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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3)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구안보협업연구소장] 하지만 영관영어반에서 만난 선배중에는 광주 출신의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임을 부정하고 중국인 공산주의자로 행세를 한 정율성처럼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자도 있었다. 정율성이 북한과 중국에서 보였던 불손하고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이지만 화려한 작곡가로서의 삶처럼 그 선배도 생도시절부터 뛰어난 지혜와 지휘생도 활약으로 후배 생도들의 존경심을 받아왔고 필자에게는 목발 및 지팡이를 짚고 있다고 해서 DJ라는 별칭을 즐겨 불러 주었다. 또한 그는 명석한 지능으로 영어 수업도 우수한 성적을 계속 유지했다. 마치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지닌 정율성처럼 그의 모습은 수업시간에 뛰어난 영어 회화능력으로 교관들의 칭찬을 받아 학생장교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일과후 독신자 숙소에서도 타 선배들처럼 잦은 출타를 하거나 만취되는 일도 없이 착실한 학생장교로 돋보였고 필자는 친절하게 학업을 도와주는 그가 고맙고 존경스럽기까지 했고 대령으로 일차 진급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영관영어반 과정이 중반을 넘어 종반으로 접어들 무렵에 그는 매우 힘든 표정으로 정색을 하며 필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동생이 사업을 하는 데 급전이 필요하고 진행상 곧 회수 가능해 일주일 뒤면 갚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필자는 현금이 있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도와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필자도 교통사고 후에 많은 출혈이 있었고 저축한 돈도 별로 없어 죄송했다. 선배의 계속 독촉에 못이겨 현재 들고 있는 적금을 해약하면 요구한 금액의 반정도를 제공할 수 있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빨리 주면 바로 해결하고 일주일 뒤에 갚겠다고 다짐했다. 하는 수 없이 통장을 들고 은행을 찾아 적금을 해약한 후에 그 선배에게 전달했다. 물론 일주일 뒤에 갚는다고 해서 가족에게는 비밀로 했다. 그후 일주일이 지났지만 선배에게 갚아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일단 돈을 주고나니 빌려준 사람이 을이 되어 있었고, 그는 여유롭게 생활하며 빌린 돈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결국 교육 종료 직전에 그 선배에게 아직까지도 가족에게 말을 안했으니 빌린 돈을 갚아주어야 통장을 다시 만들 수 있다고 독촉했다. 그 선배는 다음주로 다시 미루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던졌는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생도시절부터 탁월한 모습으로 존경을 했던 인연은 악연으로 끝났다. 가짜 한국인 정율성처럼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그의 언행에 현혹된 필자가 부끄러웠고, 이후에는 잘 아는 지인들과의 관계에서 금전 문제가 생길 때에는 여유가 있어 대출이 아닌 무상으로 제공하거나 아니면 조심스럽게 거절하는 것이 돈도 잃지 않고 더구나 사람도 더 잃지 않는 길이라는 교훈을 영관영어반 교육과정에서 얻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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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2)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㉗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정율성이 6·25남침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 군가도 작곡했지만 인민군과 함께 서울에 내려와 점령군으로서 자유 대한민국을 유린하고 1·4 후퇴 때는 중공군과 함께 재차 서울에 내려와 조선궁정악보를 약탈해간 매국노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따라서 광주 출신이지만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인 공산당원으로 변절한 자를 추모하며 중국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추진했던 정율성 공원 조성사업은 동족상잔의 비국을 겪은 자유대한민국에서는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현재도 핵과 미사일 발사실험을 계속하는 북한의 군사도발을 막으려면 견고한 한미동맹이 절실한 실정이다. 필자가 다녔던 ‘영관영어반’ 과정에서도 북한의 재 남침에 대비해 합동참모본부의 주요부서에 근무하며 군사전략을 담당했던 용삼남(육사33기) 선배로부터 한미연합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용 선배는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목발을 짚고 재활치료에 전념했던 필자에게 용기를 심어주기도 했다. 그는 생도시절 럭비부 선수 생활을 했는데 운동중에 부상을 입어 척추가 심하게 손상되어 의사들이 판단할 때에도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상태였으나 강한 의지로 철저하게 운동을 하여 척추 주변 근육을 강화시킴으로써 전혀 불편함 없이 더 건강하게 보였다. 예를 들면 합참 근무시에 매일 새벽에 가장 일찍 출근하여 책상 및 의자 정리 및 청소를 한 뒤에 책상위에 올라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를 300개씩 하여 근육을 강화시켰다. 그가 원주에 있는 부대에 근무할 때에는 고속도로에서 시비를 걸던 조폭을 한방의 주먹으로 넉아웃시킬 정도로 강해졌다는 여담도 남겼다. 건강한 체력은 건전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창출하며 업무에 질도 고양시킬 수 있다. 건강의 이상을 극복하며 지칠줄 모르는 용 선배의 체력에 상관들은 힘든 업무도 쉽게 맡길 수 있었고 업무상 만나는 미군들과도 쉽게 친해져 한미 연합작전과 군사전략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게다가 일과후에는 독신자 숙소에서 우리의 전통악기인 대금을 연주하며 하루를 마감하여 건강상 어려운 위기를 적극 극복하는 강한 의지와 동시에 예술감까지 가진 문무를 겸비한 군인으로 끝없는 존경심을 불러 일으켜 앞으로의 군생활의 롤모델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할 정도였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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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1)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㉖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 10월2일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정율성 거리’에 세워져 있던 중국 음악가 ‘정율성 동상’이 기단에서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진 모습으로 발견됐다. 정율성은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중국에 귀화한 음악가로, 북한·중공군 군가를 작곡한 인물인데, 광주시가 기념사업을 추진해 논란을 불렀다. 정율성 동상은 중국 청년단체가 제작해 광주 지역 청년단체에 기증한 것으로 2008년 광주 남구 양림동에 조성된 정율성 거리 입구에 세워졌다. 광주 남부경찰서는 이날 재물손괴 혐의로 보수단체 회원 윤모(56)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은 전날(1일) 오후 정율성 흉상 목 부분에 밧줄을 묶고 2.5톤 승합차에 이를 연결한 뒤 쓰러뜨리는 모습이 담긴 CCTV를 확보했다. 정율성 흉상은 위의 사진처럼 약 1m 높이의 기단에서 완전히 분리된 채 기단 옆 땅바닥에 누운 모습으로 발견됐다. 윤씨는 범행 직후 한 유튜브 채널에서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 사업을 중단하라고 광주시에 요구했는데 이를 이를 수용하지 않아 강제로 (흉상을) 철거했다”고 밝혔다. 윤씨는 경찰에서 “내가 그랬다. 3일 오전에 경찰서로 가서 조사받겠다”며 범행을 시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북한의 연평도 포격 유족 대표인 고(故) 서정우 하사의 어머니 김오복 전 광주대성여고 교장은 2일 “공산주의자 정율성의 실체가 드러났는데도 광주시가 혈세 48억원을 들여 정율성 공원을 짓는다는 계획을 철회하지 않고 무조치로 일관하고 있다”며 “공원 철폐를 위한 릴레이 피켓 시위를 열겠다”고 밝혔다. 김오복 전 교장은 “북·중공의 군가를 짓는 등 한국 침략세력의 나팔수 역할을 한 정율성 논란이 갈수록 커지고 있지만 강기정 광주시장은 아무 중단 조치도 없이 정율성 공원조치를 강행하겠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율성 공원 문제 제기에 대해 철지난 이념몰이, 색깔론, 민간외교라는 억지 논리만 되뇌고 있다”면서 “지난 한 달여 동안 보훈단체들의 집회를 관제 데모로 깎아내리고 국가를 위해 희생한 호국영령과 보훈가족을 모독하고, 공산주의자 정율성 공원을 철폐하거나 대안을 만들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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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0)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㉕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최근 국방부장관으로 지명된 신원식 의원(육사 37기)은 레닌에게 선물받은 권총으로 독립군을 직접 사살한 소련군 장교인 홍범도의 동상 이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필자는 ‘영관영어반’ 과정에 다닐 즈음에는 홍범도의 존재 조차도 몰랐다. 청산리 대첩 이후인 1921년, 소련군 장교인 홍범도와 그 일당들에 의한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들은 몰살당하며 해체됐다는 사실도 최근에 알았다. 남북이 대치된 상황에서 소련군 복장의 공산주의자를 추모한다는 것은 광주에서 태어났지만 인민군과 중국인민군 군가와 마오쩌뚱 찬양가 등을 수십 곡 만들며 뼈속까지 어용 공산주의자인 정율성 작곡가의 추모공원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관생도를 포함한 건전한 국민들의 정체성과 대적관을 현혹시키는 잘못된 처사이다. 필자가 다니던 ‘영관영어반’ 과정에서도 확고한 대적관을 바탕으로 견고한 한미동맹을 위한 교육이 계속되었다. 이 교육을 통해 숙달한 영어회화 능력으로 북한의 군사도발에 대비한 한미연합작전 및 훈련에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을 마치면 다음 보직은 연합사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필자는 이미 다음 보직이 충북 충용부대로 정해져 있었고, 다른 교육생들은 연합사령부 또는 예하 부대 및 연합작전/훈련을 주로 시행하는 합동참모본부로 분류되었다. 마침 합참의 중요부서에서 근무했던 선배도 함께 교육을 받고 있어 북한의 군사도발에 대비한 한미연합작전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중 한명은 육사 33기 용삼남 중령이었다. 과거 승리부대에서 함께 근무했던 양태수, 나대일, 김형배 선배 등을 포함하여 많은 선배 동료들을 다시 만나는 해후의 시간도 만끽했으나 용 선배는 6개월 교육기간 중에 강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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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89)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㉔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75주년을 맞은 국군의 날은 6·25남침전쟁 당시 우리 육군의 38선 돌파를 기념하는 날이다. 추석 연휴 때문에 닷새 앞당겨 지난 26일 열린 올해 국군의 날 기념행사는 그동안 소홀히 했다가 10년 만에 대대적인 도심 시가행진으로 주목받았다. 유사시 북한 지휘부의 지하 벙커를 파괴할 고위력 현무 미사일과 한국형 사드로 불리는 장거리 지대공유도미사일, 엘샘(L-SAM) 같은 첨단무기가 대거 등장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날로 고도화하는 북한의 핵 위협에 강력히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거듭 강조하며, 우리 군의 태동 시점은 1945년 광복 이후라고 언급했다. 이어 윤 대통령은 “광복 후 제대로 된 무기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태동한 우리 군은 이제는 적에게는 두려움을 안겨 주고, 국민에게는 신뢰받는 세계 속의 강군으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이는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등 역사 논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국군의 뿌리를 독립군에서 찾았던 문재인 전 대통령의 인식을 사실상 반박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국군의 날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급격하게 무너진 북한군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동부전선의 우리 육군 3사단이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처음으로 38선을 돌파한 10월1일을 기념하는 뜻에서 1956년 제정됐다. 하지만 체제 경쟁이 끝나고 남북정상회담 등이 열린 2000년대 이후론 광복군 창설일인 9월17일로 바꾸자는 주장도 꾸준히 제기됐다. 우리나라가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한 헌법에 따라 군의 뿌리도 임시정부 군대인 광복군으로 정립하는 게 맞다고 민주당 등 일부는 주장하지만 확고한 대적관을 강조해온 현 정부는 선을 긋고 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싸웠던 광복군도 의미는 있지만, 지금 우리 군은 북한과 싸우는 군대라며 국군의 확고한 정체성을 강조했고, 여야의 인식 차는 국군의 날 메시지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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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88)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㉓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개월 기간의 ‘영관영어반’ 과정이 중간정도 지나갈 즈음에 필자는 그동안에 미루어 왔던 석사학위 논문의 마무리에 쉴 틈이 없었다. 그렇지만 ‘영관영어반’ 과정에 입교시킨 것은 능력이 부족한 필자가 석사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유리한 여건을 만들어주신 신의 배려와 인도라 생각되어 감사할 뿐이었다. 최종 논문심사에서 ‘동서독 통일과정에서의 군통합에 관한 연구 –남북한 적용가능성을 중심으로’라는 필자의 논문을 검토하던 동국대학교 3명의 지도교수들은 신통하다는 표정으로 새로운 착안이라고 칭찬을 해주었다. 왜냐면 당시에는 독일통일에 관련한 자료와 논문은 많았지만 군사분야는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독일 통일 당시에 독일에서 군사과정을 다녔던 김영식 동기(전 1군사령관)가 제공해준 귀국보고서가 큰 바탕이 되었고, 다른 학생들은 논문들은 기존의 타 논문에서 인용하여 만들다 보니 필자의 논문보다 교수들이 참고할 사항이 많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심사중에 지도교수들은 논문 내용보다 내 신상에 더욱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목발을 짚고 있지만 육사37기로 박지만과 동기라고 하자 그들은 ”아마도 그 동기들은 똑똑한 사람이 많이 들어갔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동기생 전체를 칭찬해주어 동기회 품격이 격상되는 이미지에 일조한 기분이 들어 보람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입교한 영관영어반 과정은 주말부부 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됨과 동시에 이미 취임해 맹활약하는 동기생들을 만나 회포도 풀었지만 대대장 근무의 노하우를 전수받는 계기가 되었고, 영관영어반 수료증과 동국대학교 석사학위기를 받아 내실을 기하는 일거다득(一擧多得)의 결실을 얻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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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8)] 혈연, 지연 및 학연보다도 근무연이 더 결정적인 역할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그해 가을 무렵에 접어들자 양 대령 연대의 중요하고 핵심적 역할을 할 참모인 작전과장이 보직을 마치고 떠나게 되어 후임자를 찾고 있었다. 연대 작전과장은 작전 업무뿐만 아니라 부대운용의 모든 분야를 총괄하기 때문에 부대의 성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해당 지휘관이 작전분야의 경험이 있는 장교를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이유이다. 그래서 통상 작전과장을 보직 받기 전에 정보과장 등의 타 참모 임무를 수행하다가 능력을 인정받으면 작전과장으로 영전하면서 그해의 중령 진급 선발에도 유력한 대상이 된다. 당시 사단으로 전입 예정자 중 소령급 장교에는 동기생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양 대령도 출신을 떠나 작전분야에서 근무 경력이 있는 유능하고 탁월한 장교가 작전과장으로 보직되길 원했다. 허나 주변을 아무리 물색하고 사단으로 전입 예정인 대상자 중에 양 대령이 원하는 조건에 해당되는 자원이 없다고 판단하여 선택을 고민하고 있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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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8)] 혈연, 지연 및 학연보다도 근무연이 더 결정적인 역할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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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7)] 혈연, 지연 및 학연보다도 근무연이 더 결정적인 역할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무적태풍부대로 전입온 지 5개월 정도 지날 즈음에 반갑고도 존경하는 선배가 예하 연대장으로 부임했다. 사단사령부의 작전보좌관직을 수행하던 필자는 새롭게 취임한 양치규 대령(육사29기)을 승리부대 중대장 근무시에 직속상관인 대대장으로 모셨기 때문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며 도움이 되도록 노력했다. ([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60)] 실전 같은 부대 검열 및 훈련평가는 승리의 첩경:‘경쟁자가 깨닫게 해준 교훈과 대대장의 리더십이 이끌어 낸 승리’ 참조) 일반 사회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것은 학력과 경력도 중요하지만 숨길 수 없는 사실은 당사자의 인맥이 크게 좌우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군생활도 마찬가지이다. 헌데 그 인맥은 처음부터 혈연이나 지연 및 학연에 의해 형성되는 것보다도 같이 근무했던 인연이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같이 근무하여 쌓인 좋은 인연은 그 당시에 상급자로부터 무능하다고 평가받지 않았기 때문에 신뢰와 함께 인맥으로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맺어진 인맥으로 상급자는 진로를 안내해주거나 멘토 역할도 하지만 평가 및 진급시에도 측면에서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또한 경험 즉 경력도 무시할 수 없다. 당시 사단사령부의 작전보좌관으로 근무하던 필자도 수방사령부 작전장교로 근무했다는 경력이 무능과 유능 그리고 탁월하다고 평가하는 측면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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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7)] 혈연, 지연 및 학연보다도 근무연이 더 결정적인 역할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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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6)] 무장탈영병 소동으로 멋진 대침투작전 훈련을 치뤄...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연대가 형성한 1봉쇄선 안의 원점 부근에서 무장탈영했던 윤길영 일병을 생포했다는 보고였다. 탈영한 윤 일병은 멀리 도주하려 했으나 각 부대의 신속한 배치와 야간에 라이트를 켜고 계속 이동하는 군차량, 선무심리전 방송, 군견 짖는 소리 등으로 꼼짝 못하고 숨어있다가 지쳐서 그대로 생포되었다. 비록 밤을 꼬박 새워 피곤했지만 작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보람을 느꼈다. 바로 그때 사단장 탁자위에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군단에서도 무장탈영병 사건 때문에 밤을 지새웠던 군단장의 전화였는데 일순간 무장탈영병 사고 발생에 대한 질책을 예상하며 긴장된 상황실의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최경근 군단장(갑종151기)은 ”사단장, 이번 무장탈영병을 잡기 위한 대침투작전은 시범을 보인 것과 같은 매우 표준이 되는 사례입니다”라며 말을 시작했다. “최초 상황보고 및 조치부터 신속하게 하달된 3개의 봉쇄선을 형성하는 작전명령과 전파체계 그리고 선무심리전, 항공정찰, 전제대 동시수색, 군견운용 등 통합적이고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전개한 작전수행에서 칭찬할 것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라며 핀잔보다는 칭찬을 하였다. 이어 “훌륭한 대침투작전 훈련이었습니다. 수고했어요...ㅋ”라는 군단장의 마지막 격려 훈시 한마디에 비록 사고를 미연에 방지 못한 책임은 있었으나, 상황실에서 밤을 지새운 참모 및 실무자들의 보람찬 환성이 터져 나오며 모든 피곤함을 날려버렸다. 무장탈영병 사건 발생은 위기였지만 지휘관의 명확한 지침과 전 부대원들이 능동적이고 효율적인 절차와 행동으로 임하여 작전에 성공함으로 부대가 단결되며 사기충천하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기회가 되었다. 무장탈영병 발생에 따른 대침투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한 이재관(육사21기) 소장은 사단장을 마친지 10개월 만에 중장으로 진급하여 군단장으로 다시 금의환향(錦衣還鄕)했다. 이후 군단장에서 영전하여 육군참모차장직을 수행하던 이 중장은 1996년 9월16일 ‘강릉 무장공비 잠수함 침투’사건이 발생하자 작전이 한창 진행중인 10월에 대장으로 진급하여 1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한달 뒤인 11월 1군사령관 이재관 대장은 ‘연화동계곡 전투’에서 무장공비의 잔적을 소탕한 것을 끝으로 강릉 안인진리 지역으로 잠수함을 통해 침투한 북한군 무장공비를 토벌하기 위한 45일간의 대규모 작전을 마무리하여 대침투작전의 전문가로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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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6)] 무장탈영병 소동으로 멋진 대침투작전 훈련을 치뤄...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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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5)] 무장탈영병 소동으로 멋진 대침투작전 훈련을 치뤄...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일련의 상황조치를 완료하고 사단장과 참모들은 상황실(TOC)에서 예하 각부대의 배치 및 활동을 보고 받으며 밤을 지새웠다. 허나 필자는 더 바빠졌다. 무장탈영병이 원점 지역을 포위한 1봉쇄선 안에 있으면 생포가 용이할 터인데, 혹시 더 원거리를 도주하여 2,3봉쇄선 밖으로 빠져나갔다면 상황은 사단이 아니라 군단 또는 군사령부급으로 확대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작전참모와 함께 고민하다가 날이 밝으면 봉쇄선 주요 목에는 그대로 소수 병력을 배치하며 필요한 지역엔 임시 검문소를 추가운용하고, 나머지 주병력과 군견으로 ‘전제대 동시 수색정찰’을 계획했다. 이때 항공정찰도 병행하기 위해 상급부대에 헬기도 추가 요청했다. 사단장의 승인을 받고 일출과 동시에 작전이 개시되도록 사전에 작전명령을 하달하며 군단에도 보고했다. 각 부대는 아침해가 밝아오기 전에 조식을 모두 마치고 각 수색 책임지역으로 출발하려는 순간 무장탈영병이 발생한 부대 연대장의 긴급한 지휘보고가 올라왔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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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5)] 무장탈영병 소동으로 멋진 대침투작전 훈련을 치뤄...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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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4)] 무장탈영병 소동으로 멋진 대침투작전 훈련을 치뤄...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사단 전지역으로 ‘진도개 하나’를 확대 발령에 따라 각 부대가 출동준비를 하는 동안 사단 상황실(TOC)에서 작전토의를 거쳐 사단장이 승인한 무장탈영병 생포 작전명령은 신속하게 각 부대로 하달되고 상급부대에도 보고됐다. 출동 준비를 마친 부대들은 때마침 하달된 작전명령에 따라 사건 발생 원점을 겹겹이 포위하는 2,3봉쇄선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절묘한 시점에 명령이 하달되어 시간 낭비를 최소화하며 바로 투입하여 일단 도주하려는 탈영병과 시간 싸움에서 우위를 점령했다. 동시에 탈영병이 발생한 해당 연대는 1봉쇄선 점령을 완료하고 포위된 봉쇄선 안의 은거 가능지역을 사단 수색대대원들과 함께 군견까지 투입하여 정밀 수색했다. 이때 2,3봉쇄선에 근접한 부대들은 도보로 투입했지만, 원거리 부대원들은 사단 수송대의 차량에 포병부대의 포차까지 동원된 수송차량을 지원받아 보다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었다. 날이 저물어 야간이 되자 봉쇄선 도로를 따라 라이트를 켜고 차량을 계속 왕복 이동시켜 은거한 무장탈영병이 꼼짝 못하고 지치도록 만드는 기만작전도 시행하였다. 더불어 주민신고망을 최대로 가동시켰고, 선무심리전으로 방송차량을 활용하여 원점부근과 주변에서 무장탈영병의 안전과 복귀 방송을 계속하며 심리적 동요를 유도했고, 또한 탈영병의 부모를 현장에 도착시켜 방송차량에 탑승하여 안전한 귀가 설득 방송도 추가했다. 이 모든 조치는 이미 5년전 승리부대 근무할 때에 ‘GOP 경계근무자의 총기난동 및 무장탈영 소동’에서 경험했던 교훈을 그대로 활용한 것이었다. 한편 상급부대인 군단에서도 무적태풍부대의 무장탈영병 발생에 따른 대침투작전 진행을 관망하면서 혹시 우려되는 탈영병의 도주를 막기 위해 인접 사단에 지시하여 주요 통로 및 목 지점을 차단하도록 조치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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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4)] 무장탈영병 소동으로 멋진 대침투작전 훈련을 치뤄...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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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3)] 무장탈영병 소동으로 멋진 대침투작전 훈련을 치뤄...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연대의 무장탈영병 발생 보고가 접수되자 상황실로 각 참모들이 비상소집되었고 전화기는 북새통을 이루었다. 부대관리 위주로 부대를 지휘했던 사단장은 역시 노련하게 침착한 모습을 보였으나 어떤 지침도 없이 인상만 쓰고 있었고 부대는 혼돈에 빠진 상태였다. 그때 가장 큰 문제는 상급 부대에서 걸려오는 전화였다. 최초 보고가 끝나자마자 상급 및 차상급 부대뿐만 아니라 심지어 청와대 상황실에서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계속된 전화로 실제 사고가 발생한 연대에서의 전화는 받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무장탈영 사고 현장에는 이미 연대의 정보분석조와 헌병 및 군의관 등이 도착하여 사고 조사를 하고 있었고 다행히도 피해자는 없었다. 또한 연대 자체 병력으로 차단선을 형성하고 있다는 연대장의 상황조치 보고도 있었다. 연대장 보고에 따르면 윤길영 무장탈영병이 소속된 해당 연대지역은 강화된 대침투작전 태세인 ‘진돗개 하나’를 발령한 상태였고, 작전참모는 정보에서 판단한 탈영병의 도주 거리를 고려하여 우선 사단 전지역으로 ‘진도개 하나’를 확대할 것을 사단장에게 건의하여 조치했다. 사건을 조기 종료하기 위해서는 무장 탈영병의 도주 거리를 고려한 작전 투입 시간과의 싸움이었으나, 가장 크게 우려되는 최악의 상황은 무장 탈영한 이 일병이 GOP철책을 넘어 월북하는 것과 도심으로 빠져나가 일반 시민들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때 필자의 과거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지난 1987년 7월 승리부대 작전장교 근무할 당시에 발생했던 GOP 철책에서 경계근무 후 복귀하던 이진수 일병이 막사 앞에서 총기를 난사해 수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무장 탈영한 한 사건의 경험이었다. 5년전 승리부대 작전장교 근무시에 업무가 미숙했던 필자는 작전명령서를 적시에 작성조차 못해 작전참모(전 김관진 국방장관)가 직접 초안을 잡아 조치했던 부끄러운 기억이 떠올랐다. 작전을 담당했던 필자는 우선 서울 방향인 남쪽이나 GOP철책 방향인 북쪽으로 향하는 모든 통로에 검문소 운용강화 지시를 하달했다. 그리고 조용히 책상에 앉아서 지도에 작전 상황도를 그리며 명령을 작성했다.([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 (73)] ‘숨막혔던 GOP 경계근무자의 총기난동 및 무장탈영 소동’ 참조) 그리고는 준비한 작전계획을 PPT로 띄우며 작전상황실(TOC)에서 대책을 논의하던 사단장과 참모들에게 설명했다. 1봉쇄선은 해당 연대장이 이미 하달한 지시를 참고하여 최대한 변동이 없도록 도식했고, 2봉쇄선과 3봉쇄선은 가용병력을 고려하여 인접 연대, 포병 및 작전통제 부대까지 투입시켜 점령하며 원점부근에는 지역을 잘 아는 해당 부대와 수색대대로 탐색하여 체포하는 계획이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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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3)] 무장탈영병 소동으로 멋진 대침투작전 훈련을 치뤄...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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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2)] 무장탈영병 소동으로 멋진 대침투작전 훈련을 치뤄...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필자를 무적태풍부대 사단작전보좌관으로 끌어와 새로운 경험을 쌓게 해준 전임자 신현돈 중령(육사35기, 예비역 대장)이 1992년 2월말에 군자산 대대장으로 취임했다. 신 중령의 전임은 필자의 초임지였던 승리부대부터 인연이 있었고, 현 부대로 배치받아 다시 만났을 때 “인정과 신뢰는 절대로 함께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라고 일침을 놓았던 김형배 중령(육사34기)으로 대대장직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사단 정보참모로 부임했다. 마침 필자가 모시던 직속상관인 작전참모는 강수명 중령(육사31기, 예비역 준장)으로 그해 가을에 대령 진급이 거의 확실시 되는 분위기이라 김 중령은 차기 작전참모로 영전할 것이라고 모두들 예상했다. 하지만 인생은 세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듯이 예측 불허의 상황이라 각자 긴장하며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고, 군자산 대대장으로 취임한 신 중령만이 신바람을 날리며 부대를 마음껏 활기차게 지휘하고 있었다. 겨울의 추위가 조금씩 걷혀가는 3월13일 금요일, 상급부대에서 컴퓨터 바이러스 ‘예루살렘’의 확산 경고가 내려져 필자의 주 활동무대였던 상황실은 비상이 걸려 각별히 조심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석양이 기우는 저녁 시간이 되자 지난 연말 지휘관 회의에서 가장 우수한 선봉대대로 선정되었던 임진강 주변의 부대에 소속된 윤길영 일병이 총기를 휴대하고 부대를 이탈한 무장 탈영병 사건이 발생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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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2)] 무장탈영병 소동으로 멋진 대침투작전 훈련을 치뤄...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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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85)]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㉓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위트컴 장군은 부산 주재 미 군수사령관으로 1953년부터 1954년 12월까지 한국군과 부산 재건 임무를 맡았다. 그는 이를 위해 스스로 미육군한국지원프로그램(AFAK)을 만들어 부산대 등 교육시설, 메리놀병원 성분도병원 등 각종 의료시설, 고아원 건립, 양정과 청학동 주택단지 건립, 도로 교량 건설, 부산역전 대화재 이재민 구호를 포함한 수많은 인도적 사업을 열정적으로 펼쳤다. 의료시설 재원이 부족해지자 위트컴 장군은 자선 바자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직접 한복을 입고 홍보 행렬에 참여했고 예하 부대별로 고아원 등 후생시설에 자매결연으로 후원과 기부를 유도했다. 대구에 있는 5군수지원사령관을 역임한 박주홍(육사42기) 장군은 “위트컴 장군은 당시 한국 기업의 어려움을 정성을 다해 본국에 알렸고, 이는 전후 복구와 우리 기업 성장에 큰 도움이 됐다”고 증언했다. 이어 “테일러 미8군 사령관도 위트컴 장군에게 ‘귀하가 요청한 한국 재건에 필요한 자재와 장비가 곧 부산에 도착한다’는 문서를 보냈는데, 이를 통해 그가 헌신적으로 전후 복구에 임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미 군수사령관 임기를 마친 위트컴 장군은 1954년 말 전역과 함께 미국으로 귀국했으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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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185)] 6·25남침전쟁후 국가재건의 선구자 위트컴 장군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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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1)] 먼저 떠난 전우들 기억이 선명해지는 ‘호국보훈의 달’(하)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사고 현장에서 순직한 7군단장 故 이현부(육사 20기) 중장은 육사 졸업시 학업성적과 리더십이 가장 우수한 생도가 받는 ‘대표화랑’상을 수상했다. 그는 기계화부대에서 소대장~사단장등 모든 지휘관직을 역임하고 또 기동군단장에 보직되어 기계화부대 작전분야의 1인자로 통했다. 또한 군사전술과 작전지휘 능력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공평무사(公平無私)한 생활 자세와 리더십을 포함한 인품도 탁월하다는 정평을 얻어 군단장직책에도 동기생 중에 가장 빨리 보직됐으나, 그만 취임 두 달 만에 사고를 당했다. 故 한황진(육사37기) 중령 역시 육사를 3등으로 졸업하고, 럭비부 주장까지 할 정도로 실력과 리더십이 뛰어난 군인이었다. 특히 한 중령은 임관 후 첫 번째 보직부터 승리부대에서 필자와 군생활을 같이 시작해 인접 중대장직을 수행했으며, 이 장군은 당시 부사단장으로 필자와 함께 근무한 인연도 있다.([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52)] ‘전방오지 산짐승과 눈싸움 그리고 셋방살이 오강의 추억…’ 참조) 한 중령은 미국 해대원 유학 복귀 후, 필자가 근무하던 무적태풍부대의 인근부대의 대대작전장교로 배치받아 오랜만에 친분을 나눌 수 있었으나, 워낙 우수한 장교인지라 군단장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었다. 헌데 보직된지 얼마 안되어서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이들의 순국은 당시 그들을 군생활의 멘토로 삼고 있던 필자에게는 대단히 충격적이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또한 “추락 당시 수행원 모두가 이 장군을 끝까지 보호하려 장군을 감싸고 있었다”라는 사고수습자가 전해준 증언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숙연케 했다. 이 장군과 참모 및 동기생 한 중령을 추모하기 위해 바쁜 작전보좌관직을 수행하던 필자도 참모에게 보고후 장례식장에 참석했다. 전역한 병사들까지도 포함한 수많은 장병이 조문했던 7군단 사령부의 장례식장은 애도를 표하던 그들의 안타까운 눈물바다였다. ‘시졸여애자고 가여지구사(視卒如愛子故 可與之俱死)’, 즉 “장수가 병사들을 사랑하는 아들 돌보듯 한다면 가히 생사를 같이할 수 있다”는 손자병법 지형편을 확인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들은 죽어서도 함께 했다. 대전 현충원의 묘비 번호를 1048번부터 1052번까지 나란히 부여받고 안장되었고, 사랑하는 동기생 한 중령은 새로운 군번인 묘비번호 ‘1-203-1051번’을 부여받았다.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이 다가오자 먼저 떠난 전우들의 기억이 더욱 선명해진다. 발렌티누스는 사랑을 위해 순교했다. 故 이현부 장군과 한황진 중령 등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순국했다. 비록 목적은 달랐으나, 이들의 순교와 순국은 남을 위한 희생이었다. 자신의 목숨보다 남녀 간의 애절한 사랑을, 자신의 목숨보다 조국을 더욱 뜨겁게 사랑했다. 그렇기에 오늘날까지 많은 이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오는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국립 현충원을 찾아 옛 전우들의 숭고한 뜻을 되새기면서, 전후방 각지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대의를 위한 희생의 길을 정진하며 묵묵히 책무를 다하고 있는 국가 안위의 마지막 보루인 우리 국군장병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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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1)] 먼저 떠난 전우들 기억이 선명해지는 ‘호국보훈의 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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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0)] 먼저 떠난 전우들 기억이 선명해지는 ‘호국보훈의 달’(중)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발렌타인-데이(St. Valen-tine's Day)는 꼭 30년 전인 1992년 2월14일 오전 선산에서 발생한 헬기추락 사고로 평소 존경하던 7군단장 이현부 중장과 사랑하는 동기생 한황진 중령을 떠나보낸 날이기도 하다. 당시에 7군단장 이현부 중장은 참모들과 함께 UH-1H헬기를 타고 경기도 장호원을 출발해서 작전통제 부대인 포항의 해병 부대 순시에 나섰다. 헬기안에서 군수참모 이원일 대령은 군단장에게 헬기 아래 내려다보이는 산을 가리키며 주변의 지형을 설명했고 탑승자 모두는 이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바로 이때즈음 탑승한 헬기가 경북 선산군 삼정산 7부 능선 상공을 지나고 있었는데, 갑자기 강한 바람에 헬기가 요동쳤다. 이어 헬기의 뒷날개가 떨어져 나가더니 균형을 잃고 급하강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공포와 당혹감에 휩싸이는 순간이었다. 추락현장을 발견한 마을주민과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때 이현부 군단장은 “부락을 피해라”고 지시했고 이에 정조종사 이지성 대위는 좌측으로 쏠리며 급강하하는 헬기가 부락을 피하도록 조종간을 잡고 안간힘을 썼다. 또한 참모들과 수행원들은 군단장을 살리기 위해 이 중장의 몸을 겹겹이 껴안았다. 그러나 결국 헬기는 인근 과수원으로 추락했다. 사고 당시 배터리의 전원을 떼어내려다가 우측 문밖으로 튕겨져 나온 부조종사 이수호 대위는 헬기추락 현장에 나타난 마을 주민들에게 “빨리 배터리를 제거해라. 그렇지 않으면 기체가 폭발한다. 군단장님을 살려야 한다”고 절규한 후 실신했다. 이 사고로 탑승장병 10명 중 7명이 현장에서 순직하고 3명이 부상을 입었다. 끝까지 군단장을 껴안으며 지키려고 했던 작전참모 허정봉 대령, 군수참모 이원일 대령, 감찰참모 노용건 중령, 비서실장 한황진 소령, 전속부관 서상권 중위와 조규성 상병은 머리를 다친 군단장과 함께 그 자리에서 순직했다. 군단장 지시에 따라 추락하는 헬기가 부락을 피하기 위해 조종간을 잡고 안간힘을 썼던 조종사 이지성·이수호 대위와 보조승무원 문기남 상병 등 3명은 다행히 목숨을 건지며 부상을 입었지만, 정조종사 이지성 대위는 사고 후유증으로 한달 만에 군단장 곁으로 떠났다. 육군 사고조사반은 ‘사고 원인을 기상이변에 의한 프로펠러 손상’이라고 발표했고, 순직 장병들은 영결식을 거쳐 이현부 장군은 국립서울현충원에 다른 순직자들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중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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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30)] 먼저 떠난 전우들 기억이 선명해지는 ‘호국보훈의 달’(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