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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철의 CrisisM]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독립기념관 부실 경영 등 질타 “전면 쇄신 요구”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독립기념관은 기획재정부에서 지난 6월 발표한 2022년도 공공기관 경영평가에서 미흡(D) 등급을 받아 기관장 경고 조치를 받으며 경영상 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 2020년 B등급이었던 경영평가는 이듬해인 2021년에 C등급으로 떨어졌고 이번에 D등급을 받아 지속적인 하락에 따른 부실 경영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특히 독립기념관은 지난 2020년에 경영평가 항목 중 하나인 관람객 수를 부풀렸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을지연습 훈련 상황 점검을 겸해 장관 취임 후 처음으로 22일 독립기념관을 방문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이날 오후 독립기념관 제1회의실에서 진행된 업무보고 자리에서 2022년 공공기관 경영 평가 결과와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대필 의혹 사건 등을 질타하며 “부실 경영과 직원 복무기강 해이가 도마에 오른 독립기념관의 전면적 쇄신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독립기념관은 올해부터 기타공공기관으로 전환되어 경영평가 주체가 기획재정부에서 국가보훈부로 변경됐다. 이에 국가보훈부는 독립기념관의 경영관리 노력 및 사업 성과를 지속 점검·평가하여 경영실적 회복에 힘쓸 방침이다. 박 장관은 또한, 지난 2021년 제기된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대필 의혹 사건을 독립기념관의 대표적인 복무기강 해이 사례로 지적하며 재발 방지 대책을 주문했다. 해당 사건은 당시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편찬 과정에서 일부 독립기념관 직원들이 과거에 작성된 원고의 일부만 수정한 뒤 명의 대여자를 내세워 원고료를 환수하는 방식으로 부당 수령한 의혹을 받았다. 대필 의혹 사건은 지난 7월 일부 관련자들의 혐의가 있는 것으로 검찰 수사 결과가 통보된 상태여서 국가보훈부는 관련 직원들에 대한 엄정한 조치와 함께 향후 유사 사례 재발 방지를 위해 지속적인 특별점검 등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일부 연구원들의 편향성 문제도 제기되는 실정이다.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대필 의혹 역시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일부 연구원들이 특정 학교 출신이나 특정 계파 중심으로 편향적으로 운영되어 발생한 문제라는 지적도 제기된 바 있다. 이에 따라 국가보훈부는 다양한 분야의 연구원이나 학교 출신자들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 채용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 앞으로 독립운동사에 대한 균형 있는 연구가 이뤄지게 함으로써 미래세대와 국민들이 올바른 국가관을 정립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박 장관은 “독립기념관은 국민으로서의 정체성과 올바른 국가관을 확립시켜 줄 막중한 임무를 실현해야 하는 대한민국 대표 기념관이지만, 현재 처해 있는 제반 상황은 위기”라면서 “독립기념관의 공직기강 확립 등 전면적인 쇄신을 통해 전 국민이 즐겨 찾는 교육의 장이자 자랑스러운 역사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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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11:42
  • [김희철의 CrisisM] 방산수출 173억불 달성과 빛바랜 어두운 그림자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 8월29일 여의도 국회 제2소회의실에서 한국안보협업연구소와 뉴스투데이 주관으로 산·학·관 관계자들이 참석하여 ‘2023 K-방산혁신포럼’이 열렸다. 작년 2월에 3일이면 끝날 것으로 판단하고 우크라이나를 침범했던 러시아는 곤욕을 치루고 있으며 전쟁이 벌써 1년을 훨씬 넘어 장기전화 되고 있는 가운데 이 전쟁의 영향으로 대한민국의 방산수출이 급증하여 173억불의 찬란한 성과를 이루며 최근 K-방산이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방산 분야에 혁신할 요소들이 다양하게 잠재돼 있어 이런 요인들을 적시에 해소하지 못하면 현재의 수출 분위기를 앞으로 계속 이어나가기 어렵다는 방산분야의 암울한 현실태를 토로하는 의견이 포럼을 통해 대두되었다. 방산은 새로운 무기체계를 개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따라서 방산의 지속 가능성에 가장 중요한 것은 수요 측면에서는 방산수출이며 공급 측면에서는 방산 전문인력 즉 사람이다. 방산 전문인력이 앞으로 계속 충원되고 지속 유지되지 못한다면 그 어떤 것으로도 이를 대체할 수 없다. 즉, 방산의 미래는 결국 사람에 달려 있다. 하지만 현재 방산업체들은 4차 산업혁명 기술과 관련된 연구개발 인력 수급 및 유지에 애로를 겪고 있으며, 군·관·연구기관에서 근무했던 전문인력도 취업제한으로 인해 업체가 필요할 때 제대로 활용하기 힘든 여건이다. 이에 한국안보협업연구소와 뉴스투데이는 ‘K-방산혁신 포럼’개최를 통해 방산업체가 겪고 있는 다양한 전문인력 수급 등 다양한 문제들을 전문가 발표와 토론을 통해 가감 없이 제기하고 적절한 대안을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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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5 16:05
  • [김희철의 CrisisM] 유명을 달리했지만 숨겨졌던 영웅을 찾아 독립유공자 예우(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고(故) 프랭크 얼 크랜스턴 윌리엄스는 1883년 8월 4일 미국 콜로라도에서 태어나 1908년 7월 충남 공주에서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사립 영명학교를 설립하고 30여년간 교장으로 조선인 교육에 진력했으며 한국 이름으로 우리암(禹利岩)이라고 불리웠다. 1967년 10월 16일에 공주사립영명실수학교 창립 30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는 동시에 동교 동창에서 동교장 우리암씨에 근속 30주년 기념동상을 동교정에 세우기로 결정하고 이후 동상 제작에 노력하여 동교 창립기념일에 동상제막식을 성대히 거행했다. 그런데 우리암 교장에 약력과 공헌을 들어보면 1907년 가을에 멀리 태평양을 건너와 당시 공주에 교육기관이 미약함을 보고 동읍 대화정 위에 명칭 명설학교(明設學校)라는 수동초막의 미약한 이 학교를 인수하여 영명학교로 명의를 변경하는 동시에 벽돌제 3층 양옥으로 훌륭한 교사를 신축하고 학급을 증설하여 수많은 청년 자질을 교육했다. 또한 1932년에 영명실수학교로 승격이 되어 이래 31년 간 세파에 난곡을 거듭하여 가며 1940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추방되기 직전까지 다수한 인재를 양성한 우리암씨의 공헌은 실로 막대하다. 또한 우리암 선생은 1943년 9월 인도 델리에서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원의 영어를 가르쳐 광복군의 한・영 연합작전에 측면 지원했다. 당시 인도에서 활약하는 조선용사들은 인도에 도착한(1943년 8월) 후 9월15일 인도군 총사령부에서 ‘피터하스’ 소교를 만나 상의한 결과 전체 동지들은 우선 영문과 방송 기술을 학습하기로 하고 ‘델리’에서 약 17공리 되는 곳에 있는 인도 학교에 가서 그 학교 교장 ‘웰리암’씨에게서 영문을 학습하였다. 학교장 웰리암씨가 예전에 미국 선교사로 조선 공주에서 35년 동안이나 있었던 우리암 선생으로, 조선어가 매우 유창하다. 인도의 조선인들은 오후에는 영문을 배우고 오전에는 총사령부에 가서 방송을 연습하며 광복군과 영국군의 연합작전을 지원하였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조선에 파견되었던 우리암 선생은 영명학교 교장으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킴은 물론 1943년 광복군의 한・영 연합작전에 투입된 것은 한국인에 대한 깊은 애정과 국제정세에 대한 높은 이해도가 감안된 것으로 보이며 이번에 건국포장에 추서되었고, 그는 1962년 6월9일 충남 공주에서 사망했다.. 참고로 영명학교 출신 독립유공자로 유관순(2019, 대한민국장), 유우석(1990, 애국장), 김현경(1998, 건국포장) 등이 있으며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영국군 연락장교로 1945년 전사 순국한 로널드 클린턴 베이컨이 2020년 애국장에 추서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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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1 14:28
  • [김희철의 CrisisM] 유명을 달리했지만 숨겨졌던 영웅을 찾아 독립유공자 예우(중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중국 난징에서 낙양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상해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하여 친일파 거두를 처단하였다가 장기간 옥고를 치르고 서대문형무소 재소 중 옥중 투쟁을 이끈 김현수 선생에게 애국장이 추서됐다. 고(故) 김현수 선생은 1933년 5월 상해로 도항했다. 그해 12월 중국 난징에서 한국 독립군의 산실인 낙양군관학교에 입학하여 민족의식 및 조선독립을 위한 훈련을 받았으며 1935년 4월 동교 졸업 후는 실천운동에 들어갔다. 1936년 2월 상하이에서 김구파의 일원으로 독립운동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하여 자금획득을 위해 동지 이하유(李何有), 김성청(金聖靑)과 함께 상해 정안사로(靜安寺路) 한규영(韓奎永) 집에 침입하여 현금 및 해로인을 강탈했다.(단도 및 권총이용). 1937년 11월11일 상해 카페에서 식사중 상해거류민 회장 이갑녕(李甲寧)을 적 일본 주구자라고 인정하여 민족혁명당원 최지삼(崔之三)과 함께 권총으로 저격하여 처단했다가 체포됐다. . 당시 김 선생은 독립군 양성 기관 및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한 이력 때문인듯 본명 외에도 김정안, 김정환, 주신화, 호영 등 다양한 이름을 사용했다. 그는 1938년 5월 2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인해 징역 10년에 처해졌는데 동년 7월27일부터 경성형무소에 수용되어 장기간 옥고를 치루고 있었다. 이때에도 형무소에서 1939년 7월25일에는 변기통 위에서 혹은 식기 구멍으로부터 머리를 빼고 “이번 사건은 종국 대우문제에 귀착하고 있는 것이니, 우리의 대우문제를 요구하라. 좋은 식사를 제공하고 수인(囚人)을 인격적으로 대우하라. 이번과 같은 불상사건을 단절시켜라. 실임자인 소장, 계호과장, 교무과장을 배격하라. 우리들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계속하자.”고 외치는 등 수형자 처우의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주도하는 등 타인에 솔선하여, 옥중 투쟁을 이끌어 1941년에는 징역 1년이 추가되었다. 이는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점령지인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단체 남화한인청년연맹의 맹원으로 친일파 거두 처단에 그치지 않고, ‘생지옥’으로 불리는 형무소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었음에도 수형자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옥중시위를 이끈 점은 강한 독립의지와 민족애를 보여준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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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30 15:23
  • [김희철의 CrisisM] 유명을 달리했지만 숨겨졌던 영웅을 찾아 독립유공자 예우(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일본의 민족 차별에 항거하여 일어난 대표적 민족운동 중 하나인 일명 ‘노다이 사건’을 주도하였다가 혹독한 처벌을 받은 고(故) 김영조 선생에게 애족장이 추서됐다. 고(故) 김영조 선생은 1940년 11월 경남 동래군(현 부산 동래구)에서 동래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경남학도 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 직후 편파 판정을 일삼은 심판장인 경남지구 위수사령관 노다이 겐지[內台兼治]를 구타하고 관저를 공격하였다가 체포되어 퇴학을 당했을 뿐 아니라 징역 8월을 받는 등 학생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혹독한 처벌을 받았다. 경남학도 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는 총동원체제기에 일본이 한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초군사훈련을 진행하기 위해 개최한 기형적 운동경기 대회이다. 당시 편파 판정을 일삼은 심판장 노다이 겐지의 이름을 따 불리게 된 ‘노다이 사건’은 광주학생운동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대표적 학생운동으로 손꼽히는데, 식민지 교육에 대한 불만과 민족 차별에 대한 울분이 폭발된 사건은 부산의 대표적인 민족으로 알려졌다. 어린 학생들이 일본군 장교를 강력히 응징할 정도의 과감한 행동은 당시 일본의 한국인에 대한 민족 차별이 얼마나 심각했는지와 전시 동원에 대한 민족적 분노가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음을 잘 보여준다. 같은 활동에 참여한 고(故) 김선갑(옥고 여독 순국)이 애국장, 이병도‧이세기‧김인규‧이달희‧이도윤‧안장원‧ 정두열 선생도 애족장에 서훈된 바 있다. (다음편 계속)
    • 오피니언
    2023.08.29 08:44
  • [김희철의 CrisisM] 유명을 달리했지만 숨겨졌던 영웅을 찾아 독립유공자 예우(중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선생은 1903년 나주에서 태어났으며 18세의 나이이자 3.1운동 1주년이 되는 1920년 3월1일 전남 나주군에서 일본인의 성지(聖地)로 간주되는 나주 신사의 외곽 화표(華表)에 40여 개의 돌을 던지고, 신사 본 건물에 ‘대한독립 만세’와 태극 무늬 등 독립 의지를 알리는 낙서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화표는 신사 입구에 세워지는 돌기둥을 가리킨다. 선생은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신사 불경죄 및 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고 무죄를 받았고, 석방될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3.1운동 1주년이 되는 시점인 1920년 3월1일 거사를 일으킴으로써 3.1운동 정신의 확산에 기여하고, 3.1운동 1주년으로 경비가 삼엄하던 시기 일본인의 성지인 신사를 과감히 훼손함으로써 독립을 향한 강한 의지를 알렸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어 이번에 대통령 표창으로 추서됐다. ■ 고(故) 박재선, 1960년 퇴학 30년 만에 졸업장을 받고, 93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서훈 고(故) 박재선 선생(여)은 졸업을 불과 2개월 앞둔 시점인 1930년 1월 부산에서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 국내 최대 규모의 학생독립운동인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는 격렬한 내용의 진정서 준비와 동맹휴교 계획 수립을 주도했다. 허나 사전 발각되어 경찰로부터 혹독한 고초를 겪고 학교 측으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으며 이번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됐다. 광주학생사건이 발생한 약 한 달 후인 어느 날 전교생이 전 공회당에 영화 구경을 하러 가는 전차에서 동래고보(현 동래고교) 학생대표로부터 “우리들도 일어서야 한다”는 연락을 받고 전기 두 조여사와 의논한 끝에 그날 밤 졸업반 동료 47명 전원을 영도(影島)의 박씨 언니 집에서 모이도록 하고 이곳에서 거사에 대한 구체적인 타협을 갖게 되었다. 이날 밤 36명이 모였으나 불참한 동료 1명이 배신, 학교에 내통한 탓으로 박씨와 조씨 등 4명은 퇴학 처분을 당하고 약 20여 명이 무기정학을 당하고 말았다.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자 약 2개월간을 경찰에 끌려다니면서 무진 고초를 당하고 석방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1월17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도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도 3학년생 47명 중 34명이 지난 11일(토요일) 오후에 부산 목도(牧島) 동교 생도 모(某)의 집에 모여 그중에 여덟이 수모(首謀)가 되어 내용이 자못 격렬한 열두 가지의 조항을 갖춘 진정서를 작성하여 그것을 13일(월요일) 조회시간 전에 학교 당국에 제출하고 일제히 동맹휴교를 실행하기로 결의하고 그 진성서를 초안까지 하여 정서(淨書)할 사람 한 명과 진성서 제출 책임자 두 명까지 선정하여 모든 협의를 진행하던 중에 그중 한 명의 학생이 그것을 자기 부모들에게 밀고(密告)를 하게 되어 그것이 드디어 학교 당국에게까지 알게 되어 거사하기 전에 발각되었다”고 보도됐다. 선생의 활동은 광주학생운동의 여파가 부산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동맹휴교 준비를 지휘한 선생은 퇴학 30년 만인 1960년 2월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의 후신인 경남여자고등학교로부터 명예 졸업장을 받은 바 있다. 광주학생운동은 일본의 민족 차별에 대한 분노가 누적되어 발생한 사건으로, 광주학생운동의 열기가 1929년 광주에 머물지 않고 해를 넘겨 1930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음을 보여준 사례이며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는 학생들의 움직임이 학교 측에 대한 진정서 전달과 동맹휴교의 형식으로 표면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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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6 22:44
  • [김희철의 CrisisM] 유명을 달리했지만 숨겨졌던 영웅을 찾아 독립유공자 예우(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유명을 달리했지만 숨겨졌던 영웅들에게 국가보훈부는 제78주년 광복절을 맞이해 100명을 발굴해 독립유공자 예우를 했다. 그중 고(故) 함복련 선생은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기생 신분임에도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인 3.1운동 대열에 적극 참여했는데 1919년 4월2일 경남 통영군에서 만세시위에 앞장서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다. 조선총독부 검사국 수형기록인 ‘형사사건부’에는 통영 만세시위에 참여한 함복련 선생이 1919년 4월 5일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류되고, 4월14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특히 경남 통영은 3.1운동 당시 기생을 포함해 상인・어민 등 사회적 소외층이 시위를 주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915년경 부도정 장터의 모습으로 장터 중심부가 각지에서 몰려든 인파로 빽빽하다. 1919년 4월2일 함복련 선생 등 통영 기생 7인이 군중과 함께 시위를 벌였던 1919년 만세시위 당시의 모습도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함복련 선생의 포상으로, 통영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검사국에 송치된 기생 7명 중 총 5명(함복련 및 정막래・이소선・김진한・김영산홍)이 포상했고, 나머지 2명도 다음 계기 공적심사 예정이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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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4 09:21
  • [김희철의 CrisisM] 유명을 달리했지만 숨겨졌던 독립유공자 100명 발굴 예우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제78주년 광복절을 맞이해 공주 영명학교 설립자로 한국광복군의 한・영 연합작전을 도운 미국인 프랭크 얼 크랜스턴 윌리엄스 선생(건국포장)과 만세시위에 앞장선 통영 기생 함복련 선생(대통령표창) 등 100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했다. 윌리엄스 선생은 한일합방 직전이었던 1908년 미국 선교사로 입국해 충남 공주군에서 영명학교를 설립한 후 30여 년간 교장으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1943년 인도 전선에서 한국광복군 인면(印緬)전구공작대 대원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한국 독립의 불씨를 살리고자 애썼다. 함복련 선생은 1919년 4월 경남 통영군에서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기생 신분에도 동료 기생들과 함께 통영의 중심부인 부도정 장터에서 만세시위에 앞장서 거족적 독립운동인 3.1운동의 열기가 통영 전역에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 이와 함께 3.1운동 1주년인 1920년 3월 일본 신사를 훼손한 남상홍 선생(대통령표창),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는 동맹휴교를 주도한 박재선 선생(대통령표창), 경남학도 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에서 민족 차별적 편파 판정을 일삼은 일본인 장교 노다이 겐지를 응징한 김영조 선생(애족장), 중국 상하이에서 친일파 수괴인 상해조선인민회 회장 이갑녕을 처단한 김현수 선생(애국장) 등 광복절을 계기로 모두 100명에게 독립유공자 포상을 했다. 이번에 포상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30명(애국장 8, 애족장 22), 건국포장 5명, 대통령표창 65명으로, 포상자 중 생존 애국지사는 없고, 여성은 13명이다. 건국훈장․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78주년 광복절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후손에게 수여됐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제78주년 광복절을 맞아 조국 독립은 물론 ‘자유’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분들께 독립유공자 포상을 할 수 있게 되어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며 “국권 상실이라는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오직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온몸을 바친 선열들의 고귀한 생애와 정신이 우리 후손들에게도 온전히 계승될 수 있도록 선양하는 것은 물론, 앞으로도 한 분의 독립운동가라도 더 찾아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 오피니언
    2023.08.22 15:12
  • [김희철의 CrisisM] 일본 생존 마지막 애국지사 오성규, 광복군 제3지대장인 김학규 장군 묘역에 환국 신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 박민식 장관이 11일~13일 2박 3일 일정으로 정부대표로 일본을 방문해 일본 내 유일한 생존 독립유공자이자 광복군인 오성규 애국지사를 영주 귀국의 목적으로 13일 국내로 모셨다. 11일 일본으로 넘어간 정부대표단은 바로 도쿄로 이동해 조국 독립을 위해 마지막까지 헌신한 오성규 애국지사(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를 위문하고 자녀들과 면담을 통해 국내로 모시는 방안 등에 대해 논의하여 결정했다. 이번 정부대표단의 방일은 2018년 배우자의 사망 이후 아파트에 홀로 거주 중인 오성규 지사가 본인 생의 마지막은 고국인 대한민국에서 보내고 싶다는 의사를 국가보훈부에 밝히면서 이루어졌다. 1923년생으로 올해 100세인 오성규 지사는 일제 강점기 ‘주태석’이라는 가명으로 중국 만주 봉천 소재 동광중학을 중심으로 이영순, 조승회 등과 비밀조직망을 만들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에 조직망이 노출되자 동지들과 함께 만주를 탈출해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한 오 지사는 1945년 5월 한미합작특수훈련(O.S.S 훈련)을 받고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던 중 8월15일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에도 오 지사는 교민보호와 선무공작을 위해 조직된 한국광복군 군사 특파단의 상해지구 특파단원으로 마지막까지 활동하였다. 정부대표단은 현지에서 먼저 오성규 지사의 건강상태를 확인해 귀국에 어려움이 없다고 판단되어 13일 하네다공항을 출발해 오 지사를 국내로 모셔와 가장 먼저 국립묘지를 찾아 광복군 제3지대장이었던 김학규 장군 묘역에 환국 신고를 하며 참배했다. 이후에는 서울 중앙보훈병원에서 오 지사의 건강상태를 정밀 검진해 건강 정도에 따라 보훈요양병원 등에서 건강과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최고로 예우하고, 건강상 특이점이 없다면 오는 제78주년 광복절 경축식 행사에도 참석할 예정이다. 오성규 지사가 국내로 영주 귀국하여, 국내 독립유공자는 김영관 지사(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등 7명에서 8명으로 늘어나게 되고, 국외 거주 독립유공자는 미국에 이하전 지사(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만 남게 된다. 한편, 정부대표단은, 오성규 지사의 영주 귀국 지원 외에도 도쿄에 있는 이봉창 의사(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의 순국지인 이치카야형무소 터와 재일학도의용군 충혼비를 참배하고, 재일본 YMCA 회관 내 기념자료실 등 독립운동 유적지를 답사(踏査)했다.. 또한 박열 의사(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의 변론을 맡은 후세다쓰지(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의 후손과 재일한국유학생 대표 등과 면담도 진행했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일본에 계신 마지막 생존 독립유공자이신 오성규 지사님을 직접 찾아뵙게 되어 남다른 감회를 느낀다”며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지사님께 무한히 감사드리고 대한민국에서 본인의 소원대로 마지막 여생을 편안히 보내실 수 있도록 최고의 예우를 다하겠다”고 출국에 앞서 밝혔던 것처럼 국립묘지 참배시에 직접 휠체어를 끌며 오 지사를 모셨다.
    • 오피니언
    2023.08.15 19:01
  • [김희철의 CrisisM] 독립운동가 최재형-최 엘레나 부부, 순국 100년만에 고국에서 해후(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제78주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8월14일에 “백년만의 해후, 꿈에 그리던 조국 대한민국” 표어(슬로건)의 부부 합장식이 거행된다. 또한 광복회 등 독립 관련 보훈단체 뿐만 아니라 많은 국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8월 12~13일간 서울현충원 현충관에 국민추모공간을 마련하고 다양한 추모·참배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1860년 08월15일 함경북도 경원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은 1908년 4월 러시아 연해주 연추에서 이범윤 등과 함께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총재로서 한인동포들의 단결과 애국심을 고취하고, 의병세력을 규합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했다. 그해 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는 ‘대동공보’의 사장으로서, 한인동포들의 권익과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한 언론활동과 안중근 장군 등 독립군의 지원 활동도 했다. 이후 1911년 12월에 러시아 연해주 한인동포들의 권익과 조국 독립을 위해 조직된 한인단체 권업회의 회장으로, 1918년 6월 전로한족중앙총회에서 명예회장으로도 선출됐다. 다음해인 1919년 3월에는 대한국민의회 외교부장으로 선임되어 그해 4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재무총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20년 4월 일본군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다가 순국했으며, 일제는 유해를 가족에게 넘겨주지 않고 매장장소조차 숨기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국가보훈부가 최재형 선생 순국 100여년만에 순국 추정지의 흙과 배우자이신 최 엘레나 여사의 유해를 대한민국으로 모셔와 서울현충원에 부부합장묘를 만들게 되어 너무나 뜻깊다”며,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유해마저 찾을 수 없었던 순국선열을 단 한분도 소홀함 없이 예우하는 일류보훈을 실현하는 첫걸음으로 생각하고 앞으로도 순국선열을 예우하는데 모든 정성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 오피니언
    2023.08.14 08:43
  • [김희철의 CrisisM] 독립운동가 최재형-최 엘레나 부부, 순국 100년만에 고국에서 해후(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때, 사업가로 자수성가해 축적한 막대한 부를 조국 독립과 수십만 시베리아 이주 동포들을 위해 사용하다가 일제 만행에 의해 불의의 객이되어 유해도 못 찾은 독립운동가가 있었다. 국가보훈부는 지난 1일 “최재형 선생(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순국장소로 추정되는 러 우수리스크의 흙과 70여 년간 키르기스스탄 공동묘지에 묻혀 있던 부인 최 엘레나 여사의 유해를 모셔와, 원래 최재형 선생의 묘가 있던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108번 자리에 합장하겠다”고 밝혔다.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묘는 1970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108번에 조성되었으나, 이른바‘가짜 유족 사건’으로 멸실되어 현재까지도 해당 묘역은 빈터로 남아있다. 이후 유족들은 멸실된 묘의 복원을 지속적으로 희망해왔으나, 최재형 선생이 1920년 4월 일본군에 의해 순국한 이후, 현재까지 유해를 찾을 수 없어 유골이나 시신을 안장하도록 규정한 국립묘지법에 따라 묘를 복원할 수 없었다. 이에 국가보훈부는 유골이나 시신이 없는 순국선열의 위패와 배우자의 유골을 함께 묘에 합장할 수 있도록 올해 1월 국립묘지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6월30일 국회 통과, 7월11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지난 18일 시행되었다. 이로써, 이역만리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해 유해를 찾지 못한 최재형 선생을 부인 최 엘레나 여사와 함께 국립묘지에 합장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였다. 9세 때 부모를 따라 시베리아 연해주로 이주한 최재형 선생은 사업가로 자수성가해 축적한 막대한 부를 조국 독립과 수십만 시베리아 이주 동포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러일 전쟁 이후 국외 항일조직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총재가 되어 항일의병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안중근 의사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또한, 대동공보(大東共報)를 인수해 재창간하고 애국심을 고취하는 기사를 게재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무총장으로 선출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과 한인사회에 대한 기여로 ‘시베리아 동포의 대은인(大恩人)’으로 추앙받았다. 부인 최 엘레나 페트로브나 여사는 3남 최 발렌틴과 5녀 최 올가의 회고에 따르면 1897년경 최재형 선생과 결혼한 이후 8명의 자녀를 낳고, 선생의 독립운동을 내조하였으며, 안중근 의사 순국 이후 남은 가족들을 보살핀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남편인 최재형 선생의 순국 이후에는 자녀들과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다 1952년 사망했고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국가보훈부는 최재형기념사업회와 함께 키르기스스탄 현지에서 유해 수습 등 준비 절차에 돌입해, 오는 7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최 엘레나 여사의 유해를 국내로 모셨다. 또한, 최재형 선생이 순국하신 장소로 추정되는 러시아 우수리스크의 최재형 선생 기념관(구 최재형 선생 고택) 뒤편 언덕에서 채취한 흙을 11일 국내로 반입해 부부를 최고의 예우로 국립묘지에 안장한다. 최 엘레나 여사의 유해를 국내로 모시는 과정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7월 중순 키르기스스탄 현지에 의회 외교차 방문한 정우택 국회부의장의 협조 요청과 주키르기즈공화국 대한민국 대사관의 도움, 기념사업회의 대국민 모금운동과 엘지(LG)유플러스의 후원 등 민간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 적기에 가능해졌다. (다음편 계속)
    • 오피니언
    2023.08.11 13:36
  • [김희철의 CrisisM] 절체절명 위기였던 마산전투의 재조명(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전 한국일보 워싱턴특파원이었던 정일화 박사는 제27연대장 마이켈리스와 포병 장교인 테리 중위의 리더십 고찰과 죽미령에 최초 투입한 스미스부대와 미24사단의 고군분투를 분석 자료를 발표했다. 정 박사는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2차대전의 영웅이었지만 미 현장체크단이 경질까지 검토했던 워커 장군의 오판과 리더십을 비판하면서 이런 약점들을 미 제8군의 예비로서 낙동강전선의 소방대 역할을 한 제27연대에 의해 극복했다고 분석했다. 아이젠하워의 부관이었던 마이켈리스 대령이 지휘한 27연대는 7월말 옥천, 왜관지역에서 방어를 하다가 8월2일 마산 진동리, 6일에는 창원, 12일에는 영산, 14일에 경산으로 이동하면서 계속 북한군에 타격을 주었고, 18일에는 다부동에 급파되어 백선엽 장군을 지원하며 최초 탱크전에서 압승한 뒤에 다시 25일 마산으로 복귀했다가 9월1일 함안 전투에 가담하는 등 전승의 신화를 달성한 낙동강방어선의 소방대로 탄생했다. 정 박사는 특히 다부동 전선이 안정화 된 요소중에 하나는 당시에 귀순한 정봉욱 중좌(육군훈련소장 역임, 소장 예편)의 북한군 포대 및 탄약고 위치 정보 제공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또한 27연대가 계속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효과적으로 표적을 제압하는 긴밀한 화력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며 이는 포병 관측장교인 테리 중위 덕택이라며 그의 리더십과 활약을 언급하며 발표를 마쳤다. 토의 시간에는 박정기 회장의 스미스부대에 대한 보훈 활동으로 감동을 주었고 자리를 옮겨 점심을 하면서도 그동안 간과되었지만 이번 포럼으로 재조명된 마산전투와 국가존립을 위한 안보의 중요성 및 기타 애피소드로 꽃을 피웠다.
    • 오피니언
    2023.08.09 10:53
  • [김희철의 CrisisM] 절체절명 위기였던 마산전투의 재조명(상)
    지난 20일 오전 한미안보연구회(COKUSS)는 미27연대를 중심으로 마산전투를 재조명하는 안보포럼을 개최했다.[사진=김희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 20일 오전 용산 전쟁기념관 4층에서 한미안보연구회(COKUSS) 김병관(육사28기) 회장, 박정기(육사24기) 전 한국전력공사 사장을 비롯한 안보전문가 및 예비역 장성 등 50여 명이 참석한 마산전투를 재조명하는 2023년 3차 안보포럼이 열렸다. 이번 행사는 6‧25남침전쟁 중에 다부동‧영천 전투, 인천상륙작전 등에 가려 소홀하게 평가되었던 낙동강 전선의 마산지구 전투에 대해 미 제27연대의 소방대 역할을 중심으로 한반도 방어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숨겨진 팩트를 발굴해 소개하는 성과가 있었다. 1부 발표를 한 허남성(육사26기) 국방대 명예교수는 한반도에서 전개된 6‧25남침전쟁을 4댠계로 구분하여 설명하면서 좀처럼 접하기 어려웠던 기록 사진들을 제시하여 감동을 주었다. 허 박사는 전쟁사 전문가답게 “팔로군 출신 방호산이 지휘하는 북한군 6사단이 개전초기 신속하게 전주-광주-목포-보성을 점령하며 압박을 가해 워커장군을 최대의 위기로 몰아넣었는데, 이에 미8군은 미 25사단을 마산 정면으로 36시간 동안 240Km 긴급히 이동시켜 44Km밖에 남지않은 부산을 향한 우회로를 차단 방어했다”고 말했다. 이때 Kean특수임무부대와 미 27연대의 활약이 돋보였으며 북한군 7사단까지 포함해 추가로 전개한 9월 공세를 막아냄으로 대한민국 존망의 갈림길인 부산교두보를 지켜냈다며 이 마산지구 전투로 전승에 대한 자신감이 붙어 대반격의 불꽃을 피웠다고 강조했다.(하편 계속)
    • 오피니언
    2023.08.08 10:34
  • [김희철의 CrisisM] 이승만 전 대통령 58주기 추모식 개최(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한 6·25남침전쟁에서 위기의 대한민국을 구하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등 독립 이후 대통령 중심제를 확립한 데 이어 정치, 경제, 교육, 군사 등 여러 분야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토대를 쌓았다. 이런 가운데 이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 논의에 속도가 붙고 있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는 지난달 29일 출범했다. 원로배우 신영균 한주홀딩스코리아 명예회장은 서울 강동구에 있는 본인의 사유지 약 4천평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상태다. 이 대통령은 독립운동 등의 업적으로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으며 1965년 90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추모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모두 이끈 명실상부한 국부(國父)이자 공산 세력의 침입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수호한 독립과 호국을 아우르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큰 별”이라며 존경심을 표했다. 또한 박 장관은 “정부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해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신 모든 분들이 제대로 예우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 오피니언
    2023.08.01 14:37
  • [김희철의 CrisisM] 이승만 전 대통령 58주기 추모식 개최(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이승만 초대 대통령 서거 58주기 추모식’이 19일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사)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회장 황교안) 주관으로 개최됐다. 추모식사(式辭), 내빈 추모사, 추모의 노래, 헌화·분향 및 유족인사 등의 순으로 진행된 이날 추모식에는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기념사업회 회원, 시민 등 500여 명이 참석했다. 1875년 황해도 출생인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1896년 서울에서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하고 협성회보와 매일신문 주필로 활동했다. 1898년 독립협회 해산과정에 고종황제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돼 1904년 8월까지 5년 7개월 간 한성감옥에 투옥됐으며, 감옥에서 청일전기(淸日戰紀)를 편역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했다. 1904년 11월 미국으로 건너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조지워싱턴 대학,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에서 각각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받고 1910년 귀국했다. 1912년 세계감리교총회 한국 대표로 임명돼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에 근거를 두고 ‘태평양잡지’, ‘태평양주보’를 발간했으며, 박용만·안창호와 협력해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4월에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됐으며, 1921년 5월에는 워싱턴 군축회의, 1933년에는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해 일본의 침략을 폭로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구미위원장으로 미국 대통령과 국무성을 상대로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하는 외교활동을 벌였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하편 계속)
    • 오피니언
    2023.07.30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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