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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안보역사의 산증인 홍일식과 故 박찬세의 우정 "자네와 함께 한 세상 호기롭게 잘 살았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60년 4·19혁명의 기폭제가 된 고려대 4·18의거의 주도자 박찬세 전 통일연수원장(고려대 교우회 고문, 향년 86세)이 코로나19 확진 후 입원 치료 중 6일 별세했다. 빈소는 11일 오후 5시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 303호에 마련되어 13일 오전 9시 발인 후 국립4·19민주묘지에서 영면에 들었다. 근세기 역사의 현장을 누비던 거목인 故 박찬세 전 통일연수원장이 영면에 들자, 박원장과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 두 거인(巨人)의 우정을 지켜보며 감동하던 언론사 대표를 지낸 이강식씨(고려대 후배)가 ‘남이 봐도 되는 日記’를 보내왔다. 이를 통해 역사의 현장에서 누구에게나 가슴을 활짝 열고, 따뜻이 맞이하는 巨人이자 약하고 음지에 있는 사람들을 더 많이 배려하는 大人이면서도 不義와 不敬을 용납 않는 단호한 포청천, 그래서 가는 곳마다 팬들이 북적이는 인기인이었던 故 박찬세 원장과 홍일식 전 총장 두 거인(巨人)의 우정 이야기를 공개한다. ■역사의 현장 속을 누비던 두 巨人의 감동적인 우정을 그린 ‘남이 봐도 되는 日記’ 전문 천학(淺學)인 데다, 과문(寡聞) 한 탓에 동서고금 인물들의 우정담(友情談)에 관해 아는 건 부처님과 마하가섭, 중국의 삼국지 삼 형제, 관중과 포숙, 그리고 우리나라의 유성룡-이순신, 다산-초의선사-추사, 익살맞은 치기로 우화를 남긴 오성-한음 정도일 뿐이다. 작심하고 찾아보면 꽤 있음 직도 하련만, 특히 근현대 산업화/민주화 이후 한국史에서 후세에 길이 전할 만큼 귀감이 될 '우정 교류' 얘기는 아쉽게도 얼핏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한밤에 볏단을 서로 옮겨쌓는 형제의 동화가 있다만, 그것은 同氣간의 정이니, 벗들의 우정과는 좀 다르다.) 개인주의, 물질만능주의 팽배가 원인이기도 하겠으나, '우정'에 대한 절대가치가 평가절하되고 있음은 아닐까. 말로만, 아쉬울 때만, 상대가 잘 나갈 때만 우정을 찾는 얍삭한 처세훈(處世訓)이 날로 보편화되어 그럴까. 헌데, 그런 시대 풍토에서도 이런 우정이 살아있더라. ■ 두 거인(巨人)인 박찬세 전 통일연수원장과 홍일식 전 고려대총장 한 사람은 '작은 거인'이다. 160cm가 채 안 되는 키, 말 그대로 단구(短軀) 임에도 누구나 그를 진정한 거인, '리틀 빅맨'이라 불렀으니. 또 한 사람은, 우선 외모로도 진짜 거인이다. 1950~60년대 靑年期엔 육 척 장신에 늠름한 어깨로 기골이 장대하다는 소릴 적지않이 듣기도 했단다. 두 사람 모두 '거인'으로 추앙되는 '참 이유'는 간명하다. 살아온 족적, 쌓아온 업적, 만인이 존경하는 인품 等等 족탈불급의 '큰 그릇'을 저마다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두 거인의, 부럽기 짝이 없는 '멋진 우정' 얘기를 남기고자 한다. 같이 걸으면, 누가 봐도 '언밸런스'라고 할 그들이 한 평생 우정의 꽃을 피우고, 지켜온 러브 스토리 -. 여문 작가가 소설로 엮으면 대박이 터지고 넘치리라. 1950년대 중반, 대학 저학년 시절에 만난 두 사람은 고대신문을 통한 글과 문장으로 서로의 존재를 알고, 첫 상면 순간에 '평생의 벗'으로 점지됐음을 느꼈단다. 이후 근 70년 동안, 찰떡같은 밀애를 이어온 것이니. 그들이 서로 '통하는 바'는 '민족'이었다고 한다. 법학도와 국문학도로 각자의 主전공은 달랐으나, 민족문제를 놓고 괴로워한 젊은이들의 심혼(心魂)이 韓민족의 분(憤)과 원(怨)과 한(恨)을 화두로 놓고 늘 분방한 담론을 펼쳤고, 그러면서 情을 쌓았더란다. 그 습관이 그대로 이어져, 米壽가 멀지 않은 지금까지 무슨 특별한 사안이 없더라도, 입과 귀가 심심할 때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전화를 걸거나 찾아가 만나서 수작(酬酌)을 곁들여 진지한 대화를 나누곤 했단다. 작게는 대소 집안일이나 주변 지인들 근황에서부터 민족, 나라, 인류의 미래까지 주제가 마를새 없었다고. 맛있는 먹거리, 귀한 술이 생겼을 땐, 가족보다 먼저 서로를 불러, 아이들처럼 둘이서 즐기곤 했다고도 한다. ■ 박찬세는 1960년 4월 고대신문 편집국장의 신분으로, 4.19의 도화선이 된 '고대 4.18 의거 선언문'을 쓰다. "질식할 듯한 기성 독재의 최후적 발악은 바야흐로 전체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만약 이와 같은 극단의 악덕과 패륜을 포용하고 있는 이 탁류의 역사를 정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세의 영원한 저주를 면치 못하리라. 동족의 손으로 동족의 피를 뽑고 있는 이 악랄한 현실을 어찌 방관하랴. 우리는 청년학도만이 진정한 민주역사 창조의 역군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여 총궐기하자." 이 기치를 들고 거리로 나선 노도(怒濤)의 고대생들이 그날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 시위를 마치고 귀교하던 중 깡패들에게 난타를 당하고 거리에 널브러져 있는 사진이 다음날 朝刊에 게재되면서 전 국민이 분연히 들고일어나 4.19 혁명의 큰 불길로 확산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박찬세는 졸업 한참 후, 그의 文才를 모셔간 정부에서 권력 핵심의 요직을 지내기도 했으나, 결국은 수구초심, 오랜 염원인 '민족통일'을 위한 기반 사업에 헌신했다. 통일원 15년, 그중 10년을 통일연수원장으로 일했으니, 오늘날 우이동 '통일연수원'이 그의 정성 어린 작품이다. ■ 홍일식은, 새삼 形言이 필요 없는 대한민국의 어르신 홍일식은 36년 동안 高大 '민족문화연구소'를 지켜오는 내내 오직 '민족문화'를 부여안고, 국학 중흥의 초석을 놓았다. <한국문화사 대계>, <한국 민속 대관>, <中韓대사전> 등 그의 손으로 탄생시킨 국학연구의 보배들이 즐비하다. 당연한 행로인, 민족고대 13代 총장이 되어 그가 보여준 인본(人本)과 공선사후(公先私後)의 탁월한 리더십은 명문 사학 경영의 전범으로도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玄民, 南齋, 그리고 芝薰을 열과 성으로 기리는가 하면 범국민을 대상으로 孝정신 함양 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가히 국학의 本山, 인문학의 巨峯이 바로 그다. ■ 그런 두 사람은 '닮은꼴'이 많다, "나의 벗 石岳, 자네와 함께 한 세상 호기롭게 잘 살았네. 곧 다시 만나기를 바라네" 누구에게나 가슴을 활짝 열고, 따뜻이 맞이하는 巨人 / 약하고 음지에 있는 사람들을 더 많이 배려하는 大人 / 그러면서도 不義와 不敬을 용납 않는 단호한 포청천 / 그래서 가는 곳마다 팬들이 북적이는 인기인이라는 점. 현모양처와 해로했고, 자식들이 성실하게 잘 자랐으며, 一家가 더 없이 화목한 점도 똑같이 닮았다. 석악(石岳) 박찬세, 가석(可石) 홍일식. 아호(雅號)에 '돌石'을 함께 지닌 것도 천연(天緣)이다. (두 사람은 만나기 이전부터 아호를 가졌더란다.) 다만, 가무 음곡에 있어서는 석악이 한 수 위라, 그의 청탁 불문 엄청난 주량과 흥겨운 시가(詩歌)는 그대로 신화가 되어 '高大夜史'에 전해오고 있으니... 때로, 두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들어본 적이 있다. "야, OO는 어떻고, OO는 네 말이 맞아." 평소 책이나 서간에선 석악兄, 가석兄 하던 분들이 둘만 있을 때 "야~, 자~" 하는 모습은 되레 보기 좋더라. 石岳이 팔순을 맞은 해, 어느 회고 글의 마지막 구절. "可石이 나의 친구라는 것이 무척이나 자랑스럽고 행복하다." 그런, 그들의 우정,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랴. 지난 3월 6일의 悲報 – ‘石岳 박찬세 급서(急逝)’. 아니, 이럴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보름 전만 해도 호방하게 폭탄주를 즐기시던 분이, 누구보다 산행도 잘하시고, 건강장수를 다짐하시던 분이 이처럼 허무하게 떠나시다니, 이렇게 황당할 수가... 두 거인의 우정의 끈, 한쪽 걸이가 떨어졌다. 그를 알고, 존경하고, 함께 지내온 모든 사람들에겐 진정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슬픔'이라. 오늘, 可石이, 몸을 추스르며, 석별의 情을 전한다. "나의 벗 石岳, 자네와 함께 한 세상 호기롭게 잘 살았네. 곧 다시 만나기를 바라네. 可石 洪 一 植 읍소" 비통(悲痛)을 넘어 오관(五官)이 먹먹하다. 이제 누구에게서 '감식초酒'를 마셔볼 수 있을 거나. 한 분의 거인만이라도 오래 우리 곁에 남아계셔서 두 분의 우정담을 간간히 들려주시길 소망할 뿐이다. 근데, 아무래도, 지금... 눈물이 자꾸 앞을 가려, 자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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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합
    2021-03-18
  • 서욱 장관, 故 변희수 전 하사 관련 "트랜스젠더 군 복무 연구 필요" 밝혀
    [시큐리티팩트=김한경 기자] 서욱 국방부 장관은 16일 성전환 후 강제전역 조치된 고(故) 변희수(23) 전 하사와 관련해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 문제에 대한 정책 연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서 장관은 국회 국방위에서 '국방부가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 성전환수술 비용 지원 등과 관련해 연구를 한 사실이 있느냐'는 더불어민주당 김병주 의원의 질문에 "아직은 없는데 이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 장관은 미국이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를 허용하는지에 대해서는 "트럼프 정부에서 안 됐다가, 바이든 정부 들어와 (허용)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서 장관은 "30개국 정도가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를 허용하고 있고, 이스라엘은 안보 환경이 우리나라와 비슷한데도 허용된다"는 김 의원의 지적에 대해 "정부마다 다른 상황"이라고 답변했다. 고(故) 변희수(23) 전 하사는 2019년 휴가 중 외국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고 돌아와 계속 복무를 희망했으나 육군은 규정에 따라 심신장애 3급 판정을 내리고 지난해 1월 전역을 결정했다. 전역 조치된 후 지난해 8월 육군을 상대로 복직 행정소송을 진행하던 중 지난 3일 오후 청주시 상당구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 전역군인
    • 종합
    2021-03-16
  • [팩트포토] 정광식 예비역 대령-신원식 의원, “故 이재수 장군 명예회복 촉구” 1인 릴레이 시위…입춘한파 속 우정
    [시큐리티팩트=김상규 기자] 정광식 예비역 대령과 신원식 국민의힘 의원이 입춘한파 속에 지난 2일부터 청와대 앞에서 '故 이재수 장군 명예회복 촉구'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였다. 특히 정광식 예비역 대령은 이재수 장군과 육사37기 동기로 이 장군이 53사단장 시절 같은 부대의 부사단장이었다.
    • 전역군인
    • 종합
    2021-02-03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57)] ‘무소불비 무소불과(無所不備 無所不寡)’와 ‘피실격허(避實擊虛)’는 전쟁에서의 선택과 집중을 강조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손자병법 ‘허실(虛實)’편의 ‘무소불비 무소불과 (無所不備 無所不寡)’는 “준비가 부족한 곳이 하나도 없게 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다”라고 풀이된다. 즉 “전부를 다 완벽하게 준비하는 것은 전부가 부실하게 된다”는 뜻이다. 또 ‘피실격허 (避實擊虛)’는 “적의 강한 곳을 피하여 약한 곳을 공격한다”라는 뜻으로 선택과 집중, 집중과 절약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무소불비 무소불과(無所不備 無所不寡)’와 ‘피실격허(避實擊虛)’는 전쟁시 피아가 치열하게 전투를 할 때 전략 및 전술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허나 평시에는 사단 책임지역내 심심산골에 인적이 드문 지역이 산재되어 있어 그곳에서 침투한 간첩들이 은거해 활동할 수 있기 때문에 취약지로 분류해 관리를 하고 있다. 그래서 집중과 절약을 해야 한다는 손자병법의 의미와 상충되는 전 지역을 커버하는 취약지 관리가 필요했다 이러한 취약지역에 소대 또는 중대 단위로 상주하면서 주변 수색정찰도 하고 매복 및 전술훈련을 하면서 병사들의 훈련 수준도 배양하고 침투한 간첩 및 불순세력의 은거도 거부하는 ‘취약지 상주훈련’을 시행했다. 통상 ‘취약지 상주훈련’을 시행할 때에는 부대의 지휘권을 벗어난 타지역에서 해당 소·중대장의 독단적 판단에 의한 행동이 요구되어 반드시 차상급 지휘관에게 훈련계획을 사전에 보고했다. 필자도 사전 토의와 현장 확인을 통해 1주일간의 취약지 훈련계획을 준비하여 보고하자 연대장은 해당 지역이 격오지로 도로도 불량하여 이동 및 소통에 제한이 많기 때문에 적 접촉시 작전조치와 폭우 피해 및 환자 발생 등 우발상황에 철저히 대비하며 병력관리를 잘하라는 지침을 받았다. ■ 장거리 행군에 따른 허기 심해, 설익은 밥도 꿀맛 훈련출발 당일 먼저 선발대를 보냈다. 취사장 설치와 통신선 개설을 위해 중대 행정보급관(인사계)가 취사병, 통신병들을 대동하여 4분의 5톤 통신차를 타고 화천군 백적산(883.5m) 북방 구운리 만산동 계곡으로 출발했다. 군장검사를 마친 중대원들은 취약지역인 만산동 계곡까지 30km행군을 시작했다. 다행히 이규환 연대장님이 평소 행군과 태권도를 강조하여 매주 행군 훈련을 했던 덕분에 병사들은 행군에 익숙해 있었다. 필자는 전방 GOP연대 소속이었으나 이번 ‘취약지 상주훈련’ 장소는 사단 후방 인접사단과 근접한 지역으로 최전방 부대가 사단 책임지역의 최후방으로 이동하여 훈련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행군이 시작되었다. 중대원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관불령을 넘어 신월동과 삼거리라고 불리는 봉오리를 통과해 다시 덕고개를 힘차게 넘었다. 필자가 근무한 지역은 첩첩산중(疊疊山中)이라는 단어가 꼭 맞는 산악지역이라 조금만 이동해도 길옆에 절벽과 벼랑 등 아찔하게 만드는 고개들이 산재해 있다. 행군 간에는 통상 50분 걷고 10분 휴식한다. 그러나 시간이 되어도 아찔한 벼랑 옆에서는 휴식을 하는 것이 위험하여 그나마 비교적 평탄한 곳을 정해야 했다. 쉬고 있다가 자칫 계곡 및 벼랑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중대 행정보급관과 취사병들이 선발대로 투입된 탓에 점심은 주먹밥으로 대체했다. 행군 간에는 배가 든든해야 잘 걸을 수 있는데 허기가 지면 낙오할 수도 있어 건빵을 추가로 휴대했지만 20대 청년들의 허기를 채울 수는 없었다. 오후 늦게 만산동 골짜기에 도착했다. 군장을 풀고 바로 주변 능선에 소대별로 개인 텐트를 설치하며 숙영준비를 했다. 그때 먼저 도착해 준비한 저녁식사가 분배되었다. 야전에서의 취사에 숙달되지 않은 취사병들이라 설익은 밥이었지만 꿀맛이었다. 미식별 천연동굴서 은거흔적 발견, 불온전단 회수하고 독립가옥 신원확인 박영일 중령의 노마지지(老馬之智), 정확한 취약점을 찾아내 “마음은 언제나 태양..!”, 의기에 차 정열을 불태웠던 시절 중대 상황실 텐트에 당직 소대장을 근무시키고 야간 야외점호를 한 뒤 취침에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일조 점호 후에 계획된 주변 취약지역 수색정찰을 시작했다. 모든 일에는 분명한 결과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소대장들에게 경쟁을 붙였다. 각자의 수색 책임지역에서 미식별된 은거가능한 천연동굴이나 은거 흔적을 찾으라고 했으며 북에서 뿌려진 불온전단을 가능한 많이 회수하고, 심신 산골에 홀로 있는 독립가옥은 필히 방문해서 신원을 확인하도록 강조했다. 각 소대를 수색정찰에 투입시키고 숙영지 텐트 상태를 재점검하고 있는데 멀리서 짚차 한대가 오는 것이 보였다. 사단 작전참모 박영일 중령(육사25기, 소장 예편)이었다. 필자는 취약지 상주훈련 계획과 현재 각 소대가 수색정찰 중임을 설명하면서 숙영지를 안내했다. 그런데 사단 작전참모는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 훈련 계획은 잘 수립했으나 취사장 위치가 잘못 되었다며(상단의 만산동계곡 사진을 참고로) “숙영지와 분리하여 계곡 건너에 취사장을 설치하면 만약 집중 호우 발생시에 계곡물이 불어나 식사추진 및 철수시 위험할 수 있으니 조정하라”는 것이었다. 각 텐트는 능선쪽으로 올려 있어 안전하지만 취사를 위해 급수가 용이한 물이 흐르는 계곡 건너에 설치된 취사장의 안전 취약점을 지적하며 추가로 사단에서 만산동으로 이동하는 도로가 부실하니 도로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는 지시를 하고는 어깨를 두드리며 현장을 떠났다. 작전참모는 그해 가을에 대령으로 진급하여 사단의 참모장을 거친 뒤 훗날 인접 연대장으로 취임했다. 필자보다 선배로서 지내온 많은 군생활 경험이 정확한 취약점을 찾아냈다. 노마지지(老馬之智)라는 사자성어처럼 선배는 역시 선배였다. 필자는 유선으로 대대장에게 작전참모의 방문과 지적 및 추가 지시사항을 보고했고 대대장은 즉시 시정 후 훈련에 임하라고 강조했다. 오후가 되자 소대별로 복귀를 했다. 역시 결과 위주의 훈련을 강조한 탓에 수개의 은거 가능한 천연동굴을 찾아냈고, 많은 불온전단들을 수거하는 성과도 올렸다. 저녁 식사 준비시간인 자유시간에는 아직 유단증을 못 받은 중대원들을 모아 태권도 교육도 병행했다. 주둔지가 아닌 야외라는 것이 오히려 저조자들에게 개별지도를 할 수 있게 되어 차후 심사를 대비한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날이 저물자 야간 분·소대 전술훈련도 했다. 다음날부터는 작전참모 지시대로 사단본부까지 도로 보수도 병행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타중대와 함께 대대장의 통제를 받는 것을 벗어나 중대 단독으로 훈련을 하는 것이 상급 및 인접 부대의 눈치를 안보게 되어 더 효과적인 훈련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훈련 마지막 날 밤이 되었다. 점호 후 전 중대원이 텐트로 들어가 취침을 하고 약간의 시간이 지났는데 당직 소대장이 보고할 것이 있다고 해서 상황실 텐트로 나갔다. 소대장들이 모여 있었다. 책상에는 약간의 더덕이 놓여 있었고 잠시 후 행보관이 막걸리를 가지고 들어왔다. 잠시 망설였으나 모처럼의 자리라 합석을 하였다. 소대별 수색활동시 전단과 함께 수거한 자연산 더덕 안주에 들이키는 막걸리가 너무도 좋았다. 더불어 그동안 함께 근무하면서 느꼈던 보람과 애로점들을 서로 나누며 한마음으로 단결될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칼럼을 쓰는 지금, 중대장시절 그때 고락을 함께했던 소대장 김태정, 우광호, 변상훈, 이동호들의 의기에 찼던 그때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마음은 언제나 태양..!”구호 아래 한마음이 되어 항상 신나고 즐겁게 정열을 불태웠던 시간이었다.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0-12-15
  • 한국수력원자력·원자력안전위 등 사이버공격 지속 발생 및 증가 추세
    ▲ 지난 2014년 12월 30일 조석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이 국회에서 열린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원전 사이버 공격 관련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사진제공=연합뉴스] 신용현 의원, "최근 10년간 한수원 인터넷망 사이버 공격 시도 1,366건" 송희경 의원, "5년간 원자력안전위 및 산하기관 사이버 공격 시도 268건"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국내 원자력발전소를 운영하는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에 대한 사이버 공격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또 원자력안전위원회 및 산하기관에 대한 사이버공격 시도도 증가하고 있어 대비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6일(일) 바른미래당 신용현 의원(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간사)이 한수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최근 10년간 한수원 인터넷망 해킹시도 현황’ 자료에 따르면 악성코드 공격, 자료훼손 및 유출, 홈페이지 공격 등 총 1,366건의 사이버 공격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사이버 공격 시도 유형을 보면, △악의적으로 사용자에게 피해를 주는 프로그램인 ‘악성코드 공격’이 835건으로 가장 많았고, △비인가자가 홈페이지 접속 후 자료를 삭제 또는 변경하는 ‘홈페이지 공격’이 329건 △일명 D-DoS로 불리는 ‘서비스 거부 공격’ 111건 순이다. 그 외에도 자료훼손 및 유출, 비정상 사용 등 다양한 공격이 시도됐다. 한수원 인터넷망에 대한 사이버공격은 2012년 515건이었으나 2016년 145건, 2017년 104건, 2018년 62건 등 지속적으로 감소 추세이다. 또 최근 3년간 공격이 이뤄진 국가별 현황을 보면 우리나라(151회)를 제외하고는 중국(62회)이 가장 많았다. 신용현 의원은 “10년 간 1,300건이 넘는 사이버 공격 시도가 이뤄진 것을 볼 때 국가기밀 유출, 원격제어 등의 위협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한수원이 사이버 공격에 대한 철저한 대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한수원은 원전을 운영하는 사업자로서 단 한 번의 사이버공격만으로도 국민안전과 국가안보에 치명적 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며 “한수원 등 정부당국은 보안시스템 강화, 전담인력 확충 등 사이버보안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자유한국당 송희경 의원이 원자력안전위원회와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 한국원자력안전재단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5년부터 올해까지 이들 기관에 대한 사이버 공격 시도가 총 268건 발생했다. 이 중 202건이 원자력안전위를 대상으로 발생했다. 연도별로는 2015년 32건, 2016년 25건, 2017년 51건, 2018년 63건이었고 올해는 9월까지 97건으로 나타났다. 송 의원은 원자력안전재단의 경우 2015년 방사선 작업종사자 약 19만 명의 정보가 담긴 '방사선작업종사자종합정보시스템'(RAWIS)이 D-DoS 공격용 악성코드 3개에 감염됐는데 4년이 지난 올해 5월에야 발견됐다며 대응이 미흡함을 지적했다. 이들 기관의 자료전송 현황 관리도 제각각이다. 올해 원자력안전위의 업무망 자료가 외장메모리로 전송된 건수는 약 72만 건에 달하는 반면,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은 업무망에서 외장메모리 사용을 차단하고 있다. 원자력안전재단은 현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송 의원은 "원자력안전위 및 산하 기관에 대한 사이버 공격 시도는 2015년 대비 올해 3배가량 급증했지만, 사이버보안 전담 인력은 1∼2명뿐이고 대부분 겸직"이라며 "보안 전담인력 확충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어 "국내 원자력 안전기관에 대한 사이버 공격은 원전 기술 경쟁력은 물론 국민 안전에도 치명적인 위협요인으로 작용할 우려가 큰 만큼 면밀한 현황 점검과 철저한 대비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 전역군인
    2019-10-07
  • [김희철의 Crisis M] 봉오동·청산리 전투 영웅들의 엇갈린 회한(하)
    ▲ 좌측부터 독립군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 대한독립군 사령관 홍범도, 의열단장 김원봉 사진 [사진출처=보훈처/동영상 캡처]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 만주 간도 한인 마을과 농장을 불태우는 만행 자행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컬럼니스트]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의 만행에 의한 간도 주민들의 희생을 뒤로 한 채, 간도와 연해주 지역에 있던 무장 독립군들은 러시아의 알렉셰프스크(자유시)로 집결했다. 이유는 강대국 러시아가 독립군을 지원해 준다면 일제를 상대하기 더 쉽고, 흩어져 있던 독립군들이 하나로 모이면 더 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21년 6월 28일,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파쟁을 불러일으켜 한국 무장독립운동 사상 최대의 비극적 사건인 ‘자유시 참변’ 또는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 불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나로 집결한 부대의 지휘권을 놓고 지도자들끼리 싸움이 벌어져 두 파로 나뉜 독립군 중 한 파가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의견이 다른 독립군을 배신하고 말았다. 알렉셰프스크에서 3마일 떨어진 수라셰프카에 주둔 중인 한인 부대인 사할린 의용대를 러시아 적군(혁명군) 제29연대와 한인보병 자유대대가 독립군의 해산을 요구하며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서로 충돌 것이다. 이 과정에서 960명의 독립군이 죽고, 1800여 명이 실종되거나 포로로 잡히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우리끼리의 싸움으로 이렇게 많은 동지들이 죽게 되자, 사건과 관련된 지도자들은 미안한 마음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해외로 망명해 살게 되었다. 김좌진장군,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다가 공산당 청년회 박상실의 흉탄에 순국 홍범도장군, 러시아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으로 카자흐스탄에서 초라한 말년 한편 항일무장투쟁 독립운동의 영웅인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 전투 이후, 헤이룽강 부근에서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여 부총재를 역임하였고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성동사관학교를 설립, 부교장으로 독립군 간부 양성에 주력했다. 또한 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 개간, 문화계몽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당 청년회 김봉환의 감언이설에 빠진 박상실의 흉탄에 맞아 불혹인 40세의 나이에 순국하였다 청산리·봉오동 전투의 또 한명의 영웅인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장군도 ‘자유시 참변’을 겪은 뒤 항일 무장투쟁활동을 접고 이르크츠크로 이동하였다. 왜냐하면 홍범도장군은 봉오동 전투의 영웅이었지만 일찍 사회주의 단체 결성도 주도했고 뒤에는 적군에 가담하여 독립군을 와해시킨 책임을 느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는 자유시 참변때 주도권을 쥐려고 러시아로 귀화해 러시아 적군과 손잡고 군사 주도권을 위해 따르지 않는 부대들 학살에 가담해서 독립군을 와해시켰다. 또한 사변후 홍범도장군은 재판관으로 참여해서 독립군들을 재판했던 것에 책임을 느끼는 회한이 있었을 것이다. 이후 연해주에서 콜호스(집단농장)를 차려 농사를 지으며 한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 노력을 했었다. 그는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하여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됐다. 이곳에서 극장 야간수위,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며 초라한 말년을 보내다 1943년 76세로 사망하였다. ▲ 의열단장 김원봉 사진 [사진출처=보훈처/동영상 캡처] 김원봉은 북한 국가검열상으로 ‘6·25 전쟁’ 주도, 전후 '팽' 당해 숙청 또다른 항일무장투쟁의 영웅인 의열단장 김원봉(1898~1958)은 최근 정부에서 보훈자 선정을 추진 하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인물로 무정부주의(아나키스트) 무장투쟁노선의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경남 밀양(密陽)에서 태어나 중국 난징[南京]의 진링[金陵]대학에 입학하여 망명생활을 하다가 1919년 12월 의열단을 조직하고 국내의 일제 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경찰서 등에 폭탄을 투척 파괴하고, 친일 및 일본군 암살 등 항일 무장투쟁을 하였다. 또한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에서 중국 관내지역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하였고 중국국민당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라는 군사조직을 편성하기도 하였다.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하였으며,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을 지내다가 8·15 광복 후 귀국하였다. 그런데 ‘조선의용대’ 후신인 중국 인민해방군의 조선의용군(5만명)은 ‘6·25남침전쟁’ 직전 북한에 들어가 인민군 전력의 3분의 1 규모를 차지했다. 평양방어사령관을 맡은 무정을 비롯해 5사단장 김창덕, 6사단장 방호산, 12사단장 전우 등 인민군 장성 50% 정도가 조선의용군 출신이었다. 6·25 새벽 남침한 북한인민군 연대 21개 중 47%인 10개 부대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용군 입북은 "김일성으로 하여금 남침 전쟁 도발 결심과 전쟁 승리의 확신을 심어준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주장했다. 김원봉은 해방 이후 남북협상 때 월북하면서 사회주의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1948년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이 됐고, 같은 해 9월엔 북한 초대 내각의 국가검열상(국방부장관)에 올랐다. 6·25 남침전쟁 때는 군사위원회 평북도 전권대표로서 후방에서 북한군의 군량미를 생산하는 일을 했다. 1952년 5월 국가검열상에서 노동상으로 임명되기도 하며 남침전쟁의 주역이 됐다. 그러나 ‘6·25남침전쟁’이후 1958년 11월 김일성 비판을 제기한 연안파 제거작업 때 숙청됐다. 정부는 1962년 항일 무장투쟁의 영웅인 김좌진, 홍범도 장군에게는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원봉은 항일 무장투쟁 업적은 인정되지만 대한민국 건국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어 제외되었고 우리 헌법에 반하는 행동을 하여 동족을 비극에 떨어뜨린 위법자로 추락했다. 특히 김원봉은 6·25 남침전쟁을 일으킨 인민군의 중심에 그가 있었고, 천만 이산가족과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우리민족 동족 상잔의 비극 역사를 만든 주역이 되었다. 비극의 역사 반복 막도록 철저한 안보의식 고취와 자주국방태세 강화 지난 24일 북한은 새벽 함경남도 선덕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새로 연구 개발한 초대형 방사포' 2발을 최고 고도는 97㎞, 비행거리는 약 380여㎞으로 시험 발사하면서 금년에만 9차례의 미사일을 발사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미국의 압박으로 발사하지 못하면서 남한을 사정거리에 두고 위협하는 ‘초대형 방사포 및 단거리 미사일’은 거리낌 없이 발사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북한중앙통신에서 "우리의 힘을 우리가 요구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굴함 없는 공격전을 벌려 적대세력들의 가중되는 군사적 위협과 압박 공세를 단호히 제압 분쇄할 우리 식의 전략전술무기 개발을 계속 힘 있게 다그쳐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이 이야기한 "우리의 힘을 우리가 요구하는 수준”이란 강대국 미국과는 협상으로 시간을 벌면서 남한을 목표로 노후된 1,000여기의 노동미사일을 대체하여 남한 전역을 사정권에 포함시킨 ‘초대형 방사포 및 단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존하는 위협은 해방 후, 김원봉이 오판해 김일성을 도와준 결과이기도 하다. 게다가 우리 정부는 이것이 안전보장이사회 의결사항 위반이 아니라고 북한편을 들고 있다. 항일무장투쟁의 영웅들이 대한민국 건국훈장에 추서되어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도 되지만, 한 순간의 오판으로 민족역사의 위법자가 되고, 천만 이산가족을 만들며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동족상잔의 비극을 만든 주역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한다. 이런 와중에 우리는 항일 무장투쟁 영웅들의 엇갈린 회한이 담긴 삶의 마무리 과정을 돌아보며 가슴이 절여오는 안타까운 심정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 후손들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 우리는 비극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철저한 안보의식 고취와 함께자주국방태세 약화를 막아야 한다. 끝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 전역군인
    • 전문가 분석
    2019-09-02
  • [전역군인 인생 2막] (4) 김종두 ‘정약용 문화교육원’ 상임이사(하), ‘효’학 교수로 기반 다져 민간의 효 문화 기수로 나서
    ▲ 지난 1일 정약용문화교육원 정기총회가 끝나고 참석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김종두 상임이사(앞줄 왼쪽에서 다섯 째). [사진제공=김종두 이사] 뉴스투데이는 군에서 장기간 복무 후 전역한 직업 군인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인생 2막’을 새롭게 펼쳐나가는 성공 사례를 소개함으로써 전역 예정 장병들의 미래 설계는 물론 다른 직종에서 퇴직한 분들의 인생 후반부 준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전역군인 인생 2막’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김종두 이사, “효교육에 특화된 명품 부사관학과 키워 졸업생 90% 임관”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2009년 33년의 군 복무를 마치고 전역한 김종두 상임이사는 육군에서 충·효·예 교육을 담당하던 시절 강사로 초빙돼 인연을 맺은 홍우준(洪禹俊) 경민학원 이사장의 요청으로 의정부시에 위치한 경민대학에 부사관학과인 ‘효충사관과’를 만들게 된다. 홍 이사장은 약관 21세 때 공산당이 싫어 부모와 가족을 북한 땅에 남겨두고 단신 월남하여 수많은 곡절 끝에 경민학원을 설립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런 연유로 그는 부모 사랑(孝)과 나라 사랑(忠)에 기초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철학을 갖게 됐고, 자신이 설립한 경민대학교에 ‘효’와 ‘충’을 가르치는 학과를 만들 생각을 했다. 홍 이사장은 그 학과를 만들어 이끌 적임자로 일찍이 김 이사를 점찍어 두고 있었고, 이런 그의 바램은 김 이사의 전역으로 현실화 됐다. 당시 김 이사와 논의하던 그는 효심과 애국심으로 무장한 교육자 양성의 의미로 ‘사(師)’자를, 공직자 양성의 의미로 ‘관(官)’자를 넣은 ‘효충사관과(孝忠師官科)’로 학과 명칭을 정했다. 홍 이사장은 김 이사에게 어떻게 하면 학생을 모집해서 그런 인재를 육성해 낼 수 있는지를 물었고, 김 이사는 “군 초급간부를 양성하는 부사관학과로 특성화하면 군대와 나라에 모두 도움이 되는 명품학과가 될 것”이라고 답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김 이사는 5년 동안 효충사관과를 맡아 학과장으로 재직했다. ▲ 효충사관과 학생들이 제복 착복식을 실시한 후 김종두 학과장(앞줄 맨 왼쪽) 및 학교 관계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제공=김종두 이사] 김 이사는 부사관이 병영에서 초급 ‘지휘자·교육자·관리자’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에 착안해 인근의 65사단과 업무협약을 맺고, 현장 실습을 통한 부하 상담 및 관리 요령 등을 가르쳤다. 또 인근의 사회복지시설에서 토요일마다 장애인 목욕 및 식사, 산책 등을 돕는 봉사활동을 함께 하면서 인성 함양에도 주력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그동안 효충사관과 졸업생들은 90% 이상이 육·해·공군의 부사관(군 공무원)으로 임관했고, 이 가운데 매년 3∼6명씩 3사관학교에 합격해 장교로 임관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전통이 이어진다면 효충사관과 출신 영관장교가 나올 날도 멀지 않았다. 경민대와 성산효대학원에서 ‘효행교육지도사’ 5000명 배출 앞장서 김 이사는 학과장으로 재직하던 2011년 효인성교육의 기본서 시리즈 1권인 ‘효패러다임의 현대적 해석’을 저술했고, 이어 2012년 2권인 ‘새로운 패러다임의 효 교육’과 3권인 ‘효와 소통의 현대적 리더십’ 등을 출간했다.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준비했던 내용들을 책으로 엮은 것인데, 효학 개론 성격으로 집필한 ‘효패러다임의 현대적 해석’은 3판 째 출간했다. ▲ 김종두 교수가 발간한 효인성교육의 기본서 시리즈 1, 2, 3권. [사진제공=인터파크] 이후 김 이사는 은사인 최성규(崔聖奎) 총장의 요청으로 경민대에서 성산효대학원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5년간 기획처장 및 효학과 교수를 맡아 강의하면서 효를 학문으로 특성화하는데 주력했다. 또 효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통해 대중의 인식을 전환하고, 인성교육·리더십·사회복지 등 인접 학문과 융합하는 노력도 기울였다.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으면서 기존에 출간한 효인성교육의 기본서 시리즈 1, 2, 3권을 인성교육과 융합해 기본서 시리즈 4권인 ‘인성교육의 이해와 실제’를 2018년 출간했다. 한편, 김 이사는 경민대 재직 시절에는 경민대학 총장 명의로, 성산효대학원 재직 시절에는 성산효대학원 총장 명의로 각 지방별 ‘효행교육지도사 자격과정’ 강의를 통해 5000여명의 효지도사 배출에 앞장섰는데, 이렇게 양성된 지도사들은 지역별 초·중·고등학교에서 효를 가르치는 활동을 하고 있다. ▲ 김종두 교수(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지난해 12월 제5기 효행교육지도사 수료식 후 학생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제공=김종두 이사] 인생 2막 성공 비결, “군대 업무 잘하면서 제2의 영역 미리 개척해야” 또한 그는 육군대학 교관시절에 다녔던 서당의 훈장 선생님이신 박성기(朴聖琪) 한학자와 육군의 충·효·예 교육을 함께 담당했던 민병돈(閔炳敦) 전 육사교장, 그리고 박사학위 과정의 은사이신 최성규 성산효대학원대학교 총장 등 3분을 평생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 금년 3월 그는 성산효대학원대학교를 떠나 2007년부터 이사로 활동해오던 정약용문화교육원(남양주시 소재)의 상임이사로 부임했고, 정약용 선생의 생가와 묘소가 위치한 남양주에서 ‘정약용 선생 바로 알리기’ 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수도권의 많은 사람들이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인 강진까지 가지 않아도 ‘효에 기초한 애국·애민정신’을 알 수 있도록 다양한 문화교육 사업도 기획하고 있다. 특히 유네스코가 2012년 정약용 선생을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으므로 남양주시 마재 마을에 살았던 정약용 선생을 세계적 인물로 알리기 위해 ‘아름다운 마재 마을 가꾸기’ 사업도 계획하고 있다. 전역을 앞둔 후배들은 그에게 묻는다. 인생 2막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냐고. 그럴 때마다 그가 해주는 말은 “군대 밖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 그 분야를 공부해 전문성을 쌓으면서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라”고 주문한다. 그는 “군대 업무를 잘하는 것은 기본이고, 제2의 영역도 미리 개척해야 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한다고 말했다.
    • 전역군인
    2019-06-09
  • [전역군인 인생 2막] (4) 김종두 ‘정약용 문화교육원’ 상임이사(상), 육군의 ‘효(孝)’교육 선구자에서 대학의 ‘효’학 교수로
    ▲ 포병단장(연대장) 이·취임식을 거행한 후 열린 다과회에서 어머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당시 어머니를 이·취임식 행사장 가운데 모신 신임 단장의 모습에서 장병들은 효를 몸소 실천하는 지휘관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사진제공=김종두 상임이사] 뉴스투데이는 군에서 장기간 복무 후 전역한 직업 군인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인생 2막’을 새롭게 펼쳐나가는 성공 사례를 소개함으로써 전역 예정 장병들의 미래 설계는 물론 다른 직종에서 퇴직한 분들의 인생 후반부 준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전역군인 인생 2막’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육군참모총장 지시로 ‘효’교육하던 김종두 중령, 경민학원 이사장이 주목 전역 후 홍우준 이사장 요청으로 경민대 ‘효충사관과’ 만들고 학과장 맡아 김종두 이사, 본지와의 인터뷰서 "군 복무시절에도 부모님에 대한 효도가 나의 기쁨"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김종두 정약용 문화교육원 상임이사(65세)는 ‘효(孝)’를 화두로 평생을 살아온 군인이자 학자이다. 그는 영관장교 시절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로 충·효·예 교육을 담당했고, 이 때 강사로 초빙됐던 홍우준(洪禹俊) 경민학원 이사장의 주목을 받게 된다. 홍 이사장은 교육사업가이자 정치인이었는데, 당시 김 이사가 ‘효’에 대해 강의하는 모습을 눈여겨보면서 언젠가 자신이 설립한 경민대학교에 이와 관련된 학과를 만들겠다는 구상을 했다고 한다. 이런 인연으로 김 이사는 전역하자마자 홍 이사장의 요청으로 경민대학교에 효충사관과를 만들고 학과장을 맡아 효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됐다. 그는 1976년 3사관학교를 졸업(13기)하고 소위로 임관한 후 2009년 대령으로 전역할 때까지 군 복무 중에도 ‘효’를 생활화했다. 특히 중대장·대대장·연대장 등 지휘관 근무 시 효에 바탕을 둔 장병 인성교육으로 단 한 건의 사고도 없는 단합된 부대를 육성했다. 김 이사는 뉴스투데이와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서당을 2년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효’를 배우게 됐다”면서 “이런 배움이 사관생도 시절 그리운 부모님께 기쁨을 드리는 모습으로 나타났고, 장교로 임관한 이후 부하 장병들이 부모님께 걱정 끼치지 않도록 안내하는 역할에 최선을 다하게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참모장교 근무 중 석사학위 받고 ‘효’서적 처음 출간해 진중문고 채택 효교육 전문가로 알려져 육본 충·효·예 교육담당관 직책 맡고 강의해 향학열이 강했던 그는 1993년부터 대구에 위치한 제2군사령부 및 50사단에서 참모장교로 근무하는 동안 영남대 행정대학원에서 공부했고, 1996년 ‘군장병의 효심과 복무 자세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육군 교육사 리더십 교육장교로 근무하게 되면서 틈틈이 모은 자료를 토대로 ‘孝, 자녀들아 부모를 사랑하자!’라는 책을 처음 출간했다. 이 책이 장병들에게 배포되는 국방부의 ‘진중문고’로 채택되면서 김 이사는 ‘군대 효교육 전문가’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육군대학의 리더십 교관으로도 근무하게 됐다. 1998년 김동신 육군참모총장은 부임하자마자 “장교 중에서 충·효 교육 전문가를 찾아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성균관 유도회로부터 “군대에서 충·효 교육을 강화하면 좋겠다”는 건의를 받고, 마침 부임 신고를 하는 김 총장에게 ‘충·효 교육 강화’를 주문함에 따라 김 총장이 그런 지시를 하게 된 것이다. 이 때 추천된 김 이사는 ‘육군본부 충·효·예 교육담당관’ 직책을 수행하게 됐다. 육군이 충·효 교육을 강화한다는 소식을 들은 ‘충·효 국민운동본부’는 육군에 충·효·예 교육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이후 1999년부터 2002년까지 3년 간 매주 1개기 35명씩 충·효·예 워크숍을 3박 4일간 실시했다. 첫 해는 충·효 국민운동본부에서, 다음 2년간은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이 진행됐다. 중대장부터 연대장까지의 지휘관과 정훈참모 등 장교 25명과 부사관 10명으로 구성된 각 기의 교육은 육사 교장을 역임한 민병돈 예비역 장군이 ‘충·예’ 교육을, 김 이사가 ‘효’ 교육을 담당했다. 이 교육을 받은 간부들이 야전 부대교육에 적용한 결과 자살 및 안전사고가 30% 가까이 줄어드는 효과를 거뒀다고 2003년 4월 17일자 국방일보는 보도했다. 어린 시절부터 키워온 가치관이 ‘인생 2막’ 펼치는 토대로 작용 김 이사는 충·효·예 워크숍을 담당하던 첫 해인 1999년 군 내부 교육용으로 ‘충·효·예 기본교재’를 집필하여 육군 예산으로 발간했다. 그의 두 번째 책인 셈이다. 이 해에 그는 세 번째 책인 ‘충효예의 리더십’을 출간했고, 3년간 진행된 워크숍이 끝난 이후 2003년 네 번째 책인 ‘엄마, 나 군대 갈래요’를 출간했다. 김 이사는 충·효·예 교육담당관을 하면서 대령으로 진급했고, 연대장 근무를 마친 후 2003년 국방대학교 리더십교수 겸 리더십 센터장에 보직돼 3년간 ‘정약용의 목민 리더십’을 강의했다. 이 시기에 그는 성산효대학원대학교에서 ‘군대 효 교육을 통한 장병 인성 함양과 리더십 역량 강화에 관한 연구’로 한국에서 최초로 ‘효’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대한민국의 ‘효’ 인성교육에도 앞장섰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 6년간 ‘한국효운동단체 총연합회’ 사무총장을 맡아 ‘효행 장려 및 지원에 관한 법률(효행장려법)’의 제정을 이끌었고, 한국 효문화진흥원 설립에도 깊이 관여했다. 김 이사가 개척한 ‘인생 2막’은 어린 시절부터 키워온 가치관을 토대로 구축했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하편에 계속)
    • 전역군인
    2019-06-02
  • [전역군인 인생 2막] (3) 윤동일 한국열린사이버대 교수(하) '전쟁 인문학' 1인 기업 시험대에 올리다
    ▲ 2016년 삼성전자에서 안보교육 중인 윤동일 교수. [사진제공=윤동일 교수] 뉴스투데이는 군에서 장기간 복무 후 전역한 직업 군인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인생 2막’을 새롭게 펼쳐나가는 성공 사례를 소개함으로써 전역 예정 장병들의 미래 설계는 물론 다른 직종에서 퇴직한 분들의 인생 후반부 준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전역군인 인생 2막’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축구 전쟁’ 출간, 고대 올림픽엔 단체종목 없었다는 의문에서 출발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윤동일 교수는 인류 역사와 현대의 일상에 숨어 있는 다양한 ‘전쟁 흔적’들을 살펴, 전쟁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공감을 통해 새로운 발견을 이어주는 전쟁 연구를 하고 있다. 통칭해 ‘전쟁 인문학’으로 정의하고, 일상의 의식주를 비롯해 전쟁에서 탄생한 스포츠, 과학기술, 상징, 음악, 미술, 게임, 뷰티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런 시도는 우리나라에서 생소한 것으로 이 분야의 퍼스트 무버임에 틀림없다. 그는 2018년 전쟁과 스포츠의 두 번째 이야기인 ‘축구 전쟁-축구의 또 다른 이름 전쟁’을 출간했다. 이 책은 “고대 올림픽은 분명히 그리스의 전투방식을 반영했지만 모두 개인 전투기술에 집중되어 있어, 당시 그리스군의 기본인 밀집전투와 관련된 단체종목은 없었다”는 의문에서 출발했다. 이런 의문은 우연한 기회에 연구한 고대 축구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윤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이미 기원전부터 축구를 즐겼고 특히 군에서 축구를 정식 군사훈련 종목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이것이 로마와 중국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세계 각지에 전파해 중세 집단축구를 거쳐 현대 축구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올림픽으로 전사 양성하고 축구로 집단전술 숙달해 전시 대비 그는 “축구가 세계로 전파되는 중심에 군대가 있었기 때문에 축구로 집단전술을 숙달하고, 이 전술이 군대의 전법에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했다. 요컨대, 올림픽이 전사양성 종목이라면 축구는 부대훈련 종목이었던 셈이다. 아울러 그는 “축구가 태어난 지 100년 만에 세계를 정복한 이유에 대해 많은 연구와 주장이 있지만 아직 반쪽에 불과하며, 축구가 전쟁과 함께 진화했다는 ‘축구의 전투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지적도 잊지 않았다. 그는 전쟁과 스포츠의 두 저술을 정리해 “올림픽으로 전사를 양성하고, 축구로 집단전술을 숙달해 비로소 전시 대비태세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 윤동일 교수가 육사생도 시절 3군사관학교 체육대회에서 축구선수로 뛰는 모습. [사진제공=윤동일 교수] 윤 교수가 저서의 시작을 올림픽과 축구로 정한 배경에는 육군사관생도 시절 축구선수 경력도 한몫을 했다. 그는 “축구가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의 출발점이었고, 북한과 체제경쟁의 한축을 담당했으며 강군육성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이런 관점에서 3군사관생도들의 체육대회가 폐지된 것에 아쉬움을 표하면서, 미국 육사와 해사 간 미식축구 정기전이 무려 110년 이상 이어지고 있음을 부러워했다. 후배와 부대에 저서 기증하고 대학에 전쟁인문학 과목 개설 그의 책은 출간과 동시에 여러 곳에 무상으로 배부된다. 특히 장교로 임관하는 육사 후배들을 비롯하여 일부 부대와 지휘관들에게 지금까지 천여 권 정도를 기증했다. 군문을 떠나면서 “직접 만든 책을 후배와 부대에 남기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부터 그는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국방상담리더십학과에서 특임교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여러 대학에서 수차례 강연은 했지만 특정 대학에 그의 과목이 개설되기는 처음이다. ‘전쟁과 문명’이란 교양과목이 개설되자마자 전쟁에 관심 있는 학생 300명이 수강을 신청해 단번에 대학에서 인기 있는 과목 중 하나로 부상했다. 수강생 중에는 군인보다 일반인이 더 많고, 여성의 비율도 35퍼센트가 넘어 연구의 보편성이 짐작된다. 늘 자신을 ‘전쟁 인문학 전도사’로 자처하며 묵묵히 걸어온 그의 노력이 서서히 빛을 발하고 있다. 하지만 윤 교수는 전쟁연구를 하는 목적이 “무작정 전쟁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창 쓸 일이 없도록 하는 것(止戈爲武)’에 있다”며 균형 잡힌 접근을 강조했다. ▲ 윤동일 교수가 한국열린사이버대학에서 올해 처음 개설된 ‘전쟁과 문명’이란 과목을 강의하는 모습. [강의 동영상 캡쳐] 책을 쓴 저자이자 교수에 출판사까지 운영하는 멀티 플레이어 군문을 떠난 지 3년이 된 그는 두 권의 책을 쓴 저자이자 대학 교수이고, 혼자서 출판사까지 운영하는 멀티 플레이어다. 그는 매일 아침 도서 주문을 확인해 포장과 택배의뢰, 계산서 발송, 정산 그리고 가끔 배송이나 홍보도 직접 나간다. 학교와 부대, 기업체를 찾아 강의도 하고, 1주에 한 건 이상 칼럼도 쓴다. 틈틈이 걷기 운동도 해야 하고, 매월 병원 2∼3곳을 돌면서 진료 받고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일도 거르면 안 된다. 그러다 컨디션이 나빠지면 무기한 일을 중단하기도 한다. 그 누구보다도 바쁘고 치열한 삶을 살지만 한편으론 신중하게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윤 교수는 또한 인문학 학술연구와 관련 사업을 추진하는 한국인문학진흥원 부설 연구소장도 맡고 있다. 이 연구소는 국가와 사회에 유용한 인문학 콘텐츠를 개발·보급할 목적으로 지난해 12월에 뜻을 같이 하는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발족했다. 올해 첫 행사로 5월 21일 세한대학교와 인문학 분야의 산학협력 연구를 위한 MOU를 체결하고, 인문학 공동연구와 보급에 힘쓸 계획이다. 전쟁 인문학 저서인 ‘호모 워리어스’ 시리즈 완성이 인생 목표 이제 그에게는 자신이 개척한 전쟁 인문학 저서, 이른바 ‘호모 워리어스(Homo Warriors)’ 시리즈를 완성하는 인생 목표가 생겼다. ‘전사로 태어난 인간’이란 뜻을 가진 이 연작에는 이미 출간한 두 권도 포함된다. 전쟁과 반전쟁(反戰爭)의 관련성을 다룬 이 시리즈는 전쟁과 로고를 비롯해 몇 권의 주제를 출간한 후에 총론으로 마무리하거나, 그 반대로 총론부터 내고 각론을 출간할 생각이다. ▲ 두 번째 저서인 ‘축구 전쟁’과 세 번째 저서로 곧 발간될 ‘프로마코스’(오른쪽)의 표지. [자료제공=윤동일 교수] 그러나 그는 “언제까지 몇 권이나 출간할 것인지는 계획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만간 세 번째 책이 출간될 예정이다. 앞장서서 싸워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고대 상징인 ‘프로마코스’란 제목의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상업 로고를 비롯한 현대의 다양한 상징이 전쟁에서 유래됐다”는 주장을 펼친다. 즉 ‘전쟁 문장’이 모든 현대 상징의 뿌리가 됐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전쟁과 전혀 관련 없다고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전쟁은 당신들에게 관심이 아주 많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말한다. 군을 나선 그가 하는 “모든 활동은 사회현상을 이해하는 여러 관점들 가운데 전쟁이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했거나 소홀했던 사실들을 일깨워 주고 유용한 관점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을 알리는 데 집중되어 있다. 윤 교수는 본인이 직원이면서 대표인 1인 기업의 CEO다. 물론 상호나 사무실도 없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그의 성공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힘차게 헤쳐 나가는 작은 몸짓에 무한의 신뢰와 응원을 보내고 싶다.
    • 전역군인
    2019-05-12
  • [전역군인 인생 2막](3) 윤동일 한국열린사이버대 교수(상) 병마 이기고 ‘전쟁 인문학자’로 변신
    ▲ 2017년 39사단에서 장병들에게 강의 중인 윤동일 교수. [사진제공=윤동일 교수] 뉴스투데이는 군에서 장기간 복무 후 전역한 직업 군인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인생 2막’을 새롭게 펼쳐나가는 성공 사례를 소개함으로써 전역 예정 장병들의 미래 설계는 물론 다른 직종에서 퇴직한 분들의 인생 후반부 준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전역군인 인생 2막’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윤동일 교수, 본지와 인터뷰서 "전쟁과 인간 삶의 관련성 알리고 싶어" '전쟁 인문학'이라는 새로운 영역 개척해 '인생 2막' 점차 꽃피워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윤동일(56) 한국열린사이버대 특임교수는 전쟁을 바라보는 특별한 시선을 가진 학자다. 그는 전쟁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소위 ‘전쟁 인문학’ 분야를 한국에서 최초로 개척해 가는 인물이다. 전쟁 인문학이란 용어도 그의 개인적 견해이고, 아직까지 학문적으로는 정립되지 않았다. 윤동일 교수는 지난 달 말 뉴스투데이 서초동 사옥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전쟁에 대해 대중들이 부정적 이미지만 갖고 있어 전쟁과 인간 삶의 관련성을 알리고 싶었다"며 "아직 전쟁 인문학자로서 모든 면에 미흡하다"고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생각한 대로 인생 2막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전쟁 인문학에 담긴 그의 시선은 독창적이다. 예컨대 올림픽 종목은 전투상황을 가정한 스포츠라고 주장한다. 마라톤은 지휘관의 명령을 전달하는 전령이 죽을힘을 다해 달렸던 전투에서 따왔고, 축구 또한 전쟁의 필요에 의해 고안된 군사훈련 종목이라고 한다. 강인한 체력으로 빠른 공격력을 구사하는 독일축구를 전차군단이라 칭하는데, 강력한 전차가 빠른 속도로 적의 핵심을 제압했던 독일군의 ‘전격전’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의 남다른 행적은 평소 가졌던 군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됐다. 2001년 학위가 없었던 그는 국방부 추천으로 헬싱키 경제대학원 MBA(경영학 석사) 과정에 늦깎이 학생이 됐다. 당시 교수나 원우로부터 “전략이나 리더십 관련 질문을 자주 받았는데 부족함을 많이 느꼈다”고 털어놨다. 이것이 계기가 돼 전쟁의 흔적을 파헤치기 시작했고, 전쟁과 경영의 학제 간 연구가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2009년 전쟁 인문학 입문, 병마와 싸우면서 ‘인생 2막’ 방향 설정 이런 그의 관심이 싹튼 것은 2009년 경영 전문지인 ‘동아비즈니스리뷰’에 특별 기고를 하면서 시작됐다. 전쟁에서 의사소통 수단인 그림(작전상황도)을 갖고 경영에 접목하자는 내용이었는데, 반응이 좋아 후속 기고와 특강 요청을 받게 됐다. 이후 “어렵고 힘들 때 나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으로 생각해 틈만 나면 관련 연구에 몰두했다. 현직 군인으로 업무를 수행하며 연구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좋아서 하는 일이기에 즐겁게 임했다. ▲ 윤동일 교수가 2009년 경영 전문지 ‘동아비즈니스리뷰’에 기고한 글. [자료제공=윤동일 교수] 2012년 국방일보의 문을 처음 두드려 ‘군대와 스포츠’란 제목의 연재를 시작했다. 현대 스포츠는 고대 올림픽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대부분이 전투와 관련된 것이라는 주장을 관련 사료와 함께 제시했다. 불과 7개월의 연재였지만 “올림픽은 그리스군의 전투방식을 반영해 전쟁을 대비했다”는 그의 주장은 상당한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글은 곧바로 문체부의 스포츠 블로그에 초청돼 스포츠 전문가들과 2년 동안 연재를 이어가기도 했다. 윤 교수는 그저 제복이 좋아 군문에 들어선 대다수 군인 중 하나였다. 하지만 순탄하지 않은 군 생활로 여러 위기가 닥치면서 굴곡진 여정으로 내몰렸고, 급기야 2013년에 찾아온 갑작스런 뇌경색과 합병증은 결국 그토록 좋아했던 군을 떠나게 된 계기가 됐다. 그는 장기간 입원하며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다가 “군인의 길은 여기서 멈추지만, 군과 후배들에게 의미 있는 읽을거리 하나를 남기겠다”고 결심한다. 퇴원 후 2014년 첫 번째 책인 ‘모든 스포츠는 전쟁에서 나왔다’ 발간 2013년 말 퇴원한 윤 교수는 남은 군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본격적인 집필에 들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2014년 군과 후배에게 남기는 메시지를 담아 ‘모든 스포츠는 전쟁에서 나왔다’란 책을 펴냈다. 스포츠의 전쟁 기원설에 대한 구체적인 주장과 세부 종목연구로는 처음이었다. ▲ 윤동일 교수가 2014년 발간한 첫 번째 책(왼쪽)과 2018년 발간한 두 번째 책 표지. [사진제공=인터파크] 이 책에서 윤 교수는 방대한 사료와 연구를 통해 “고대 스포츠는 곧 나라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전시 필요한 전투기술을 평시 숙달할 수 있도록 고안된 군사훈련”이란 결론에 도달한다. 그는 페르시아와 몽골의 민속경기 종목이 그들의 전쟁 방식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확인해 보기를 권하면서 “모든 스포츠는 전쟁에서 유래한 군인들의 군사훈련”이라고 주장했다. 윤 교수는 이 책의 발간을 위해 전쟁 인문학 서적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1인 출판사도 만들었다. 전쟁의 신이자 군인들의 수호신인 “아테나를 위하여”라는 그리스어 ‘아테(AΘE)’를 출판사 이름으로 정했다. 당시 일부 출판사에서 무상 인쇄 제의도 받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직접 출간하기로 결심했다. 힘들어도 자신의 뜻대로 책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건강 문제로 53세 전역, 2018년 ‘축구 전쟁’ 펴내며 전성기 돌입 이후 건강 문제 등으로 더 이상 군 생활이 어려워진 윤 교수는 2016년 53세의 나이에 중령으로 전역했다. 시력의 50퍼센트를 잃고, 장기 손상 등으로 신체능력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지만 존재 이유와 같은 연구를 중단할 수는 없었다. 이미 책도 한 권 펴냈고 가끔 강연 요청도 들어왔기에 그는 전역 이후 인생 2막을 자신이 하고 싶었던 전쟁 관련 연구를 마음껏 하면서 본격적인 집필활동과 강의를 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다. ▲ 윤동일 교수가 2017년 11월부터 주 1회 패널로 출연 중인 국군방송의 ‘국방 FM이 좋다’ 프로그램. [사진제공=국군방송] 윤 교수의 연구에 대한 집념과 노력은 국방일보 기획 연재와 국군방송 출연 등으로 이어졌다. 그는 2016년 ‘전쟁과 음악’이란 제목으로, 2017년 ‘방패 & 로고’란 제목으로 국방일보에 글을 기고했다, 또 2017년 11월부터 지금까지 매주 1회씩 국군방송의 ‘국방 FM이 좋다’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해 ‘전쟁과 문명’이라 주제로 얘기하고 있다. 국군정신전력원에서 운영하는 블로그에도 3년째 연재를 이어가고 있다. 2018년 윤 교수는 자신의 두 번째 책인 ‘축구 전쟁-축구의 또 다른 이름 전쟁’을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올림픽의 기원인 고대 스포츠 종목은 전사의 개인전투기술 숙달에는 유용하지만 집단전투를 기본으로 하는 그리스 전투방식을 충족하진 못했다”면서 “그 해답이 바로 축구에 있다”고 주장했다. 즉 올림픽이 전사양성 종목이라면 축구는 부대훈련 종목이었던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 전역군인
    2019-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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