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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된 ‘9·19 군사합의’ (하)
[시큐리티팩트=김진형 위기관리전문기자] 이 군사합의에 따르면 금번 무인기의 도발은 명백한 합의사항 위반이다. 특히 이번 무인기 도발은 미국의 안보 전문가들도 “정찰, 감시를 넘어 언제라도 폭탄과 화학무기 등을 이용한 기습 공격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예상을 가능케 하였다”고 평가했다. 그동안 북한의 군사합의를 무시한 북한의 군사적 행동들이 여럿 있었다. 지난 10월 북한은 야음을 틈타 군사합의가 설정한 비행금지구역 코앞까지 군용기를 내려보낸 데 이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위반인 탄도미사일 발사에 나선 다음 9·19 군사합의를 명시적으로 위반하는 완충구역 내 방사포 등 포병 사격까지 감행했다. 이제 더이상 북한의 선의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지난 정부에서 그토록 자랑하던 9·19 군사합의는 북측의 계속되는 위반으로 무실화를 넘어 폐기의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한번은 실수로 볼 수 있지만 두 번, 세 번 반복되면 합의사항 이행에 대한 의지가 없다는 명백한 의도로 보아야 한다. ◀김진형 프로필▶ 미국주재 해군무관, 문무대왕함 함장, 정보사2여단장,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센터장, 해군1함대사령관, 합참전략기획부장 등 다양한 직책을 거쳐 해군소장으로 전역했다. 전역 후 숭실대·경동대 초빙교수, 군인공제회 상임감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숭실대 겸임교수와 군대문화 및 국가위기관리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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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된 ‘9·19 군사합의’(상)
[시큐리티팩트=김진형 위기관리 전문기자] 합동참모본부는 26일 오전 10시 25분경부터 미상 항적 수 대가 인천 강화군, 경기 김포시, 경기 파주시 인근 MDL을 넘어 우리 영공에 침입한 사실을 포착했다고 밝혔다. 합참은 일부 무인기가 비무장지대(DMZ)를 넘어 민간인 지역까지 비행했고, 일부는 육안으로 식별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북한 무인기 5대가 2014년 이후 처음으로 우리 영공을 침범해 서울 상공까지 침투한 것이다. 우리 군의 대응 작전으로 인천국제공항과 김포공항의 민항기가 한때 이륙이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다. 2018년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남과 북이 일체의 군사적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합의했다. 바로 ‘9·19 군사합의’이다. 핵심 내용은 △일체의 적대행위 중지 △비무장지대 평화지대화 △서해 해상 평화수역화 △교류협력과 접촉 왕래 활성화를 위한 군사적 보장대책 강구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 강구 등 5개 분야에 걸친 합의사항을 합의문에 담았다. 합의서 1조 3항을 상기해 보면, 쌍방은 2018년 11월 1일부터 군사분계선 상공에서 모든 기종의 비행금지구역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기로 했다. “고정익항공기는 군사분계선으로부터 동부지역은 40km, 서부지역은 20km를 적용하여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한다. 회전익항공기는 군사분계선으로부터 10km로, 무인기는 동부지역에서 15km, 서부지역에서 10km로, 기구는 25km로 적용한다”라고 명기됐다.(하편 계속) ◀김진형 위기관리전문기자 프로필▶ 미국주재 해군무관, 문무대왕함 함장, 정보사2여단장,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센터장, 해군1함대사령관, 합참전략기획부장 등 다양한 직책을 거쳐 해군소장으로 전역했다. 전역 후 숭실대·경동대 초빙교수, 군인공제회 상임감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숭실대 겸임교수와 군대문화 및 국가위기관리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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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미사일 대비해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절실(하)
[시큐리티팩트=김진형 위기관리전문기자] 둘째, 한반도 안보 문제에 한국이 직접적 당사자로서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은 미·일 동맹을 기반으로 한 안보공동체다. 그러나 한반도 안보 문제에 미·일 두 나라가 따로 협력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북한 문제, 한반도 문제에서 한국이 제외된 협력체계가 가동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한국이 중심에 서서 한반도 문제를 이끌어갈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우리 문제가 다른 나라에 의해 간섭받고 심지어 배제된 뼈아픈 경험이 있다. 현재 우리의 군사력·경제력·외교력은 상당히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일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자신 있게 한반도 문제에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 한·미·일 및 한·일 군사 협력은 한국이 먼저 적극적으로 이끌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2016년 체결됐지만, 문재인 정부 시절 논란이 됐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의 정상적 복원을 통한 한·일 및 한·미·일의 원활한 정보 소통체계를 구축하고 군수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한·미·일 군사협력 체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확고한 한·미 동맹에 기반을 둔 한·미·일 군사협력, 군사 동맹이 아닌 한·일 군사협력이 담대하게 추진된다면 북한의 도발 억제는 물론 안정적인 한반도 상황 관리가 가능해진다. 글로벌 중추 국가를 위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노력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김진형 위기관리전문기자 프로필▶ 미국주재 해군무관, 문무대왕함 함장, 정보사2여단장,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센터장, 해군1함대사령관, 합참전략기획부장 등 다양한 직책을 거쳐 해군소장으로 전역했다. 전역 후 숭실대·경동대 초빙교수, 군인공제회 상임감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숭실대 겸임교수와 군대문화 및 국가위기관리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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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미사일 대비해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 절실(상)
[시큐리티팩트=김진형 위기관리전문기자] 한국과 미국·일본 국방부 장관은 지난 6월 싱가포르에서 미사일 경보 훈련과 탄도미사일 탐지·추적 훈련 정례화 등 대북 공조 방안에 합의했다. 3국 장관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인 평화 정착을 달성하기 위해 긴밀히 협력하자는 약속도 했다. 이를 놓고 일각에서는 일본의 군사 대국화와 연계하며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한·미·일 3국의 무기 시스템과 국제정치 역학 관계를 고려할 때 이제는 한·미·일 군사 협력에 대한 담대한 전환이 필요하다. 지난 9, 10월 북한의 계속된 미사일 위협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한국 해군과 미국 핵 추진 항공모함, 일본 해상자위대 함정이 참가한 3국 연합훈련이 동해에서 두 차례 진행됐다. 북한은 지난 10월 이후 항공기·탄도미사일과 포병 사격 등 다양한 방식으로 도발했다. 특히 지난달 14일에는 화성-17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동해상으로 발사했다. 북한은 핵 탑재가 가능한 중·단거리 탄도미사일뿐 아니라 미국 본토까지 도달 가능한 ICBM을 발사함으로써 미사일 능력을 과시했다. (중편 계속) ◀김진형 위기관리전문기자 프로필▶ 미국주재 해군무관, 문무대왕함 함장, 정보사2여단장,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센터장, 해군1함대사령관, 합참전략기획부장 등 다양한 직책을 거쳐 해군소장으로 전역했다. 전역 후 숭실대·경동대 초빙교수, 군인공제회 상임감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숭실대 겸임교수와 군대문화 및 국가위기관리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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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리딩코리아, 책 읽는 군인으로 강한 군인 만들기,
[시큐리티팩트=김진형 전문기자] 사단법인 캠프리딩코리아와 사랑의책나누기운동본부는 육군훈련소에 입소하는 신병들에게 배부할 1,850여 개의 ‘책꾸러미 전달식’을 실시했다. 책꾸러미 전달식에는 캠프리딩코리아 정병국 대표와 유성욱이사, 사랑의책나누기운동본부 민승현 본부장 그리고 박원호 육군훈련소장이 참석하였으며, 코로나19 확산방지 차원에서 최소인원으로 진행되었다. ‘책꾸러미’는 사랑의책나누기운동본부에서 제작한 독서가이드북 및 독서노트와 양서 1권 등 총 3권으로 구성된다. 양서는 신병들이 서로 돌려볼 수 있도록 젊은 세대가 좋아하고 시중에서 도서판매 순위가 높은 70여 종의 신간 서적이 전달됐다. 책꾸러미 전달은 '책 읽는 군인'으로서의 힘찬 출발을 지원하는 독서진작 프로그램이다. 입대와 함께 독서를 경험하게 하고 책 읽은 습관을 갖도록 하여 병영독서문화로 발전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입대 장병과 가족들에게 큰 호응을 받고 있다. 캠프리딩코리아 정병국 대표는 “입시 위주의 교육과 취업 준비 등으로 바빴던 청년들에게 책을 읽게 하고 독서습관을 갖도록 하는 것은 병영문화를 선진화하여 강한 군대를 만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미래의 리더를 육성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책꾸러미는 매년 12만 명의 청춘이 정예 용사로 다시 태어나는 정병(精兵) 육성의 요람 육군훈련소에서 병영독서문화를 만들어가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 또한 장병들이 군 복무 기간을 사회 진출을 대비하는 유용한 자기계발의 기회로 만들 뿐만 아니라 독서를 통해 열린 병영, 소통하는 선진 군대문화 조성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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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50)] 화려한 사단장의 애대심이 오히려 과유불급(過猶不及) (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상징 명칭이 ‘열쇠부대’로 불리는 5사단은 1948년 4월29일 경기도 수색에서 3, 4, 9연대를 기반으로 5여단으로 창설되었다. 창설 후 여단 주둔지가 전라남도 광주로 변경되었고, 1949년 5월12일, 5보병사단으로 승격했다. 이때 15, 20연대가 사단으로 배속되었다. 초대 사단장은 송호성 준장. 이후 1949년 7월에는 백선엽 대령이 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사단은 15연대를 전주에, 20연대를 광주에 주둔시켜 빨치산 토벌을 주 임무로 하며 부대 정비 및 교육훈련을 실시하였고, 제주 4.3 사건, 여순사건 진압에 투입되었다. 이후 1950년 6.25남침전쟁이 발발하면서, 육군본부의 소환으로 서울 용산에 올라와 북한군 남하 지연작전에 참여하였다. 이 시점에는 백선엽이 1사단으로 옮겨가고 이응준(군영1기) 준장이 사단장으로 재직했다. 그러나 말이 지연전이지, 닥치는 대로 투입하라는 채병덕 총장의 삽질 작전지시로 말미암아 예하 부대들은 사단장조차 모르는 사이 많은 병력이 사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 와중에 2개 대대로 부대 건제를 유지했던 15연대는 1개 대대만 남은 1사단 13연대 재건을 위해 해체되고, 20연대 역시 창동 - 미아리 축선 방어전을 위해 한강 이북에 투입되었다가 전멸하여 지휘 가능한 연대들이 사실상 없어졌다. 그래도 남은 병력들을 긁어모아 7월1일부터 시흥전투지구사령부 예하부대로서 지연전을 전개하며 철수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나마 있던 병력들까지 분산되어 17일에는 기어이 사단이 해체되기에 이른다. 이후 1950년 10월8일 대구에 주둔 중이던 27연대, 마산에 주둔 중인 35연대, 부산에 주둔 중인 36연대를 근간으로 대구에서 5보병사단을 재창설하였고, 이 연대들이 지금까지 이르게 됐다. 다시 재창설된 5사단은 이후 수많은 전투를 치루었는데, 그 중 36연대가 미 2사단 예속으로 치룬 ‘피의 능선 전투’와 ‘가칠봉 전투’가 유명하다. (하편 계속)
실시간 군대를 말한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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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5)]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두산백과 자료에 의하면 6 ·25남침전쟁의 3년간에 걸친 동족상잔의 전화(戰禍)는 남북한을 막론하고 전 국토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결과를 낳았다. 전투병력의 손실만 해도 유엔군이 한국군을 포함하여 18만 명이 생명을 잃었고, 공산군측에서는 북한군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또한 전쟁기간 중 대한민국의 경우 99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남한지역을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동안 인민재판 등의 무자비한 방법에 의하여 '반동계급'으로 몰려 처형당한 억울한 희생이었다. 또 전쟁기간 중 북한은 8만 5000명에 달하는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사들을 대한민국으로부터 납치해 갔다. 이 가운데에는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과 저명한 학자·종교인·공무원 들이 상당수 포함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북한지역으로부터는 300만 명 이상의 주민들이 공산학정을 탈출하여 자유로운 생활을 찾기 위해 고향과 가족, 친척들을 북에 둔 채 남한으로 월남하여 대한민국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1950년 당시 북한지역 인구는 1200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는데, 그 가운데 1/4 정도가 북한을 떠나 월남하였다. 이로인해 1000만 이산가족의 아픔이 시작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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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5)]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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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4)]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북한은 임인년 새해 들어 평양 순안비행장 등에서 미사일 발사 무력 시위를 네 차례 감행하면서 극초음속 미사일 발사에 성공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핵실험 및 ICBM발사를 재개할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이 북한의 최근 미사일 발사와 관련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 소집을 요청했고, AFP통신은 외교 소식통을 인용해 알바니아, 영국, 프랑스, 아일랜드, 멕시코가 미국의 안보리 회의 요청에 동참했다고 보도했다.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주유엔 미국대사도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북한에 대한 압력을 계속 높여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미국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미 국무부 대변인 네드 프라이스은 1월11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여러 결의안을 위반하는 것이며, 북한의 이웃 국가들과 더 넓은 국제 사회에 위협이 될 것입니다"라고 발표했고, 존 커비 국방부 대변인 역시도 현지시간 18일 언론 브리핑에서 "북한의 잇단 미사일 발사 시험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이 위협을 평가절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편 우리 합참 발표에 따르면 미사일은 이날 8시50분부터 4분 간격으로 발사됐고 미사일의 최대 속도는 마하5 정도였다. 합참 관계자는 “북한군은 현재 동계훈련 중”이라며 “동해상 표적을 선정해 정밀도를 향상하고 연속 발사 성능 점검 등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발사 표적에 대해선 지난 14일 북한이 열차형 미사일로 명중시켰다며 사진까지 공개했던 함경북도 길주군 무수단리 앞바다의 무인도 ‘알섬’이 거론된다. 당시 북한은 ‘북한판 이스칸데르’로 불리는 KN-23을 열차형 발사대에서 쐈다. 특히 순안비행장은 2017년 8월 북한이 화성-12형 중장거리탄도미사일(IRBM)을 발사했던 곳이다. 당시 이 미사일은 최대 고도 550㎞로 2700㎞ 정도를 비행하며 일본 홋카이도 상공을 통과해 북태평양 공해상에 도달했다. 개활지인 순안비행장은 한·미의 탐지가 상대적으로 용이하다는 점에서 2017년과 마찬가지로 대외 시위용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제버릇 남 못준다”는 우리 속담처럼 70년전 민족상잔의 6·25남침전쟁을 일으켰던 북한이 또 전쟁을 감행할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다. 아무런 대응도 없이 강건너 불구경하듯 방관하고 있는 현정부가 심히 걱정된다. 군사 전문가의 분석에 따르면 17일 북한이 쏜 단거리 탄도미사일 두 발은 약 42㎞ 고도로 380㎞를 날아가 동해상 표적을 겨냥했는데 만일 남쪽으로 발사했다면 육·해·공군 본부가 있는 계룡대까지 닿는 거리이기 때문이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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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4)]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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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3)]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약 70여년 전이며 휴전협정 체결로 6·25남침전쟁이 끝난 그해인 1953년 11월27일 부산역이 있던 중구일대에서도 대형 화재 사건이 발생했다 휴전을 맞아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서울로 정부가 옮겨 가긴 했지만, 여전히 부산 일대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전쟁 피난민들로 가득 찬 상태였다. 화재 사건의 시발점이 된 중구 영주동 일대에는 피난민들이 만든 임시 천막으로 가득 차 있었고, 늦가을 건조한 날씨에 불이 딱 붙기 좋은 목조 건물이 밀집된 공간이었다. 처음에는 판자촌에서 일어난 작은 화재였는데 갑자기 불어온 강풍으로 지역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며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번져 당시 부산의 도심이었던 부산역~ 중앙동~ 동광동-영주동~대청동입구 일대가 거의 전소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불길은 이튿날 새벽 6시경 잡혔으나, 29명의 사상자와 6천여 세대 3만 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주택 3,132채 및 일제강점기 조선과 일본을 잇는 관문 역할을 했던 옛 경부선 부산역사와 부산우체국이 전소돼 버렸다. 그 화재는 ‘부산역전 대화재’로 기록되었고 전쟁의 악몽을 채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설상가상 부산 피난민들을 다시금 절망의 늪에 빠뜨린 대참사였다. 대참사 이후 부산역은 1965년까지 10년 이상 가건물을 사용했으며, 부산역 신축을 위해 1965년 7월 23일 초량역의 영업을 정지하고 부산진역으로 통합하여 운영했다. 1969년 초량에 부산역이 신축 완공됨과 동시에 명실공히 부산의 종점 부산역으로서의 업무를 다시 수행하기 시작했는데, 신축된 현 부산역은 초량역 위치가 아니고 3부두 옆의 물웅덩이 해변을 매립한 곳이다. 이 화재에 앞서 1953년 1월30일에도 국제시장 대화재가 발생하여 국제시장이 전소되고 부평동, 신창동, 광복동 일부가 피해를 입는 큰 참화가 있었다. 이 국제시장 대화재와 부산역전 대화재를 같은 화재로 착각하여 국제시장, 남포동, 광복동까지 부산역전 대화재로 소실된 걸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게다가 1954년 12월 용두산공원 판자촌에도 화재가 발생하여 3명이 사망하고 192명이 부상 당하는 등 많은 판자촌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고 궁중 유물을 임시 보관했던 국악원 창고가 전소돼 상당수의 유물이 타 버렸다. 이러한 사유로 그 당시에 사람들이 "부산이 아니고 불산이라고 불러야겠다"고 우스게 소리로 얘기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부산역전 대화재’가 발생했을 때, 벽안의 미 2군수사령관 위트컴 장군은 군법을 어기면서 군수창고를 개방해 천막과 구호물자를 꺼내어 이재민들을 도왔던 역사적 사실이 감동을 주고 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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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3)]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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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2)]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⑩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이 작전에 종군했던 외신기자들은 우리 해병대가 이러한 기습적인 상륙작전으로 우세한 적군을 공격해서 적의 점령지를 탈환한 전례는 일찍이 없었다며 통영상륙작전의 대승을 높이 평가하는 특필보도로 저마다 최대의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1950년 8월23일 통영상륙작전에 대한 취재차 원문고개로 김성은 부대를 방문한 미국 '뉴욕해럴드 트리븐' 신문의 기자 '마가렛 히킨스'는 전광석화 같은 김성은 장군의 묘수에 경탄을 금치 못하며 “당신들은 정말 귀신도 잡을 만큼 놀라운 일을 해냈소”라는 말로 감동을 표현했다. 그녀는 6·25 남침전쟁 발발 후 후퇴를 거듭하며 고전하는 상황속에서 오히려 기습적인 공격을 시도하여 승리한 김성은 부대의 작전에 찬사를 보내며 ‘귀신이라도 잡겠다(The might capture even the Devil)’라는 기사 제목의 승전보를 전세계에 보도했다. 이렇게 통영상륙작전에서 한국해병의 감투 정신을 두고 "귀신이라도 잡겠다"는 기사를 널리 보도함으로써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말의 유래가 되는 씨를 뿌려놓은 계기가 되었다. 통영 원문고개 생활공원에 세워진 전적비와 통영상륙작전 기념관에서는 매년 기념식과 추모식이 열리며, 이를 통해'귀신 잡는 해병대' 명성을 얻은 김성은 부대의 맹활약상을 기리고 있다.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신 김성은 장군을 비롯한 참전 선배들의 충정에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 또한 현재 자유민주주의 행복을 누리는 우리들은 그들을 기념하고 추모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이다. 따라서 나라를 위해 순국하신 전쟁 영웅분들의 명예 고양은 물론 국민들의 나라사랑 의식을 고취하는 이같은 행사가 이 곳 통영상륙작전 전적지 뿐만 아니라 타 격전지에서도 지속적으로 추진되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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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2)]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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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1)]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⑨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해병대가 먼저 매일봉을 점령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던 적은 계속 매일봉을 향해 전진해 오고 있었다. 이때 선점하고 있던 김성은 부대 7중대가 맹렬한 사격과 치열한 육박전도 불사하며 공세 행동을 감행함에 당황한 적은 필사적으로 대응했으나 더이상 전진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분산돼정양리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이에 8월18일 12시부터 해군함정의 지원 사격을 받으며, 8월19일 10시까지 통영시내로 진입하며 치열한 소탕작전을 벌여 잔적을 완전히 괴멸시켰다. 해병대 김성은 부대의 적극적인 소탕작전에 전의를 상실한 적은 퇴로인 원문고개도 이미 차단당하자 목선 3척을 이용하여 해상으로 도주하다가 해상을 경비하던 504·512호정에 의해 격침되었다. 이 작전 결과로 유엔군의 낙동강 방어선에 보급이 끊기지 않게 유지시켰고, 통영반도를 먼저 확보한 뒤 거제도도 점령하여 이곳을 거점으로 견내량 해협을 건너 마산항과 진해항을 봉쇄하려던 북한군 지휘부의 의도도 좌절시켰다. 또한 적 사살 469명, 포로 83명, 따발총 128정, 아식소총 107정, 권총 13정, M1소총 3정, 기관단총 14정, 박격포 2문, 지프차 2대, 트럭 10대, 전화기 5대 등과 많은 포탄·수류탄 등을 빼앗는 대전과를 올렸으나, 아군은 15명이 전사하고 47명만 부상을 당했다. 이 통영상륙작전은 우리 해군·해병들이 최초로 성공시킨 단독 적전 상륙작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유엔군이 후퇴 및 철수를 반복하며 방어만 하던 중 유일한 공격작전이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1950년 9월23일 유엔군이 서울탈환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인천으로 출항할 때까지 통영을 평정하며 반격 여건을 조성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에도 기여하였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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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1)]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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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0)]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⑧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김성은 부대장은 거제도 서해안을 방어하는 것보다 통영반도에 상륙하여 적을 섬멸하는 것이 작전상 유리하다고 판단하였고, 전병력을 장평리에 상륙시킨 후 일부 병력을 원문 고개로 진출시켜 적의 후속부대를 저지하고 주전력은 통영 시내에 침입한 적을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김성은 부대는 먼저 1950년 8월16일 22시에 해군함정 512호정과 평택호에 나누어 타고 출발하여 17일 새벽 3시 통영반도 동북방 1㎞ 지점에 있는 지도(거제도 북방 연안)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통영 근해를 경비하던 해군함정 703·901·504·512·302·307호정 및 평택호 등의 지원 엄호하에 주병력을 8월17일 18시 통영반도 동북방에 있는 장평리에 상륙하며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때 적은 해병대가 통영항구 정면으로 상륙할 것으로 판단하고, 고지에 배치하였던 병력을 통영 남해안 일대에 집결시켜 해안선에 배치시켰으므로 접전 없이 상륙할 수 있었다. 한편, 해군함정들은 협조된 계획에 따라 통영항 내에 접근하여 매일봉·남망산 및 부두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해병대를 상륙시킨 512호정과 평택호도 남하하여 함포 사격에 가담하였다. 상륙 후 공격을 개시한 ‘김성은 부대’ 2중대와 3중대는 각각 목표 지점을 접전 없이 점령하였고, 상륙부대의 내륙 진출에 따라 해군잠정 901정은 원문고개 서측만으로 깊숙히 침투하여 통영시내로 진입하려는 적의 후속부대를 저지하기 위하여 고성에서 원문고개로 통하는 진로를 포격하였다. 동시에 해병대는 밤을 세워 가며 맹렬한 공격 작전을 감행하여 8월18일 새벽에 2중대가 유일한 공격로이며 전술상 요지인 원문고개를 점령하여 적의 통영반도 진출입을 차단했다. 또한 7중대는 통영전투에서 승패의 관건이 되는 매일봉(망일봉)을 점령하여 강력한 방어진을 구축하였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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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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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60)]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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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9)]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⑦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1950년 8월에 접어들자 전선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서로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동부 전선에서는 포항 외곽에서, 중부 전선에서는 왜관 등지에서 혈전이 계속되었고, 서부 전선에서는 진동리로 기동하는 적이 마산·진해·부산을 위협하고 있었다. 서부지역의 진동면을 공격해 마산과 진해의 점령을 꾀했던 북한군은 진동리지구 전투에서 ‘김성은 부대’의 굳건한 방어와 맹렬한 역공에 의해 공격 기세가 꺾여 본래의 의도인 마산·진해·부산 등지로 직접 공격하여 낙동강 전선의 배후를 차단하려는 것이 좌절됐다. 이에 일부 병력을 남쪽으로 돌려 무방비상태에 있던 놓여 있는 통영반도를 먼저 확보한 뒤 거제도도 점령하여 이곳을 거점으로 해 견내량 해협을 건너 마산항과 진해항을 봉쇄하는 것으로 작전을 전환하였다. 예상한 바와 같이 1950년 8월16일 미명을 기하여 고성으로부터 통영으로 향한 북한군 7사단 51연대와 104치안연대의 650명이 1950년 8월 17일 새벽 1시통영시내로 침입해 왔다. 이와 같이 긴박한 상황이 발생하자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즉시 거제도에 상륙하여 통영으로부터 거제도로 공격하려는 적을 격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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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9)]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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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8)]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해병대의 진동리지구 전투는 1950년 8월3일, 경남 진동리 서쪽 고사리에서 북한군 6사단 정찰대대에 기습공격을 감행하는 등 계속된 전투를 통해 적 사살 171명, 포로 8명, 그리고 각종 무기 110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며 북한군 6사단 공격의 예봉을 꺾고, 마산을 점령하여 유엔군의 낙동강 방어선을 와해시키려는 적의 기도를 완전히 무산시켰다. 또한 1949년 해병대 창설이래 최대 전공을 세우게 되었으며, 이어 치룬 통영상륙작전의 대승도 함께 공로로 인정되어 전투에 참가한 부대 전 장병이 1계급 특진했다. 해병대 사령부는 1992년 이 진동리지구 전투를 기념하는 전첩비를 대한민국 해병대가 피땀흘려 싸웠던 그날의 전적지가 보이는 이곳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지산리에 세웠다. 2017년 개최된 해병대의 진동리지구 전투 기념식에서 전진구 해병대사령관은 대독한 기념사를 통해 "조국의 평화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치신 호국영령들의 영전에 머리숙여 명복을 빌며, 참전영웅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며 추모했다. 이어서 그는 "우리 해병대는 국민의 신뢰와 성원을 바탕으로 선승구전의 능력과 태세를 완비하여 만약 적이 도발한다면 해병대의 이름으로 무자비하게 응징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후손들이 자유롭고 마음껏 꿈을 펼칠수 있도록 가장 강하고 튼튼한 국방의 임무를 완수하는 '호국충성 해병대'가 될 것을 다짐한다"라고 밝혔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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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8)]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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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7)]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0년 6·25 남침전쟁 발발 후 후퇴를 거듭하던 국군과 유엔군이 8월 들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고, 남하한 북한군 6사단은 진주-사천-고성을 거쳐 마산을 다음 공격목표로 삼고 예하 6사단 정찰대대는 마산 입구인 진동리까지 진출했다. 마산을 못 지키면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질 위기에서 8월1일 서부지구전투사령부로부터 진동리 서방에서 적을 저지 및 섬멸하라는 명령을 받은 ‘김성은 부대’는 다음날 고사리 지서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적정 파악을 위한 정찰을 실시해 2중대를 부현에, 3중대를 고사리 남방 428고지 서측에 배치했다. 8월 3일 북한군 정찰대대가 전차를 선두로 진동리를 향해 다가오자 335고지의 7중대와 428고지의 3중대는 맹렬한 화력을 집중해 이들을 격퇴시켰다. 진동리에서의 첫번째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성은 부대는 이후 미 25사단 예하 24연대에 배속돼 마산방어에 투입됐다. 부산 서방 50킬로미터에 위치한 마산은 부산 서측방의 관문으로 마산 방어의 성패는 부산 교두보 확보와 직결되는 전략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미 8군사령부는 적의 주공이 대구 전선에 집중되자 이를 분산시켜 압력을 완화할 목적으로 미 25사단에 역습을 명령했다. 이에 김성은 중령이 지휘하는 한국 해병대는 ‘미 24연대는 킨(Kean) 특수임무부대의 예비대로서 서북산 일대를 공격해 진동리-함안 도로를 확보한다’라는 기동계획에 의거 다시 8월5일 15시 30분경 진동리에 도착했다. 이윽고 마산-진동리 가도의 타격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해병 7중대는 적이 진출해 있던 340고지를 공격했다. 7중대는 적진 최단거리에 접근해 일제히 수류탄전을 거듭하면서 적진을 돌파, 피아 식별이 어려운 진내전이 전개되는 가운데 과감한 육박전을 감행해 다음날 13시 10분에 전략상 요지인 340고지를 탈환하고 미군에 인계한 다음 진동리로 철수했다. 이후8월7일부터 미 육군 25사단을 주축으로 편성된 킨(Kean) 특수임무부대가 방어작전시 공세활동의 일환으로 진주 방향에 대규모 역공격(1950.8.7.~ 8.12.)을 실시하는 동안, 우리 해병대는 서북산 일대의 적을 격퇴하여 진동리와 마산 간보급로에 대한 적 위협을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낙동강 방어선을 튼튼히 구축하는데 기여했다. 이후 마산에서 다시 미 24사단으로 배속된 김성은 부대는 진해로부터 병력을 보강 받아 재차 진동리로 이동했다. 8월 10일 새벽에 또 해병의 방어진지로 공격을 재개한 적들을 2시간 이상이나 계속된 혈전 끝에 격퇴시키고 날이 밝자 도주하는 적을 계속 추격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1일 아침 8시를 기해 해병대의 공격목표인 서북산 능선일대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포격의 지원 속에 이곳을 완전히 장악해 마산으로 통하는 보급로를 확보한 해병대는 이 지역을 미 25사단에게 인계하고 다음 전투지인 중암리로 이동했다. 중암리 전투에서도 대승한 ‘김성은 부대’는 8월14일 진해로 개선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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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7)]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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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6)]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인 지리적여건의 특성과 ‘여순10.19사건’ 진압작전의 교훈에 따라 상륙작전을 수행할 부대의 필요성이 절실하였다. 1949년 4월15일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상륙작전을 주 임무로 하는 해병대가 드디어 창설되었다. 대령 진급과 동시에 초대사령관으로 임명된 신현준은 하얼빈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이 만주에 세운 봉천군관학교를 나와 만주군의 대위로 근무했으며 간도특설대의 간부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현준은 8.15 광복 후 잠시 광복군에 편입되었다가, 귀국하여 1946년 조선해안경비대로 입대한 뒤 해군 중위로 임관하였다. 같은 해 인천기지사령관을 거쳐 1948년에는 진해특설기지 참모장에 임명되었으며, 해병대가 창설될 때 초대사령관직을 맡았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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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6)]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