찬받았지만 전출간 친구의 빈자리는 허전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부재자 투표가 끝나고 정상적인 부대운용으로 돌아오자 사단에서는 GOP교대 준비 지시가 하달되었고 연대는 GOP투입전 교육을 시작했다. 필자가 속한 대대는 예비로 지원임무가 하달되었고, 신원조회가 통과된 일부 간부 및 병사들은 GOP투입부대의 인원보충을 위해 전출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인접 10중대장으로 근무하던 동기 고(故) 한황진 대위([김희철의 직업군인 이야기](35) ‘호국보훈의 길에도 통하는 미스트롯을 키운 힘’ 참조)는 GOP투입 대대로 떠났다. 생자필멸(生者必滅, 산 사람은 반드시 죽고), 거자필반(去者必返, 떠나간 사람은 반드시 돌아오며), 회자정리(會者定離, 만나면 헤어지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정한 이치이다)라는 명언처럼 “모든 것이 무상함을 뜻한다”는 법화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부재자 투표로 늦어진 GOP투입준비 때문에 공식적인 환송회식도 못하고 그를 아쉽게 떠나 보내야 했다. 승리부대 전입동기로 2년전 GP장 시절부터 정도 많이 들었는데…, 적과 대치하는 GOP중대에서 건강하게 근무 잘하고 기회가 되면 침투하는 간첩을 잡아 영웅이 되길 진심으로 기원했다. 그가 떠난 지 일주일이 되자 다른 대대는 GOP투입 준비에 바쁘게 보내고 있었지만 필자가 속한 대대도 전투준비 및 부대관리에 대한 사단 감찰검열이 있어 정신이 없었다. 다행이도 새롭게 보강된 대대작전장교 지동수 소령(전 사단교육장교)이 치밀하고 깐깐하게 준비했고, 대대장의 명확한 지도가 있어 수감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감찰참모가 검열결과 강평시 구원투수로 부임해 나름의 역할을 한 작전장교와 보직 해임된 중대에서 몸부림을 쳤던 필자를 칭찬해주어서 보람을 느꼈으나, 왠지 GOP투입부대로 전출 가버린 인접 중대장 동기생의 빈자리가 너무도 허전했다. ‘상호 현상태보존' 원칙을 안지킨 막사는 폐허 수준 문제병사 전입 많아 180명으로 늘어난 중대원 관리에 난감 드디어 GOP부대 교대가 이루어졌다. 중대는 대성산 전방에 위치해 유격장을 담당했던 부대에서 예비임무인 적근산 후사면의 좁고 깊은 골짜기 지역으로 이동했다. 부대교대는 많은 에피소드를 낳는다. 상급 부대에서는 부대교대 원칙인 ‘상호 현상태 보존 후 인원만 이동’을 강조했다. 이것은 노후 된 막사 생활을 위해 시설을 보강하고 소소하게 설치했던 편의시설과 부착물들을 그대로 남겨놓아 불필요한 예산 낭비를 방지하자는 지침이었다. 그러나 교대전에 지휘관들은 사전 협조회의에서 이 원칙을 준수하기로 상호 약속하지만 부대원들은 새롭게 이전한 부대에서 편리하게 사용하기 위해 모두 떼어갔다. 따라서 상호교대 후에 지휘관들은 교대전 좋은 관계에서 교대후에는 서로 불편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당시에도 부대 이동후 인수한 막사에 들어서니 거의 폐허 수준이었다. 이른 봄의 문턱에서 기온은 약간 올라 낮 양지녁에는 따사하지만 밤이 되면 전방 골짜기의 삭풍은 막사안에서도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중대원들은 1~2년 뒤에 또 이동할 막사이지만 내 집으로 생각하고 정리를 시작했다. 마치 신축 건물에 입주한 것처럼 모든 것을 새롭게 보강해야 했다. 전방의 봄은 오히려 겨울보다 더 춥다. 그래서 창문에 바람 막는 문풍지도 붙이고 당시 유일한 보온 수단이었던 페치카도 보수하는 등 분주하게 편의시설을 보강했다. 그러던 중 부대원이 하나 둘 씩 늘어났는데, 그 이유는 GOP투입은 하였지만 추후 신원조회가 불분명하거나 사고뭉치로 판단된 병사들이 GOP에 적응을 못하고 예비인 필자의 중대로 전입오기 때문이었다. 지난 사단의 감찰검열 이후 연대에서는 부적격이나 GOP근무에 회의를 품은 병사들까지 타 중대도 있는데 모두 필자의 중대로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소대장과 선임하사관들은 전입 면담부터 이러한 문제사병 관리에 짜증을 내고 있었고, 연대에서 중대장인 필자를 믿고 맡기는 것도 좋지만 이런 전입자를 포함한 중대원이 180명까지 늘어나자 시설도 부족하고 신상 등의 부대관리에도 부담감이 늘어나 난감할 지경이었다. 폭우로 전방 GOP철책 150m가 전도되어 경계에 취약점 발생 GOP근무 '부적격 병사'가 맹활약해 공사기간 단축에 기여 부적격 병사는 '구르는 재주' 가진 굼벵이 어느덧 여름이 되어 폭우가 일주일 동안 쏟아지자 점입가경(漸入佳境)으로 더 중차대한 임무가 부여되었다. 퇴근 후 관사에서 모처럼의 휴일을 즐기던 일요일 밤에 군용 전화벨이 힘차게 울렸다. 중대 막사는 관사에서 약 3분 거리로 인접해 있어 전화가 뜸했는데 그것도 밤에 걸려온 전화라 급박한 위급상황이 발생했는지 걱정이 되었다. “나 연대장인데, 9중대장 지금 쉬고 있지?”하며 연대장이 대대장도 아닌 중대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그동안의 폭우로 전방 GOP철책이 대규모로 전도되어 다음날 아침에 중대원들을 인솔하여 GOP 철책복구를 위해 투입하라는 지시였다. 필자는 연대장 통화가 끝나고 바로 대대장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대대장도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소대장들을 비상소집 시키고 중대로 들어갔다. GOP 철책 공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원이었다. 중대원의 3분의 1이 새로이 전입 온 GOP 근무 부적격자로 실제 투입가능한 인원을 선발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특히 보안부대 담당관은 부적격자들을 모두 제외한 인원들만 투입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어쩔 수 없이 투입지역에서 근무하다 전입 온 병사와 면담을 했다. 보안부대 담당관의 이야기처럼 그가 변심해서 월북이라도 하면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하지만 이 병사를 제외하고 투입할 때에는 그는 중대원들에게 왕따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다행히도 그 병사는 자신을 꼭 데리고 가달라고 건의했다. 그 지형도 잘 알고 있으며 동기들도 많이 있어 이번 공사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간청했다. 소대장들도 그 병사가 중대 전입 후 생활을 잘했다며 포함시키는 것에 동의했다. 결국 “중대장이 직접 관리하면서 불미스런 일이 발생하면 내가 책임지겠다”라고 보안부대 담당관을 강력히 설득하여 투입인원에 포함시켰다. 밤새 공사도구를 점검하여 부족분은 연대에 건의하고 GOP 지역에서는 3인조 행동을 하는 원칙준수를 위해 조편성도 마쳤다. 잠시 눈을 붙인 후 아침에 연대에서 지원 나온 트럭을 타고 출발했다. 공사지역에 도착에서 숙영준비부터 했다. 마침 그 지역은 필자가 DMZ 에서GP 장으로 근무했던 곳으로 작전시 늘 다니던 익숙한 지형이었다. 그곳은 위의 좌측 사진 같이 경사진 곳으로 GOP 철책 150미터 정도가 폭우에 쓸려 내려가 흔적도 없었고, GOP중대에서 경계병을 촘촘히 배치해 놓은 상태였다. 숙영지 편성 중에 공사용 철책들이 도착했다. 현장지도 나온 연대장은 “최대한 빨리 철책을 설치하는데, 2주내에 완료하라”고 강조했다. 아마도 전도된 GOP철책 지역으로 간첩이 침투하거나 변심한 인원들이 월북하기에 용이하다는 취약점이 있기 때문에 불안했던 것 같다. 중대원을 2개 팀으로 편성해서 양쪽에서 동시에 시작하기로 했고 철책설치조, 시멘트비빔조, 운반조, 기타 지원조로 편성했다. 물론 GOP중대의 경계병 외에 일단 유사시를 대비하여 실탄을 휴대한 상태로 자체 경계조도 배치했다. 쏜 화살처럼 일주일이 금방 지나가고 있었다. 소대장은 공사기간 단축을 위해 야간 작업을 건의했다. 보안부대 담당관이 "야간 작업은 병력관리에 특히 위험하다"고 의견을 제시했지만 주간작업만 하는 것은 연대장의 조기 공사완료 지침을 해소하기에는 안일한 조치 같아 야간 작업을 감행했다. 곳곳에 횃불을 만들어 대낮같이 밝힌 상태에서 중대원들은 참으로 열심히 임무를 수행했고 필자는 중대원들이 자랑스러웠다. 특히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는 속담처럼 GOP근무 부적격자로 낙인찍혀 중대에 전입왔던 그 병사가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자신이 근무했던 GOP 소대에서 근무용 간식인 라면과 빵 그리고 추가로 필요한 도구 등을 확보해 중대원들에게 나눠주며 그 누구보다도 동분서주 바쁘게 뛰어다녀 중대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처음에 연대장이 2주로 공사 기간을 한정했던 것 보다 4일을 단축시킨 10일 만에 완료되었다. “남아(男兒)는 자신을 믿고 인정해주는 사람을 위해 충성을 다한다”는 말처럼 굼벵이(?)까지 포함된 중대원들이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정확히 129m, 43칸의 철책설치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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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54) 회자정리(會者定離)와 굼벵이의 '구르는 재주'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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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20) 인본주의와 인류애의 표상이 된 흥남철수와 ‘메러디스 빅토리’호(하)
- ▲ 좌측 흥남항에서 피난민 1만4,005명을 승선시켜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록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갑판을 가득 메운 북한주민들과 당시의 ‘레너드 라루’선장 모습, 우측 1954년 카톨릭 수도자가 되어 바오로 수도원에서 평생을 헌신한 ‘마리너스 라루’수사 [자료제공=생명의 항해] 군인 10만과 피란민 10만을 구한 성공적인 ‘흥남철수작전’은 X-mas 선물 라루 선장의 상선 ‘메러디스빅토리’호 14,004명을 태워 기네스북에 등재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부두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400여톤의 다이너마이트와 227톤의 폭탄, 200드럼의 휘발유를 미해군 수중폭파팀과 공병이 폭파 폐기시키고, 마운트 맥켄리호에 승선해 지휘를 하던 10군단장 알몬드 및 도일 소장도 24일 16시32분에 흥남항을 출발함으로써 유엔군 10만여명과 35만톤 군수물자 철수시킨 ‘흥남철수작전’은 성공리에 완료되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흥남항에 남아있던 군인들과 9만 8천여명의 피란민을 실어 부산 및 거제도 장승포로 철수시켰던 197척의 선박 중 하나는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 였다. 이 선박은 선적했던 무기를 모두 내리고 피란민 1만4천여명을 승선시켰고, ‘생명의 항해’ 저자인 안재철 ‘월드피스자유연합’ 이사장의 노력으로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 기네스북에 2004년 9월에 등재되었다. 미쳤어! 도저히 불가능한 14,000여명을 태워 미친 서커스 어릿광대 놀이 나흘간의 항해도중 태어난 5명 아이의 이름은 ‘김치1~김치5’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37살된 ‘레너드 라루’선장이 지휘하는 비무장 상선으로 미해군 용선계약에 따라 미국 해운 회사 ‘무어 맥코맥 선사’소속으로 90상륙지원단에 배속되어 인천상륙작전도 참전했다. 1950년 8월16일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항 14일간 태평양을 항해한 뒤 요코하마 항에서 미 7사단 32연대 소속 병력(절반 정도가 새로이 모병된 한국인 카투사로 구성)들과 탱크와 탄약을 실었다. 이 선박은 인천상륙작전중인 9월 17일 22척의 호위선 중에서 인천에 가장 먼저 들어간 상선이다. 이는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원들이 대부분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바 있는 역전의 해군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인천상륙작전 지원임무를 마치고 일본으로 복귀하는 도중에 백기를 달고 있는 나룻배 한 척을 나포했다. 그 배에는 강제 징집된 것으로 보이는 14명의 북한군인이 타고 있었고 자신들을 감시하던 중공군들을 구금한 후 공해상으로 도망치는 길이라고 했다. 아마도 그들은 인천상륙작전 개시 이래 최초의 포로들이었을 것이다. 그들 중 한명이 머리와 팔이 칼에 베인 상처가 있어 러니 사무장은 응급치료제로 정성껏 치료해주었고, 그들을 요코하마 항에서 미 해군에 인계하였다. 그후 일본과 한국의 항구 사이를 수차례에 걸쳐 왕복 운항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장진호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유엔군 사령부로부터 50갤런 드럼통에 담긴 항공유 1만톤을 흥남 연포비행장에 주둔해 있는 미 해병 1항공대의 전투비행단에 수송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배는 12월 11일 흥남항에 도착했는데 중공군의 총공세로 17일 연포비행장을 폐쇄할 예정이어서 다시 부산으로 이동해 하역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받았다. 부산에서 항공유를 내리던 중인 12월 19일, 아직 하역하지 못한 항공유 300톤이 배에 남아 있지만 철수작전을 돕도록 즉시 흥남항으로 되돌아 오라는 긴급 호출을 받았다. 이 날 다시 출발하여 20일 19시경에 기뢰가 부설된 해역을 뚫고 흥남 외항에 도착하였다. 그 때는 이미 미 해병 1사단과 한국군 1군단 병사들은 철수하였고 미 7사단 병력들도 흥남부두에 집결하여 승선을 완료한 채 출항을 기다리고 있으며, ‘통제선-3’까지 축소된 방어선을 전담하는 미 3사단만이 남아서 철수를 엄호하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22일 새벽, 기계화부대 상륙정이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대기하고 있는 외항 46번 계류장에 다가와서 1,000명의 군인에게 공급할 레이션(미군 전투식량)을 가지고 가자 라루 선장과 선원들은 전투부대원들을 태워서 곧 출항할 것으로 짐작했다. 그러던 중 명령에 의해 오히려 위험한 내항 3번 선착장으로 입항했다. 폐허가 된 흥남 시가의 눈 덮힌 언덕배기로 포탄들이 비오 듯 쏟아지고 북한주민들은 마지막 남은 퇴로인 바닷가로 허둥대며 떼를 지어 몰려오고 있었다. 저녁이 되자 전투에 지치고 면도도 못한 덥수룩한 차림의 미 10군단 부참모장 맥카프리 중령 등 5명이 승선하였다. 그들은 라루 선장에게 “대부분의 선박과 유엔군은 이미 흥남을 떠났고 공산군이 포위망을 빠르게 좁혀오고 있습니다. 이 배가 마지막까지 흥남에 남아있는 배들 중 하나입니다”라고 현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 배는 단순한 화물선으로 다른 승객을 태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선장님께 피란민을 태우라고 명령할 수 없으며, 선장님이 예정대로 얼마간의 군인들만 태우고 빨리 흥남항을 빠져나가시겠다면 원래 계획대로 진행하시면 됩니다”라며 “하지만 선장님이 자원하여 피란민 중 다만 얼마만이라도 태우고 나갈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마지막 철수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선장님 도와주십시오!”하고 부탁했다. 라루 선장은 전혀 망설이지도 않았고 누구와 상의하지도 않은 채 너무 쉽고도 간단하게 “알겠습니다. 우리가 저들을 구출하겠습니다”하고는 “몇 명이 아니라 될 수 있는 한 많이 데리고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라루 선장의 명령이 하달되자 선원들은 피란민들이 탈 수 있도록 나무로 만든 다리 등을 급하게 만들어 설치했다. 22일 21시30분부터 피란민들의 승선이 시작됐다. 이들 북한 주민들의 생명을 구출하기 위해 4척의 항공모함과 구축함 등에서는 끊임없이 함포 사격을 가했고 발사한 포탄들은 포성을 울리며 배 위를 지나갔다. 또한 포탄의 진동으로 배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일반 화물 운반용으로 제조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는 선원이 머무르는 12인용 선실밖에 없었고 선원들은 48명 이었다. 배 한쪽에 3층으로된 화물선창이 있는데 아래쪽 선창에 피란민을 수용한 다음, 숨 쉴 공간만 남겨놓고 선창을 칸막이로 막고 그 위에 또 태웠다. 또 제일 아래쪽 선창 꼭대기와 갑판 사이에 선창을 임시로 만들어 그 곳에도 사람들을 짐 부리듯 싣고 승강구의 뒤끝은 출입과 환기를 위해 그대로 놔두었다. 갑판 아래의 공간이란 공간은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뒤늦게 들어온 사람은 버스나 지하철에서 처럼 내내 서있어야 했다. 선창을 채우자 갑판 사이도 채우고 주 갑판과 보트 계류장까지도 모자라 삭구(배에서 쓰는 밧줄 종류)에 매달리기까지 했다. 새벽녁이 밝아오자 피란민 승선을 감독하던 2등 항해사 알버트가 탄식을 하며 외쳤다. “미쳤어, 마치 손바닥만한 한 차에 12명의 거인이 들어가는 서커스 어릿광대 놀이만 같아…” 이때 라루 선장이 총 몇 명이나 배에 탔나고 물었다. “아래쪽 선창에 1만명을 태우곤 세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라면서 1등 항해사 사바스티오는 싱긋 웃었다. 평시에는 1,200명 정도까지는 승선이 가능했는데,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최종적으로 14,000명을 쑤셔놓듯 태웠다. 하지만 사무장 로버트 러니 상급선원은 “이 배는 이들에게 제공할 먹을 거리는 물론 물이나 화장실도 없고, 의사나 통역할 사람도 없으며, 기온은 영하인데 화물창에는 난방도 안되고 전기시설도 없고, 더군다나 갑판에 있는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사람들은 바닷바람과 얼음같이 찬 물보라 속에서 어떻게 추위를 이겨낼 수 있을까?”하며 걱정을 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북한 피란민을 싣고 바다로 나가기 직전에 한 대의 짚차가 선착장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한 명의 미 육군 중위가 뛰어내리며 황급히 라루 선장에게 “범죄 수사대에서 방금 공산주의자 몇 명이 피란민으로 위장하고 탔다는 정보를 입수해 한국군 헌병 17명과 함께 승선해서 같이 가기 위해 왔습니다”라고 급하게 말했다. 실제로는 몇 명이 아니라 많은 숫자의 간첩들이 탔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남한으로 내려가 설사 유엔군 작전을 방해하더라도 더 많은 선량한 피란민을 구출하려면 누가 간첩인지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대로 모두 태우고 가는 수 밖에 없었다. 중공군의 포위망이 좁혀오는 상황에서 피란민들을 구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유엔군의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생명의 항해’를 계속 진행하는 것 뿐이었다. 피란민 승선이 완료되자 138미터의 갑판까지 사람들로 꽉 들어찼으며 배 2번 창고 아래에 있는 폭발성이 강한 300톤의 항공유와 14,000명의 피란민 이 두가지 화물을 실은 채, 드디어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23일 오후 2시54분에 부산을 향해 출발했다. 화물 대신 사람들을 태우고 눈보라 치고 삭풍이 불어대는 동해바다에서 28시간 820km의 ‘생명의 항해’가 시작되었다. 다음날 새벽이 되었을 때,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온통 얼어붙은 송장이 되어 갑판을 뒤덮을까 걱정했는데 피란민들은 모질게도 질긴 생명줄을 붙들고 있었다. 오히려 항해 도중 5명의 아이가 태어났고 승무원들은 ‘김치1’에서 ‘김치5’까지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또 먹을 것을 찾아 젊은이 몇 명이 선원실로 험악한 기세로 뛰어들기도 했고, 유언비어가 난무하여 폭동의 조짐도 있었으며 그 와중에 헌병으로 위장한 중공군을 체포해 강금하기도 했다. 드디어 24일 13시21분 부산항에 닻을 내렸다. 선장을 비롯한 모두의 얼굴에 안도감이 피어 올랐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부산은 이미 유엔군과 백만명 이상의 피란민들로 북적이고 있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으니 남서쪽 80km 더 가서 거제도에서 하선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라루 선장은 체력적 한계에 도달한 피란민들을 위해 10번 계류장에 정착하고 유엔군의도움을 받아 부상자들은 부산항에 내려 치료를 받고 음식과 물, 담요 등을 배에 실어 나누어 주었다. 24일 자정에 시작된 피란민들의 식사는 다음날인 25일 아침 7시가 다되어야 겨우 끝났다. 1950년 한반도의 크리스마스는 정말로 헐벗고 굶주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날이었고, 선상에서 라루 선장은 인생에 중요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 좌측, 1950년 12월 26일 아침 거제도에서 안도감에 화색이 돌며 하선하는 북한 피난민들과 우측, 2001년 여름 미국 뉴튼에 있는 바오로 수도원에서 투병중인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이었던 ‘마리너스 라루’수사와 수도원 인수를 위해 방문한 왜관 수도원의 김구인 원장신부 [자료제공=생명의 항해] 한국 사람들에 의한 뉴튼 수도원의 부흥은 ‘마리너스’수사와 선원들의 선행에 대한 보은 그날 12시42분에 마침내 거제도에 도착했지만 항구가 작아 공해상에서 하룻밤을 보내고26일 아침에 지원받은 미군 8,500톤급 상륙정 2척에 7,000명씩 태워 하선시켰다. 떠나는 피란민들은 즐겁게 손을 흔들며 깊은 감사의 눈길을 보냈고, ‘메러디스 빅토리’호 48명의 선원들은 원래 군인들만 태워 왔으면 이렇게 위험하지 않았겠지만 목숨을 담보로 수행한 무모한 생명구출항해에서 끝없는 보람과 만족 및 자부심을 느꼈다. 그렇지만 라루 선장은 자신의 무모한 결정의 결과에 기뻐할 이유가 또 하나 있었다. 피란민들을 떠나 보내고 텅빈 선창을 돌아보다가 러시아제 기관총이며 자동 권총과 탄약통, 수류탄 더미들이 반짝거리며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여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또다른 전과를 올렸다. 이것은 친절한 피란민들이 감사의 표시로 남겨 놓았거나 마음이 변한 적군들이 전향의 징표로 남겨 놓은 선물이었다. 그후 라루 선장은 자신의 젊은 시절 20년을 보냈던 바다 생활을 접고 1954년 수도자의길로 들어섰는데, 베니딕트 회 바오로 수도원에서 ‘마리너스’라는 수사로 근 50년 헌신했다. 그는 “흥남에서 14,000명의 피란민을 구출한 사건이 저의 결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수도 생활에 헌신하려는 사람 수가 감소하자 뉴저지 뉴튼의 약 70만평 광활한 대지에 자리잡은 바오로 수도원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 그때 베네딕트 수도회 슈뢰더 대수도원장이 140명의 수도자가 있는 왜관 수도원의 원장인 김구인 신부에게 도와줄 수 있는지 질의를 하였다. 왜관 수도원은 ‘마리너스’수사가 헌신했던 바오로 수도원을 회생시키기로 결정을 하자 이틀 후인 2001년 10월 14일 투병중이던 ‘마리너스’ 수사는 87세의 일기로 선종했다. ‘마리너스’수사가 선종한지 2개월 후, 한국인 수도자들이 도착하여 수도원 복구작업에 돌입했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인 카톨릭 신자들은 뉴튼에 찾아와 일을 도왔다. 2004년 1월, 뉴욕 타임즈 특집기사에서 골드블렛 기자는 “한국 사람들에 의한 수도원의 부흥은 50년전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이었던 ‘마리너스’수사와 선원들의 선행에 대한 보은으로 보인다”라고 소개했다. ‘마리너스’수사가 된 라루 선장은 1950년 겨울 흥남항과 거제도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며 한 가지를 분명히 알고 결심하며 실천했고, 이것은 인본주의와 인류애의 표상이 되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Whatsoever you do to the least of these, you do unto Me)!”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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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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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20) 인본주의와 인류애의 표상이 된 흥남철수와 ‘메러디스 빅토리’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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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53) 정치적 중립 고민속에서 체험한 '기쁨', 겨울아이와 선거혁명
- 군인의 정치적 중립을 배워왔던 필자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지시… 부대별로 민정당 지지도 확인해 해당 지휘관의 지휘능력 평가에 반영 민병돈 장군의 정치적 중립, 수년 후 반전되는 재평가 받아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2014년 내부 고발자들이 모였던 ‘한국공익신고지원센터’를 만든 이지문씨는 1992년 백마부대에서 중위로 복무하다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의 군대 내 부정 선거를 폭로했다. 당시 부재자투표 때 민주자유당 후보를 찍으라고 상관이 병사들에게 요구한 사실을 폭로한 것이다. 이씨는 이후 군에서 징계를 받고 파면됐으나 소송을 제기해 파면은 취소됐고 중위로 전역했다. 하지만 군입대 전 삼성그룹에 채용되기로 한 일은 취소됐다. 1996년부터는 민주당 소속 서울시의원을 지냈고, 이후에는 공익제보자 모임, 호루라기재단 등에서 시민사회운동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요즈음 군부대에서는 이지문 중위가 군생활을 할 때처럼 부정선거를 전혀 생각조차 못하며 철저하게 공정한 선거가 이뤄지고 있다. 몇 년 전 군장성 출신이 모 지역구 선거에 나와 당선했는데 지역별 선거결과를 분석하면서 부대 및 군 관사지역의 지지도가 오히려 낮았다며 안타까워한 것이 그 증거이기도 했다. 필자가 중대장을 시작한지 한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군부대는 동계가 되면 각 제대별로 간부교육을 한다. 1985년 1월 사단 간부교육 중에 교육받던 지휘관들에게 갑자기 자대로 복귀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선후배를 만나 부대지휘의 정보를 교환하고 회포도 풀 수 있었던 교육이 조기에 종료되어 아쉽지만 자대로 복귀했다. 복귀하자 마자 연대장이 전체 지휘관 회의를 직접 소집했다. 갑자기 간부교육 중 복귀 지시가 하달됐고 또 연대장이 회의를 소집하자 지휘관들은 특별한 사건이 있는가 의아해했다. 당시는 제 5공화국으로 다음달인 2월12일, 제 12대 국회의원 276명을 뽑는 선거가 있어 마을마다 선거운동 분위기에 요란하게 들떠 있었다. 연대장은 평소와 달리 웃는 얼굴로 차를 권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현직 대통령이 나라 사랑하는 지도력을 발휘한 결실로 경제가 급성장하고 ’88 올림픽’도 유치했다며 정부의 시책을 홍보하면서 좌익 및 진보세력들에 의한 정치적 혼란 상황을 언급했다. 이러한 난국에 우리 군인들도 동참하여 나라가 바로 갈 수 있도록 적극적인 행동으로 정부를 도와야 한다며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당인 민정당을 지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 당황했던 것은 연대장이 부대별로 지지도를 확인해서 해당 지휘관의 지휘능력 평가에 반영하겠다는 말이었다. 그의 곁에 있던 보안사령부에서 파견된 보안반장은 부재자 투표용지를 보이며 각개 병사들이 투표한 것을 모두 확인하겠다고 말한 것은 군인의 정치적 중립을 배워왔던 필자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회의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해서 대대장실에 중대장들은 다시 모였다. 대대장도 연대장의 지시에 난감한 표정으로 “각 부대별로 평가를 한다니 중대장들은 조심하되 적극적으로 임해…..”라고 말을 더듬으며 대대를 담당하는 보안부대 중사의 표정을 살폈다. 중대 행정반으로 돌아와서 소대장을 집합시켰다. 필자는 무슨 말부터 해야 할 지 몰랐지만 연대장과 똑같이 정부시책을 홍보하고 이 부재자 투표 결과가 대대장 평가까지 좌우하게 된다는 언급을 하며 소대장들의 협조를 부탁했다. 이후 전 중대원을 집합시켜 정부시책을 홍보하면서 좌익 및 진보세력들에 의한 정치적 혼란 상황을 언급했다. 이러한 난국에 국회의원 선거에서 올바르게 잘 판단해서 투표를 잘하자고 당부했다. 행정반에 투표소가 설치되고 각 개인의 투표용지가 도착했다. 그러면 필자는 중대장실에 해당 병사를 불러 차를 한잔 주면서 어디를 찍을 것인가를 확인 후 투표소로 보냈다. 필자는 지시사항을 시행하면서도 이것이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군인의 역할은 아닌데 하는 죄책감을 느꼈다. 헌데 문제가 생겼다. 소대 군종병을 맡고 있는 전진호 일병이 중대장실에 들어와 차를 한잔 마시면서 절대 집권당을 찍지 않겠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현 정부를 지지하지 않고 무소속에 목사님 출신이 있어 그 분을 찍겠다”고 자신의 의지를 강하게 표출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전일병과 이야기를 하면서 초라해지는 내모습을 느꼈고 소신있게 자신의 신념을 주장하는 전 일병(현재 서울 성북동 00교회목사)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때 선임 소대장 김중위가 중대장실로 들어왔다. “중대장님 지금 뭐하세요..? 군인은 명(命)에 살고 명(命)에 죽는 것인데…”하며 “지금부터는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중대장님은 나가세요..”라며 필자를 밀어내고 전 중대원 면담을 자처했다. 김중위는 중대에서 1년 넘게 근무하여 필자보다 중대 병사들을 더 많이 알고 친하게 지내고 있었고, 내키지 않았던 암울한 수렁에서 나를 건져주었다. 이와 관련해서 특전사령관과 육사교장을 역임하였던 민병돈 장군(육사15기, 하나회)이 당시 인접 제 20사단장으로 근무를 하였는데, 그 부대도 필자가 겪은 상황에 처해있을 때 사단장이 나서서 참군인의 모습을 보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민장군은 상부로부터 선거를 도우라는 지시를 받고 당시 예하 여단장들에게 정부시책을 홍보하되 투표과정에서 일체의 선거법 위반행위가 있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나를 믿고 따르면 모든 책임은 사단장이 지겠다고 했다. 결국 투표 결과 다른 부대보다 여당 지지율이 떨어졌고 통상 20사단장을 마치면 영전하던 당시의 사례에서 벗어나 준장 보직인 육본 정보참모부 차장으로 좌천되었고 사단보안부대장도 한직으로 밀려났다. 이후 1987년 6.29선언이 있었고 민주화 과정을 거치며 민장군의 정치적 중립을 유지한 처신은 반전되는 재평가를 받아 오히려 중장으로 진급해 특전사령관으로 임명 되었다. 물론 당시의 사단보안부대장과 사단장 지시를 수명한 여단장들도 한직에서 요직으로 발탁되었다. 그 밖에도 이런 참군인이 여러분 있는 걸로 알고 있다. 훗날 민장군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필자도 그때 거부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는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중대는 선임 소대장 김중위의 도움으로 절대적인 지지율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타 부대와 비슷한 결과로 평가되어 대대장에게 면은 세웠다. 통신장교가 꺼낸 '아내의 생일선물'은 이종용의 '겨울 아이' 그해 겨울에 태어난 '겨울아이'는 바로 12대 국회의원 선거혁명 잡초는 밟아도 또 밟아도 다시 살아나, 철저한 감시필요 중대 소대장은 학군장교인 김태정 중위, 우광호 소위와 학사장교인 변상훈 소위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대장 부임 후 엄동설한 속에서도 치루었던 지휘관 교대 FTX(작계시행훈련)와 애끓는 고민을 하며 난감했던 부재자투표가 끝나고 격려차원에서 육단리 셋방으로 저녁초대를 했다. 1월말 눈 내리는 대성산 기슭 육단리의 조그마하고 비좁은 단칸방 셋집에 소대장들과 통신장교인 현준(김중위 동기)이 들어가니 서로 어깨를 부딪히며 끼워 앉아야 했다. 그동안 훈련과 임무수행 중의 애피소드 회상으로 한 층 분위기가 고조되었지만 3시간 넘게 올라간 눈 덮힌 대성산 진지에서 혹한을 견디며 사고없이 부대를 지휘했던 것과 이번 투표에 있었던 소대장들의 노고에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아내가 저녁상을 내오자 자리는 더 좁아졌다. 소주 한잔을 기우려는 순간 늦게 온 통신장교가 “잠깐..”하며 기다리라고 했다. 부시럭 거리며 벗어 놓은 옷사이에서 케익을 꺼내왔다. 아내와 필자는 당황했다. 촛불을 켜고 누가 시작했는지도 모르게 당시 유행했던 가수 이종용의 ‘겨울아이’가 흘러 나왔다. 신혼인 아내는 소대장들이 준비한 자신의 생일 케익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필자도 잠시 잊고 있었는데 소대장들이 기억을 하고 기습적으로 우리 부부를 감동시켰다. 사람들은 참으로 간단하고 작은 것에 쉽게 감동을 받는다. 그때 군인 가족의 애환 속에서 아내는 작은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 그해 겨울에 태어난 겨울아이가 또 있었다. 바로 제 1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로 말 그대로 선거혁명 이었다. 그렇게도 치밀하게 정권이 개입했지만 집권당인 민정당은 35.2% 득표로 148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창당한지 200일도 채 안되는 신민당이 29.3%득표에 67석으로 제 1야당이 되었고, 야당 역할을 잘 못했던 기존의 민한당은 35석을 확보했으나 곧 해체되어 통합된 신민당이 103석으로 증가하여 국민들의 민의가 확실하게 반영될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는 집권당의 불신과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선거혁명 이었고 이것은 바로 이어진 6.29선언과 제5공화국 종말을 앞당기는 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부정선거와 부패 등은 잡초와 같은 존재이다. 이후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시에도 이지문 중위의 폭로로 일부이지만 집권당 정부의 선거 개입이 또 드러났다. 현재도 장담할 수 없다. 이제는 과거처럼 군에서의 일방적인 선거개입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고도로 지능화된 일반사회가 더 문제이다. 필자도 경험 했지만 유도식 여론조사와 언론의 편파 방송으로 민의를 호도하고 있는 일부 상황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필자가 중대장 시절 제 12대 국회의원 선거시 그렇게도 집요하게 개입하며 부정한 투표를 유도했던 결과가 오히려 선거혁명을 이뤄낸 것처럼 국민들이 올바르고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 또한 지금도 맹활약하고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이지문씨의 한국공익신고지원센터, 호루라기재단 등처럼 시민사회에서 공정하고 정확한 두 눈을 크게 뜨고 철저하게 감시해야 한다. 잡초는 밟아도 또 밟아도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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