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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환된 유해 DNA가 존안된 미스터 션샤인의 ‘유진 초이’ 황기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유진 초이’의 실존 인물인 황기환 애국지사(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의 유전자(DNA) 정보를 확보해 국가 관리기록으로 영구 보존한다”고 밝혔다. 황기환 지사의 유전자(DNA) 정보는 지난 4월10일 순국 100년 만에 고국으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 제7묘역에 안장된 황기환 지사의 유해를 미국 뉴욕 마운트 올리벳 묘지에서 파묘하는 과정에서 채취한 시료를 국내로 들여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을 통해 확보하였다. 황기환 지사 유해는 2008년 미국 뉴욕 마운트 올리벳 묘지에서 발견되어 2013년부터 국내봉환을 10여 년에 걸쳐 추진하였으나 유족이 확인되지 않아 2차례 법원 소송을 제기하였음에도 승인을 얻지 못했으나 국가보훈부와 뉴욕총영사관의 적극적인 설득과 노력으로 지난 1월 31일 묘지 측이 파묘에 합의하면서 극적으로 성사되었다. 또한 국가보훈부는 후손이 확인되지 않은 황기환 지사 유해의 유전자(DNA) 정보 보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파묘 과정에서 시료를 확보해 4월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정을 의뢰하였다. 감정을 맡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황기환 지사가 순국한 지 100년이 지나 유해의 훼손 상태가 심각해 감정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유전자(DNA)정보가 황기환 지사의 유족을 확인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기에 사명감을 갖고 다양한 분석기법을 적용해 2개월만에 어렵게 정보 획득에 성공하였다. 이에 국가보훈부는 황기환 지사의 소중한 유전자(DNA) 정보를 국가의 기록으로 영구히 보존하고, 유족을 찾는데 적극 활용할 예정이다. 박민식 국가보훈부장관은 “앞으로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협업해 후손이 확인되지 않는 국외 독립유공자의 유해 유전자(DNA) 정보를 기록으로 영구 보존하고 후손을 찾는 중요 단서로 활용해 이분들의 희생과 공헌이 우리사회에 영원히 계승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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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공자 예우와 복지증진 협약 체결로 재계가 동참한 일류보훈 구현
[시크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전경련회관에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김병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직무 대행 등이 ‘국가유공자 예우 및 복지증진 업무협약’을 3일 10시에 체결했다. 이날 업무 협약은 대한민국 자유수호에 헌신한 국가유공자에 대한 존경과 예우 분위기 조성, 국가유공자의 영예로운 삶 향유를 위한 복지증진, 생활안정을 위한 일자리 지원 확대 등을 목적과 주요 골자로 구체적인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이번 업무협약에 따라 첫 번째 실천사업으로 ‘수호자의 발걸음’ 프로젝트가 추진된다. 이 사업은 ‘국가보훈부-전국경제인연합회-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함께 협력해 자유 수호를 위해 대한민국 곳곳을 쉼 없이 전진한 국군 및 유엔군 참전용사의 헌신에 감사드리고자 세상에 하나뿐인 맞춤형 신발을 제작해 헌정한다. 왼발과 오른발의 발볼 차이로 기성화가 안맞거나 보행 불편이 있는 6‧25참전유공자 및 재방한 유엔참전용사 등 300명 영웅의 발을 삼면측정(3D스캔)하고 그에 맞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영웅의 신발(One & Only Heroes Shoes)”를 제작해 6·25남침전쟁 정전 70주년인 7월 27일을 전후해 직접 전달한다. 또한, 맞춤형 신발 제작을 위해 취형한 발 모양과 참전영웅의 인적사항, 참전기간, 누적 발걸음 수 등이 표기된 동판을 제작해 대한민국을 지켜낸 희생과 헌신에 감사와 예우를 전하는 의미에서 11월 11일 국제추모의 날(턴투워드부산)에 맞추어 유엔평화공원에 ‘영웅의 길’을 조성할 예정이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영웅을 기억하는 것은 피와 땀으로 대한민국을 지킨 모든 분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약속이자 일류보훈으로 가는 기본” 이라며 “국가보훈부 승격에 걸맞게 품격 높은 보훈으로 국가유공자를 예우하고 보답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지난해 ‘경제계와 함께하는 일류보훈 동행’으로 시작된 양 기관의 상호협력은 이번 협약으로 더욱 공고화되어 향후 주거개선 및 제대군인 일자리 지원 등 국가유공자 생활안정을 위한 복지증진 사업으로 구체화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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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잊혀진 모로코 6·25남침전쟁 참전용사 첫 확인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전문기자] 주모로코 한국대사관(대사 정기용)은 6·25 남침전쟁 당시 프랑스 군복을 입고 참전했던 북아프리카 모로코 군인의 후손을 처음으로 찾아냈다고 28일(현지시간) 밝혔다. 이번에 확인된 유족은 6·25 남침전쟁에 유엔군 프랑스대대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모하메드 벤 카두르 라스리(당시 병장·실제 모로코 이름은 무흐 벤카두르 엘 아스리)의 딸인 프테탐 엘 아스리(81)씨와 손녀다. 라스리씨는 1951년 3월5일 1037고지 전투 중 왼쪽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전사했으며, 유해는 부산 유엔 공원에 안장돼 있다. 한국대사관은 지난해 9월 프랑스 군사기록원 자료를 통해 라스리씨를 포함한 8명의 모로코 군인이 프랑스군에 배속돼 6·25에 참전한 사실을 확인하고, 모로코 보훈처와 함께 참전용사 가족 찾기에 나섰다. 6·25 남침전쟁의 숨은 영웅찾기 사업을 진행하던 윤종진 보훈처 차장이 지난해 12월 현지 방문을 계기로 참전용사 가족 찾기에 적극 나선 모로코 보훈처는 몇달간의 조사와 확인 끝에 첫 성과를 냈다. 그러나 후손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라스리씨의 병적 상 이름이 실제 이름과 달리 기재된 데다, 유족들이 거주지를 옮기면서 전입신고를 하지 않아 소재 파악도 어려웠다. 딸인 프테탐씨가 가지고 있던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인 군복 입은 사진이 가족관계를 확인하는 단 한 가지 단서였다. 프테탐씨는 "4살 때 입대한 뒤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고 6·25 남침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도 최근에 알았다"며 "우리를 잊지 않고 찾아준 한국 정부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부산 유엔 공원을 꼭 방문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6·25 남침전쟁 발발 당시 모로코는 프랑스의 보호령이었다. 모로코인 참전용사들이 프랑스군에 배속돼 프랑스 군복을 입고 전쟁에 투입된 이유다. 모로코 참전용사 확인 작업은 애초 2012년에 시작됐지만, 당시 모로코 측에서 관련 자료 확인에 난색을 보이면서 1년 만에 중단됐다. 그렇게 끝나는 듯했던 참전용사 확인은 2021년 정 대사가 엘렌 르 갈 당시 주모로코 프랑스 대사에게서 6.25 참전 모로코인 자료가 프랑스에 존재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재개됐다. 이후 부산 유엔공원에서 모로코 출신 참전용사 2명이 안장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이어 대사관측은 프랑스 참전용사 및 전쟁피해자 사무소(ONACVG)의 협조로 프랑스 군사 기록원에 남아있는 관련 기록을 확보, 지난해 처음으로 참전용사 8명의 존재를 찾아냈다. 정기용 대사는 "정전 70주년을 맞은 해에 모로코 출신 6·25 참전용사 가족을 찾게 돼 의미가 크다"며 "앞으로도 추가로 참전 용사와 가족을 찾는 한편 모로코 내 학교 교재에 이 사실을 수록하고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는 등 후속 사업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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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은 “외교관 생활을 하며 만난 미국인들은 한국인보다도 백선엽장군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음을 알게되었습니다”라며 “백 장군님은 정전협정을 앞두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하시어 현재 한미동맹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작금에 북한의 핵위협과 도발이 계속되는 속에서 출범하는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큰 역할을 하기를 기대합니다”라고 축사를 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의 “참군인 김관진 장관이 이사장을 맡아 이 재단은 더욱 발전할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이어 박정환 육군참모총장, 틸러리 전 연합사령관, 권오성 육군협회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국회 회의 때문에 늦게 도착한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를 만든 분, 백선엽 장군은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내신 분, 박정희는 오늘의 선진 경제를 만들었습니다”라고 축사를 시작했다. 이어 박 장관은 “이렇기 때문에 이 세분은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나라발전에 큰 업적을 많이 남긴 지도자입니다. 허나 지난 정권에서는 폄하되며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 이 세분의 역사적인 공을 양지로 끌어내는 것이 본 장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의 일에도 분골쇄신의 각오로 절대 기여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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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재단 이사장인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은 “백선엽 장군님은 창군(創軍) 원로이자, 6.25남침전쟁시 대한민국이라는 신생국가가 존폐의 위기에 처할 때에 다부동전투 승리로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의 발판을 만드시고, 평양 선두입성, 중공군의 공세 저지, 남부군 토벌 등의 뛰어난 전공을 세우셨다”며 기념사를 시작했다. 백선엽 장군은 전쟁중에 국군 최초 4성 장군이 되어 두 번의 육군참모총장과 제10대 합참의장을 역임했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헌신적인 노력을 하여 한미동맹의 초석을 다지신 구국영웅이다. 미군은 지금도 백선엽 장군님을 6·25남침전쟁시에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하며 존경하고 있다. 백 장군은 전역후 약 10년 동안 중화민국, 프랑스, 캐나다 대사를 역임하며 북한의 외교 진출 공세를 철저히 막아내었고, 귀국해서 교통부 장관 재임시에는 서울지하철 1호선 건설 실현과 대한민국 화학산업을 키워내신 탁월한 외교관이자 산업근대화의 주역이기도 하다. 이에 김관진 이사장은 “백선엽 장군님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공인(公人)의 표본이자 우리 시대 ‘제복의 영웅’입니다. 그동안 뜻있는 많은 분들이 감사하게도 여러 추모 및 기념단체를 만들어 뜻을 기리고 있었습니다”라며 “이제 과거를 뛰어넘어 대한민국을 초일류국가로 도약시키기 위해 백남희 여사의 적극적인 후원과 보훈부의 도움으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을 창립하여 새롭게 출발합니다. 이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따라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은 장군님의 숭고한 나라사랑과 공인 정신을 선양하고 계승함으로써 미래의 주역이 될 이 땅의 젊은이들이 올바른 역사인식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며 각오를 밝혔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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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상)
30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구 소재 공군회관에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재단 창립대회를 개최. [사진=김희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은 30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구 소재 공군호텔에서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김형오 전 국회의장, 박민식 보훈부 장관, 권오성 육군협회장, 이중근 부영그룹회장, 고현석 육군참모차장, 벤플리트 장군 손자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재단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창립대회는 대한민국 군가합창단(홍두승 단장)의 식전 공연에 이어 초대 재단 이사장인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과 백선엽 장군의 장녀이자 재단 명예이사장인 백남희 여사의 개회선언으로 시작됐다.2부에서는 김재창 장군의 ‘가까이서 본 선배 백선엽 장군’과 유광종 대표의 ‘백선엽,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 주제 발표가 있었다. 특히 다부동 대첩 및 평양입성 전투에서 고(故) 백선엽 장군과 함께 싸웠던 ‘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의 박형수(94세) 회장과 김주찬(94세) 부회장이 노구를 이끌고 참석해 전장 실상을 이야기할 때와, 재단 명예이사장인 백남희 여사가 환영사로 대한민국과 아버지의 삶을 이야기할 때는 참석자들 모두에게 깊은 감동을 주어눈시울을 붉어지게 만들며 힘찬 박수가 터져나왔다. 또한 백선엽 장군과 인연을 맺였던 청년 대표와 연평해전 전사자 서정우 하사의 모친의 플로어 맨트도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백 장군은 1952년 7월 최연소(32세)로 제7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고, 이듬해 1월엔 만 33세에 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됐다. 정전회담 땐 국군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2020년 7월10일 향년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다음편 계속)
실시간 군대를 말한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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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⑳사명감과 신념으로 기적을 이룬 라루(Leonard P. LaRue)선장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1950년 크리스마스 직전, 함흥 동쪽 흥남부두에는 1백 만 명 가까운 피란민들이 아우성과 통곡으로 천지를 흔들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이 진격했을 때 열광적으로 환영했던 자유를 동경하는 사람들이었다. 마지막 탈출선인 메레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는 인원 58명과 짐을 실을 수 있는 화물선이었다. 12월 22일 항구엔 혹독한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미국 무어 매코맥 선사의 화물선 빅토리호는 함포사격의 엄호를 받으면서 선체를 선창에 댔다. 사방은 황혼에 잠기고 시가는 죽음 앞에 가로놓여 있었다. 해군 신호등은 37세인 선장 레오나두 P. 라루에게 출발을 위해 엔진을 끄지 말라는 경고를 주었다. 선장은 사실 흥남 항을 떠나도 그만이었다. 그러나 절망 속에서 이틀이나 추위를 견디며 부두에 앉아 있던 수많은 피란민을 버려둘 수 없었다. 문제는 몇 명을 태우느냐에 있다. 이 배는 겨우 승무원 46명과 승객 12명 58명을 수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보다도 저 많은 군중 속에서 공산정권의 지령을 받은 프락치가 끼어 있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또 그들의 보따리 속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일일이 확인할 수도 없는 일이다. 배 바닥에는 3천 드럼의 연료용 기름이 깔려 있다. 성냥 한 개비면 이 배를 불바다로 만들 수도 있었다. 라루 선장은 눈을 감고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이시여! 저를 도와주소서.” 그는 별안간 용기라도 얻은 듯 일등 항해사에게 명령했다. “1만 명의 피란민을 태우시오.” 일등항해사는 그 순간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정원 58명의 배에 1만 명을 태우라니 그것은 정상적인 사람은 엄두조차 못 낼 일이다. “하지만 한 번 해 봅시다. 하늘이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노인, 아낙네, 아기, 할아버지, 할머니....... 피란민들은 울부짖으며 꼬리를 몰고 배 위로 밀려들었다. 배는 삽시간에 콩 나물 시루처럼 되었다. 선장 라루는 피란민의 승선수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일등항해사는 1만 2백 명까지 세고는 더 이상 헤아리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이튿날 새벽 동이 틀 무렵 빅토리호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산항에 도착한 것은 크리스마스 전날인 24일 오후였다. 그 무렵 1백만 명 이상의 피란민이 몰려있던 부산항은 이들을 맞아들일 곳이 없었다. 부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주먹밥을 배위에 올려 주는 것뿐이었다. 선장 라루도 그 일을 거들었다. 피란민들에겐 흥남 출발 이래 첫 요깃거리였다. 빅토리호는 다시 뱃머리를 돌려 미 육군에서 운영하는 거제도의 수용소로 향했다. 12월 26일 피란민들은 거제도 앞바다에서 두 대의 LST에 옮겨 탔다. 한 배에 7천 5백 명씩, 그 수는 1만 5천 명에 달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세운 믿기 어려운 기록은 미국에서 화제가 되었다. 독자 여러분이 라루 선장이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신념이 기적을 낳는다는 의미를 아십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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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⑳사명감과 신념으로 기적을 이룬 라루(Leonard P. LaRue)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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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37)] 미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④
- [시튜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 북한과 중공군은 중국으로부터 유입되는 많은 군사물자와 장비를 경의선과 만포선을 통해 평양으로 수송했고, 이를 다시 평양에서 중동부 전선으로 보급하고 있었다. 승호리 철교는 평양 동쪽 10km 지점 대동강 지류인 남강에 설치된 철교로서 중국으로부터 평양까지 수송된 보급물자를 중동부 전선으로 수송하는 북한군 후방보급로의 요충지였다. 미 5공군은 이러한 중요성으로 인해 이미 기존 승호리 철교의 폭파ㆍ차단작전을 시행했으나 북한은 기존 철교 위치에서 하류 방향으로 북쪽 200미터 지점을 우회해 새로운 철교를 가설한 후 주위에 밀집된 대공방어망을 구축했다. 또한 10개의 교각은 침목을 우물 정자(井) 형으로 쌓아 올리고 그 공간에는 모래주머니를 채워 폭격이나 기총에 대해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건설됐다. 미 5공군은 이 철교를 폭파하기 위해 미 전폭기 B-29까지 동원하여 500회(소티)에 달하는 폭격을 퍼부었음에도 파괴에 실패한 곳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밑져야 본전이란 식으로 이 작전임무를 한국 공군에 이양했다. 임무를 부여받은 공군 10전투비행전대장 김신 대령은 공군 최초의 100회 출격 달성자인 김두만 소령에게 이임무를 부여했다. 1952년 1월12일 아침 7시 40분 편대장 김두만 소령의 지휘 아래, 2번기 장성태 대위, 3번기 김금성 대위, 4번기 이기협 대위, 5번기 전봉희 대위가 탑승한 F-51 전투기 5기 편대가 강릉기지를 이륙했다. 드디어 편대는 적의 대공포화가 작렬하는 승호리철교 표적의 상공에 도착했고 우선 로켓탄과 기총으로 적 대공포진지를 무력화한 후 500파운드 폭탄 10발을 투하했으나 폭탄이 교각 사이의 모래바닥과 물 속에 떨어져 폭파에 실패했다. 같은 날 오후 2시, 윤응렬 대위가 지휘하는 3기 편대(2번기 주영복 대위, 3번기 정주량 대위)가 재차 폭격을 시도했으나 교각 위의 철로만 손상을 입혔을 뿐 교량 폭파에는 또 실패했다. 첫날 임무에 실패한 김신 대령은 참모들과 숙의 끝에 8000피트 상공에서 강하해 3000피트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당시의 미군 전술로는 철교 폭파가 불가능하다고 분석했다. 결국 조종사에게는 적 대공포에 피격될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폭격 명중률을 크게 높일 수 있도록 저고도 폭격 방안인 4000피트 상공에서 강하해 1500피트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작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1월15일 오전 8시 25분 엄동설한으로 살을 에는듯한 한파 속에 투철한 감투정신으로 무장한 제1편대장 윤응렬 대위(2번기 정주량 대위, 3번기 장성태 대위)와 제2편대장 옥만호 대위(2번기 유치곤 대위, 3번기 박재호 대위)가 이끄는 6대의 F-51 전폭기는 승호리철교 표적 상공에 도착했다. 먼저 제1편대가 적의 심한 대공 포화를 피해가며 편대장기를 선두로 기수를 목표에 맞춰 진입해 로켓탄을 발사하자 철교의 경간 2개에서 검붉은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이어 제2편대가 표적을 향해 진입하자 1편대는 2편대를 엄호하기 위해 잔여 로켓탄과 기총을 적의 대공포 진지를 향해 발사했고 유치곤 대위가 포함된 2편대는대공포화의 위협을 무릅쓰고정확한 조준 하에 폭탄과 로켓탄을 표적에 투하했다. 이때 명중한 2개의 교각 경간이 파괴되면서 철편이 허공에 솟아올라 떨어지고철교의 중앙에는 2개의 큰 구멍이 생겼다. 이로써 우리 공군은 출격한 지 14회(소티) 만에 승호리 철교를 파괴시키는 놀라운 신화를 만들어냈다. 이날 F-51기 6대는 폭탄 12발, 로켓탄 20발, 50밀리 기총 4700발을 사용해 승호리 철교 폭파 외에도 포진지 6개소, 보급품 집적소 1개소, 벙커 3개소, 건물 1개 동을 파괴하는 성과도 거뒀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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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37)] 미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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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⑲배짱있고 냉엄한 장왕의 배려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지금으로부터 2천 수백 년쯤 전인 춘추시대, 초나라에 장왕(莊王)이라는 훌륭한 임금이 나타나 후진국이었던 초나라를 최강의 나라로 끌어올렸다. 장왕은 수완 있고 냉엄한 인물이었다. 냉엄한 인물이란 일반적으로 그 날카로운 기백에 의해 부하를 벌벌 떨게 할 수는 있어도, 마음으로 복종시키지는 못한다. 그러나 장왕은 그 점에서는 예외적인 존재였다. 날카로운 사람이면서 느긋한 배짱도 있었기 때문이다. 장왕이 어느 날 밤, 신하들을 모아놓고 술을 대접하면서 “오늘 밤은 신분이나 지위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즐기려 하니 마음 놓고 마시도록 하라.”고 했으므로, 임금과 신하가 한데 어울려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그런데 바람이라도 불었는지 방안의 모든 불이 갑자기 꺼져 버렸다. 바로 이 때다 하고 왕의 애첩을 희롱한 사내가 있었다. 애첩 또한 대담한 여성으로 그 남자의 갓끈을 잡아 뜯고는 장왕에게 아뢰었다. “갓끈이 없는 사람이 범인이옵니다. 체포하십시오.”그러자 장왕은 “아니다. 문제는 내가 주연을 베푼 탓으로 일어난 것이니, 여자의 정조를 중히 여겨 부하를 욕되게 할 수는 없다.”고 애첩을 타이르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오늘 밤은 신분에 구애되지 않고 즐기는 주연이다. 모두 갓끈을 잘라 버려라!” 불이 켜진 뒤 보니, 신하들 중에 누구하나 갓끈이 붙어 있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수년 후, 장왕은 진(晋)이라는 강대국과 싸우게 되었다. 그런데 항상 아군의 선두에 서서 용감무쌍하게 싸우는 장수가 있었다. 그 장수의 활약으로 결국 진나라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장왕은 그를 불렀다. “그대 같은 용사가 있었음을 미처 몰랐다는 것은 내가 부덕한 탓이야. 그런 나를 원망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싸워 준 것은 무슨 연유인가?” 묻자 그는 엎드려 대답하였다. “저는 한 번 죽었던 몸입니다. 술에 취해 무례를 저질렀을 때, 임금님의 배려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 때부터 목숨을 바쳐서라도 은혜를 갚기로 맹세했습니다. 그날 밤, 갓끈을 뜯긴 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작은 일까지 하나하나 들추어내어 허물을 잡는다면 부하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복종을 얻을 수 없다. 너그럽고 포용력이 있어야만 부하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음을 장왕의 일화는 말해 주고 있다. 독자 여러분은 부하들의 실수를 한 번쯤 용서해 준 적이 있습니까? 부하들로부터 신뢰받고 있습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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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⑲배짱있고 냉엄한 장왕의 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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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⑱워털루 전투의 웰링턴 공작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군대를 격파한 사람은 잘 알려진 대로 영국의 웰링턴 공작이다. 그는 1815년 6월 18일, 원군을 데리고 달려온 프로이센의 장군 게프하르트 폰블뤼허 후작과 힘을 합쳐 최후의 결전에서 승리해 나폴레옹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워털루 전투는 이튼의 운동장에서 이겼다.” 이튼이란 웰링턴 공작이 수학한 학교를 말하는데, 상류계급을 위한 예비학교로서 럭비가 유명하다. 즉 그 학교 재학 중에 국기(國技)인 크리킷(cricket)이나 럭비로 다진 정신과 육체가 워털루의 승리를 가져오게 했다는 뜻이다. 영국인의 명예존중 정신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지루한 참호전이었다. 개량된 독일군의 화력 앞에 영국의 구식 대포와 소총은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강력하게 밀고 들어오는 독일군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군은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초기에 치솟던 사기도 형편없이 떨어져 참호 속에서 나오려 하지도 않았다. 지휘관들은 국면을 전환시킬 묘책을 궁리했지만 적의 막강한 화력을 뚫고 돌격을 명령하는 것은 무리였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한 젊은 장교가 일어서더니 군장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큰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케임브리지 출신들은 모두 나와라! 겁쟁이는 케임브리지 동창이 아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젊은 장교가 있는 곳으로 장교와 병사가 모여들었다. “옥스퍼드의 제군들이여! 우리는 겁쟁이가 아니다. 옥스퍼드의 명예를 우리가 더럽혀서는 안 된다” 삽시간에 두 대학 출신 장교와 병사가 두 패로 모여들었고 남은 병사들도 모두 참호 속으로 나와 있었다. 럭비선수였던 고급장교가 입을 열었다. “옥스퍼드의 이름을 걸고 함께 돌격한다. 비열했다는 오명을 남기지 말자. 우리는 오늘 피로써 옥스퍼드의 명예를 지킨다.” 저쪽에선 축구선수였던 젊은 장교가 목청을 높였다. “케임브리지의 명예를 걸고 적진을 돌파한다. 후세에 손가락 받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려라. 쓰러지더라도 놈들의 저지선에서 쓰러져야 한다. 알았나!” 그리하여 영국의 병사들은 이색대열을 형성하고 돌격선의 앞에 섰다. 소대도 분대도 아닌 출신학교끼리 모여 대열을 형성한 것이다. 이윽고 명령이 떨어졌다. “케임브리지, 돌격! 앞으로 돌격!” “옥스퍼드, 돌격! 앞으로 돌격!” 명예를 소중히 하는 정신은 삶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1차 대전 당시 보여 준 영국군의 이 일화는 명예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부대의 명예를 고양시킬 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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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⑱워털루 전투의 웰링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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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36)] 미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1951년 12월, 38도선 인근에서 전선이 고착된 가운데 유엔군은 협상을 통해 전쟁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고 결말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반면 북한과 중공군은 계속적인 증원으로 전투력을 확대하여 고착된 전선에서 양측 세력이 점차 균형을 이루게 됐다. 이로써 지상전에서는 대규모 작전의 실현 가능성이 희박해진 가운데 연대급 이하의 전초진지 쟁탈전이 반복되는 소부대 전투를 제외하고 거의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따라서 유엔군 지도부는 교착상태에 빠진 휴전회담의 성과를 진전시키기 위해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던 공군에게 적의 전 병참선에 대한 폭격작전을 실시하여 증원을 차단함으로써 현상황을 타개하도록 기대를 걸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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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36)] 미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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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⑰타이타닉호의 선원들, 죽음을 앞두고도 헌신적인 구조활동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타이타닉호는 1912년 4월14일 23시40분 북대서양 해상에서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한 영국의 호화 여객선이다. 4만6328톤의 여객선은 당시 세계 최고속의 여객선으로서 불침(不沈)이라고 믿어졌지만 어이없게도 첫 항해에서 조난을 당하여 1513명이 사망하였다. 이 사건을 각색하여 만든 영화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준 것은 죽음을 앞둔 선원들의 헌신적인 구조장면이다. 선원들은 빙산과 충돌한 직후에, 배는 침몰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과 16척의 구명보트, 4척의 접는 보트의 수용능력에 비추어 승객 중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는 배와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다는 두 가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즉 자신들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죽음이 절대 절명의 현실로 다가섰는데도 선원들은 에드워드 존 스미스 선장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구조작업을 진행하였다. 승객에 앞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선원은 한 명도 없었다. 죽음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선 그 절망의 순간에도 선원으로서의 임무수행에 사력을 다했다. 이 영화가 시사하는 것은, 책임과 의무는 죽음 앞에서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선원들은 선원의 의무와 책임 때문에 비겁하지 않게 자기희생을 택했다. 승객을 보호할 책임을 가진 군인의 길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저수지의 뚝 방도 조그만 구멍에 의해서 무너지고 건물의 벽도 별 돌 몇 장이 빠지면 위태롭게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군인 개개인의 책임은 준엄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군인은 죽음을 무릅쓰고 책임을 완수하는 숭고한 애국애족의 정신이 자기 신념화되어야 한다. 독자 여러분은 타이타닉호의 영화를 감상하고 무엇을 느꼈습니까? 여러분의 책임을 행동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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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⑰타이타닉호의 선원들, 죽음을 앞두고도 헌신적인 구조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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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35)] 미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에 전투기가 한 대도 없던 우리 공군은 미군이 제공하는 F-51 무스탕 전투기 10대를 인수하기 위해서 고(故) 이근석 대령을 포함한 10명의 인수요원을 선발했다. 김신 중령은 6·25 남침전쟁 발발 다음 날인 1950년 6월 26일 이근석 대령의 인솔하에장성환 중령(전 공군참모총장), 김영환 중령, 강호륜 대위, 박희동 대위, 김성룡 중위, 정영진 대위, 이상수 중위, 장동출 중위 등 선발된 인수요원에 포함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김신 중령은 일본에서 인수받은 F-51 무스탕 전투기를 조종해 귀국한 다음날인 7월 3일 우리 공군의 최초 출격에 합류했다. 그는 자신이 백범의 아들이기 보다는 전투기 조종 실력이나 전쟁시 공적으로 평가받는 걸 더 선호했다고 한다. 실력으로 평가받고 싶은 것은 군인으로서의 당연한 자존심이었으리라. 하지만 이 첫 비행에서 F-51 무스탕 전투기 인수단장이었던 이근석 대령은 안타깝게도 적의 대공포를 맞았다. 그는대공포에 엔진이 명중되자 탈출하기는 커녕 적군 전차부대 한 복판으로 돌진해서 비행기와 함께 산화했다. 이때 이 대령은 “3번기 왼쪽 탄약차량 공격, 건투를 빈다”는 마지막 명령을 내린 뒤 이같은 희생적 공격을 함으로써 전투기 조종사 중 첫 전사자로 기록됐다. 이근석 대령은 나중에태극무공훈장 수훈과 함께 장군으로 추서됐으며, 공군은 58년이 지난 2008년에야 전투기 첫 출격을 기념해 7월3일을 ‘조종사의 날’로 선포했다. 한편, 비행한지 몇 일만에 최고참 이근석 장군의 전사로 한국공군은단독비행이 금지되었고, 유엔공군이 들어오면서 그나마 닦아 둔 활주로에서도 쫓겨났다. 사천비행장의 부족한 활주로로 인한이착륙의 어려움은 감수하더라도, 한때마산일대까지 북한군이 공격해오면서 위태롭기도 했었다. 그러나 1.4후퇴 이후 백구부대 창설로 조종사들이 대량 육성되어 F-51 무스탕 조종사들 숫자가 증가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한국공군의 단독작전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였기에 공비 토벌을 통해작전능력 향상과 인정을 받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김신 중령도 1951년 10월까지 공중전투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19회 출격하며 지리산 공비 토벌 항공작전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후 김신은 고참이 되면서 직접비행을 통한 전투 참여 기회를 많이 얻지 못하였으나 전투 의지는 매우 강했다. 특히 1952년 1월, 김신 대령이 공군 10전투비행전대장으로 재임할 당시 유엔군이 500회 넘게 출격하면서도실패한평양 승호리철교 폭파 작전을 지휘해 한국공군 단독으로 성공함으로써 우리 공군의 위상을 높힘과 동시에 전장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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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35)] 미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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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⑯화산 폭발로 페허가 된 폼페이시 발굴시 발견된 파수병의 상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이탈리아 나폴리만에 있는 ‘베스비우스’ 화산 폭발로 페허가 된 폼페이시를 발굴하던 때의 일이다. 발굴 작업 중에 용암으로 응고된 창을 든 파수병의 상이 나타났다. 뜨거운 용암이 사방에서 덮쳐 오는 죽음의 순간에도 파수병은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명령받은 위치를 이탈하지 않고 회의장 앞에서 꼿꼿이 선채 용암에 묻혀 버렸다. 당시 함께 발굴된 많은 사람들의 화석은 하나같이 그 모습이 살길을 찾아 이리저리 발버둥 치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파수병의 모습은 어찌나 의젓한지 발굴하던 고고학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부여된 책임은 기필코 완수하고, 명령에는 절대복종하는 엄정한 군기를 가진 군대만이 전쟁에서 필승할 수 있다. 군기가 확립된 군대는 전쟁에 임했을 때 어떤 화기 보다도 막대한 힘을 발휘하여 승리를 쟁취한다. 반대로 군기가 문란한 군대는 전시에는 패하고 평시에는 국민에게 지탄받는 대상이 되고 만다. 군기가 확립된 군대에서는 부하는 상관을 존경하고 상관은 부하를 믿으며, 상하가 스스로 일심동체가 되어 일정한 방침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행동하게 된다. 독자여러분은 상관이 지시를 하고, 취소나 종료를 얘기하지 않고 떠났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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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⑯화산 폭발로 페허가 된 폼페이시 발굴시 발견된 파수병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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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34)] 미공군도 실패한 평양 승호리철교를 폭파시킨 한국공군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백범 김구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시절에 이미 “미래의 전쟁은 항공력이 우선이다”라고 강조했다. 아버지 혜안의 영향을 받은 차남 김신은 1937년 일본 공군이 중국 난징을 폭격하는 모습을 목격한 뒤 공군 조종사가 돼 조국 독립에 기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버지인 김구 주석과 함께 활동하는 임시정부 요인들 간의 비밀연락 임무 등을 수행하면서 조종사의 꿈을 키웠다. 김신(전 공군참모총장)은 1944년 중국 공군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고, 1947년 미국 랜돌프 공군비행학교를 수료하며 조종사의 꿈을 이뤘다. 귀국 이후엔 육군항공대에서 활동하며 1949년 공군 창설에 기여했다. 미국에서 비행교육을 받은 탓으로 미군이 작성한 대한민국 공군 주요인물 출신성분 보고서에는 그가 미군 출신으로 기재되어 있기도 하다. ■ 6·25남침전쟁 때 한국 공군으로 첫 출격한 김구 선생의 차남 김신 중령 아버지인 김구 선생처럼 공산주의를 혐오했던 김신은 아버지가 암살당한 후 20대 후반의 나이에 우익으로 진로를 확정하고 대한민국 공군의 창군 멤버가 됐다. 비록 미국 랜돌프 공군비행학교를 수료한 뒤에도 조모의 유골 송환 등으로 인하여 시기가 맞지 않아 공군 창설의 7인에는 들지 못했으나 귀국과 동시에 입대하면서 군사 교육 및 경력을 인정받아 공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공군 창설 7인이 주도한 모임에는 계속 참여를 했는데, 당시 한국 공군에선 최연장자였던 최용덕 장군, 항공사령관 이영무 대령 등과 함께 중국 공군 출신으로 그들은 대한민국 공군 발전의 핵심 역할을 했다. 1950년 조선인민군의 전면 남침에 의해서6·25 남침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F-51 무스탕 전투기 인수 10인의 요원으로 선발된다. 당시그는 중국군-미군 유학과정에서 무스탕 정규교육을 받은 한국 공군내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전쟁 직후 도일하여 F-51 무스탕 전투기를 인수하러 갔을 때 미국 랜돌프 공군비행학교에서 공부했던 무스탕 메뉴얼을 지참해가서 자료를 제공함과 동시에 통역도 겸했다고 한다. 그는 공군 조종사로 6·25 남침전쟁 초기에 북한군과 빨치산 토벌에 앞장섰다. 전방에 나서지 않고 후방 빨치산 토벌에 참가한 것을 소외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백범의 아들이 전방에서 지휘하다가 생포될 경우 벌어질 정치적문제를 생각한다면 후방 빨치산 토벌에 참가하는게 나은 일로여겼을 수도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공군 전투조종사로 공중전에도 참가했다. 영화 ‘빨간마후라’도 사실 김신 장군이 공군 제10전투비행전대장으로 재임할 당시의 이야기가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김구 선생의 정치적 라이벌이던 이승만 대통령입장에서 볼 때도 김 장군은 정치관이확고해흠잡을 구석이 없는 반공주의자이고, 기술관료의 자질도 충분했기 때문에 이승만 정권의 제1공화국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공군총장까지 역임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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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⑮ 독일이 불침함(不沈艦)이라고 자랑했던 비스마르크(Bismarck)호의 침몰
- [시큐리티팩트=유철상 칼럼니스트] 지휘관 또는 장교간의 불화나 분쟁은 부대 군기에 커다한 악영향을 끼친다. 지휘부나 장교단에 대한 갈등과 마찰은 부대 전반에 대한 자신감을 약화시키며 군기를 저해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의 한 예를 독일이 불침함(不沈艦)이라고 자랑했던 비스마르크호의 침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시 독일의 유명한 전함 비스마르크호가 북대서양을 단독으로 순항하고 있을 동안 그 전함 내의 승무원 사이에 군기가 이완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생존자들을 통해서 밝혀졌다. 처음 승무원들은 그들의 함이 불침함이라는 신념과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출항하였다. 또한 첫 해전에서 영국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Prince of Wales)호를 격퇴시키고 후드(Hood)호를 격침함으로써 사기충천하여 승리감이 최고 절정에 다다랐다. 그러나 그 후 루에트엔스(Luetjens) 제독과 비스마르크호 함장 린데만(Lindeman)대령 사이에 있었던 의견충돌은 장병들 사기를 급작스럽게 저하시키고 불안한 정신 상태를 조성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전투 중 포수가 자기 위치를 떠나 살길을 찾으려고 도망치고, 장교들은 포탑 위에서 포수들이 지정된 정 위치에 붙어 있도록 위협사격을 하는 등 함 내의 전투군기가 엉망이 되었다. “자기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서, 또는 자기를 인정하지 않고 구박했던 사람을 위해서는 죽을 각오로 싸우고 싶지 않다”는 사고가 장병들 사이에 퍼졌다고 한다. 그 결과 비스마르크 호는 전력이 훨씬 약한 로드니(Rodney)호와 킹 조지(King Geroge)5세 호의 공격을 받고 완전히 침몰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비스마르크 호의 침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군대 병영 내에 군기가 이완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겠습니까? ◀유철상 프로필▶ 現시큐리티팩트 칼럼니스트, 군인공제회 대외협력팀장, 육군 군수사령부·훈련소·소말리아·이라크파견부대·9군단 정훈공보참모, 한미연합사령부 공보실장 / 주요저서 : ‘향기로운 삶의 지혜’(2011년, 플래닛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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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철상의 동서양 전사에서 배우는 교훈] ⑮ 독일이 불침함(不沈艦)이라고 자랑했던 비스마르크(Bismarck)호의 침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