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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15)] 통일전망대에서 대한민국 평화 기원하며 완주 기념 ‘만세삼창’ 외쳐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8월 30일, 종주를 시작한지 12일째 날이자 마지막 날이다. 오늘은 거진읍 반암리에 위치한 행운 민박에서 거진읍, 화진포, 대진리를 거쳐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까지 약 15㎞정도는 걷고 출입신고소부터 통일전망대까지는 차량으로 이동하는 여정이었다. 오늘 종주하는 지역에는 거진, 대진 등의 마을이 있고 유명한 관광지인 화진포가 있으며 6.25남침전쟁 시 격전지였던 월비산, 351고지 등이 있다. 지난 10일 동안 아침 식사를 담당했던 황금철 단원이 오늘은 사발면이 아니라 파도 썰어 넣고 달걀도 넣어 끓인 특별한 라면을 준비했다. 모두들 감사한 마음으로 맛있게 잘 먹고 6시경 민박집을 나섰다. 민박집 주인 아주머니는 텃밭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단원들 모두 아주머니가 베풀어준 친절함과 호의에 감사하며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특히 아주머니와 동갑인 박찬도 단원은 더 다정다감하게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아주머니께서는 “나에게 이렇게 따뜻하고 다정한 말을 해준 사람이 참으로 오랜만이다”라고 감격해 하셨다. 만나는 사람마다 진심어린 말로 힘과 용기와 편안함을 주시는 박찬도 다원이 존경스럽고 부러웠다. 우리는 바닷가 모래사장을 밟으며 여정을 시작했다. DMZ 종주의 완주를 눈앞에 두고 있어서인지 대원들의 걷는 모습은 경쾌했다. 우리는 불가능 할 것 같았던 이번 도전의 마무리 지점에 와있었다. 거진 읍내를 통과하니 화진포 이정표가 보였다. 화진포 호수는 아주 오랜 옛날에는 바다였는데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모래로 바다와 격리돼 지금은 담수와 해수가 교차하는 천연 호수라고 한다. 면적은 약 72만평으로 여의도 넓이와 거의 비슷하고 호수 둘레는 10㎞가 넘는 산책길이 조성돼 있다. 이 호수와 바다 사이의 백사장이 화진포 해수욕장이며 울창한 소나무 숲이 유명하다. 호수 주위에는 고성군의 꽃으로 지정된 해당화가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방랑시인 김삿갓은 화진포의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 화진포의 8경을 읊었고, 그 중 3경이 平沙海棠(평사해당: 호수 주변 넓은 모래밭에 핀 붉은 해당화)이다. 이 호수는 바닷물이 들고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통로가 있고 호수 표면에는 담수가, 호수 깊은 곳엔 해수가 있어 민물고기뿐 아니라 바다고기도 살고 있다고 한다. 매년 여러 종류의 철새들이 찾아오고 다양한 생물들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닷가인데다 경치가 아름다워 산 중턱에는 광복 후 김일성 별장, 한국전쟁 후 이승만 별장, 이기붕 별장이 지어졌다. 대진항을 지나 통일안보공원 근처에 명파리 검문소가 있었다. 이 검문소는 민간인통제선 안쪽 지역을 출입하는 민간인을 검문하던 초소였다. 지금은 통행인들의 불편을 줄이기 위해 CCTV로 감시만 한다고 했다. 임무수행 중인 초병들이 CCTV로 우리를 확인하는 것 같더니 다가와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우리의 여정을 설명하며 현역 신분증도 보여 주었다. 초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해안가 경계 철조망을 따라 만들어진 순찰로를 걸었다. 대진항을 지나자 마차진 해변과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까지 700m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였다. 아침에 출발할 때 출입신고소까지 11㎞를 예상했는데 실제로 걸은 거리는 약 15㎞ 정도였다. 10시쯤 통일전망대 출입 신고를 마친 후 주차장에서 지인이 보낸 분을 만났다. 표정이 밝고 친절한 분이었는데, 그가 운전하는 차량으로 통일전망대까지 이동했다. 이동하는 길 서쪽 방향 5㎞ 지점에는 6.25전쟁 시 전투가 치열했던 월비산, 351고지 등이 있었다. 6.25전쟁 초기인 1951년 10월 중순부터 휴전 직전까지 7차례에 걸쳐 고지 쟁탈전이 있었다. 당시 1군단 예하 수도사단과 11사단 등은 월비산과 351고지 탈환을 위해 작전을 수행했다. 육·해·공군이 합동작전을 수행한 이 전투에서 해군은 지속적인 함포사격을 했고 공군은 총 1500여 회 출격해 적 핵심시설 및 진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휴전 협정 시 월비산과 351고지는 북한 땅이 됐다. 월비산과 351고지 전투 기념비는 통일전망대에 위치해 있었다. 이 기념비에는 “이 전투에서 호국의 신이 되신 전몰장병의 전공을 기리고자 1957년 7월 15일 제3군단에서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대진리에 전투기념비를 건립하고 관리해 오던 중 통일전망대가 설치돼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분들에게 민족분단의 아픔을 되새기고 조국 수호의 증표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그날의 격전지가 바라다 보이는 이곳으로 이전하였음. 1988. 12. 26”이라고 적혀 있었다. 통일전망대에 도착하니 해금강을 비롯하여 북한지역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고성군 홈페이지에는 분단 현실이 발아래 펼쳐있는 곳으로 분단의 아픔과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을 되새기고자 1984년에 통일전망대를 지었다고 설명돼 있다. 동해안 최북단인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호리 해발 70m 고지 위에 위치한 이 전망대에서는 16∼25㎞ 거리 떨어진 금강산을 볼 수 있으며, 해금강 대부분이 한눈에 보였다. 우리 넷은 함께 만세 삼창을 외쳤다. 우리 대한민국의 평화가 유지되기를 기원하며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지금은 갈 수 없지만 언젠가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그날을 기원하면서 감사기도를 올리고 성모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도 찍었다. 차량 지원을 나온 분이 사진을 찍어줘 오랜만에 단원 넷이 모두 나오는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1년 중에 해금강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날이 많지 않다는데, 오늘은 잘 보여서 우리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박찬도, 이창조 단원은 통일전망대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두 분은 2008년 4월 초에 이곳을 출발하여 5년여 동안 동해안, 남해안, 서해안을 돌고 돌아 4개월 전인 지난 2013년 4월에 임진각까지 도착해 ‘대한민국 U자 걷기’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걸어서 대한민국을 한 바퀴 돌아온 셈이다. 그 걷기에는 총 26명이 참여했고 필자도 2012년 서해안 구간 걷기에는 함께 했었다. 단원들 모두 이 곳에서 장시간 머물면서 아름다운 풍경도 보고 12일 간의 여정을 정리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갈 길이 멀었고, 차량 지원을 나온 분을 생각하니 지체 없이 출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돼 곧장 속초로 이동했다. 버스터미널 근처의 ‘아바이 마을 식당’에서 모둠 순대와 함흥냉면으로 식사하면서 지난 12일을 되돌아보고 기억에 남는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걷는 동안 내내 행복했다. 우리가 만난 사람들은 마음이 따뜻했고 지친 우리는 많은 도움을 받고 힘을 얻었다. 장거리를 잘 걸으려면 배낭의 무게를 줄여야 한다는 것과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면 고통스럽다는 것도 경험했다. 다리 근육의 힘은 걸을수록 강해진다는 것도 알았다. 물 한잔을 대접받으면서 감동했고, 아무리 좋은 비옷도 오랜 시간 비를 맞으면 속옷까지 젖는 것과 잠깐 쉬는 나무그늘이 얼마나 시원한 지도 경험했다. 우리는 고통을 겪는 상황에서도 “아는 것만큼 보인다. 내 주변 사람에게서 항상 배울 거리가 있다. 모든 사람이 다르고, 다름을 인정해야한다. 걸을수록 성취감이 커지고 자신감이 생긴다. 고통을 겪으며 선열들께 감사한다”라는 좋은 말도 나누었다. 또 “우리가 왜 걷는 거지?”라는 질문도 했고, “살아 있기 때문에, 건강하게 살기 위해, 삶의 의욕과 활기를 높이기 위해”라고 답했다. “가능하면 우리의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기면 좋겠다”라는 말도 했다. 이렇게 우리는 12일간의 대장정이었던 DMZ 종주를 마감했다. 함께했던 5670 단원들께 이 지면을 빌려 경의와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기도와 전화, 문자, 직접 방문 등으로 안전하고 건강하게 걸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모두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합니다. 그리고 DMZ 종주 완주를 축하합니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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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생 2막
    2021-08-17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14)] 이승만 대통령 휘호 ‘爲國盡忠’ 새겨진 바위 보며 세찬 비 뚫고 완주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8월 29일, 종주를 시작한지 11일째 날이다. 오늘은 용대리의 설악산림 수련관을 출발하여 진부령 정상에 오른 후 진부리, 장신리를 거쳐 고성군 광산리, 대대리를 지나 거진항 근처 반암에 있는 행운 민박까지 걷는 여정이다. 5시경 기상하여 사발면, 선식, 우유 등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6시경 출발했다. 수련관 관리자에게 용대리 휴양림 입구까지 차를 태워 달라고 부탁했다. 최초 계획했던 오늘 여정은 이곳이 아닌 용대리 휴양림 숙박시설에서 금강산 건봉사 입구에 있는 민박집까지 약 28㎞였다. 그런데 숙소 위치가 변경돼 여기부터 걷게 되면 오늘 종주거리가 너무 길어져 무리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차를 타고 가면서 얘기를 나누다보니 짧은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다 왔다고 한다. 차에서 내리니 용대리 휴양림 입구가 아닌 진부령 정상이었다. 우리를 태워다준 관리자가 칠십 노구를 이끌고 걷는 단원들의 모습이 안쓰러워 걷는 거리를 줄여주려고 의도적으로 용대리 휴양림 입구를 지나쳐 정상까지 데려다 주는 호의를 베푼 것 같았다. 걸으려고 계획했던 길을 걷지 못하게 됐지만 그 분의 호의를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되돌아가는 것도 아닌 듯해 진부령 정상부터 걷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예약한 민박집까지 거리는 10여㎞ 정도에 불과했다. 불현듯 예약된 숙소를 변경하여 오늘 좀 더 걸으면 내일 부담이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예약을 취소하면 민박집에 피해를 줄 것 같아서 마음이 걸렸다. 그런데 참 묘한 상황이 전개됐다. 마침 예약된 민박집 주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근처의 신축건물 공사장에서 일하는 일꾼 여러 명이 오늘 방을 비우기로 했었는데 공사가 지연돼 숙박을 연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박집 주인은 난감해 하면서 대신에 다른 민박집을 좋은 조건으로 소개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내가 예약을 취소하고 싶었는데 오히려 다행이었다. 나는 인심 쓰는 것처럼 괜찮다고 답한 후, 소개해준 거진항 근처의 행운 민박으로 숙소를 새로 정했다. 진부령 정상 공간은 널찍했다. 이 공간에 세워진 향로봉지구 전투 전적비에는 “맹호 수도사단 용사들은 단기 4284년(1951년) 5월 7일부터 동년 6월 9일까지 89회에 달하는 ‘괴뢰 제5군단’의 반격을 격퇴하고 설악산과 향로봉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고성군에서 운영하는 진부령 미술관도 있었다. 어떤 전시물이 있을지 궁금했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라 문이 잠겨 있었다. 진부령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백두대간은 산은 산대로 계곡은 계곡대로 그 줄기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또 산봉우리를 따라 이어지는 능선도 아름다웠다. 진부령은 추가령, 대관령과 함께 영동과 영서를 잇는 3대 고갯길이다. 그중 진부령은 높이가 529m로 가장 낮은 고개다. 이러한 특성으로 영동지방에 눈이 많이 와도 진부령은 여간해서 통제되지 않았다고 한다. 옛날 보부상들이 넘던 오솔길이 1987년 왕복 2차선 도로로 확장 포장됐다. 꼬불꼬불한 진부령 길을 돌고 돌아 정상에서 약 십리 정도 내려오니 장신리 이정표가 보였다. 길가에는 커다란 돌에 ‘소똥령 마을’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마을 이름이 독특하여 근처 상점에서 잠깐 쉬며 주민으로부터 지명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장신리’라는 행정구역 명칭보다 ‘소똥령 마을’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면서 ‘소똥령 마을’로 불리게 된 두 가지 설을 들려주었다. 하나는 동쪽의 작은 고개라는 의미로 소동령(小東嶺)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된소리로 발음하다 보니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옛날 영동지역에서 인제군 원통으로 소를 팔러 가려면 이곳에서 쉬거나 하룻밤을 묵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러다 보니 길 여기저기에 쇠똥이 있었고 그런 모습을 보고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대다수 주민들은 ‘소똥령’이라는 명칭을 더 즐겨 쓰고 있다고 한다. 조금 더 내려오니 ‘건봉사’라는 사찰의 방향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였다. 건봉사는 고성군에 위치한 사찰로 금강산 줄기가 시작되는 건봉산 감로봉의 동남쪽 자락에 있어 ‘금강산 건봉사’로 불린다. 이 사찰은 신라 법흥왕 시절에 창건된 사찰로 약 1,500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6·25전쟁 시 폭격으로 수백 칸에 이르던 전각이 모두 폐허가 됐고 지금은 근래에 복원한 건물만 단출하게 서있다고 했다. 고성군 광산리를 지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친필 휘호가 새겨진 바위가 있었다. 휘호 내용은 ‘爲國盡忠’이었다. 안내판에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께서 6.25전쟁 당시 11사단을 지휘하는 사단장에게 ’조국을 위해 충성을 다하라‘는 뜻으로 친필을 하사했고 그 시기는 1951년 9월경이며 친필휘호의 바위 음각 시기는 하사 받은 해 봄이라고 적혀 있었다.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지면서 먹구름이 몰려들었고, 곧이어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아스팔트 도로임에도 불구하고 금방 도랑 같은 물길이 만들어 졌다. 비를 피할 곳도 없어 비를 맞으며 계속 걸었다. 마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쬘 때도 걷는 것처럼. 시원한 비를 맞으며 걷는 행운을 만났다고 생각하며 내리는 비를 즐기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대원들은 도로에 고여 있는 물도 아랑곳하지 않고 첨벙첨벙 걸으며 속도를 높여 걸었다. 우리는 모두 우비를 입고 두 시간도 넘게 걸었다. 비옷을 입을 때에는 겉옷이 젖을까 노심초사 했었는데 나중에는 속옷까지 모두 젖었다. 신체 모든 부위의 감각이 내리는 비의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사관학교 다닐 때 여름에 군사훈련을 받으며 이렇게 억수같이 내리는 비에 온몸을 적셨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맨몸으로 자연에 덩그러니 버려진 것 같은 상황을 경험하며 평상시 자각하지 못했던 느낌이 왔다. 그리고 우리가 더없이 약한 존재라는 사실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 ‘야지에서 비를 피할 방법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비를 맞고 걷고 있다’는 상황을 생각하면 불쌍하고 측은한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시원함, 홀가분함 등 좋은 느낌을 느끼며 걸었다. 우리는 모두 흠뻑 젖은 상태로 오후 2시경 행운 민박에 도착했다. 비가 계속 내렸기 때문에 점심은 우동, 짬뽕, 간짜장, 탕수육을 배달시켜 먹었다. 다행히 한 단원과 동갑인 함경도 출신의 주인 아주머니가 모든 세탁물을 가져오라고 하여 세탁기로 돌려주셨다. 비가 그친 후에는 빨래 줄을 가져와서 널 수 있도록 준비해 주셨다. 한참 동안 휴식을 취했고, 비가 그친 후 우리는 동네를 한 바퀴 돌며 바다 구경도 했다. 저녁은 해변 횟집에서 회 정식으로 먹었다. 푸른 바다를 보며 시작한 만찬이었는데 주변이 깜깜해질 때 끝났다. 참으로 오랜만에 편하고 여유롭게 앉아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일 약 10여 ㎞만 걸으면 여정을 마무리한다는 생각과 함께 DMZ 종주 기간에 있었던 일들로 떠올리며 편안한 마음으로 마지막 밤 잠자리에 들었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 전역군인
    • 인생 2막
    2021-08-09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13)] 향로봉·노전평 전투 지역 지나며 전사자 부인 사연에 가슴이 먹먹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8월 28일, 종주를 시작한지 10일째다. 오늘은 원통리에 위치한 을지회관을 출발하여 한계리, 남교리를 거쳐 용대리의 설악산림 수련관까지 약 28㎞를 걸었다. 인제군 북면은 면사무소가 있는 원통리의 ‘원통’이란 이름이 더 유명하다. 북면은 동해안으로 접근하는 관문으로 진부령을 넘으면 고성군, 미시령을 넘으면 속초시, 한계령을 넘으면 양양군과 연결된다. 인제에는 향로봉, 서화계곡, 노전평 지구, 백담사, 만해 마을 등이 있다. 5시경에 컵라면과 어제 정전택님이 가져온 햇반, 김, 몇 가지 반찬을 곁들여 아침식사를 하고 6시경 숙소를 출발했다. 조금 걷다 보니 원통리 표지석이 보였다. 표지석에는 ‘원산으로 가는 통로’라는 의미로 원통이 정해졌고, 조선시대에 원통역(驛)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당시에는 대체로 30리마다 역(驛)을 운용했다. 역은 말을 이용해 국가 교통 및 통신 기능을 수행했던 곳이나, 근대적인 통신 제도와 교통수단의 출현으로 1896년에 사라졌다. 하천을 따라 백담사 입구 마을까지 약 5시간 정도 걸었다. 걷는 동안 정자문, 12선녀탕 계곡 입구, 용대초등학교, 백담사 입구를 지나 용대삼거리까지 걸었다. 용대리 지역은 상당히 넓어 도중에 길을 잘못 들어 고생도 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냇가 커다란 나무 그늘에서 더위를 피해 친구들과 어울리는 분들에게 매운탕과 소주도 몇 잔 대접받았다. 여기저기에 군락을 이루며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는 설화초(설악초)도 보였다. 식물에 관해 박식한 한 단원이 “이 꽃은 눈이 내린 것처럼 하얗고 잎 색깔도 눈꽃처럼 하얗게 변해 설화초로 불린다”고 설명했다. 설화초의 꽃말은 ‘환영과 축복’인데, 이곳에 오는 사람들을 환영하는 의미로 심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담사 입구 마을에서 깔끔한 중국집을 찾아 짜장면을 먹은 후 공기 좋은 휴양림 콘도에서 묵는다는 즐거움에 부지런히 걸어서 용대자연휴양림에 도착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안내 데스크에서 예약된 방을 찾았다. 그런데 안내 데스크 근무자는 예약자 명단에 내 이름이 없다고 했다. 예약했다던 지인의 이름도 없어서 순간 아주 당황스러웠다. 오늘 묵는 숙소가 예약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사전 답사를 하면서 숙소를 정하고 예약 했는데, 10일째 숙소는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남아있는 거리와 일자를 고려하니 용대리가 적절했다. 그러나 마땅한 숙소를 발견할 수 없어 고민하다가 휴양림에 숙박시설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당시 산림청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전화해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지인은 예약이 가능한지 알아보겠다고 했고, 며칠 후 수련관이 예약됐다는 연락과 함께 전화번호도 받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용대리 지역의 숙소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그런데 예약자 명부에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지인으로부터 받은 전화번호로 연락해 보니 예약된 숙소는 지금 우리가 있는 진부령 근처가 아니라 미시령 근처라고 했다. 이곳 사정을 잘 모르는 필자가 용대리라는 말만 듣고 이곳에 비슷한 시설이 2군데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예약된 숙소는 10㎞ 이상 떨어져 있었고, 대중교통도 없는 상황이었다. 미시령 근처 수련관을 관리하는 분께 우리의 상황을 설명하고 부탁을 드렸더니 고맙게도 차를 몰고 와주셨다. 덕분에 편하게 미시령 옛길 관광도 하며 오후 5시경 숙소인 설악산림 수련관에 도착했다. 콘도 형태로 시설을 갖춘 깔끔한 공간이었다. 우리가 오늘 걸은 인제군 일대는 6·25전쟁 시 향로봉 전투와 노전평 전투가 있었던 지역이다. 향로봉 전투는 맹호부대가 1951년 3월 7일부터 그해 7월 9일까지 중공군과 벌인 전투다. 중공군은 중동부지역의 요충인 인제를 확보하기 위해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부대를 증원하여 설악산과 향로봉 일대를 여러 차례 공격했다. 그러나 맹호부대는 이를 격퇴하고 설악산 및 향로봉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서화 계곡의 노전평 부근에서는 1951년 8월 초순부터 1953년 7월 휴전 성립 직전까지 장기간 고지 쟁탈전이 벌어졌다. 당시 8사단은 인제 서화리 축선과 인접한 고지군을 차지하기 위해 요충지인 노전평을 점령했다. 이 전투에서 8사단은 승리했지만 전사 90명, 부상 536명, 실종 17명 등 피해도 컸다. 노전평 전투에서 전사한 90명 중 한 명일 것으로 추측되는 전사자의 아내가 말한 사연이 문득 생각나 마음이 아팠다. 지난 2017년 10월 24일 뉴스1은 ‘66년 만에 가족 품으로 돌아오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6.25전쟁 중이던 1951년 8월 8사단 10연대 소속으로 노전평 전투에서 전사한 김창헌 일병(1924년생)의 부인 황용녀(94)씨 자택을 방문해 전사자 신분확인 통지서와 유해 수습 시 관을 덮었던 태극기 그리고 발굴된 인식표와 도장 등 유품을 전했다. 고인은 노전평 전투 중 적의 총탄을 맞은 것으로 추정되며 28세의 나이에 전사했다. 부인 황씨는 “남편이 자원입대 했을 때 임신 중이었고 남편도 임신한 사실을 알았다”며 “남편은 태중의 아이를 남자로 생각해 ‘김인석’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전쟁터로 떠났다”고 했다. 남편이 떠나고 10일 후 딸이 태어나자 황씨는 “남편이 소중하게 지어준 아이 이름을 바꿀 수 없어 그대로 쓰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보따리 장사와 노점상을 하며 홀로 딸을 키웠는데, 이제라도 남편의 유해를 찾아 만나볼 수 있어 너무 감격스럽다”며 눈물을 흘렸다. 딸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남기고 산화한 젊은이, 60여년을 홀로 살며 딸을 키워 할머니가 된 여인, 남편의 얼굴이 아닌 유해를 만나는 것으로라도 감격스러워하는 여인, 딸 바보였을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함은 물론 아버지 얼굴조차 모르는 딸…. 그 삶이 어떠했을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6·25전쟁 시 한국군 사망자(실종자 포함)는 60만 9천여명이라고 한다. 이 분들은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그리고 후손들에게 자유 대한민국을 남겨주기 위해 목숨을 바치셨다. 우리는 이분들에게 감사해야 하고 경의를 표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유족들에게 보답도 해야 한다. 하지만 천안함 전사자를 포함해 국토방위 임무를 수행하다 순국한 분들을 대하는 일부 위정자들의 모습과 태도에 안타까움과 함께 분노가 느껴진다. 숙소에 도착한 후 그동안 많이 가벼워진 배낭의 짐을 풀고 땀 냄새가 진동하는 옷부터 빨았다. 관리하는 분이 짤순이를 돌려 빨래의 물기를 빼 주셔서 저녁 햇볕에도 잘 말랐다. 숙소에서 가까운 봉평 메밀 막국수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음식점 건물은 노부부의 큰아들이 부모님을 위해 특별히 설계했다는데, 민박도 받는 방 내부는 깔끔했고 노래방기기도 있었다. 노래를 좋아하는 주인과 함께 어울려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오늘 숙소 변경 문제로 많이 당황했던 것을 생각하며 내일 묵을 숙소에 전화를 걸어 예약 상태를 다시 확인했다. 집을 떠나온 지 열흘이 지났고, 이제 종주 일정은 2일 남았다. 한 방에서 넷이 묵었지만, 설악산의 맑은 공기를 느끼며 편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 전역군인
    • 인생 2막
    2021-08-03
  • ‘6·25남침전쟁의 예수와 영웅’에게 무공·국민훈장 수여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7월27일 문재인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최초로 ‘유엔군 참전의 날’을 맞이하여 미국 참전용사 故 에밀 조세프 카폰(Emil Joseph Kapaun) 군종 신부와 호주 참전용사인 콜린 니콜라스 칸(Colin Nicholas Khan)장군에게 각각 태극무공훈장과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여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유엔군 참전의 날 기념 ‘유엔군 참전용사 훈장 수여식’에서 “참전으로 맺어진 혈맹의 인연을 되새기며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헌신에 보답하겠다”면서 “역대 대통령 최초로 ‘유엔군 참전의 날’에 훈장을 수여하는 영광스러운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 ‘한국전쟁의 예수’ 故 에밀 카폰 군종 신부의 헌신적 생애 에밀 카폰 신부는 6·25남침전쟁 당시 미국 군종 신부로 참전해 '한국전쟁의 예수', ‘6.25전쟁의 성인’으로 불렸다. 이날 훈장 수여식에는 조카인 레이먼드 카폰이 대한민국 최고 등급인 태극무공훈장을 대리 수상했고, 염수정 서울대교구장 추기경과 주한 교황대사 대리인 페르난도 레이스 몬시뇰, 군종교구장 서상범 주교가 참석했다. 캔자스주 필슨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1940년 사제 서품을 받은 카폰 신부는 1950년 7월 군종 신부로 6·25남침전쟁에 파견됐다. 그의 소속 부대인 미 1기병사단 8기병연대 3대대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원산까지 진격했지만, 같은 해 11월 한국전에 불법 참전한 ‘중공군’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부대에는 곧 철수 명령이 떨어졌지만, 카폰 신부는 중공군 포위를 뚫고 탈출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부상병들을 돌보기 위해 전선에 남았다. 그는 통나무와 지푸라기로 참호를 만들어 부상병을 대피시켰고 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다가 결국 중공군의 포로가 됐다. 하지만 포로수용소에서도 카폰 신부는 자신보다 포로가 된 동료 병사들을 돌보는 데 헌신했고, 그 와중에 이질과 폐렴에 걸려 1951년 5월23일 35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전장에서 꽃핀 카폰 신부의 박애 정신은 포로가 되었다가 살아남은 병사들의 증언을 통해 알려졌고, 1954년 그의 생애를 담은 ‘종군 신부 카폰 이야기’라는 책으로 발간됐다. 한국에는 1956년 당시 신학생이었던 故 정진석 추기경이 ‘종군신부 카폰’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판을 내면서 처음 소개됐다. 이후 그는 ‘한국전의 예수', ‘6·25 전쟁의 성인'으로 불리워왔다. 故 정 추기경은 ‘지난 3월 미국 하와이주 국립태평양 묘지에 안장된 신원 미상의 참전용사 유해 중에서 카폰 신부의 유골이 확인됐다는 소식을 전달받았다’고, 출간된 개정판의 서문에 추가하는 구술내용을 남기기도 했다. 카폰 신부는 전쟁터에서 인류애를 실천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3년 미국 정부로부터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을 받았다. 교황청 시성성(순교·증거자의 시복·시성 담당)은 1993년 카폰 신부를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했고, 카폰 신부 출신 교구가 성인 시복을 추진하고 있다. 염 추기경은 “카폰 신부님이 태극무공훈장을 받게 돼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기쁘고 감사하다”며 “이 땅에서 전쟁 중 목숨을 바친 분들, 우리나라를 위해 참전한 유엔군 청년들의 고귀한 죽음을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문 대통령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에밀 카폰 신부 유족에게 6.25전쟁 당시 카폰 신부가 착용하던 십자가가 달린 철모를 구현한 기념물을 선물하였다. 대리 수상한 레이먼드 카폰은 “이 훈장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6.25남침전쟁 참전용사 및 전사자들께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를 상기시켜 주는 것”이라며 “다시 한번 저희 삼촌을 대신하여 감사드린다. 대한민국은 저의 마음속에 특별한 자리로 남았기 때문에 꼭 다시 방문하겠다”고 말했다. ■ 호주 왕립연대 소대장으로 참전했던 콜린 칸 장군, 국민훈장 석류장 수상 문 대통령은 이어진 수여식에서 한국전쟁 때 파병된 호주군의 업적을 말하며 “호주왕립연대 소대장이었던 칸 장군님은 죽음의 고비를 넘긴 뒤 전쟁 후에는 대한민국 발전상을 호주 전역에 알리는 일에 앞장섰다”며 “전쟁 때 함께 싸웠고, 전후 복구에도 큰 힘이 되어준 장군님과 호주 참전용사들을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라고 소개했다. 이날 국민훈장 석류장 수상은 칸 장군의 조카 손녀인 캐서린 엘리자베스 칸(Katherine Elisabeth Khan)이 대리 수상했다. 문 대통령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칸 장군의 유족에게도 호주군이 참전했던 가평전투를 기리는 가평석 기념석패를 선물했다. 칸 장군의 조카 증손녀 이매진 스미스는 “콜린 칸 증조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오늘 훈장 수여식 참석하게 되어 영광”이라고 한국어로 말한 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참석하지 못해 굉장히 아쉬워하셨는데, 이 영광스러운 상과 영예를 주셔서 정말 감사드린다”라고 말했다.
    • 전역군인
    • 종합
    2021-07-28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12)] 인제지구 전투와 리빙스턴교의 아픈 사연 떠올리며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도 새삼 느껴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8월 27일, 종주 9일째이다. 오늘은 양구군 남면 광치터널 근처의 컨테이너 숙소를 출발하여 광치령로를 따라 걸었다. 광치터널을 통과한 후 서호교를 건너 인제 읍내를 지난 다음, 합강리를 거쳐 인제군 원통면에 있는 을지회관까지 약 28㎞를 걸었다. 우리가 종주한 인제 지역에는 광치령, 인제지구 전투 전적지, 리빙스턴교 등이 있었다. 오늘 아침은 양구 휴게소 아주머니가 김치를 곁들여 끓여준 표고버섯 라면을 맛있게 먹었다. 우리들이 먼 길을 걸어왔고 아직 가야할 길이 상당하다는 것을 아는 아주머니는 먼 길 떠나는 자식에게 하듯이 밥을 수북이 담은 고봉밥 여러 그릇을 식탁에 갖다 놓으며 많이 먹으라고 권했다. 이에 감사한 마음을 담아 아주머니와 기념사진도 한 장 찍었다. 오전 6시가 되기 전에 출발했다. 구름이 약간 낀 날씨였다. 광치령로를 걸어 6시경 광치터널 입구에 도달했다. 터널을 지난 후에는 오르막길이 아니어서 걷기가 수월했다. 광치령의 표고는 약 800m이다. 양양 60㎞, 인제 12㎞라는 이정표도 보였다. 양구와 인제, 원통을 연결하는 광치령 인근에는 울창한 원시림이 조성돼 여러 개의 폭포와 계곡들이 있었다. 우리가 오늘 걸은 광치령 길은 잘 닦여진 왕복 2차선 아스팔트 도로였지만 광치령 옛길은 오솔길이었다고 한다. 이 길은 워낙 높고 험해서 보통 사람은 걸어서 넘을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이 길을 북한이 6·25전쟁을 준비하며 확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1994년에는 광치 터널이 준공돼 지금은 자동차로도 수월하게 넘을 수 있게 됐다. 필자가 1981년 초등군사반 교육 후 초임지 명령을 받았을 때 특히 중동부 전선의 백두산 부대와 을지 부대로 배치되는 동기들과 위로주를 마시던 기억이 났다. 그때 우리는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 할 것이라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옛날에는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라는 말도 있었는데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된 지금은 그런 말이 사라진 것 같다. 38선 이북에 위치한 인제군은 1945년 광복 이후 북한이 남침하여 6·25전쟁을 일으키기 전 까지는 북한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이 수복했다가 중공군의 개입 후에는 국군이 후퇴하여 북한에 편입되는 등 전쟁의 영향을 많이 받은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연합군은 1953년 5월 20일부터 반격작전을 전개했다. 홍천부터 진격해 소양강의 교량을 점령하면서 교두보를 확보했고, 이어 관대리와 인제를 탈환하고 6월 4일 원통리까지 북진했다. 이 전투로 중공군에게 빼앗겼던 인제와 현리 지역 등 중동부전선의 실지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고 산화한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1958년 합강리에 인제지구 전투 전적비가 건립됐고 1997년 인제군 남북리로 이전했다. 이 지역에는 합강리와 덕산리를 잇는 리빙스턴교가 있는데, 인제지구 전투와 관련한 아픈 사연이 있다. 당시 미2사단 포병연대에 소속돼 작전을 수행하던 리빙스턴 중령은 북방 2㎞ 지점에서 매복해 있던 적군의 기습을 받았다. 리빙스턴 중령은 덕산리에서 인북천을 건너 합강리로 후퇴하기 위해 도하를 시도했으나 폭우로 강물이 불어나 대다수 부대원들이 강을 건너지 못하고 적군의 총탄에 전사했다. 그도 중상을 입고 후송됐지만 끝내 세상을 떠났다. 야전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던 그는 ‘이 강에 다리가 놓여있었다면 이렇게 많은 부하들이 희생되지 않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을 말하고 미국에 있는 아내에게 ’사재를 털어서라도 인북천에 다리를 놓아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부인이 다리 건설에 필요한 기금을 희사해 1957년 12월 4일 길이 150m 폭 3.6m의 아이빔에 붉은 페인트를 칠한 목재 난간의 다리가 세워졌다. 이 다리는 리빙스턴 중령의 희생과 자유 수호를 기리는 상징물이 됐다. 아무런 생각 없이 내리쬐는 태양을 벗 삼아 맑은 공기를 마시며 즐겁게 걸었다. 가끔 꽃밭을 잘 가꾼 집도 보였다.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산과 계곡, 파란 하늘과 구름에 둘러싸인 산봉우리들은 아름다웠다. 산을 감싸고 흐르는 물줄기는 생명을 탄생시키고 산하를 기름지게 만들며 울창한 숲이 만드는 능선의 녹색 물결이 길을 걷는 우리들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준다. 우리 국토가 베풀어주는 편안함의 이치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스페인 까미노 길을 30여일 걸으며 만났던 넓고 끝없는 평원, 이집트에서 2년간 머물면서 경험했던 생명체가 존재할 것 같지 않은 황량한 사막이 떠오르며, 우리 국토는 ‘생명을 탄생시키고 편안함을 느끼게 만드는 녹색 산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설악을 품은 인제”라는 현수막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원통 읍내의 중국집에서 우동과 간짜장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많이 쉬었다가 일어났다. 을지회관으로 가는 도중 한사모 회원 중 특별한 인연이 있는 정전택님의 전화를 받았다.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 원통에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회관 입구에서 만나 반갑게 포옹했고, 그와의 인연이 시작된 과정이 떠올랐다. 필자는 2012년 4월 강원도 원주에서 열린 ‘100㎞ 걷기대회’에 처음 참가해 완보했다. 그 후 2017년까지 6년 연속 완보했고, 올해 다시 참가해 현재 7회를 완보했다. 100㎞ 완보는 엄청난 경험이었으며, ‘나는 100㎞ 완보 후 내 인생이 바뀌었다’라고 여러 사람들에게 얘기했다. 그리고 매년 주변의 지인들에게 함께 걷기를 권했고, 정전택님과는 그렇게 맺어진 인연이다. 그는 한사모 주말걷기 회원이었고, 매주 일요일 함께 걷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필자가 그랜드슬램 워커가 된 사실을 알게 됐다. 2013년 어느 날 그는 100㎞ 걷기에 도전한다고 선언했다. 나이를 고려해 부인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2014년 100㎞ 걷기대회에 참가해 거뜬히 완보했다. 그리고 그해 7월 ‘제주도 250㎞걷기 대회’와 9월 ‘군산 새만금방조제 66㎞ 걷기대회’에 참가해 여러 사람의 박수를 받으며 여유롭게 완보했다. 대한걷기연맹에서는 그에게 ‘2014년 그랜드슬램 워커’라는 타이틀을 부여했다. 그리고 그가 대한민국 최고령 그랜드슬램 워커라고 발표했다. 2014년 당시 그분의 나이는 77세였다. 정전택님은 “걷고자 하는 의지가 있고 충분히 준비하면 나이는 커다란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실천한 선구자였다. 정전택님과 우리들은 수다를 떨며 걷기와 관련한 여러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여기 걷고 있는 사람들이 몇 년 후에 다시 이 코스를 걸으면 좋겠다. 어쩌면 그때는 나이가 80이 넘은 사람도 있을 테니 그때는 ’6780 순례단‘이란 이름으로 걷자”라는 얘기도 했다. 어떤 분은 “젊은이들을 동참시키는 것도 의미가 있으니 40대가 포함된 4080단을 만들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현대인 중 적절한 운동 없이 건강 유지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면 아주 오랫동안 운동을 거의 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운동 부족으로 건강함을 잃어버리는 시대이기도하다. 그리고 건강을 얘기하면 건강관리를 말하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착각에서 벗어나 운동을 실천해야만 건강이 관리될 수 있다. 걷기는 모든 사람이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운동임이 분명하다. 남다르게 건강관리를 꾸준히 실천하고 있는 정전택님이 존경스럽다. 그리고 우리들이 가볍게 나눈 대화이지만 시간이 지난 다음에 어떤 형태로든 다시 한 번 더 이 길을 걸을 기회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저녁은 회관 식당에서 오리 백숙을 시켜 잘 먹었다. 정전택님은 다음날 우리가 먹을 햇반과 반찬, 포도주 팩 등을 가져오셨다. 걷기대회 경험이 많으셔서 그런지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맛있는 저녁도 사주셨다. 지면으로나마 다시 그 때의 감사했던 마음을 전한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 전역군인
    • 인생 2막
    2021-07-27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11)] 한반도 중동부 전선 걸으며 전사자의 넋 위로하고 평화 기원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8월 26일, 종주 8일째에 접어들었다. 오늘은 숙소인 상승회관을 출발하여 풍산리, 해산터널, 해산령 정상, 비수구미, 평화의 댐, 오천터널을 거쳐 광치터널 입구까지다. 종주 거리는 약 60㎞이나 실제 걸은 거리는 40여㎞ 정도이다. 오늘 걸은 양구 지역은 한반도 중동부 전선의 일부분이며 을지전망대, 펀치볼, 제4땅굴, 도솔산 등이 있다. 숙소를 출발해서 조금 걷다 보니 ‘평화로’에 들어섰다. 460번 지방도인데 ‘평화로’라는 이름을 붙인 것 같았다. 어떤 의도로 부여된 이름인지 모르겠으나 ‘평화’ 라는 단어의 의미를 생각하며 걸었다. 한참 걷다 보니 해산터널 입구였다. 해산터널은 해발 702m, 길이 1,986m로 터널 입구에 “최북단, 최고봉, 최장 터널”이란 팻말이 있었다. 터널 내부의 보행자 길은 아주 좁아 차량들이 지나갈 때 다소 불안했지만 기온은 낮아 시원했다. 터널을 통과한 후 ‘아흔아홉의 구비길’이라는 팻말이 보였다. 가는 길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조금 더 걸으니 해산령의 ‘해오름 휴게소’가 보였다. 휴게소 앞 안내도에는 “해산 전망대, 비목의 고장 화천을 찾아주신 여러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곳은 화천에서 평화의 댐으로 가는 아흔 아홉 구비의 중간 길목으로서 남과 북을 잇는 민족의 명산인 해산 절경을 한 눈에 전망 할 수 있는 쉼터입니다”란 설명이 있었다. 이어 비수구미(秘水九美: 신비로운 물이 빚은 아홉 가지 아름다운 경치)라고 적힌 팻말을 지나 여러 구비를 돌아 평화의 댐에 다다랐다. 이 댐은 북한의 수공(水攻)에 대비하고 홍수도 예방할 목적으로 1987년 2월 착공하여 1989년 1월 1단계 공사(높이 80m)를 완료했다. 2002년부터 2단계 공사(높이 125m)를 다시 시작해 2005년 10월 마무리됐다. 댐의 길이는 601m이며 최대 저수량은 26억 3천만 톤이라고 한다. 평화의 댐은 많은 국민들의 성금으로 만들어졌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할 수 없지만 나도 평화의 댐 건설에 성금을 낸 기억이 있다. 바로 가까이 DMZ가 있고 남북이 대치하는 현실을 생각할 때 온 국민이 평화를 갈구하고 있다는 의미를 담아 이 거대한 구조물에 평화의 댐이란 이름을 붙인 것으로 생각됐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댐 아래로 보이는 파로호는 평화로웠다. 평화의 댐 상류 쪽에는 비목 공원이 있었고, ‘비목’의 노랫말이 새겨진 기념비도 있었다. 이 가사는 정전(停戰)된 후 10여년이 지나 백암산에서 근무하던 한명희 작사가가 지었다. 그는 치열한 전투로 화약 연기 가득했을 백암산 깊은 계곡에서 수많은 돌무덤과 오래되어 이름도 알 수 없는 많은 목비(木碑)를 보았고, 달밤에 순찰을 돌 때 ‘이름 모르는 전사자들의 절규가 들리는 것 같았다’며 산화한 젊은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했다. 어쩌면 사람들은 평화의 의미도 제대로 모르면서 평화 타령을 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국가의 안위와 평화를 위해 생명을 담보로 헌신하는 사람들이 군인이란 점은 분명하며, 6·25전쟁의 포성은 잠시 멎었지만 아직도 전쟁은 진행 중이다. 더 이상 한반도에서 전쟁이 없도록 대비를 잘하고 모든 국민과 후손들이 평화롭게 삶을 영위하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걸었다. 오늘 종주한 양구 지역에는 을지전망대, 펀치볼, 제4땅굴, 도솔산 등이 있다. 을지전망대는 양구 북방 27㎞, 군사분계선으로부터 약 1㎞ 남쪽 지점에 있는 가칠봉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북한 전방지역을 보려는 국민들이 꼭 들리는 안보관광지로서 날씨가 좋을 때는 금강산 비로봉과 4개의 봉우리(차일봉, 월출봉, 미륵봉, 일출봉)도 볼 수 있다고 한다. 펀치볼은 해발 400∼500m의 고지대에 발달한 분지이다. 1950년 전쟁 당시 양구군에 있는 가칠봉에 오른 연합군 종군기자가 봉우리에서 내려다본 지형이 마치 화채 그릇(Punch Bowl)과 비슷하다고 해서 불리게 됐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제4땅굴은 양구 북방 26㎞지점 DMZ 안에서 발견됐는데, 군사분계선과 불과 1.2㎞ 떨어져 있다. 이 땅굴은 1990년 3월 발견되었고, 땅굴 출입구에는 기념비와 안보 교육관 그리고 군견 ’헌트’의 동상이 있다. 헌트는 땅굴 추적과정에서 북한군이 설치해 놓은 지뢰를 밟아 산화하면서 여러 장병들의 소중한 목숨을 살린 공로가 있다. 헌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육군 소위로 추서됐고, 땅굴 입구에 동상을 세워 그 공로를 기리고 있다. 양구와 인제 사이의 험준한 산악지역인 도솔산에서는 1951년 6월 4일부터 19일까지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미 해병대 1사단에 배속된 우리 해병대 제1연대는 4,200명의 북한군을 상대로 치열한 육박전과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 24개 고지를 하나씩 점령하면서 전진했다. 고지 하나를 점령했다가 빼앗기고 또 빼앗는 전투를 반복하며 24개 고지를 6월 19일까지 완전히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 아군도 7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북한군 2,263명을 사살하고 44명을 생포했다. 산악전 사상 유래가 없는 치열한 대공방전으로 한국군 해병대 5대 작전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그 뒤 해병대에서는 ‘도솔산의 노래’라는 군가를 제정하여 그날의 승리와 용전의 기백을 후배 해병들에게 널리 알리고 있다. 평화의 댐을 약 3㎞ 지나 ‘평화쉼터’란 식당에서 오후 2시경 제육볶음으로 점심을 먹었다. 식사 후 근처의 바람골에서 흐르는 물에 발도 담그고 폭포도 구경하며 푹 쉬었다. 식당 사장님은 2남 1녀를 홀로 키운 여장부인데, 평화의 댐 건설 시 공사장에서 식당을 운영한 것이 계기가 돼 이곳에 자리를 잡았으며, 지금은 음식점과 가게 그리고 민박까지 운영하고 있다. 우리가 종주하던 그 해에는 피서객들이 상당히 많이 찾아 바쁘게 일했다고 했다. 바쁠 때에는 양구 방산면에서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는 큰 아들과 역도 선수인 둘째 아들, 그리고 시집간 딸까지 나서서 일을 거들어 준다고 했다. 여기서 양구까지는 민가도 없고 걷기에 너무 멀어 택시를 불러 이동할 계획이었는데, 마침 사장님 사위가 와서 우리를 양구까지 태워주었다. 오늘 숙소는 광치터널 입구 근처에 있는 컨테이너 숙소다. 비록 컨테이너지만 감지덕지한 마음으로 저녁을 맞이했다. 우리는 익숙한 장소, 사람, 음식 등으로 둘러싸인 심리적 안전지대에서는 마음이 편안하다. 하지만 안전지대 밖으로 한 발짝만 내딛으면 불편하고 괴로우며 난처한 일과 마주친다. 때로는 이런 모험에서 숨겨진 보물을 만나는 즐거움과 행복도 있다. 오늘 숙소 인근 휴게소에서 만난 두 손이 없는 심마니 아저씨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도 우리에게는 숨겨진 보물 같았다. 삶의 행로는 마음속에 정해놓은 여정과 일치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굳이 마음속의 시나리오에 자신의 인생 여정을 억지로 맞추기 보다는 삶의 과정을 좋아하여 전념하다 보면 만족할 수 있고 행복해 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 전역군인
    • 인생 2막
    2021-07-19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10)] 파로호·426고지·406고지 등 전쟁 격전지 걸으며 군인의 삶 되돌아봐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8월 25일, 종주 일곱째 날이다. 오늘은 대성산 인근의 승리회관을 출발하여 봉오리를 지나 율목교, 파포리, 상서면사무소, 파포삼거리를 거쳐 파포고개를 넘어 화천읍으로 향했다. 봉오리부터는 아스팔트 포장이 잘된 461지방도였다. 구만리의 파로호 전시관을 지나 풍산리에 있는 칠성부대 상승회관까지 약 26㎞를 걸었다. 이 지역은 6·25 전쟁 당시 파로호 전투, 426고지, 406고지 전투가 있었던 지역이다. 새벽 5시 10분, 선식과 우유로 아침을 먹고 평상시보다 좀 서둘러 오전 6시가 되기 전에 출발했다. 우연히도 단원 모두가 천주교 신자여서 어제 잠자리에 들기 전 내일은 일요일이니 미사에 참석하자고 의견 일치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10여분 정도 걸으니 8305부대 위병소가 보였다. 32년 전 필자가 연대장님께 전입신고를 했던 부대다. 그리고 어제 위문 왔던 선임하사 윤현준님을 처음 만난 곳이기도 하다. 부대 가까이에 있던 군 관사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 같았다. 그 당시 선임하사의 집은 군 관사였는데, 소대장 근무 시절 명절이나 생일 때 초대받아 식사 대접을 받은 기억이 났다. 어제 윤현준님께 그 이야기를 하니 정작 본인은 기억을 하지 못했다. 나에게는 낯선 환경에서 부대 음식만 먹다가 정성이 가득 담긴 따뜻한 음식을 대접받은 특별한 경험이어서 오래 기억에 남았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일상생활이었기 때문에 기억을 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지금과 비교하면 많은 것들이 열악했다. 병사들 내무반에는 벽돌과 진흙으로 만든 뻬치카라는 난방시설이 있었다. 석탄가루와 진흙을 섞어 만든 혼합물을 뻬치카에 태워 내무반을 따뜻하게 유지했다. 이를 전담 관리하는 ‘뻬당’(뻬치카 당번병)으로 책임감 있는 상병 또는 병장이 임명됐다. 뻬당은 밤새 뻬치카 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봐야 했지만 따뜻한 장소에 항상 있을 수 있어 병사들은 좋아했다. 그리고 장교들이 묵었던 독신자 숙소(BOQ)는 나무를 때서 난방을 했다. 저녁에 소대원이 방 바닥을 따뜻하게 데워 놓으면 온기를 느끼며 편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이른 새벽이 되면 방바닥의 온기는 사라지고 방안의 마실 물도 얼어 있었다. 당시는 목욕탕도 귀해 목욕을 하려면 인근 읍내에 나가야 했다. 근무가 없는 일요일에 가끔 나가 소주 한 잔을 곁들인 저녁식사를 하는 것이 당시 최고의 문화생활이었다. 봉오리 삼거리를 걸으면서 야외기동훈련, 연대전투단 훈련 등 타 지역에서 장기간 훈련을 하고 부대 복귀를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봉오리 지역을 행군하며 지나갈 때 길가의 지역 주민들로부터 따뜻한 격려도 받고 음료수도 나눠줘 마신 기억이 났다. 그때는 지역주민과 군의 관계가 상당히 인간적이었고 훈훈했던 것 같다. 4시간 20분 동안 조금 빠르게 걸었다. 율목교, 파포리, 상서면사무소, 파포삼거리를 지나 파포고개를 넘어 화천읍으로 향했다. 모두들 미사를 드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는지 쉬지도 않고 부지런히 걸어서 오전 11시에 시작하는 교중미사에 참석했다. 미사 후 성당 앞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휴식도 취하고, 친절한 교우님들이 주시는 달콤하고 향기로운 커피도 마셨다. 성당 근처에 있는 성원식당에서 여유롭게 점심을 먹고 오랫동안 편히 쉬었다. 자전거를 타고 자연을 만끽하는 사람들을 식당에서 만나 즐겁고 가벼운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들은 춘천을 출발하여 화천까지 왔고 평화의 댐까지 가는 중이라고 했다. 이어 구만리에 있는 파로호 전시관을 지나 풍산리에 있는 칠성부대 상승회관까지 걸어 이날 종주를 마쳤다. 6·25 전쟁 시 파로호, 426고지, 406고지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파로호는 1944년 5월에 화천댐이 건설되면서 만들어진 호수이며 건설 당시 이름은 ‘화천호’였으며, 상류에는 평화의 댐이 있다. 6·25전쟁 시 용문산 전투에서 6사단이 중공군 3개 사단의 공세를 막아낸 뒤 도망가는 중공군들을 파로호까지 추격하여 괴멸시켰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기념해 파로호(破虜湖, 오랑캐를 깨뜨린 호수)로 개명했고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파로호는 1945년 38선에 의해 북한령이 되었다가 휴전협정이 막바지에 이른 1953년 7월 20일에 금성천 및 화천댐 근처 425고지, 406고지 전투 결과 승리로 화천댐을 포함한 호수 전체가 우리 땅이 됐다. 그 결과 지금도 우리에게 풍부한 물과 전기를 공급하는데 기여하고 있으며 북에서 내려오는 물에 의한 홍수 피해를 조절할 수도 있게 됐다. 칠성전망대에서는 화천 북방 철책선 약 1.2㎞ 지점의 425고지와 406고지를 볼 수 있다. 그 지역에서는 6·25전쟁 막바지에 아주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1953년 7월 휴전을 앞두고 북한의 김일성은 “화천 발전소만은 넘겨줄 수 없다”며 탈환을 지시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화천 발전소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며 절대 사수 명령을 내리고 1953년 7월 19일 2군단 사령부를 직접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했다. 중공군은 1953년 7월 20∼22일 425고지를 계속 공격했다. 인해전술을 내세운 중공군의 공격에 아군은 백병전을 불사하며 싸워 고지를 지켰다. 그리고 7월 23∼24일 406고지의 3연대 6중대가 중공군의 마지막 공격을 격퇴하며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고지를 지켜낸 상태에서 휴전 협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규학 6중대장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규학 중대장은 전사하기 며칠 전 아내에게 애절한 사랑이 담긴 편지를 썼다. 그가 쓴 편지에는 “그리운 금원씨 날이 밝으면 어떤 임무가 주어질지 모르지만 이 밤 당신 꿈을 꾸리다”라는 애틋한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2020년 구순이 된 그의 아내 정금원 할머니는 남편이 전장에서 보낸 편지는 받았으나 오지 못한 남편을 아직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매일경제, 2020. 06.14, 정전 이틀 전 전사한 남편을 기다리는 구순의 아내) 이 편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참전할 수밖에 없었던 한 군인과 그와 함께 살아가는 가족의 애절함과 슬픔을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분들 때문에 현재 우리가 편안히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전역 이후 앞으로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할지 자문하게 됐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한반도를 갈망하며 칠성부대 상승회관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하루도 더운 날씨였지만 계획대로 무사히 종주를 마쳤고, 천주교 신자인 단원들이 함께 주일미사까지 드릴 수 있어서 행운이었고 은총을 받았다는 생각을 했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 전역군인
    • 인생 2막
    2021-07-14
  • 6·25 전쟁 당시 ‘대한해협 해전의 영웅’인 최영섭 예비역 대령 별세
    [시큐리티팩트=안도남 기자] 6·25 전쟁 당시 ‘대한해협 해전의 영웅’이자 최재형 전 감사원장의 부친인 최영섭(해사 3기) 예비역 해군 대령이 8일 향년 9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최 전 대령은 이날 새벽 최재형 전 감사원장 등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으며,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됐다. 문재인 대통령도 조화를 보내고, 유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을 보내 조의를 표했다. 고인은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6일 새벽 동해상으로 남하해 부산으로 침투하려던 북한 1천t급 무장 수송선을 대한해협에서 격침하는데 결정적 공을 세운 전쟁영웅이다. 대한해협 해전은 6·25 전쟁에서 우리나라 해군의 첫 승전 사례다. 당시 고인은 해군 최초 전투함인 백두산함(PC-701)의 갑판사관(소위)이었고, 이후 인천상륙작전 등 6·25 주요 전투에도 참전해 공을 세웠으며, 1964년 우리나라 최초 구축함인 충무함의 제2대 함장이 됐다. 해군은 지난 4월 그의 일대기를 담은 ‘지략·용기·덕망을 겸비한 최영섭 대령’ 평전을 출간했다. 고인은 평전을 전달받은 자리에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의 남은 가족들을 국가가 책임지고 챙겨야 강한 군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해군 전사자 자녀를 위한 ‘바다사랑 장학금’으로 2018년과 2020년 각각 3천만원, 그리고 병세가 위중해진 올해 3월에도 1천만원 등 7천만원을 기부했다. 자신의 저서 판매수입과 강연료를 모은 돈이었다고 한다. 강원도 평강에서 태어난 고인은 해방 후 온 가족이 월남한 실향민이다. 대표적인 군인 명문가로, 동생 두 명은 해병대 대령과 해군 부사관으로 전역했고, 아들 넷 모두 육군 법무관 출신인 최재형 전 감사원장을 비롯해 육·해·공군 장교로 복무했다. 손자 1명은 해병대 장교로 DMZ(비무장지대)에서 근무했고, 최 전 원장이 입양한 아들 2명도 병장으로 제대하여 고인은 평소 “자손들에게 가급적 최전방에서 근무하라고 했다”며 “나는 육·해·공군과 해병대를 아우르는 통합사령관”이라고 자랑했다. 부친의 근무지였던 경남 진해에서 태어난 최 전 원장은 부친 간호에 진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28일 감사원장직 사퇴 이후 가족과 함께 지방에서 머무르다 부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경했다. 최 전 원장은 정치 참여를 선언하기 전에 부친과 상의해 결정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인은 최 전 원장이 정치 참여를 상의하자 “소신껏 하라”고 당부했고, 특히 숨을 거두기 직전에는 “대한민국을 밝혀라”는 글을 적어 건넸다고 한다. 고인의 유족으로는 최 전 원장 외에 아들 재신(전 고려개발 사장), 재민(최재민소아병원장). 재완(광주대 교수) 씨가 있다. 오는 10일 발인 이후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
    • 전역군인
    • 종합
    2021-07-09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9)] 민통선 지역 내 6·25전쟁 격전지 걸으며 소대장 근무 시절 소환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8월 24일, 종주를 시작한지 여섯째 날이다. 오늘은 육단리에 위치한 필승회관을 출발하여 사곡리를 지나 용암리에 있는 민통선 출입통제초소인 용암초소를 통과 후 DMZ 종주의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는 대성산 민통선 지역인 말고개, 중고개를 넘어 봉오리에 있는 승리회관까지 약 25㎞ 거리를 걸었다. 현재 한반도는 남한과 북한이 군사 분계선(MDL, Military Demarcayion Line) 또는 휴전선이라고 불리는 선으로 나누어져 있다. MDL로부터 남북으로 각각 2㎞ 지역에는 군사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비무장지대(DMZ)가 설정돼 있고, MDL 남쪽 5∼10㎞에 이르는 공간은 군사작전 등의 목적으로 민간인의 출입을 제한하는 민간인 통제구역이다. 이 지역을 구분하는 경계선을 민간인통제선(이하 민통선)이라고 부른다. 오늘 구간에는 단원 중 두 번째로 연장자인 이창조님이 49년 전인 1964년 7월에 37연대 6중대 1소대장으로 부임했던 부대가 있고, 필자가 32년 전인 1981년 7월에 50연대 2대대 통신소대장으로 부임한 부대가 위치하고 있어 종주단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지역이다. 필승회관을 출발하여 사곡리를 거처 용암초소로 향했다. 도로 좌우측 풍경은 30여년전 모습과 흡사했고, 승리 전망대 5㎞라는 이정표도 보였다. 15사단의 별칭인 승리부대가 떠올라 필자는 가슴이 뛰었다. 15사단은 6·25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전통 있는 부대이다. 1953년 강원도 고성군 351고지에 배치돼 북한군을 상대로 여러 번 승리했고,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는 부대’란 의미로 ‘승리 부대’라는 별칭을 하사했다고 한다. 민통선 지역은 민간인도 신분이 확인되면 차량에 탑승한 상태로 출입 및 통과가 가능하다. 하지만 배낭을 메고 걷기 위해서는 별도의 허가가 필요했다. 용암초소에서 출입 허가를 받은 후 말고개를 향해 걸었다. 우리가 걷고 있는 도로에서 DMZ까지 거리는 약 2-3㎞다. 길 좌측에는 삼천봉, 승리 전망대, 천불봉, 승암고개 등 많은 고지가 있고 길 우측에는 대성산이 있으며 그 사이에 재건촌이라는 마을이 있다. 재건촌 입구에는 커다란 기념비와 조그만 가게가 있었다. 우리는 가게 앞에 있는 파라솔에 앉아 시원한 음료도 마시고 지역 주민으로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도 들으며 휴식을 취했다. 이 기념비에는 1968년 8월 30일 민통선 북방 전략촌 건설계획과 유휴 농지 개발, 식량증산 목적으로 구호주택 50호에 50세대가 입주하여 농경지를 분배(1주택 2헥타르)받아 삶의 터를 마련한 마현 2리의 개척 역사가 기록돼 있었다. 기념비에는 또 “한국전쟁 참화로 지뢰가 뿌려진 황무지에서 우리들 아버지, 어머니는 목숨을 걸고 호미와 삽을 들었고 밤에는 총을 들고 삶의 희망을 지켜왔습니다. 척박한 땅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눈물과 땀을 뿌렸던 사람들은 마현 2리 역사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이고 그 역사를 거울삼아 후손들이 뿌리내리고 희망의 꽃을 피울 것입니다”라며 험난한 세월의 역경을 딛고 일어선 그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전하고자 비를 세웠다고 적혀 있었다. 재건촌을 출발하여 5번 국도를 따라 걷기 시작해 말고개 초입에 들어섰다. 말고개는 철원군 근남면과 화천군 상서면을 잇는 해발 690미터의 고개다. 보통 고개 이름에서 말이라는 단어는 큰 고개를 의미한다. 이곳 말고개 역시 고개가 크다는 의미로 붙여진 지명으로 짐작된다. 옛날 근무했던 시절에는 차량이 지나면 흙먼지를 일으키는 도로였으나 지금은 아스팔트로 포장돼 있다. 조금 걷다 보니 승암고개가 보였다. 승암고개는 6.25전쟁 당시 그리스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장소다. 1953년 7월 정전 협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중공군은 7월 20일부터 마현리 북쪽에 있는 승암고개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당시 미군에 배속된 그리스 왕립 헬레닉(Hellenic) 대대와 스파르타 대대는 정전 협정이 맺어지기 하루 전인 1953년 7월 26일까지 승암고개를 성공적으로 사수했다. 이 전투에서 그리스군은 총알이 떨어진 극한 상황에서 고대 스파르타 전사들의 후예답게 소총에 대검을 장착한 후 용맹스럽게 돌진하여 비록 19명이 전사했지만 육탄전으로 승암고개를 사수했다. 그 당시 그리스는 2차 세계대전으로 국토가 피폐해진데다 1949년까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간 내전이 벌어져 6·25전쟁 참전이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한다. 현재 그리스군의 6·25전쟁 참전기념비는 영동고속도로 여주휴게소에 있다. 좀 더 걷다 보니 필자가 근무했던 필승대대가 보이면서 1983년 대대에 근무할 때 발생했던 가슴 아픈 사건이 기억났다. 그 때도 비무장지대 안에는 GP가 운영되고 있었다. 당시 우리 부대는 DMZ 출입을 통제하는 통문에서 GP까지 차량이 통행할 도로를 만들고 있었다. 한 여름 어느 날 오후 나는 대대 상황실에서 근무 중 긴급한 상황을 보고받았다. “DMZ에서 지뢰가 폭발하여 다수 인원이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환자 수송을 위해 긴급 헬기를 요청하고 급하게 지프를 타고 현장으로 이동했다. 현장을 구체적으로 확인해보니 도로개설공사 현장에서 땅을 파던 불도저가 6·25전쟁 시 매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전차 지뢰의 뇌관을 눌러 터진 것으로 확인됐다. 지뢰 파편들이 공사현장 경계 작전을 수행하던 소대장과 병사들을 피범벅으로 만들어 의식을 잃은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들을 들것으로 옮기고 급하게 날아온 헬기에 실어 후송했다. 소대장은 나와 같은 중대에서 생활했던 아주 친한 육사 동기생이었다. 헬기에 실려 후송되는 동기생과 병사들의 모습을 보며 한동안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치료를 잘 받아서인지 인명 피해는 없었다. (애석하게도 그 동기생은 그 후 약 10여년이 지난 어느 날 헬기 추락사고로 운명했다.) 말고개는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과 화천군 상서면을 연결한다. 대성산 동쪽 사면은 마현리이며 남쪽 사면에서는 사동천이 발원하여 북한강으로 흘러 들어가고 북서쪽 사면에서는 한탄강의 지류인 남대천이 발원한다. 대성산은 6·25전쟁 초기 아주 치열하게 전투가 있었던 대표적인 지역이다. 국군은 1951년 6월 9일 대성산지역에서 공격을 시작하였고 대성산 1042고지와 신월동, 865고지를 탈환했다. 이후 1951년 6월 14일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면서 승암고개, 삼천봉, 비조봉 일대까지 진출하여 김화지역을 사수했다. 국군이 대성산을 사수함으로써 중공군의 공격로를 차단할 수 있었다. 대성산지구 전투에 대한 장병들의 전공을 높이고 넋을 추모하고자 15사단 8305부대와 화천군이 1983년 10월 1일 대성산지구 전적비를 세웠다. 우리 일행이 대성산 중턱의 말고개 정상에 거의 도착 할 때 어제 통화했던 옛 전우인 소대 선임하사의 전화를 받았다. ‘근처에 왔는데 정확한 위치가 어디냐’고 물어본다. 어제 전화를 받고 급하게 일정을 조정하여 이 근처에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말고개 정상 근처에서 감격적으로 해후했다. 32년 전 연대본부에서 대대까지 필자를 오토바이로 모시러 왔던 윤현준님이 멀리 일산에서 새벽에 출발해 4륜 차량을 끌고 위문을 온 것이다. 종주계획을 수립할 때 대성산 정상에도 올라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피로도와 시간 때문에 정상에 오르는 것을 계획에서 제외했다. 그런데 지금은 4륜 차량을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 부대와 협조한 후 4륜 차량을 타고 대성산 정상에 올라갔다. 눈앞에 전개되는 마현 1,2리 정착촌 마을, 비무장 지대 DMZ와 그 너머 북녘 땅 오성산도 볼 수 있었다. 정상에서 내려와 전적비 앞 잔디에 돗자리를 펴고 윤현준님이 준비해온 김밥과 떡, 막걸리로 점심 파티를 하며 회포를 풀었다. 우리의 이런 정경을 본 사람은 가끔 지나가는 차량에 탑승한 군인들 몇 명 뿐이었다. 마침 전적비 주변 환경 미화를 하던 병사들의 도움으로 우리 전체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점심 파티 후 우리는 필자가 32년 전에 근무했던 부대를 방문했다. 이미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서 옛날 건물은 전혀 볼 수 없었다. 사람 손이 닿는 것은 다 바뀐 것 같았다. 그렇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렸던 지형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함께 근무했던 끈끈한 전우애는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휴일 부대를 책임지고 있는 당직사령과 기념촬영도 했다. 군 전역을 약 1달 정도 앞둔 현 시점에서 뒤돌아보니 내가 초임지에서 윤현준님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는 가식이 없었고 소탈했으며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는 ‘군 생활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몸소 실천하며 소대장인 필자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고마운 사람이다. 군 생활을 하면서 출신이 다르다는 이유로, 또는 신분이 다르다는 이유로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문제가 된 경우를 여러 번 목격했다. 그러나 나는 부사관과 갈등이 전혀 없이 30여년 동안 생활해온 것 같다. 어쩌면 처음 부임지에서 그와 생활하면서 신분에 대한 벽이라는 것을 모르면서 인간적 만남을 바탕으로 군 생활을 시작한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4륜 차량의 기동력을 이용하여 중고개를 넘었다. 그리고 봉오리를 지나 49년 전 이창조 소위가 처음 부임하여 근무했던 부대도 잠깐 방문했다. 그 부대는 이외수 문학관이 있는 다목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숙소인 봉오리에 있는 필승회관에는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했다. 그리고 저녁은 윤현준님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DMZ 종주 엠블럼을 감사의 표시로 전했다.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함께 한 후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불원천리를 마다않고 달려와 격려해준 윤현준님께 이 지면을 빌려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 전역군인
    • 인생 2막
    2021-07-06
  • [현역대령의 DMZ 종주기(8)] 6·25 전쟁 격전지 걸으면서 군 복지시설 혜택도 누려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오늘은 8월 23일, 종주 5일째다. 문혜리의 군 숙소인 승포회관을 출발하여 지경리, 김화, ‘저격능선 전투 전적비’, 와수리를 거쳐 육단리에 있는 필승회관까지 걸었다. 약 18㎞로 이번 종주 기간 중 하루에 걷는 거리가 가장 짧은 구간이다. 거리가 짧은 이유는 다음 날 걸어야 할 지역이 민간인 통제구역이어서 숙소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오전 6시 승포회관을 출발, 호국로라는 이정표를 보며 43번 국도를 따라 지경리, 학포리를 통과하여 김화로 향했다. 어제 한사모 회원님들의 격려 덕분인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더구나 천근같이 무거운 배낭들을 승포회관 관리관이 한사모 회장님이 당부한대로 오늘 숙소인 육단리 필승회관까지 옮겨 주기로 약속해 배낭 없이 나설 수 있었다. 길 가장자리와 부대 입구 등 여기저기에 백골이 그려진 모습을 보니 아마도 3사단 지역인 것 같았다. 잠자리 비행기가 일 열로 지나가는 모습도 보았고 ‘멸북’ ‘통일’이라는 구호가 적힌 도로 장벽도 통과했다. 점심은 종주 구간에 있는 철원반점에서 간짜장을 먹었고, 식사 후 식당 안방을 차지하고 잠시 쉬었다. 지경리를 지나고 쉬리공원에서 휴식한 후 조그마한 예쁜 다리를 건너 학포리를 거쳐 와수리에 도착했다. 학포리에는 ‘저격능선 전투’(Battle of Sniper Ridge)를 기념하는 전적비가 산등성이에 우뚝 솟아 있다. 이곳에서는 남대천 건너에 있는 저격능선을 볼 수 있다. 김화 북방 약 7㎞ 지점의 이 능선은 해발 고도가 580미터이고 능선 상부의 면적은 약 1㎢ 정도다. 오성산으로 접근할 수 있는 주요 지점이며 전선 고착 시 전방의 전초 진지를 차지하기 위해 중요한 지역이었다. 6·25전쟁 당시 이 능선에서 미군이 중공군 저격병들로부터 여러 번 저격을 받아 인명 피해를 입으면서 미군들이 저격 능선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유래가 전해진다. 그 후 1952년 10월 14일부터 42일간 저격 능선에서 중공군과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를 ‘저격능선 전투’라고 부르며 그 기념비가 있는 것이다. 국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김화-금성 간 도로망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휴전 회담에서 군사분계선 설정 시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저격능선 전투와 백마고지 전투는 6·25전쟁 최대 격전으로 평가된다. 와수리와 숙소가 있는 육단리를 지나며 발바닥에 문제가 생긴 단원의 치료약을 사려고 약국을 찾았다. 그런데 두 군데 모두 문이 닫혀있었다. 숙소에 도착한 후 필승회관 관리관과 상의하여 가까이 위치한 필승부대에 의료 지원을 요청했다. 대민지원을 나온 군의관은 그 단원의 발바닥을 정성껏 소독하며 아주 친절하게 치료했다. 발바닥이 악화된 이유가 며칠간의 여정이었다는 말을 들은 군의관은 한편 놀라면서도 환자의 나이가 70대 중반이라는 사실에 감탄하며 무리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고 돌아갔다. 아직 현역 대령 신분인 필자가 단장을 맡다보니 이런 일이 있을 때 군부대의 협조를 얻기 쉬운 장점도 있었다. 저녁은 필승회관에서 질 좋고 저렴한 삼겹살에 반주를 곁들여 배불리 먹었다. 단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아주 훌륭한 식사라며 흡족해했다. 군 복지시설을 사용해본 경험이 거의 없는 단원님들은 이번 종주 간에 군 복지시설을 이용할 기회를 가진 것이 아주 좋은 경험이라며 즐거워했다. 내일 종주할 코스에는 필자가 1981년 소위로 임관한 후 처음 부임했던 부대가 있다. 그 당시 필승부대로 불리는 사단 사령부에서 전입신고를 하고 연대를 거쳐 대대에 도착할 때까지 기억과 대대에서 근무했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특히 화천군 명월리에 위치한 사단 사령부를 출발하여 연대본부까지 이동할 때가 기억났다. 더불백 하나를 들고 덮개가 덮혀진 트럭 뒤편에 앉아서, 달리는 차량이 만들어내는 뿌연 흙 먼지를 바라보며 꽤 긴 시간을 이동했다. ‘얼마나 더 가야 하나’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던 긴장된 시간이었다. 연대 본부에서 5Km정도 떨어져 있는 대대까지 가는 길 좌우측 철조망에 붙어 있는 ‘미확인 지뢰지대’ 라고 씌어져있는 팻말은 신임 소위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대대에서 통신소대장으로 1년 정도 근무하며 전투진지가 있는 대성산을 수십 번도 더 올라가곤 했다. 당시 소대 선임하사가 불현 듯 생각나서 전화했다. “DMZ 종주 5일째로 내일 말고개, 중고개를 넘어 옛날 함께 근무했던 소대를 잠깐 방문하려고 한다”고 하자 반가워하면서 왜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는 핀잔도 들었다. 잠자리에 누우니 수많은 단어들과 수많은 정겨운 얼굴들이 떠올랐다. 육단리, 다목리, 삼거리, 대성산, 적근산, 삼천봉, 말고개, 중고개, 실내 고개, 수피령, 봉오리, 민촌……. 그리고 대성 산의 좋은 기운과 맑은 공기를 느끼면서 편하게 잠이 들었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 전역군인
    • 인생 2막
    2021-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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