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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환된 유해 DNA가 존안된 미스터 션샤인의 ‘유진 초이’ 황기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유진 초이’의 실존 인물인 황기환 애국지사(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의 유전자(DNA) 정보를 확보해 국가 관리기록으로 영구 보존한다”고 밝혔다. 황기환 지사의 유전자(DNA) 정보는 지난 4월10일 순국 100년 만에 고국으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 제7묘역에 안장된 황기환 지사의 유해를 미국 뉴욕 마운트 올리벳 묘지에서 파묘하는 과정에서 채취한 시료를 국내로 들여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을 통해 확보하였다. 황기환 지사 유해는 2008년 미국 뉴욕 마운트 올리벳 묘지에서 발견되어 2013년부터 국내봉환을 10여 년에 걸쳐 추진하였으나 유족이 확인되지 않아 2차례 법원 소송을 제기하였음에도 승인을 얻지 못했으나 국가보훈부와 뉴욕총영사관의 적극적인 설득과 노력으로 지난 1월 31일 묘지 측이 파묘에 합의하면서 극적으로 성사되었다. 또한 국가보훈부는 후손이 확인되지 않은 황기환 지사 유해의 유전자(DNA) 정보 보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파묘 과정에서 시료를 확보해 4월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정을 의뢰하였다. 감정을 맡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황기환 지사가 순국한 지 100년이 지나 유해의 훼손 상태가 심각해 감정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유전자(DNA)정보가 황기환 지사의 유족을 확인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기에 사명감을 갖고 다양한 분석기법을 적용해 2개월만에 어렵게 정보 획득에 성공하였다. 이에 국가보훈부는 황기환 지사의 소중한 유전자(DNA) 정보를 국가의 기록으로 영구히 보존하고, 유족을 찾는데 적극 활용할 예정이다. 박민식 국가보훈부장관은 “앞으로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협업해 후손이 확인되지 않는 국외 독립유공자의 유해 유전자(DNA) 정보를 기록으로 영구 보존하고 후손을 찾는 중요 단서로 활용해 이분들의 희생과 공헌이 우리사회에 영원히 계승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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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공자 예우와 복지증진 협약 체결로 재계가 동참한 일류보훈 구현
[시크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전경련회관에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김병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직무 대행 등이 ‘국가유공자 예우 및 복지증진 업무협약’을 3일 10시에 체결했다. 이날 업무 협약은 대한민국 자유수호에 헌신한 국가유공자에 대한 존경과 예우 분위기 조성, 국가유공자의 영예로운 삶 향유를 위한 복지증진, 생활안정을 위한 일자리 지원 확대 등을 목적과 주요 골자로 구체적인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이번 업무협약에 따라 첫 번째 실천사업으로 ‘수호자의 발걸음’ 프로젝트가 추진된다. 이 사업은 ‘국가보훈부-전국경제인연합회-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함께 협력해 자유 수호를 위해 대한민국 곳곳을 쉼 없이 전진한 국군 및 유엔군 참전용사의 헌신에 감사드리고자 세상에 하나뿐인 맞춤형 신발을 제작해 헌정한다. 왼발과 오른발의 발볼 차이로 기성화가 안맞거나 보행 불편이 있는 6‧25참전유공자 및 재방한 유엔참전용사 등 300명 영웅의 발을 삼면측정(3D스캔)하고 그에 맞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영웅의 신발(One & Only Heroes Shoes)”를 제작해 6·25남침전쟁 정전 70주년인 7월 27일을 전후해 직접 전달한다. 또한, 맞춤형 신발 제작을 위해 취형한 발 모양과 참전영웅의 인적사항, 참전기간, 누적 발걸음 수 등이 표기된 동판을 제작해 대한민국을 지켜낸 희생과 헌신에 감사와 예우를 전하는 의미에서 11월 11일 국제추모의 날(턴투워드부산)에 맞추어 유엔평화공원에 ‘영웅의 길’을 조성할 예정이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영웅을 기억하는 것은 피와 땀으로 대한민국을 지킨 모든 분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약속이자 일류보훈으로 가는 기본” 이라며 “국가보훈부 승격에 걸맞게 품격 높은 보훈으로 국가유공자를 예우하고 보답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지난해 ‘경제계와 함께하는 일류보훈 동행’으로 시작된 양 기관의 상호협력은 이번 협약으로 더욱 공고화되어 향후 주거개선 및 제대군인 일자리 지원 등 국가유공자 생활안정을 위한 복지증진 사업으로 구체화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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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잊혀진 모로코 6·25남침전쟁 참전용사 첫 확인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전문기자] 주모로코 한국대사관(대사 정기용)은 6·25 남침전쟁 당시 프랑스 군복을 입고 참전했던 북아프리카 모로코 군인의 후손을 처음으로 찾아냈다고 28일(현지시간) 밝혔다. 이번에 확인된 유족은 6·25 남침전쟁에 유엔군 프랑스대대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모하메드 벤 카두르 라스리(당시 병장·실제 모로코 이름은 무흐 벤카두르 엘 아스리)의 딸인 프테탐 엘 아스리(81)씨와 손녀다. 라스리씨는 1951년 3월5일 1037고지 전투 중 왼쪽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전사했으며, 유해는 부산 유엔 공원에 안장돼 있다. 한국대사관은 지난해 9월 프랑스 군사기록원 자료를 통해 라스리씨를 포함한 8명의 모로코 군인이 프랑스군에 배속돼 6·25에 참전한 사실을 확인하고, 모로코 보훈처와 함께 참전용사 가족 찾기에 나섰다. 6·25 남침전쟁의 숨은 영웅찾기 사업을 진행하던 윤종진 보훈처 차장이 지난해 12월 현지 방문을 계기로 참전용사 가족 찾기에 적극 나선 모로코 보훈처는 몇달간의 조사와 확인 끝에 첫 성과를 냈다. 그러나 후손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라스리씨의 병적 상 이름이 실제 이름과 달리 기재된 데다, 유족들이 거주지를 옮기면서 전입신고를 하지 않아 소재 파악도 어려웠다. 딸인 프테탐씨가 가지고 있던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인 군복 입은 사진이 가족관계를 확인하는 단 한 가지 단서였다. 프테탐씨는 "4살 때 입대한 뒤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고 6·25 남침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도 최근에 알았다"며 "우리를 잊지 않고 찾아준 한국 정부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부산 유엔 공원을 꼭 방문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6·25 남침전쟁 발발 당시 모로코는 프랑스의 보호령이었다. 모로코인 참전용사들이 프랑스군에 배속돼 프랑스 군복을 입고 전쟁에 투입된 이유다. 모로코 참전용사 확인 작업은 애초 2012년에 시작됐지만, 당시 모로코 측에서 관련 자료 확인에 난색을 보이면서 1년 만에 중단됐다. 그렇게 끝나는 듯했던 참전용사 확인은 2021년 정 대사가 엘렌 르 갈 당시 주모로코 프랑스 대사에게서 6.25 참전 모로코인 자료가 프랑스에 존재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재개됐다. 이후 부산 유엔공원에서 모로코 출신 참전용사 2명이 안장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이어 대사관측은 프랑스 참전용사 및 전쟁피해자 사무소(ONACVG)의 협조로 프랑스 군사 기록원에 남아있는 관련 기록을 확보, 지난해 처음으로 참전용사 8명의 존재를 찾아냈다. 정기용 대사는 "정전 70주년을 맞은 해에 모로코 출신 6·25 참전용사 가족을 찾게 돼 의미가 크다"며 "앞으로도 추가로 참전 용사와 가족을 찾는 한편 모로코 내 학교 교재에 이 사실을 수록하고 참전 기념비를 건립하는 등 후속 사업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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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은 “외교관 생활을 하며 만난 미국인들은 한국인보다도 백선엽장군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음을 알게되었습니다”라며 “백 장군님은 정전협정을 앞두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하시어 현재 한미동맹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작금에 북한의 핵위협과 도발이 계속되는 속에서 출범하는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큰 역할을 하기를 기대합니다”라고 축사를 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의 “참군인 김관진 장관이 이사장을 맡아 이 재단은 더욱 발전할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이어 박정환 육군참모총장, 틸러리 전 연합사령관, 권오성 육군협회장의 축사가 이어졌다. 국회 회의 때문에 늦게 도착한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은 국가를 만든 분, 백선엽 장군은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내신 분, 박정희는 오늘의 선진 경제를 만들었습니다”라고 축사를 시작했다. 이어 박 장관은 “이렇기 때문에 이 세분은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나라발전에 큰 업적을 많이 남긴 지도자입니다. 허나 지난 정권에서는 폄하되며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 이 세분의 역사적인 공을 양지로 끌어내는 것이 본 장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의 일에도 분골쇄신의 각오로 절대 기여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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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재단 이사장인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은 “백선엽 장군님은 창군(創軍) 원로이자, 6.25남침전쟁시 대한민국이라는 신생국가가 존폐의 위기에 처할 때에 다부동전투 승리로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의 발판을 만드시고, 평양 선두입성, 중공군의 공세 저지, 남부군 토벌 등의 뛰어난 전공을 세우셨다”며 기념사를 시작했다. 백선엽 장군은 전쟁중에 국군 최초 4성 장군이 되어 두 번의 육군참모총장과 제10대 합참의장을 역임했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헌신적인 노력을 하여 한미동맹의 초석을 다지신 구국영웅이다. 미군은 지금도 백선엽 장군님을 6·25남침전쟁시에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하며 존경하고 있다. 백 장군은 전역후 약 10년 동안 중화민국, 프랑스, 캐나다 대사를 역임하며 북한의 외교 진출 공세를 철저히 막아내었고, 귀국해서 교통부 장관 재임시에는 서울지하철 1호선 건설 실현과 대한민국 화학산업을 키워내신 탁월한 외교관이자 산업근대화의 주역이기도 하다. 이에 김관진 이사장은 “백선엽 장군님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공인(公人)의 표본이자 우리 시대 ‘제복의 영웅’입니다. 그동안 뜻있는 많은 분들이 감사하게도 여러 추모 및 기념단체를 만들어 뜻을 기리고 있었습니다”라며 “이제 과거를 뛰어넘어 대한민국을 초일류국가로 도약시키기 위해 백남희 여사의 적극적인 후원과 보훈부의 도움으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을 창립하여 새롭게 출발합니다. 이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따라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은 장군님의 숭고한 나라사랑과 공인 정신을 선양하고 계승함으로써 미래의 주역이 될 이 땅의 젊은이들이 올바른 역사인식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며 각오를 밝혔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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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창립식 개최(상)
30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구 소재 공군회관에서 백선엽장군기념재단 재단 창립대회를 개최. [사진=김희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정부에서 최초 승인한 백선엽장군기념재단은 30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구 소재 공군호텔에서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김형오 전 국회의장, 박민식 보훈부 장관, 권오성 육군협회장, 이중근 부영그룹회장, 고현석 육군참모차장, 벤플리트 장군 손자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재단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창립대회는 대한민국 군가합창단(홍두승 단장)의 식전 공연에 이어 초대 재단 이사장인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과 백선엽 장군의 장녀이자 재단 명예이사장인 백남희 여사의 개회선언으로 시작됐다.2부에서는 김재창 장군의 ‘가까이서 본 선배 백선엽 장군’과 유광종 대표의 ‘백선엽,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 주제 발표가 있었다. 특히 다부동 대첩 및 평양입성 전투에서 고(故) 백선엽 장군과 함께 싸웠던 ‘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의 박형수(94세) 회장과 김주찬(94세) 부회장이 노구를 이끌고 참석해 전장 실상을 이야기할 때와, 재단 명예이사장인 백남희 여사가 환영사로 대한민국과 아버지의 삶을 이야기할 때는 참석자들 모두에게 깊은 감동을 주어눈시울을 붉어지게 만들며 힘찬 박수가 터져나왔다. 또한 백선엽 장군과 인연을 맺였던 청년 대표와 연평해전 전사자 서정우 하사의 모친의 플로어 맨트도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백 장군은 1952년 7월 최연소(32세)로 제7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고, 이듬해 1월엔 만 33세에 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 됐다. 정전회담 땐 국군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는 2020년 7월10일 향년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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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4)]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해병대 창설의 계기가 된 ‘여순 10.19사건’은 1948년 10월 19~27일 간 전라남도 여수·순천 지역에서 일어난 국방경비대 14연대 소속 군인들의 반란과 여기에 호응한 좌익계열 시민들의 봉기가 유혈 진압된 사건이다. 1948년 10월19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14연대는 1946년 2월15일 광주에서 편성된 4연대가 모체이며, 여기에는 여순사건의 주동자였던 김지회, 홍순석 같은 좌익 계열 장교 외에도 지창수 등 사건을 직접 주도하게 되는 부사관들도 포진하고 있었다 또한 14연대 구성원들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경찰에 대한 적대적 감정도 봉기의 원인이 되었다. 창군 이전 국군은 경찰의 보조전력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아 경찰의 조롱거리가 되기 일쑤였고, 이같은 인식은 국군 창설 이후에도 쉽게 변하지 않았다. 1947년부터 14연대의 관할 지역인 전라남도 동부지역에서는 군·경간의 물리적 충돌이 세 차례나 발생하였으며, 모두 경찰에 유리한 결과로 종결되었다. 이는 14연대 병사들 사이에서 경찰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4연대의 반란은 좌익 계열 숙군의 위협과 연대의 제주도 파병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지창수 상사를 비롯한 연대 내 남로당계 부사관들의 급조된 계획에서 시작되었다. 10월 19일 오전 7시 육군본부로부터 14연대에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한 출항 명령이 하달되자 이 날 저녁 장교들이 부재한 틈을 타 부대원들을 연병장에 소집시킨 지창수는 연단에서 “경찰을 타도하고,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하자”며 부대원들을 선동하였다. 대부분의 사병들이 여기에 찬동하였고, 반대파는 즉각 사살되었다. 지창수를 신임 연대장으로 추대한 반란군은 즉시 여수로 진격하였다. 이때 반란에 참여한 인원의 수효에 대해서는 1,000~2,00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사실상 무방비 상태와 다름없던 여수는 쉽게 함락되었고, 반란군은 다시 병력의 대다수를 열차로 이동시켜 20일 오후에는 순천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순천에 파견 나와 있던 홍순석의 2개 중대와, 광주 4연대 소속 진압군도 반란군에 합류하였다. 사기가 높아진 반란군은 주변 지역으로 공격을 속행하였으며, 그 결과 22일에는 전남 동부 지역의 6개 군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때 경찰에 의한 고문 등의 폭력을 경험하기도 했던 좌익 청년들은 지역의 우익 인사·경찰관 및 그 가족을 보복심에 살해하기도 하였으며, 인민위원회에 의해 경찰서장 등의 우익 인사들이 처형되기도 하였다. 우익 인사들에 대한 보복·숙청 외에도 인민위원회는 토지개혁, 식량배급 등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20일에 개최된 미 군사고문단 수뇌부 회의에서는 광주에 ‘반란군 토벌 전투사령부’를 조직할 것을 결정하였다. 진압군 지휘는 육군총사령관(육군총참모장) 송호성 준장이 맡았고, 총 11개 대대가 진압작전에 나서게 되었다. 반란군과 진압군 간의 첫 교전이 순천시 서면 학구리에서 벌어졌고, 초전에 승리한 진압군은 그대로 진격하여 23일에는 순천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란군의 주력은 순천에서 도주하였으며, 진압군에 대항한 것은 잔여 병력과 무장한 시민들이었다. 이후 진압군은 기세를 몰아 인근 광양과 보성까지 수복하였다. 10월 24일, 반란군 토벌사령부의 송호성 준장이 이끄는 여수 공략부대는 여수시 미평동 일대에서 반란군의 기습을 받고 잠시 후퇴하였다. 여수 공략전이 잠시 소강 상태에 빠진 사이 지창수가 이끄는 반란군은 백운산과 벌교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작전 속행을 요구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진압군은 10월 25일부터 재차 탈환 작전에 나섰다. 장갑차, 박격포의 지원을 받은 4개 대대 가량의 병력과 항공기, 경비정이 동원된 포위전이 시작되었다. 이때 신현준 중령이 이끄는 해군 함대도 출동했다. 결국 10월27일 진압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된 여수를 포기하고 지리산으로 입산한 반란군은 11월경부터 진압군과 간헐적인 교전을 벌이는 등 게릴라(빨치산)로서 활동하였다. 이에 국군은 이듬해까지 토벌 작전을 전개하여 여순사건의 주모자인 김지회, 홍순석, 지창수 등을 사살하였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게릴라 활동은 1950년 초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민간인들의 인명 피해도 끊이지 않았다. 1948년 10월 19일부터 27일까지 이어졌던 여순사건은 막대한 인명·재산 피해를 남겼다. 대략 2,000~5,00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됐고 재산 피해는 약 100억 원, 가옥 소실은 2천 호 가량으로 집계되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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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4)]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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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3)]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 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해병대 출신 최초로 국방장관을 지낸 고(故) 김성은 장군(1924년 3월14일~2007년 5월15일)은 19세의 나이로 만주 하얼빈 농대를 수료한 엘리트로 해방 이듬해인 1946년 4월 1일 해군병학교를 특임으로 졸업하고 해군 참위(소위)로 임관했다. 한편 해병대는 1948년 ‘여순 10.19사건’ 이후 상륙작전 부대의 필요성에 따라 창설됐다. 이는 여순사건 진압을 위해 해군 함대를 이끌고 출동한 신현준 중령의 “상륙군 없이 반란군을 완전 진압할 수 없다”는 보고를 받은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의 지시에 의해 이뤄졌다. 그리하여 해병대는 1949년 4월15일 진해에서 380명의 규모로 창설되었고 초대사령관에 신현준 대령이 임명되었다. 해병대사령부 창설당시 중령으로 진급한 김성은은 참모장으로 보임되어 해병대의 육성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 공비토벌 지휘관에 임명된 그는 지리산에 근거한 진주 일대의 공비를 소탕했고, 진주에서 제주도로 이동해 한라산 일대의 공비를 토벌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6.25 남침전쟁이 발발하자 김 중령은 500여명의 해병대원으로 구성된 ‘김성은 부대’를 지휘해 전쟁 초반 남원·함양·진주지구에서 지연작전을 전개했다. 특히 마산 진동리 전투와 통영 상륙작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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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3)]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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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2)]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⑩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장단·사천강지구 전투 62주년 전승 기념행사'와 '전승 기념비 제막식'이 2014년 11월13일 오전에 열렸다. 중공군과 맞서 싸워 혁혁한 전공을 세운 해병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한 행사는 국민의례, 헌화와 분향, 공정식 전 해병대 사령관의 회고사, 기념사, 전승 기념비 제막식 등 순으로 진행됐다. 전승 기념비에는 당시 전사한 해병대 776명의 이름이 새겨졌다. 비 중앙에 495일간의 치열한 전투 장면을 도드라지게 새긴 양각화, 좌우에 '상승해병'과 '무적해병' 휘호, 비문과 헌시 등이 조각됐다. 해병대 제1전투단 부단장으로 장단·사천강지구 전투에 참여한 공정식 전 사령관은 "현재 도라산 전망대 자리인 지하 참호에서 495일간 밤을 지새우며 중공군에 맞서 개성∼판문점∼서울축선의 수도권 서북방을 지켜냈다"고 회고하며 "오늘 행사로 776위의 해병 호국영령의 아픔이 깃든 이 자리가 해병 용사들의 성지로 기억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영주 해병대사령관은 기념사에서 "선배 해병들은 '서울 전방의 전선을 사수하라'는 국가의 명령에 서울의 관문을 굳건히 사수했다"며 "앞으로도 임전무퇴의 정신을 이어받아 수도권 서부와 서북 도서를 지켜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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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2)]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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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1)]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⑨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귀신 잡는 해병'신화를 만들며 통영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과 9.28서울 수복을 위한 연희고지와 104고지 전투에서도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김성은 대령(해사1기, 전 해병대사령관/국방부장관)이 1952년 10월 연대장으로 부임했다. 수도권 관문이자 당시 교착상태에 빠진 사천강-장단지구의 지휘관으로 발령받은 그는 함께 배치된 군목이었던 김덕순 목사와 함께 3일을 기도한 뒤, 중공군에 대한선제공격을 감행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적들이 예상하지 못한 기습적인 ‘귀신 잡는 해병’의 공격으로 중공군 2,700여 명을 전멸시켜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종국에는 서부전선에서의 수도권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며 현재의 군사분계선(MDL)으로 확정되게 만들었다. 이처럼 6.25 남침전쟁 전 기간에 걸쳐 명장으로서 명성을 드높인 김성은 장군은 부하에 대한 사랑도 특별했다. 연일 계속된 전투로 기진맥진한 부하들의 참호를 일일이 찾아가 독려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이해함으로써 부하들이 안도하고 전투에 임할 수 있게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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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1)]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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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0)]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⑧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끝없이 지루한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현재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근식 중위가 작전보좌관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연대본부는 특별히 포병대대에서 발전시킨 ‘Box Means’ 전법을 적용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일종의 진내사격으로 적을 방어진지 내부로 끌어들이고 우리 해병 전원이 진지 중앙에 파놓은 동굴 속으로 대피하면 포탄에 VT신관을 장착한 포병사격으로 공중에서 폭발시킨 포탄에 의해 진지내에 진입한 중공군을 살상하는 방법이었다. 각 대대장과 작전장교를 연대의 관측소(OP)가 있는도라산 155m고지에 집합시켜 이 전법에 대해 사전 회의를 했다. 특히 아군이 대피하는 시간과 적들이 노출되었을 때 포격하는 시간의 정확성이 매우 중요했다. 자칫 잘못하면 아군의 피해가 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중공군의 공격이 집중되던 전초진지 36m고지에 계획을 했고 어느날 자정무렵 공격해온 적들과 교전을 하던 해병들은 신호에 의해 일제히 대피동굴로 피신했다. 이어 VT신관을 장착한 105mm야포사격으로‘Box Means’ 전법이 시작됐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점검해보니 완전히 집단 도살을 당한 것처럼 진지 주변 일대에는 적들의 시체가 산재해 있었다.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고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그 다음날 인접 전초진지에서도 ‘Box Means’ 전법은 또 적중했다. 연대는 이틀 간 계속된 성과에 만족했고 우리 해병 장병들도 오랜만에 그들의 피로를 풀고 지루함도 달랠 수 있었다. 그후 일과 처럼 매일 공격해 오던 적들의 야간 공격이 뜸해졌다. 반면에 우리 해병연대가 이 작전 성공에 만족했고 기뻐하며 방심한 것이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다. 며칠후 중공군은 다시 전초진지로 야간공격을 했는데 종전의 방법대로 응전하다가 전원이 동굴로 대피했을 때 이번에는 포병사격이 지연되었다. 이때 적들은 미리 준비해 온 폭약장치통을 해병 대피호 속에 박고 폭파시켰다. '꽝'하는 소리와 함께 함몰된 대피호 속의 해병들은 모두 매몰됐고 중공군들은 포병사격 전에 신속히 철수해 버렸다. 그때 연대본부에서는 교신이 두절된 전초진지의 상황을 알 수 없었다. 이튿날 전초진지에 가보니 진지 중앙부가 함몰되어 있었고 폭파로 매몰돼 전사한해병들을 발굴할 때의 모습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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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50)]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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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9)]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 ⑦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이근식 중위가 연대 작전보좌관으로 보직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좌측 대대의 전초진지 87m고지 쟁탈전이 시작되어 그 치열함이 처절했고 몇주간의 전투 끝에 결국 중공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87m고지를 장악한 중공군은 좌일선 방어 임무를 교대한 5대대의 전초진지 50m고지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특히 야간 공격시 중공군중기관총의 예광탄이 파란 불빛을 내며 50m고지를 향해 날아가는 모습은 도깨비불처럼 보였다. 우리 기관총 예광탄은 붉은 빛을 내나 중공군은 파란색이라 금방 식별할 수 있었다. 사실 피아간 정면에넓은 개활지가 있어우리 진지 전방에서의 활동은 높은 감제고지에 있는 중공군에게 모두 관측되어 주간전투는 불가능한 상태였다. 따라서 야간공격을 시도했는데 천연장애물인 사천강으로 인해 좌측대대의 야간 공격은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또한 서해와 인접한 사천강은 조수간만의 시간이 일정하기 때문에 중공군들은 우리의 야간공격 예상시간에 대비할 수 있었다. 만약 전투가 계속되어 사천강 만조 전에 도강을 못하게 되면 공격중대는 휴대한 병기나 장구를 강변에 버리고 도강해야 됨으로 시간에 쫒기어 공격 성과가 기대에 못미쳤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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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9)]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 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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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8)]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 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수류탄 돌격 소대장’으로 불리며 도솔산 전투의 영웅이었던 이근식 중위는 장단·사천강지역에서 약4개월간의 5중대장 근무를 했다. 그런데, 치열한 접전을 치룬 우일선 대대와는 달리 그가 소속된 좌일선 2대대는 이렇다 할 결정적인 접전없이 보냈다. 다만 한미 보전협동 수색정찰 시와 중대본부에 적의 포탄 낙하로 인한 피해만 입은 상황이었다. 이후 그는 연대의 요청으로 작전보좌관 직책으로 전속되었다. 연대 작전보좌관은 당시의 모든 중대장들이 동경하고 희망하던 보직이었다. 그는 연대 작전보좌관직을 맡은 처음에는 작전계획서 작성 등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해병 소위로 임관 후 소총소대장, 중대장을 하면서 전투만 했으니 이러한 참모 직능에 대해서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근식 중위를 요청했던 부연대장 남상휘 중령(예비역 준장, 전 포항기지사령관)의 지도로 1개월 정도 지나자 점차 극복하여 참모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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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8)]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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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7)]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 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진행되면서 1953년 정전협정이 채결될 때까지 중부전선을 중심으로 휴전선 전면에서 피아간의 치열한 고지쟁탈전이 진행되었고, 이 기간중에 M36 잭슨 대전차 자주포를 편제한 육군의 독립 전차중대는 1951년 10월부터 전선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육군은 먼저 동해안 1군단에는 51, 56, 60 전차중대, 중부전선 2군단에는 52, 55, 58 전차중대, 그리고 금화, 철원, 연천지역의 육군 보병사단에는 53, 57, 59 전차중대를 배치하였다. 육군 입장에서 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전차부대는 1951년 10월 5일에 창설된 51, 52전차중대로 교육용 전차를 인수하고 전차병 교육과정을 거쳐 M36 잭슨 대전차 자주포를 편제했다. 게다가 육군의 전차중대는 해병대 보다도 8개월이나 먼저 전선에 투입되었다. 하지만해병대는 육군보다 2개월 빠른1951년 8월 25일에 전차중대를 창설했지만 전차와 전차병은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듬해 5월 4일 경기도 파주에서 해병 1연대 전차부대의 교육 수료식을 거행함과 동시에 미 해병대로부터 인수한 M4A3E8 셔먼 중형전차 20대로 완전한 전차중대를 편성하였다. 해병대 입장에서는M36 잭슨은 전차가 아닌 대전차 자주포이기 때문에 1951년 8월25일에 전차부대를 창설하여 1952년 5월4일에 M4A3E8 셔먼 중형전차를 편제하였고 이후 전선에 투입된 해병1연대의 전차중대가 국군 최초라고 주장한다. 육군이 경전차로 취급하였던 M36 잭슨의 경우는 전차를 지원하는 대전차 자주포였기에 북한군 전차와 실제적인 대전차 전투는 수행하지 못하였고 보병사단에 배속되어 고지 쟁탈전에서보병 화력지원 임무 위주로 운용되었다. 당시 미 육군의 전차부대가 서부지역에 집중 배치된 것과는 달리 주로 동부지역에 배치되었던 육군 전차부대의 주요 전투는 동해안 지역의 ‘월비산 및 351 고지 탈환전', 중동부 화천지역의 ‘689 고지, 오봉 고지, 삼각봉 고지, 지형능선 전투'와 중서부 금화 연천지역의 ‘노리, 베티, 쿠인, 백마 고지 전투' 등이 있다. 해병 1연대 전차중대는 1952년 5월 경기도 개풍군 장단면 수전포로 이동, 6월부터는 도라산 및 임진강의 ‘장단·사천강지구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 전차중대는 임진강 자유의 다리를 건너 155m고지(도라산 전망대)를 중심으로 사천강 주변의 전초진지를 포함한 장단반도의 넓은 개활지에서 보전협동 수색정찰과 화력지원을 담당했다. 특히 그해 7월에는 사천강을 도강하는 중공군 보병 1개 대대 병력을 괴멸시키는 대전과도 올렸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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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7)]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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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6)]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 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장단·사천강지구 전투’가 진행중이던 당시 중공군에겐 제공권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우리 L-19정찰기의 활동만 있었을 뿐이었는데, 어느날 중공군의 대공사격으로 사천강 주변 넓은 개활지에 격추되어 조종사가 적에게 체포되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러나 L-19정찰기의 추락지점이 우리 보다 적진지에서 더 가까웠고 적이 감제하는 넓은 개활지를 통과하는 불리점으로 접근이 불가능했다. 해병대 입장에서 만약 아군 전초진지 가까이에 떨어졌으면 만사를 제쳐놓고라도 그들을 구했을 것이다. 당시 상황을 지켜보던 5중대장 이근식 중위는 미 해병대 전차 20대, 한국 해병대 전차 5대와 함께 한미 보전협동작전으로 87m고지까지의 수색정찰을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투입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안타까웠다. 이때 장단반도의 광활한 평야에서 전투를 했던 해병대의 M4A3E8 셔먼 중형전차부대는 단순한 화력지원 위주로 운용했던 육군 보다 전차의 충격력을 과시하는 기동작전까지 전개한 최초의 전차부대였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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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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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6)]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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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5)]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 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중공군들은 우리 해병을 임진강 넘어로 퇴각시키고 광활한 평야인 장단반도를 확보함과 동시에 수도 서울을 압박하기 위해 집요한 공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우리의 무적해병 1연대는 임전무퇴의 정신과 필히 사수하겠다는 전투의지로 효과적인 방어를 통해 적들을 격퇴했다. 이때 우일선 대대인 3대대의 상황은 상기 배치도의 맨 위쪽에 위치한 전초진지 67m고지 공격에 실패한 중공군이 공격 방향을 36m, 33m, 31m고지로 전환해 공격하는 등의 치열한 전초진지 전투가 계속됐다. 특히 이 전초진지들은 대대의 주진지로부터 2km 이상 전방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중공군들은 그들이 원하는 시간과 방향으로 공격할 수 있어 전면방어가 가능하도록 진지와 교통호를 구축했으며 철조망을 4~5중으로 설치하고 주요 접근로에는 지뢰까지 매설하여 대비했다. 좌일선 대대인 2대대는 최초에는 전초진지인 87m고지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왜냐면 주진지로부터 4 km나 이격되어 전초진지로서의 역할을 기대할 수 없고 주변은 평야지대라 모든 활동이 적에게 노출되어 적의 포병사격에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주간의 수색정찰로 이 공간을 통제를 대신했다. 이는 우리 해병보다 중공군에게 더 근접되어 있는 전초진지인 87m고지앞에 흐르는 사천강을 포함해 피아간 주진지의 대치 거리가 5km 이상 되기 때문이었고, 따라서 87m고지에 병력이 배치되기 전까지 평온한 시간을 보내며 방어진지를 보강하고 있었다. 당시 수시로 미 해병대 전차 20대와 한국 해병대 전차 5대 그리고 ‘수류탄 돌격 소대장’으로 불리며 도솔산 전투의 영웅이었던 이근식 중위가 지휘하는 5중대가 한미 보전협동작전으로 87m고지까지의 수색정찰을 했다. 8월 초에는 수색작전을 마치고 복귀중 대대의 주진지 도로 앞에서 미 해병대의 선두 전차가 고장으로 정차하여 수리후 재출발할 시점에 적의 포탄이 떨어져 전차위에 탑승하고 있던 해병들이 전사했다. 그는 중대장 재직중 유일한 피해라며 안타까워 했다. 이때 가장 아쉽게 생각했던 점은 우리 해병이 미 해병 1사단의 작전통제를 받고 있어서 작전명령에 의해 공격은 못하고 방어만 했다는 것이다. 이근식 중위는 “싸움이란 서로 치고 박고해야 재미있고 신도 나는데 두들겨 맞고만 있으라니면 그게 어디 싸움인가?”라며 “이때의 우리 해병들이 이런꼴이니 지칠 수밖에 없었다”고 한탄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87m고지 쟁탈전이 시작되어 그 치열함이 처절했고 몇주간의 전투 끝에 결국 중공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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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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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45)] 해병대의 '장단·사천강지구 전승'으로 서부전선을 지켜... 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