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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군대를 말한다 기사

  • [김희철의 전쟁사(192)]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㉚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 여사가 묵는 호텔에는 중국이나 북한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과 중국 고위층, 북한대사관 직원들이 자주 찾았다. 이즈음 한 여사는 허담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과 연이 닿았다. 1990년 6월 북한 땅을 밟을 수 있었던 것도 허담의 초청장이 있어 가능했다. 중국에 들어간 지 11년 만이었다. 1990년대 초 북한을 드나들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유해 발굴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어디를 가든 지도원과 운전수, 참사가 따라붙었는데 선물과 칭찬으로 먼저 호감을 산 뒤 친해지면 북한 외국인 묘지와 장진호에 대해 물어보는 식으로 정보를 수집했다. 한 여사는 1999년까지 스물다섯 번 방북했지만, 방북 초청장은 수도 없이 받았다고 했다. 북한에 들어갈 때는 선물로 옷이나 의약품, 일본약 구심(求心·심장약)을 몇 상자씩 준비했는데, 이를 위해 들어간 경비만 약 백만 달러의 많은 돈이었고 부부의 사재와 위트컴의 연금이 총동원되었다. 한 여사는 서울 집을 팔고 물려받은 재산을 모두 썼다. 위트컴 장군의 연금도 대부분 미군 유해 정보수집에 쏟아부었다. 위트컴 장군 부부의 희생과 봉사는 그 어느 누구도 쉽게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애국심과 인류애의 거룩한 표상이다. 생전 한 여사는 어느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은 창고를 만들어 유해를 쌓아두고 있는데, 유해가 누구 건지 모른다. 미군 유해를 미국과 협상카드로 생각하니 유해만 모아 쌓아 놓은 거다”라며 “나는 유해 발굴에 협조하는 역할을 했고, 유해가 발견되면 미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실종자 사무국(DPMO, 2015년 국방부 직할청 DPAA로 격상)’이 사망·실종자 명단과 맞춰본 뒤 친인척 유전자 감식을 통해 진위를 밝힌다”고 말한 바 있다. 공식적인 미군 유해 송환은 1954년 유엔 측이 북한으로부터 유해 4011구(국군 유해 2144구, 나머지는 유엔 참전군 유해)를 돌려받은 이후 잠정 중단됐다. 90년대 초 북한은 ‘미군 유해’를 발굴했다며 보상금을 요구했는데, 96년부터는 북한에 인력과 장비를 보내 본격적으로 유해 발굴 작업을 벌여 220여 구의 미군 유해를 발굴했다. 하지만 2005년 북핵 문제로 북·미 관계가 악화되자 안전 문제 때문에 미군 유해를 발굴 작업은 중단됐다. 그리고 한묘숙 여사는 위트컴 사후"위트컴 장군 희망재단"을 설립하여 고인의 숙원사업을 30년 넘게 지속했다.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미군 유해를 찾아 중국 및 북한을 떠돈 한 여사는 2017년 1월1일 90세의 생을 마감하며 그리운 남편 곁으로 떠났다. 그해 1월4일 그녀는 부산 유엔기념공원의 존경하며 사랑하는 남편 위트컴 장군 묘역에 함께 안장됐다. 유럽 전선과 한반도 전장을 넘나들며 승리의 발판을 만들고 마지막까지 애국심과 인류애의 표상이 된 남편은 자신의 평생 숙원을 실천한 아내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위트컴 장군은 유엔기념공원에 잠든 유일한 유엔군(미군) 장성이며 한묘숙은 유일한 여성이기도 하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남편 위트컴 장군의 유지를 구현하기 위해 30여 년을 중국과 북한에서 떠돈 아내의 일생은 한 편의 대하(大河)드라마 같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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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26
  • [김희철의 전쟁사(191)]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㉙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묘숙 여사가 민간 차원에서 특히 여성의 신분으로 이러한 유해발굴 사업을 주도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역부족이었고, 이로 인해 한때는 이중간첩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유골을 찾으러 왔다고 할 수 없어 중국 대리상을 통해 도그택(군번줄)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군번줄을 가져오면 하나에 500달러, 혹은 1,000달러를 주었는데 큰 돈이 계속 투입되었다. 또한 어느 정도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때 유골도 사 모아 보았지만, 대부분이 짐승들의 뼈였다. 어떤 때에는 북한이 정치적 흥정을 붙이기도 했던 와중에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1995년 이후에 숫제 문을 닫아버려 북한 방문이 더 어려워졌다. 한 여사가 유해발굴 사업을 위해 중국에 머물고 있던 1982년 7월12일, 86세의 위트컴 장군이 서울 용산의 미8군 전용호텔이던 내자호텔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했다는 비보를 듣게 된다. 위트컴의 평생 숙원인 유해발굴 사업 때문에 존경하는 남편의 임종도 못 지키게 됐다. 아무튼 시간과 노력에 비해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지만 위트컴의 미군 유해발굴 송환 의지와 한묘숙의 헌신적 노력은 그 이후 한·미 국책사업으로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또한 중국에 오래 있다 보니 그녀를 찾는 한국 사람도 많이 생겼다. 1980년대 후반 한 여사는 주중 한국대사관과 ‘비슷한’ 역할을 했는데, 김영삼(YS)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의 방중(訪中) 요청 친서를 직접 공산당 간부에게 전달했고, 대기업 인사들과 중국 고위층을 연결해주기도 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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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22
  • [김희철의 전쟁사(190)]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돌이켜 보면 결혼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고문을 맡아 백악관과 긴밀히 연락하며 한미 외교라인의 가교 구실을 했던 위트컴 장군은 베트남전쟁이 발발하자 미군 고문 신분으로 사이공에 갔다. 그때 한 여사도 함께 따라가 그곳에서 몇 해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위트컴 장군은 한 여사에게 “홍콩에 한 번 다녀오라”고 부탁했다. 홍콩에서 중국으로 갈 방편을 마련해보라는 말도 남겼다. 그 이유는 한참 후에야 알 수 있었다. 한 여사가 홍콩을 드나들던 1979년, 홍콩 사업가의 초청으로 중국 본토에 입국할 기회가 생겼다. 그때 위트컴 장군은 아내에게 “6·25남침전쟁 때 죽은 미군 병사의 유해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며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2011년 4월 주간동아에 실린 한 여사의 생전 인터뷰는 이렇다. “장군님이 왜 중국 비자를 발급받으려고 그토록 애썼는지 이해할 수 있었어요. 제가 중국으로 갈 때면 장군님은 지도 한 장과 만날 사람의 리스트, 미국대사관 위치를 알려줬어요”라고 말했다. 이어 그녀는 “장군님은 주프랑스 미국대사관에서 무관으로 일한 적이 있어 그때 사귄 중국 고위층을 잘 알았어요”라고 덧붙였다. 또한 “베이징 서우두(首都) 국제공항에 내리면 마중 나온 사람이 ‘홍치’(紅旗·중국 자동차 상표)를 끌고 와 나를 에스코트했는데, 장군님이 다 연락을 해놓았는지 그대로 따라가면 됐어요”라며 신기한 듯 미소를 지었다. 특히 중국이나 북한에서는 유해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이는 위트컴 장군도 일절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만약 우리가 ‘뼈다귀’ 찾으러 왔다면 아마 미쳤다고 오해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수십 차례 한국과 중국을 오가다 그녀는 아예 중국에 눌러앉았다. 주로 베이징호텔과 젠궈(建國) 호텔에 투숙했는데, 젠궈호텔 810호에서는 8년간 거주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기자가 “30년이 넘었는데 왜 지금까지 미군 유해 발굴을 계속하느냐”고 묻자 한 여사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장군님이 돌아가실 때도 ‘북한에 묻힌 유해를 제발 미국으로 보내달라’는 유언을 남겼데요. 그래서 이 일을 그만둘 수 없었어요. 사별 후에 미혼이었던 그가 구태여 나와 결혼한 건 자신이 죽어도 이 일을 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라고 회상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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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20
  • [김희철의 전쟁사(189)]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㉗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에 남아 ‘한국 전쟁고아의 아버지’라 불린 위트컴 장군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82년 심장마비로 타계하기 전까지 은밀하게 북녘에 있는 미군 유해 송환 사업에 나섰다. 그는 6·25남침전쟁 중 ‘장진호 전투’에서 사망한 미군 유해를 가족 품으로 돌려보내는 걸 생애 마지막 임무로 여겼고 그의 평생 숙원이었던 사실을 아내 한묘숙 여사에게 밝혔다. 장진호는 1950년 영하 40도의 겨울 혹한에 미 해병대 1사단 1만여 명과 중공군 7개 사단 12만여 명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함경남도 개마고원 일대에서 벌어진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대원 절반 이상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투로 중공군의 남하는 2주간 지연됐고, 피란민 등 20여만 명이 그 유명한 ‘흥남철수’를 할 수 있었다. 생전에 위트컴 장군은 아내에게 “장진호에 수천 구의 미군 유해가 있을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북한을 다녀왔던 한 여사는 생전 국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한 사람에게서 당시 미군 병사들이 죽을 때 ‘마미(Mommy)!’하고 외치더라는 증언을 들었어요. 북쪽 사람이 저에게 ‘마미’가 뭐냐고 물어 ‘엄마’라는 뜻이라고 대답해줬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 사람이 '미국 놈들이 오마니를 찾다가 죽어갔구나'라고 말할 때, 장군의 유언이 사실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고 이역만리에서 엄마를 찾으며 죽어간 불쌍한 영혼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어요“라고 그녀는 안타까워했다. 당시 위트컴은 공인의 자격으로 자신이 적성국인 중국이나 북한에 들어간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미국 시민권자가 된 한묘숙 여사를 통해 유해 발굴사업의 가능성을 타진하려 했다. 한 여사는 남편의 소개서 한 장만 지닌 채 방법을 수소문하며 관계자들을 접촉하기 위해 100여 차례 홍콩을 방문했다. 그 결과 1979년에 중국을 방문할 수 있었고, 북한이 정치적 흥정을 붙이기도 했지만 1990년부터 1995년 사이에 23차례나 북한을 다녀왔다. 그리고 부창부수(夫唱婦隨)였다. 한 여사는 북한이 문을 닫아버렸던 1995년 이후에도 2017년 임종 직전까지 장군의 유지에 따라 미군 유해 송환에 지속적으로 끝까지 헌신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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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8
  • [김희철의 전쟁사(188)]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㉖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위트컴 장군은 긴장한 목소리로 “좀 나와 주시오. 오늘 한복을 입지 말고 양장을 하고 와요”라고 한묘숙 여사에게 정중하게 요청을 했다. 그녀는 평소 한복을 입었는데, ‘무슨 일일까?’하고 궁금했지만 얼른 양장을 하고 영문도 모른채 장군을 따라갔다. 미국대사관 앞이었다. 그제야 큰 키의 위트컴 장군은 그녀를 굽어보면서 말했다. “나와 결혼해 주시오...!” 그의 갑작스런 청혼에 한묘숙 여사는 어리둥절했다. 사별을 하고 혼자가 된 70세의 위트컴 장군과 당시 37세였던 한 여사는 33년 나이 차이가 있었고 재혼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그들을 방해하지 못했다. 대사관을 나왔을 때 그들은 이미 부부가 되어 있었다. 한 여사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장군의 애국심과 인간애에 깊은 애정과 존경을 느꼈다. 위트컴 장군은 공과 사를 분명히 할 줄 아는 청렴한 신사였다. 그녀는 “장군님은 평소 누군가 군용 종이에 메모라도 하면 ‘정부 자산을 왜 함부로 쓰느냐’고 다그칠 정도로 공사(公私)를 분명히 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장군님은 미군 장교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상사가 나를 군용차에 태우려 해도 같은 말을 하며 사양했고, 잠들기 전에는 반드시 자신의 손수건과 속옷을 직접 빨아 빨랫줄에 널었어요”라고 회상했다. 결혼 후 위트컴 장군은 한 여사의 1남 1녀를 끔직이 사랑했다. 그는 한여사의 딸이 미국 유학을 갔을 때, 매일 아침 일어나 가장 먼저 유학을 보낸 그녀의 딸에게 편지를 쓰면서 하루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녀의 딸은 곧 그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생전에 한 여사는 “그날 결혼식을 올린 겁니다. 생각하면 ‘우스워요’ 전남편과 이혼한 후 미국 유학을 떠나려 했지만 당시 유학 정보가 없어 고민하던 중 익선원을 찾은 위트컴 장군에게 ‘유학 도움’을 요청한 게 부부의 연이 됐다”며 그리워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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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2-07-09
  • [김희철의 전쟁사(187)]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㉕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에 남아 ‘한국 전쟁고아의 아버지’라 불린 위트컴 장군은 그가 설립한 ‘한미재단’을 운영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전쟁고아들에게 선물을 나눠주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부인 한묘숙 여사를 만났다. 1963년 한국 국민들을 돕는 사회사업에 매진하던 위트컴 장군은 그날도 전쟁고아들을 위문하기 위해 ‘익선원’을 찾아갔다. 그때 한 여사는 충남 천안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보육시설인 ‘익선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한 여사는 명망 가문의 딸로 언니가 여성 소설가 한무숙이고, 동생 역시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아내 소설가 한말숙이다. 아버지의 직장 관계로 부산으로 내려와 4년간 살면서 1945년에 부산여고를 졸업했고 영어 회화가 가능해 위트컴 장군과 쉽게 소통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작고 가냘프지만 강인하고 용기있는 여자로 남편과 이혼한 후 두 아이를 혼자 키우며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모언론사 인터뷰에서 위트컴 장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장군님은 선물을 한아름 들고 여러 고아원을 자주 찾았어요. 전쟁고아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희망을 주는 연설을 하고는 공책과 연필을 선물하는 걸 큰 기쁨으로 여겼죠. 익선원 아이들도 장군님 오시는 날만 기다렸어요"라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자주 고아원 운영에 대해 장군과 의논하고 기부도 받았다. 1964년 어느날 그녀는 ‘익선원’을 찾아온 장군에게 지금까지와 다른 도움을 청했다. 그것은 본인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위한 유학정보 및 도움 요청이었다. 그녀의 색다른 요청에 놀란 위트컴 장군은 그 부탁을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었다. 왜냐면 그동안의 ‘익선원’ 방문을 통해 가냘프지만 강인하고 용기있는 한 여사에게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한 여사의 부탁을 들어주면 이별을 하게 될 상황이었다. 위트컴 장군은 생각다 못해 중대한 결심을 하고 며칠 후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전화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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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04
  • [김희철의 전쟁사(186)]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㉔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4년 퇴역한 후에도 한국에 남은 위트컴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고문을 맡아 한미 외교라인의 가교 역할을 했다. 그는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미8군 사령관(1951년 4월~1953년 1월) 겸 유엔군 사령관이던 ‘한국 육군의 아버지’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과 함께 ‘한미재단’을 설립해 미국에서 한국을 돕는 공공과 민간의 지원이 끊임없이 이뤄지게 함으로써 한국 재건과 부흥 원조에 나섰다. 특히 50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던 위트컴 장군은 그들의 건강한 삶을 위해 보육원과 고아원을 짓는 등 전쟁고아 지원에 온 힘을 다했다. 그가 만든 미육군한국지원프로그램(AFAK)에서도 고아원 지원 사업에 역점을 두고 군부대가 53개의 고아원을 직접 지원하도록 추진했으며, 기술을 가르치고 취직까지도 연결해 주었다. ‘푸른 눈의 한국인’으로 뿌리내린 위트컴 장군은 1982년 서울 용산 미8군 기지에서 심장마비로 운명하자 그 스스로가 원한 대로 ‘제2의 고향’인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됐다. 그의 졸기(卒記)를 실은 ‘부산일보’ 1982년 7월23일자 기사 제목도 ‘한국 전쟁고아의 아버지, 부산 UN 묘지에…’였다. 부산 시민들도 위트컴 장군을 ‘전쟁고아의 아버지’로 기억한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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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30
  • [김희철의 전쟁사(184)]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㉒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현대적인 교통망을 구축하고 소방 장비의 진입로를 확보하는 중요한 도로 및 교량 건설사업도 추진했다. 국제시장을 통과하는 부민동로가 개통되었고, 메리놀 길을 완공함으로써 혼잡한 도심의 교통량을 줄이고, 메리놀 병원의 진입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위트컴 장군과 AFAK의 병원 건립 사업은 메리놀병원을 포함하여 7개의 병원을 목표로 진행됐다.특히 메리놀병원은 총 160개 병상을 보유한 당시 한국 최고의 병원으로 건립됐는데, 병원 건립을 위한 미군들의 모금 캠페인으로 약 6만 달러가 모금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산의 대화재 재건 프로젝트는 위트컴 장군의 지휘 아래 체계적으로 진행됐다. 장군은 재건활동을 전담하기 위한 별도의 조직인 PMP(Pusan Military Post)를 신속히 구성했고, 관련 기관과의 협력을 위한 기구도 별도로 만들어 노력의 통합에 만전을 기했다. 주택 건설 사업은 도시 재건의 가장 중요한 분야로서 동래에 111가구의 주택단지와 영도에 109가구의 주택단지를 8월에 완공했다. 또한 UNKRA와 협력하여 공동 프로젝트로 1,100채의 주택을 추가로 짓도록 함으로써 부산의 주택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도록 했다. 또한 17개 학교에 대한 신축 및 수리 사업도 진행됐고,AFAK 프로그램은 특히 고아원 지원 사업에 역점을 두었다.50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던 위트컴 장군은 군부대가 53개의 고아원을 직접 지원하게했으며, 기술을 가르치고 취직까지도 지원했다. 이를 종합하면 1953년 11월부터 1958년 11월까지 총 6백여만 달러의 AFAK 예산이 투입됐는데, 1954년 6월까지 이미 3백여만 달러가 부산에 집중됐다. 예산사용을 살펴볼 때 동래, 송도, 영도 등 화재와 관련 없는 지역에서의 공사가 더 많았다는 것은 단순히 화재 피해지역에 대한 긴급공사가 아니라 부산 도시계획 전반을 염두에 두고 진행된 인류애적인 도시 재건 차원의 프로잭트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전후 복구를 위한 UN의 원조 방법으로서 1959년까지 1억2천2백만 달러를 지원했으며, 한미 상호안전보장법(MSA, Mutual Security Act)에 의해 미국정부가 직접 지원하는 방식으로 1961년까지 총 17억4천4백만 달러를 지원받게 만들었다. 위트컴 장군은 AFAK 기금은 물론 추가적인 예산 확보를 위해 UNKRA와 미국 정부에 의한 지원 방법인 FOA(Foreign Operation Administration)를 균형 있게 활용함으로써 부산 재건을 위한 최적의 지원 환경을 조성했다. 미국 정부 및 미군, UN, 한국 정부 및 한국군, 민간기업 및 부산 시민 등 다양한 조직과 관련된데다,조직별 복잡한 예산체계로 효과적지원에는 한계가 있었다.그러나 각 조직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냈고, 이들의 인류애적인 노력을 통합해빠른 시간내에 놀라운 전후 위기극복의 성과를 올렸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각 시행한 부산의 재건 과정에서 발휘된 위트컴 장군의 추진력은 마치 하나의 종합예술 작품을 관람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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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14
  • [김희철의 전쟁사(183)]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위트컴 장군은 피난민들의 어려운 생활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면서 판자촌을 자주 둘러보았다. 그는 어느 날 영도를 시찰하던 중 보리밭에서 고통스럽게 출산하는 산모를 보면서 조산원과 병원 건립 지원을 결심한다. 때마침 6.25남침전쟁 발발 두 달 전인 1950년 4월15일, 메리놀수녀회는 부산시 중구 대청동 4가 현 부산가톨릭센터 자리에 진료소를 열고 무료 진료를 시작했다. 부산 최초의 가톨릭 의료기관인 '메리놀수녀의원'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가난한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하지만 열악한 진료소의 입원 시설과 전문의료 인력부족으로휴전 이후 밀려오는 부상자와 피난민 환자들을 감당해낼 수없었다. 이에 따라 병원 측은 위트컴 장군과 AFAK의 지원을 받아 현재의 위치에 지상 3층, 160병상 규모의 종합병원을증축하기로 결정했다. 1954년 7월29일 기공식과 함께 공사에 들어갔으나 신축자금이 턱없이 부족했다. 위트컴 장군은 사령관의 체면을 버리고 본인은 파란 눈의 갓을 쓴 노인으로, 메리놀 수녀회와 부대원들은 한복 서양인으로 단장하여 거리 가장행렬을 하며 모금 활동을 펼쳤고, 예하 미군 장병들도월급의 1%를 기부하며 모금에 참여했다. 당시 메리놀수녀회의 요한나 수녀는 "1953년 10월 부산에 와서 간호사로 근무했는데 피란민 대다수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없고 집도 없어눈물이 나지 않을 수없었다"며 "부산역전 대화재 직후 하루에 화상 환자를 포함해 2000여 명의 환자가 몰려 병원이 미어터졌다"고 회상했다. 그녀는 "병원 신축이 절실했는데 자금난을 겪자 위트컴 장군이 휘하 미군 장병에게 월급의 1%를 공사비로 내게 해 공사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위트컴 장군이 메리놀병원 신축뿐 아니라 침례병원, 복음병원, 성분도병원을 짓는 데도 재정적인 지원을 했다"고 증언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메리놀 종합병원’은 거리 가장행렬을 하며 모금 활동을 펼치는 등우여곡절 끝에 착공한지 8년 만인 1962년 11월 지금의 자리에 준공할 수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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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08
  • [김희철의 전쟁사(182)]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⑳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윤인구 총장의 꿈과 교육사상은 위트컴 장군의 노력으로 165만 ㎡(50만 평)의 부지 확보와 온천장~부산대 길이 1.6㎞의 진입도로 개설 및 대한미군원조처(AFAK)를 통한 캠퍼스 시설 공사비 25만 달러 지원만으로 구현하기에는 부족했다. 1957년 세워진 무지개 문은 윤 총장의 꿈과 교육사상에 따른 하늘로 높이 화살을 쏘아 올리는 형상이다. 설계자의 의도대로 이 문을 통해 학생들이 드나들고 금정산을 배경으로 하늘과 구름이 무시로 오고 가며 활시위처럼 당겨진 무지개 문의 한 중간에는 종을 매달았다. 교육은 어딘가에 있을, 어딘가에 닿을 희망을 노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윤 총장은 "교육가는 차가운 돌맹이에서 혈맥이 뛰는 생명체를 제작해 내려는 사람이다"고 정의했다. 교육가는 창조적 마인드를 품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초대형 프로젝트를 계획한 윤 총장은 1958년 프랑스에서 귀국한 당대 최고의 건축가 김중업을 만나 본관 건물(현 인문관) 설계를 요청한다. 그의 두뇌와 김중업의 감각이 결합되자 시너지가 만들어졌다. 본관 건물의 중앙 홀은 5층까지 전면유리로 꾸며졌다. 안에서 창밖을 보면 아스라한 도심 풍경 속에 황령산까지 눈에 잡힌다. 맑고 푸른 날 바깥에서 이 건물을 보면 둥근 유리벽에 하늘과 구름이 넘실거린다. 광명이 주는 진리가 숨쉬는 모습이다. 70m에 이르는 필로티, 즉 공중에 떠 있는 공간은 자유를 상징한다. 이 속으로 금정산의 바람이 드나든다. 윤 총장은 자유를 '만사에 구애받지 않음'이라며, 이는 주어진 환경과 여건 등 나를 구속하는 모든 것을 돌파하는 능력을 말한다고 했다. 대학정신의 소중한 덕목이다. 완공 행사때 당시 문교차관 김선기는 "궁궐같다"고 했고, 유네스코에서는 낭비라고 일침을 놨다. 그러나 윤 총장은 "호연지기를 기르고 큰 인물을 키우려면 그만한 그릇이 필요한 법"이라고 응수했다. 본관 건물 공사비는 당시 기준으로 약 300억 원이 들어갔다. 1958년과 최근을 비교하면 그동안 한국은 359배 성장했다. 금값의 인플레를 고려하면 67배의 실질성장이다. 단순 계산으로 '300억×67' 하면 약 2조 원이 된다. 전쟁 직후 가난에 허덕이는 상태에서, 그것도 지방에서 국가가 지으라고 한 것도 아닌 대학의 본관 건물을 이렇게 웅장하고 미려하게 지을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하다. 하지만 윤인구 총장은 이렇게 도약한 학교로 만드는 것이 위트컴 장군에 대한 보답이라고도 생각했다. 결과적으로는 위트컴 장군의 부산대 방문은 우연이 아닌 희망의 만남이 되어 학교를 지을 땅도 없고 돈도 없는 윤인구와 부산시민에게 역사적인 인재 육성의 기틀이 조성되는 계기였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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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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