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역군인Home >  전역군인 >  인생 2막
-
제2연평해전 승전 주역 이희완 대령, 보훈부 차관 임명
[시큐리티팩트=강철군 기자] 제2연평해전 승전 주역인 이희완(47·해사 54기) 대령이 신임 국가보훈부 차관에 임명됐다. 통상 대령이 국방부 기준으로 과장급 직위를 맡는 만큼 그의 차관 발탁은 파격적인 인사로 받아들여진다. 이 차관은 지난 4월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에 동행해 한미동맹 70주년 기념 오찬에 참석했으며, 지난 6월 윤 대통령이 6·25전쟁 참전 유공자 어르신들을 청와대 영빈관으로 모시는 자리에도 초청됐다. 국가보훈부와는 작년 말부터 순직 군경·소방관의 미성년 자녀에게 맞춤형 지원을 펼치는 '히어로즈 패밀리 프로그램'을 함께한 인연이 있다. 이 차관은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 당시 참수리 357호 고속정 윤영하 정장이 전사하자 부정장으로서 25분간 교전을 지휘했다. 북한의 37㎜ 포탄을 맞아 오른쪽 다리를 잃는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승조원들과 함께 치열한 사투를 벌여 승전을 이끌었다. 지난 1일 대령으로 진급해 해군본부 교육정책담당으로 복무하던 중 차관으로 임명되면서 전역한다. 이 차관은 경상북도 김천출신으로 울산 성신고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제2연평해전 참전해 충무무공훈장을 받았고 해군사관학교 심리학 교수, 해군대학 작전전술학 교관, 해군본부 인재개발교육담당, 해군본부 교육정책담당 등의 직을 거쳤다.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15)] 통일전망대에서 대한민국 평화 기원하며 완주 기념 ‘만세삼창’ 외쳐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8월 30일, 종주를 시작한지 12일째 날이자 마지막 날이다. 오늘은 거진읍 반암리에 위치한 행운 민박에서 거진읍, 화진포, 대진리를 거쳐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까지 약 15㎞정도는 걷고 출입신고소부터 통일전망대까지는 차량으로 이동하는 여정이었다. 오늘 종주하는 지역에는 거진, 대진 등의 마을이 있고 유명한 관광지인 화진포가 있으며 6.25남침전쟁 시 격전지였던 월비산, 351고지 등이 있다. 지난 10일 동안 아침 식사를 담당했던 황금철 단원이 오늘은 사발면이 아니라 파도 썰어 넣고 달걀도 넣어 끓인 특별한 라면을 준비했다. 모두들 감사한 마음으로 맛있게 잘 먹고 6시경 민박집을 나섰다. 민박집 주인 아주머니는 텃밭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단원들 모두 아주머니가 베풀어준 친절함과 호의에 감사하며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특히 아주머니와 동갑인 박찬도 단원은 더 다정다감하게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아주머니께서는 “나에게 이렇게 따뜻하고 다정한 말을 해준 사람이 참으로 오랜만이다”라고 감격해 하셨다. 만나는 사람마다 진심어린 말로 힘과 용기와 편안함을 주시는 박찬도 다원이 존경스럽고 부러웠다. 우리는 바닷가 모래사장을 밟으며 여정을 시작했다. DMZ 종주의 완주를 눈앞에 두고 있어서인지 대원들의 걷는 모습은 경쾌했다. 우리는 불가능 할 것 같았던 이번 도전의 마무리 지점에 와있었다. 거진 읍내를 통과하니 화진포 이정표가 보였다. 화진포 호수는 아주 오랜 옛날에는 바다였는데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모래로 바다와 격리돼 지금은 담수와 해수가 교차하는 천연 호수라고 한다. 면적은 약 72만평으로 여의도 넓이와 거의 비슷하고 호수 둘레는 10㎞가 넘는 산책길이 조성돼 있다. 이 호수와 바다 사이의 백사장이 화진포 해수욕장이며 울창한 소나무 숲이 유명하다. 호수 주위에는 고성군의 꽃으로 지정된 해당화가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방랑시인 김삿갓은 화진포의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 화진포의 8경을 읊었고, 그 중 3경이 平沙海棠(평사해당: 호수 주변 넓은 모래밭에 핀 붉은 해당화)이다. 이 호수는 바닷물이 들고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통로가 있고 호수 표면에는 담수가, 호수 깊은 곳엔 해수가 있어 민물고기뿐 아니라 바다고기도 살고 있다고 한다. 매년 여러 종류의 철새들이 찾아오고 다양한 생물들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닷가인데다 경치가 아름다워 산 중턱에는 광복 후 김일성 별장, 한국전쟁 후 이승만 별장, 이기붕 별장이 지어졌다. 대진항을 지나 통일안보공원 근처에 명파리 검문소가 있었다. 이 검문소는 민간인통제선 안쪽 지역을 출입하는 민간인을 검문하던 초소였다. 지금은 통행인들의 불편을 줄이기 위해 CCTV로 감시만 한다고 했다. 임무수행 중인 초병들이 CCTV로 우리를 확인하는 것 같더니 다가와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우리의 여정을 설명하며 현역 신분증도 보여 주었다. 초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해안가 경계 철조망을 따라 만들어진 순찰로를 걸었다. 대진항을 지나자 마차진 해변과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까지 700m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였다. 아침에 출발할 때 출입신고소까지 11㎞를 예상했는데 실제로 걸은 거리는 약 15㎞ 정도였다. 10시쯤 통일전망대 출입 신고를 마친 후 주차장에서 지인이 보낸 분을 만났다. 표정이 밝고 친절한 분이었는데, 그가 운전하는 차량으로 통일전망대까지 이동했다. 이동하는 길 서쪽 방향 5㎞ 지점에는 6.25전쟁 시 전투가 치열했던 월비산, 351고지 등이 있었다. 6.25전쟁 초기인 1951년 10월 중순부터 휴전 직전까지 7차례에 걸쳐 고지 쟁탈전이 있었다. 당시 1군단 예하 수도사단과 11사단 등은 월비산과 351고지 탈환을 위해 작전을 수행했다. 육·해·공군이 합동작전을 수행한 이 전투에서 해군은 지속적인 함포사격을 했고 공군은 총 1500여 회 출격해 적 핵심시설 및 진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휴전 협정 시 월비산과 351고지는 북한 땅이 됐다. 월비산과 351고지 전투 기념비는 통일전망대에 위치해 있었다. 이 기념비에는 “이 전투에서 호국의 신이 되신 전몰장병의 전공을 기리고자 1957년 7월 15일 제3군단에서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대진리에 전투기념비를 건립하고 관리해 오던 중 통일전망대가 설치돼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분들에게 민족분단의 아픔을 되새기고 조국 수호의 증표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그날의 격전지가 바라다 보이는 이곳으로 이전하였음. 1988. 12. 26”이라고 적혀 있었다. 통일전망대에 도착하니 해금강을 비롯하여 북한지역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고성군 홈페이지에는 분단 현실이 발아래 펼쳐있는 곳으로 분단의 아픔과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을 되새기고자 1984년에 통일전망대를 지었다고 설명돼 있다. 동해안 최북단인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호리 해발 70m 고지 위에 위치한 이 전망대에서는 16∼25㎞ 거리 떨어진 금강산을 볼 수 있으며, 해금강 대부분이 한눈에 보였다. 우리 넷은 함께 만세 삼창을 외쳤다. 우리 대한민국의 평화가 유지되기를 기원하며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지금은 갈 수 없지만 언젠가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그날을 기원하면서 감사기도를 올리고 성모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도 찍었다. 차량 지원을 나온 분이 사진을 찍어줘 오랜만에 단원 넷이 모두 나오는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1년 중에 해금강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날이 많지 않다는데, 오늘은 잘 보여서 우리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박찬도, 이창조 단원은 통일전망대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두 분은 2008년 4월 초에 이곳을 출발하여 5년여 동안 동해안, 남해안, 서해안을 돌고 돌아 4개월 전인 지난 2013년 4월에 임진각까지 도착해 ‘대한민국 U자 걷기’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걸어서 대한민국을 한 바퀴 돌아온 셈이다. 그 걷기에는 총 26명이 참여했고 필자도 2012년 서해안 구간 걷기에는 함께 했었다. 단원들 모두 이 곳에서 장시간 머물면서 아름다운 풍경도 보고 12일 간의 여정을 정리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갈 길이 멀었고, 차량 지원을 나온 분을 생각하니 지체 없이 출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돼 곧장 속초로 이동했다. 버스터미널 근처의 ‘아바이 마을 식당’에서 모둠 순대와 함흥냉면으로 식사하면서 지난 12일을 되돌아보고 기억에 남는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걷는 동안 내내 행복했다. 우리가 만난 사람들은 마음이 따뜻했고 지친 우리는 많은 도움을 받고 힘을 얻었다. 장거리를 잘 걸으려면 배낭의 무게를 줄여야 한다는 것과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면 고통스럽다는 것도 경험했다. 다리 근육의 힘은 걸을수록 강해진다는 것도 알았다. 물 한잔을 대접받으면서 감동했고, 아무리 좋은 비옷도 오랜 시간 비를 맞으면 속옷까지 젖는 것과 잠깐 쉬는 나무그늘이 얼마나 시원한 지도 경험했다. 우리는 고통을 겪는 상황에서도 “아는 것만큼 보인다. 내 주변 사람에게서 항상 배울 거리가 있다. 모든 사람이 다르고, 다름을 인정해야한다. 걸을수록 성취감이 커지고 자신감이 생긴다. 고통을 겪으며 선열들께 감사한다”라는 좋은 말도 나누었다. 또 “우리가 왜 걷는 거지?”라는 질문도 했고, “살아 있기 때문에, 건강하게 살기 위해, 삶의 의욕과 활기를 높이기 위해”라고 답했다. “가능하면 우리의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기면 좋겠다”라는 말도 했다. 이렇게 우리는 12일간의 대장정이었던 DMZ 종주를 마감했다. 함께했던 5670 단원들께 이 지면을 빌려 경의와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기도와 전화, 문자, 직접 방문 등으로 안전하고 건강하게 걸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모두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합니다. 그리고 DMZ 종주 완주를 축하합니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14)] 이승만 대통령 휘호 ‘爲國盡忠’ 새겨진 바위 보며 세찬 비 뚫고 완주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8월 29일, 종주를 시작한지 11일째 날이다. 오늘은 용대리의 설악산림 수련관을 출발하여 진부령 정상에 오른 후 진부리, 장신리를 거쳐 고성군 광산리, 대대리를 지나 거진항 근처 반암에 있는 행운 민박까지 걷는 여정이다. 5시경 기상하여 사발면, 선식, 우유 등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6시경 출발했다. 수련관 관리자에게 용대리 휴양림 입구까지 차를 태워 달라고 부탁했다. 최초 계획했던 오늘 여정은 이곳이 아닌 용대리 휴양림 숙박시설에서 금강산 건봉사 입구에 있는 민박집까지 약 28㎞였다. 그런데 숙소 위치가 변경돼 여기부터 걷게 되면 오늘 종주거리가 너무 길어져 무리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차를 타고 가면서 얘기를 나누다보니 짧은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다 왔다고 한다. 차에서 내리니 용대리 휴양림 입구가 아닌 진부령 정상이었다. 우리를 태워다준 관리자가 칠십 노구를 이끌고 걷는 단원들의 모습이 안쓰러워 걷는 거리를 줄여주려고 의도적으로 용대리 휴양림 입구를 지나쳐 정상까지 데려다 주는 호의를 베푼 것 같았다. 걸으려고 계획했던 길을 걷지 못하게 됐지만 그 분의 호의를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되돌아가는 것도 아닌 듯해 진부령 정상부터 걷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예약한 민박집까지 거리는 10여㎞ 정도에 불과했다. 불현듯 예약된 숙소를 변경하여 오늘 좀 더 걸으면 내일 부담이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예약을 취소하면 민박집에 피해를 줄 것 같아서 마음이 걸렸다. 그런데 참 묘한 상황이 전개됐다. 마침 예약된 민박집 주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근처의 신축건물 공사장에서 일하는 일꾼 여러 명이 오늘 방을 비우기로 했었는데 공사가 지연돼 숙박을 연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박집 주인은 난감해 하면서 대신에 다른 민박집을 좋은 조건으로 소개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내가 예약을 취소하고 싶었는데 오히려 다행이었다. 나는 인심 쓰는 것처럼 괜찮다고 답한 후, 소개해준 거진항 근처의 행운 민박으로 숙소를 새로 정했다. 진부령 정상 공간은 널찍했다. 이 공간에 세워진 향로봉지구 전투 전적비에는 “맹호 수도사단 용사들은 단기 4284년(1951년) 5월 7일부터 동년 6월 9일까지 89회에 달하는 ‘괴뢰 제5군단’의 반격을 격퇴하고 설악산과 향로봉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고성군에서 운영하는 진부령 미술관도 있었다. 어떤 전시물이 있을지 궁금했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라 문이 잠겨 있었다. 진부령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백두대간은 산은 산대로 계곡은 계곡대로 그 줄기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또 산봉우리를 따라 이어지는 능선도 아름다웠다. 진부령은 추가령, 대관령과 함께 영동과 영서를 잇는 3대 고갯길이다. 그중 진부령은 높이가 529m로 가장 낮은 고개다. 이러한 특성으로 영동지방에 눈이 많이 와도 진부령은 여간해서 통제되지 않았다고 한다. 옛날 보부상들이 넘던 오솔길이 1987년 왕복 2차선 도로로 확장 포장됐다. 꼬불꼬불한 진부령 길을 돌고 돌아 정상에서 약 십리 정도 내려오니 장신리 이정표가 보였다. 길가에는 커다란 돌에 ‘소똥령 마을’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마을 이름이 독특하여 근처 상점에서 잠깐 쉬며 주민으로부터 지명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장신리’라는 행정구역 명칭보다 ‘소똥령 마을’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면서 ‘소똥령 마을’로 불리게 된 두 가지 설을 들려주었다. 하나는 동쪽의 작은 고개라는 의미로 소동령(小東嶺)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된소리로 발음하다 보니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옛날 영동지역에서 인제군 원통으로 소를 팔러 가려면 이곳에서 쉬거나 하룻밤을 묵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러다 보니 길 여기저기에 쇠똥이 있었고 그런 모습을 보고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대다수 주민들은 ‘소똥령’이라는 명칭을 더 즐겨 쓰고 있다고 한다. 조금 더 내려오니 ‘건봉사’라는 사찰의 방향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였다. 건봉사는 고성군에 위치한 사찰로 금강산 줄기가 시작되는 건봉산 감로봉의 동남쪽 자락에 있어 ‘금강산 건봉사’로 불린다. 이 사찰은 신라 법흥왕 시절에 창건된 사찰로 약 1,500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6·25전쟁 시 폭격으로 수백 칸에 이르던 전각이 모두 폐허가 됐고 지금은 근래에 복원한 건물만 단출하게 서있다고 했다. 고성군 광산리를 지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친필 휘호가 새겨진 바위가 있었다. 휘호 내용은 ‘爲國盡忠’이었다. 안내판에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께서 6.25전쟁 당시 11사단을 지휘하는 사단장에게 ’조국을 위해 충성을 다하라‘는 뜻으로 친필을 하사했고 그 시기는 1951년 9월경이며 친필휘호의 바위 음각 시기는 하사 받은 해 봄이라고 적혀 있었다.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지면서 먹구름이 몰려들었고, 곧이어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아스팔트 도로임에도 불구하고 금방 도랑 같은 물길이 만들어 졌다. 비를 피할 곳도 없어 비를 맞으며 계속 걸었다. 마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쬘 때도 걷는 것처럼. 시원한 비를 맞으며 걷는 행운을 만났다고 생각하며 내리는 비를 즐기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대원들은 도로에 고여 있는 물도 아랑곳하지 않고 첨벙첨벙 걸으며 속도를 높여 걸었다. 우리는 모두 우비를 입고 두 시간도 넘게 걸었다. 비옷을 입을 때에는 겉옷이 젖을까 노심초사 했었는데 나중에는 속옷까지 모두 젖었다. 신체 모든 부위의 감각이 내리는 비의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사관학교 다닐 때 여름에 군사훈련을 받으며 이렇게 억수같이 내리는 비에 온몸을 적셨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맨몸으로 자연에 덩그러니 버려진 것 같은 상황을 경험하며 평상시 자각하지 못했던 느낌이 왔다. 그리고 우리가 더없이 약한 존재라는 사실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 ‘야지에서 비를 피할 방법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비를 맞고 걷고 있다’는 상황을 생각하면 불쌍하고 측은한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시원함, 홀가분함 등 좋은 느낌을 느끼며 걸었다. 우리는 모두 흠뻑 젖은 상태로 오후 2시경 행운 민박에 도착했다. 비가 계속 내렸기 때문에 점심은 우동, 짬뽕, 간짜장, 탕수육을 배달시켜 먹었다. 다행히 한 단원과 동갑인 함경도 출신의 주인 아주머니가 모든 세탁물을 가져오라고 하여 세탁기로 돌려주셨다. 비가 그친 후에는 빨래 줄을 가져와서 널 수 있도록 준비해 주셨다. 한참 동안 휴식을 취했고, 비가 그친 후 우리는 동네를 한 바퀴 돌며 바다 구경도 했다. 저녁은 해변 횟집에서 회 정식으로 먹었다. 푸른 바다를 보며 시작한 만찬이었는데 주변이 깜깜해질 때 끝났다. 참으로 오랜만에 편하고 여유롭게 앉아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일 약 10여 ㎞만 걸으면 여정을 마무리한다는 생각과 함께 DMZ 종주 기간에 있었던 일들로 떠올리며 편안한 마음으로 마지막 밤 잠자리에 들었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13)] 향로봉·노전평 전투 지역 지나며 전사자 부인 사연에 가슴이 먹먹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8월 28일, 종주를 시작한지 10일째다. 오늘은 원통리에 위치한 을지회관을 출발하여 한계리, 남교리를 거쳐 용대리의 설악산림 수련관까지 약 28㎞를 걸었다. 인제군 북면은 면사무소가 있는 원통리의 ‘원통’이란 이름이 더 유명하다. 북면은 동해안으로 접근하는 관문으로 진부령을 넘으면 고성군, 미시령을 넘으면 속초시, 한계령을 넘으면 양양군과 연결된다. 인제에는 향로봉, 서화계곡, 노전평 지구, 백담사, 만해 마을 등이 있다. 5시경에 컵라면과 어제 정전택님이 가져온 햇반, 김, 몇 가지 반찬을 곁들여 아침식사를 하고 6시경 숙소를 출발했다. 조금 걷다 보니 원통리 표지석이 보였다. 표지석에는 ‘원산으로 가는 통로’라는 의미로 원통이 정해졌고, 조선시대에 원통역(驛)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당시에는 대체로 30리마다 역(驛)을 운용했다. 역은 말을 이용해 국가 교통 및 통신 기능을 수행했던 곳이나, 근대적인 통신 제도와 교통수단의 출현으로 1896년에 사라졌다. 하천을 따라 백담사 입구 마을까지 약 5시간 정도 걸었다. 걷는 동안 정자문, 12선녀탕 계곡 입구, 용대초등학교, 백담사 입구를 지나 용대삼거리까지 걸었다. 용대리 지역은 상당히 넓어 도중에 길을 잘못 들어 고생도 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냇가 커다란 나무 그늘에서 더위를 피해 친구들과 어울리는 분들에게 매운탕과 소주도 몇 잔 대접받았다. 여기저기에 군락을 이루며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는 설화초(설악초)도 보였다. 식물에 관해 박식한 한 단원이 “이 꽃은 눈이 내린 것처럼 하얗고 잎 색깔도 눈꽃처럼 하얗게 변해 설화초로 불린다”고 설명했다. 설화초의 꽃말은 ‘환영과 축복’인데, 이곳에 오는 사람들을 환영하는 의미로 심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담사 입구 마을에서 깔끔한 중국집을 찾아 짜장면을 먹은 후 공기 좋은 휴양림 콘도에서 묵는다는 즐거움에 부지런히 걸어서 용대자연휴양림에 도착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안내 데스크에서 예약된 방을 찾았다. 그런데 안내 데스크 근무자는 예약자 명단에 내 이름이 없다고 했다. 예약했다던 지인의 이름도 없어서 순간 아주 당황스러웠다. 오늘 묵는 숙소가 예약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사전 답사를 하면서 숙소를 정하고 예약 했는데, 10일째 숙소는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남아있는 거리와 일자를 고려하니 용대리가 적절했다. 그러나 마땅한 숙소를 발견할 수 없어 고민하다가 휴양림에 숙박시설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당시 산림청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전화해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지인은 예약이 가능한지 알아보겠다고 했고, 며칠 후 수련관이 예약됐다는 연락과 함께 전화번호도 받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용대리 지역의 숙소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그런데 예약자 명부에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지인으로부터 받은 전화번호로 연락해 보니 예약된 숙소는 지금 우리가 있는 진부령 근처가 아니라 미시령 근처라고 했다. 이곳 사정을 잘 모르는 필자가 용대리라는 말만 듣고 이곳에 비슷한 시설이 2군데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예약된 숙소는 10㎞ 이상 떨어져 있었고, 대중교통도 없는 상황이었다. 미시령 근처 수련관을 관리하는 분께 우리의 상황을 설명하고 부탁을 드렸더니 고맙게도 차를 몰고 와주셨다. 덕분에 편하게 미시령 옛길 관광도 하며 오후 5시경 숙소인 설악산림 수련관에 도착했다. 콘도 형태로 시설을 갖춘 깔끔한 공간이었다. 우리가 오늘 걸은 인제군 일대는 6·25전쟁 시 향로봉 전투와 노전평 전투가 있었던 지역이다. 향로봉 전투는 맹호부대가 1951년 3월 7일부터 그해 7월 9일까지 중공군과 벌인 전투다. 중공군은 중동부지역의 요충인 인제를 확보하기 위해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부대를 증원하여 설악산과 향로봉 일대를 여러 차례 공격했다. 그러나 맹호부대는 이를 격퇴하고 설악산 및 향로봉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서화 계곡의 노전평 부근에서는 1951년 8월 초순부터 1953년 7월 휴전 성립 직전까지 장기간 고지 쟁탈전이 벌어졌다. 당시 8사단은 인제 서화리 축선과 인접한 고지군을 차지하기 위해 요충지인 노전평을 점령했다. 이 전투에서 8사단은 승리했지만 전사 90명, 부상 536명, 실종 17명 등 피해도 컸다. 노전평 전투에서 전사한 90명 중 한 명일 것으로 추측되는 전사자의 아내가 말한 사연이 문득 생각나 마음이 아팠다. 지난 2017년 10월 24일 뉴스1은 ‘66년 만에 가족 품으로 돌아오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6.25전쟁 중이던 1951년 8월 8사단 10연대 소속으로 노전평 전투에서 전사한 김창헌 일병(1924년생)의 부인 황용녀(94)씨 자택을 방문해 전사자 신분확인 통지서와 유해 수습 시 관을 덮었던 태극기 그리고 발굴된 인식표와 도장 등 유품을 전했다. 고인은 노전평 전투 중 적의 총탄을 맞은 것으로 추정되며 28세의 나이에 전사했다. 부인 황씨는 “남편이 자원입대 했을 때 임신 중이었고 남편도 임신한 사실을 알았다”며 “남편은 태중의 아이를 남자로 생각해 ‘김인석’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전쟁터로 떠났다”고 했다. 남편이 떠나고 10일 후 딸이 태어나자 황씨는 “남편이 소중하게 지어준 아이 이름을 바꿀 수 없어 그대로 쓰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보따리 장사와 노점상을 하며 홀로 딸을 키웠는데, 이제라도 남편의 유해를 찾아 만나볼 수 있어 너무 감격스럽다”며 눈물을 흘렸다. 딸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남기고 산화한 젊은이, 60여년을 홀로 살며 딸을 키워 할머니가 된 여인, 남편의 얼굴이 아닌 유해를 만나는 것으로라도 감격스러워하는 여인, 딸 바보였을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함은 물론 아버지 얼굴조차 모르는 딸…. 그 삶이 어떠했을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6·25전쟁 시 한국군 사망자(실종자 포함)는 60만 9천여명이라고 한다. 이 분들은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그리고 후손들에게 자유 대한민국을 남겨주기 위해 목숨을 바치셨다. 우리는 이분들에게 감사해야 하고 경의를 표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유족들에게 보답도 해야 한다. 하지만 천안함 전사자를 포함해 국토방위 임무를 수행하다 순국한 분들을 대하는 일부 위정자들의 모습과 태도에 안타까움과 함께 분노가 느껴진다. 숙소에 도착한 후 그동안 많이 가벼워진 배낭의 짐을 풀고 땀 냄새가 진동하는 옷부터 빨았다. 관리하는 분이 짤순이를 돌려 빨래의 물기를 빼 주셔서 저녁 햇볕에도 잘 말랐다. 숙소에서 가까운 봉평 메밀 막국수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음식점 건물은 노부부의 큰아들이 부모님을 위해 특별히 설계했다는데, 민박도 받는 방 내부는 깔끔했고 노래방기기도 있었다. 노래를 좋아하는 주인과 함께 어울려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오늘 숙소 변경 문제로 많이 당황했던 것을 생각하며 내일 묵을 숙소에 전화를 걸어 예약 상태를 다시 확인했다. 집을 떠나온 지 열흘이 지났고, 이제 종주 일정은 2일 남았다. 한 방에서 넷이 묵었지만, 설악산의 맑은 공기를 느끼며 편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12)] 인제지구 전투와 리빙스턴교의 아픈 사연 떠올리며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도 새삼 느껴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8월 27일, 종주 9일째이다. 오늘은 양구군 남면 광치터널 근처의 컨테이너 숙소를 출발하여 광치령로를 따라 걸었다. 광치터널을 통과한 후 서호교를 건너 인제 읍내를 지난 다음, 합강리를 거쳐 인제군 원통면에 있는 을지회관까지 약 28㎞를 걸었다. 우리가 종주한 인제 지역에는 광치령, 인제지구 전투 전적지, 리빙스턴교 등이 있었다. 오늘 아침은 양구 휴게소 아주머니가 김치를 곁들여 끓여준 표고버섯 라면을 맛있게 먹었다. 우리들이 먼 길을 걸어왔고 아직 가야할 길이 상당하다는 것을 아는 아주머니는 먼 길 떠나는 자식에게 하듯이 밥을 수북이 담은 고봉밥 여러 그릇을 식탁에 갖다 놓으며 많이 먹으라고 권했다. 이에 감사한 마음을 담아 아주머니와 기념사진도 한 장 찍었다. 오전 6시가 되기 전에 출발했다. 구름이 약간 낀 날씨였다. 광치령로를 걸어 6시경 광치터널 입구에 도달했다. 터널을 지난 후에는 오르막길이 아니어서 걷기가 수월했다. 광치령의 표고는 약 800m이다. 양양 60㎞, 인제 12㎞라는 이정표도 보였다. 양구와 인제, 원통을 연결하는 광치령 인근에는 울창한 원시림이 조성돼 여러 개의 폭포와 계곡들이 있었다. 우리가 오늘 걸은 광치령 길은 잘 닦여진 왕복 2차선 아스팔트 도로였지만 광치령 옛길은 오솔길이었다고 한다. 이 길은 워낙 높고 험해서 보통 사람은 걸어서 넘을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이 길을 북한이 6·25전쟁을 준비하며 확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1994년에는 광치 터널이 준공돼 지금은 자동차로도 수월하게 넘을 수 있게 됐다. 필자가 1981년 초등군사반 교육 후 초임지 명령을 받았을 때 특히 중동부 전선의 백두산 부대와 을지 부대로 배치되는 동기들과 위로주를 마시던 기억이 났다. 그때 우리는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 할 것이라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옛날에는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라는 말도 있었는데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된 지금은 그런 말이 사라진 것 같다. 38선 이북에 위치한 인제군은 1945년 광복 이후 북한이 남침하여 6·25전쟁을 일으키기 전 까지는 북한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이 수복했다가 중공군의 개입 후에는 국군이 후퇴하여 북한에 편입되는 등 전쟁의 영향을 많이 받은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연합군은 1953년 5월 20일부터 반격작전을 전개했다. 홍천부터 진격해 소양강의 교량을 점령하면서 교두보를 확보했고, 이어 관대리와 인제를 탈환하고 6월 4일 원통리까지 북진했다. 이 전투로 중공군에게 빼앗겼던 인제와 현리 지역 등 중동부전선의 실지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고 산화한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1958년 합강리에 인제지구 전투 전적비가 건립됐고 1997년 인제군 남북리로 이전했다. 이 지역에는 합강리와 덕산리를 잇는 리빙스턴교가 있는데, 인제지구 전투와 관련한 아픈 사연이 있다. 당시 미2사단 포병연대에 소속돼 작전을 수행하던 리빙스턴 중령은 북방 2㎞ 지점에서 매복해 있던 적군의 기습을 받았다. 리빙스턴 중령은 덕산리에서 인북천을 건너 합강리로 후퇴하기 위해 도하를 시도했으나 폭우로 강물이 불어나 대다수 부대원들이 강을 건너지 못하고 적군의 총탄에 전사했다. 그도 중상을 입고 후송됐지만 끝내 세상을 떠났다. 야전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던 그는 ‘이 강에 다리가 놓여있었다면 이렇게 많은 부하들이 희생되지 않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을 말하고 미국에 있는 아내에게 ’사재를 털어서라도 인북천에 다리를 놓아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부인이 다리 건설에 필요한 기금을 희사해 1957년 12월 4일 길이 150m 폭 3.6m의 아이빔에 붉은 페인트를 칠한 목재 난간의 다리가 세워졌다. 이 다리는 리빙스턴 중령의 희생과 자유 수호를 기리는 상징물이 됐다. 아무런 생각 없이 내리쬐는 태양을 벗 삼아 맑은 공기를 마시며 즐겁게 걸었다. 가끔 꽃밭을 잘 가꾼 집도 보였다.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산과 계곡, 파란 하늘과 구름에 둘러싸인 산봉우리들은 아름다웠다. 산을 감싸고 흐르는 물줄기는 생명을 탄생시키고 산하를 기름지게 만들며 울창한 숲이 만드는 능선의 녹색 물결이 길을 걷는 우리들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준다. 우리 국토가 베풀어주는 편안함의 이치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스페인 까미노 길을 30여일 걸으며 만났던 넓고 끝없는 평원, 이집트에서 2년간 머물면서 경험했던 생명체가 존재할 것 같지 않은 황량한 사막이 떠오르며, 우리 국토는 ‘생명을 탄생시키고 편안함을 느끼게 만드는 녹색 산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설악을 품은 인제”라는 현수막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원통 읍내의 중국집에서 우동과 간짜장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많이 쉬었다가 일어났다. 을지회관으로 가는 도중 한사모 회원 중 특별한 인연이 있는 정전택님의 전화를 받았다.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 원통에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회관 입구에서 만나 반갑게 포옹했고, 그와의 인연이 시작된 과정이 떠올랐다. 필자는 2012년 4월 강원도 원주에서 열린 ‘100㎞ 걷기대회’에 처음 참가해 완보했다. 그 후 2017년까지 6년 연속 완보했고, 올해 다시 참가해 현재 7회를 완보했다. 100㎞ 완보는 엄청난 경험이었으며, ‘나는 100㎞ 완보 후 내 인생이 바뀌었다’라고 여러 사람들에게 얘기했다. 그리고 매년 주변의 지인들에게 함께 걷기를 권했고, 정전택님과는 그렇게 맺어진 인연이다. 그는 한사모 주말걷기 회원이었고, 매주 일요일 함께 걷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필자가 그랜드슬램 워커가 된 사실을 알게 됐다. 2013년 어느 날 그는 100㎞ 걷기에 도전한다고 선언했다. 나이를 고려해 부인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2014년 100㎞ 걷기대회에 참가해 거뜬히 완보했다. 그리고 그해 7월 ‘제주도 250㎞걷기 대회’와 9월 ‘군산 새만금방조제 66㎞ 걷기대회’에 참가해 여러 사람의 박수를 받으며 여유롭게 완보했다. 대한걷기연맹에서는 그에게 ‘2014년 그랜드슬램 워커’라는 타이틀을 부여했다. 그리고 그가 대한민국 최고령 그랜드슬램 워커라고 발표했다. 2014년 당시 그분의 나이는 77세였다. 정전택님은 “걷고자 하는 의지가 있고 충분히 준비하면 나이는 커다란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실천한 선구자였다. 정전택님과 우리들은 수다를 떨며 걷기와 관련한 여러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여기 걷고 있는 사람들이 몇 년 후에 다시 이 코스를 걸으면 좋겠다. 어쩌면 그때는 나이가 80이 넘은 사람도 있을 테니 그때는 ’6780 순례단‘이란 이름으로 걷자”라는 얘기도 했다. 어떤 분은 “젊은이들을 동참시키는 것도 의미가 있으니 40대가 포함된 4080단을 만들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현대인 중 적절한 운동 없이 건강 유지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면 아주 오랫동안 운동을 거의 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운동 부족으로 건강함을 잃어버리는 시대이기도하다. 그리고 건강을 얘기하면 건강관리를 말하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착각에서 벗어나 운동을 실천해야만 건강이 관리될 수 있다. 걷기는 모든 사람이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운동임이 분명하다. 남다르게 건강관리를 꾸준히 실천하고 있는 정전택님이 존경스럽다. 그리고 우리들이 가볍게 나눈 대화이지만 시간이 지난 다음에 어떤 형태로든 다시 한 번 더 이 길을 걸을 기회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저녁은 회관 식당에서 오리 백숙을 시켜 잘 먹었다. 정전택님은 다음날 우리가 먹을 햇반과 반찬, 포도주 팩 등을 가져오셨다. 걷기대회 경험이 많으셔서 그런지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맛있는 저녁도 사주셨다. 지면으로나마 다시 그 때의 감사했던 마음을 전한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11)] 한반도 중동부 전선 걸으며 전사자의 넋 위로하고 평화 기원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8월 26일, 종주 8일째에 접어들었다. 오늘은 숙소인 상승회관을 출발하여 풍산리, 해산터널, 해산령 정상, 비수구미, 평화의 댐, 오천터널을 거쳐 광치터널 입구까지다. 종주 거리는 약 60㎞이나 실제 걸은 거리는 40여㎞ 정도이다. 오늘 걸은 양구 지역은 한반도 중동부 전선의 일부분이며 을지전망대, 펀치볼, 제4땅굴, 도솔산 등이 있다. 숙소를 출발해서 조금 걷다 보니 ‘평화로’에 들어섰다. 460번 지방도인데 ‘평화로’라는 이름을 붙인 것 같았다. 어떤 의도로 부여된 이름인지 모르겠으나 ‘평화’ 라는 단어의 의미를 생각하며 걸었다. 한참 걷다 보니 해산터널 입구였다. 해산터널은 해발 702m, 길이 1,986m로 터널 입구에 “최북단, 최고봉, 최장 터널”이란 팻말이 있었다. 터널 내부의 보행자 길은 아주 좁아 차량들이 지나갈 때 다소 불안했지만 기온은 낮아 시원했다. 터널을 통과한 후 ‘아흔아홉의 구비길’이라는 팻말이 보였다. 가는 길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조금 더 걸으니 해산령의 ‘해오름 휴게소’가 보였다. 휴게소 앞 안내도에는 “해산 전망대, 비목의 고장 화천을 찾아주신 여러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곳은 화천에서 평화의 댐으로 가는 아흔 아홉 구비의 중간 길목으로서 남과 북을 잇는 민족의 명산인 해산 절경을 한 눈에 전망 할 수 있는 쉼터입니다”란 설명이 있었다. 이어 비수구미(秘水九美: 신비로운 물이 빚은 아홉 가지 아름다운 경치)라고 적힌 팻말을 지나 여러 구비를 돌아 평화의 댐에 다다랐다. 이 댐은 북한의 수공(水攻)에 대비하고 홍수도 예방할 목적으로 1987년 2월 착공하여 1989년 1월 1단계 공사(높이 80m)를 완료했다. 2002년부터 2단계 공사(높이 125m)를 다시 시작해 2005년 10월 마무리됐다. 댐의 길이는 601m이며 최대 저수량은 26억 3천만 톤이라고 한다. 평화의 댐은 많은 국민들의 성금으로 만들어졌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할 수 없지만 나도 평화의 댐 건설에 성금을 낸 기억이 있다. 바로 가까이 DMZ가 있고 남북이 대치하는 현실을 생각할 때 온 국민이 평화를 갈구하고 있다는 의미를 담아 이 거대한 구조물에 평화의 댐이란 이름을 붙인 것으로 생각됐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댐 아래로 보이는 파로호는 평화로웠다. 평화의 댐 상류 쪽에는 비목 공원이 있었고, ‘비목’의 노랫말이 새겨진 기념비도 있었다. 이 가사는 정전(停戰)된 후 10여년이 지나 백암산에서 근무하던 한명희 작사가가 지었다. 그는 치열한 전투로 화약 연기 가득했을 백암산 깊은 계곡에서 수많은 돌무덤과 오래되어 이름도 알 수 없는 많은 목비(木碑)를 보았고, 달밤에 순찰을 돌 때 ‘이름 모르는 전사자들의 절규가 들리는 것 같았다’며 산화한 젊은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했다. 어쩌면 사람들은 평화의 의미도 제대로 모르면서 평화 타령을 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국가의 안위와 평화를 위해 생명을 담보로 헌신하는 사람들이 군인이란 점은 분명하며, 6·25전쟁의 포성은 잠시 멎었지만 아직도 전쟁은 진행 중이다. 더 이상 한반도에서 전쟁이 없도록 대비를 잘하고 모든 국민과 후손들이 평화롭게 삶을 영위하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걸었다. 오늘 종주한 양구 지역에는 을지전망대, 펀치볼, 제4땅굴, 도솔산 등이 있다. 을지전망대는 양구 북방 27㎞, 군사분계선으로부터 약 1㎞ 남쪽 지점에 있는 가칠봉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북한 전방지역을 보려는 국민들이 꼭 들리는 안보관광지로서 날씨가 좋을 때는 금강산 비로봉과 4개의 봉우리(차일봉, 월출봉, 미륵봉, 일출봉)도 볼 수 있다고 한다. 펀치볼은 해발 400∼500m의 고지대에 발달한 분지이다. 1950년 전쟁 당시 양구군에 있는 가칠봉에 오른 연합군 종군기자가 봉우리에서 내려다본 지형이 마치 화채 그릇(Punch Bowl)과 비슷하다고 해서 불리게 됐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제4땅굴은 양구 북방 26㎞지점 DMZ 안에서 발견됐는데, 군사분계선과 불과 1.2㎞ 떨어져 있다. 이 땅굴은 1990년 3월 발견되었고, 땅굴 출입구에는 기념비와 안보 교육관 그리고 군견 ’헌트’의 동상이 있다. 헌트는 땅굴 추적과정에서 북한군이 설치해 놓은 지뢰를 밟아 산화하면서 여러 장병들의 소중한 목숨을 살린 공로가 있다. 헌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육군 소위로 추서됐고, 땅굴 입구에 동상을 세워 그 공로를 기리고 있다. 양구와 인제 사이의 험준한 산악지역인 도솔산에서는 1951년 6월 4일부터 19일까지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미 해병대 1사단에 배속된 우리 해병대 제1연대는 4,200명의 북한군을 상대로 치열한 육박전과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 24개 고지를 하나씩 점령하면서 전진했다. 고지 하나를 점령했다가 빼앗기고 또 빼앗는 전투를 반복하며 24개 고지를 6월 19일까지 완전히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 아군도 7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북한군 2,263명을 사살하고 44명을 생포했다. 산악전 사상 유래가 없는 치열한 대공방전으로 한국군 해병대 5대 작전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그 뒤 해병대에서는 ‘도솔산의 노래’라는 군가를 제정하여 그날의 승리와 용전의 기백을 후배 해병들에게 널리 알리고 있다. 평화의 댐을 약 3㎞ 지나 ‘평화쉼터’란 식당에서 오후 2시경 제육볶음으로 점심을 먹었다. 식사 후 근처의 바람골에서 흐르는 물에 발도 담그고 폭포도 구경하며 푹 쉬었다. 식당 사장님은 2남 1녀를 홀로 키운 여장부인데, 평화의 댐 건설 시 공사장에서 식당을 운영한 것이 계기가 돼 이곳에 자리를 잡았으며, 지금은 음식점과 가게 그리고 민박까지 운영하고 있다. 우리가 종주하던 그 해에는 피서객들이 상당히 많이 찾아 바쁘게 일했다고 했다. 바쁠 때에는 양구 방산면에서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는 큰 아들과 역도 선수인 둘째 아들, 그리고 시집간 딸까지 나서서 일을 거들어 준다고 했다. 여기서 양구까지는 민가도 없고 걷기에 너무 멀어 택시를 불러 이동할 계획이었는데, 마침 사장님 사위가 와서 우리를 양구까지 태워주었다. 오늘 숙소는 광치터널 입구 근처에 있는 컨테이너 숙소다. 비록 컨테이너지만 감지덕지한 마음으로 저녁을 맞이했다. 우리는 익숙한 장소, 사람, 음식 등으로 둘러싸인 심리적 안전지대에서는 마음이 편안하다. 하지만 안전지대 밖으로 한 발짝만 내딛으면 불편하고 괴로우며 난처한 일과 마주친다. 때로는 이런 모험에서 숨겨진 보물을 만나는 즐거움과 행복도 있다. 오늘 숙소 인근 휴게소에서 만난 두 손이 없는 심마니 아저씨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도 우리에게는 숨겨진 보물 같았다. 삶의 행로는 마음속에 정해놓은 여정과 일치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굳이 마음속의 시나리오에 자신의 인생 여정을 억지로 맞추기 보다는 삶의 과정을 좋아하여 전념하다 보면 만족할 수 있고 행복해 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실시간 인생 2막 기사
-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3)] 첫날 24㎞ 구간은 임진각에서 감악산 펜션까지
-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8월 19일 새벽 5시 30분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택시로 경의선 출발지인 공덕역으로 갔다. 6시 32분 문산행 첫 전철을 탔고, 전철 안에서 단원 전원이 합류했다. 그런데 전철로 이동 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허구 헌 날 내버려두고 우리가 출발하는 날 이렇게 비를 뿌리면 우리 걷기꾼들은 어찌 한 단 말입니까?” 이런 한탄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에 순응하면서 걸어야겠다”는 마음의 준비와 각오를 단단히 했다. 7시 40분경 문산역에서 택시를 타고 임진각으로 갔다. 임진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은 후, DMZ 종주단 4명은 330㎞ 대장정을 시작했다. 첫날 목표는 임진각을 출발하여 파주 적성에 있는 황포나루를 지나 감악산 펜션까지 약 24㎞였다. 임진각은 DMZ에서 남쪽으로 약 7K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남북분단의 비극적 현실을 상징하는 장소이다. 북녘 땅에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들이 고향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찾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DMZ는 국가가 자국의 영토임에도 국제법상 병력 및 군사시설을 주둔시키지 않을 의무가 있는 특정지역이나 구역을 의미한다. 한반도의 DMZ는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전쟁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의해 휴전됨으로서 생겨났다. 육상의 군사분계선인 MDL(Military Demarcation Line)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각각 2㎞씩 양국의 군대를 후퇴시키기로 약속하면서 만들어진 지역이다. 임진강 하구인 경기도 파주시 정동리부터 강원도 고성군 명호리까지다. 임진각은 분단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화해와 상생, 평화와 통일의 상징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임진각 주변에는 평화누리 공원이 조성돼 있다. 이 공원은 2005년 세계평화축전을 계기로 만들어졌으며 대형 잔디에 각종 볼거리와 작품들이 있다. “바람의 언덕” 아래로는 무지개 색으로 팔랑이는 바람개비가 많이 있다. 그 주위에는 자유의 다리, 평화의 종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고 6.25 전쟁 당시 각종 유물과 전쟁기념물도 있다. 망향의 노래비에는 1983년 ‘이산가족 찾기’의 배경 음악이었던 ‘잃어버린 30년’의 가사가 통일을 기다리며 서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그리웠던 삼십 년 세월 / 의지할 곳 없는 이 몸 서러워하며 그 얼마나 울었던가요 / 우리 형제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정 나누는데 /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 목 메이게 불러 봅니다 / 내일일까 모래일까 기다린 것이 눈물 맺힌 삼십 년 세월 / 고향 잃은 이 신세를 서러워하며 그 얼마나 울었던가요 / 우리 남매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못 다한 정 나누는데 /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 목 메이게 불러 봅니다.” 여정의 시작점이 있는 ‘평화누리길’이라는 도로 이름은 우리 DMZ 걷기꾼들이 염원하는 평화통일과 연관되어 있는 듯했고 이런 것들이 더해져서 어서 빨리 평화롭게 통일이 되기를 기원한다. ‘평화누리길’은 2010년 개장되었으며 총 189㎞의 길로 DMZ 접경지역인 김포시, 고양시, 파주시, 연천군 등 4개 시·군을 잇는 대한민국 최북단의 걷는 길이다. 우리는 파주 평화누리길 셋째 길에 위치하고 있는 임진각을 출발하여 마정리, 장산리를 지났다. 필자는 1980년대 중반 이 지역에서 중대장 근무를 했다. 이 지역에서 군 생활을 할 때 화창한 날 장산 전망대에 올라 북한의 송학산을 포함한 북녘 풍경과 임진강, 초평도 도습지를 한눈에 본 기억을 더듬었다. 이번 순례길에서는 그러한 정경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일정상 그곳을 지나쳐 화석정, 그리고 율곡리를 걸었다. 율곡리는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자 ‘십만양병설’로 유명한 율곡 선생의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그 중 대표적인 유적지로 ‘자운 서원’과 ‘화석정’이 있다. 서원은 조선시대에 유교의 성현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설립한 사설 교육 기관이다. 조선 중기 이후 정치적 혼란으로 여러 학자들이 지방에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게 됐으며, 이를 바탕으로 서원에서는 선배 유학자를 기리고 제사하는 사당의 기능까지 했다고 한다. 자운 서원은 1615년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됐고 이이의 위폐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화석정은 굽이쳐 흐르는 임진강의 절경을 한 눈에 감상 할 수 있는 정자로서 그가 벼슬에서 물러나 임진강을 벗하며 말년을 보냈다고 하며 지금은 이이 선생이 8세에 지었다는 ‘팔세부시(八歲賦詩)’라는 시가 걸려 있었다. 율곡리를 지나 좀 걷다 보니 전진교가 보인다. ‘천하무적 전진부대’에서 중대장을 할 때 수 없이 많이 통과했었던 다리이다. 전진교를 건너 초소에서 출입자 명부에 인적사항을 기록 할 때에는 어떤 돌발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긴장했었고 업무를 마치고 나올 때에는 별일 없음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곤 했던 기억이 난다. 두포 나들목을 지나 장파리의 리비교를 지난 후 황포돛배로 향한다. 리비교는 정전협정 직전 미군이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건설한 다리로 대전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미 공병대 리비 중사의 이름을 붙였다. 황포돛배는 조선시대의 중요한 운송수단의 하나였고 우리가 가는 그곳은 임진강 황포돛배라는 지명이며 그곳에 가면 그 배를 탈 수도 있는 곳이다. (4편에 계속)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
- 전역군인
- 인생 2막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3)] 첫날 24㎞ 구간은 임진각에서 감악산 펜션까지
-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2)] 사전 답사 통해 330㎞ 종주 계획 완성하다
-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DMZ를 따라 함께 걷기로 한 ‘DMZ 종주팀’을 구성 후 몇 가지 사항을 결정했다. 먼저 출발지는 문산 임진각, 최종 도착지는 고성 통일 전망대로 정했다. 코스를 이렇게 정한 이유는 한반도의 허리를 걷는다는 상징적 의미뿐만 아니라 휴전선 가까이 위치해 있어 분단의 아픔을 체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DMZ 종주 출발일은 8월 19일, 기간은 12일로 정했다. 아주 더운 혹서기를 피해 걷기에 좋은 계절을 선택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내가 전역하는 날이 9월말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기간을 정했다. 그리고 별도의 지원 차량이나 인원 없이 오롯이 4명이 배낭에 필요한 짐을 휴대하고 걷기로 했다. 잠자는 장소는 종주 코스 주변의 민간 숙박시설을 이용하되 그런 시설이 없는 지역에서는 군 숙박시설을 협조해 이용하기로 했다. 아침 식사는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컵라면, 초코파이 또는 에너지 바 같은 것을 준비하고, 점심과 저녁식사는 그날 걷는 코스에서 만나는 음식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이렇게 기본적인 방향을 정한 이후 실제로 매일 걸어야 하는 구간을 확정하기 위해 2013년 6월 13일부터 3일간 차량을 이용해 종주 구간을 사전 답사했다. 전 코스를 12일로 구분하여 하루하루 걸어야 할 이동로를 직접 확인하고 묵을 숙소를 찾아 예약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구체적인 이동로를 판단할 때에는 지역 행정관서에서 만든 관광지도를 사용했다. 걷는 길이 자세히 표시돼 있지는 않았지만 국도와 지방도가 명확히 구분돼 있는데다 지역의 명소들과 숙박, 음식점 등 관광과 관련된 정보들이 모두 포함돼 있어 여러모로 유용했다. 경기도 지역은 미개통 구간이 여러 곳 있기는 했지만 걷기 전용도로인 ‘평화누리길’을 주로 택했고, 강원도 지역은 경기도처럼 걷기 전용도로가 아직 없기 때문에 국도 및 지방도를 걷기로 했다. 어떤 구간에는 음식점이 아예 없는 지역도 있었다. 이런 구간에서는 어쩔 수 없이 초코파이나 에너지 바 등으로 점심 요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민간 숙박시설이 없는 지역에서는 군에서 운용하는 숙박시설을 이용했다. 당시 나는 전역을 40여일 앞둔 현역이었기에 군 숙박시설을 협조하기에 유리했다. 군 숙박시설을 사용할 수 없었다면 걸어서 DMZ 종주를 할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민족을 분단한 휴전선 155마일(약 250㎞)이라고 말하지만 실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약 330㎞에 달했다. 결국 하루 걷는 코스는 가용한 숙박시설의 위치를 고려하여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이동거리를 좀 길거나 짧게 잡을 수밖에 없는 곳도 몇 군데 생겼다. 이동거리가 긴 곳은 걷기에 많은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걸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을 갖고 정할 수밖에 없었다. DMZ 종주단을 상징하는 표식도 만들어서 배낭 뒤에 부착했다. 30여년이 넘는 군 복무를 하면서 수많은 훈련계획을 수립했었지만, DMZ 종주 계획을 만들면서 더 많은 고민을 한 것 같다. 걷는 사람들의 나이와 체력 상태, 예측하기 어려운 기상 등 여러 변수가 많았음에도 DMZ 종주 계획은 완성됐다. 단원들은 계획을 공유하고 걷기에 대한 의기를 투합했다. 단장을 맡은 나는 모든 계획이 실행 과정에서는 계획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부딪히는 상황에 유연히 대응해야 한다는 사실도 단원들에게 상기시켰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어떠한 결정도 단장이 혼자서 할 수 있다는 확답도 받았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
- 전역군인
- 인생 2막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2)] 사전 답사 통해 330㎞ 종주 계획 완성하다
-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1)] 우리는 왜 DMZ 종주를 결정했나?
-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내가 배낭을 메고 군사분계선(DMZ)을 따라 걸을 것이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DMZ를 종주하자’는 제안을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주말걷기 모임에서 만난 한 회원이 “안 대령이 금년에 전역하는데, 전역 전에 DMZ 종주를 하면 남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다”면서 “혼자 걷기 어려우면 동행하겠다”라는 제안을 했다. 많은 땀을 흘렸고 청춘을 불살랐던 그 지역. 군 생활을 할 때는 늘 바쁘고 긴장해야 했는데 전역을 앞둔 지금 걷는다면 여유롭게 과거를 뒤돌아보는 시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함께 하겠다는 그 회원의 말이 DMZ 종주를 결정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DMZ 종주는 엄밀히 말하면 DMZ에 인접한 길을 걷는 것이다. 이 길은 대부분 군부대의 허가를 얻어야 통과할 수 있는 민간인통제선(이하 민통선) 이남지역이지만 일부 구간은 민통선 지역이 포함된다. 따라서 현역 신분이 아니면 군부대의 협조를 받기도 어렵고 그 지역을 정확히 알지 못해 걷기를 계획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나는 당시 현역이었고 특히 민통선 구간은 내가 과거에 근무했던 부대였다. 60, 70대 아저씨들이 12일 동안 무거운 배낭을 메고 더운 여름에 330㎞를 걷는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최초에 제안한 회원을 포함하여 동행자를 구하는 것, 이들의 나이가 많으니 각자 가족의 허락을 받아내는 것, 실제 걸을 수 있는 거리를 판단하는 것 등 여러 가지 고민이 있었다. 그런 고민 끝에 드디어 4명의 인원으로 ‘DMZ 종주팀’을 구성했다. 이후 차량으로 종주할 지역을 사전에 답사하고 지역별로 숙소를 미리 정하는 등 나름대로 치밀한 준비를 했다. 그리고 건강을 해치면 안 된다는 전제 하에 통일을 염원하면서 전 코스를 완주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그 여정이 벌써 8년 전의 일이 되었지만 걷는 동안 만난 우리의 산하는 매우 아름다웠다. 하지만 여기저기 전쟁의 아픈 상처가 남아있어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걸으면서 육체적 어려움을 겪는 상황마다 슬기롭고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하는 5670 아저씨들의 위대한 잠재력도 돋보였다. 아직까지 중장년층의 국토순례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는데다 DMZ 종주라는 특별한 지역을 종주한 것이었기에 우리의 경험을 글로 남기는 것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쪼록 연재되는 이 글이 이런저런 이유로 새로운 시도를 망설이는 중장년층에게 특히 도움이 되길 바란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
- 전역군인
- 인생 2막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1)] 우리는 왜 DMZ 종주를 결정했나?
-
-
‘전역’ 그것은 과연 축복일까 테러일까?
- 시큐리티팩트 = 오청훈 job전문기자 전역을 앞두고 전직기본교육에 입교한 선후배 장교들에게 “나에게 있어서 전역이란 000이다”라는 질문에 답을 하게 해보면 대부분 ‘새로운 시작’, ‘휴식’과 ‘기쁨’ 등 긍정적이고 좋은 이미지로 답변을 한다. 그러면서 ‘나에게도 똑같이 물어봐 주시죠’라고 한다. 내 답변은 그들과는 사뭇 다르게 나온다. ‘나에게 있어서 전역이란? 개인에게 가해지는 일종의 테러였다’라고 과거형으로 답변을 하며 화면에는 2001. 9.11 테러 사진이 나온다. 대부분 수긍을 못하겠다는 표정들이지만 이내 공감하는 표정으로 바뀌게 된다. 전역으로 인해 화목했던 가정이 파탄의 지경까지 오가게 되었고, 경제적으로 위기가 찾아왔으며, 하루아침에 직장도 잃게 되는 것 이것이 개인차원의 테러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런 맥락으로 내 전직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게 된다. ▲ 9.11테러 사진( 청와대 위기관리센터장 강의자료 ) 아무리 힘겹고 어려운일도 지나면 추억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게도 이제 7년이나 지나버린 전역이 그러하다. 2010년 8월 경기도 파주 영어마을에서 소령 3차 진급발표 소식을 듣게 되었고, 결과는 비선이었다. 내심 기대가 컷던지라 실망도 컸다. 무엇보다도 수년간 내조를 해준 아내에게 미안함이 제일컸다. 얼마지나지 않아 아내의 권유로 예비군 지휘관 시험을 준비하기로 결정을 했고, 주말시간을 이용해서 영등포시장역 인근의 학원에 다니며 열심히 시험 준비를 하게 됐다. 하루 15시간이 넘는 시간을 투자해 가며 공부하던 내게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것은 시험에 한 두번 실패를 하게된다면 예비역 대위 신분으로는 5급 예비군지휘관 시험에 응시할 수 없게 제도가 개편이 된다는 소식이었다. 이러한 불안감은 내 자신감을 너무도 빠른시간에 꺽어버렸고, 그로인해 나는 시험준비를 중도에 하차하게 되었다. 되돌아 보면 이런 나의 결정이 모든 위기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결정을 아내는 좀처럼 이해하질 못했고, 관계는 점점 악화되어 결국엔 의정부 가정법원까지 오가게 되는 신세가 되었다. 갑자기 시험 준비를 포기하고 나니 정말 갈곳이 없었다. 불행중 다행으로 전직기본교육과정 중에 알게된 국방부 전직컨설팅에 참여를 하게 되었고, ㈜스카우트에서 운영하는 6주 프로그램과 커리어컨설턴트 양성과정을 동시 수강하게 되었다. 과정을 우수하게 이수한 결과 ㈜스카우트에 바로 취업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벌 수 있는 돈은 4인가족의 생활비로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고 전세대출금을 제외한 퇴직금 잔액과 국가보훈처 전직지원금, 회사월급을 포함해서 2011년 10월, 11월, 12월 생활비를 간신히 마련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내겐 2012년은 없었다. 하루하루 그리고 한 달을 무사히 살아내는게 일상일 뿐이었다. 이러한 뼈아픈 현실을 직시한 나는 벼랑 끝에 매달린 심정으로 내 일상의 모습부터 바꿔나가게 되었다. 남양주에서 강남역까지 운행하는 1100번 광역버스 첫차를 타기위해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하여 출근준비를 하였고, 매일 6시 30분경 회사에 도착하여 강의실과 사무실 정리를 포함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닥치는대로 해 나갔다. 하루하루를 정말 치열하게 보냈고 그런 모습이 애처로웠던지 입사후 두달이 되는 시점에 함께 근무하는 선배 컨설턴트로부터 현대산업개발 비상계획팀 계약직 과장 직위 응시 추천을 받아 첫 번째 전직을 하게 되었다. 민간기업 비상대비 업무와 민방위 업무를 배워가며 관련된 교육들을 이수하고, 예비역 소령진급, 민간 석사 추가 취득 등 실무형 스펙을 쌓아가던중 현재 회사의 채용공지를 접하고 전역후 23개월간 묵묵히 쌓아온 노하우를 이용해 두 번째 전직(정규직)에 성공을 하게 되었다. 사람은 직접 위기를 맞닥뜨려야만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진정한 힘을 얻는 것 같다. 물론 그 위기를 미리 감지하고 준비를 하면 좋겠지만 그게 생각처럼 쉽진 않은 것 같다. 테러와도 같았던 전역이 현재는 축복이 되었지만 그 누구도 직접 겪어보기 전엔 감히 그 어려움을 공감하진 못할 것이다. 산의 정상에 오르는 것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라면 산에 오르기전 베이스 캠프를 잘 차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산의 높이가 높을수록 더 많은 베이스 캠프가 필요할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씩 목표로 향하는 발걸음이 다소 무겁고 힘에 겹겠지만 중도에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생각보다 빨리 산 정상에 설 수 있을것이라 확신한다. 전직에 성공하는 방법은 단순 명료하다.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다음호에서는 베이스캠프에서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구체적인 노하우(전직 성공을 위한 7가지 비밀이야기)에 대해 전격 공개할 예정이다. 많은 관심과 구독을 바란다.
-
- 전역군인
- 인생 2막
-
‘전역’ 그것은 과연 축복일까 테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