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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환된 유해 DNA가 존안된 미스터 션샤인의 ‘유진 초이’ 황기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유진 초이’의 실존 인물인 황기환 애국지사(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의 유전자(DNA) 정보를 확보해 국가 관리기록으로 영구 보존한다”고 밝혔다. 황기환 지사의 유전자(DNA) 정보는 지난 4월10일 순국 100년 만에 고국으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 제7묘역에 안장된 황기환 지사의 유해를 미국 뉴욕 마운트 올리벳 묘지에서 파묘하는 과정에서 채취한 시료를 국내로 들여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을 통해 확보하였다. 황기환 지사 유해는 2008년 미국 뉴욕 마운트 올리벳 묘지에서 발견되어 2013년부터 국내봉환을 10여 년에 걸쳐 추진하였으나 유족이 확인되지 않아 2차례 법원 소송을 제기하였음에도 승인을 얻지 못했으나 국가보훈부와 뉴욕총영사관의 적극적인 설득과 노력으로 지난 1월 31일 묘지 측이 파묘에 합의하면서 극적으로 성사되었다. 또한 국가보훈부는 후손이 확인되지 않은 황기환 지사 유해의 유전자(DNA) 정보 보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파묘 과정에서 시료를 확보해 4월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정을 의뢰하였다. 감정을 맡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황기환 지사가 순국한 지 100년이 지나 유해의 훼손 상태가 심각해 감정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유전자(DNA)정보가 황기환 지사의 유족을 확인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기에 사명감을 갖고 다양한 분석기법을 적용해 2개월만에 어렵게 정보 획득에 성공하였다. 이에 국가보훈부는 황기환 지사의 소중한 유전자(DNA) 정보를 국가의 기록으로 영구히 보존하고, 유족을 찾는데 적극 활용할 예정이다. 박민식 국가보훈부장관은 “앞으로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협업해 후손이 확인되지 않는 국외 독립유공자의 유해 유전자(DNA) 정보를 기록으로 영구 보존하고 후손을 찾는 중요 단서로 활용해 이분들의 희생과 공헌이 우리사회에 영원히 계승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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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공자 예우와 복지증진 협약 체결로 재계가 동참한 일류보훈 구현
[시크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전경련회관에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김병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직무 대행 등이 ‘국가유공자 예우 및 복지증진 업무협약’을 3일 10시에 체결했다. 이날 업무 협약은 대한민국 자유수호에 헌신한 국가유공자에 대한 존경과 예우 분위기 조성, 국가유공자의 영예로운 삶 향유를 위한 복지증진, 생활안정을 위한 일자리 지원 확대 등을 목적과 주요 골자로 구체적인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이번 업무협약에 따라 첫 번째 실천사업으로 ‘수호자의 발걸음’ 프로젝트가 추진된다. 이 사업은 ‘국가보훈부-전국경제인연합회-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함께 협력해 자유 수호를 위해 대한민국 곳곳을 쉼 없이 전진한 국군 및 유엔군 참전용사의 헌신에 감사드리고자 세상에 하나뿐인 맞춤형 신발을 제작해 헌정한다. 왼발과 오른발의 발볼 차이로 기성화가 안맞거나 보행 불편이 있는 6‧25참전유공자 및 재방한 유엔참전용사 등 300명 영웅의 발을 삼면측정(3D스캔)하고 그에 맞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영웅의 신발(One & Only Heroes Shoes)”를 제작해 6·25남침전쟁 정전 70주년인 7월 27일을 전후해 직접 전달한다. 또한, 맞춤형 신발 제작을 위해 취형한 발 모양과 참전영웅의 인적사항, 참전기간, 누적 발걸음 수 등이 표기된 동판을 제작해 대한민국을 지켜낸 희생과 헌신에 감사와 예우를 전하는 의미에서 11월 11일 국제추모의 날(턴투워드부산)에 맞추어 유엔평화공원에 ‘영웅의 길’을 조성할 예정이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영웅을 기억하는 것은 피와 땀으로 대한민국을 지킨 모든 분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약속이자 일류보훈으로 가는 기본” 이라며 “국가보훈부 승격에 걸맞게 품격 높은 보훈으로 국가유공자를 예우하고 보답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지난해 ‘경제계와 함께하는 일류보훈 동행’으로 시작된 양 기관의 상호협력은 이번 협약으로 더욱 공고화되어 향후 주거개선 및 제대군인 일자리 지원 등 국가유공자 생활안정을 위한 복지증진 사업으로 구체화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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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잊혀진 모로코 6·25남침전쟁 참전용사 첫 확인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전문기자] 주모로코 한국대사관(대사 정기용)은 6·25 남침전쟁 당시 프랑스 군복을 입고 참전했던 북아프리카 모로코 군인의 후손을 처음으로 찾아냈다고 28일(현지시간) 밝혔다. 이번에 확인된 유족은 6·25 남침전쟁에 유엔군 프랑스대대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모하메드 벤 카두르 라스리(당시 병장·실제 모로코 이름은 무흐 벤카두르 엘 아스리)의 딸인 프테탐 엘 아스리(81)씨와 손녀다. 라스리씨는 1951년 3월5일 1037고지 전투 중 왼쪽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전사했으며, 유해는 부산 유엔 공원에 안장돼 있다. 한국대사관은 지난해 9월 프랑스 군사기록원 자료를 통해 라스리씨를 포함한 8명의 모로코 군인이 프랑스군에 배속돼 6·25에 참전한 사실을 확인하고, 모로코 보훈처와 함께 참전용사 가족 찾기에 나섰다. 6·25 남침전쟁의 숨은 영웅찾기 사업을 진행하던 윤종진 보훈처 차장이 지난해 12월 현지 방문을 계기로 참전용사 가족 찾기에 적극 나선 모로코 보훈처는 몇달간의 조사와 확인 끝에 첫 성과를 냈다. 그러나 후손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라스리씨의 병적 상 이름이 실제 이름과 달리 기재된 데다, 유족들이 거주지를 옮기면서 전입신고를 하지 않아 소재 파악도 어려웠다. 딸인 프테탐씨가 가지고 있던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인 군복 입은 사진이 가족관계를 확인하는 단 한 가지 단서였다. 프테탐씨는 "4살 때 입대한 뒤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고 6·25 남침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도 최근에 알았다"며 "우리를 잊지 않고 찾아준 한국 정부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부산 유엔 공원을 꼭 방문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6·25 남침전쟁 발발 당시 모로코는 프랑스의 보호령이었다. 모로코인 참전용사들이 프랑스군에 배속돼 프랑스 군복을 입고 전쟁에 투입된 이유다. 모로코 참전용사 확인 작업은 애초 2012년에 시작됐지만, 당시 모로코 측에서 관련 자료 확인에 난색을 보이면서 1년 만에 중단됐다. 그렇게 끝나는 듯했던 참전용사 확인은 2021년 정 대사가 엘렌 르 갈 당시 주모로코 프랑스 대사에게서 6.25 참전 모로코인 자료가 프랑스에 존재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재개됐다. 이후 부산 유엔공원에서 모로코 출신 참전용사 2명이 안장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이어 대사관측은 프랑스 참전용사 및 전쟁피해자 사무소(ONACVG)의 협조로 프랑스 군사 기록원에 남아있는 관련 기록을 확보, 지난해 처음으로 참전용사 8명의 존재를 찾아냈다. 정기용 대사는 "정전 70주년을 맞은 해에 모로코 출신 6·25 참전용사 가족을 찾게 돼 의미가 크다"며 "앞으로도 추가로 참전 용사와 가족을 찾는 한편 모로코 내 학교 교재에 이 사실을 수록하고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는 등 후속 사업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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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은 “외교관 생활을 하며 만난 미국인들은 한국인보다도 백선엽장군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음을 알게되었습니다”라며 “백 장군님은 정전협정을 앞두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하시어 현재 한미동맹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작금에 북한의 핵위협과 도발이 계속되는 속에서 출범하는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큰 역할을 하기를 기대합니다”라고 축사를 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의 “참군인 김관진 장관이 이사장을 맡아 이 재단은 더욱 발전할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이어 박정환 육군참모총장, 틸러리 전 연합사령관, 권오성 육군협회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국회 회의 때문에 늦게 도착한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를 만든 분, 백선엽 장군은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내신 분, 박정희는 오늘의 선진 경제를 만들었습니다”라고 축사를 시작했다. 이어 박 장관은 “이렇기 때문에 이 세분은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나라발전에 큰 업적을 많이 남긴 지도자입니다. 허나 지난 정권에서는 폄하되며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 이 세분의 역사적인 공을 양지로 끌어내는 것이 본 장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의 일에도 분골쇄신의 각오로 절대 기여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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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재단 이사장인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은 “백선엽 장군님은 창군(創軍) 원로이자, 6.25남침전쟁시 대한민국이라는 신생국가가 존폐의 위기에 처할 때에 다부동전투 승리로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의 발판을 만드시고, 평양 선두입성, 중공군의 공세 저지, 남부군 토벌 등의 뛰어난 전공을 세우셨다”며 기념사를 시작했다. 백선엽 장군은 전쟁중에 국군 최초 4성 장군이 되어 두 번의 육군참모총장과 제10대 합참의장을 역임했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헌신적인 노력을 하여 한미동맹의 초석을 다지신 구국영웅이다. 미군은 지금도 백선엽 장군님을 6·25남침전쟁시에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하며 존경하고 있다. 백 장군은 전역후 약 10년 동안 중화민국, 프랑스, 캐나다 대사를 역임하며 북한의 외교 진출 공세를 철저히 막아내었고, 귀국해서 교통부 장관 재임시에는 서울지하철 1호선 건설 실현과 대한민국 화학산업을 키워내신 탁월한 외교관이자 산업근대화의 주역이기도 하다. 이에 김관진 이사장은 “백선엽 장군님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공인(公人)의 표본이자 우리 시대 ‘제복의 영웅’입니다. 그동안 뜻있는 많은 분들이 감사하게도 여러 추모 및 기념단체를 만들어 뜻을 기리고 있었습니다”라며 “이제 과거를 뛰어넘어 대한민국을 초일류국가로 도약시키기 위해 백남희 여사의 적극적인 후원과 보훈부의 도움으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을 창립하여 새롭게 출발합니다. 이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따라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은 장군님의 숭고한 나라사랑과 공인 정신을 선양하고 계승함으로써 미래의 주역이 될 이 땅의 젊은이들이 올바른 역사인식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며 각오를 밝혔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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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상)
30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구 소재 공군회관에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재단 창립대회를 개최. [사진=김희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은 30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구 소재 공군호텔에서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김형오 전 국회의장, 박민식 보훈부 장관, 권오성 육군협회장, 이중근 부영그룹회장, 고현석 육군참모차장, 벤플리트 장군 손자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재단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창립대회는 대한민국 군가합창단(홍두승 단장)의 식전 공연에 이어 초대 재단 이사장인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과 백선엽 장군의 장녀이자 재단 명예이사장인 백남희 여사의 개회선언으로 시작됐다.2부에서는 김재창 장군의 ‘가까이서 본 선배 백선엽 장군’과 유광종 대표의 ‘백선엽,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 주제 발표가 있었다. 특히 다부동 대첩 및 평양입성 전투에서 고(故) 백선엽 장군과 함께 싸웠던 ‘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의 박형수(94세) 회장과 김주찬(94세) 부회장이 노구를 이끌고 참석해 전장 실상을 이야기할 때와, 재단 명예이사장인 백남희 여사가 환영사로 대한민국과 아버지의 삶을 이야기할 때는 참석자들 모두에게 깊은 감동을 주어눈시울을 붉어지게 만들며 힘찬 박수가 터져나왔다. 또한 백선엽 장군과 인연을 맺였던 청년 대표와 연평해전 전사자 서정우 하사의 모친의 플로어 맨트도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백 장군은 1952년 7월 최연소(32세)로 제7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고, 이듬해 1월엔 만 33세에 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됐다. 정전회담 땐 국군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2020년 7월10일 향년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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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53)] 눈물 어린 애국의 결정판 백두산함으로 최초 승리한 대한해협해전과 전초전인 옥계해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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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53)] 눈물 어린 애국의 결정판 백두산함으로 최초 승리한 대한해협해전과 전초전인 옥계해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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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52)] 기록상 유일하게 성공적으로 타격한 대북 응징보복 작전인 손원일제독의 ‘몽금포작전(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대한민국 국군이 창군된 1948년부터 우리 군은 큰 위기를 맞았다. 육군 내 좌익으로 활동하던 강태무, 표무원이 예하 2대대 병력 전체를 이끌고 월북했고, 해군에서도 암약하던 좌익이 동해에서 함정 4척을 동반해 월북한 일도 있었다. 또 9척을 유인 납북시키려다 발각되어 실패하고 저지하는 정장을 살해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렇게 뒤숭숭하던 1949년 8월10일 인천항에 정박한 미 군사고문 단장 로버트 준장의 전용 보트가 납북된 사실이 밝혀졌다. 6일 뒤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될 예정이던 관함식을 방해하기 위해 북한이 대담한 선제 도발을 한 것이다. ■ 육·공군 보다 먼저 창설된 해군의 ‘몽금포작전’ 이승만 대통령은 경무대 대책회의에서 동해에서는 태극기를 단 함정이, 서해에서는 성조기를 단 보트가 납북된 것에 대해 개탄하며 이응준 육군참모총장과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을 질책했다. 국가의 정체성과 존립성 마져 흔들리는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낀 손 해군참모총장은 북한에 강력한 충격을 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마침 첩보부대는 북으로 끌려간 보트가 몽금포항에 계류된 사실을 밝혀냈다. 손 총장은 정보감 함명수 소령(해사 1기, 7대 해군총장)을 특공대장으로 하는 20명의 해병대 상륙대원들과 함정 5척으로 구성된 해군전단에게 보트 탈환 및 응징보복작전을 지시했고 전의에 불탄 이들은 전날 밤에 은밀히 인천항을 빠져나왔다. 드디어 8월 17일 새벽 여명 속에 몽금포 해변 윤곽이 들어나자, 특공대원들은 고무보트에 올라 항구로 돌진했다. 예상외의 기습에 놀란 북한군은 해안초소와 부두에 정박한 함정에서 사격을 가함으로서 쌍방간에 치열한 전투가 전개됐다. 이 때 적탄이 특공대장 함소령의 양쪽 허벅지를 관통했고, 뭍 근처까지 도달한 고무보트 중 4척은 기관 고장으로 멈췄다. 자칫 전멸될 위기였다. 이것을 목격한 공정식 소령(해사 1기, 6대 해병대사령관)이 통영(JMS-302)함을 지휘해 적진 속에서 포로가 될 상황에 처한 함소령과 상륙대원들을 구출한 후, 37미리 포로 북한 함정 4척을 대파 격침시켰다. 승조원들은 육박전을 벌여 북한군 120명을 사살하고 5명(장교1, 병4명)을 생포한 뒤 35톤급 제 18호 경비정까지 나포해 남하했다. 비록 목표했던 보트를 되찾지는 못했지만 예상외의 큰 전과를 거두게 됐다. ‘몽금포작전’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우리 국민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해 단호하게 응징한 작전으로 역사에 길이 남았다. 당시 우리 해군 전체 병력은 3000명으로 15분의 1인 200명이 출전했고, 특공대원을 포함한 참전자 중 1명만 부상을 입었다. ■ 70여년 전, 대북 응징보복작전을 성공적 시행한 선배들의 혁혁한 전통을 계승한 강군되길 하지만 이 작전 후 군은 곤욕을 치렀다. 미국이 무초 대사를 통해 ‘해군의 38선 월북작전’에 항의했고, 김일성은 “6.25남침전쟁 발원은 몽금포 작전”이라며 선전과 선동전을 폈다. 이 주장에 중국과 소련이 가세하며 북침설이 나돌았으나, 1990년대 초 러시아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북침설은 존립 근거를 잃었다. 그런데도 우리 군은 ‘몽금포 작전’을 인정하는데 60년 이상 허비하다가, 전 합참의장인 최윤희 제독이 2012년 6월 해군참모총장 재직 시 해군본부에서 발행한 ‘6.25전쟁과 한국해군작전’이란 책에서 공식 기록으로 등재돼 구전되어 오던 이 혁혁한 전공이 빛을 보게 되었다. 작금의 미사일 발사 등 북의 군사적 위협이 가중되는 가운데 우리 군은 성군기 문란, 하극상, 갑질 논란 등의 문제로 신뢰가 떨어지고 있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근본 임무를 망각하지 말고, 내외부로부터 있을 불순한 세력에 의한 테러나 북한의 무력 도발에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 그래야 이미 70여년 전에 도발 원점과 지원세력을 과감히 타격하는 대북 응징보복작전을 성공적으로 시행한 선배들의 혁혁한 전통을 이어받아 강군으로 거듭날 수 있고, 국민들에게는 신뢰의 카타르시스를 되찾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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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52)] 기록상 유일하게 성공적으로 타격한 대북 응징보복 작전인 손원일제독의 ‘몽금포작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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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51)] 기록상 유일하게 성공적으로 타격한 대북 응징보복 작전인 손원일제독의 ‘몽금포작전’(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이명박 정부는 연평도 포격도발 발생 12일째 되는 2010년 12월4일 토요일임에도 국방부장관 이취임식을 강행했다. 신임 김관진 국방부장관은 취임사에서 “앞으로 북한군이 도발할 시 우리 군은 그 원점 뿐만 아니라 지원과 지휘세력까지도 완전 타격하는 철저한 응징보복을 할 것”이라고 각오를 밝히며, 예하 부대에는 “현장에서 선조치 후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도발원점 타격을 지시한 결단력이 돋보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미 6ㆍ25남침전쟁 발발전인 1949년 8월17일 우리 해군에 의해 기록상 유일하게 도발원점과 지원세력을 성공적으로 타격한 대북 응징보복 작전인 ‘몽금포작전’이 과감하게 시행되었다. 이 역사적인 사실이 2012년 당시 해군총장 최윤희 제독에 의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 국군의 모체가 된 미 군정 조선경비대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여 광복이 되자 정치 지도자들과 군사 경력이 있는 청·장년은 되찾은 나라의 주권과 국민을 지키는 군대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런데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의 귀환이 늦어지면서 8월30일 좌익 세력이 먼저 ‘조선국군준비대’를 조직했고, 국내에 들어와 있던 광복군 계열도 10월29일 ‘대한국군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그해 11월 미 군정에 등록된 군사 단체는 무려 30개에 이르렀다. 사설 군사 단체들이 난립하면서 소란이 빚어지자 미 군정은 좌우익의 모든 군사 단체들에게 해산 명령을 내렸다. 또한 경찰력만으로 치안과 질서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한 미 군정 헌병사령관 시크 준장은 직접 군대의 창설을 서둘렀다. 이에 따라 1945년 11월13일 미 군정 내에 국방사령부(뒤에 통위부로 명칭을 바꿈)가 출범했다. 국방사령부는 38도선 경비와 해상 경비 업무를 담당했다. 그런데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에 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안을 협의하기로 하자 미 군정은 정식 군대 대신 병력 규모 2만5000명의 치안군(조선경비대)을 창설하기로 방침을 바꾸고 각 도에 1개 연대씩 경찰예비대를 편성하는 '뱀부 계획(Bamboo Plan)'을 수립했다. 현재 육군사관학교가 자리 잡은 태릉에서 1946년 1월 15일 조선경비대 1연대 A중대가 창설됐다. 이어 2연대(대전), 3연대(이리), 4연대(광주), 5연대(부산), 6연대(대구), 7연대(청주), 8연대(춘천), 9연대(제주)가 편성됐다. 이에 미 군정은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통위부장에 임시정부 군사부 참모총장을 지낸 유동열을 상해까지 가서 모셔왔으며, 광복군의 구조와 계급·명칭 등을 수용하려고 했다. ■ 해군 원조인 손원일 제독의 ‘해방병단(海防兵團)’과 국군 창설 3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육군 못지않게 해군의 역할도 중요했다. 초대 해군참모총장 고(故) 손원일 제독(1909~1980)은 1945년 8월 ‘조국광복에 즈음하여 이 나라 해양과 국토를 지킬 동지를 구함’이라는 모집광고를 냈다. 결국 육군보다 먼저 장병 200여 명을 모아 11월11일11시에 서울 관훈동 표훈전에서 ‘해방병단(海防兵團)’ 결단식을 열었고 이날은 해군 창설기념일이 되었다. ‘해방병단’의 설립은 1894년 7월15일 조선수군이 폐지된 지 51년 4개월 만에 우리 바다를 스스로 지키는 해군의 모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창립 날짜가 11(十一)월 11(十一)일인 이유는 선비 사(士)가 두 번 겹치는 형태로 해군의 신사도 정신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손 제독은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1946년 1월 현재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인 해군병학교를 창설, 초대교장으로 재직했다. 당시 직접 생도들에게 항해술을 가르치는 등 장교 육성을 위해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해방병단’은 국방사령부로 편입된 후 ‘조선해안경비대’로 개칭했다. 1946년 1월 초 태극기가 나부끼는 진해 앞바다에서 첫 해상 훈련을 실시했고, 이듬해에는 우리 손으로 만든 첫 군함인 ‘충무공정’을 진수시켜 인천 근해에서 편대 훈련을 했다. 손 제독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1948년 12월15일 정식으로 발족된 대한민국 해군의 참모총장직을 맡았고, 1948년 10월 여수ㆍ순천 사건 진압에 투입되었다가 해병대의 필요성을 느껴 1949년 4월15일 해병대도 창설하였다. 한편 1947년 가을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 정부는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면서 조선경비대를 5만명으로 늘린다는 방침을 정했다. 1947년 12월 기존의 9개 연대로 서울·대전·부산에 각각 여단을 창설했고, 이듬해 4월 추가로 2개 여단이 편성됐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가장 시급한 과제의 하나는 국군 창설이었다. 1948년 8월 16일 이범석 국방장관은 '국군 장병에게 보내는 훈령'을 발표하여 "금일로부터 육·해군 각급 장병은 대한민국의 국방군으로 편성되는 영예를 안게 됐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장병들에게 진충보국(盡忠報國) 정신을 실천해 전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당부했다. 국군조직법이 제정됨에 따라 미 군정의 조선경비대와 해방병단이 모체가 된 조선해안경비대는 육군과 해군으로 개칭되었다. 또한 8월31일 광복군 선·후배인 유동열 미 군정 통위부장과 이범석 국방장관 사이에 군사 업무가 이양됨으로써 대한민국 국군의 정통성이 광복군을 잇는다는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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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51)] 기록상 유일하게 성공적으로 타격한 대북 응징보복 작전인 손원일제독의 ‘몽금포작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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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50)] 용맹한 ‘백병전의 왕자’인 터키군은 ‘칸 카르데시’ (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전술적으로는 패했지만 전략적으로 유엔군 작전에 기여했던 터키군은 ‘군우리 전투’에서 일부 부대가 명령도 없었는데 멋대로 철수함으로써 실추된 터키 여단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중공군과의 전투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1951년 1월 25일, 용인으로 전진하던 터키 여단은 전방 금량장리의 151고지에 잘 구축되어 있는 중공군 진지와 마주쳤다. 이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미 25사단으로부터 전차를 지원받는 한편, 항공 공습 후 공격을 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중공군 진지에는 드물게도 박격포 등을 비롯한 포병 지원화력이 있어서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터키 여단 3대대(앞서 제시한 ‘군우리 전투’에서 일방적으로 철수한 부대)는 대대장 이하 전원이 ‘알라후 아크바르(알라신은 위대하다)’를 크게 외치며 고지로 돌격하는 결전을 치루었다. 오후 5시경 대대는 고지를 점령했는데 확인된 중국군의 전사자 474구의 시신 대부분이 총검에 의한 것이었을 정도로 터키군은 ‘백병전의 왕자’로 거듭났고 반면에 터키군은 전사 12명, 부상 70명이라는 사소한 피해만 입어 실추된 터키 여단의 명예를 다시 드높여주었다. 마침, 이 장면을 API 통신의 종군기자가 취재하여 보도함으로 전투가 널리 알려졌고 ‘군우리 전투’에서 입었던 불명예를 완전히 떨쳐냄은 물론 ‘백병전의 왕자’라는 명성도 얻었다. ■ 6·25남침전쟁에서 터키군 희생에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당연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터키인들은 약 1500년 전 고구려(발해)와 돌궐(투르크)이 동맹관계였다는 것에 기인하기 보다는 사실 6·25남침전쟁 참전 이후부터 '칸 카르데쉬'의 의미를 찾는다. 6·25남침전쟁 당시 터키는 5000명 파견 계획을 세우고 지원병을 모집했는데 '형제의 나라'에서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수만명의 터키인들이 지원했다. 미국, 영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견했으며 많은 희생자도 발생했다. 공식 수치는 1만4936명이 참전, 721명 전사, 168명 실종, 2111여명 부상 등이다. 역사적으로 용맹한 전사들이었던 투르크 민족인 터키군은 6·25남침전쟁에서도 백병전에 강한 명성을 발휘해 군우리, 금량장, 퇴계원 등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많은 전문가들은 만약 터키군이 전투에서 패했더라면 오늘날 휴전선의 위치는 훨씬 남쪽에 그어져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제시했다. 휴전 이후에도 터키군은 전쟁 복구사업을 위해 계속 주둔했으며, 도로를 닦고 다리를 놓았으며 전쟁고아들을 돌보고 위생, 의료 봉사활동도 펼쳤다. 이것은 2018년 한국과 터키가 합작으로 만든 ‘아일라’라는 영화에서 부모 잃은 5살 소녀와 터어키 병사의 애틋한 이야기로 잘 표현되어 있다. 대한민국이 불과 60여년 만에 세계 10위권 국가로 도약해 있다는 현실에 터키인들은 흐뭇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한다. 또한 지난 2002년 월드컵 당시 터키를 따뜻하게 응원해 준 대한민국 국민의 모습이 터키 유학생들을 통해 전해지면서 양국 관계에 대해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터키에서의 축구 열기는 뜨거워 축구가 자기 정체성의 상징이며 삶 자체라고 표현되기도 하며 결혼에서도 응원하는 축구팀이 고려 조건이 될 정도라고 한다. 특히 한국과 터키의 3,4위전 당시 자국에서 조차 본 적이 없는 대형 터키 국기가 관중석에 펼쳐지는 순간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수많은 터키인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터키인들이 '한국은 터키와 특별한 관계'라는 인식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해준 계기가 됐다. 이제 터키의 '한국 사랑'은 우리 기업 제품 선호와 한류 열풍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 터키내 활동중인 한류 팬클럽은 현재 17개 17만 여명에 달한다. 터키의 우리에 대한 호감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들만큼 특별한 것이 사실이며, 우리가 터키인들을 만났을 때 6.25남침전쟁에 참전하고 희생한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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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50)] 용맹한 ‘백병전의 왕자’인 터키군은 ‘칸 카르데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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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49)] 용맹한 ‘백병전의 왕자’인 터키군은 ‘칸 카르데시’ (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터키는 6·25남침전쟁시 육군 1개 여단을 파병하여 참전했고 이후 한국을 피로 맺어진 형제의 나라라는 뜻의 ‘칸 카르데시’로 부르고 있다. 연인원 1만4936명이 참전해 3064명의 인명 피해를 봄으로써 얼마나 용맹히 싸웠는지 알 수 있다. 군우리·금량장 전투가 대표적이며 터키의 앙카라·이스켄데룬 등에 참전기념물이 있다. 부산의 유엔묘지에는 영국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462명이 잠들어 있다. 6·25남침전쟁시 터키여단의 참전용사인 오스만 야사르 에켄(82)은 "저희들에게 한국은 우리 고향처럼 느껴집니다. 터키 군인들이 한국 땅에서 ‘피를 나눈 형제(칸 카르데시)’가 됐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 터키군은 한국의 자유와 세계 평화 위해 용맹하게 싸웠고 3064명 희생 1950년 6·25남침전쟁이 발발하자 세계 16개국의 유엔군이 참전하였는데 7월25일 터키 정부에서도 6·25남침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했고 터키군은 10월17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후 11월26일부터 군우리·신림리 전투를 시작으로 1951년 1월 13일에는 의정부·연천·금화 지구에서 전투를 벌였다. 터키군은 1951년 1월25일부터 27일까지 3일 간 금량장 전투를 벌여 474명을 사살하고 23명의 포로를 잡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1952년 2월24일에는 ‘단장의 능선’ 전투도 치르었다. 터키군은 6·25남침전쟁 동안에 중공군과 북한군을 상대로 여러 번 접전을 벌였으며 3064명의 전사자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휴전 후에는 1953년 7월부터 1966년 7월까지는 의정부 지구 경계임무를 수행하였다. 영동고속도로 마성 인터체인지 입구에 우뚝 서 있는 ‘터키군 참전비’ 탑 하단 앞의 작은 표지석 동판에는 한국어와 터키어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유엔의 기치를 들고 터키 보병여단은 한국의 자유와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침략자와 싸웠다. 여기 그들의 전·사상자 3064명의 고귀한 피의 값은 헛되지 않으리라.” 또한 터키 국기에 있는 초생달과 별 모형은 이스탄불을 정복하던 날 메메트(Mehmet) 황제가 본 밤하늘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의 군대가 이스탄불의 성벽 밑을 뚫고 침입하려 했을 때 초승달 빛으로 이를 발견하여 나라를 구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 터키군은 혈전을 치른 ‘군우리 전투’에서 유엔군 최초로 미 대통령 표창 수상 1950년 중후반에 이미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은 한반도에 진입해 있었고 당시 한중 국경에 거의 근접해 있던 유엔군에게 일련의 기습 공격을 가했다. 중공군은 국군 2군단을 괴멸시킴으로써, 미 8군의 우익을 붕괴시켰다. 이로써 11월 4일 압록강 진격을 목표로 하던 유엔군의 공세는 좌절되었다. 이러한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을 과소 평가해 11월24일 미 8군에게 새로운 공세를 개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새로 도착한 터키 여단은 공세의 일환으로 미 9군단의 예비부대가 되었고, 미 8군사령부 공격의 중심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맥아더의 낙관과는 달리 11월 25일 밤 중공군은 대규모 반격을 감행했다. 미 8군을 상대로 거두었던 이전의 승리를 바탕으로, 중공군은 다시 와해된 국군 2군단을 공격하였고, 11월 26일 유엔군의 우익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는 이 상황에 고무되어 38군에게 유엔군의 우익에서 서쪽으로 진격하여 군우리에서 미 9군단의 철수로를 차단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맞서서 미 9군단은 터키 여단에게 11월 26일 군우리 동쪽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터키 병사들은 영어나 한국어를 모두 이해할 수 없었기에, 터키 여단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중공군 부대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부족했기 때문에 전투는 더욱 혼돈에 휩싸였다. 터키 여단은 미 9군단의 지시를 잘못 이해하여 동쪽으로 진격함으로써 산골을 통해서 장거리 행군을 할 수 밖에 없었다. 11월 26일 덕천에서 패해 도주하던 국군 2군단 예하의 6사단과 7사단은 와원에 처음 도착한 터키 여단 2개 대대의 공격을 받았는데, 이는 터키군이 국군을 중공군으로 착각한 것이 원인이었다. 아군 간의 오인 사격으로 20명의 국군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터키군도 14명의 사망자와 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잘못된 정보로 인해 터키군은 중공군을 도로변에서 조우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및 유럽 언론들은 터키군이 중공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고 보고했고, 뉴스가 발표된 이후 정확한 사실이 다시 알려졌음에도 미국 언론은 보도를 정정하려고 들지 않았다. 11월 27일,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터키 여단은 군우리 동쪽의 와원에서 치열한 전투에 임했다. 결국 터키군은 후퇴하는 국군 2군단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진격하였고, 5배나 많은 중공군에게 퇴로를 차단 당할 위기에서도 희생을 감수하며 용맹하게 싸웠다. 그때 미 2사단도 중공군에게 포위당해 전멸 위기에 있었는데, 터키군은 후퇴하는 미 2사단을 엄호하기 위해 착검을 하고 중공군과 대적하여 “백병전을 가장 잘한 군대는 터키군이다”라고도 불리게 됐다. 군우리 전투를 분석한 역사학자 베빈 알렉산더는 와원과 군우리 사이에 있던 유일한 유엔군 부대가 터키 여단이었고, 미 2사단이 철수하기 전에 중공군이 군우리를 점령할 수 없었다는 것은 터키 여단이 그들의 원래 목표를 달성하고 미 9군단의 철수를 엄호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음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결국 터키군은 군우리 전투에서 전술적으로는 패하였지만 중공군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혀, 중공군 38군이 이후로 5일간이나 진격을 하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었다. 물론 일부 부대가 명령도 없었는데 멋대로 철수하여 터키 여단의 명예를 실추시킨 경우도 있었지만 많은 희생을 치르며 소정의 성과를 얻었다. 따라서 이 전투로 터키군은 유엔군 최초로 미 대통령 표창을 받게 되었으며, 12월 13일 미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터키 여단이 중공군에 맞서 보여준 행동과 희생을 기려 15개의 은성훈장과 동성훈장을 수여했다. (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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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49)] 용맹한 ‘백병전의 왕자’인 터키군은 ‘칸 카르데시’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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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48)] 스파르타 대대, 고대전쟁사의 찬란한 전통과 영광을 계승하여 용전분투 (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연천 313(스카치) 고지 전투는 1951년 10월 3~5일간 연천 북방 15km 지점의 313고지에서 중공군 141사단 및 140사단 예하 부대와 치른 전투이다. 스파르타 대대는 당시 미 1기병사단에 배속되어 방어선을 개선하기 위한 제한적인 공격 작전에 참가하여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던 313고지를 공격하였다. 10월 3일과 10월 4일의 2회에 걸친 공격에서 돌격 부대가 목표 지역까지 도달하였으나,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사상자가 속출하자 일단 철수한 후, 10월 5일 항공 폭격과 포격의 지원하에 재차 공격을 실시하여 313 고지를 점령하였다. 이 전투에서 대대는 전사 28명, 부상 77명의 피해를 입어 그리스군의 한국전 전투 중 가장 피린내 나는 전투로 기록됐다. ■ 휴전을 앞두고 스파르타 정신으로 끝까지 고수한 ‘북정령 전투’ 북정령 전투는 1953년 7월 15~26일간 스파르타 대대가 미 3사단에 배속되어 북정령 남쪽 승암고개의 주 저항선(김화 동북쪽 10km 지점)을 방어하고 있던 중 중공군의 마지막 ‘7월 공세’에 가담한 68군 예하 부대와 치른 전투이다. 스파르타 대대는 적근산 서남쪽 고비목을 거쳐 7월15일 김화-금성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북정령 남쪽 구릉지대로 진출했다. 그날 밤부터 중공군의 포격은 시작되었고 진지 구축을 미처 끝내지 못한 그리스군은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계속 인원을 증원해 인해전술로 공격하는 중공군에 맞선 대대는 숨막히는 격전으로 간신히 새벽녘에 적군을 격퇴했다. 그러나 손상된 진지를 보강할 겨를도 없이 중공군의 주간 공격이 다시 시작됐다. 2시간30분 간의 격렬한 혈전 끝에 적군을 물리치고 작전지역을 국군 1기갑여단 1대대에 인계한 후 스파르타 대대는 북정령 남쪽 승암고개 일대의 532, 492고지 등 요충지에 재배치되었다. 휴전을 불과 3일 앞두고 또 중공군이 7월25일 대대가 배치된 고지에 포병 화력을 집중한 후 공격해왔다. 스파르타 대대는 한치의 땅도 양보할 수 없다는 전의로 중공군과 맞섰다. 결국 중공군이 영역을 넓히려는 의도로 7월 26일까지 계속한 마지막 공세를 끝까지 격퇴하며 고지를 지켜내고 7월 27일 휴전을 맞이하였다. 당시 미군 연대장은 휴전을 앞두고 피해를 줄이려는 의도로 이 전투에 앞서 그 지역으로부터 철수를 종용하였으나, 그리스군 스파르타 대대는 철수가 미칠 심각한 영향을 고려하여 추가적인 지원화력을 요청하면서 그 방어선을 끝까지 고수하였다. 이 전투 결과 그리스군은 19명이 전사하고 28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나 적군인 중공군 150명을 사살하고, 27명의 포로를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다. 때마침 그리스군 동측 인접 국군 11사단이 적근산 전투에서([김희철의 전쟁사](43) ‘청춘들의 출혈이 계속된 적근산 735(김일성)고지 전투(하)’ 참조) 승리하여 우측 고지지역을 지켜냈다. 결국 이와 함께 스파르타 대대가 ‘명불허전(名不虛傳)’이란 말처럼 그 명성과 전통에 걸맞는 투지와 용맹하고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북정령 고지를 사수함으로써 오늘날 승암고개와 그 후사면의 광활한 평야이자 곡창지대인 마현리는 휴전선 남쪽에 남아있게 되었으며 필자가 소·중대장 시절 그곳에서 마음껏 활보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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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48)] 스파르타 대대, 고대전쟁사의 찬란한 전통과 영광을 계승하여 용전분투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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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47)] 스파르타 대대, 고대전쟁사의 찬란한 전통과 영광을 계승하여 용전분투(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아보협업연구소장] ‘명불허전(名不虛傳)’이란 명성이나 명예가 헛되이 퍼진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이름날 만한 까닭이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필자가 중대장과 사단작전보좌관으로 근무했던 부대 인근에는 북정령과 승암고개 그리고 연천 313고지, 노리고지 등이 있었다. 이곳의 공통점은 6·25남침전쟁 시 그리스의 용맹한 스파르타 대대가 고대전쟁 역사의 찬란한 전통을 계승하여 맹활약한 전투지역으로 ‘명불허전(名不虛傳)’이란 사자성어의 의미를 증명했다. ■ 처절했던 6·25남침전쟁의 휴전 이틀 전까지 피흘리며 싸워 이 땅을 지켜낸 군대 그리스는 1944년 2차세계대전 종전으로 독일로부터 해방된 후 소련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 내란에 휩싸였다. 그러나 1949년 미국의 지원으로 공산군을 몰아내고 6년 가까운 내전을 종식하였다. 이듬해인 1950년 한반도에서 공산군의 남침이 알려지자 그리스 의회는 6월29일 한국전 파병을 결정했다. 지상군은 최초 3500여 명 규모의 여단급 부대 파병이 결정되었으나, 파병 준비를 하던 중 유엔군의 반격 작전으로 한국전의 사태가 호전됨에 따라 규모가 1개 대대로 축소되었다. 이 스파르타 대대는 1950년 12월 9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도착 초기에는 미군 사단에 배속되어 전방 지역에서 예비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1951년 1월25일 ‘이천 381고지’에서 중공군과 치른 전투를 시작으로 각처에서 많은 격전을 치렀다. 그리스는 총인원 5532명의 군인과 8명의 여성 간호장교들을 참전시켰다. ‘연천 313고지 전투’, ‘노리고지 전투’, ‘북정령 전투’ 등을 치렀으며 휴전 직전까지 용감하게 싸워 우리 국토를 지켜주었다. 또한 그리스 공군도 C-47기 7대로 구성된 13수송편대를 파병했다. 1950년 12월1일 일본에 도착한 이후 미 21비행대대와 미 6461수송대대에 배속돼 미 해병사단을 지원했다. 장진호 전투 등의 전사상자를 후방으로 후송하는 업무를 맡았다. 특히 장진호 남쪽의 하갈우리, 고토리 비행장을 활주로로 썼는데 강풍과 눈보라가 심해 보급품 공수와 병력 후송에 큰 고생을 했지만 작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리스군은 참전기간 중 전사 192명, 부상 543명, 포로 3명(국방부 통계)의 피해를 입었다. ■ 최초로 중공군과 치른 ‘이천 381고지 전투’ 이천 381고지 전투는 1951년 1월 29~30일간 그리스의 스파르타 대대가 최초로 중공군과 치른 전투이며 미 1기병사단에 배속되어 중공군 112사단 334연대와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인 전투이다. 스파르타 대대는 1951년 1월 25일부터 실시된 반격 작전에서 이천을 점령하고 북상 도중인 1월29일 381고지 일대에서 야간 기습 공격을 받게 되었다. 중공군은 대대 정면에서 381고지를 3차례에 걸쳐 공격하였으나, 이에 대대는 조명탄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포병 지원 사격으로 공격 부대를 제압하는 한편, 근접 전투를 전개하여 이들을 격퇴하고 381고지를 방어하였다. (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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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47)] 스파르타 대대, 고대전쟁사의 찬란한 전통과 영광을 계승하여 용전분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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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46)] 피를 부르는 처절한 공방전이 계속된 적근산 735(김일성)고지 전투(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휴전 회담이 막바지에 이르러 양측의 뺐기고 뺐는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던 1953년 7월, 또한번의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공록 대위는 국군11사단 20연대 9중대장으로 중부전선 금성지구 격전지 적근산 전투에 투입됐다. 이 대위는 평북 강계가 고향으로 1947년 혼자 월남했다. 1950년 육군사관학교가 4년제 정규과정으로 바뀌면서 생도를 모집했는데 그는 28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하여 6월 1일 입교했다. 그러나 입교한 지 24일만에 전쟁이 터졌다. 그날로 경기도 포천 전투에 투입됐다. 사람들은 생도들로만 구성된 부대를 '육사생도대대'라고 불렀다. 포천 지역은 북한군이 소련제 탱크를 집중 운용하며 쳐내려왔다. 우리군은 남쪽으로 계속 밀렸다. 태릉·광나루·수원·포항 전투…. 전투가 계속되면서 친구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그해 8월 살아남은 생도들이 부산 동래에 모였다. 이미 86명이 전사했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육사 생도 2기생’들은 육군종합학교에 편입됐고, 9주 훈련을 마친 뒤 다시 전선에 투입됐다. 그들은 6.25남침전쟁 동안 수많은 전투에 참전했다. 휴전 회담이 진행되던 1953년 7월, 이공록 대위가 지휘한 11사단 20연대 9중대는 13시간 철야 행군 끝에 적근산 자락에 도착하니 몸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주먹밥 하나로 허기를 달래고 밤잠을 청했으나 포성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목표는 중공군이 장악한 602고지였다. 한여름 폭염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내 앞에도 뒤에도 용맹한 국군들은 거침없이 내달렸다. 적이 던지는 수류탄을 되집어 던지며 돌격했다. 하지만 완강한 적의 저항에 아군 피해만 늘었다. 적 포탄 한 발에 우리 병사 2~3명씩이 쓰러졌다. 이 대위 눈앞에서 피 흘리며 쓰러지는 부하들을 보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한 병사의 왼쪽 어깨를 관통한 총알이 오른쪽 겨드랑이를 뚫고 지나갔다. 그 병사가 몸을 질질 끌고 와 그의 앞에서 휙 쓰러졌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헬리콥터가 있으니 조금만 참아라"고 거짓말했다. 그게 그에게 조금이라도 힘을 줄 수 있기 바라며…. 1차 공격에 실패한 뒤, 야간 공격을 하기로 했다. 남은 중대원을 확인하니 장교는 9중대장 이 대위와 부중대장인 이순택 중위뿐이고, 병사는 90명에 불과했다. 소대장 4명을 포함해 70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은 것이다. 엄청난 죄책감이 밀려왔다. 9중대장 이 대위는 분노에 북받쳐 소리쳤다. "이제 우리 중대는 중대장 없이 제1소대는 내가, 제2소대는 이 중위가 지휘한다. 기필코 602고지를 점령하자." ■ 전투에서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청춘들의 출혈을 멈추게 한 ‘휴전 협정’ 조인 또다시 피 튀기는 전투가 시작됐다. 이공록 대위와 부중대장은 각각 단독으로 공격해 정상에서 만나기로 했다. 11사단 20연대 9중대의 돌격대가 1시간 만에 목표를 점령했다. 대대장에게 목표 점령을 보고하고 증원 부대를 요청했다. 그런데 목표를 점령하고 만나기로 약속한 이 중위가 보이지 않았다. 무전기로 아무리 불러도 응답이 없었다.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수소문했더니, 공격 도중 적 포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고 했다. 이 대위는 넋을 잃었다. 장교 신분도 잊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 이제 남은 대원은 60명이었다. 중대 병력의 3분의 2가 희생됐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병사들을 차마 볼 수 없었다. 모두 얼빠진 사람처럼 축 늘어져 산 송장 같았다. 그는“이렇게 많은 부하를 희생시키고 혼자 살아남았다니…. 차라리 적의 포탄이 내 몸에 덮쳐 주었으면 좋겠다”라고 중얼 거렸고 살아야겠다는 의지도 욕심도 없어졌다. 이 대위는 총을 집어 들었다. 총구를 왼쪽 가슴에 대고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방아쇠에 걸었다. 그 순간, 지쳐 늘어져 있던 병사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을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 생사를 함께 하자고 약속한 전우들 아닌가. 이 대위는 벌떡 일어났다. 그 병사 어깨에 손을 얹고 "잘 싸웠다! 어디 다친 데는 없나?" 하고 말을 건넸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만 주르륵 흘렸다. 그도 이 대위와 거의 같은 또래다. 이 대위 나이 스물셋. 병사들 중엔 이 대위와 나이가 같거나 2~3살 위인 사람도 많았다. 7월27일 아침, 예측할 수 없는 하루가 또 시작됐다. 오늘도 죽고 죽이는 포격전이 계속되겠지. 그때 통신병이 전화라며 달려왔다. 새로운 공격 명령일 거라 생각했는데 부드러운 대대장 목소리가 들렸다. "아침 10시를 기해 모든 사격을 중지하라는 상부의 지시다." 휴전이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 처절했던 적근산 전투를 회상하며 “비극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힘이 있어야” 전쟁 직후 이 대위는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삶과 죽음을 같이했던 그의 부하와 전우들 때문이었다.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났는데도 그는 군복을 벗을 수 없었다. 1969년 월남전에 파병돼 1년 2개월간 싸운 뒤, 귀국과 함께 중령으로 예편했다. 참전했던 ‘육사 생도 2기생’들은 전쟁 때 육사를 제대로 마치지 못해 40년 넘게 졸업생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다 1996년 입교 46년 만에 졸업장을 받았다. 포천에는 전쟁 때 죽은 동기생 86명의 참전비가 있다. 이공록 대위는 “죽은 그들과 살아남은 ‘육사 생도 2기생’들에게도 참으로 행복했던 생도 시절이 있었다. 단 24일뿐이었던...”이라고 한마디를 남겼다. 또한 1981년 9월 적근산 전투에서 생존한 이한설 목사는 “전쟁을 겪어보지 않아 그 참혹함을 모르고 전쟁을 잊고 사는 이들과 내가 목숨을 걸었던 그 곳에서 밤낮으로 철책을 지키는 손주 같은 장병들이여, 나라가 힘이 있어야 한다. 나라가 힘이 있고 부강해야 다시는 이땅에서 그 날의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국군이 있다. 국민들은 군을 신뢰하고 군인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복무해야 한다. 기억하자. 그날의 비극을 …”이라고 증언을 마무리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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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46)] 피를 부르는 처절한 공방전이 계속된 적근산 735(김일성)고지 전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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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45)] 피를 부르는 처절한 공방전이 계속된 적근산 735(김일성)고지 전투 (중)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0년 10월말 한국전에 개입한 중공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서울까지 점령하였으나 아군의 반격으로 후퇴, 현재의 휴전선을 따라 전선이 형성되었다. 그 후로는 대대적인 공방전대신 전선 일대의 요충지 탈환을 위한 국부적이고 치열한 고지전이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국군은 중부전선 적근산 일대에서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는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겨우 735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는데 당시 7중대 소총병이었던 이한설 목사(현재 서울 성암교회 원로목사)은 중대원이 거의 전멸하고 생존한 6명중에 한사람이었다. ■ 이한설 서울 성암교회 원로목사, “송장 썩는 냄새와 시체의 피를 빨아먹는 모기가 두려워…” 이 목사는 증언을 통해 "전투는 화력이 난무하던 초반과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탄약이 소진되어 종국에는 총검을 가지고 혈투를 펼치는 백병전 양상이었다"고 전했다. 그는 “중공군이 던진 방망이수류탄 파편에 맞아 왼쪽 겨드랑이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후송은 커녕 다시 올라가 싸워야 했다”라며 말을 이어갔다. 때는 폭염이 작열하는 한여름이라 중공군과 아군의 시체가 어우러져 썩어가고 있었다. 여름 밤 불어오는 바람에 묻어나는 송장 썩는 냄새, 시체의 피를 빨아 손가락 마디만한 크기로 커진 모기의 공격은 두렵기까지 했다. 한밤중에도 지척에서 들리는 비명소리와 총검이 몸통을 비집고 들어가는 소리는 두려움을 넘어 적에 대한 증오와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더 크게 만들었던 것 같았다. 전투의 장기화로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해 찾아오는 허기는 인근 밭의 강냉이를 날로 뜯어먹는 것으로 달랬다. 누적된 피로에 쏟아지는 졸음은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살기 위해서는 참아야 했고 죽지 않으려면 죽여야 했던 것을. 그것이 6·25남침전쟁이었고 735고지 전투였다. 전쟁은 처절했고 전투는 치열했다. 나중에 참호를 정리하며 발견된 시신들은 개머리판이 부서진 총을 부둥켜안고 있거나 수류탄 안전핀을 입에 물고 폭사한 모습 등 아수라장이었다. 6중대는 고지를 점령하자 그곳에서 사투하다 장렬히 전사한 김영국 중대장의 시신을 발견하여 곧 대대OP로 후송했다. 치열한 전투에서 간신히 생존한 이 목사는 “7중대장 김영국 중위는 수세에 몰리자 분연히 적진에 뛰어들어 적 여러 명을 사살하고 기관총을 탈취해 전세를 뒤집으려다 총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한 영웅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결국 9월 아군 2사단은 전투기 지원 하에 735고지 왼쪽 전방 633고지를 공격했고 북쪽으로 1㎞를 더 진출해 승리를 거머쥐었다”고 말했다. 김영국 중위와 7중대원의 용맹성과 전공이 크게 인정 보도됨에 따라 이들에게 이승만대통령과 트루만 대통령의 표창장에 이어 UN군사령관과 미9군단장의 표창장이 연달아 수여 되었다. 김영국 중위 개인은 육군 대위로 일계급 특진과 동시 을지무공훈장과 미(美) 은성무공훈장도 수여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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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45)] 피를 부르는 처절한 공방전이 계속된 적근산 735(김일성)고지 전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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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44)] 피를 부르는 처절한 공방전이 계속된 적근산 735(김일성)고지 전투(상)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필자가 소·중대장 시절에 적근산 주변의 735, 633, 602고지 등을 수색할 때 6·25남침전쟁 당시 치열했던 전흔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휴전 직전 필자의 장인(故강철 대령, 종합1기)이 11사단 중대장으로 참전했던 일화와 관련된 현장도 발견했다. 1950년 10월말 한국전에 개입한 중공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서울까지 점령 하였으나 아군의 반격으로 후퇴, 현재의 휴전선을 따라 전선이 형성되었다. 그 후로는 대대적인 공방전대신 전선일대의 요충지 탈환을 위한 국부적이고 치열한 고지전이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 735(김일성)고지의 처절한 공방전, 야릇한 고요함과 정적이 전해준 공포 1951년 8월초에 국군 2사단은 중부전선 적근산과 김화를 연결하는 산악지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사단 좌측에 31연대, 우측에 17연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17연대 정면에 위치한 735고지는 일명 ‘김일성 고지’로도 불리웠고 피아간 상대방을 견제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따라서 쌍방이 이 고지를 점령확보하기 위해 수차에 걸쳐 뺐고 뺐기는 공방전이 전개 되었다. 2사단장 함병선 준장은 8월3일에는 사단유격대대와 17연대 1대대로 하여금 735고지를 공격, 탈취하였으나 적의 역습으로 후퇴하는 등 수 차례에 걸친 탈환전이 되풀이 되었다. 1951년 8월8일 17연대가 이 고지를 확보하자 사단 예비연대였던 32연대와 전선방어 임무를 교체하였다. 32연대는 예하 7중대를 735고지에 배치하고 그 후방 약 2km 지점에 735고지를 바라볼 수 있는 785고지정상에 2대대OP(관측소 또는 지휘소)를 설치하였다. 7중대장은 대대관측장교 윤영목 중위(현재 미국 오레곤 6.25참전 유공자 회장)와 육군종합학교 9기 동기생인 김영국 중위였고 그의 직속상관은 2대대장인 박동석 소령이었다. 최전방 요충지 735고지에는 윤중위의 후배관측장교인 이소위가 관측병, 통신병, 연락병 3명과 함께 7중대장을 위한 관측 및 포병지원임무를 맡고 있었다. 김영국 중위는 평소 친밀했던 군 동기인 관계로 수시로 윤중위에게 포지원을 잘해 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참고로 당시 2사단에는 105mm 곡사포 1개대대라는 미약한 화력지원력이 전부였다. 1951년 9월, 32연대 7중대가 735고지 방어임무를 맡고 있던 중 9월1일 밤 20:30시경부터 중공군 80사단 239연대가 대대적인 기습공격을 가해왔다. 735고지에 배치된 포병관측장교 이소위는 즉시 긴박한 상황을 보고하고 동시에 포병지원사격을 요청해와 735고지 능선 넘어에서 공격해 오는 중공군에 고사계 사격으로 저지 및 선멸을 시도하였다. 동시에 적군 상공에 조명탄을 계속 발사하여 아군의 적정관찰과 방어사격을 용이하게 하였다. 그러나 적군은 극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방어하는 7중대의 6배가량 되는 2개대대 병력의 절대다수 인해전술로 물밀듯 중대경계초소와 소대방어선을 강타하며 735고지 정상을 향하여 공격해왔다. 적이 아군 주진지에 접근함에 따라 포병의 화력지원은 아군 피해를 우려해 점점 어려워졌다. 7중대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포병관측장교의 유선망도 단절돼 무전기로만 교신했다. 윤중위는 대대OP에서 보병대대장 박소령과 긴밀한 보·포협동을 유지하면서 계속 포병대대본부에 전황을 보고하여 화력지원을 요청했다. 얼마 후 735고지에 이소위와 함께 있던 관측병이 무전으로 “이소위님이 쓰러졌습니다. 적군이 중대OP 부근까지 접근해 왔으며 이 상황에서 도저히 포병 지원 임무를 수행할 수 없으니 일단 대대OP로 철수해야 되겠습니다.”라고 보고해 왔다. 사실상 적과 밀집된 이 시점에서 조명탄 이외의 포격지원이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 상황을 즉시 포병대대본부에 보고하고 7중대 관측장교 이소위의 철수를 통보하였다. 약 1시간 후인 23:30시경에 이소위가 관측병 등에 업힌 채 통신병, 연락병과 함께 윤중위가 있는 대대OP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 당시 이소위는 완전히 실신 상태였으며 다행히 상처는 없기에 나의 야전 천막속에 눕히고 안정을 되찾도록 하였다. 7중대의 전방 관측반이 735고지에서 철수한 후부터 포병지원 임무는 전적으로 대대 관측장교인 윤 중위가가 맡게 되었고 보병대대 OP에서 대대장과 긴밀한 협조하에 모든 포병사격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하루가 지난 9월2일 자정이 넘어서도 전투는 계속됐고 01:00시경에는 735고지 도처에서 백병전이 감행되었으며 적군은 7중대 OP까지 접근한 상태였다. 김영국 중대장은 시시각각으로 대대장에게 중대의 위급상황을 보고하였으며 대대장은 수차에 걸쳐 중대장에게 “후퇴하지 말고 결코 사수하라”고 지시하였다. 그 후 01:30시경에 김영국 중대장으로부터 “적이 735고지 중대OP까지 침투했고 중대 잔여병력이 분산되었으니 이제는 아군 피해를 염려 말고 735고지 정상에 진내사격을 가해 적군을 저지해 달라”는 최후의 요청이 들어왔다. 이후 김영국 중대장과 그의 통신병과의 통신은 두절되고 02:00시경에는 쌍방의 총포성이 완전히 멈췄다. 그 후에 닥쳐온 정적, 벌레소리 하나 들리지 않은 야릇한 고요함이 공포로 밀려왔다. 이로써 735고지는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나 일부잔여 7중대원은 고지 각처에 은거하고 있었다. ■ 7중대의 원한을 갚은 6중대의 735고지 탈환전 그런데 적은 735고지를 점령한 후 새병력을 투입해서 대대OP(관측소)를 향해 계속 공격해 올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2사단에서는 735고지 재탈환작전을 계획하고 역습부대로 32연대 6중대를 선정해 다음날 9월2일 06:00시에 제6중대 병력을 735고지 산기슭에 배치하고 공격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이때 대대OP에는 제2사단장 함병선 준장이 참모진과 미고문관을 대동하고 6중대 탈환전을 지휘하기 위해 도착했다. 6중대의 공격개시에 앞서 사전에 준비된 작전계획에 따라 공격준비사격으로 미군 함제 전폭기의 735고지 폭격이 시작되었다. 대대관측장교 윤 중위는 이 전폭기들을 위해 WP(백린)탄을 735고지 정상에 발사해서 목표확인을 도와주었다. 전폭기 4대 편대가 계속 교대로 날아와 고지에 새로 구축한 적의 방어진을 강타했다. 약 30분간 계속된 폭격이 끝난 다음 제2사단을 지원하는 18포병대대는 물론 인접 미9군단 예하의 8인치와 240mm 대형 장거리포까지 동원하여 포사격이 계속되었다. 공중에서의 폭격과 지상에서의 집중포격으로 735고지는 완전히 초토화 되었다. 이로 인해 지도상의 735m고지가 1m낮아진 734m고지로 부르게 되고 후일 일부 전사에도 734고지로 기록하게 되었다. 06:00시 포격이 멈추자 6중대는 일제히 735고지를 향해서 공격을 개시했다. 중대가 고지 중반부에 이르렀을 때 아군의 폭격과 포격을 피해 참호속에 피신해 있던 생존 중공군이 일제히 밖으로 나타나 소총, 기관총과 수류탄으로 반격을 가해왔다. 6중대의 공격은 일진일퇴를 거듭했으며 그 중간중간에 정밀포격지원으로 적의 반항을 약화시켰다. 6중대는 약4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735고지 부근에 산재해 있던 7중대원들과 합세하여 10:00시경 드디어 735고지를 탈환하였다.(하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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