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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환된 유해 DNA가 존안된 미스터 션샤인의 ‘유진 초이’ 황기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유진 초이’의 실존 인물인 황기환 애국지사(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의 유전자(DNA) 정보를 확보해 국가 관리기록으로 영구 보존한다”고 밝혔다. 황기환 지사의 유전자(DNA) 정보는 지난 4월10일 순국 100년 만에 고국으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 제7묘역에 안장된 황기환 지사의 유해를 미국 뉴욕 마운트 올리벳 묘지에서 파묘하는 과정에서 채취한 시료를 국내로 들여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을 통해 확보하였다. 황기환 지사 유해는 2008년 미국 뉴욕 마운트 올리벳 묘지에서 발견되어 2013년부터 국내봉환을 10여 년에 걸쳐 추진하였으나 유족이 확인되지 않아 2차례 법원 소송을 제기하였음에도 승인을 얻지 못했으나 국가보훈부와 뉴욕총영사관의 적극적인 설득과 노력으로 지난 1월 31일 묘지 측이 파묘에 합의하면서 극적으로 성사되었다. 또한 국가보훈부는 후손이 확인되지 않은 황기환 지사 유해의 유전자(DNA) 정보 보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파묘 과정에서 시료를 확보해 4월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정을 의뢰하였다. 감정을 맡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황기환 지사가 순국한 지 100년이 지나 유해의 훼손 상태가 심각해 감정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유전자(DNA)정보가 황기환 지사의 유족을 확인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기에 사명감을 갖고 다양한 분석기법을 적용해 2개월만에 어렵게 정보 획득에 성공하였다. 이에 국가보훈부는 황기환 지사의 소중한 유전자(DNA) 정보를 국가의 기록으로 영구히 보존하고, 유족을 찾는데 적극 활용할 예정이다. 박민식 국가보훈부장관은 “앞으로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협업해 후손이 확인되지 않는 국외 독립유공자의 유해 유전자(DNA) 정보를 기록으로 영구 보존하고 후손을 찾는 중요 단서로 활용해 이분들의 희생과 공헌이 우리사회에 영원히 계승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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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공자 예우와 복지증진 협약 체결로 재계가 동참한 일류보훈 구현
[시크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전경련회관에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김병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직무 대행 등이 ‘국가유공자 예우 및 복지증진 업무협약’을 3일 10시에 체결했다. 이날 업무 협약은 대한민국 자유수호에 헌신한 국가유공자에 대한 존경과 예우 분위기 조성, 국가유공자의 영예로운 삶 향유를 위한 복지증진, 생활안정을 위한 일자리 지원 확대 등을 목적과 주요 골자로 구체적인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이번 업무협약에 따라 첫 번째 실천사업으로 ‘수호자의 발걸음’ 프로젝트가 추진된다. 이 사업은 ‘국가보훈부-전국경제인연합회-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함께 협력해 자유 수호를 위해 대한민국 곳곳을 쉼 없이 전진한 국군 및 유엔군 참전용사의 헌신에 감사드리고자 세상에 하나뿐인 맞춤형 신발을 제작해 헌정한다. 왼발과 오른발의 발볼 차이로 기성화가 안맞거나 보행 불편이 있는 6‧25참전유공자 및 재방한 유엔참전용사 등 300명 영웅의 발을 삼면측정(3D스캔)하고 그에 맞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영웅의 신발(One & Only Heroes Shoes)”를 제작해 6·25남침전쟁 정전 70주년인 7월 27일을 전후해 직접 전달한다. 또한, 맞춤형 신발 제작을 위해 취형한 발 모양과 참전영웅의 인적사항, 참전기간, 누적 발걸음 수 등이 표기된 동판을 제작해 대한민국을 지켜낸 희생과 헌신에 감사와 예우를 전하는 의미에서 11월 11일 국제추모의 날(턴투워드부산)에 맞추어 유엔평화공원에 ‘영웅의 길’을 조성할 예정이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영웅을 기억하는 것은 피와 땀으로 대한민국을 지킨 모든 분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약속이자 일류보훈으로 가는 기본” 이라며 “국가보훈부 승격에 걸맞게 품격 높은 보훈으로 국가유공자를 예우하고 보답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지난해 ‘경제계와 함께하는 일류보훈 동행’으로 시작된 양 기관의 상호협력은 이번 협약으로 더욱 공고화되어 향후 주거개선 및 제대군인 일자리 지원 등 국가유공자 생활안정을 위한 복지증진 사업으로 구체화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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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잊혀진 모로코 6·25남침전쟁 참전용사 첫 확인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전문기자] 주모로코 한국대사관(대사 정기용)은 6·25 남침전쟁 당시 프랑스 군복을 입고 참전했던 북아프리카 모로코 군인의 후손을 처음으로 찾아냈다고 28일(현지시간) 밝혔다. 이번에 확인된 유족은 6·25 남침전쟁에 유엔군 프랑스대대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모하메드 벤 카두르 라스리(당시 병장·실제 모로코 이름은 무흐 벤카두르 엘 아스리)의 딸인 프테탐 엘 아스리(81)씨와 손녀다. 라스리씨는 1951년 3월5일 1037고지 전투 중 왼쪽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전사했으며, 유해는 부산 유엔 공원에 안장돼 있다. 한국대사관은 지난해 9월 프랑스 군사기록원 자료를 통해 라스리씨를 포함한 8명의 모로코 군인이 프랑스군에 배속돼 6·25에 참전한 사실을 확인하고, 모로코 보훈처와 함께 참전용사 가족 찾기에 나섰다. 6·25 남침전쟁의 숨은 영웅찾기 사업을 진행하던 윤종진 보훈처 차장이 지난해 12월 현지 방문을 계기로 참전용사 가족 찾기에 적극 나선 모로코 보훈처는 몇달간의 조사와 확인 끝에 첫 성과를 냈다. 그러나 후손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라스리씨의 병적 상 이름이 실제 이름과 달리 기재된 데다, 유족들이 거주지를 옮기면서 전입신고를 하지 않아 소재 파악도 어려웠다. 딸인 프테탐씨가 가지고 있던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인 군복 입은 사진이 가족관계를 확인하는 단 한 가지 단서였다. 프테탐씨는 "4살 때 입대한 뒤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고 6·25 남침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도 최근에 알았다"며 "우리를 잊지 않고 찾아준 한국 정부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부산 유엔 공원을 꼭 방문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6·25 남침전쟁 발발 당시 모로코는 프랑스의 보호령이었다. 모로코인 참전용사들이 프랑스군에 배속돼 프랑스 군복을 입고 전쟁에 투입된 이유다. 모로코 참전용사 확인 작업은 애초 2012년에 시작됐지만, 당시 모로코 측에서 관련 자료 확인에 난색을 보이면서 1년 만에 중단됐다. 그렇게 끝나는 듯했던 참전용사 확인은 2021년 정 대사가 엘렌 르 갈 당시 주모로코 프랑스 대사에게서 6.25 참전 모로코인 자료가 프랑스에 존재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재개됐다. 이후 부산 유엔공원에서 모로코 출신 참전용사 2명이 안장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이어 대사관측은 프랑스 참전용사 및 전쟁피해자 사무소(ONACVG)의 협조로 프랑스 군사 기록원에 남아있는 관련 기록을 확보, 지난해 처음으로 참전용사 8명의 존재를 찾아냈다. 정기용 대사는 "정전 70주년을 맞은 해에 모로코 출신 6·25 참전용사 가족을 찾게 돼 의미가 크다"며 "앞으로도 추가로 참전 용사와 가족을 찾는 한편 모로코 내 학교 교재에 이 사실을 수록하고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는 등 후속 사업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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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은 “외교관 생활을 하며 만난 미국인들은 한국인보다도 백선엽장군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음을 알게되었습니다”라며 “백 장군님은 정전협정을 앞두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하시어 현재 한미동맹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작금에 북한의 핵위협과 도발이 계속되는 속에서 출범하는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큰 역할을 하기를 기대합니다”라고 축사를 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의 “참군인 김관진 장관이 이사장을 맡아 이 재단은 더욱 발전할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이어 박정환 육군참모총장, 틸러리 전 연합사령관, 권오성 육군협회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국회 회의 때문에 늦게 도착한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를 만든 분, 백선엽 장군은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내신 분, 박정희는 오늘의 선진 경제를 만들었습니다”라고 축사를 시작했다. 이어 박 장관은 “이렇기 때문에 이 세분은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나라발전에 큰 업적을 많이 남긴 지도자입니다. 허나 지난 정권에서는 폄하되며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 이 세분의 역사적인 공을 양지로 끌어내는 것이 본 장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의 일에도 분골쇄신의 각오로 절대 기여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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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재단 이사장인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은 “백선엽 장군님은 창군(創軍) 원로이자, 6.25남침전쟁시 대한민국이라는 신생국가가 존폐의 위기에 처할 때에 다부동전투 승리로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의 발판을 만드시고, 평양 선두입성, 중공군의 공세 저지, 남부군 토벌 등의 뛰어난 전공을 세우셨다”며 기념사를 시작했다. 백선엽 장군은 전쟁중에 국군 최초 4성 장군이 되어 두 번의 육군참모총장과 제10대 합참의장을 역임했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헌신적인 노력을 하여 한미동맹의 초석을 다지신 구국영웅이다. 미군은 지금도 백선엽 장군님을 6·25남침전쟁시에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하며 존경하고 있다. 백 장군은 전역후 약 10년 동안 중화민국, 프랑스, 캐나다 대사를 역임하며 북한의 외교 진출 공세를 철저히 막아내었고, 귀국해서 교통부 장관 재임시에는 서울지하철 1호선 건설 실현과 대한민국 화학산업을 키워내신 탁월한 외교관이자 산업근대화의 주역이기도 하다. 이에 김관진 이사장은 “백선엽 장군님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공인(公人)의 표본이자 우리 시대 ‘제복의 영웅’입니다. 그동안 뜻있는 많은 분들이 감사하게도 여러 추모 및 기념단체를 만들어 뜻을 기리고 있었습니다”라며 “이제 과거를 뛰어넘어 대한민국을 초일류국가로 도약시키기 위해 백남희 여사의 적극적인 후원과 보훈부의 도움으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을 창립하여 새롭게 출발합니다. 이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따라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은 장군님의 숭고한 나라사랑과 공인 정신을 선양하고 계승함으로써 미래의 주역이 될 이 땅의 젊은이들이 올바른 역사인식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며 각오를 밝혔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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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상)
30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구 소재 공군회관에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재단 창립대회를 개최. [사진=김희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은 30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구 소재 공군호텔에서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김형오 전 국회의장, 박민식 보훈부 장관, 권오성 육군협회장, 이중근 부영그룹회장, 고현석 육군참모차장, 벤플리트 장군 손자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재단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창립대회는 대한민국 군가합창단(홍두승 단장)의 식전 공연에 이어 초대 재단 이사장인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과 백선엽 장군의 장녀이자 재단 명예이사장인 백남희 여사의 개회선언으로 시작됐다.2부에서는 김재창 장군의 ‘가까이서 본 선배 백선엽 장군’과 유광종 대표의 ‘백선엽,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 주제 발표가 있었다. 특히 다부동 대첩 및 평양입성 전투에서 고(故) 백선엽 장군과 함께 싸웠던 ‘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의 박형수(94세) 회장과 김주찬(94세) 부회장이 노구를 이끌고 참석해 전장 실상을 이야기할 때와, 재단 명예이사장인 백남희 여사가 환영사로 대한민국과 아버지의 삶을 이야기할 때는 참석자들 모두에게 깊은 감동을 주어눈시울을 붉어지게 만들며 힘찬 박수가 터져나왔다. 또한 백선엽 장군과 인연을 맺였던 청년 대표와 연평해전 전사자 서정우 하사의 모친의 플로어 맨트도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백 장군은 1952년 7월 최연소(32세)로 제7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고, 이듬해 1월엔 만 33세에 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됐다. 정전회담 땐 국군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2020년 7월10일 향년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다음편 계속)
실시간 군대를 말한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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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97)] 중공군도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저격능선전투’의 진실은?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 32연대 11중대에서 참전했던 문관혁 소위(예비역 대령, 갑종장교 25기)는 “저격능선 전투가 1952년 10월 14일 새벽 5시에 시작됐지만, 공격 명령은 일주일 전에 내려왔어요”라며 “연대 작전과장(변일현 대위), 대대 정보장교와 같이 저격능선과 유사한 지형을 선정했죠. 거기다 적 진지를 그대로 만들라고 하더군요. 비슷한 지형을 찾아 닷새간 공격 연습을 했습니다”고 체험담을 말했다. 당시 첫 작전은 32연대 9중대가 저격능선 오른쪽, 10중대가 왼쪽, 문관혁 소위가 있던 11중대는 예비로 하는 대형으로 공격했다. 2시간쯤 지나니 9중대와 10중대가 전멸한 상황이 됐는데 적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싸우니까 아군 쪽 피해가 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자 예비였던 11중대에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문관혁 소위도 소대원을 이끌고 고지로 공격했다. 자동화기 사격과 수류탄에 의한 저항이 산발적으로 있었지만 7부 능선까진 무난히 올라갔다. 전진 중에 중공군의 방망이 수류탄이 폭풍 퍼붓듯이 날아오며 자동화기에 피해가 늘어나고 3.5인치 로켓포 사수마저 총에 맞아 쓰러지자, 문소위는 직접 로켓포를 메고 적 화기진지를 조준해 발사했고 자동화기 사격이 가격을 멈췄을 때 세 차례에 걸쳐 돌격을 감행한 후 그날 오후 5시쯤 점령했다. 문소위가 A고지에 올라가니, 앞서 공격했던 10중대장인 홍경태 대위가 중대원들은 모두 죽고 혼자 살아남아 무전기로 계속 대대장을 호출하고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였던 그는 “야! 이 고지는 내가 점령했어”라고 몇 번이고 말하며 제정신이 아니였다. 문 소위가 A고지 위쪽의 Y고지 방향으로 전진하는데 바로 10m 전방 땅굴에서 적의 자동화기 사격이 다시 작열했다. 그곳에 2.5파운드(1.1kg)짜리 폭약에 뇌관을 꽂아 도폭선에 불을 붙여 던졌고 폭약이 터진 땅굴에 가보니 체코식 기관총 사수의 다리에 쇠사슬이 묶여 있었던 처절한 아비규환이었다. 그날 문 소위의 2소대는 30명을 데리고 공격했는데 8명만 살아남았고, 그들이 위치한 곳은 A고지 인근 돌바위 능선과 Y고지가 갈라지는 지점의 작은 돌출부였다. 그들은 저녁을 먹고 밤 8시쯤 되어 무전기로 중대본부를 불렀는데 응답이 없어 확인해보니 그 사이에 적이 역습해 아군 중대는 벌써 철수했고 낙오된 상태였는데 중공군에게 포위돼 있었다. 다행히 캄캄한 밤이라 그들의 존재를 중공군이 모르고 있었다. 이튿날(15일) 새벽 2시가 되니까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문소위는 전투 중 명령 없이 철수하면 총살이었지만 통신이 두절돼 철수 명령을 못 받았고, 명령 불복종으로 총살당하는 한이 있어도 소대원은 살려야 한다는 판단에 분대장 2명을 조용히 불러 ‘총소리가 나면 각자 무기를 들고 어제 아침 우리가 공격하기 위해 대기하던 골짜기로 철수해서 집결한다’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생존한 소대원 8명이 기습적으로 진지를 박차고 초인적인 힘으로 경사가 70~80도의 산비탈 500~600m를 뛰어 내려가자 포위했던 중공군들도 당황해 아무 조치도 못했고 낙오자 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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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97)] 중공군도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저격능선전투’의 진실은?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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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96)] 중공군도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저격능선전투’의 진실은?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중국의 승전 기록은 미군 격퇴와 오성산 방어 성공에 맞추어 있고 지하 갱도의 고난은 신화의 소재다. 중국 선양 항미원조열사능원에 “동굴진지는 물이 적다. 겨와 풀을 먹으며 버텼다(吃糠咽菜·흘강인채). 그 정신으로 미군을 제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저격능선(상감령) 전투 당시 “오성산을 잃으면 조선 역사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휴전후 마오쩌둥의 지시로 1956년에 상감령은 영화로도 제작됐다. 2011년 중국 주석 후진타오의 미국 백악관 방문 때, 피아니스트 랑랑(郞朗)의 연주곡은 ‘나의 조국(我的祖國)’으로 영화 ‘상감령’ 주제가 였다. 연주곡에는 “승냥이와 이리가 오면 엽총으로 맞이하겠다”라는 가사가 들어 있다. 승냥이는 미국이었고 당시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속절없이 당한 꼴이 되었다. ■저격능선의 A고지와 돌바위 능선은 국군이, Y고지는 중공군이 점령 저격능선 전투 1단계는 정일권 장군(훗날 국무총리, 국회의장 역임)이 지휘하는 2사단의 공격으로 시작됐다. 10월 14일 05시, 9개 포병대대의 지원을 받는 32연대 3대대가 1차 공격을 했지만 최초는 실패했으며 추가로 1개 중대를 지원받아 13시 40분에 다시 공격했다. 이번에는 미군 전폭기 6개 편대와 국군 2사단의 9개 포병대대의 집중 포격을 지원받아 공격을 했다. 그 결과 중공군 진지를 완전히 파괴하고 32연대 3대대는 치열한 백병전 끝에 저격능선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점령한 후, 3대대는 Y고지와 돌바위 고지에 각각 1개 중대를, A고지에는 3개 중대를 배치하여 중공군 역습에 대비하였다. 중공군 133연대는 이날 야간에 강력한 포병 화력과 파상적 돌격 공격으로 Y고지와 A고지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중공군과 치열한 백병전 끝에 3대대 전술지휘소는 함락되었고 3대대는 돌바위 고지를 남겨두고 퇴각했다. 이때 32연대는 예비연대인 17연대 2대대를 투입하여 돌바위 고지를 엄호하면서 전폭기 폭격 지원으로 10월15일 14시 30분, A고지를 재탈환했다. 이에 중공군은 이날 밤과 10월16일 새벽, 133연대의 2개 대대로 고지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어진 중공군 134연대의 역습도 잘 막아냈다. 그 이후로 중공군은 135연대를 투입하여 새로운 방법으로 공격했다. 우선 Y고지를 점령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A고지와 돌바위 고지를 공격했다. 결국, 국군 2사단 32연대는 중공군 135연대와 치열한 백병전을 하면서 1대대가 역습을 하였으나 결국 A고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10월20일 08시, 정일권 2사단장은 17연대가 32연대와 임무를 교대하여, A고지를 탈환하도록 했다. 17연대 1대대는 세 차례 공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국군은 그 이후에도 76회의 항공 지원을 받아 11시에 다시 공격을 개시하여 A고지를 탈환했다. 그 이후, 국군은 중공군의 역습으로 A고지를 피탈당하고, 17연대 3대대 역습과 중공군의 재역습과 다시 국군의 A고지 재확보로 고지 쟁탈전이 이어졌다. 이처럼 저격능선에선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나는 가운데 군단 계획에 의해, 국군 2사단은 미 7사단의 작전지역인 삼각고지를 인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군 2사단은 A고지를 집중적으로 방어하는 저격능선 전투 2단계 작전에 들어갔다. 31연대를 삼각고지로 배치하고, 저격능선에 다시 32연대를 투입하면서 방어하던 17연대를 예비 임무로 변경하였다. 32연대의 투입 이후 무리한 전투가 계속 이어졌다. 국군이 주간 작전에서 막강한 화력으로 중공군을 제압하면, 중공군은 야간 역습으로 대응했다. 32연대 2대대는 병력을 종심으로 깊게 배치하여 중공군의 역습을 막아냈다. 중공군은 45사단에서 29사단으로 교대해서 공격을 실시했지만, 국군 2사단은 11월 25일까지 중공군을 재격퇴하는 등 고지 주인이 28차례나 바뀌었던 진지를 사수하는데 성공했다. 결국 국군 2사단 장병들의 투혼이 서린 저격능선의 A고지와 돌바위 능선은 우리 군이 점령하고, Y고지는 중공군이 점령한 상태에서 전투가 일단 종결됐다. 그 후 김점곤 준장이 지휘하는 9사단이 저격능선 방어 임무를 인수했다. 저격능선 전투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하던 2사단은 군단 예비로 전환하여 부대 정비 후에 9사단이 성공적으로 방어한 백마고지로 재배치되었다. 그러다가 1953년 7월에 전개된 이른바 중공군의 마지막 ‘7·13공세’로 저격능선은 휴전선 북방의 비무장지대로 들어가고 말았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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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96)] 중공군도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저격능선전투’의 진실은?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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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95)] 중공군도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저격능선전투’의 진실은?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미국과 무역전쟁 중인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은 지난 10월23일 ‘항미원조 전쟁 70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한국전쟁을 '미국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전쟁'이라고 6·25남침전쟁을 언급하며 미국과의 항쟁의지를 다지고 있다. 또한 중국 정부는 국영방송 CCTV를 통해 6·25남침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를 미화한 다큐멘터리 ‘빙혈(冰血) 장진호’, 철의 삼각지 저격능선 전투를 다룬 영화 ‘상감령(上甘嶺)’ 등을 방영했다. 중국 정부는 특히 ‘상감령 전투’가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 즉 6·25 남침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투라고 자화자찬해왔다. 미국 제재를 받고 있는 중국 통신장비 업체 화웨이의 런정페이(任正非) 회장은 “내년에 우수한 인재들이 배출되면 그들을 이끌고 상감령으로 진격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중 간 화웨이 분쟁에 상감령이 소환되는 게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불쾌했다. 또 얼마 전 중국은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의미가 담긴 강원도 화천군에 위치한 호수 ‘파로호(破虜湖)’의 명칭 변경을 요구해 논란이 일고 있다. 파로호는 6·25 남침전쟁 당시 중공군에 승전한 것을 기념해 이승만 대통령이 지은 이름이다.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도 주중대사 시절 이 요구를 받았다고 했다. 파로호 외에도 영화 ‘안시성’을 두고 중국 측이 “우리 영웅(당 태종)을 비하한다”고 항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고구려 장군 양만춘이 당 태종을 물리친 전투를 담은 영화가 불편했던 것이다. 중국은 저격능선(상감령) 전투와 파로호, 영화 ‘안시성’에 이르기까지자기 입맛대로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 동북공정으로 우리 민족의 승전기록까지 바꾸겠다고 달려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중국도 ‘한국전쟁에서 거둔 최대의 승리’라고 미화하고 있는 치열한 고지쟁탈전인 저격능선(상감령) 전투 승리의 진실을 살펴보았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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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95)] 중공군도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저격능선전투’의 진실은?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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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94)] 중공군도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저격능선전투’의 진실? 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2년 10월14일 김종오 장군의 9사단은 중공군 38군(江擁輝)을 격퇴시키고 395(백마)고지 정상을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 ‘백마고지(White Horse hill)’란 집중포격 때문에 민둥산으로 벗겨진 고지의 형태가 마치 백마처럼 보였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이밖에 집중포화로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다는 ‘아이스크림 고지(철원)’, 대머리처럼 벗겨졌다는 ‘불모고지(Old Baldyㆍ연천)’, 저격 당하기 십상인 지형이라는 ‘저격능선(Sniper Ridgeㆍ김화)’, 당대 미국의 유명한 육체파 배우인 제인 러셀의 가슴을 연상시킨다는 ‘제인러셀 고지(Jane Russellㆍ김화 오성산 기슭의 삼각고지)’ 등의 치열했던 6·25남침전쟁을 통해 이름이 붙여진 고지들이 있다. ■ 밴플리트 사령관은 주도권 장악 위해 제한된 목표 탈취하는 ‘쇼다운(Show Down) 작전’ 개시 오성산(五聖山, 1062m) 남쪽 기슭에 있는 저격능선(Sniper ridge)과 삼각고지(Triangle or Jane Russell Hill)는 상감령(上甘嶺) 고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어서, 저격능선 전투와 삼각고지 전투를 중공군들은 ‘상감령 전투(上甘嶺戰鬪)’라고 통틀어 부른다. 중국은 미군을 격퇴하고 오성산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신화를 만들며 승리한 전투라고 영화까지 만들었다. 이곳에서 1952년에 중부전선의 김화(현재의 철원군 김화읍 주변) 지역에 배치되어 정일권 장군(훗날 국무총리, 국회의장 역임)이 지휘한 국군 2사단과 미 7사단이 중공군 15군에 맞서, 1952년 10월14일부터 6주간에 걸쳐 주저항선 전방의 전초진지를 빼앗기 위한 치열한 공방전이 치루어졌다. 저격능선이라는 명칭은 1951년 10월, 노매드(Nomad)선을 목표로 진격작전을 전개한 미 25사단이 김화지역으로 진출하여 중공군 26군과 대치하게 되었을 때, 이 능선에 배치된 중공군이 538고지로 진출한 미군을 저격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히게 되었다. 그러자 미군 병사들은 이 무명능선을 가리켜 ‘저격능선(Sniper Ridge)’ 또는 ‘저격병 능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952년 10월, 중공군이 전초진지에 대해 대대적으로 공격을 시작하자, 미 8군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전초진지 전반에 걸쳐 아군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소규모 공격작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쇼다운(Show Down) 작전’이라고 칭한 대대규모의 병력으로 제한된 목표를 탈취하는 작전을 개시했다. 전투가 시작하기 전, 중공군 15군은 오성산을 중심으로 예하 3개 사단을 배치했는데, 그 중 45사단은 저격능선에 전초진지를 설치하여 경계부대를 배치했다. 아군 진지에서 200m정도 거리에 배치된 중공군 부대 규모는 중대에 불과했지만, 사단 및 군단급 병력 지원이 가능한 상태였다. 이른바 저격능선 전투는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단계는 미7사단이 삼각고지(Jane Russell Hill)를 공격하기 시작한 1952년 10월 14일부터 미 7사단이 삼각고지에서 철수하게 된 10월 25일까지다. 이 때 국군 2사단도 17, 31, 32연대와 추가로 증원된 30, 37연대 및 16개 포병대대로 10월 14일부터 저격능선을 공격했다. 2단계는 2사단이 미 7사단으로부터 삼각고지를 인수하여 양 고지에서 전투를 수행한 10월 25일부터 11월 5일까지, 3단계는 저격능선 전투가 종료되는 11월 24일까지다. 이 42일간 고지 주인이 28차례나 바뀌었던 치열한 고지쟁탈전은 결국 어느 편에도 일방적인 승리를 안겨주지 못했지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6·25전쟁사(총 11권)’의 제 10권(휴전협상 고착과 고지쟁탈전 격화)에 이 전투를 한국군의 승리로 평가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4일까지 진행된 저격능선 전투에서 국군 제2사단이 승리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유리한 전초진지를 확보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산군의 기세를 꺾음으로써 전 전선에 걸쳐 작전의 주도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전투는 유엔군 측이 휴전회담을 정치적으로 유리하게 이끌어 나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사살 3772명, 추정사살 1만1023명, 포로 72명의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유엔군의 우세한 화력에도 아군 역시 국군 2사단이 그동안의 반격작전에서 전사 1096명, 부상 3496명, 실종 97명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반면 중국은 1953년 7월 27일 휴전까지 삼각고지와 저격능선에서의 모든 전투를 ‘상감령 전투’라고 칭하며 ‘한국전쟁에서 거둔 최대의 승리’라고 미화하고 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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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94)] 중공군도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저격능선전투’의 진실?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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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93)] 중공군도 패배를 인정한 김종오 장군의 백마고지 전투 ⑧
- [시큐리티팩트= 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6·25남침전쟁에서 한국군이 치른 전투 중 ‘백마고지(395m) 전투’를 가장 높게 평가했다. 그는 6·25전쟁 중에 이 전투에 대한 연구를 미 육군에 지시하고 미 9군단 작전처는 사후 검토보고서(AAR)를 작성해 전 미군 부대에 배포도 했다. 유엔군과의 전투를 거의 연전연승으로 날조하는 중공군 역시 6·25남침전쟁을 기록한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 경험 총결’에서 유일하게 패배를 인정했고, 적이었던 중공군과 북한군이 김종오 장군을 ‘군신(軍神)’으로 부르며 위명을 떨치게 된 전투이기도 하다. 당시 전투에 참전했던 용사의 말에 의하면 야간에 백병전을 할 때 머리카락 길이로 피아 여부를 판별 했다고 한다. 중공군은 머리를 박박 깎았고 국군은 머리가 길었기 때문이었다. 야간에 전혀 안보이는 상태에서 한손으로는 눈앞에 있는 사람의 머리를 만져 길면 살려주고 짧으면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대검으로 베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 위에 손을 턱~ 하고 올려서 만졌는데 순간 가슴이 철렁 했다고 한다. 왜냐면 그가 죽일 가능성이 50:50 이었으므로. 다행히 아군이었는지 자신을 놔두고 다른 사람 머리 만지러 떠났다고도 했다. 그만큼 치열한 전투였다는 에피소드는 물론 실제 고지전 혹은 점령전하에서 야간백병전은 피아식별이 되지 않는 총검이나 군용삽을 이용한 무차별적인 난투극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6․25남침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꼽히는 ‘백마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 전쟁영웅이자 한국 육군사의 전설적인 명장 김종오 장군이다. 그는 일본 주오(中央)대학에 재학 중이던 1944년 24살의 나이에 일본군에게 학도병으로 강제 징용되었으나 다행히 일본의 패망으로 참전하기 직전에 해방된 조국으로 귀국하여 1946년 1월 군사영어학교 졸업과 동시에 육군 참위(소위, 군번 10031)로 임관했다. 그 후, 1949년 육군 대령으로 진급하여 북한군 1대대를 유인 섬멸한 사직리전투 등 큰 전공을 세웠고, 이후 6․25남침전쟁을 불과 며칠 앞둔 1950년 6월10일 29세의 나이로 6사단장으로 보직되어 춘천·홍천 방면으로 공격해 오는 북한군의 진격을 5일간이나 지연시켜 김일성의 남침계획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했다. 또한 충북 음성군 동락리에서 북한군 15사단 48연대를 기습하여 사살 1천 명, 포로 97명과 수많은 장비를 빼앗는 등 개전 이래 최초·최대의 전과를 올렸으며, 같은 해 9월 낙동강 방어선에서 반격 작전에 나선 김종오 장군의 6사단은 10월26일 초산을 점령, 한만 국경에 최초로 태극기를 꽂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나, ‘51년 3사단장 재직시 현리전투에서 쓰라린 패배도 겪었다. 허나 이후에도 백마고지전투 승리 등 6․25남침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며 한국군의 전설적인 명장이자 영웅으로 불렸던 그는 종전 후, 육사교장, 1·5군단장, 1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 및 합동참모회의 의장 등 군의 요직을 지냈다. 그러나 수만의 적군을 물리친 그였지만 몸속 깊이 찾아온 병마와의 싸움에서는 끝내 이기지 못하고 1966년, 45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김종오 장군은 마지막 병상에서 조차 ‘더 일할 나이에 조국통일도 못 보고 눈을 감으니 한스럽고 죄송할 뿐이니, 평생의 소원인 통일 성업을 꼭 이뤄 달라’는 유언을 대통령에게 남기며 일평생 조국을 향한 애국과 충절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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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93)] 중공군도 패배를 인정한 김종오 장군의 백마고지 전투 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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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92)] 중공군도 패배를 인정한 김종오 장군의 백마고지 전투 ⑦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열흘간의 백마고지전투에서 중공군의 손실은 전사 8234명, 포로 5097명으로 38군 전체가 공격력을 상실했고 아군은 3428명이 전사했다. 현리 전투를 비롯해 그동안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번번이 실망스러운 졸전을 거듭했던 한국군은 1951년 후반부터 밴플리트 8군사령관의 ‘야전훈련사령부(FTC)’ 운용에 따라 부대 전체의 재교육 등 내실을 다지기 위해 힘썼는데, 백마고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과 미군은 21만 9954발, 중공군은 5만 5000발, 총 27만 4954발의 포탄을 쏟아부었다. 6·25남침전쟁 중 단일 최다 포탄을 소모했다. 국군은 겨우 1개 사단이 중공군 최정예 3개 사단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압도적인 병력 열세에 있었지만, 9사단은 최악의 위기 속에서도 목표 탈취를 위해 강인한 투지를 견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투기간중 적시 적절한 예비대의 투입 및 부대교대 등으로 부대원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또한 강력한 포병 및 항공화력을 지을 받을 수 있어 4배의 포탄을 퍼부어댄 것이 승리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고 이는 국군의 또 다른 대승인 용문산 전투 이후 병력의 열세를 화력의 우세로 메꿀 수 있음을 또 다시 증명한 사례가 되었다. 결국 이러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9사단은 철의 삼각지를 지배하려던 중공군의 전략 기도를 꺾고 끝내 백마고지를 확보하였다. 이 전투로 중공군 팽더화이 사령관에게 "제38군 만세!"라는 축전을 받아 그때부터 만세군으로 불릴 정도로 중공군 내에서는 최정예 부대인 38군(江擁輝)은 궤멸상태가 되어 중공군 23군과 교대한 후 후방으로 물러났다. 현재 철원에는 백마고지 전적지가 세워져 있으며 여기서 1.5km 떨어진 곳에 백마고지 전투의 승리로 확보된 북한군의 노동당사가 위치해 있다. 현재 백마고지는 5사단 관할로 근처에 열쇠전망대가 있으며 신청하면 둘러볼 수 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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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92)] 중공군도 패배를 인정한 김종오 장군의 백마고지 전투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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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91)] 중공군도 패배를 인정한 김종오 장군의 백마고지 전투 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2년 10월6일 시작된 백마고지전투에서 중공군 38군(江擁輝)은 395(백마)고지 정상을 탈취하는 데 성공했지만, 김종오 장군의 9사단은 재차 역습을 가해 고지를 탈환하는 등 이 고지를 점령하기위해 10일 동안 국군과 중공군의 뺏고 빼앗기는 싸움이 반복됐다.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15일까지의 고지 쟁탈전 기간 동안에만 고지의 주인이 무려 12번이나 바뀔 정도로 치열했다는 것이다. 전쟁영웅들이 무수한 피를 뿌리며 이 나라를 지켜냈다는 것을 우리 국민들은 기억해야한다. ■ 영웅칭호 받은 중공군 335연대 괴멸에 결정적 기여한 국군 30연대의 육탄 3용사 국군 29연대가 10월10일 06:30 드디어 21시간 30분의 교전 끝에 395고지를 또 탈환하며 역습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밤 고지는 또다시 중공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때 사단장 김종오 장군은 395(백마)고지 주봉을 사수하는 전술에서 새롭게 전환하여 과감하게 북진해 화랑고지와 북쪽 산맥의 장송고지까지 장악하여 중공군의 공격 루트를 차단하는 작전을 구상했다. 과감한 만큼 그 위험부담도 컸다. 첫날 전투에서 화랑고지를 점령했던 중대는 백마고지와 화랑고지 사이로 공격한 중공군에 의해 거의 전멸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국군은 또 다시 자신의 나라를 지킬 능력이 없다는 평을 들어야 했고 결국 9사단은 재차 과감한 공격을 결정했고 11번째의 혈전이 시작됐다. 10월12일, 먼저 30연대 3개 대대가 돈좌된 29연대를 초월공격하여 백마고지 주봉인 395고지의 탈환에 투입했으나, 적 엄호진지에서의 기관총 사격이 완강해 공격부대의 피해만 늘어나 전진이 불가한 상황이었다. 그러자 1대대 1중대 ‘육탄 3용사(3소대장 강승우 소위, 오규봉 하사, 안영권 하사)’가 13시20분경에 수류탄을 들고 기관총 진지에 돌입해 자폭하며 파괴시켰다. 이들의 희생 덕분에 백마고지 주봉을 다시 탈환한 후에 야간방어도 성공했다. 이어 28연대가 초월공격하여 화랑 및 장송고지를 탈취하며 전연대가 영웅칭호를 받은 중공군 112사단 335연대를 괴멸시켰다. 그러자 중공군 38군은 112사단 336연대를 새롭게 추가 투입시켰다. 이날밤 장송고지를 지키던 28연대 1대대는 신병이 3분의 1이상이었고 남은 장교들 마저 거의 손실된 상태였다. 그러나 장교가 쓰러지면 부사관이, 부사관이 쓰러지면 고참 병사가 지휘를 대신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며칠간의 전투가 장병들을 강인한 승부사로 바꿔 놓았고 이 격전으로 장송고지를 끝까지 사수했으나, 화랑고지의 거점 세 곳은 다시 빼앗겼다. 10월14일 다시 교대한 29연대가 9사단의 마지막 공세인 12번째 탈환전에 나섰다. 15일 오전까지 29연대가 기세를 몰아 중공군이 공격의 교두보로 삼고 있던 화랑고지의 거점과 395(백마)고지의 북쪽 낙타능선상의 전초진지를 탈환하게 됨으로써 적을 완전히 격퇴하였다. 거의 궤멸상태에 이른 중공군 38군은 예하 112, 114사단을 축차로 철수시키며 전선에서 물러나면서 비로서 백마고지 전투는 끝이 났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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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91)] 중공군도 패배를 인정한 김종오 장군의 백마고지 전투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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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90)] 중공군도 패배를 인정한 김종오 장군의 백마고지 전투 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좌로 00미리, 우로 00미리 효력사! 명중! 명중! 계속 발사!"하며 신나게 지휘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김 중대장은 떼를 지어 몰려오는 적을 무수하게 날려 버리는데 정신을 빼았겨 모든 것을 잊은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바로 이 순간 무전기에서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무전이 두절되었다. 계속 호출해도 응답은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중대장 전사! 즉시 시신을 후송해 가고 최중위가 중대장 대리 근무를 하라. 내일 일찍 관측소로 올라와 사격임무를 중단 없이 수행하라"는 이대철 대대장의 지시가 무전으로 왔다. 중화기중대장 대리명령을 받은 최현호 중위는 충격과 당황으로 잠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얼마 후 중대원이 중대장의 시신을 운구해 왔다. 최 중위는 이미 어둠이 깔린지라 후래쉬를 비쳐 중대장의 전신을 훑어 보았다. 중대장의 머리 부분은 없어지고 온 몸은 피투성이었다. 조금전 무전으로 서로 통하던 중대장이 이렇게 처참하게 전사한 모습을 확인한 최 중위는 순간적인 강한 충격과 공포로 아연실색하고 온 몸에 경련을 느꼈다. 그는 잠시 후 정신을 차려 그 처절한 사유를 확인했더니 중대장이 유개 관측호에서 쌍안경으로 몰려오는 적에게 명중탄을 퍼붓는 순간 구경 미상의 적 직사포탄이 날아들어 김인창 중대장의 머리 부분을 때려 즉사케 했다는 설명을 들었다. 이윽고 밤은 깊어만 갔다. 적의 증원부대는 야음을 이용하여 계속 투입되었고 저항은 완강하였으나 1대대는 최후 일각까지 돌격과 백병전을 되풀이 한 결과 10월10일 06:30 드디어 21시간 30분의 교전 끝에 395고지를 또 탈환하며 역습에 성공하였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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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90)] 중공군도 패배를 인정한 김종오 장군의 백마고지 전투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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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89)] 중공군도 패배를 인정한 김종오 장군의 백마고지 전투 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최초 29연대는 사단 동쪽 연대로서 철원 평야의 동측방을 담당하고 있었고, 최현호 중위가 소속된 1대대는 연대 예비였다. 전방에서는 중공군 114사단이 공격을 개시한지 3시간만에 백마고지의 일부 방어선이 돌파되었고 사단 예비인 28연대 1대대가 역습에 투입되어 일시 주저항선을 회복하였으나 10월 7일 23:00 적의 계속적인 압력으로 395고지 정상이 최초로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10월 8일 00:40 사단 예비인 28연대 2대대가 역습 개시 2시간만인 02:40에 395고지와 주저항선 탈환했으나, 추가 투입된 중공군 112사단에 의해 다시 08:10에 395고지를 피탈 당했고 28연대 3대대가 23:05에 탈환했으나 또 10월 9일 03:30에 395고지 및 주저항선을 피탈 당하는 등 고지 쟁탈전이 반복되었다. 이같이 전황이 급박해지자 사단은 10월 9일 07:00시 예비로 전환된 29연대에 역습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연대는 사단 동측 방어임무를 사단에 배속되어 있던 신편 51연대에 인계하고 14:05 공격준비사격에 이어 공격개시선을 통과하였다. 역습 목표는 물론 395(백마)고지이며 대형은 1대대가 서, 3대대가 동, 2대대가 예비가 되고 전방 각 대대는 395 고지의 좌우 양 능선을 따라 진출하게 되었다. 당시 1대대 중화기중대장 김인창 대위는 중기관총은 전방 소총중대로 배속시키고 81mm 박격포소대만 395고지 동남쪽 하단부에 진지를 점령하여 대대 일반 지원으로 운용하였다. 주사격목표는 395고지 정상과 그 정상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적의 주접근로인 능선이었다. 그러나 역습이 개시된지 3시간 이상이 경과하였으나 전방 공격부대는 적의 완강한 저항에 진출이 지연되어 사상자는 점차 증가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16:00 경 395고지 중턱의 대대OP(관측소)에서 역습부대를 지휘하던 대대장으로부터 81mm 박격포 진지에 있던 중화기중대장에게 무전으로 "중화기중대장은 즉시 대대 OP 부근으로 추진하여 적을 직접 관측하면서 적 증원부대를 화력으로 차단함과 동시에 우리 역습부대의 전진을 엄호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1대대장은 일본 군대를 거친 함경도 출신의 강한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육사 8기 특별반 출신의 이대철 소령이었다. 그는 싸움에는 제일인자로 불려졌고 급하면 공격부대의 최선두에 서서 나를 따르라는 식이었다. 그러니 그의 가슴은 많은 훈장으로 덮여져 있었고 무인으로서 그의 위용은 당당하였다. 종합학교 2기생 출신인 중화기중대장 김인창대위는 가늘고 큰 키에 뛰어난 두뇌를 가진 합리적 성품으로 부하들의 신망이 두터웠고 보병학교 초등군사반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중대장으로 부임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기철 1대대장으로부터 대대 OP로 올라오라는 지시를 받은 김인창 중대장의 얼굴은 갑자기 굳어지면서 약간 당황하고 공포감이 감도는 인상을 지었다. 허겁지겁 지도판, 쌍안경, 나침반, 후래쉬 등을 챙겨 연락병과 함께 관측소에 도착한 중대장은 무전으로 81mm 박격포 진지에 있던 소대장 최현호 중위와 교신하며 사격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다음편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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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89)] 중공군도 패배를 인정한 김종오 장군의 백마고지 전투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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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88)] 중공군도 패배를 인정한 김종오 장군의 백마고지 전투 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백마고지는 광활한 철원평야 일대와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 보급로로 요충지였다. 그 특유한 위치적인 특징 때문에 아군이 백마고지를 점령하더라도 북쪽에서는 백마고지를 굽어보는 더 높은 고지들이 많아 전술상 크게 유리한 면이 없지만, 만약 적군이 백마고지를 차지한다면 철원평야 일대의 전선을 모두 적에게 내주고 아군은 15km를 후퇴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을 파악한 김종오 장군은 배수진을 치고 죽을 때까지 물러서지 않은 ‘사전불퇴(死戰不退)’의 정신으로 9사단 장병들과 함께 중공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 중공군 2개 사단의 축차 공격을 막아낸 백마부대 9사단 10월8일 새벽 고지 일대에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자 적은 제5차 공세를 재개하였다. 전날까지의 공격이 여의치 못하자 중공군은 최초 투입된 38군 114사단에 이어 예비인 112사단 334연대를 추가로 투입하였다. 국군 28연대 장병들은 사력을 다하여 이에 맞섰으나 짙은 안개로 포병 및 항공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한 가운데 08:10 주봉을 적에게 피탈당하고 말았다. 사단은 17:00시 28연대 3대대를 투입 또다시 반격을 개시하였다. 대대는 적의 거센 저항에 부딪쳐 장장 8시간여의 격전을 거듭한 끝에 23:05 마침내 주봉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5차에 걸친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에서 28, 30 양연대는 거의 재편성이 불가피할 정도로 많은 병력 손실을 보았다. 사단은 적포로의 진술을 기초로 적의 공격이 당분간 계속되리라 판단하고, 동측 평야지대를 방어하던 29연대를 백마고지에 운용할 복안으로 사단 예비로 전환했다. 9일밤 자정이 지나면서 중공군은 또다시 집요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근 3시간에 걸친 파상 공격으로 밀어닥친 적은 새벽 03:00 고지 주봉과 그 우측 능선의 일부를 다시 수중에 넣는데 성공하였다. 날이 밝자 사단은 적이 점령한 고지 정상에 17,700발의 포탄과 항공기에 의한 화력을 집중 투하했고, 이 날밤 29연대로 하여금 역습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연대는 적의 완강한 저항을 물리치고 자정 무렵 고지 주봉을 점령하고 적을 격퇴하였다. 중공군도 결코 이 고지만을 양보할 수 없다는 기세였다. 10일 새벽 적은 정상을 향하여 개미떼처럼 기어오르고 있었으며 04:00 무렵부터 피아간에는 수류탄 투척전과 백병전이 전개되었다. 처절한 전투가 전개되었으나 국군 29연대 1대대가 주봉에서 9부 능선으로 철수한 후 2대대의 증원을 받은 후 역습을 감행, 이날 06:30 다시 정상을 탈환하였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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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88)] 중공군도 패배를 인정한 김종오 장군의 백마고지 전투 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