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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이승만, 안중근, 천안함 트리플 추모(상)
[시큐리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3월26일은 ‘이승만 건국 정신 계승 국민대회’가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탄신일이며, ‘안중근 장군 순국 114주기 추모제’와 1‘4주기 천안함 46용사 추모식’이 열리는 회한의 트리플 추모일이었다. 회한의 트리플 추모일 나흘 앞선 지난 22일, 해군 제2함대사령부에서 열린 제9회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이 열렸고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동시에 참석했다.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국가를 위협하는 세력에 잘 맞서서 대응해야 한다”며 “어떠한 위협도 응징해야 한다”는 취지로 대화를 나눴고 “이렇게 명백하게 도발과 공격을 받았는데도 자폭이라느니 왜곡, 조작, 선동해서 희생자를 모욕하는 일이 있다”라고 강조했다. 한 위원장은 “영웅들을 이렇게 모욕하고, 조작하고 선동하고 왜곡하는 세력들이 계속 그런 일을 하고 있다. 반드시 막아 내야겠다”며 “저희가 잘하겠다”고 말했다. 행사를 마친 윤 대통령은 차에 탑승하기 전 한 위원장과 악수하며 한 위원장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던 이날 만남은 다른 의미에서 주목받았는데, 내달 총선을 앞두고 당과 대통령실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4·10 총선에 악재로 작용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이 같은 시기에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이 만나면서 갈등이 봉합 국면에 접어든 상징적 장면으로 대통령실 관계자는 “당정 간 갈등이 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라고 대통령실은 밝혔다. ■ ‘부활한’ 천안함에 오른 영웅들…“이제 피격당하지 않을 것” ‘제14주기 천안함 46용사 추모식’이 열린 26일 2함대사령부에서 천안함 폭침 사건 당시 생존장병들과 전사자의 유가족 등은 신형 호위함으로 다시 태어난 ‘천안함(FFG-Ⅱ, 2800톤급)’에 오르며 “많이 좋아졌어. 이 배라면 서해 나가서 두 번 다시 피격당하지 않을 것 같아. 다행이야”라며 반겼다. 또 다른 유가족은 "벌써 14년이 지났지만 단 하루도 천안함 사건과 내 아들을 잊은 날이 없다"라며 "이름을 이어간 천안함 장병은 물론이고 국군 모두가 다시는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밝혔고, 또한 유족회장은 “새 국회에선 천안함 괴담 방지 특별법을 마련하라”고 강조했다. 호위함 천안함은 '천안'을 함명으로 사용한 해군의 세 번째 함정이다. 천안함은 초계함(PCC, 1000톤급)보다 크기와 무장, 방어능력을 대폭 증가했다. 천안함은 길이 122m, 폭 14m, 높이 35m 크기에 최고속력은 30노트(시속 55㎞)이며, 해상작전헬기 1대를 탑재할 수 있다. 주요 무장으론 5인치 함포와 함대함유도탄, 한국형 수직발사체계(KVLS)로 발사하는 함대지유도탄·장거리 대잠어뢰(홍상어)·유도탄방어유도탄 등이 탑재돼 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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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22대 총선 전쟁에 투입된 별들의 실체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민의힘 ‘용인시병’에서 단수 공천된 고석 후보는 1960년 서울시 성북구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군 전역 후 고향이었던 전남 무안으로 이사해 함평 학다리고교를 나왔다. 육사(39기) 생도시절 공부를 잘했던 고 후보는 육사 교수요원으로 발탁되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위탁교육을 받았고, 1991년 제3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이후 군법무관으로 주로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등에서 복무했으며, 군 내부에서는 방위산업과 정부 계약에서 빈틈없이 탁월한 업무처리를 하여 강직하다는 평이 주류였다. 1998년에는 원용수 준위가 6백여만원의 뇌물을 받은 병무비리 사건에서 병무비리 청탁자 명단을 찾아내어 병무비리를 밝혀냈다. 더불어 해묵은 병무비리들을 파헤쳐 군 내부의 기강을 바로 잡은 것으로 주목 받았는데 당시 진보정권의 미움을 받아 한직에서만 머물게 했다. 보수정권이 들어선 2008년 11월 방위사업청 법무지원팀장으로 근무하며 준장으로 진급해 육사 동기생 중 첫 번째로 별을 달았다. 이때 당시 대전지검 논산지청장으로 있던 윤석열(사법연수원 23기) 대통령이 직접 영전을 축하했었다. 이후 2009년부터 육본 법무실장을 거쳐 국방부 고등군사법원장을 역임했다. 전역 후 2013년 법무법인(유) 화우 변호사로, 2015년부터는 법무법인(유) 세종에서 파트너변호사로 근무했다. 2022년 6월 ‘용인시병’ 당협위원장 공모에 신청하면서 윤석열 대통령과 사법연수원 동기였던 인연이 알려져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후 2023년 6월 지역 대학교수와 전문가들이 공감대를 형성하여 ‘수지새미래연구원’을 창립해 원장으로 추대되었다. 2023년 8월 당협위원장으로 내정되었으며 2024년 2월16일 열린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회의 결과 발표에서 단수공천이 확정됐다. ‘용인시병’지역은 민주당에서 문재인 정권의 국방부 대변인을 지냈고 윤석열 대통령 저격수 역할을 한 부승찬(제주생, 공사43기) 후보가 당내 경선 승리하며 확정되어 ‘육사 대 공사, 장군 대 소령의 경쟁’이 주목받고 있다. ‘용인시을’ 후보로 공천받은 이상철 후보는 용인시 백암면에서 태어나 백암중, 수원 유신고교(11회)를 졸업하고 1990년 한양대 졸업과 함께 학군사관 28기로 임관하였다. 중령~준장까지 1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오직 제2작전사령부 지역에서 근무한 후방지역 작전 전문가이다. 제5보병사단장에 취임하여 문재인 정부의 최대 국정과제 중 하나인 화살머리고지 유해 발굴을 잘 마무리하여 2021년 임기제로 중장 진급과 함께 군사안보지원사령관으로 보직되었다. 하지만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첫 대장급 인사에서 문재인 정부 수혜 인사로 분류되어 보직대기 상태가 되었고 지상작전사령부 참모장으로 재직하다가 2023년 전역했다. 이후 2024년 1월 국민의힘에 22대 총선 국방안보분야 인재로 영입되어 ‘용인시을’ 전략공천 후보가 됐다. 본선 상대는 해당 지역구 현직인 민주당 김민기 의원의 불출마에 따라 공천된 손명수 전 국토부 2차관이다. 영주시·영양군·봉화군·울진군 지역구의 임종득 후보는 경북 영주시 출신으로 대구 청구고교를 졸업하고 육사 42기로 임관해 전략/정책 분야 참모를 맡은 전략통 군인으로 2019년 소장으로 전역하였다. 올드 도미니언 대학교 국제관계학 석사, 경남대학교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학구파이다. 2009년 대령 시절 육사 2학년이었던 아들(68기)과 함께 공수 강하훈련을 했던 일화도 있다. 2022년 8월, 건강 문제로 직에서 물러난 신인호 국가안보실 제2차장의 후임으로 임명되었고 퇴임한 2023년 10월부터 차기 총선준비를 했다. 같은 영주시 출신 정치인 장욱현 전 영주시장, 장윤석 전 국회의원 등과 경쟁해 결국 공천을 따냈다. 사실상 국민의힘 공천이 곧 당선인 경북 지역이기 때문에 큰 이변이 없다면 제22대 국회의원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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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⑧
[시큐리티팩트=김희철] 별고지 전투는 1952년 2월 18일 네덜란드 대대가 평강 남방 10km 지점에 위치한 중공군의 전초진지인 별고지(430고지)를 공격해포로를 포획하고 방어시설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고 각종 가용 지원화력의 엄호하에 공격을 전개한 전투이다. 그해 2월 5일 미 제2사단 제 38연대 예비로 전환한 네덜란드 대대는 철원 동쪽의 하리동에 집결했고, 2월 10일~15일간 적 유인 작전인 유엔군 ‘Calm Up’ 작전이 실패하자 네덜란드 대대는 사단장으로부터 중공군 주요 전초진지인 별고지를 기습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때 별고지는 2개 소대규모 중공군이 배치돼있었고, 고지 후방에는 중대규모의 증원 병력도 있었다. 이들은 후방 472고지 일대에 구축한 강력한 지원기지로부터 화력지원까지 받고 있었다. 네덜란드 대대는 3개 포병대대, 4.2인치 중박격포 2개 중대, 전차 2개 중대, 부상자 및 탄약운반을 위한 노무자 70명과 화염방사기, 방탄복까지 지원받았다. 적진 항공정찰을 통해 전투 계획을 수립한 대대장은 2월 17일 대대 간부들을 집합시켜경사지에서의 신속한 이동을 강조하며 작전명령을 내렸다. 2월 18일 04시 B중대가 출발했다. 05시 엄호소대가 주저항선을 통과해지시된 무명고지를 점령하며, 06시 15분 후속하던 주공인 2개 소대가 공격개시선으로 진출해 모든 공격준비를 완료하자 06시 45분부터 예정된 공격준비사격이 별고지 일대에 집중됐다. 드디어 07시 B중대는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고, 포병의 오폭으로 잠시 공격이 일시 정지되기도 했지만. 우일선 소대는 경미하게 저항하는 적을 격퇴하고 별고지를 점령했다. 07시 30분경 472고지 방면으로 철수하는 적을 포병과 전차가 집중포격 실시해 많은 적을 사살했으며 09시경 연대장 지시에 따라 벙커 3개와 다량의 포탄 및 지뢰 등을 폭파하고 화력 엄호를 받으며 저항선으로 복귀하며 전투를 종료했다. 이번 별고지 전투로 5명이 전사하고29명이 부상당한 네덜란드 대대는중공군 1개 중대 이상을 완전 섬멸시키는 대성과를 올렸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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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는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⑦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횡성전투를 마친 네덜란드대대는 미 제2사단의 일부로 중동부지역 대암산~도솔산 부근 전선에 투입되었다. 대우산 전투는 방어선 전방의 감제고지인 대우산을 점령하기 위해 조공 부대로서 북한군 제27사단이 점령하고 있던 그 남쪽의 1120고지(대머리산)을 공격하여 탈취한 전투이다. 1951년 7월15일 네덜란드대대 1개월 간 부대 재정비 후 미 제38연대에 배속되어 양구 북쪽의 도솔산으로 이동하여 7월25일까지 적의 중대규모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으며 다수의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1120고지를 정찰했다. 7월26일 07시30분경 네덜란드대대 공격부대인 C중대 주저항선 전방의 만정곡으로 이동하여 공격 개시하여 10시30분경 돌격선 진출하였지만 안개가 걷히며 중대가 적에게 노출되고 적이 C중대를 향해 기관총사격을 집중했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사상자가 증가하고 위험해지자 고지 중간지점으로 철수함. 이때 좌전방으로 우회 공격한 일부 병력이 고참병들의 투혼으로 1120고지로 진출해 적의 진지 일부를 탈취했으나, 적의 역습으로 다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오후 C중대 재정비 후 재공격 준비했으나, 오히려 적에게 발견되어 역습당하였고, 점점 부상자가 속출하게 되어 어두운 밤이지만 연막과 야간을 이용해 철수했다. 이후 7월29일 미군 1개 대대가 공격 주도하고 네덜란드대대는 조공으로 미군에 대한 화력을 지원했는 데 결국 대우산 점령했다. 내덜란드대대는 대우산의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경기관총으로 증강된 소대규모를 1120고지로 투입되었으나 8월6일즈음 전선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대대는 사단예비가 되어 소양강변의 관대리로 이동하며 전투를 마감했다. 대우산 전투에서 네덜란드대대는 전사 11명과 부상 31명, 실종 1명 등의 인명손실이 발생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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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⑥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중공군의 2월 공세로 인해 전방의 아군부대들이 철수를 단행하자 이들에 대한 엄호임무를 부여받은 네덜란드 대대가 1951년 2월12일부터 13일까지 횡성 일원에서 중공군의 기습에 대응하는 방어전투를 전개했다. 리지웨이 미 제8군사령관이 반격의 여건을 만들기 위해 시도한 ‘썬더볼트 작전’의 일환으로 공격하던 미 제2사단이 1951년 1월23일 원주를 탈환하자 사단 예비로 있던 네덜란드 대대는 제38연대로 배속되어 원주로 진출했다. 네덜란드 대대는 2월 2일 원주 북서쪽 섬강 부근 송호리와 상장포 일대로 진출해 패잔병 소탕작전을 수행한 뒤, 홍천을 탈환하기 위해 2월 4일 사단의 명령에 따라 횡성으로 이동해 후천에 배치되어 한국군 사단의 후방 엄호를 담당했다. 1951년 2월 11일 중공군 제40군, 제66군이 서북쪽, 북한군 제5군단이 동북쪽에서 아군의 정면과 측면 공격, 일부 병력 연대 후방으로 침투해 유엔군의 주보급로를 차단하는 중공군의 네 번째 공세인 2월 공세가 단행됐다. 이때 군단장이 전 부대에 철수명령을 하달했고, 전 부대가 네덜란드 대대가 방어중인 횡성으로 몰려들자 네덜란드 대대 A중대는 본래의 위치인 횡성교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고 서쪽으로 이동했으며, 오후 15시 30분경 네덜란드 대대가 배치된 지역에 적의 박격포 공격이 집중되어, 본부중대 기능이 마비됐다. 16시경 미 제187공수여단 G중대와 전차소대로 구성된 구원부대가 한국군 1개 보병대대와 함께 돌진해 적에게 포위된 4000여 명의 병력과 합세해 작전을 전개했다. 헌데 19시10분경 중공군이 한국군으로 위장하고 후방으로 침투해 아군의 철수를 엄호하고 있던 네덜란드 대대 화기중대와 대대본부를 공격했다. 이때 대대장은 수류탄 폭발로 전사했고 이러한 상황에서도 21시 30분경 화기중대장이 임시로 대대를 지휘해 끝까지 철수부대를 엄호했다. 다음날인 2월 12일 22시경 사단의 지시에 따라 한국군과 미군 철수 뒤 엄호하던 네덜란드 대대 A중대는 횡성 후방의 뒷네물 강변에, 이틑날 01시 네덜란드 대대 B중대도 뒷네물강 남쪽에, 04시경에는 원주비행장에 도착해 용맹한 네덜란드군의 명성을 드높이며 횡성전투는 종료됐다. 횡성전투로 대대장과 군목, 인사장교 등 17명 전사, 37명 부상, 차량 15대와 다수의 공용화기를 잃는 피해를 입었으나 아군의 철수 엄호작전을 완벽히 수행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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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은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⑤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달 박민식 보훈부 장관을 비롯한 출장단이 ‘국제보훈 교류·협력’ 등을 위해 방문한 국가중에 네덜란드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6·25남침전쟁이 발발하자 유엔회원국 중 유엔결의에 따라 제일 먼저 군사지원을 약속한 나라는 영연방국가들이었다. 그 중의 한 나라인 네덜란드는 우선 구축함 지원을 약속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으로서 근본적으로 소련의 유럽 지배에 경계심을 갖고 있었던 이들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에 대해 실질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유럽에서 미국의 확고한 역할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아시아에서 미국과 함께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덜란드는 해군과 육군을 파병했는데, 해군은 1950년 7월19일, 육군은 11월23일에 도착했으며, 지상군이 한반도 전투에 최초 투입된 날짜는 12월3일이다. 네덜란드는 6.25남침전쟁 당시 군사력이 매우 미약했고, 대부분의 병력마저도 인도네시아에 주둔하고 있었다. 즉각적인 지상군의 파견이 여의치 않음에 따라 우선 1척의 구축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네덜란드 구축함 ‘에베르센’호는 일본에서 운용되던 영국 극동함대에 배속되어 있었고 1950년 7월19일부터 서해안 활동을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전쟁 기간 동안 6척의 함정을 교대로 파견해 해상작전을 지원했다. 북한군들이 계속 남하해 6.25남침전쟁이 악화됨에 따라 1950년 7월14일 유엔사무총장이 네덜란드 정부에 지상군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네덜란드는 1950년 9월9일 636명의 1개 보병대대를 창설, 덴 오우덴 중령을 대대장으로 임명하고 11월23일 부산 도착해 현지 적응훈련 거친 후 그해 12월11일 미 제2사단에 배속되어 전투에 참가했다.(다음편 계속)
실시간 CRISIS M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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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는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①
- 헤이그 특사 이준 열사의 묘적지를 삼일공고 학생들과 함께 참배하는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사진=보훈부] [뉴스투데이=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제보훈 교류·협력’ 등을 위해 네덜란드를 방문한 박민식 장관을 비롯한 출장단은 지난달 16일 바겐스트라트 거리에 위치한 헤이그 특사 ‘이준 열사’ 묘적지를 찾아 참배했다. 헤이그 특사 이준 열사는 1895년 서재필의 독립협회에 가담해 활동했으며, 갑오경장시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귀국후에는 독립협회와 지금 서울특별시 중앙우체국 앞에 있었던 상동감리교회에서 활동을 재개했다. 상동감리교회는 전덕기 목사의 부탁을 받은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이 만든 우리말 문법을 가르칠 정도로 민족의식을 가진 지식인들의 공동체였다. 1902년에는 민영환의 ‘비밀 결사 개혁당’에 가담했으며, 1904년 공진회 회장을 지냈다. 공진회 활동으로 유배 생활을 한 뒤, 1905년 국민교육회 회장에 취임하고 보광학교, 오성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계몽 운동에 힘썼다. 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상동교회의 전덕기, 이동휘, 이회영 등은 고종의 밀사를 파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고종에게도 신임장을 받아 특사로는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이준이 정해졌다. 이준은 고종의 신임장을 들고 만주의 이상설, 러시아의 이위종과 차례로 합류해 헤이그로 향했다. 그러나 을사조약 체결이 일본의 강제에 의한 것이었음을 폭로하려 했던 계획은 영일 동맹으로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의 방해로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고종이 폐위되고 순종이 즉위했으며, 이준은 헤이그의 숙소에서 순국했다. 당시 네덜란드 유력 일간지 ‘헤트·화데란트’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잔인한 탄압에 항거하기 위해 이상설, 이위종과 같이 온 특사 이준씨가 어제 숨을 거두었다. 일본의 영향으로, 그는 이미 지난 수일동안 병환중에 있다가 바겐슈트라트에 있는 호텔에서 사망했다”라고 보도했다. 오랫동안 이준이 할복 자결을 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국사편찬위원회는 1962년 할복 자결 아닌 병사 쪽으로 판단했다. 이는 당시 일제의 한민족 억압에 대한 반일적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준이 영웅화되면서 할복 자결설이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으며, 유해는 본래 헤이그에 묻혀 있다가 1963년 봉환됐다. 서울 장충단 공원에 동상이 세워져 있고, 헤이그에는 이준 열사를 기념하는 이준 열사 기념교회(감리교)가 건립되어 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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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네덜란드군는 6·25남침전쟁의 숨은 영웅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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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ROTC운영 108개 대학중 절반인 54곳 정원 미달(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김완섭 기획재정부 차관이 지난 21일 군부대를 방문하면서 ‘장병 지원 확대'를 강조했지만, 올해 7월 기준 육군 학군단을 운영하는 전국 108개 대학 가운데 후보생 정원이 미달한 학교는 절반인 54곳으로 집계됐다. 경인교대 학군단은 36명이 정원이지만 재학 중인 ROTC후보생은 5명에 불과했고, 교원대 학군단은 69명이 정원이나 23명의 후보생만 재학하고 있었다. 또한 한양대는 54명 정원 중 25명만, 서강대는 정원이 43명이지만 20명에 그쳤다. 이는 병사는 복무기간이 짧고 봉급이 인상되는 데 반해, 초급간부는 복무기간이 긴 데다 처우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현재 복무기간은 육군 병사는 18개월이지만 ROTC는 군별로 24∼36개월이다. 육군은 올해 전반기 ROTC 후보생 지원 경쟁률이 역대 최저인 1.6대 1에 그쳐 지난 1일부터 창군 이래 처음으로 추가 모집을 받았다. 모집 인원보다 지원자가 많긴 하지만 입영 후 중도에 포기하는 후보생들이 적잖아 자칫 졸업 후 임관하는 장교 인원이 목표치를 하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 ROTC 경쟁률은 2015년 4.8대 1, 2021년 2.6대 1, 2022년 2.4대 1 순으로 갈수록 하락 추세다. 이는 병봉급이 초급 간부의 급여와 대등해지고 반면에 의무복무 기간은 초급간부가 6~18개월 더길기 때문에 입대자들은 봉급과 복무기간을 고려할 때 간부의 잇점이 없어져 차라리 병으로 입대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우리 군의 원활한 임무 수행을 위해 국방부가 우수한 초급장교를 확보하는 것은 당연한 책무이다. 하지만 과거 정권에서 포퓰리즘에 의한 무분별한 병 봉급 인상 및 복무기간 단축 정책의 폐해는 초급간부 지원 회피 및 국방운영예산 증가와 이로인한 전력증강 예산부족 유발 등으로 국가안보에 중요한 걸림돌이자 절대위기가 되고 있다. 정부와 국방부는 더 문제가 심각해지기 전에 해당 사태의 원인 파악과 함께 학군장교 등 초급간부 충원율의 대대적 향상을 위한 혁신적인 대안 마련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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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ROTC운영 108개 대학중 절반인 54곳 정원 미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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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ROTC운영 108개 대학중 절반인 54곳 정원 미달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김완섭 기획재정부 제2차관은 지난 21일 강원도 동해시 해군 제1함대를 찾아 주요 시설과 장병 생활 공간을 점검하고 장병들과 오찬을 함께 했다. 김 차관은 근무 시간의 대부분을 함선 안에서 보내는 장병들의 노고에 감사를 전하면서, 병 봉급 인상 및 초급간부 단기 복무 장려금 인상 등에 대한 투자를 늘리겠다고 밝혔다. 내년도 병장 기준 병 봉급이 올해 130만원(사회진출지원금 포함)에서 165만원으로 35만원 인상됐고, 초급간부 단기복무장려금도 장교 1200만원, 부사관 1000만원으로 각각 300만원과 250만원 인상한 2024년 예산안을 반영했다. 또한 김 차관은 병 봉급 인상 뿐만 아니라 노후 숙소 개선 및 주택수당 지급범위 확대, 병영 생활관 현대화 전환 등을 통해 장병 주거 여건 개선에도 힘쓰겠다고 말했고, 이에 따라 노후 숙소 개선 예산도 작년의 두배 규모인 4196억원으로 편성하는 등 국방운영비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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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ROTC운영 108개 대학중 절반인 54곳 정원 미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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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현시대의 전사들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세력에 의해 희생당했던 수많은 애국 영령들의 원한과 피가 아직 뜨겁고,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의 눈물이 여전히 마르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에서까지 공산주의자 나팔수 역할을 했던 정율성을 기리는 것을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한 “우리 국민들의 소중한 예산은 대한민국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고, 단 1원도 대한민국의 가치에 반(反)하는 곳에 사용될 수 없다. 오직 ‘호남학도병들’처럼, 대한민국의 영웅들을 기억하기 위한 예산만 있을 뿐이다”라며 정율성 기념공원 조성 계획의 전면 철회를 촉구했다. 더불어“호남학도병들의 우국충절(憂國忠節)을 기억하고, 학생과 국민들이 호남학도병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계승할 수 있도록 순천역 광장에 현충시설을 건립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국가보훈부는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마련에 착수할 계획이고 의지를 표명했다. 이날 순천역 광장에는 6·25남침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고병현*(1929년생)님을 비롯해 고효주 6·25참전학도병 충혼선양회 회장, 그리고 전남지역 보훈단체장 10여 명이 함께했다. 박민식 장관은 순천역 광장 행사에 앞선 간담회 자리에서 호남학도병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호남학도병 대표 고병현님에게 ‘영웅의 제복’을 전달했다. 참고로 고병현님은 1950년 율촌고등공민학교 재학 중, 6‧25참전을 위해 면사무소에 군입대를 지원하였으나 거부당하자, 망치로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찍고 “이몸을 조국에 받치나이다. -무진생 고병현”이라는 혈서를 제출하였으며, 이후 육군 제5사단 15연대 학도중대에 입대하였다 한편,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이날 순천역 방문에 앞서 순천 매산고등학교(1950년 당시 순천매산중학교)에 소재한 순천매산고 출신 학도병 30여 명의 이름이 새겨진 6·25참전기념비와 순천지역 참전학도병 50여 명의 이름이 새겨진 학교 정문 옹벽의 충혼벽화에 매산고 교장, 학생 대표들과 함께 헌화하며 진정한 보훈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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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현시대의 전사들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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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현시대의 전사들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정율성은 일제강점기 광주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하다가 광복 후 월북하여 북한 인민위원회, 조선노동당, 북한군 등에서 활동을 했으며, 6.25남침전쟁 기간 중에 다시 중국으로 귀화하여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해방군 등에서 군인으로 활동한 작곡가이다. 중국 바이두백과는 그를 한국 사람이 아닌 ‘근대 중국 작곡가’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난징을 떠나 10월 중국공산당의 본거지인 연안에 가서 본격적인 공산당 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 무렵부터 당시 중국공산당의 거물 저우언라이의 양녀 딩쉐쑹(丁雪松)과 연애를 했는데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1년 결혼했다. 1939년 4월에는 오랜 심사 끝에 중국공산당 정식 가입이 승인되었다. 그 해 '팔로군 행진곡'(현 중국인민해방군진행곡)을 작곡했다. 광복이 되자 한반도 공산화을 위해 연안 팔로군 본부 소속 김무정의 명령으로 정율성은 딩쉐쑹과 딸 등 가족과 함께 1945년 12월, 소련 군정하에 있던 북한 평양에 도착해서 북조선인민위원회 소속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인민군 협주단을 데리고 북한 전국 방방곡곡을 순회하며 북한 지역주민들에게 새로 수립된 북한 사회주의 정권을 찬양하는 공연을 무려 200여 차례나 치렀고, 북한 사회주의 정권과 인민군을 찬양하는 ‘조선인민군 행진곡’ 등 30여 곡을 작곡하여 김일성으로부터 포상장도 수여받았다. 1950년 6.25남침전쟁이 발발하자 북한군 군관 신분으로 참전하였으며, 서울 점령 직후 서울에 내려와 주둔했다. 그는 개전 초기 서울 점령 직후부터 9월까지 쭉 서울에 머물렀다. 그의 아내 딩쉐쑹도 함께 서울에서 머물렀는데, 그해 8월경 돌연 가족들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갔다. 중국에서의 정율성은 마오쩌둥의 시에 곡을 붙이는 등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작품이 대부분을 작곡했다. 문화대혁명기에 그는 마오쩌둥의 시사 20편에 곡을 붙였으며 이 작품은 “그 자체가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기백이 넘쳐흐르는 교향악으로 중국혁명사의 최고탑”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가 일생동안 마오쩌둥의 시사에 곡을 붙인 편수는 34수에 달한다. 1976년 9월9일 마오쩌둥이 죽고 피바람을 불었던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소외되었던 정율성은 곧 복권되었다. 그는 이번에는 저우언라이 총리를 찬양하는 연가와 건국 50주년(정확히는 중국공산당 창당 5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을 만드는데 착수하며 끝까지 공산주의자 나팔수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해 12월7일 베이징 근교의 한 운하에서 낚시를 하던 도중 심장병으로 쓰러져 62세로 사망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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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현시대의 전사들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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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현시대의 전사들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지난 8월28일 오전 전남 순천역 광장에서‘잊혀진 영웅, ‘호남학도병들’을 기억해야합니다!’를 주제로 한 호남학도병 현충시설 건립 계획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국가의 품격은 누구를 기억하는가에 달려있다. 우리는 호남의 정신과 호남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이끈 영웅들을 기억하고 기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호남학도병들을 기억하는 것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유가족들의 아픔을 보듬는 것”이라며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였다. 순천역 광장은 6·25남침전쟁이 발발한 1950년,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학생들이 집결하여 ‘학도병’ 출정식을 가졌던 역사적 장소이다. 당시 순천과 여수, 광양, 벌교 등 호남지역 17개 학교 180여 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혈서로 입대지원서를 쓰고, 같은 해 7월13일, 순천역에서 출정식을 가졌다. 이에 박 장관은 “호남의 어린 학생들이 조국을 위해 펜 대신 총을 들었고, 목숨을 건 혈투 끝에 차디찬 전장의 이슬로 스러져갔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자유 대한민국을 사수하겠다는 정신, 바로 이것이 호남의 정신”이라고 밝혔다. 특히 그는“공산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수많은 애국 영령들의 원한과 피가 아직 식지 않았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의 눈물이 여전히 마르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의 미래인 학생들에게 공산당의 나팔수를 기억하게 하고 기리겠다는 시도에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라며 광주시가 추진 중인 정율성 기념공원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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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현시대의 전사들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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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현시대의 전사들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우리가 누리는 민주와 자유는 영웅들의 피 묻은 군복 위에 서 있기 가능하다.호국의 별인 백선엽 장군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는 이들은 너무도 많이 있다. 그가 "나를 쏘라"며 6‧25남침전쟁 최대 격전지였던 다부동 고지를 지키지 않았다면 낙동강 방어선은 무너졌다. 이를 기리기 위해 지난 7월5일 백선엽 장군의 동상 제막식이 있었다. 만약 다부동 전투에서 패했다면 소련과 중공의 지원에 힘입은 북한에 의해 한반도는 적화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번영을 구가하는 자유민주체제의 대한민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박민식 장관은 지난 6일 열린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백선엽 장군을 친일파로 모독하는 야당 의원에게 발끈했다. 박 장관은 반민특위 출범 당시 백 장군은 친일 명단에 포함되지도 않았다고 설명했다. 도중에 문재인 전 대통령 부친의 흥남시 농업계장을 지낸 바 있는 이력까지 언급하며 "만주군관학교 소좌(소위)로 북간도가 첫 근무지던 백선엽 장군이 친일파라면. 그도 친일파가 아니냐?"라고 강조했다. 청산리 대첩 이후인 1921년, 소련군 장교인 홍범도와 그 일당들에 의한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들은 몰살당하며 해체됐다. 백 장군이 북간도에 부임한 1942~1943년 무렵에는 독립군들이 연해주로 쫓겨간 뒤였다. 그가 근무한 부대의 명칭이야 만주특설대로 좌파세력들의 토착왜구 몰이에 그럴싸하다. 문전 대통령은 백 장군이 숨을 거두었을 때 조화만 보냈을 뿐, 끝내 조문하지 않았다. 나라를 지킨 호국의 영웅을 친일로 모독하는 좌파 세력의 정치적 계산과 무관하지 않다. 6‧25남침전쟁 당시에 김일성이 가장 증오했던 남한의 인물이 이승만과 백선엽이었다는 것과도 묘하게 일치한다. 또한 전직 대통령도 현실 정치에 거리를 둬야 한다. 그러나 문 전 대통령은 걸핏하면 정치적 발언을 한다. 이번에도 홍범도의 흉상과 관련해 언급이 잦았다. 자택으로 찾아온 자파 의원들과 정치를 안주 삼는다. 국가지도자를 지낸 사람답게 정치적 발언을 삼가고 신중한 처신을 해야한다. 백 장군이 독립군을 토벌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팩트를 부풀린 것도 아니고 아예 날조에 가깝다. 영웅의 명예를 지키려고 거야에 맞서며'1류 보훈’에 매진하는 박 장관과 레닌에게 선물받은 권총으로 독립군을 직접 사살한 소련군 장교인 홍범도의 동상 이전을 주장하는 신원식 의원(국민의힘)에게 박수 보낸다. 일부 세력들이 백 장군을 친일파로 모독하는 행각을 계속 저지르면 좌시하면 안된다. 좌파세력이 호국의 영웅 백 장군을 친일파로 몰아 모독하려는 것을 거듭 개탄하며 박민식 장관이나 신원식 국회의원처럼 적극적인 반론을 제기해야 한다. 보훈의 최고 가치인 국가정체성이야말로 박 장관이나 신 의원을 비롯한 모든 국민이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내야하는 엄숙한 과제이다. 그리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호국의 제단에 피를 뿌린 분들에게 최고의 예우를 다해야 한다. 제복(MIU)입은 영웅들의 명예를 짓밟는 이적행위와 망동을 당장 중단하게 만드는 것이 진정한 애국이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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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현시대의 전사들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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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현시대의 전사들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25남침전쟁 당시 백선엽 장군의 1사단은 1950년 8월3일부터 9월22일까지 22km거리의 대구를 위협하는 다부동 전투에서 열세한 병력으로 유례없이 치열한 혈전을 치루었다. 화력이 우세한 미군을 피해 김일성은 국군 1사단 정면에 무려 북한군 3개 사단 2만여명의 병력을 몰아넣었다. 당시 백선엽 장군의 지휘 아래 있었던 1사단 병력은 모두 7000여명으로 병력은 3대 1, 화력은 10대 1로 북한군에게 절대적으로 열세였다. 북한군 전쟁지도부는 바로 그 점을 노렸다. 하지만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라고 독전하며 지휘한 백 장군의 1사단은 북한군 3개 사단을 격파하며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국군은 최후 방어선인 낙동강 전선 방어에 성공하여 인천상륙작전과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때 김일성의 특명으로 다부동을 버티고 있는 남한의 백선엽을 생포하고자 거액의 포상금까지 걸었고, 결국 사단사령부가 있던 다부동 후방의 동명초등학교에 북한군 1개 중대규모가 기습을 감행했다. 때마침 운동장에서 숙영하던 증원부대 8사단 10연대의 1개 대대가 재빨리 반격하여 기습한 적들을 격퇴했다. 당시에 김일성이 가장 증오했던 남한의 인물이 이승만과 백선엽이었고 제거하기 위해 포상금까지 걸었는데 묘하게도 현재 이 두 인물을 친일파 등으로 몰아 폄하시키는 모습이 개탄스럽다. 백 장군은 다부동 전투를 비롯해 평양 최초 점령, 서울 재탈환, 춘계 공세 방어, 동부 휴전선 북상 등 숱한 작전을 지휘한 6·25남침전쟁 영웅이었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헌신적인 노력을 하여 한미동맹의 초석을 다졌고, 제4대 합동참모의장과 제7·10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백 장군은 전역 후 약 10년 동안 중화민국, 프랑스, 캐나다 대사를 역임하며 북한의 외교 진출 공세를 철저히 막아내었고, 귀국후에는 교통부 장관 재임하며 서울지하철 1호선 건설 실현과 대한민국 화학산업을 키워낸 ‘탁월한 외교관’이자 ‘산업근대화’의 주역으로 대한민국 발전을 위해 고귀한 헌신을 이어간 구국영웅이다. 미군들이 지금도 6·25남침전쟁시에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하며 존경하는 백선엽 장군은 2020년 100세를일기로 영면에 들었으며,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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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현시대의 전사들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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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현시대의 전사들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문재인 전 대통령은 지난 12일 자신의 부친을 친일파로 지칭한 박민식 보훈부 장관을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고 이날 더불어민주당 윤건영 의원을 통해 밝혔다. 이와 관련해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페이스북에 올린 ‘문재인 전 대통령의 고소에 대한 입장문’을 통해“법적 절차에 충실히 따르되 그에 따르는 수고로움은 나라를 바로 세우는데 감수해야 할 영광으로 생각하겠다”고 밝혔다. ■ 박민식 장관의 국회 답변은 친일파에 대한'일관된 기준'을 강조한 발언...문 전 대통령의 고소는'내로남불'식 태도 박 장관은 “저는 문 전 대통령 부친 문용형 씨를 친일파로 일방적으로 몰아가거나 비판을 한 바 없다. '백선엽 장군이든 문재인 전 대통령의 부친이든 그 삶을 함부로 규정지어선 안 된다.일제 강점기라는 아픔의 시대를 살았던 모든 사람들에게는 같은 기준, 같은 잣대가 적용되어야 한다’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를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전직 대통령이 법적 공격을 통해 또다시 반일 대 친일의정쟁으로 몰아가는 행태에 깊은 실망과 유감을 표한다”며 “이번 고소를 통해 도대체 무엇이 친일이고, 누가 친일파인지 보다 적극적이고 생산적인 토론이 이뤄지는 계기가 된다면 망외의 소득이 될 것”이라고 페이스북에 올렸다. 이 같은박 장관의 입장은 소위 친일파에 대한 '일관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일제 강점기에 다수 국민이 체제순응적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점에 있어서 문 전 대통령의 부친과 백선엽 장군의 행보는 유사한 성격을 갖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박 장관은 지난 6일 열린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일제강점기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백선엽 장군이 친일파가 아니라는 취지로 주장하는 과정에서 "문 전 대통령 부친은 (일제시대) 흥남시청 농업계장을 했는데, 친일파가 아니냐"라고 언급, 논쟁이 벌어졌다. 백선엽 장군의선택을 친일이라고 비판한다면, 같은 논리로 문 전 대통령의 부친도 친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게 박 장관의 국회 답변의 취지였던 것이다.오히려 문 전 대통령의 부친이 친일파가 아니듯이 백 장군도 친일파가 아니라는 게 박 장관의 논지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 전 대통령이 박 장관을 고소한 것은자신의 부친은 친일파가 아니고 백 장군만 친일파라는 '내로남불'식 논리의 산물이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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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방산수출 173억불 달성과 빛바랜 어두운 그림자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최근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는 정보체계의 붕괴, 플랫폼을 통한 정보 공유 등 여러 정보 관련 기술 대전환이 발생하고 있어 이를 대비한 기술 전문인력 양성이 시급하다. 이에 따라 고숙련직과 저숙련직의 허리 부분인 ‘중’숙련직의 업무종사자가 줄어들고 있는 실정을 고려하여 전문인력을 확보하면서 이들을 지속적으로 육성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취업 및 채용 인력시장에서 방위산업의 매력도를 끌어 올려야 하며, 방산업계 종사자들의 전문성을 지속 육성 위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게다가 업계는 인력난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데 ‘공직자 윤리법’ 때문에 취업 제한도 섣불리 풀기 힘든 상황으로 퇴직자는 갈 곳이 없는 실정이다. K-방산이 현재 빛을 보이고 있는 것은 과거 뛰어난 인재가 집중됐기 때문이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현재 법규제에 따른 높은 진입 장벽이 문제로 퇴직한 사람에 대한 취업제한 제도에 대해 다시 검토 개선하여 어떠한 투자를 통해서라도 인력이 확보될 필요가 있다. 또한 토론 과정에서 오병후 한국군수품수출협회장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영향으로 K-방산이 잘 나가지만 방산 중소기업들에게는 빛좋은 개살구로 고사 직전에 놓여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현상태를 토로하며 대책을 강구를 요구했다. 작년도 173억불 방산 수출의 찬란함을 속깊게 분석하면 대기업이 성급하게 추진했던 절충교역이 부매랑이 되어 되돌아오고 있다. 절충교역(Offset)은 외국으로부터 군사 장비, 물자 및 용역을 획득할 때 외국 계약자에게 기술 이전 및 부품 역수출 등과 같은 일정한 반대 급부를 요구하는 조건부 교역이다. 즉 관련 중소기업들은 해당부품을 계속해서 판매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준비했는데, 절충교역을 통해 그 기술과 부품을 해당국 개발하고 생산할 수 있도록 만들어 원청업체의 4차 밴드업체까지 판로가 막혀 우리 기업들은 회사 문을 닫아야 하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에 따라 관련 중소기업들에게 암울한 그림자로 기업을 고사 상황에 직면하게 만드는 것 뿐만 아니라 원청기업인 대기업도 이번에 우리 무기체계를 수입하면서 절충교역으로 기술 이전 및 부품 역수출 등을 하게된 해당 국가가 추후 수출시장에서 경쟁자가 되어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 예상된다. 이번 ‘2023 K-방산혁신포럼’에 참석한 산·학·관 관계자들은 이런 정황을 참작하여 국회에서 조속한 입법 조치를 하며 행정 기관 및 학계에서는 대안을 마련하고 방산 기업들은 보다 정밀하고 첨단 고도화되는 무기체계와 기술들을 계속 개발하는 노력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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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CrisisM] 방산수출 173억불 달성과 빛바랜 어두운 그림자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