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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군대를 말한다 기사

  • [김희철의 전쟁사(174)]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⑫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 부산에 위치한 미2군수사령부의 사령관 위트컴 장군은 11월27일 ‘부산역전 대화재’가 발생하자 화마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정부도 할 수 없는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렸다. 대참사로 인해 부산 전체를 절망의 늪에 빠뜨린 패닉 발생으로 절체절명(絕體絕命)의 위기를 맞은 그는 자연스럽게 제2차 세계대전시 영국 애버데어에서 보여준 대민관계와 프랑스 르앙을 재건한 경험이 되살아났다. 또한 유년시절 청교도 가문의 엘리트 교육을 받은 기독교적 정의와 인간에 대한 기본 사랑을 실천할 기회라는 마음이 치솟아 올랐다. 위트컴 장군은 민간에 사용할 수 없는 전투용 군수물자를 직권으로 풀어 추위에 갈 곳이 없는 이재민들에게 천막촌을 건립해 주고 먹을 것을 제공해 주며 즉각적인 구호활동을 개시했다. 그는 매일 2만 3100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과 텐트, 의류, 침구류 등 군수물자를 긴급히 지원했고 화재 다음 날인 11월 28일엔 즉시 공병부대를 투입하여 화마가 휩쓸고 간 피해지역을 정리했다. 이어 12월 9일에 첫 번째 텐트촌을, 12월 10일에는 두 번째 텐트촌을 제공하겠다고 계획을 밝히면서, 일반 장병들에게는 4만명이 기거할 수 있는 임시 천막촌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위트컴은 “이재민 중 누구라도 굶거나, 잠잘 곳이 없거나, 진료받지 못하는 경우가 없을 것이다”라고 확고한 의지를 표명했다. 장군의 대응방식은 걱정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걱정은 뒤로 하고, 빠르게 해결책을 찾아서 망설임 없이 추진하는 것이었다. 또한 일시적이 아닌 장기적 관점에서 본질적 문제와 해결책을 찾았다. 즉, 화재로 인한 재해의 단순한 복구 수준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거주할 가옥의 건설, 도시 기반시설의 구축, 의료환경 개선, 학교 및 전쟁 고아 지원 등 총체적으로 도시를 재건한다는 차원에서 접근했다. 이를 위해 위트컴 장군은 자신의 모든 노하우와 경험을 결집하여 해결책을 구상했다. 이것이 바로 AFAK(미군대한원조, 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 프로젝트를 활용한 재건사업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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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04
  • [김희철의 전쟁사(173)]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⑪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위트컴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3년 대령으로 진급하여 영국의 브리스톨 해협에 위치한 11항만단 지휘관으로 보직됐고, 치밀한 준비과정을 거쳐 노르망디 상륙작전 지원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때 지역주민들에 대한 예의, 군인으로서의 행동 규범, 제복 착용에 이르기까지 모범적 모습을 보이는 11항만단 부대원들에 대해 애버데어(Aberdare) 시민들은 감동했다. 특히 그들의 전통을 존중하며 주민들이 어떻게 차를 만드는지를 배우는 등 주민들과의 친화 과정은 대민관계의 전형적 모델이었다. 이렇게 사람이 중심인 존중의 리더십은 추후 한국 국민들과 문화를 존중하면서 우호적 관계를 형성하게 만든 결과로 당시의 브리스톨 해협 애버데어 시민들이 스스로 11항만단을 ‘The Aberdare Port’라고 부르며 자긍심을 가질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또한 11항만단은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 가장 치열했던 프랑스 오마하(Omaha) 해변 전투에서 5만여명의 연합군 병력과 군사물자의 수송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했다. 이후 기능이 마비된 오마하 해변과 주변 항만들을 재건하면서 정상적으로 항만을 운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임무였다. 그러나 그는 상륙 이후 초기 90일 동안 총 926,689톤, 일일 10,296톤이라는 엄청난 물량을 처리하는 초인적인 능력을 보여주었다. 위트컴은 파렛트, 크레인, 트럭, 철도, 화물의 적하역, 장비의 엔진 종류, 나라별 처리 방식의 차이점, 해변의 조류 등 엄청난 수준의 전문성에 바탕을 둔 항만 운영에 대해 누구보다도 심도 있는 전문적 지식을 갖고 있었기에 상륙 이후 지속적인 군수지원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임무들을 성공적으로 훌륭하게 수행하자 독일군에 의해 폐허가 된 프랑스 르앙(Rouen)을 재건하라는 추가적인 임무가 부여되었다. 르앙은 노르망디의 중심 도시로서 센 강을 관통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내륙의 항만 도시이다. 유서 깊은 르앙 성당이 위치하고 있고, 역사적으로는 자유의 여신상이 조립 및 분해된 곳이며, 잔다르크가 화형 당한 곳이기도 하다. 위트컴은 임무를 부여받은 즉시 끊긴 다리들을 건설하고 마비된 항만들의 기능을 회복하는 재건 작전을 수행했다. 위트컴의 지휘 아래 수개월간의 집중적인 복구 노력을 통해 다시 큰 선박들이 이동하게 됐고, 도시기능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위트컴이 영국 애버데어에서 보여준 대민관계와 프랑스 르앙을 재건한 경험, 그리고 그의 리더십은 차후 부산의 재건을 위한 값진 토대가 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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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02
  • [김희철의 전쟁사(172)]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⑩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소련의 남하를 막기 위해 그린랜드 공군기지 건설을 지휘했던 위트컴 장군은 1953년 미 제2군수사령관으로 부임했으나 11월 27일 ‘부산역전 대화재’가 발생하는 위기를 맞게 된다. 해방 직후 30여만 명이었던 부산 인구는 전쟁이 끝나자 순식간에 백만이 되고 도시기능은 마비되었으며 공동묘지 위에까지 판자 조각, 양철 등으로 비만 겨우 가릴 수 있는 판자촌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전쟁을 치르면서 남한 인구 약 2천만 명 중 천만이 빈민이요 대부분이 실업자였다. 판잣집이 밀집해 있다 보니 조그만 부주의가 대형화재로 이어져 부산은 그때 ‘불산’이라고도 불렀다. 11월 27일 오후 8시 20분경 당시 부산시 중구 영주동 17통16반 허도영(許道榮)의 방에서 난롯불 부주의로 발생한 화염은 풍속 11.8m의 강풍으로 순식간에 부산역 대화재로 확대되었다. 14시간에 걸친 화마는 부산역을 중심으로 한 번화가의 주요 건물 및 민가 등 약 1,250호를 태우고 다음 날 오전 10시 20분에 진화되었으나 같은해 1월 30일 국제시장 화재의 12.6배가 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광활한 지역의 일제 건축물과 미군 막사 같은 주요 건축물이 모두 전소되었으며 또한 민간주택 3,132채가 완전히 소실되었다. 29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데다, 6,000여 세대 약 3만여 명의 이재민은 11월말 삭풍이 몰아치는 혹한 속에 노천에서 떨고 있었다. 이 현장을 목격한 위트컴 장군은 대학 시절 선교사가 꿈이었던 것처럼 기독교적 정의와 인간에 대한 기본 사랑을 실천할 기회라는 마음을 다지게 된다. 이는 어린 시절 도전과 해결이라는 어머니의 가정교육이 그 뿌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이재민들을 위한 즉각적인 구호활동을 개시하였다. 매일 23,100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과 텐트, 의류, 침구류 등 군수물자를 긴급히 지원하였다. 화재 다음 날인 11월 28일 장군은 즉시 공병부대를 투입하여 지역을 정리하였고, 일반 장병들에게는 40,000명이 기거할 수 있는 임시 천막촌을 준비하도록 했다. 이렇게 조건반사적인 조치를 할 수 있는 전문성은 제2차 세계대전시 아이슬란드와 영국에서의 항만 운영과 소련의 남하를 막기 위해 그린랜드 공군기지 건설 등의 지휘 경험이 뒷받침되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시에 위트컴 장군이 지휘했던 11항만단은 독일군에 의해 폐허가 된 프랑스의 루앙(Rouen)시를 재건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수개월 동안 집중적인 복구 노력을 통해 큰 선박들이 이동하며 도시기능이 살아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위트컴의 경험들은 이번 부산역 대화재로 피해가 확대된 부산의 재건을 위한 값진 토대 및 추진 동력이 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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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28
  • [김희철의 전쟁사(171)]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⑨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하와이의 YMCA에서 일하다가 1917년 National Guard 및 예비군 장교(ROTC)로 임관한 위트컴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1914-1918)하자 미 육군 16사단 32연대 보병 장교로 제2차 마론강 전투에 참전하면서 군인의 길을 걷게 됐다. 위트컴은 1941년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국의 참전이 결정되자 아이슬란드에 미군 장교 최초로 파견되어 모든 항만을 지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43년 대령으로 진급한 후 영국의 브리스톨 해협의 뉴포트(Newport)에 위치한 미 11항만단 지휘관으로 보직되어 강한 훈련 및 치밀한 준비과정을 거쳐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에 가장 치열했던 오마하 전투에서 5만여 명의 연합군 병력과 군사물자의 수송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상륙작전 성공 후에 노르망디 해변 및 주변 항만들의 운영 및 보급 작전을 지휘하였고, 이후 폐허가 된 프랑스 루앙(Rouen)시의 항만 운영 및 재건을 위한 임무를 추가로 수행하여 지역의 안정화에 기여했다. 이 작전의 공로로 위트컴은 훗날 6·25남침전쟁에서 유엔군 사령관으로 한국군 재건에 기여했던 전쟁영웅 밴플리트 장군과 함께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또한 위트컴이 대학시절에 선교사로 활동할 꿈을 꾸었던 필리핀에서의 미군 상륙작전이 1945년에 있었는데, 이때 그는 필리핀 마닐라 항만의 지휘관으로 보직되어 17만 명의 대규모 병력이 동원된 수송, 군수 업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준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종전 후 전역하여 사회활동을 했으나 냉전시대였던 1950년 현역으로 복귀하여 소련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영하 60도까지 떨어지는 혹한의 추위속에서 그린랜드 공군기지 건설 등을 위한 수송 및 보급작전을 지휘하여 당시 ’미군 최고 군수전문가‘의 위치에 올랐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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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26
  • [김희철의 전쟁사(170)]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⑧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위트컴 장군은 1894년 미국 중부 캔자스주 토피카(Topeka)에서 주대법관을 역임한 아버지 조지 허버트 위트컴과 당시 남자대학에서 최초로 강의한 여성 법률가이며 교수인 어머니 제시 위트컴 사이의 5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친가는 물론 외가가 모두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집안에서 성장한 위트컴은 전통적인 청교도 가문의 엘리트 교육을 바탕으로 기독교적 정의와 인간에 대한 기본 사랑을 터득하게 된다. 캔자스주 토피카의 워시본(Washbon)대학 재학시에는 대학 편집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각종 토론회에서 우수 토론자로 선정되었고 미식축구 선수로도 맹활약을 했다. 또한 아펜잴러와 언더우드가 활동했던 SVM(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 학생자원선교활동) 멤버로 필리핀 선교사의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위트컴은 대학 졸업 후 다양한 회사에서 간부로 근무하였고, 지역사회 활동에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기업 및 정부기관의 예산, 조직, 기술 등에 관한 많은 지식과 경험을 습득할 수 있었다. Southwestern Telephone Company 등 여러 통신회사에서 세일즈 매니저, 지역 책임자로 근무했고, 보스턴 시정부의 업무 개선을 위해 다양한 지원활동도 했다. 또한 3백만 불 이상의 실업자 구호 펀드를 모금했으며, 시정부의 자문위원회에 참여하여 정책에 대한 조언을 통해 100만 불 이상의 예산을 절감하는 역량을 발휘했다. 당시 위트컴은 공화당의 매사추세츠 주지사 선거에 출마할 정도로 상당한 지명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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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2-04-22
  • [김희철의 전쟁사(169)]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정전협정 체결로 치열한 전투는 일단 마무리됐지만 제 2군수사령부 사령관 위트컴 장군은 책상 위에 있는 서류들을 결재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특히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유엔군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전했던 미군들의 복귀와 한국군 재건을 위해 한국군에게 인계할 장비와 화기 및 추가적인 지원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전쟁복구 사업을 담당하는 ‘AFAK(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 미군대한원조)’ 프로그램 업무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 복구 및 한국군 전력증강을 위해 연일 계속된 후속조치로 피로한 상태였던 어느날 밤에 위트컴 장군 방의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1953년 11월27일 밤 8시30분경에 부산 영주동 판자촌에서 시작된 불은 갑자기 불어온 강풍으로 지역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며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번져 동광동을 지나 중앙동 부산역까지 번지며 일대가 거의 전소되는 비극이 일어났다는 보고였다. 불길은 이튿날 새벽 6시경 잡혔으나, 29명의 사상자와 6천여 세대 3만 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주택 3,132채 및 일제강점기 조선과 일본을 잇는 관문 역할을 했던 옛 경부선 부산역사와 부산우체국이 전소돼 버렸다. 게다가 당시 광활한 지역의 일제 건축물과 6·25남침전쟁을 지원했던 미군 막사 같은 주요 건축물이 모두 전소되며 큰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에 위트컴 장군은 사무실에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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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20
  • [김희철의 전쟁사(168)]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현리전투에서 국군 2군단이 대패하자 밴플리트가 국군 전투력 강화를 위해 ‘야전훈련사령부(FTC)’ 운용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이에 힘입어 양양에서는 총 12개 부대가 창설됐다. 그 중 8·12·15사단은 아이젠하워에게 한국군 20개 사단 증강계획을 브리핑하기 이전에 창설됐다. 이후 20·21·22·25사단이 각각 창설됐으며 정전협정 이후에도 27사단(1953년 9월) 등의 부대들이 양양 송암리 등지에서 창설됐다. 결과적으로 양양을 비롯한 각지에서의 한국군 재건은 밴플리트 장군과 그가 만든 ‘야전훈련사령부(FTC)’에서 시작되었으며, 이에 따라 밴플리트 장군은 일명 '한국군의 아버지'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전투력 강화는 ‘야전훈련사령부(FTC)’에서의 교육훈련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전력을 증강할 수 있는 장비와 화기가 갖춰져야 했다. 6·25남침전쟁 막바지인 1953년 미군 제 2군수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한 위트컴 장군은 마치 한국군 재건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밴플리트 장군을 내조하듯이 한국군 전력증강과 유엔군의 군수물자 확보및 정확한 수송을 위해 많은 역할을 했다. 3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은 한국군을 위해 탄약 70만 발, 소화기 50만 정, 화포 1500여 문, 차량 2만여 대 등 200만t 규모의 장비와 군수물자를 최전방으로 실어 날랐고, 후방지역 치안 유지는 물론 전쟁포로와 피난민 관리 임무도 수행했다. 이로써 6·25남침전쟁 중반에 10개 사단 규모였던 한국군이 1953년 정전협정 무렵에는 20개 사단 56만 8994명의 대군으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대군이 된 것은 일명 '한국군의 아버지'라 불리던 밴플리트 장군의 ‘야전훈련사령부(FTC)’ 운용 등의 한국군 재건 노력부터였지만, 숨은 공로자였던 제 2군수사령부 사령관 위트컴 장군의 한국군 전력증강에 매진한 공도 컸던 것으로 평가됐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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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18
  • [김희철의 전쟁사(167)]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25남침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던 1952년 유혈만을 강요하는 진지 고착전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유엔군의 지원없이 우리 자체의 병력과 화력만으로는 155마일에 달하는 전선을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이자 유엔군사령관이었던 밴플리트는 “미군이 장기적으로 한국에 머무를 수는 없으니 앞으로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해 독자적인 방어에 나서야 할 것”이라며 한국군 잔력증강의 필요성을 최초로 언급했다. 1952년 말, 밴플리트는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에게 “곧 미국의 새 대통령 당선자이자 자신과 육사 동기였던 아이젠하워가 한국을 방문할 수 있으니 그 때 당신이 한국군 전력증강의 필요성과 세부 계획을 브리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당시 미 8군의 게스트하우스였던 지금의 서울 필동 ‘한국의 집’을 백선엽 장군에게 2주 동안 제공하면서 라이언 미 군사고문단장 등 자신의 참모들과 함께 한국군 전력증강의 밑그림을 작성할 수 있도록 지원도 했다. 미국 대통령 선거 경선 때 ‘6·25남침전쟁의 휴전 필요성’을 선거공약으로 강조하고 다녔던 아이젠하워가 그해 12월3일 한국을 방문하자 밴플리트가 계획한 대로 백선엽 장군의 브리핑이 있었다. 백 장군은 “현재 한국군은 10개 사단으로 이뤄져 있는데, 추가로 화력과 장비를 제대로 갖춘 한국군 20개 사단으로 증강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등이 맡고 있는 지역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보고 말미에 “미군 1개 사단이 주둔하는 비용으로 한국군 2~3개 사단을 창설할 수 있으며 미국이 협조하면 2년 안에 증강을 완료할 수 있다”고 한 마디를 더 보태며 강하게 설득했다. 브리핑을 경청한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는 “원칙적으로는 동의한다”며 표정이 좋아졌다. 한국에서의 전쟁을 하루빨리 끝내고 미군을 철수시키고자 했던 그가 한국군을 증강해 휴전선의 대부분을 한국군에게 맡기고자 하는 계획 자체에 반대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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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14
  • [김희철의 전쟁사(166)]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공산학정을 탈출하여 자유로운 생활을 찾기 위해 고향과 가족, 친척들을 북에 둔 채 대한민국으로 월남한 피난민들이 대부분 모여 있던 부산에서 1953년 11월27일 ‘부산역전 대화재’가 발생했다. 그때, 군법을 어기고 군수창고를 개방해 그들에게 천막과 구호물자를 꺼내어 피난민들이 포함된 이재민들을 도왔던 미 2군수사령관 위트컴 장군은 1894년 미국 캔자스에서 태어났다. 위트컴 장군은 1916년 ROTC로 군생활을 시작해 제1·2차 세계대전과 6·25남침전쟁 등 수많은 전쟁에 참전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 가장 치열하던 ‘오마하 해안 전투’에서 5만여 명의 연합군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을 지휘해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을 받았다. 1945년에는 일본이 점령 중이던 필리핀을 탈환하기 위한 상륙작전에서 17만여 명의 대규모 병력과 군수물자를 섬 요충지로 오차 없이 정확하게 수송해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다. 냉전 시절 미 공군이 주둔하며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서유럽과 미국 본토를 보호한 아이슬란드 케플라비크 기지도 그의 손을 거쳤다. 1941년 위트컴 장군이 기지를 건설할 때는 독일 해군의 이동을 감시하는 전초기지였다. 1950~51년에는 영하 60도인 그린란드에 공군기지를 건설하고자 세계 각국의 병력과 장비, 군수물자 수송을 지휘했는데, 당시 투입된 인력과 장비는 파나마 운하 건설 때와 비슷하다 하니 군수전문가로서 그의 면모와 능력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군사작전에 필요한 병력과 군수물자를 충원하고, 보급 지원을 하는 병참(兵站)은 전쟁 성패와 직결되는 군사전략 수준의 역할이다. 중국 한(漢)나라 유방이 항우와 전쟁에서 승리한 뒤 전투를 승리로 이끈 ‘한신’보다 후방 보급을 맡은 ‘소하’의 공을 으뜸으로 친 것도 군수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위트컴 장군 역시 유방의 소하처럼 부임지마다 그 소임을 철저히 완수해 승리의 발판을 만들었다.‘군수분야의 영웅’ 위트컴 장군은 6·25남침전쟁 막바지인 1953년 미군 제 2군수사령부 사령관으로 한국에 부임했다. 제 2군수사령부는 개전 초기 막대한 손실을 입은 한국군을 위해 탄약 70만 발, 소화기 50만 정, 화포 1500여 문, 차량 2만여 대 등 200만t 규모의 장비와 군수물자를 최전방으로 실어 날랐고, 후방지역 치안 유지는 물론 전쟁포로와 피난민의 관리 임무도 수행했다. 유엔군의 군수물자 확보와 정확한 수송, 국군 전력 증강은 그의 몫이었다. 개전 초기 9만6112명이던 한국군 병력이 1953년 7월 정전협정 당시 20개 사단 56만8994명의 대군이 된 것도 한국군 전력 증강에 매진한 위트컴 장군의 공이 컸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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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11
  • [김희철의 전쟁사(165)]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두산백과 자료에 의하면 6 ·25남침전쟁의 3년간에 걸친 동족상잔의 전화(戰禍)는 남북한을 막론하고 전 국토를 폐허로 만들었으며,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결과를 낳았다. 전투병력의 손실만 해도 유엔군이 한국군을 포함하여 18만 명이 생명을 잃었고, 공산군측에서는 북한군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또한 전쟁기간 중 대한민국의 경우 99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남한지역을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동안 인민재판 등의 무자비한 방법에 의하여 '반동계급'으로 몰려 처형당한 억울한 희생이었다. 또 전쟁기간 중 북한은 8만 5000명에 달하는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사들을 대한민국으로부터 납치해 갔다. 이 가운데에는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과 저명한 학자·종교인·공무원 들이 상당수 포함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북한지역으로부터는 300만 명 이상의 주민들이 공산학정을 탈출하여 자유로운 생활을 찾기 위해 고향과 가족, 친척들을 북에 둔 채 남한으로 월남하여 대한민국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1950년 당시 북한지역 인구는 1200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는데, 그 가운데 1/4 정도가 북한을 떠나 월남하였다. 이로인해 1000만 이산가족의 아픔이 시작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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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대를 말한다
    2022-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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