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10(목)

전역군인
Home >  전역군인

실시간 전역군인 기사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4)] 첫날 종주 힘들었지만 어려움 극복하고 완주하겠다는 의지도 확인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오늘 걸은 거리가 약 24㎞ 정도이다. 이른 새벽 집을 출발해 임진각까지 왔고 임진각부터 숙소가 있는 감악산 펜션까지 장거리를 더운 날 걸어와서 인지 단원들 모두가 아주 힘들어 했다. 그래서 숙소 근처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 때 근처 가게의 아주머니가 우리들에게 걷는 사연을 물었다. 단원 한 명이 걷는 취지와 오늘 임진각부터 걸어왔다고 설명하면서 시원한 물을 좀 마시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커다란 양푼에 얼음물을 가득 갖다 주셨다.(아마도 냉장고에 있는 얼음을 다 꺼내 가져온 것 같았다). 시원한 물을 마시며 그 아주머니의 훈훈함을 듬뿍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이 종주 첫째 날이어서 원래 계획은 숙소에 도착하면 근처 음식점에서 단합을 다지는 의미로 성대한 식사를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숙소에 도착했을 때 모두들 지쳐서 음식점으로 이동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저녁식사는 숙소 주인이 권하는 중국집에서 음식을 배달 시켜 먹었다. 저녁식사 후 단원들의 발바닥 상태를 포함한 건강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문제는 없었지만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힘이 들었다고 말했다. 사실 제일 젊은 나에게도 오늘은 무척 힘든 하루였다. 출발 전에 우리들을 엄청 아끼고 사랑하는 주위의 여러분들로부터 진심 어린 우려의 말씀을 많이 들었다. 나이가 70이 넘은 사람들이 300㎞가 넘는 먼 거리를 12일 동안 장기간 걷는 것은 무리다. 또 만약에 어떤 사고가 발생하면 아주 복잡하고 심각한 문제라며 걱정을 하신 분도 있었다. 그렇지만 걷기로 했고, 이렇게 시작된 대장정의 첫날이 지나면서 화살은 시위를 떠나 목표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모두가 힘든 하루였지만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극복하고 완주하겠다는 의지와 소망을 서로 확인한 시간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걷기의 궁극적 목표가 건강 유지에 도움이 돼야 한다는 평상시 신념과 함께 고령인 단원들의 피로가 젊은이들과 다를 것이라 여겨져 “내일 단원들의 걷는 모습을 세밀히 지켜보며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목표 지점인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도착하기 전이라도 단원 중 누군가의 건강에 문제가 생길 것으로 판단되면 아무런 미련 없이 즉시 모든 일정을 중단하겠다”라는 종주 가이드라인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오늘 걸으면서 금년(2013년) 초 아내와 함께 약 40일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던 여정이 기억났다. 한겨울에 걸었기 때문에 길은 몹시 미끄러운데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겨울임에도 비가 자주 내렸다. 날씨가 추웠고 잠자리도 불편해 순례길 걷기를 시작한 것에 대한 후회가 앞서면서 계획대로 목적지까지 걸을 수 있을지 약간의 걱정도 됐다. 그러나 며칠을 걸으면서 환경에 적응됐고 처음의 후회와 걱정들은 사라졌다. 그리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그리고 추위와 불편함에도 즐거울 수 있었다. 그러자 자연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친절함과 훈훈함이 느껴지면서 행복했다. “그동안 내가 반복된 일상에 감각이 무디어져 이런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나 자신을 보호하려고 너무 두꺼운 옷을 입고 다녀서 주변 사람들의 훈훈함과 친절함을 느끼지 못했을 수 있었겠다”라고 생각했다. 특히 종착지가 가까워오면서 순례길에 머무는 것이 너무 좋고 곧 끝나는 것이 아쉬워 10㎞도 되지 않는 거리를 걷고 숙소를 정했던 기억도 났다. 순례길을 걸은 후 나는 “과거는 감사, 현재는 행복, 미래는 설레임”이란 문구를 염두에 두고 생활하고 있다. 오늘 DMZ 종주단의 첫날 걷기는 매우 힘들었다. 단원들의 힘들어하는 표정이 역력하여 걱정도 됐다. 그러나 평화누리길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과 인심 좋은 아주머니가 준비해준 얼음물이 시원함과 함께 훈훈한 정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번 DMZ 종주도 어려움은 있을 테지만 걷고 나면 좋은 기억으로 남을 거라고 막연한 상상을 해보았다. 그래서 마음의 눈을 활짝 열고 환경에 순응하면서 즐겁게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는데, 첫날 비록 힘은 들었지만 계획대로 잘 걸은 것처럼 마지막 날까지 모두 잘 걸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단원들은 모두 편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 전역군인
    • 인생 2막
    2021-06-02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3)] 첫날 24㎞ 구간은 임진각에서 감악산 펜션까지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8월 19일 새벽 5시 30분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택시로 경의선 출발지인 공덕역으로 갔다. 6시 32분 문산행 첫 전철을 탔고, 전철 안에서 단원 전원이 합류했다. 그런데 전철로 이동 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허구 헌 날 내버려두고 우리가 출발하는 날 이렇게 비를 뿌리면 우리 걷기꾼들은 어찌 한 단 말입니까?” 이런 한탄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에 순응하면서 걸어야겠다”는 마음의 준비와 각오를 단단히 했다. 7시 40분경 문산역에서 택시를 타고 임진각으로 갔다. 임진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은 후, DMZ 종주단 4명은 330㎞ 대장정을 시작했다. 첫날 목표는 임진각을 출발하여 파주 적성에 있는 황포나루를 지나 감악산 펜션까지 약 24㎞였다. 임진각은 DMZ에서 남쪽으로 약 7K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남북분단의 비극적 현실을 상징하는 장소이다. 북녘 땅에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들이 고향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찾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DMZ는 국가가 자국의 영토임에도 국제법상 병력 및 군사시설을 주둔시키지 않을 의무가 있는 특정지역이나 구역을 의미한다. 한반도의 DMZ는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전쟁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의해 휴전됨으로서 생겨났다. 육상의 군사분계선인 MDL(Military Demarcation Line)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각각 2㎞씩 양국의 군대를 후퇴시키기로 약속하면서 만들어진 지역이다. 임진강 하구인 경기도 파주시 정동리부터 강원도 고성군 명호리까지다. 임진각은 분단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화해와 상생, 평화와 통일의 상징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임진각 주변에는 평화누리 공원이 조성돼 있다. 이 공원은 2005년 세계평화축전을 계기로 만들어졌으며 대형 잔디에 각종 볼거리와 작품들이 있다. “바람의 언덕” 아래로는 무지개 색으로 팔랑이는 바람개비가 많이 있다. 그 주위에는 자유의 다리, 평화의 종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고 6.25 전쟁 당시 각종 유물과 전쟁기념물도 있다. 망향의 노래비에는 1983년 ‘이산가족 찾기’의 배경 음악이었던 ‘잃어버린 30년’의 가사가 통일을 기다리며 서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그리웠던 삼십 년 세월 / 의지할 곳 없는 이 몸 서러워하며 그 얼마나 울었던가요 / 우리 형제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정 나누는데 /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 목 메이게 불러 봅니다 / 내일일까 모래일까 기다린 것이 눈물 맺힌 삼십 년 세월 / 고향 잃은 이 신세를 서러워하며 그 얼마나 울었던가요 / 우리 남매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못 다한 정 나누는데 /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 목 메이게 불러 봅니다.” 여정의 시작점이 있는 ‘평화누리길’이라는 도로 이름은 우리 DMZ 걷기꾼들이 염원하는 평화통일과 연관되어 있는 듯했고 이런 것들이 더해져서 어서 빨리 평화롭게 통일이 되기를 기원한다. ‘평화누리길’은 2010년 개장되었으며 총 189㎞의 길로 DMZ 접경지역인 김포시, 고양시, 파주시, 연천군 등 4개 시·군을 잇는 대한민국 최북단의 걷는 길이다. 우리는 파주 평화누리길 셋째 길에 위치하고 있는 임진각을 출발하여 마정리, 장산리를 지났다. 필자는 1980년대 중반 이 지역에서 중대장 근무를 했다. 이 지역에서 군 생활을 할 때 화창한 날 장산 전망대에 올라 북한의 송학산을 포함한 북녘 풍경과 임진강, 초평도 도습지를 한눈에 본 기억을 더듬었다. 이번 순례길에서는 그러한 정경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일정상 그곳을 지나쳐 화석정, 그리고 율곡리를 걸었다. 율곡리는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자 ‘십만양병설’로 유명한 율곡 선생의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그 중 대표적인 유적지로 ‘자운 서원’과 ‘화석정’이 있다. 서원은 조선시대에 유교의 성현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설립한 사설 교육 기관이다. 조선 중기 이후 정치적 혼란으로 여러 학자들이 지방에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게 됐으며, 이를 바탕으로 서원에서는 선배 유학자를 기리고 제사하는 사당의 기능까지 했다고 한다. 자운 서원은 1615년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됐고 이이의 위폐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화석정은 굽이쳐 흐르는 임진강의 절경을 한 눈에 감상 할 수 있는 정자로서 그가 벼슬에서 물러나 임진강을 벗하며 말년을 보냈다고 하며 지금은 이이 선생이 8세에 지었다는 ‘팔세부시(八歲賦詩)’라는 시가 걸려 있었다. 율곡리를 지나 좀 걷다 보니 전진교가 보인다. ‘천하무적 전진부대’에서 중대장을 할 때 수 없이 많이 통과했었던 다리이다. 전진교를 건너 초소에서 출입자 명부에 인적사항을 기록 할 때에는 어떤 돌발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긴장했었고 업무를 마치고 나올 때에는 별일 없음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곤 했던 기억이 난다. 두포 나들목을 지나 장파리의 리비교를 지난 후 황포돛배로 향한다. 리비교는 정전협정 직전 미군이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건설한 다리로 대전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미 공병대 리비 중사의 이름을 붙였다. 황포돛배는 조선시대의 중요한 운송수단의 하나였고 우리가 가는 그곳은 임진강 황포돛배라는 지명이며 그곳에 가면 그 배를 탈 수도 있는 곳이다. (4편에 계속)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 전역군인
    • 인생 2막
    2021-06-01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2)] 사전 답사 통해 330㎞ 종주 계획 완성하다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DMZ를 따라 함께 걷기로 한 ‘DMZ 종주팀’을 구성 후 몇 가지 사항을 결정했다. 먼저 출발지는 문산 임진각, 최종 도착지는 고성 통일 전망대로 정했다. 코스를 이렇게 정한 이유는 한반도의 허리를 걷는다는 상징적 의미뿐만 아니라 휴전선 가까이 위치해 있어 분단의 아픔을 체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DMZ 종주 출발일은 8월 19일, 기간은 12일로 정했다. 아주 더운 혹서기를 피해 걷기에 좋은 계절을 선택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내가 전역하는 날이 9월말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기간을 정했다. 그리고 별도의 지원 차량이나 인원 없이 오롯이 4명이 배낭에 필요한 짐을 휴대하고 걷기로 했다. 잠자는 장소는 종주 코스 주변의 민간 숙박시설을 이용하되 그런 시설이 없는 지역에서는 군 숙박시설을 협조해 이용하기로 했다. 아침 식사는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컵라면, 초코파이 또는 에너지 바 같은 것을 준비하고, 점심과 저녁식사는 그날 걷는 코스에서 만나는 음식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이렇게 기본적인 방향을 정한 이후 실제로 매일 걸어야 하는 구간을 확정하기 위해 2013년 6월 13일부터 3일간 차량을 이용해 종주 구간을 사전 답사했다. 전 코스를 12일로 구분하여 하루하루 걸어야 할 이동로를 직접 확인하고 묵을 숙소를 찾아 예약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구체적인 이동로를 판단할 때에는 지역 행정관서에서 만든 관광지도를 사용했다. 걷는 길이 자세히 표시돼 있지는 않았지만 국도와 지방도가 명확히 구분돼 있는데다 지역의 명소들과 숙박, 음식점 등 관광과 관련된 정보들이 모두 포함돼 있어 여러모로 유용했다. 경기도 지역은 미개통 구간이 여러 곳 있기는 했지만 걷기 전용도로인 ‘평화누리길’을 주로 택했고, 강원도 지역은 경기도처럼 걷기 전용도로가 아직 없기 때문에 국도 및 지방도를 걷기로 했다. 어떤 구간에는 음식점이 아예 없는 지역도 있었다. 이런 구간에서는 어쩔 수 없이 초코파이나 에너지 바 등으로 점심 요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민간 숙박시설이 없는 지역에서는 군에서 운용하는 숙박시설을 이용했다. 당시 나는 전역을 40여일 앞둔 현역이었기에 군 숙박시설을 협조하기에 유리했다. 군 숙박시설을 사용할 수 없었다면 걸어서 DMZ 종주를 할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민족을 분단한 휴전선 155마일(약 250㎞)이라고 말하지만 실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약 330㎞에 달했다. 결국 하루 걷는 코스는 가용한 숙박시설의 위치를 고려하여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이동거리를 좀 길거나 짧게 잡을 수밖에 없는 곳도 몇 군데 생겼다. 이동거리가 긴 곳은 걷기에 많은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걸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을 갖고 정할 수밖에 없었다. DMZ 종주단을 상징하는 표식도 만들어서 배낭 뒤에 부착했다. 30여년이 넘는 군 복무를 하면서 수많은 훈련계획을 수립했었지만, DMZ 종주 계획을 만들면서 더 많은 고민을 한 것 같다. 걷는 사람들의 나이와 체력 상태, 예측하기 어려운 기상 등 여러 변수가 많았음에도 DMZ 종주 계획은 완성됐다. 단원들은 계획을 공유하고 걷기에 대한 의기를 투합했다. 단장을 맡은 나는 모든 계획이 실행 과정에서는 계획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부딪히는 상황에 유연히 대응해야 한다는 사실도 단원들에게 상기시켰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어떠한 결정도 단장이 혼자서 할 수 있다는 확답도 받았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 전역군인
    • 인생 2막
    2021-05-18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1)] 우리는 왜 DMZ 종주를 결정했나?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내가 배낭을 메고 군사분계선(DMZ)을 따라 걸을 것이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DMZ를 종주하자’는 제안을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주말걷기 모임에서 만난 한 회원이 “안 대령이 금년에 전역하는데, 전역 전에 DMZ 종주를 하면 남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다”면서 “혼자 걷기 어려우면 동행하겠다”라는 제안을 했다. 많은 땀을 흘렸고 청춘을 불살랐던 그 지역. 군 생활을 할 때는 늘 바쁘고 긴장해야 했는데 전역을 앞둔 지금 걷는다면 여유롭게 과거를 뒤돌아보는 시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함께 하겠다는 그 회원의 말이 DMZ 종주를 결정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DMZ 종주는 엄밀히 말하면 DMZ에 인접한 길을 걷는 것이다. 이 길은 대부분 군부대의 허가를 얻어야 통과할 수 있는 민간인통제선(이하 민통선) 이남지역이지만 일부 구간은 민통선 지역이 포함된다. 따라서 현역 신분이 아니면 군부대의 협조를 받기도 어렵고 그 지역을 정확히 알지 못해 걷기를 계획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나는 당시 현역이었고 특히 민통선 구간은 내가 과거에 근무했던 부대였다. 60, 70대 아저씨들이 12일 동안 무거운 배낭을 메고 더운 여름에 330㎞를 걷는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최초에 제안한 회원을 포함하여 동행자를 구하는 것, 이들의 나이가 많으니 각자 가족의 허락을 받아내는 것, 실제 걸을 수 있는 거리를 판단하는 것 등 여러 가지 고민이 있었다. 그런 고민 끝에 드디어 4명의 인원으로 ‘DMZ 종주팀’을 구성했다. 이후 차량으로 종주할 지역을 사전에 답사하고 지역별로 숙소를 미리 정하는 등 나름대로 치밀한 준비를 했다. 그리고 건강을 해치면 안 된다는 전제 하에 통일을 염원하면서 전 코스를 완주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그 여정이 벌써 8년 전의 일이 되었지만 걷는 동안 만난 우리의 산하는 매우 아름다웠다. 하지만 여기저기 전쟁의 아픈 상처가 남아있어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걸으면서 육체적 어려움을 겪는 상황마다 슬기롭고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하는 5670 아저씨들의 위대한 잠재력도 돋보였다. 아직까지 중장년층의 국토순례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는데다 DMZ 종주라는 특별한 지역을 종주한 것이었기에 우리의 경험을 글로 남기는 것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쪼록 연재되는 이 글이 이런저런 이유로 새로운 시도를 망설이는 중장년층에게 특히 도움이 되길 바란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 전역군인
    • 인생 2막
    2021-05-12
  • 후임병 강제추행·가혹행위 등 혐의 받은 해병대 예비역 집행유예 2년 선고
    [시큐리티팩트=안도남 기자] 해병대 복무 당시 후임 병사들에게 강제추행과 가혹행위 등을 한 20대 예비역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제주지법 제2형사부(부장판사 장찬수)는 6일 강제추행과 특수협박, 위력행사 가혹행위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22)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고 밝혔다. 또 보호관찰 1년과 사회봉사 120시간, 성폭력치료프로그램 40시간 이수를 명령했다. A씨는 해병대 모 부대 병장으로 복무하던 지난해 2월부터 7월까지 생활관 등에서 후임 병사들에게 뒷짐 지고 몸을 굽혀 머리를 땅에 박고 두 다리를 벽이나 책상에 걸치는 '메뚜기 자세'를 시키고 폭행하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가혹행위를 한 혐의를 받는다. A씨는 또 후임 병사들의 신체 일부를 만지며 추행하고, 둔기로 위협한 혐의도 받는다. A씨에게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는 후임 병사들은 11명에 이른다. 재판장은 "상명하복이 엄격한 군대 생활에서 하급자가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운 점을 악용해 범행을 저지르는 등 죄질이 절대 가볍지 않다"며 "다만 피해자 일부와 합의했고, 형사처벌 전력이 없는 점 등을 참작했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 전역군인
    • 종합
    2021-05-06
  • 국가안보역사의 산증인 홍일식과 故 박찬세의 우정 "자네와 함께 한 세상 호기롭게 잘 살았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60년 4·19혁명의 기폭제가 된 고려대 4·18의거의 주도자 박찬세 전 통일연수원장(고려대 교우회 고문, 향년 86세)이 코로나19 확진 후 입원 치료 중 6일 별세했다. 빈소는 11일 오후 5시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 303호에 마련되어 13일 오전 9시 발인 후 국립4·19민주묘지에서 영면에 들었다. 근세기 역사의 현장을 누비던 거목인 故 박찬세 전 통일연수원장이 영면에 들자, 박원장과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 두 거인(巨人)의 우정을 지켜보며 감동하던 언론사 대표를 지낸 이강식씨(고려대 후배)가 ‘남이 봐도 되는 日記’를 보내왔다. 이를 통해 역사의 현장에서 누구에게나 가슴을 활짝 열고, 따뜻이 맞이하는 巨人이자 약하고 음지에 있는 사람들을 더 많이 배려하는 大人이면서도 不義와 不敬을 용납 않는 단호한 포청천, 그래서 가는 곳마다 팬들이 북적이는 인기인이었던 故 박찬세 원장과 홍일식 전 총장 두 거인(巨人)의 우정 이야기를 공개한다. ■역사의 현장 속을 누비던 두 巨人의 감동적인 우정을 그린 ‘남이 봐도 되는 日記’ 전문 천학(淺學)인 데다, 과문(寡聞) 한 탓에 동서고금 인물들의 우정담(友情談)에 관해 아는 건 부처님과 마하가섭, 중국의 삼국지 삼 형제, 관중과 포숙, 그리고 우리나라의 유성룡-이순신, 다산-초의선사-추사, 익살맞은 치기로 우화를 남긴 오성-한음 정도일 뿐이다. 작심하고 찾아보면 꽤 있음 직도 하련만, 특히 근현대 산업화/민주화 이후 한국史에서 후세에 길이 전할 만큼 귀감이 될 '우정 교류' 얘기는 아쉽게도 얼핏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한밤에 볏단을 서로 옮겨쌓는 형제의 동화가 있다만, 그것은 同氣간의 정이니, 벗들의 우정과는 좀 다르다.) 개인주의, 물질만능주의 팽배가 원인이기도 하겠으나, '우정'에 대한 절대가치가 평가절하되고 있음은 아닐까. 말로만, 아쉬울 때만, 상대가 잘 나갈 때만 우정을 찾는 얍삭한 처세훈(處世訓)이 날로 보편화되어 그럴까. 헌데, 그런 시대 풍토에서도 이런 우정이 살아있더라. ■ 두 거인(巨人)인 박찬세 전 통일연수원장과 홍일식 전 고려대총장 한 사람은 '작은 거인'이다. 160cm가 채 안 되는 키, 말 그대로 단구(短軀) 임에도 누구나 그를 진정한 거인, '리틀 빅맨'이라 불렀으니. 또 한 사람은, 우선 외모로도 진짜 거인이다. 1950~60년대 靑年期엔 육 척 장신에 늠름한 어깨로 기골이 장대하다는 소릴 적지않이 듣기도 했단다. 두 사람 모두 '거인'으로 추앙되는 '참 이유'는 간명하다. 살아온 족적, 쌓아온 업적, 만인이 존경하는 인품 等等 족탈불급의 '큰 그릇'을 저마다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두 거인의, 부럽기 짝이 없는 '멋진 우정' 얘기를 남기고자 한다. 같이 걸으면, 누가 봐도 '언밸런스'라고 할 그들이 한 평생 우정의 꽃을 피우고, 지켜온 러브 스토리 -. 여문 작가가 소설로 엮으면 대박이 터지고 넘치리라. 1950년대 중반, 대학 저학년 시절에 만난 두 사람은 고대신문을 통한 글과 문장으로 서로의 존재를 알고, 첫 상면 순간에 '평생의 벗'으로 점지됐음을 느꼈단다. 이후 근 70년 동안, 찰떡같은 밀애를 이어온 것이니. 그들이 서로 '통하는 바'는 '민족'이었다고 한다. 법학도와 국문학도로 각자의 主전공은 달랐으나, 민족문제를 놓고 괴로워한 젊은이들의 심혼(心魂)이 韓민족의 분(憤)과 원(怨)과 한(恨)을 화두로 놓고 늘 분방한 담론을 펼쳤고, 그러면서 情을 쌓았더란다. 그 습관이 그대로 이어져, 米壽가 멀지 않은 지금까지 무슨 특별한 사안이 없더라도, 입과 귀가 심심할 때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전화를 걸거나 찾아가 만나서 수작(酬酌)을 곁들여 진지한 대화를 나누곤 했단다. 작게는 대소 집안일이나 주변 지인들 근황에서부터 민족, 나라, 인류의 미래까지 주제가 마를새 없었다고. 맛있는 먹거리, 귀한 술이 생겼을 땐, 가족보다 먼저 서로를 불러, 아이들처럼 둘이서 즐기곤 했다고도 한다. ■ 박찬세는 1960년 4월 고대신문 편집국장의 신분으로, 4.19의 도화선이 된 '고대 4.18 의거 선언문'을 쓰다. "질식할 듯한 기성 독재의 최후적 발악은 바야흐로 전체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만약 이와 같은 극단의 악덕과 패륜을 포용하고 있는 이 탁류의 역사를 정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세의 영원한 저주를 면치 못하리라. 동족의 손으로 동족의 피를 뽑고 있는 이 악랄한 현실을 어찌 방관하랴. 우리는 청년학도만이 진정한 민주역사 창조의 역군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여 총궐기하자." 이 기치를 들고 거리로 나선 노도(怒濤)의 고대생들이 그날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 시위를 마치고 귀교하던 중 깡패들에게 난타를 당하고 거리에 널브러져 있는 사진이 다음날 朝刊에 게재되면서 전 국민이 분연히 들고일어나 4.19 혁명의 큰 불길로 확산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박찬세는 졸업 한참 후, 그의 文才를 모셔간 정부에서 권력 핵심의 요직을 지내기도 했으나, 결국은 수구초심, 오랜 염원인 '민족통일'을 위한 기반 사업에 헌신했다. 통일원 15년, 그중 10년을 통일연수원장으로 일했으니, 오늘날 우이동 '통일연수원'이 그의 정성 어린 작품이다. ■ 홍일식은, 새삼 形言이 필요 없는 대한민국의 어르신 홍일식은 36년 동안 高大 '민족문화연구소'를 지켜오는 내내 오직 '민족문화'를 부여안고, 국학 중흥의 초석을 놓았다. <한국문화사 대계>, <한국 민속 대관>, <中韓대사전> 등 그의 손으로 탄생시킨 국학연구의 보배들이 즐비하다. 당연한 행로인, 민족고대 13代 총장이 되어 그가 보여준 인본(人本)과 공선사후(公先私後)의 탁월한 리더십은 명문 사학 경영의 전범으로도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玄民, 南齋, 그리고 芝薰을 열과 성으로 기리는가 하면 범국민을 대상으로 孝정신 함양 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가히 국학의 本山, 인문학의 巨峯이 바로 그다. ■ 그런 두 사람은 '닮은꼴'이 많다, "나의 벗 石岳, 자네와 함께 한 세상 호기롭게 잘 살았네. 곧 다시 만나기를 바라네" 누구에게나 가슴을 활짝 열고, 따뜻이 맞이하는 巨人 / 약하고 음지에 있는 사람들을 더 많이 배려하는 大人 / 그러면서도 不義와 不敬을 용납 않는 단호한 포청천 / 그래서 가는 곳마다 팬들이 북적이는 인기인이라는 점. 현모양처와 해로했고, 자식들이 성실하게 잘 자랐으며, 一家가 더 없이 화목한 점도 똑같이 닮았다. 석악(石岳) 박찬세, 가석(可石) 홍일식. 아호(雅號)에 '돌石'을 함께 지닌 것도 천연(天緣)이다. (두 사람은 만나기 이전부터 아호를 가졌더란다.) 다만, 가무 음곡에 있어서는 석악이 한 수 위라, 그의 청탁 불문 엄청난 주량과 흥겨운 시가(詩歌)는 그대로 신화가 되어 '高大夜史'에 전해오고 있으니... 때로, 두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들어본 적이 있다. "야, OO는 어떻고, OO는 네 말이 맞아." 평소 책이나 서간에선 석악兄, 가석兄 하던 분들이 둘만 있을 때 "야~, 자~" 하는 모습은 되레 보기 좋더라. 石岳이 팔순을 맞은 해, 어느 회고 글의 마지막 구절. "可石이 나의 친구라는 것이 무척이나 자랑스럽고 행복하다." 그런, 그들의 우정,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랴. 지난 3월 6일의 悲報 – ‘石岳 박찬세 급서(急逝)’. 아니, 이럴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보름 전만 해도 호방하게 폭탄주를 즐기시던 분이, 누구보다 산행도 잘하시고, 건강장수를 다짐하시던 분이 이처럼 허무하게 떠나시다니, 이렇게 황당할 수가... 두 거인의 우정의 끈, 한쪽 걸이가 떨어졌다. 그를 알고, 존경하고, 함께 지내온 모든 사람들에겐 진정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슬픔'이라. 오늘, 可石이, 몸을 추스르며, 석별의 情을 전한다. "나의 벗 石岳, 자네와 함께 한 세상 호기롭게 잘 살았네. 곧 다시 만나기를 바라네. 可石 洪 一 植 읍소" 비통(悲痛)을 넘어 오관(五官)이 먹먹하다. 이제 누구에게서 '감식초酒'를 마셔볼 수 있을 거나. 한 분의 거인만이라도 오래 우리 곁에 남아계셔서 두 분의 우정담을 간간히 들려주시길 소망할 뿐이다. 근데, 아무래도, 지금... 눈물이 자꾸 앞을 가려, 자판이……….
    • 전역군인
    • 종합
    2021-03-18
  • 서욱 장관, 故 변희수 전 하사 관련 "트랜스젠더 군 복무 연구 필요" 밝혀
    [시큐리티팩트=김한경 기자] 서욱 국방부 장관은 16일 성전환 후 강제전역 조치된 고(故) 변희수(23) 전 하사와 관련해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 문제에 대한 정책 연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서 장관은 국회 국방위에서 '국방부가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 성전환수술 비용 지원 등과 관련해 연구를 한 사실이 있느냐'는 더불어민주당 김병주 의원의 질문에 "아직은 없는데 이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 장관은 미국이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를 허용하는지에 대해서는 "트럼프 정부에서 안 됐다가, 바이든 정부 들어와 (허용)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서 장관은 "30개국 정도가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를 허용하고 있고, 이스라엘은 안보 환경이 우리나라와 비슷한데도 허용된다"는 김 의원의 지적에 대해 "정부마다 다른 상황"이라고 답변했다. 고(故) 변희수(23) 전 하사는 2019년 휴가 중 외국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고 돌아와 계속 복무를 희망했으나 육군은 규정에 따라 심신장애 3급 판정을 내리고 지난해 1월 전역을 결정했다. 전역 조치된 후 지난해 8월 육군을 상대로 복직 행정소송을 진행하던 중 지난 3일 오후 청주시 상당구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 전역군인
    • 종합
    2021-03-16
  • [팩트포토] 정광식 예비역 대령-신원식 의원, “故 이재수 장군 명예회복 촉구” 1인 릴레이 시위…입춘한파 속 우정
    [시큐리티팩트=김상규 기자] 정광식 예비역 대령과 신원식 국민의힘 의원이 입춘한파 속에 지난 2일부터 청와대 앞에서 '故 이재수 장군 명예회복 촉구'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였다. 특히 정광식 예비역 대령은 이재수 장군과 육사37기 동기로 이 장군이 53사단장 시절 같은 부대의 부사단장이었다.
    • 전역군인
    • 종합
    2021-02-03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57)] ‘무소불비 무소불과(無所不備 無所不寡)’와 ‘피실격허(避實擊虛)’는 전쟁에서의 선택과 집중을 강조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손자병법 ‘허실(虛實)’편의 ‘무소불비 무소불과 (無所不備 無所不寡)’는 “준비가 부족한 곳이 하나도 없게 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다”라고 풀이된다. 즉 “전부를 다 완벽하게 준비하는 것은 전부가 부실하게 된다”는 뜻이다. 또 ‘피실격허 (避實擊虛)’는 “적의 강한 곳을 피하여 약한 곳을 공격한다”라는 뜻으로 선택과 집중, 집중과 절약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무소불비 무소불과(無所不備 無所不寡)’와 ‘피실격허(避實擊虛)’는 전쟁시 피아가 치열하게 전투를 할 때 전략 및 전술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허나 평시에는 사단 책임지역내 심심산골에 인적이 드문 지역이 산재되어 있어 그곳에서 침투한 간첩들이 은거해 활동할 수 있기 때문에 취약지로 분류해 관리를 하고 있다. 그래서 집중과 절약을 해야 한다는 손자병법의 의미와 상충되는 전 지역을 커버하는 취약지 관리가 필요했다 이러한 취약지역에 소대 또는 중대 단위로 상주하면서 주변 수색정찰도 하고 매복 및 전술훈련을 하면서 병사들의 훈련 수준도 배양하고 침투한 간첩 및 불순세력의 은거도 거부하는 ‘취약지 상주훈련’을 시행했다. 통상 ‘취약지 상주훈련’을 시행할 때에는 부대의 지휘권을 벗어난 타지역에서 해당 소·중대장의 독단적 판단에 의한 행동이 요구되어 반드시 차상급 지휘관에게 훈련계획을 사전에 보고했다. 필자도 사전 토의와 현장 확인을 통해 1주일간의 취약지 훈련계획을 준비하여 보고하자 연대장은 해당 지역이 격오지로 도로도 불량하여 이동 및 소통에 제한이 많기 때문에 적 접촉시 작전조치와 폭우 피해 및 환자 발생 등 우발상황에 철저히 대비하며 병력관리를 잘하라는 지침을 받았다. ■ 장거리 행군에 따른 허기 심해, 설익은 밥도 꿀맛 훈련출발 당일 먼저 선발대를 보냈다. 취사장 설치와 통신선 개설을 위해 중대 행정보급관(인사계)가 취사병, 통신병들을 대동하여 4분의 5톤 통신차를 타고 화천군 백적산(883.5m) 북방 구운리 만산동 계곡으로 출발했다. 군장검사를 마친 중대원들은 취약지역인 만산동 계곡까지 30km행군을 시작했다. 다행히 이규환 연대장님이 평소 행군과 태권도를 강조하여 매주 행군 훈련을 했던 덕분에 병사들은 행군에 익숙해 있었다. 필자는 전방 GOP연대 소속이었으나 이번 ‘취약지 상주훈련’ 장소는 사단 후방 인접사단과 근접한 지역으로 최전방 부대가 사단 책임지역의 최후방으로 이동하여 훈련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행군이 시작되었다. 중대원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관불령을 넘어 신월동과 삼거리라고 불리는 봉오리를 통과해 다시 덕고개를 힘차게 넘었다. 필자가 근무한 지역은 첩첩산중(疊疊山中)이라는 단어가 꼭 맞는 산악지역이라 조금만 이동해도 길옆에 절벽과 벼랑 등 아찔하게 만드는 고개들이 산재해 있다. 행군 간에는 통상 50분 걷고 10분 휴식한다. 그러나 시간이 되어도 아찔한 벼랑 옆에서는 휴식을 하는 것이 위험하여 그나마 비교적 평탄한 곳을 정해야 했다. 쉬고 있다가 자칫 계곡 및 벼랑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중대 행정보급관과 취사병들이 선발대로 투입된 탓에 점심은 주먹밥으로 대체했다. 행군 간에는 배가 든든해야 잘 걸을 수 있는데 허기가 지면 낙오할 수도 있어 건빵을 추가로 휴대했지만 20대 청년들의 허기를 채울 수는 없었다. 오후 늦게 만산동 골짜기에 도착했다. 군장을 풀고 바로 주변 능선에 소대별로 개인 텐트를 설치하며 숙영준비를 했다. 그때 먼저 도착해 준비한 저녁식사가 분배되었다. 야전에서의 취사에 숙달되지 않은 취사병들이라 설익은 밥이었지만 꿀맛이었다. 미식별 천연동굴서 은거흔적 발견, 불온전단 회수하고 독립가옥 신원확인 박영일 중령의 노마지지(老馬之智), 정확한 취약점을 찾아내 “마음은 언제나 태양..!”, 의기에 차 정열을 불태웠던 시절 중대 상황실 텐트에 당직 소대장을 근무시키고 야간 야외점호를 한 뒤 취침에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일조 점호 후에 계획된 주변 취약지역 수색정찰을 시작했다. 모든 일에는 분명한 결과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소대장들에게 경쟁을 붙였다. 각자의 수색 책임지역에서 미식별된 은거가능한 천연동굴이나 은거 흔적을 찾으라고 했으며 북에서 뿌려진 불온전단을 가능한 많이 회수하고, 심신 산골에 홀로 있는 독립가옥은 필히 방문해서 신원을 확인하도록 강조했다. 각 소대를 수색정찰에 투입시키고 숙영지 텐트 상태를 재점검하고 있는데 멀리서 짚차 한대가 오는 것이 보였다. 사단 작전참모 박영일 중령(육사25기, 소장 예편)이었다. 필자는 취약지 상주훈련 계획과 현재 각 소대가 수색정찰 중임을 설명하면서 숙영지를 안내했다. 그런데 사단 작전참모는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 훈련 계획은 잘 수립했으나 취사장 위치가 잘못 되었다며(상단의 만산동계곡 사진을 참고로) “숙영지와 분리하여 계곡 건너에 취사장을 설치하면 만약 집중 호우 발생시에 계곡물이 불어나 식사추진 및 철수시 위험할 수 있으니 조정하라”는 것이었다. 각 텐트는 능선쪽으로 올려 있어 안전하지만 취사를 위해 급수가 용이한 물이 흐르는 계곡 건너에 설치된 취사장의 안전 취약점을 지적하며 추가로 사단에서 만산동으로 이동하는 도로가 부실하니 도로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는 지시를 하고는 어깨를 두드리며 현장을 떠났다. 작전참모는 그해 가을에 대령으로 진급하여 사단의 참모장을 거친 뒤 훗날 인접 연대장으로 취임했다. 필자보다 선배로서 지내온 많은 군생활 경험이 정확한 취약점을 찾아냈다. 노마지지(老馬之智)라는 사자성어처럼 선배는 역시 선배였다. 필자는 유선으로 대대장에게 작전참모의 방문과 지적 및 추가 지시사항을 보고했고 대대장은 즉시 시정 후 훈련에 임하라고 강조했다. 오후가 되자 소대별로 복귀를 했다. 역시 결과 위주의 훈련을 강조한 탓에 수개의 은거 가능한 천연동굴을 찾아냈고, 많은 불온전단들을 수거하는 성과도 올렸다. 저녁 식사 준비시간인 자유시간에는 아직 유단증을 못 받은 중대원들을 모아 태권도 교육도 병행했다. 주둔지가 아닌 야외라는 것이 오히려 저조자들에게 개별지도를 할 수 있게 되어 차후 심사를 대비한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날이 저물자 야간 분·소대 전술훈련도 했다. 다음날부터는 작전참모 지시대로 사단본부까지 도로 보수도 병행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타중대와 함께 대대장의 통제를 받는 것을 벗어나 중대 단독으로 훈련을 하는 것이 상급 및 인접 부대의 눈치를 안보게 되어 더 효과적인 훈련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훈련 마지막 날 밤이 되었다. 점호 후 전 중대원이 텐트로 들어가 취침을 하고 약간의 시간이 지났는데 당직 소대장이 보고할 것이 있다고 해서 상황실 텐트로 나갔다. 소대장들이 모여 있었다. 책상에는 약간의 더덕이 놓여 있었고 잠시 후 행보관이 막걸리를 가지고 들어왔다. 잠시 망설였으나 모처럼의 자리라 합석을 하였다. 소대별 수색활동시 전단과 함께 수거한 자연산 더덕 안주에 들이키는 막걸리가 너무도 좋았다. 더불어 그동안 함께 근무하면서 느꼈던 보람과 애로점들을 서로 나누며 한마음으로 단결될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칼럼을 쓰는 지금, 중대장시절 그때 고락을 함께했던 소대장 김태정, 우광호, 변상훈, 이동호들의 의기에 찼던 그때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마음은 언제나 태양..!”구호 아래 한마음이 되어 항상 신나고 즐겁게 정열을 불태웠던 시간이었다.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0-12-15
  • 한국수력원자력·원자력안전위 등 사이버공격 지속 발생 및 증가 추세
    ▲ 지난 2014년 12월 30일 조석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이 국회에서 열린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원전 사이버 공격 관련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사진제공=연합뉴스] 신용현 의원, "최근 10년간 한수원 인터넷망 사이버 공격 시도 1,366건" 송희경 의원, "5년간 원자력안전위 및 산하기관 사이버 공격 시도 268건"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안보전문기자] 국내 원자력발전소를 운영하는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에 대한 사이버 공격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또 원자력안전위원회 및 산하기관에 대한 사이버공격 시도도 증가하고 있어 대비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6일(일) 바른미래당 신용현 의원(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간사)이 한수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최근 10년간 한수원 인터넷망 해킹시도 현황’ 자료에 따르면 악성코드 공격, 자료훼손 및 유출, 홈페이지 공격 등 총 1,366건의 사이버 공격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사이버 공격 시도 유형을 보면, △악의적으로 사용자에게 피해를 주는 프로그램인 ‘악성코드 공격’이 835건으로 가장 많았고, △비인가자가 홈페이지 접속 후 자료를 삭제 또는 변경하는 ‘홈페이지 공격’이 329건 △일명 D-DoS로 불리는 ‘서비스 거부 공격’ 111건 순이다. 그 외에도 자료훼손 및 유출, 비정상 사용 등 다양한 공격이 시도됐다. 한수원 인터넷망에 대한 사이버공격은 2012년 515건이었으나 2016년 145건, 2017년 104건, 2018년 62건 등 지속적으로 감소 추세이다. 또 최근 3년간 공격이 이뤄진 국가별 현황을 보면 우리나라(151회)를 제외하고는 중국(62회)이 가장 많았다. 신용현 의원은 “10년 간 1,300건이 넘는 사이버 공격 시도가 이뤄진 것을 볼 때 국가기밀 유출, 원격제어 등의 위협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한수원이 사이버 공격에 대한 철저한 대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한수원은 원전을 운영하는 사업자로서 단 한 번의 사이버공격만으로도 국민안전과 국가안보에 치명적 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며 “한수원 등 정부당국은 보안시스템 강화, 전담인력 확충 등 사이버보안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자유한국당 송희경 의원이 원자력안전위원회와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 한국원자력안전재단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5년부터 올해까지 이들 기관에 대한 사이버 공격 시도가 총 268건 발생했다. 이 중 202건이 원자력안전위를 대상으로 발생했다. 연도별로는 2015년 32건, 2016년 25건, 2017년 51건, 2018년 63건이었고 올해는 9월까지 97건으로 나타났다. 송 의원은 원자력안전재단의 경우 2015년 방사선 작업종사자 약 19만 명의 정보가 담긴 '방사선작업종사자종합정보시스템'(RAWIS)이 D-DoS 공격용 악성코드 3개에 감염됐는데 4년이 지난 올해 5월에야 발견됐다며 대응이 미흡함을 지적했다. 이들 기관의 자료전송 현황 관리도 제각각이다. 올해 원자력안전위의 업무망 자료가 외장메모리로 전송된 건수는 약 72만 건에 달하는 반면,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은 업무망에서 외장메모리 사용을 차단하고 있다. 원자력안전재단은 현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송 의원은 "원자력안전위 및 산하 기관에 대한 사이버 공격 시도는 2015년 대비 올해 3배가량 급증했지만, 사이버보안 전담 인력은 1∼2명뿐이고 대부분 겸직"이라며 "보안 전담인력 확충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어 "국내 원자력 안전기관에 대한 사이버 공격은 원전 기술 경쟁력은 물론 국민 안전에도 치명적인 위협요인으로 작용할 우려가 큰 만큼 면밀한 현황 점검과 철저한 대비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 전역군인
    2019-10-07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