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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7)]교육훈련 제일주의로 최우수부대 성과 달성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체력도 보강하고 지형 및 작전계획을 숙지토록 유도했던 한탄강 주변의 군자산, 마차산, 감악산 등 산악지역 등반은 필자에게 또다른 추가 임무를 부여했다. 산 정상에 올라 간부들에게 작전계획과 지명 유래를 설명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간이 전술토의도 병행했다. 이를 위해 필자는 늘 한 장짜리 지명 유래 및 지역 전사 설명서를 만들어 즐건 산행이지만 간부들이 지형 숙지를 통해 작전에 보다 효율적으로 기여하는 도랑치고 가재잡는 성과를 올려야 했다. 무적태풍부대 인접인 마차산은 동두천시의 소요동과 연천군 전곡읍 천파리의 경계에 위치한 588m높이의 산으로 3번 국도와 경원선 철도를 사이에 두고 소요산과 마주보고 있다. 이제까지 소요산 유명도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마차산인데 산 정상에 오르면 사방으로 조망이 막힘없이 터진다. 마차산은 감악산의 지맥으로 시의 서북쪽을 감싸고 있으며 소요동 서단에 위치하면서 한북정맥과 연결되어 있다. 꼭대기에 당나라 장수 설인귀의 비가 있었는데 감악산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산 정상엔 축성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산 남쪽에 마고개가 있고 북쪽에는 옥녀봉이 솟아 있다. 산이름은 ‘광여도’ 등에는 마차산(磨嵯山)으로, ‘대동여지도’에는 마차산(摩次山), ‘팔도군현지도’에는 마차산(磨差山)으로 표기되어 있고, ‘조선지형도’에 마차산(磨叉山)으로도 사용되어 왔다. 사진의 설명서에 있는 감악산(紺岳山)은 화악산, 송악산, 관악산, 운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의 하나로 높이는 해발 675m이다. 지명은 바위 사이로 검은빛과 푸른빛이 보인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지역 주민들에게는 감박산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 신라시대부터 무속신앙에서 영산으로 여겨 국가적으로 소사(小祀)의 격으로 제사를 올렸다. 또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정상은 평지인데 석단이 있고 그 위에는 감악산비 혹은 비뜰왕비라 불리는 석비(石碑)가 있다. 인근의 전설에 7세기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실은 이 지역 사람이고 감악산비는 설인귀의 비석이라고 전해지지만, 이는 지역주민들이 설인귀를 동향인으로 삼은 결과일 뿐 역사적 사실로 증명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비석은 지역 민간신앙에서 감악산신의 상징과도 같다. 대한민국에서 흔히 영산이라 불리는 산에는 사찰들이 많기 마련인데, 감악산은 감악산신 신앙이 너무나 강해서 들어섰던 사찰마저 대부분 폐찰이 되었고, 현재는 범륜사를 비롯해, 수월사, 봉암사, 미타암 등의 절이 남아있다. 하지만 인근의 수량이 풍부한 운계폭포 등으로 절경이다. 정상에서는 북쪽 방면에 있는 임진강 건너편으로 휴전선 일대가 보이며, 날이 맑으면 개성시의 송악산까지도 희미하게나마 보이곤 한다. 정상인 장군봉 바로 아래에는 임꺽정이 관군의 추격을 피하고자 숨어지냈다는 전설이 있는 ‘임꺽정굴’도 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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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6)]교육훈련 제일주의로 최우수부대 성과 달성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무적태풍부대는 종무식날에 작전항공장교(S-3Air)들을 소집하여 항공기 유도능력 측정을 하였고, 연초 시무식날에는 개인화기 사격측정을 하여 붐을 조성했던 ‘교육훈련 제일주의’를 추진했다. 교육훈련을 부대운영 중점으로 강력히 시행하자 훈련을 통해 숙달된 부대원들의 전투준비 태세는 자연스럽게 강화되었고, 이러한 분위기에 휩쓸려 장병들의 사기가 고양되면서 안전사고 없는 완벽한 부대관리를 하는 성과도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교육훈련 제일주의’ 강력추진 붐 조성에 따라 숙달된 부대원들은 각종 검열 및 평가에서 좋은 성적도 올리게 되었고, 그해 연말에는 전투지휘검열 최우수 및 3년 연속 대통령부대표창을 수상했다. 한편 이영대 사단장(학군4기)은 교육훈련의 일환으로 참모 및 실무자들과 함께 주둔지 및 작전지역 주변의 마차산, 감악산, 군자산 등의 중요 산악지역 등반을 통해 체력도 보강하고 지형을 숙지토록 유도했다. 그 덕분에 상급 부대에서 주관한 각종 전술토의시에 현 지형을 두발로 확인한 부대원들은 자신있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고 상하급자 사이에 느꼈던 거리감도 같이 땀을 흘리며 해소되어 자연스럽게 원활한 의사소통이 되는 계기도 마련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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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5)] 힘들고 급할 때 찾는 친구가 진정한 벗(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자신도 모르게 공중전화 박스에 다가간 필자는 무심코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이 울리더니 “여보세요..?”하고 반가운 고등학교 미술부 동창인 이상엽 화백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필자는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고, 그는 재촉하며 “여보세요”만 반복했다. 잠시 안정이 되자 “상엽아, 희철이야 ...”하고는 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사무실에서 야간 작업을 하던 그는 “무슨 일이냐?”며 울먹이는 필자의 위치를 묻고는 전화를 끊었다. 자정이 넘어갈 즈음에 중환자실 대기실에서 웅크리고 쭈그려 앉아 아버님 수술 결과를 기다리던 필자 앞에 그 친구는 나타나 어깨를 두드렸다. 그는 “이렇게 마냥 기다리지 말고 잠깐 나가자...”라며 서울시 충무로에 위치한 자신의 일러스트 회사 사무실에서 광고 디자인 작업중에 물감이 묻은 손을 내게 내밀었다. 그는 밤샘 작업을 하다가 필자의 전화를 받고 평택까지 단숨에 달려와 병원 앞 여관방에 함께 들어가 소주와 오징어포 안주를 서로 나누며 아버지의 교통사고로 실의 빠져있는 필자를 위로했다. 그는 통이 트자 밤샘의 피곤함도 잊은 채 사업을 위해 다시 서울로 향했다. 친구중에 진정한 벗의 의미는 무엇일까? 초등학교, 중고교, 대학교 및 사회 친구 중에 본인도 모르게 전화 다이얼을 돌릴 수 있는 벗이 있다는 것에 필자는 행복한 놈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고교시절 미술부 반장을 하며 우정을 나누었고 졸업후 10여년 지난 뒤에 충무로 대로변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자 다짜고짜 필자를 두드려 팼던 죽마고우(竹馬故友)인 동창이었다. ([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126)] ‘충무로 한복판에서 구타당한 장교’ 참조) 그 친구의 배려 덕분에 아버지는 성공적인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로 옮겼고, 4주 동안 무의식(코마) 상태에서 계시다가 회복되어 장기간 치료 후에 다행히 건강을 되찾았다. 사전적 정의인 ‘친구(親舊)’는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다. 그중에는 도원의 결의처럼 같이 한날에 죽자고 약속하는 경우나 먼저 죽으면 3일장을 꼬박 함께하겠다고 약속하는 친구도 있지만, 힘들고 외로우며 급할 때 조건없이 연락해서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진정한 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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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4)] 힘들고 급할 때 찾는 친구가 진정한 벗(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인생에서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처럼 좋은 일에는 방해(妨害)가 되는 안좋고 나쁜 일도 많이 생긴다. 연말 대통령 후보들의 장병 격려차 부대방문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루고, ‘교육훈련 제일주의’를 강조했던 이영대 사단장(학군4기)의 지휘의도를 구현하기 위한 시무식 사격측정 등의 이벤트를 통해 장병들의 사기가 높아져 부대 분위기가 활성화될 즈음에 개인적인 악재가 터졌다. 그해 1월 중순경 이른 저녁에 어머니의 울음 섞인 전화를 받았다. 평택 집앞 도로에서 아버님의 승용차와 트럭이 충돌하는 교통사고가 발생하여 아버님이 병원으로 후송중이며 중태라는 소식이었다. 최전방을 지키는 부대의 사단작전보좌관이라는 직책 때문에 멀리 갈 수 없는 입장이라 고민하다가 할 수 없이 참모에게 보고하니 “바쁜 당면 업무는 작전장교에게 맡기고 빨리 아버님이 입원한 병원으로 가보라”고 배려를 해주었다. 어린 아들이 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가족은 집에 대기시키고 우선 필자가 먼저 출발했는데 아버님 걱정에 눈물이 자꾸 흘러 운전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였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최대한 빨리 달려서 평택 병원에 도착하니 마침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아버님이 수술실로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응급실 침대 위에 웅크리고 쓰러져 있는 아버지는 신음만 계속 내뱉으셨고, 어머니는 어찌할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셨다. 수술 신청 및 동의서를 작성하자 곧바로 수술실로 들어가시는 피투성이의 아버님 모습을 지켜보며 당황하시는 어머니를 우선 진정시켜 집으로 들여보냈다. 담당 의사는 일단 응급처치를 했는데 워낙 상처가 심하고 다친 곳이 많아서 수술 시간과 생존 여부를 예측할 수 없다며, 필자에게는 멀리 가지말고 대기실에서 연락을 기다리라고 당부하고 수술을 시작했다. 평택 병원의 중환자실 대기실은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장기간의 간병을 통해 대부분의 가족들은 지쳐 초췌한 모습에 쪼그려 앉아 있고, 간호사의 호출에 놀라 달려가거나 환자의 상태가 안좋아 통곡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시간, 두시간이 지나면서 밖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아버님 수술 경과가 걱정되었지만 답답한 마음에 혼잡한 대기실에서 잠시 벗어나 병원 밖으로 나갔다. 밤 11시가 넘어가는 시간이라 길거리의 인적도 뜸해진 상태에서 병원 입구의 공중전화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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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3)] 힘들고 급할 때 찾는 친구가 진정한 벗(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순우리말에 ‘벗’은 비슷한 또래로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이나 늘 가까이하여 심심함이나 지루함을 달래는 사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며 비슷한 의미로 교우, 동무, 벗님 등으로도 사용한다. 반면에 ‘친구(親舊)’는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또는 나이가 비슷하거나 아래인 사람을 낮추거나 친근하게 이르는 말로 유의어로 교우, 동료로 사전에 정의되어 있다. 친구 관련 사자성어에는 관포지교(管鮑之交, 옛날 중국의 관중과 포숙처럼 친구 사이가 다정함을 이르는 말, 매우 다정하고 허물없는 친구사이), 막역지우(莫逆之友, 마음이 맞아 서로 거스르는 일이 없는, 생사를 같이할 수 있는 친밀한 벗), 죽마고우(竹馬故友, 대말을 타고 놀던 벗이라는 뜻으로, 어릴 때부터 같이 놀며 자란 벗, 불알동무, 불알친구, 소꿉동무)가 있다. 또한 간담상조(肝膽相照, '간과 쓸개를 내놓고 서로에게 내보인다'라는 뜻으로, 서로 마음을 터놓고 친밀히 사귐), 금란지교(金蘭之交, 단단하기가 황금과 같고 아름답기가 난초 향기와 같은 사귐이라는 뜻으로, 우정이 깊은 사귐) 등으로 친구 관계를 표현한다. 그밖에 백아절현(伯牙絶絃, 백아가 거문고 줄을 끊어 버렸다는 뜻으로, 자기를 알아주는 절친한 벗의 죽음을 슬퍼함을 이르는 말)이란 흔치 않은 고사성어도 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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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2)] 참모의 충성스런 직언과 지휘관의 탁월한 결심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93년 첫날 시무식을 마치고 상황회의 시간에 이영대 사단장은 ‘교육훈련 제일주의’를 부르짖었다. 그리고 사단 사령부의 전간부는 앞서 제시한 대로 단독군장을 하고 사격장에 집결하여 개인화기 사격측정을 하면서 ‘교육훈련 제일주의’ 첫날을 시작했다. 헌데 사단장과 김형배 작전참모의 사전 담판이 있었다는 사실은 대부분 모르고 있었다. 김 작전참모는 사단장의 부대운영 중점을 정하기 전에 사단장실에서 독대하며 “사단장님의 색깔은 어떤 색이십니가?”라고 질문하자, 사단장은 “치밀한 ‘부대관리’를 통해 부대가 안정된 상태에서 강인한 ‘교육훈련’을 하여 완벽한 ‘전투준비’를 한다”라고 포괄적으로 답했다. 참고로 지난번 무적태풍부대 지휘관이었던 이재관 사단장(육사21기)은 사고를 예방하는 ‘부대관리’, 그 앞 김길부 사단장(육사20기)은 ‘전투준비’, 그전인 이상호 사단장은 ‘교육훈련’을 가장 우선하는 부대운용 중점을 선정했었다. 사단장의 의중을 파악한 김 참모는 “모든 것을 취하려 함은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역대 사단장들의 부대운용 중점을 비교하며 우선적으로 ‘교육훈련 제일주의’를 부대운용 중점으로 할 것을 재차 건의를 했다. 참모의 건전한 판단에 의한 정확한 건의을 청취한 이영대 사단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심을 하여 ‘교육훈련 제일주의’가 탄생되었다. 철저한 교육훈련을 통해 안정된 부대관리도 할 수 있고 그 성과로 전투준비에도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사단장은 ‘간부는 견인포가 아닌 자주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기본적으로 전투적인 사고를 견지하고,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전투준비를 위해 스스로 어떻게 효과적인 교육훈련을 할 것인가 생각하며 모두 창의적·적극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자”고 덧붙였다. 사단장의 의도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전체 부대원들의 참여가 중요했다. 따라서 참모는 ‘교육훈련 제일주의’ 분위기 조성을 위해 타부대와 달리 유일하게 12월31일 종무식날에는 항공기 유도능력 측정을, 신년초 시무식날에는 사단 전간부의 개인화기 사격측정을 하도록 조치했다. 지휘관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난제·고충을 해결하는 것이 참모 책무라고 강조했던 김 작전참모는 ‘교육훈련 제일주의’를 부대운용 중점으로 선정하는 과정과 붐조성 위한 사격 측정 등을 통해 어떻게 임무를 수행해야 바르고 유능한 참모가 될 수 있는가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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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1)] 참모의 충성스런 직언과 지휘관의 탁월한 결심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손자병법 “허실” 편에는 ‘무소불비 무소불과(無所不備 無所不寡)’라는 말이 있다. 이는 “모든 것을 준비했다는 것은 아무것도 준비하지않는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전쟁 중에서 공격과 방어작전을 수행함에 있어 우선순위를 두고 작전을 계획하는 것이 실패를 방지하며 승리하는 길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일상도 마찬가지이지만 전장에서 모든 곳을 공격하거나 방어를 하면 예상치 못하는 곳에 적이 집중하여 작전함으로서 상대적 열세로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따라서 무엇이 우선순위인지 미리 판단하고 작전을 준비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교훈의 사자성어이다. 그 이유는 자원과 인력은 한정되어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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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1)] 참모의 충성스런 직언과 지휘관의 탁월한 결심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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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0] 참모의 충성스런 직언과 지휘관의 탁월한 결심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연말 장병 격려차 부대를 방문한 대통령 후보들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었던 12월이 가면서 연말연시가 되자 ‘교육훈련 제일주의’를 강조했던 이영대 사단장(학군4기)의 지휘의도를 명확히 알 수 있는 이벤트가 있었다. 지난 봄에 ‘지휘관의 구상을 실현하는 난제·고충 해결이 참모 책무’라는 제목으로 참모들의 임무 수행 과정을 주제로 글을 게재했지만 이번은 상황이 조금 특이하게 달랐다. ([직업군인 사용설명서(203~207)] ‘특공대대 여군팀 창설 비화’ 참조) 새롭게 작전참모로 보직을 받은 김형배 중령(육사34기)이 앞선 사단장들의 지휘 중점을 보고하고 충성스런 본인의 직언을 통해 사단장을 설득하여 지휘관의 부대운영 중점을 정했기 때문이다. 작전참모는 사단장과 의견을 조율하여 ‘지휘관의 구상’을 만들었고, 그것을 지휘관과 참모가 실현하기 위한 난제와 고충을 해결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는데 때마침 이영대 사단장과 참모의 생각이 일치하여 ‘교육훈련 제일주의’라는 부대운영의 중점이 선정되었다. 따라서 12월31일 종무식날에 예하 대대 및 연대 작전항공장교(S-3Air)들을 소집하여 항공기 유도능력 측정을 하였고, 신년초 시무식날에는 사단 전간부를 대상으로 개인화기 사격측정을 하여 붐을 조성하였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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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00] 참모의 충성스런 직언과 지휘관의 탁월한 결심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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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9]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㉓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하지만 YS(김영삼)는 ‘양김시대’의 역사에서 보듯이 말보다는 행동으로 실천하고 약속을 지키는 지도자였다. 그는 1961년 5·16 이후 기나긴 군부독재를 종식시키며, 1993년 2월25일 대통령에 취임해 자신의 정부를 최초의 '문민정부'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검찰 사정과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등 정치개혁을 필두로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척결에 앞장섰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수수 폭로 및 구속, 조선총독부 철거, 금융실명제와 지방자치제 실시 등 핵심적인 개혁을 통해 국민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특히 금융실명제 실시는 금융거래의 투명성과 형평 과세를 통해 경제의 투명성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마침 대통령 당선자 YS의 부대방문에 맞춰 당선을 축하하며 행운을 알리는 하얀눈이 온 세상을 덮었다. 또한 행동으로 보여주던 YS가 남기고 간 것은 놀라울 정도였다. 위문내용이 VTR 5대, 신형TV 40대, 격려금 1000만원으로 대통령 당선자의 위력은 대단했다. 각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방문 준비를 총괄하여 지휘한 작전참모 김형배 중령이 뒤풀이하던 회식 자리에서 “조직을 단결시키고 리더로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은 ‘돈’과 ‘인사’이다”라고 던진 한마디가 명언이 되어 귓가를 맴돌며 가슴에 와 닿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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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9]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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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8]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㉒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드디어 12월30일 마지막 방문자인 YS(김영삼)가 부대에 들어섰다. 하지만 다른 대통령후보 및 주요 인사들의 격려 방문과는 확연히 달랐다. 특이하게도 YS 비서실은 방문 일정을 30일로 고집했는데 그날 숫자를 거꾸로 읽으면 03이 되기 때문이라고 부대원들은 추측했다. 다른 후보들과 차별화된 것은 이미 노태우·김종필(JP)과 손잡고 3당 합당을 결행하며 집권 민자당 후보였던 YS가 1992년 12월18일 실시된 제14대 대선에서 영원한 맞수이던 김대중 후보(민주당)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됐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통령 경호실 요원들을 대동하고 등장한 대통령 당선자 YS는 66세의 나이답지 않게 훨씬 젊어 보였고, 얼굴에는 기름이 잘잘 흐르며 빛이 났다. 꽉 아문듯한 입술에서는 그의 특유한 고집과 의지를 느낄 수 있었으나 격려사를 할 때에는 약간 실망했다. 그는 격려사를 하면서 가끔씩 힘을 주어 강한 소리로 강조했는데 무슨 내용의 말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방문했던 달변가 DJ(김대중), JP(김종필)와 너무도 비교가 되었다. 순간 이틀전에 방문한 대한적십자사 총재 강영훈 장군의 모습이 스쳐갔다.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을 통해 겪게된 고난의 시간을 학문으로 극복한 강영훈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용장(勇將)이자 덕장(德將)이었다. 또한 군후배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덕담을 던지며, 벽창호처럼 올곧은 참군인의 길을 걷고 청렴하고 강직한 이미지의 국무총리를 역임한 저력을 지닌 적십자사 총재로서 자랑스런 군선배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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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8]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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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7]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㉑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이 무렵 평화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자격으로 무적태풍부대를 방문한 69세의 DJ(김대중)는 역경의 정치활동 중 모진 고문을 받아 다친 다리를 절면서 그 유명한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그는 그동안의 세월에서 파란만장(波瀾萬丈)한 길을 걸어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마치 고향마을 어르신이 손자들을 만나기 위해 부대를 방문한 것 같은 온화한 표정이었다. 회의실에서의 업무보고를 받던 그는 선거를 앞두고 표를 의식해서인 건강함을 과시하듯 여유를 보여주며 특유의 달변을 쏟아냈다. 참석한 부대장들과 참모들은 전라도 사투리가 약간 가미된 특유 억양의 DJ 언변에 모두 빨려들어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선거를 코앞에 둔 터라 급하게 마무리하고 부대를 떠났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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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7]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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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6]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⑳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DJ(김대중)는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와 겨루었으나 패배하였다. 그후 미국·일본 등지에서 박정희 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다가 1973년 8월8일 도쿄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 요원에 의하여 국내로 납치(김대중납치사건)되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76~1978년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투옥되었고, 1980년 초 정치활동을 재개하였으나 같은 해 7월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1985년 다시 귀국하여 김영삼과 더불어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직을 역임하였고 1987년 8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12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91년 9월 통합야당인 민주당을 창당하여 공동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92년 12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김영삼에게 지면서 다시 낙선하여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는 동시에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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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6]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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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5]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⑲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이들이 무적태풍부대를 방문하며 치러진 1992년 대선에서 YS는 노태우·김종필(JP)과 손잡고 3당 합당을 결행하며 집권 민자당 후보로, DJ는 제1야당(평화민주당)의 후보로 나섰는데, YS가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 3당 합당은 영호남 지역구도 고착으로 이어지면서 현재까지도 지역주의라는 그림자를 만들게 된 시초가 됐다. 이 여파로 DJ는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가 1995년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국민회의를 창당하여 1997년 말 DJ가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이후에도 남북관계와 통일 등 이념 문제에 있어서 YS는 보수, DJ는 진보의 목소리를 대표하면서 대립했다. 그러다 YS가 2009년 8월 폐렴으로 입원해 죽음을 앞둔 DJ를 전격 문병, 두 사람의 화해가 DJ 서거 직전 극적으로 이뤄지기도 했다. 김대중의 타계에 이어 김영삼도 2015년 11월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으로 사망했다. 이로서 인기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묘사되었던 민주화 동지이자 정치적 라이벌로, YS(김영삼)ㆍDJ(김대중)로 불리며 한국 현대 정치를 양분해 이끌어 왔던 ‘양김시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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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5]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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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4]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⑱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최근 배우 송중기가 주연으로 인기리에 방영되는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실존 인물인 YS(김영삼)ㆍDJ(김대중) 전 대통령이 등장해 관심을 끌고 있다. 1924년 전남 신안에서 태어난 김대중은 1950년 ‘목포일보’ 사장을 지낸 뒤 1960년 민의원에 당선되며 정치활동을 시작했고, 1927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난 김영삼은 1951년 장택상 전 국무총리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해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최연소(만 26세) 의원이 되었다. YSㆍDJ 이 두사람은 1970~80년대 유신체제와 5공 신군부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민주화 투쟁을 위해 손을 잡았던 동지였지만, 두 사람은 결국 갈라서며 대립했다.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야권 후보 단일화 협상에 실패하면서부터 각각 상도동계(YS)와 동교동계(DJ)라는 야당 2대 파벌 수장으로서 일생을 라이벌 관계로 살았다. 이들은 목표로 했던 대통령직선제를 실현해 놓고도, 후보 단일화 실패(YS는 통일민주당, DJ는 평민당 후보로 출마)로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대권을 빼앗겼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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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4]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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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3]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⑰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회의실에서의 업무보고를 받고 전시된 화기, 장비 및 피복 등을 둘러본 후 장병 식당에서 자율배식으로 점심을 받아 어린 병사들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첫 수저를 들기 전에 함께한 장병들에게 진심어린 한마디로 군의 대선배이면서도 제대로 역할을 못한 심정을 표현했다. 당시 67세의 노장이자 모진 풍파를 겪으며 풍운아 인생을 살아온 김종필의 첫 마디는 “미안합니다......!”였다. 이어 그는 감회에 젖어 떨리는 목소리로 “사단장으로부터 훌륭한 보고를 받고..., 진열된 장비들과 이곳 식당에 들어와 장병들을 보니까...,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국토방위를 위해 말없이 굳굳하게 책임을 다하는 여러분들이 고맙고 든든합니다”라고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천천히 진심을 전하는 김종필의 첫마디가 멈추자, 식당안의 전장병들은 마치 노쇠한 할아버지가 손자들을 위하는 마음처럼 느끼며 감동이 가슴 깊히 파고들어 순간 우렁찬 박수를 터뜨렸다. 김종필은 일본인들과 맞섰던 풍운아 청년 시절을 보내고 장교로 임관하여 부패한 장성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이른바 '정군 운동'으로 강제 전역되었다가 5.16군사정변 이후 현역으로 복귀하여 육군준장으로 전역한 군선배였다. 또한 지난 40여년을 정권의 핵심에서 국가발전을 위해 매진했지만 초라한 당시 군의 현실을 확인하고 그동안 군발전의 역할에 소홀했던 것을 자책하는 모습이었다. 아무튼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의 방문도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어 흐뭇했지만, 그의 진심어린 언행은 긴 여운을 남기었다. 그는 이후에도 킹메이커이자 풍운아의 삶을 지속하다가 ‘제2의 한명회’로 불리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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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3]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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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2]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⑯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김종필 전 총리가 무적태풍부대를 방문할 당시인 1992년 말에 그는 ‘신민주공화당’ 총재 신분의 킹메이커로 제14대 대선에서 김영삼이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을 지지했던 시기였다. 그동안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의 기치를 내걸고 1970년 국방과학연구소를 창설하여 국방력 강화와 방위산업 발전에 노력했다. 그러나 사실 국방은 미군에 의존했고 국민들이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새마을 운동 및 경제발전에 우선해서 더 많이 전력투구했다. 김종필은 자신이 제3공화국 박정희의 오른팔이자 실세로 군림했으며 이후에도 정권 핵심의 위치에서 업적도 많았고 영향력도 대단했지만 군발전에 대해서는 부족함이 있었다. 제14대 대선에서도 킹메이커 역할을 하면서 당대표의 자격으로 연말 전방부대 위문을 온 김종필은 부대에서 정성을 다해 준비했지만 열악한 환경을 직시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장병 복지 등 군의 발전을 위해 소홀했던 것에 대한 회한이 남아있는 표정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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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92]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