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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군대를 말한다 기사

  • [김희철의 전쟁사(117)]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④미국 언론, 이승만을 ‘칼을 품고 춤추는 늙은 고집쟁이’로 비난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피비린내 나는 고지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유엔군과 공산군측 간에는 포로교환 협상 등 휴전회담 신경전도 지속되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이야말로 한국에 대한 사형집행 영장이자 분단의 고착화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휴전에 결사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 스탈린의 사주로 6.25남침전쟁이 발발하자 세계 평화를 위해 미군과 유엔군이 참전했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켜 한반도 통일을 눈앞에 바라보기도 했었으나, 중공군의 불법 참전으로 다시 밀려 1.4후퇴시에는 수도 서울을 다시 한 번 내주었다. 한때 유엔군은 평택과 안성을 잇는 37도선까지 밀렸고, 미국은 한국 정부를 제주도나 사모아로 옮길 것까지도 검토했었다. 허나 이 대통령은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맥아더의 후임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은 이승만 대통령의 확고한 의지에 감격하여 “나는 여기에 머물기 위해 왔다”는 말로 더 이상 후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밝혔다. 그 후 38도선을 중심으로 공방전이 계속되었지만, 인명피해만 계속될 뿐 어느 누구도 확실한 승기를 잡을 수 없었다. 미국 등 유엔 참전국들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반도에서 군사적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어떻게 하면 명분 있는 휴전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유엔 참전국들도 전쟁이 계속되는 것에 대해 국내 여론이 좋지 않게 형성되고 있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내 여론의 악화는 정치인들로서는 외면할 수 없는 크나큰 압력이다. 이러한 미국내 여론의 악화에 따른 휴전을 반대하는 인물은 단 한 사람 이승만 뿐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전미 시장(市長) 회의에서의 녹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공산 침략은 우리가 그것을 패퇴시키거나 우리가 패퇴하던가 둘 중 하나이지 그 사이에 타협적인 해결책은 있을 수 없다......90만이나 되는 공산군이 북한에 남게 된다면 그것은 공산 측의 승리”리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국 등 유엔군이 빠지더라도 한국 단독으로라도 북진통일을 하겠다고 공언했다. 이에 미국 언론은 이승만을 ‘칼을 품고 춤추는 늙은 고집쟁이’라는 등의 말로 비난했다. 휴전을 원하는 것은 유엔군 측만은 아니었고, 대한민국을 제외한 모든 관련 당사국들이 원하는 것이었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이 대통령은 우방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은 물론 전 세계로부터 비난의 화살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에 대해 “자유와 공산주의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이 둘은 결합될 수 없고 공산주의와의 타협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물과 기름을 혼합하려는 것과 다름없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판문점에서 시도되고 있는 휴전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 휴전은 세계를 양립할 수 없는 지역으로 갈라놓은 깊은 구조적 균열을 땜질하려는 시도이므로 온전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프로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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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6
  • [김희철의 전쟁사(116)]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③전세 불리해진 중공군 요구로 휴전 예비회담 개최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중공군 6차 공세를 사투로 막아낸 유엔군과 국군이 북진함에 따라 중공군은 병법의 기본인 속전속결(速戰速決)원칙을 포기하고 신속한 승리보다는 천천히 승리를 쟁취한다는 전략으로 변경하였고, 휴전협정에도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미국 또한 한반도의 정책 목표를 전쟁 이전의 상태로 전선을 유지하면서 휴전을 모색하고 휴전 이후 유엔을 통한 한반도의 통일국가 수립을 최종적으로 추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미국은 스스로 외교적 주도권을 행사하여 소련 및 중국정부와 막후 접촉을 시작했다. 유엔군이 '현대판 살수대첩'으로 불리는 파로호 전투에서 압승함에 따라 중공군은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 휴전까지 지루하고 치열한 ‘고지 쟁탈전’과 포로 교환 등 휴전회담 신경전 지속 6.25남침전쟁이 발발한 지 1년 만인 1951년 6월23일 유엔 주재 소련 대표인 야코브 말리크가 라디오 방송에서 '평화의 대가'란 연설을 통해 휴전협상을 제안했다. 말리크는 휴전회담 개최와 양군의 38도선으로부터 철수도 제의했다. 공식적으로 나온 첫 제의였지만, 이러한 식의 휴전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꽤나 나돌고 있었다. 말리크가 휴전협상을 제안하자 미국은 이에 일단 동의하였다. 한편 한반도에서는 유엔군이 강력한 공세로 전환하자 계속된 패배로 전세가 불리해져 전투력 복원에 시간이 필요했던 중공군과 인민군측의 요구로 개성에서 1차 예비회담이 열려 본회담을 위한 준비사항을 협의했다. 드디어 7월10일 첫 본회담이 개최되었으나 양측간의 신경전속에 아무런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 당시 유엔군측에서는 회담이 한 달 정도면 끝날 것으로 예상했으나 정치적 선전에 급급한 중공군과 인민군측의 파행적 진행으로 7월26일에야 토의할 의제를 가까스로 합의했다. 그러나 첫 휴전회담에서 중공군과 인민군측은 15일간의 고의적 지연을 통해 그 동안 형편없이 붕괴된 군사력을 재편했다. 이에 유엔군은 중공군이 전투력 정비할 여유를 주지 않고 유리한 지형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위하여 공세를 감행했다. 헌데 문제는 휴전회담의 장소가 개성이므로 서부전선에서의 전면적인 공세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중공군과 인민군측도 반격할 경우 서부전선에서 유엔군의 강력한 화력에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을 감안하여 주 전장을 중동부전선의 산악지역으로 집중했다. 따라서 휴전이 되는 1953년까지 2년간 ‘고착된 전선에서 치열한 고지 쟁탈전’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쟁이 전환됐다. 유엔군과 중공군 및 인민군은 이렇게 고착된 전선에서 혈전에서 혈전으로 이어진 소모전을 감행한 ‘수도고지, 백마고지, 저격능선, 펀치볼,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전투’ 등 피비린내 나는 고지전을 지루하게 지속하였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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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0
  • [김희철의 전쟁사(115)]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체결’ ②마오쩌둥, 고지 위주 지구전 전환 명령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용문산 전투에서 대승한 국군 6사단이 속해있던 호그의 미 9군단은 화천(파로호)쪽으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미 10군단이 반격을 시작하면 중공군은 화천으로 철수하게 될 것인데, 미 9군단이 화천을 점령하게 되면 중공군을 포위망에 가둘 수가 있었다. 5월20일 호그의 미 9군단이 공격을 시작했고, 23일에는 알몬드의 미 10군단도 반격을 시작했다. 미군은 모르고 있었지만 중공군은 능력을 초과하여 병참선이 신장돼 있었다. 따라서 지역을 쟁취하고 수천 명의 한국군을 격파했으나 그들이 입은 피해 또한 막심했다. 이로 인해 생존자들은 지쳐있었고 탄약과 식량도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5월20일부터 서부의 미 1, 9군단이 용문산 및 파로호 전투 등에서 연이은 쾌승으로 중공군에게 기습적인 타격을 가했다. 23일부터는 중동부의 미 10군단까지 공세로 전환하자 펑더화이는 전선이 불리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유엔군은 동서해의 제해권과 함께 제공권도 다시 확보했다. 드디어 유엔군은 신속한 반격으로 문산 북방 임진강까지 도달했으며, 5월 말이 되자 유엔군은 중공군의 4월 춘계공세에서 빼앗긴 전선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이로써 유엔군은 거의 현재의 휴전선까지 북진한 유리한 상황에서 협상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중공군이 6차에 걸친 공세를 펼쳤지만 스스로 더 이상 대규모 공세를 치를 능력이 없음을 인식하고 마오쩌둥은 중공군에게 지구전으로 전환할 것을 명령했다. 펑더화이는 이제 지구전에 앞서 38선 부근의 방어를 지상방어에서 지하방어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에 따라 38선 부근에 대규모의 지하방어 시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6월 1일, 한반도를 횡으로 가로지르는 강력한 방어선 구축을 결심했다. 그는 ‘철의 삼각지’ 모두를 점령하려던 계획을 수정하여 삼각형의 저변 두 지점인 철원, 금화 점령을 목표로 하였다. ‘철의 삼각지’는 평강(현재 북한지역)을 꼭지점으로 하고 서측의 철원, 동측의 금화를 삼각형 밑의 두 꼭지점으로 하는 지역으로, 중요한 교통로들이 통과하는 중부전선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공산군과 유엔군 양측 모두에게 중요한 지역이었고 공격하기는 불리하고 방어에는 유리한 곳이었다. 원래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원산으로의 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이 작전은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에 의해 거부되었고, 대신 리지웨이와 밴 플리트는 ‘철의 삼각지’를 점령하고 화천 저수지 동쪽의 펀치볼 지대를 공격한다는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이로써 병법의 기본은 속전속결(速戰速決)로 빠르게 싸우고 빠르게 끝내는 것이었으나, 반대로 교착된 중부전선에서의 지루하고 피비린내 나는 고지전의 격전과 답답한 휴전협정 진행이 예고되었다.(다음편 계속) ◀김희철 프로필▶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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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05
  • [김희철의 전쟁사(114)]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 체결’ ①'현대판 살수대첩'으로 불리는 파로호 전투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옛날이나 지금이나 병법의 기본은 속전속결(速戰速決)로 빠르게 싸우고 빠르게 끝내는 것이다. 손자병법의 ‘작전편’에 ‘병귀승 불귀구 구즉둔병좌예 졸속 미도교지구(兵貴勝 不貴久 久則鈍兵挫銳 拙速 未睹巧之久)’란 구절이 나온다. 이는 “전쟁할 때 신속하게 이기는 것이 중요하며 오래 싸우는 것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전쟁이 길어지면 창끝이 무뎌지고 전투 의지는 약해진다. 준비가 조금 부족해도 신속하게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뜻으로 속전속결(速戰速決)을 강조한 말이다. ■ 용문산 전투 압승에 이어 신속히 반격하자 중공군은 휴전회담 제의 1951년 5월21일 ‘용문산 대첩’에서 압승한 국군 6사단은 양평에서 가평과 춘천을 거쳐 화천 발전소까지 퇴각하는 중공군을 따라 60여 km를 진격했다. 38선을 재돌파한 국군 6사단과 해병 1연대, 학도병들은 그때 마침 `화천댐을 확보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중공군 3개 사단의 심장부에 일격을 가하는데, 그것이 바로 '현대판 살수대첩'으로 불리는 파로호 전투였다. 변변한 전력시설이 없던 당시, 북한군의 수중에 있던 화천댐은 반드시 탈환해야 할 지상 목표였으며 북한군으로서는 절대 빼앗길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패퇴하던 중공군은 화천(대붕)호에 이르렀을 때 호수로 인해 퇴로가 막혔다. 6사단은 그대로 중공군의 후미를 들이쳤고, ‘화천발전소 탈환전'이라 이름 붙여진 파로호 전투를 3일간 밤낮없이 치렀다. 그 결과 위의 사진처럼 중공군 3만여명을 '물 반 고기 반'이던 화천호에 `물 반 시체 반'으로 수장시키는 대승을 거둬 북진의 교두보를 확보했다.대승의 현장이었던 ‘화천(대붕)호’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뜻의 ‘파로호(破虜湖)’라는 친필 휘호를 받았다. 그리고 당시 ‘사창리 전투와 현리 전투’로 사기가 최악으로 떨어졌던 국군의 사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시발점이 되었다. 닷새간의 전투 결과 국군 6사단의 피해는 전사 107명, 부상 494명, 실종 33명이었고, 이에 비해 중공군은 전사 1만 7177명, 포로 2183명이라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어 3개 사단이 궤멸되었다. 이 숫자는 공격에 나섰던 중공군 63군의 절반에 달하는 숫자였다. 또한 용문산 전투의 승리를 시작으로 퇴각하는 중공군을 쫓아 30일까지 반격작전을 전개한 국군과 UN군은 파로호 전투 등에서 대승하였고, 그 결과에 따라 중공군은 10만 병력과 주요 장비들을 거의 상실하자 결국 휴전회담을 제의하기에 이른다. (다음편 계속)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프로필▶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 (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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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03
  • [김희철의 전쟁사(113)] 구더기 득실한 적의 시체속에서 불사신의 곡예를 보여준 노리고지전투 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 1사단 12연대 3대대 작전관 한효석 중위는 “원래 퀸 고지는 미7사단 1개 중대가 방어를 하고 있다가 중공군에 빼앗겼던 것을 우리 한국군이 다시 탈환해서 2개 중대 병력이 방어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중공군은 한동안 잠잠하더니 그 사이에 고지 밑으로 땅굴을 파고 들어와 대대 병력을 은폐시켰다가 ‘53년 6월25일 기습을 감행했다. 고지의 아군들은 밤에 중공군이 땅속을 파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지만 대단하게 여기질 않았다. 기습을 당한 아군은 상당수가 포로가 됐고 중대장도 한 명만 살아 남았다. 199고지의 3대대 관측소(OP)로 올라온 그 중대장은 온몸이 피투성인 채 김자열 대대장을 붙들고 울면서 기습을 받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그는 중대 관측소(OP) 참호 속에 있다가 중공군이 올라 오길래 입구를 연락병과 함께 막아 버리고 이틀 동안 숨어 지내다가 다시 옆으로 굴을 뚫고 빠져 나왔다고 했다. 새벽에 호 속에서 뛰어 나와 고지 밑으로 마구 뒹굴어 내려오는데 적의 집중 사격을 받아 연락병은 전사하고 자기만 살았다며 울먹였다. 이후부터 1사단은 중공군의 ‘두더지 작전’을 막기 위해 수색을 고지 밑까지 철저히 했다. 한편 15연대 전초진지였던 171과 퀸 고지를 중공군에게 뺏긴 뒤에 테일러 미8군사령관이 독전하기 위해 사단사령부로 달려왔다. 테일러 장군은 “퀸 고지를 탈환할 생각은 말고 현 방어선을 지키기만 하라”고 명령했다. 따라서 1사단은 탈환전을 단념하고 방어선을 구축해 주 저항선을 지키는데 힘을 기울였다. 김동빈 사단장은 중공군들을 기만하기 위해 우선 첫째로 퀸 고지에서 주 저항선에 이어지는 산허리를 잘라 도랑을 깊게 파 지뢰를 매설해 놓았고, 두번째로 야간에는 지프 25대를 동원하여 올라갈 때는 라이트를 켜고 내려 올 때는 끄게 하면서 1백m 간격으로 계속 돌게 하여 우리 방어 진지에 대한 대량 보급을 하는 것처럼 위장했다. 마지막으로는 고지마다 1개 분대씩의 병력을 올려 보내 작업을 시켜 후방 진지 공사가 활발한 것처럼 기만해서 감히 적들이 달려들지 못하도록 겁을 줬다. 철통 방어준비를 한 것처럼 활동한 위장 및 기만전술에 속아 넘어간 중공군은 공격 방향을 서쪽 11연대 정면으로 바꾸었고, 이때 10배 넘는 적의 공격을 끝까지 방어하며 기적적으로 격퇴시켜 6·25남침전쟁사에 찬란히 기록된 베티고지 영웅 김만술 소위의 무용담이 탄생했다. 하지만 퀸 고지를 빼앗기고 얼마 안돼 노리고지도 적의 수중으로 넘어가 버린 채 아쉽게도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말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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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9
  • [김희철의 전쟁사(112)] 구더기 득실한 적의 시체속에서 불사신의 곡예를 보여준 노리고지전투 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노리고지 쟁탈전 후에도 1사단은 317·199·박·백두산 고지 등 피아의 전초진지와 주요 감제 고지들을 둘러싼 중공군과의 공방전을 계속했다. 특히 적은 ‘53년6월 하순 서울에서 한창 벌어지고 있는 휴전 반대 데모와 들끓는 국민 여론의 기를 꺾어 보자는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국군 1사단 지역 내의 171·박·퀸 고지 등에 격렬한 포격을 앞세운 공격을 가해 왔다. 1953년5월3일, 1사단장으로 부임한 김동빈 준장이 전선을 돌아봤더니 171·퀸 고지 등을 맡은 15연대의 방어선이 약간 허술한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미8군 정보에 의하면 적의 공격 방향이 이들 고지 쪽을 향하고 있다고 했다. 김 사단장은 미1군에서 트럭 40 대를 지원 받고 사단 본부 요원들까지 동원시켜 50m 폭의 철조망을 치는 등 15연대의 방어 진지를 재 강화시켰다. 6월25일 하오 4시께 작전 회의를 열고 있는데 갑자기 적 포탄 2발이 사단 본부 후방에 떨어졌다. 그때부터 적의 본격적인 포격이 시작됐는 데 김 사단장이 6·25 남침전쟁 동안 당한 포격 중에서 가장 심한 거였다고 회상했다. 중공군의 포격은 국군 1사단 쪽만 집중적으로 가해졌는데, 이것은 휴전을 반대하는 한국군의 사기를 꺾고 협정 조인에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려는 공산군 측의 속셈이었다. 이 일대 다른 유엔군 지역엔 전혀 적의 포격이 없었다. 당시 1사단 참모장 장춘권 대령(·예비역 육군 소장)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우리는 적이 강 건너의 노리와 베티 고지를 공격해 올 것으로 추정하고 모든 포문을 그쪽으로 돌린 채 퀸 고지 쪽의 경계는 소홀히 했지요. 그러나 적은 이날 밤 임진강을 도하하여 퀸 고지로 달러 붙었어요. 완전히 적의 기습을 당한 셈이었지요” 어처구니없이 고지를 적에게 빼앗기고 말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우리가 반성할 점이 많았다는 설명이다. 사실 당시 우리 지휘관들이나 사병들은 서울이 너무 가깝고 충분한 보급을 받고 있으니까 긴장감이 약간 풀려 있었다. 그래서 이 같은 적의 공격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으면서도 방어 태세를 제대로 못 갖췄다. 장 참모장이 얼마 전부터 일선 경계를 철저히 하고 철조망을 5중으로 쳐 놓으라고 독려를 했는데, 중공군이 공격한지 1시간만에 퀸 고지가 피탈됐다는 보고를 받고 지프로 달려나가 보니 연대 저항선의 철조망은 겨우 한 겹 뿐이었다. 물론 진지 구축에는 시간도 필요했고 또 당시 휴전 기운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겠지만 방어준비가 미비한 것이 사실이었다. 화가 치민 장 참모장은 대대장을 군법 회의에 돌리라고 고함을 질렀다고 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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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1-07-28
  • [김희철의 전쟁사(111)] 구더기 득실한 적의 시체속에서 불사신의 곡예를 보여준 노리고지전투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혈전과 격전이 거듭된 노리고지의 산병호 속에는 쌓인 시체가 썩어 구더기들이 득실득실하여 발목까지 빠졌으며, 교통호 속에서 육박전을 벌이던 아군 병사가 포격에 메워져 버린 흙더미에 치여 중공군을 껴안은 채 그대로 죽어 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지들은 피 흘린 보람도 없이 휴전 직전 중공군의 최종공세에 의한 발악적인 맹공격을 받고 빼앗겨 지금은 대부분이 군사분계선(MDL) 이북에 들어가 있다. ■ 4개월 동안의 노리고지 두더지 생활로 ‘털보’라는 별명얻은 도상보 소위 12연대 3중대 1소대장 도상보 소위는 11연대의 격전이 끝난 후인 ‘52년 12월13일, 노리고지 방어에 투입됐다. 11월14일에는 한국 전선을 시찰중인 닉슨 미 부통령이 1사단 12연대를 방문하여 격려도 했다. 노리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는 미군 포와 탱크의 지원이 큰 힘이 됐다. 당시 우리 한국군과 미군은 화력지원 협조본부(FSCC)를 설치해 놓고 보전포 협동 작전을 긴밀히 조정했다. 당시 유엔 공군은 피아식별을 위해 대공포판이 있는 곳은 회피하여 폭격을 가했다. 그래서 12연대가 확보하고 있던 소노리 고지에는 밤이 되면 대노리 고지의 중공군들이 내려와 호 속에서 손목에 끈으로 잡아매고 있던 국군 병사들의 대공포판을 뺏으려고 해 서로 끌어 잡아당기며 승강이를 벌이기도 했다. 이 두 고지는 이렇게 인접해 있어 강 이남에 주력을 둔 아군으로서는 적의 야간 공격 때면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래서 미군 측에서는 이곳을 포기하고 강 남쪽으로 철수하자고 주장도 했다. 그러나 박림항 1사단장은 이 같은 의견이 제기되자 소노리 고지는 우리가 최후의 한명이 남을 때까지 사수하겠다면서 적극 반대했다. 1사단 좌우에는 영 연방군과 미 7사단이 배치돼 있었다. 12월 중순 즈음에 도상보 소위는 12연대장 정영흥 대령의 “도 소위 소대가 투입해 소노리 고지를 방어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때부터 4개월 동안을 이 소노리 고지에서 두더지 생활을 했다. 고지에 도착해보니 호들이 거의 다 포격에 무너져 버린 상태였다. 막힌 교통호를 파다가 육박전을 벌이던 아군 병사가 중공군을 끌어안은 채 그대로 죽어 있는 시체를 몇 구 발견했고, 간혹 남아 있는 호 속에는 구더기들이 꽉 차 있어 발을 넣을 수도 없었다. 밤중에 순찰을 나가 졸고 있는 듯한 동초병을 깨워 보면 어느 사이에 적 총탄을 맞고 죽어 있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번은 공격해오는 적들이 아군 진지에 달라붙어서 진내 사격을 요청하고 호 속으로 들어갔다 나와 보니 위생병이 없어졌다. 그때 건너편 골짜기에서 그 위생병이 중공군한테 끌려가면서 “소대장님. 소대장님…”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가는데 정말 못 견딜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무차별 사격을 시켰다. 사격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봤더니 부르는 소리가 들릴 듯 말듯 하더니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도 그 위생병은 휴전협정후에 포로 교환 때 송환돼 왔다. 도상보 소위가 ‘53년3월 하순에 이 소노리 고지에서의 임무를 교대하고 철수했는데, 수염이 둘째 단추까지 내려와 ‘털보’라는 별명이 붙었다. 수염을 깎고 나니까 소대원들도 전혀 몰라보았다고 한다. 그는 소노리 고지 방어의 전공으로 화랑 무공훈장을 받았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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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7
  • [김희철의 전쟁사(110)] 구더기 득실한 적의 시체속에서 불사신의 곡예를 보여준 노리고지전투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편 여러 차례의 공방전 끝에 많은 병력이 손실돼 11연대 수색중대가 공격 작전에 추가로 투입됐다. 너무 작아서 밥풀고지라고 곳에서 출발했는데 노리고지까지는 300m밖에 안 되는 거리였지만 그 사이는 완전히 벌판이라 그대로 가면 적에게 노출되고 마는 불리한 입장이었다. 수색중대의 3개 소대는 야음을 이용하여 일단 고지 밑까지 접근한 다음 1소대는 소노리를, 2·3소대는 대노리 고지를 공격했다. 황병식 상사가 지휘한 1소대는 소노리 고지의 교통 호를 타고 나가다 적의 포격을 만나 모두 전사하고 생존한 10명이 계속 전진해서 대노리 고지 우측으로 도달했다. 날이 밝았는데도 포격으로 먼지와 포연이 하늘을 덮어 좌우조차 분간할 수 없는 상황 이었지만 동굴 속에서 저항하는 적들에게 수류탄을 넣어 폭사시키고 올라가 굴속을 향해 “손들고 나와라..!”라고 소리를 치니까 아군 무전병 2명이 손을 들고나왔다. 알고 보니 이 고지 쟁탈전 중 후퇴를 못한 채 동굴속에 남았던 아군이 워낙 깊고 캄캄하니까 서로 분간을 못하고 중공군과 함께 이때까지 지낸 거였다. 이 동굴을 점령하고 인원을 확인해보니 소대장 황병식 상사를 포함해 4명밖에 안 남았다. 대노리 고지 좌측을 공격한 2, 3소대는 거의 전멸한 상태였다. 오전 10시쯤 되니까 중공군이 맹렬히 반격했는데 이때 생존 전우 3명과 같이 동굴 속에 들어가 방어를 했다.수색중대 1소대장 황상사는 추가로 투입돼 고지로 올라온 2대대 6중대장 정대선 대위에게 상황을 설명해주고 12시쯤 내려왔다. 전사자들을 처리하고 있는 밥풀고지에 오니까 황상사는 이미 전사한 것으로 보고가 돼 있었다. 중공군은 물론 우리의 몇 배가되는 전사상자를 냈지만 11연대 수색중대가 거의 전멸되고 만 것은 너무도 처절한 희생이었다. 연대 수색중대와의 치열한 접전에서 전투력이 약화된 중공군은 임무를 교대해 올라온 6중대 전우들에게는 저항도 전혀 못한 채 참패를 당하고 퇴각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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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6
  • [김희철의 전쟁사(109)] 구더기 득실한 적의 시체속에서 불사신의 곡예를 보여준 노리고지전투 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노리고지 전투 당시 11연대 3대대장이 수립한 공격작전의 목표는 소노리와 대노리를 탈취하는 것이었다. 증강된 1개 중대 규모를 투입하되 양개 목표에 최초 1개 소대씩 배당하고 상황 진전에 따라 예비소대를 후속 투입하기 위한 준비를 갖춰 대기하도록 계획했다. 대대장은 협소한 공간에 과다한 부대투입은 회피해야 한다는 점과 방어에 발판이 되고 있는 노리고지 확보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사단장의승인을 얻어냈다. ■ 불사신 곡예를 보여준 초인적인 전사 최종인 소위와 박관욱 일병 첫 번째로 불사신 곡예를 보여준 전사는 무서운 정신력을 지닌 1소대 소대장 최종인 소위였다. 적의 집중포화와 수류탄 세례에 직면하여 공격이 좌절될 즈음 최종인 소위를 비롯한 1소대는 소노리를 우회하여 쏜살같이 대노리 고지에 전진하여 돌격선에 도달했다. 당시 중공군은 소노리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어 1소대의 접근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소대는 1시간 만에 경미한 적의 저항밖에 받지않고 대노리 고지에 대공포판을 설치하는데 성공했다. 다음은 9중대의 활약이었다. 12월 13일 동이 트자 목표에 돌진해 들어간 9중대는 백병전 끝에 적병 36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하면서 드디어 소노리 탈취에 성공했다. 그런데 최고의 결정적 상황으로 10중대의 중앙 1소대에서 드라마 같은 일이 일어났다. 대노리를 향해 공격 중이던 10중대는 능선에 도달하였으나 적의 진지를 돌파하지 못하고 돈좌(기세 따위가 갑자기 꺽임)되고 말았다. 이렇게 좌절하려는 그 순간 7부능선에 엎드려 있던 한 명의 병사가 불현듯 일어나 재빨리 고지 정상으로 뛰어올라가 고지 너머에 대고 사격을 퍼붓고 나서, 뒤의 아군을 향해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이때 좌측방 닉키고지의 적이 기관총 사격을 가해오자 그 병사는 쓰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 병사는 다시 일어나 원위치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다시 한참을 엎드려있던 그 병사는 재차 일어나 전과 동일한 행동을 되풀이하며 고지 정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적은 측방과 후방에서 동시에 집중사격을 가해왔는데, 병사는 또 쓰러졌다. 대대장은 "이번에는 정말 죽었구나"하고 체념했다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병사는 다시 일어나 제자리에 돌아왔다. '불사신의 곡예'라고 할 정도로 당돌하고 대담무쌍한 용맹스러운 병사의 행동은 피아불문 숨을 죽이고 관람하는 이른바 한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당시 연대 관측소( OP)인 264고지에 있던 미 제1군단장 켄덜(John W. Kendall)중장은 그 병사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안절부절 하다가 "나의 군대생활 30여년에 저렇게 용감한 사람은 처음 보았다. 저 병사는 초인이다. 한국 군인은 강하다."라고 감탄했다고도 전해진다. 그 불사신의 전사는 11연대 10중대 1소대 2분대의 자동소총수 박관욱 일병이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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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3
  • [김희철의 전쟁사(108)] 구더기 득실한 적의 시체속에서 불사신의 곡예를 보여준 노리고지전투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 노리고지 전투를 지휘했던 1사단장 박림항 준장(예비역 육군중장)을 비롯한 한국군들은 ‘52년 말 6·25남침전쟁의 휴전협정이 머지않아 성립될 것이라는 뉴스가 나도는 가운데 한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겠다는 집념이 대단했다. 이를 위해 적정을 파악하려고 포로 잡기 경쟁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노리고지 같은 전초에서는 아군과 중공군 사이에 서로 포로를 잡기 위한 경미한 수색전이 늘 벌어졌다. 포로 잡기 탐색전이 항상 전개되고 있던 소노리고지는 적의 전초인 대노리고지와 한 능선에 붙어 있었는데 1사단은 이 고지에서 언젠가는 큰 전투가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한 보·전·포 협동작전을 미군들과 계속 익히고 있었다. 특히 박 사단장은 사단예비대인 최주종 11연대장에게 백병전에 대한 연구를 시켰다. 지금처럼 태권도가 널리 보급됐더라면 좋았을 텐데 당시는 몰랐기에 개머리 판치기, 수류탄 ·연막탄 사용법, 유도 등의 갖가지 훈련을 후방에서 맹렬히 했다. 노리고지 전투는 한마디로 우리 1사단의 보병과 미군의 탱크와 포병 부대가 삼위일체가 돼 전개한 모범적인 보·전·포 협동 및 한미 연합작전이었다. 8부 능선에 올라 붙은 우리 돌격 장병들은 포판을 등에 지고 미군 직사포의 근접포격 지원을 받으며 고지 정상으로 뛰어올라갔다. 돌격 대원들은 백병전이 벌어지면 호가 좁아서 개머리 판치기가 잘 안되니까 M-1소총의 개머리판을 잘라 가지고 전투에 임했다. 고도의 훈련과 정확한 관측이 요구되는 이 같은 작전을 우리 장병들과 미군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멋있게 해냈다. 따라서 노리고지 전투는 모범적인 보·전·포 협동작전으로 당시 미국 보병학교의 교지에도소개됐다. 이 전투를 지켜본 미군 고위장성들은 한국군의 전투력을 높이 평가했고 또 신뢰하게 됐으며, 한국군은 이제 포와 전차 지원만 해주면 충분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또한 사병들의 용맹심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전우애 이상의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8부 능선에서 적의 수류탄 반격에 막혀 더 이상 못 올라가는 사병들에게 돌격의 힘을 줄 수 있는 것은 전우의 죽음을 호소해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최고였다. 박 사단장은 관측소에서 쌍안경으로 능선의 사병들이 적의 수류탄에 팔·다리가 날아가는 게 보일 때마다 다른 사병들에겐 전우의 전사를 호소하며 적개심을 불러일으켜 돌격케 했다. 노리고지 전투는 중대·대대 단위의 소규모 작전이었는데 박 장군은 늘 사단 단위의 대규모작전을 하고 싶어했었다. 그러나 상급 부대에서는 희생자가 많이 나서는 안 된다면서 그런 전투는 무리한 작전이라고 못하게 했다며 아쉬워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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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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