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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군대를 말한다 기사

  • [김희철의 전쟁사(171)]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⑨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하와이의 YMCA에서 일하다가 1917년 National Guard 및 예비군 장교(ROTC)로 임관한 위트컴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1914-1918)하자 미 육군 16사단 32연대 보병 장교로 제2차 마론강 전투에 참전하면서 군인의 길을 걷게 됐다. 위트컴은 1941년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국의 참전이 결정되자 아이슬란드에 미군 장교 최초로 파견되어 모든 항만을 지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43년 대령으로 진급한 후 영국의 브리스톨 해협의 뉴포트(Newport)에 위치한 미 11항만단 지휘관으로 보직되어 강한 훈련 및 치밀한 준비과정을 거쳐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에 가장 치열했던 오마하 전투에서 5만여 명의 연합군 병력과 군사물자의 수송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상륙작전 성공 후에 노르망디 해변 및 주변 항만들의 운영 및 보급 작전을 지휘하였고, 이후 폐허가 된 프랑스 루앙(Rouen)시의 항만 운영 및 재건을 위한 임무를 추가로 수행하여 지역의 안정화에 기여했다. 이 작전의 공로로 위트컴은 훗날 6·25남침전쟁에서 유엔군 사령관으로 한국군 재건에 기여했던 전쟁영웅 밴플리트 장군과 함께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또한 위트컴이 대학시절에 선교사로 활동할 꿈을 꾸었던 필리핀에서의 미군 상륙작전이 1945년에 있었는데, 이때 그는 필리핀 마닐라 항만의 지휘관으로 보직되어 17만 명의 대규모 병력이 동원된 수송, 군수 업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준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종전 후 전역하여 사회활동을 했으나 냉전시대였던 1950년 현역으로 복귀하여 소련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영하 60도까지 떨어지는 혹한의 추위속에서 그린랜드 공군기지 건설 등을 위한 수송 및 보급작전을 지휘하여 당시 ’미군 최고 군수전문가‘의 위치에 올랐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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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26
  • [김희철의 전쟁사(170)]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⑧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위트컴 장군은 1894년 미국 중부 캔자스주 토피카(Topeka)에서 주대법관을 역임한 아버지 조지 허버트 위트컴과 당시 남자대학에서 최초로 강의한 여성 법률가이며 교수인 어머니 제시 위트컴 사이의 5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친가는 물론 외가가 모두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집안에서 성장한 위트컴은 전통적인 청교도 가문의 엘리트 교육을 바탕으로 기독교적 정의와 인간에 대한 기본 사랑을 터득하게 된다. 캔자스주 토피카의 워시본(Washbon)대학 재학시에는 대학 편집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각종 토론회에서 우수 토론자로 선정되었고 미식축구 선수로도 맹활약을 했다. 또한 아펜잴러와 언더우드가 활동했던 SVM(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 학생자원선교활동) 멤버로 필리핀 선교사의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위트컴은 대학 졸업 후 다양한 회사에서 간부로 근무하였고, 지역사회 활동에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기업 및 정부기관의 예산, 조직, 기술 등에 관한 많은 지식과 경험을 습득할 수 있었다. Southwestern Telephone Company 등 여러 통신회사에서 세일즈 매니저, 지역 책임자로 근무했고, 보스턴 시정부의 업무 개선을 위해 다양한 지원활동도 했다. 또한 3백만 불 이상의 실업자 구호 펀드를 모금했으며, 시정부의 자문위원회에 참여하여 정책에 대한 조언을 통해 100만 불 이상의 예산을 절감하는 역량을 발휘했다. 당시 위트컴은 공화당의 매사추세츠 주지사 선거에 출마할 정도로 상당한 지명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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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22
  • [김희철의 전쟁사(169)]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정전협정 체결로 치열한 전투는 일단 마무리됐지만 제 2군수사령부 사령관 위트컴 장군은 책상 위에 있는 서류들을 결재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특히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유엔군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전했던 미군들의 복귀와 한국군 재건을 위해 한국군에게 인계할 장비와 화기 및 추가적인 지원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쟁복구 사업을 담당하는 ‘AFAK(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 미군대한원조)’ 프로그램 업무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 복구 및 한국군 전력증강을 위해 연일 계속된 후속조치로 피로한 상태였던 어느날 밤에 위트컴 장군 방의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1953년 11월27일 밤 8시30분경에 부산 영주동 판자촌에서 시작된 불은 갑자기 불어온 강풍으로 지역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며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번져 동광동을 지나 중앙동 부산역까지 번지며 일대가 거의 전소되는 비극이 일어났다는 보고였다. 불길은 이튿날 새벽 6시경 잡혔으나, 29명의 사상자와 6천여 세대 3만 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주택 3,132채 및 일제강점기 조선과 일본을 잇는 관문 역할을 했던 옛 경부선 부산역사와 부산우체국이 전소돼 버렸다. 게다가 당시 광활한 지역의 일제 건축물과 6·25남침전쟁을 지원했던 미군 막사 같은 주요 건축물이 모두 전소되며 큰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에 위트컴 장군은 사무실에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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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20
  • [김희철의 전쟁사(168)]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현리전투에서 국군 2군단이 대패하자 밴플리트가 국군 전투력 강화를 위해 ‘야전훈련사령부(FTC)’ 운용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이에 힘입어 양양에서는 총 12개 부대가 창설됐다. 그 중 8·12·15사단은 아이젠하워에게 한국군 20개 사단 증강계획을 브리핑하기 이전에 창설됐다. 이후 20·21·22·25사단이 각각 창설됐으며 정전협정 이후에도 27사단(1953년 9월) 등의 부대들이 양양 송암리 등지에서 창설됐다. 결과적으로 양양을 비롯한 각지에서의 한국군 재건은 밴플리트 장군과 그가 만든 ‘야전훈련사령부(FTC)’에서 시작되었으며, 이에 따라 밴플리트 장군은 일명 '한국군의 아버지'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전투력 강화는 ‘야전훈련사령부(FTC)’에서의 교육훈련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전력을 증강할 수 있는 장비와 화기가 갖춰져야 했다. 6·25남침전쟁 막바지인 1953년 미군 제 2군수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한 위트컴 장군은 마치 한국군 재건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밴플리트 장군을 내조하듯이 한국군 전력증강과 유엔군의 군수물자 확보및 정확한 수송을 위해 많은 역할을 했다. 3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은 한국군을 위해 탄약 70만 발, 소화기 50만 정, 화포 1500여 문, 차량 2만여 대 등 200만t 규모의 장비와 군수물자를 최전방으로 실어 날랐고, 후방지역 치안 유지는 물론 전쟁포로와 피난민 관리 임무도 수행했다. 이로써 6·25남침전쟁 중반에 10개 사단 규모였던 한국군이 1953년 정전협정 무렵에는 20개 사단 56만 8994명의 대군으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대군이 된 것은 일명 '한국군의 아버지'라 불리던 밴플리트 장군의 ‘야전훈련사령부(FTC)’ 운용 등의 한국군 재건 노력부터였지만, 숨은 공로자였던 제 2군수사령부 사령관 위트컴 장군의 한국군 전력증강에 매진한 공도 컸던 것으로 평가됐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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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18
  • [김희철의 전쟁사(167)]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25남침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던 1952년 유혈만을 강요하는 진지 고착전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유엔군의 지원없이 우리 자체의 병력과 화력만으로는 155마일에 달하는 전선을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이자 유엔군사령관이었던 밴플리트는 “미군이 장기적으로 한국에 머무를 수는 없으니 앞으로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해 독자적인 방어에 나서야 할 것”이라며 한국군 잔력증강의 필요성을 최초로 언급했다. 1952년 말, 밴플리트는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에게 “곧 미국의 새 대통령 당선자이자 자신과 육사 동기였던 아이젠하워가 한국을 방문할 수 있으니 그 때 당신이 한국군 전력증강의 필요성과 세부 계획을 브리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당시 미 8군의 게스트하우스였던 지금의 서울 필동 ‘한국의 집’을 백선엽 장군에게 2주 동안 제공하면서 라이언 미 군사고문단장 등 자신의 참모들과 함께 한국군 전력증강의 밑그림을 작성할 수 있도록 지원도 했다. 미국 대통령 선거 경선 때 ‘6·25남침전쟁의 휴전 필요성’을 선거공약으로 강조하고 다녔던 아이젠하워가 그해 12월3일 한국을 방문하자 밴플리트가 계획한 대로 백선엽 장군의 브리핑이 있었다. 백 장군은 “현재 한국군은 10개 사단으로 이뤄져 있는데, 추가로 화력과 장비를 제대로 갖춘 한국군 20개 사단으로 증강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등이 맡고 있는 지역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보고 말미에 “미군 1개 사단이 주둔하는 비용으로 한국군 2~3개 사단을 창설할 수 있으며 미국이 협조하면 2년 안에 증강을 완료할 수 있다”고 한 마디를 더 보태며 강하게 설득했다. 브리핑을 경청한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는 “원칙적으로는 동의한다”며 표정이 좋아졌다. 한국에서의 전쟁을 하루빨리 끝내고 미군을 철수시키고자 했던 그가 한국군을 증강해 휴전선의 대부분을 한국군에게 맡기고자 하는 계획 자체에 반대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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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2-04-14
  • [김희철의 전쟁사(166)]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공산학정을 탈출하여 자유로운 생활을 찾기 위해 고향과 가족, 친척들을 북에 둔 채 대한민국으로 월남한 피난민들이 대부분 모여 있던 부산에서 1953년 11월27일 ‘부산역전 대화재’가 발생했다. 그때, 군법을 어기고 군수창고를 개방해 그들에게 천막과 구호물자를 꺼내어 피난민들이 포함된 이재민들을 도왔던 미 2군수사령관 위트컴 장군은 1894년 미국 캔자스에서 태어났다. 위트컴 장군은 1916년 ROTC로 군생활을 시작해 제1·2차 세계대전과 6·25남침전쟁 등 수많은 전쟁에 참전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 가장 치열하던 ‘오마하 해안 전투’에서 5만여 명의 연합군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을 지휘해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을 받았다. 1945년에는 일본이 점령 중이던 필리핀을 탈환하기 위한 상륙작전에서 17만여 명의 대규모 병력과 군수물자를 섬 요충지로 오차 없이 정확하게 수송해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다. 냉전 시절 미 공군이 주둔하며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서유럽과 미국 본토를 보호한 아이슬란드 케플라비크 기지도 그의 손을 거쳤다. 1941년 위트컴 장군이 기지를 건설할 때는 독일 해군의 이동을 감시하는 전초기지였다. 1950~51년에는 영하 60도인 그린란드에 공군기지를 건설하고자 세계 각국의 병력과 장비, 군수물자 수송을 지휘했는데, 당시 투입된 인력과 장비는 파나마 운하 건설 때와 비슷하다 하니 군수전문가로서 그의 면모와 능력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군사작전에 필요한 병력과 군수물자를 충원하고, 보급 지원을 하는 병참(兵站)은 전쟁 성패와 직결되는 군사전략 수준의 역할이다. 중국 한(漢)나라 유방이 항우와 전쟁에서 승리한 뒤 전투를 승리로 이끈 ‘한신’보다 후방 보급을 맡은 ‘소하’의 공을 으뜸으로 친 것도 군수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위트컴 장군 역시 유방의 소하처럼 부임지마다 그 소임을 철저히 완수해 승리의 발판을 만들었다.‘군수분야의 영웅’ 위트컴 장군은 6·25남침전쟁 막바지인 1953년 미군 제 2군수사령부 사령관으로 한국에 부임했다. 제 2군수사령부는 개전 초기 막대한 손실을 입은 한국군을 위해 탄약 70만 발, 소화기 50만 정, 화포 1500여 문, 차량 2만여 대 등 200만t 규모의 장비와 군수물자를 최전방으로 실어 날랐고, 후방지역 치안 유지는 물론 전쟁포로와 피난민의 관리 임무도 수행했다. 유엔군의 군수물자 확보와 정확한 수송, 국군 전력 증강은 그의 몫이었다. 개전 초기 9만6112명이던 한국군 병력이 1953년 7월 정전협정 당시 20개 사단 56만8994명의 대군이 된 것도 한국군 전력 증강에 매진한 위트컴 장군의 공이 컸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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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2-04-11
  • [김희철의 전쟁사(165)]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두산백과 자료에 의하면 6 ·25남침전쟁의 3년간에 걸친 동족상잔의 전화(戰禍)는 남북한을 막론하고 전 국토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결과를 낳았다. 전투병력의 손실만 해도 유엔군이 한국군을 포함하여 18만 명이 생명을 잃었고, 공산군측에서는 북한군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또한 전쟁기간 중 대한민국의 경우 99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남한지역을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동안 인민재판 등의 무자비한 방법에 의하여 '반동계급'으로 몰려 처형당한 억울한 희생이었다. 또 전쟁기간 중 북한은 8만 5000명에 달하는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사들을 대한민국으로부터 납치해 갔다. 이 가운데에는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과 저명한 학자·종교인·공무원 들이 상당수 포함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북한지역으로부터는 300만 명 이상의 주민들이 공산학정을 탈출하여 자유로운 생활을 찾기 위해 고향과 가족, 친척들을 북에 둔 채 남한으로 월남하여 대한민국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1950년 당시 북한지역 인구는 1200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는데, 그 가운데 1/4 정도가 북한을 떠나 월남하였다. 이로인해 1000만 이산가족의 아픔이 시작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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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08
  • [김희철의 전쟁사(164)]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북한은 임인년 새해 들어 평양 순안비행장 등에서 미사일 발사 무력 시위를 네 차례 감행하면서 극초음속 미사일 발사에 성공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핵실험 및 ICBM발사를 재개할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이 북한의 최근 미사일 발사와 관련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 소집을 요청했고, AFP통신은 외교 소식통을 인용해 알바니아, 영국, 프랑스, 아일랜드, 멕시코가 미국의 안보리 회의 요청에 동참했다고 보도했다.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주유엔 미국대사도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북한에 대한 압력을 계속 높여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미국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미 국무부 대변인 네드 프라이스은 1월11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여러 결의안을 위반하는 것이며, 북한의 이웃 국가들과 더 넓은 국제 사회에 위협이 될 것입니다"라고 발표했고, 존 커비 국방부 대변인 역시도 현지시간 18일 언론 브리핑에서 "북한의 잇단 미사일 발사 시험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이 위협을 평가절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편 우리 합참 발표에 따르면 미사일은 이날 8시50분부터 4분 간격으로 발사됐고 미사일의 최대 속도는 마하5 정도였다. 합참 관계자는 “북한군은 현재 동계훈련 중”이라며 “동해상 표적을 선정해 정밀도를 향상하고 연속 발사 성능 점검 등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발사 표적에 대해선 지난 14일 북한이 열차형 미사일로 명중시켰다며 사진까지 공개했던 함경북도 길주군 무수단리 앞바다의 무인도 ‘알섬’이 거론된다. 당시 북한은 ‘북한판 이스칸데르’로 불리는 KN-23을 열차형 발사대에서 쐈다. 특히 순안비행장은 2017년 8월 북한이 화성-12형 중장거리탄도미사일(IRBM)을 발사했던 곳이다. 당시 이 미사일은 최대 고도 550㎞로 2700㎞ 정도를 비행하며 일본 홋카이도 상공을 통과해 북태평양 공해상에 도달했다. 개활지인 순안비행장은 한·미의 탐지가 상대적으로 용이하다는 점에서 2017년과 마찬가지로 대외 시위용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제버릇 남 못준다”는 우리 속담처럼 70년전 민족상잔의 6·25남침전쟁을 일으켰던 북한이 또 전쟁을 감행할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다. 아무런 대응도 없이 강건너 불구경하듯 방관하고 있는 현정부가 심히 걱정된다. 군사 전문가의 분석에 따르면 17일 북한이 쏜 단거리 탄도미사일 두 발은 약 42㎞ 고도로 380㎞를 날아가 동해상 표적을 겨냥했는데 만일 남쪽으로 발사했다면 육·해·공군 본부가 있는 계룡대까지 닿는 거리이기 때문이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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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06
  • [김희철의 전쟁사(163)]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약 70여년 전이며 휴전협정 체결로 6·25남침전쟁이 끝난 그해인 1953년 11월27일 부산역이 있던 중구일대에서도 대형 화재 사건이 발생했다 휴전을 맞아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서울로 정부가 옮겨 가긴 했지만, 여전히 부산 일대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전쟁 피난민들로 가득 찬 상태였다. 화재 사건의 시발점이 된 중구 영주동 일대에는 피난민들이 만든 임시 천막으로 가득 차 있었고, 늦가을 건조한 날씨에 불이 딱 붙기 좋은 목조 건물이 밀집된 공간이었다. 처음에는 판자촌에서 일어난 작은 화재였는데 갑자기 불어온 강풍으로 지역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며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번져 당시 부산의 도심이었던 부산역~ 중앙동~ 동광동-영주동~대청동입구 일대가 거의 전소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불길은 이튿날 새벽 6시경 잡혔으나, 29명의 사상자와 6천여 세대 3만 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주택 3,132채 및 일제강점기 조선과 일본을 잇는 관문 역할을 했던 옛 경부선 부산역사와 부산우체국이 전소돼 버렸다. 그 화재는 ‘부산역전 대화재’로 기록되었고 전쟁의 악몽을 채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설상가상 부산 피난민들을 다시금 절망의 늪에 빠뜨린 대참사였다. 대참사 이후 부산역은 1965년까지 10년 이상 가건물을 사용했으며, 부산역 신축을 위해 1965년 7월 23일 초량역의 영업을 정지하고 부산진역으로 통합하여 운영했다. 1969년 초량에 부산역이 신축 완공됨과 동시에 명실공히 부산의 종점 부산역으로서의 업무를 다시 수행하기 시작했는데, 신축된 현 부산역은 초량역 위치가 아니고 3부두 옆의 물웅덩이 해변을 매립한 곳이다. 이 화재에 앞서 1953년 1월30일에도 국제시장 대화재가 발생하여 국제시장이 전소되고 부평동, 신창동, 광복동 일부가 피해를 입는 큰 참화가 있었다. 이 국제시장 대화재와 부산역전 대화재를 같은 화재로 착각하여 국제시장, 남포동, 광복동까지 부산역전 대화재로 소실된 걸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게다가 1954년 12월 용두산공원 판자촌에도 화재가 발생하여 3명이 사망하고 192명이 부상 당하는 등 많은 판자촌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고 궁중 유물을 임시 보관했던 국악원 창고가 전소돼 상당수의 유물이 타 버렸다. 이러한 사유로 그 당시에 사람들이 "부산이 아니고 불산이라고 불러야겠다"고 우스게 소리로 얘기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부산역전 대화재’가 발생했을 때, 벽안의 미 2군수사령관 위트컴 장군은 군법을 어기면서 군수창고를 개방해 천막과 구호물자를 꺼내어 이재민들을 도왔던 역사적 사실이 감동을 주고 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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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2-04-04
  • [김희철의 전쟁사(162)] 누란의 위기에서 국가를 구한 ‘귀신 잡는 해병대’⑩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이 작전에 종군했던 외신기자들은 우리 해병대가 이러한 기습적인 상륙작전으로 우세한 적군을 공격해서 적의 점령지를 탈환한 전례는 일찍이 없었다며 통영상륙작전의 대승을 높이 평가하는 특필보도로 저마다 최대의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1950년 8월23일 통영상륙작전에 대한 취재차 원문고개로 김성은 부대를 방문한 미국 '뉴욕해럴드 트리븐' 신문의 기자 '마가렛 히킨스'는 전광석화 같은 김성은 장군의 묘수에 경탄을 금치 못하며 “당신들은 정말 귀신도 잡을 만큼 놀라운 일을 해냈소”라는 말로 감동을 표현했다. 그녀는 6·25 남침전쟁 발발 후 후퇴를 거듭하며 고전하는 상황속에서 오히려 기습적인 공격을 시도하여 승리한 김성은 부대의 작전에 찬사를 보내며 ‘귀신이라도 잡겠다(The might capture even the Devil)’라는 기사 제목의 승전보를 전세계에 보도했다. 이렇게 통영상륙작전에서 한국해병의 감투 정신을 두고 "귀신이라도 잡겠다"는 기사를 널리 보도함으로써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말의 유래가 되는 씨를 뿌려놓은 계기가 되었다. 통영 원문고개 생활공원에 세워진 전적비와 통영상륙작전 기념관에서는 매년 기념식과 추모식이 열리며, 이를 통해'귀신 잡는 해병대' 명성을 얻은 김성은 부대의 맹활약상을 기리고 있다.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신 김성은 장군을 비롯한 참전 선배들의 충정에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 또한 현재 자유민주주의 행복을 누리는 우리들은 그들을 기념하고 추모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이다. 따라서 나라를 위해 순국하신 전쟁 영웅분들의 명예 고양은 물론 국민들의 나라사랑 의식을 고취하는 이같은 행사가 이 곳 통영상륙작전 전적지 뿐만 아니라 타 격전지에서도 지속적으로 추진되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다.
    • 소통시대
    • 군대를 말한다
    2022-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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