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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501] 누가 뭐래도 우리는 소중한 친구들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컬럼니스트] 필자가 대대장 취임전에 대형 교통사고로 병상에 누워 있을 때에도 동기생 중에 3, 4학년을 함께한 졸업중대 동기들이 더 많은 위문과 격려를 보내주었고,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한 지금도 가끔씩 부부동반으로 모여 우정을 나누고 있다. 대대장 근무를 하던 당시에 타 동기들은 대부분 모두가 먼저 대대장을 마치고 참모 보직으로 옮겼지만, 필자는 대대장반 교육과정에서의 교통사고 때문에 후유증 재활치료로 2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뒤늦게 대대장으로 취임했다. 그런데 먼저 대대장을 마치고 여유를 갖게 된 졸업중대 동기들에게서 그들보다 2년 늦게 대대장직을 수행하는 필자의 부대를 부부동반으로 격려 방문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사관생도 시절에 3, 4학년을 함께한 졸업중대 동기들의 부대 방문은 ‘유붕이자원방래(有朋而自遠方來), 불역락호(不亦樂乎)’의 깊이 감춰진 의미인 “술과 밥을 먹는 친구가 아니라, 내가 곤궁한 처지에 있을 때 함께 해줄 수 있는 동지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는가?”라는 공자의 논어에 기록된 동지형(同志型) 인간상이 현실로 구현되는 순간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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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9] 지휘관은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직책(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조영호 사단장의 사고예방 최우선 부대운영 지침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병사 개개인의 신상파악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여 긴밀한 소통을 통해 사고예방에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선 대대의 60여명밖에 안되는 현역 전병력의 인적사항을 병원관리(兵員管理)용으로 전산화시켰다. 이는 탁월했던 후배 고(故) 김상철 대위(육사38기)의 포대에서 수년전에 활용했었지만, 당시에는 타부대는 아직 적용을 못하고 있던 상태로 사단에서는 필자가 최초로 시행했었다. 나중에는 일반화된 명암관리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결손가정 등 필요한 요소을 검색하면 전 대대원중에 해당자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발전시켰다. 그러나 병원관리 데이터를 입력하려면 수시로 대대원들과 면담이나 소원수리함(대대장만 개봉 가능) 등을 통해 소통할 필요가 있었다. 하루는 화장실에 설치된 소원수리함에 한 병사가 면담을 요청하는 문건을 확인했다. 대대장실에서 아담한 키에 다소곳이 마주 앉아서 차를 한잔하던 00일병은 주저하다가 말문을 열였다. “대대장님, 이것을 차마 중대장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시작하자 흠칫 상관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애로사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귀를 쫑긋 세웠다. 교육대학을 다니다가 입대한 그는 제대후에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입대 후에 생활관에서 단체 생활을 하면서 취침시에 모포가 쓸려내려간 동료의 허벅지를 볼 때마다 흥분되고 몸에 이상한 느낌이 든다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하소연이었다. 그 말을 들은 필자는 난감했다. 하지만 00일병의 입장이 되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대장이 이 사실을 알았으니 그런 이상 징후 치료가 가능한지를 우선 알아보고 조치하겠다며 안심하라고 달래주었다. 그를 생활관으로 돌려보내며 걱정이 됐으나 연대 인사과장에게 먼저 상의를 했다. 다음날 연대인사과 선임하사가 대대를 방문해 00일병을 면담하고 병원 진료를 받게 하겠다며 데리고 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병원 치료차 대대를 떠난 병사는 의사 진료 후에 ‘성도착증세’로 확진이 됐고, 바로 전역 조치가 되었다. 한달 뒤에 그의 편지를 받았다. 전역해서 집에서 조용히 보내고 있다는 소식이었고, 말미에 병명 때문에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수 없게 되었다는 원망도 적혀있었다. 지휘관은 휘하에 부하들을 지휘통솔하는 직책이다. 질식사 위험의 부하도 살리는 보람도 있었으나, 후자같은 경우에는 많은 타부하들을 위해 지휘관을 믿고 솔직하게 애로사항을 건의했던 부하를 아쉽게 전역시켜야 하는 아픔을 겪게 만드는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괴로움을 겪게 만들기도 했다. 어쩔수 없이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게 만들었지만 지금도 희생양이 된 00일병에게 미안함이 가슴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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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8] 지휘관은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직책(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부대 복귀를 고려해 우선 원거리부터 이동하여 야간순찰을 시작했다. 미원면과 낭성면을 지나 가덕면에 위치한 지파출소 예비군무기고를 향해 가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짚차 출입문 틈으로 혹서기 삭풍을 예는 바람이 매섭게 파고들어 발밑의 히타의 온기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추웠다. 저멀리 가덕면 지팔출소와 예비군 무기고가 시야에 들어오며 경계초소가 보였는데 그 안에 초병이 없었다. 일순간 날이 추워서 경계근무를 안하고 임시 생활관에 들어가 쉬고 있다는 생각이 스치며 경계근무에 소홀한 초병을 어떻게 혼을 내줘야 할지를 생각하며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차를 세우고 경계초소로 들어갔다. 헌데 초병인 상근예비역은 초소 밖을 보며 경계근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초소안에 총을 세워놓고 쪼그리고 앉아서 깡통에 피워놓은 장작불을 쬐고있었다. 기습적인 대대장의 방문에 놀란 초병은 옆에 소총을 집어들면서 급하게 일어서서 ‘필...!’하고 경례를 했다. 경례구호도 제대로 하지못한 초병은 백지장처럼 얼굴이 하얗게 변했고,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며 필자의 품에서 잠시 기절을 했다. 필자는 초병을 안은 채 초소 밖으로 나와 찬바람을 맞히며 등을 두드렸다. 잠시후 표정이 정상적으로 돌아온 초병은 말을 할려고 했는데 그때까지도 제대로 정신이 돌아오지 못했는지 더듬거리고 있었다. 초병은 혹한을 견디기 위해 깡통에 피워놓은 장작불에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장시간을 보냈는지 일산화탄소를 흡입하여 거의 중독되기 직전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필자의 품으로 쓰러졌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는 더듬거리며 죄송하다는 말만 계속했다. 일산화탄소에 중독되어 비틀거리는 초병을 생활관 대기실로 옮기고 그곳에서 대기하던 다른 상근예비역으로 초병근무를 교대시켰다. 비록 후방지역 향토사단이지만 대대장으로 근무하는 필자도 당연히 무기고 경계초소 야간순찰을 돌아야 한다는 생각해 지속 감행했던 결과로 질식사 직전의 부하를 살렸다는 부듯한 보람이 엄동설한 속에서 가슴을 따뜻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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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5] 혹한기훈련과 연대전투단훈련으로 호국충절의 고장임을 증명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고향이 같은 충청북도인 사단장과 군수는 보자마자 너무도 반갑게 인사를 했다. 충북 괴산군 청안면 출신인 사단장은 충북 청원군 북이면 출신의 군수와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사단장은 청원군수를 만나자마자 군의회 의장과 함께 훈련장을 방문해서 비행장 방어시에 야간 침투하는 적들을 격멸하기 위해 필요한 탐조등 35셋트(630만원 상당)을 구매하여 기부해준 것과 지난번 낭성면 예비군 무기고 신축 예산(약 2000만원) 지원, 그리고 사단에서 필요한 모래를 미호천에서 채취하도록 승인해준 것에 대해 감사함을 표했고, 분위기는 상승고도를 탔다. 덕분에 훈련상황실에서의 현황보고는 부드럽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 두사람은 훈련상황실에서 나와 훈련장 텐트 현장을 함께 순시했다. 모두 시간에 쫒기는 중요 직책이었으나 그들은 할 이야기가 남았는지 현장 순시를 함께하다가 대대장 텐트로 다시 들어가 못다한 환담을 지속했다. 다음날 사단 상황실의 아침 상황보고에서 사단장은 청원대대의 훈련 현장지도시 중대장과 병 1인 다역화와 간부화 훈련 백브리핑에 대한 칭찬의 훈시를 쏟아내며 타부대도 참고해서 훈련에 임하라고 강조했다. 또한 발표한 병사는 포상휴가조치하라고 지시했다는 소문도 들렸고, 얼마뒤에 현장지도 결과가 공문으로 각 부대로 하달되어 대대원들의 사기가 최고로 고조되는 영광도 얻었다. 사단장의 동계 혹한기 훈련 현장지도 결과가 각 부대로 하달되자 연대 및 사단 실무자들과 타 부대장들은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사단이 들썩들썩하냐?”고 의문의 전화를 필자에게 계속 날려보냈다. 육본으로 전출간 전임 사단 공병대장과 수방사에서 함께 근무했던 장연석(육사35기) 선배도 소식을 들었다며 축하 전화를 주었다. 과거 최전방 대성산 기슭의 중대장 시절에는 혹한과 폭설 속에서 얼음집을 지어 숙영하며 적응훈련을 했었지만, 향토사단 후방지역인 충청북도는 전방만큼 기온이 떨어지지 않아 제대로 혹한기 훈련을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사단장의 극찬으로 이번 혹한기 훈련도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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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19] 재활치료의 위기를 호기로 만드는 비법⑲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연구소장] 병자년 새해가 되었지만 필자는 아직도 목발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대대장 취임은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만약 이대로 취임하면 ‘절름발이 대대장 또는 DJ 대대장’이라는 별명이 계속 따라 붙을 것 같았다. 또한 활동에 많은 제약을 주어 불편하게 만드는 골반쪽의 상단 고정핀을 제거하자는 통합병원 군의관(이진우 대위)의 진단에 따라 새해 초부터 재차 병원에 입원했다. 통합병원 도착 다음날 바로 2시간 동안의 수술을 통해 상단핀을 제거하고 다시 2주간의 회복 기간을 가졌다. 이미 3개월 전에 같은 병원에 입원했던 환자였기 때문인지 만나는 간호장교와 군의관들도 모두 반기며(?) 인사를 해와 병원 생활을 불편없이 익숙하게 할 수 있었고, 짧은 입원 기간이기 때문에 주변의 선후배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며 가족에게도 면회오지 않도록 당부했다. 하지만 회복 및 재활치료의 무료한 시간이 계속되자 재활위기를 호기로 만를려는 생각을 감출 수가 없었다. 보름간의 골반쪽의 상단 고정핀을 제거 수술치료, 입원 기간에 병실에 앉아 필자는 동국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인 ‘동서독 통일과정에서의 군통합에 관한 연구– 남북한 적용가능성을 중심으로’에서 예비군분야를 발췌하여 정리한 ‘조국통일을 대비한 예비군제도 비전’이라는 원고를 작성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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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14] 재활치료의 위기를 호기로 만드는 비법⑭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필자는 유난히도 ‘37’이라는 숫자와 많은 인연을 갖고있다. 육사 37기로 임관했고, 또 37사단의 대대장 자원으로 부임했으며, 전입후에 자만과 교만에 빠져 과신하며 지팡이를 던져버리고 무리하게 다니다가 불융합에 의한 대퇴부 재골절로 다시 수술을 받고 37일동안 입원했다. 바로 전해 4월에 발생한 대형교통사고로 인한 병원치료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했을 때 주변 선배들이 재활 치료 기간이 많이 남아있어 바로 대대장 취임은 어려우니 차라리 6개월간의 ‘군사영어반’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으며 재활치료를 한후에 대대장으로 취임하라는 제안에 따라 본의 아니게 영어교육을 받는 혜택을 누렸었다. 이번에도 퇴원을 앞두고 회복할 수 있는 재활치료 시간이 필요했는데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생각해낸 군수관리학교 8주간의 ‘군수기능통합관리과정 제95-4기’ 교육이 종합행정학교 군사영어반에 이어 최후의 피난처가 되었다. 또한 작전직능의 장교가 군수분야까지 섭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당시에 장교들이 전 직능의 임무를 다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한다는 취지에 따라 잠시동안 공통 주특기로 바뀌었지만, 제95-4기과정에 참석한 학생장교들은 대부분이 군수직능 중령급 장교들로 이미 군수참모 직책을 경험했거나 곧 참모로 부임할 자원들이었다. 따라서 작전직능으로 군수분야 문외한(門外漢)인 필자는 수업을 따라가기가 매우 힘들었고 함께 교육받는 선배들과 수호천사 라파엘이었던 동기 이00중령의 도움이 없었다면 무의미하며 고통스럽고 어려운 시간이 될 수도 있었다. (다음편 계속)
실시간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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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1)]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무적태풍부대의 1992년 연말은 정말로 정신이 없었다. 생도시절 각종 힘든 훈련을 하면서 외쳤던 ‘극한 속의 여유’란 구호의 의미를 절로 느끼게 하는 순간이었다. 그해 12월에 실시되는 대통령선거 각 당의 후보들이었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과 대법원장, 적십자사 총재 강영훈 장군까지 국가의 거물급 중요 인사들의 격려 방문은 부대의 자긍심도 높힐 수도 있었지만 계속되는 행사를 준비하는 실무자에게 죽을 맛을 느끼는 고생이었다. 마지막 방문자인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를 영접하기 2일전인 12월28일에 전설적인 삶을 주도했던 강영훈 적십자사 총재가 부대를 찾았다. 이때 군사령부에서는 주요 인사들이 유독 무적태풍부대로 집중해서 방문하는 것이 이상하다며 원인을 조사하라는 지시도 있었다고 전해졌다. 강영훈 적십자사 총재와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의 부대 방문행사 준비를 하면서 신임 작전참모 김형배 중령(육사34기)의 자료 수집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김 참모는 육군대학에 발간되는 ‘군사평론’을 분야별로 분류하여 책자로 만들어 수시로 참조했고, 강 총재에게 보고할 슬라이드를 창의적으로 만들기 위해 인접 사단 및 군단의 보고내용을 수집하는 등 어떠한 임무를 부여받더라도 총체적인 자료로 참신한 업무보고서를 작성토록 노력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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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1)]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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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0)]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강영훈 장군은 7년의 재임기간 중에 무적태풍부대를 인상적으로 격려 방문했던 대한적십자사 총재직을 성공적으로 마친 1997년 이후 세종연구소 이사장직을 맡아 국가발전에 기여했다. 청렴하고 강직한 이미지로 각인된 그는 유엔 환경계획 한국위원회 총재, 인촌상 운영위원회 위원장,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초대회장 등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후엔 전시작전통제권환수 반대 운동에 나서는 등 사회원로로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는 총리에서 퇴임한 뒤 평소에 자주 대중교통을 이용했다고 한다. 가족들에게 “전직 총리가 버스를 타는 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진정한 민주사회”라고 말했다는 후문이었으며 늘 국민과 가까이에서 함께하다 2016년 5월10일 95세로 타계하였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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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80)]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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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79)]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1970년부터 그는 박정희정권을 용납하게 되었으나 ‘5.16은 일어나서는 안 되었던 일’이란 것이 평생의 신념이었다. 1976년말 15년간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여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장과 외무부 산하의 외교안보연구원(현 국립외교원)장을 역임했다. 1980년 주영대사에 임명되었고 1983년 12월부터 아일랜드 대사를 겸하였으며, 1984년 12월 이후 주로마 교황청 대사를 지냈다. 1988년에는 제13대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는데 같은 해 12월부터 2년간 국무총리로 첫 남북총리회담 개최와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등을 주도했다. 그는 총리 시절에 서울과 수원을 시작으로 제주도와 마라도까지 전국 18곳을 순회하며 ‘국민과의 대화’를 가졌으며, 1989년 일본 쇼와 천황의 장례식 조문도 참석하는 등 보다 적극적으로 자기 역할을 충분하게 했다. 총리를 퇴임한 뒤, 1991년 제18대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되어 매년 수시로 전방부대를 위문했는데 1992년 말 당시 대통령선거의 후보들처럼 무적태풍부대를 격려 방문했다. 또한 그는 7년간 민간의 대북 인도적 지원사업을 주도하면서 북한 수재민 돕기(1995년)와 남북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제의(1997년) 등 남북 교류에 큰 족적을 남겼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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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79)]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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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78)]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강영훈 장군은 1921년 평북 창성군에서 태어나 청산보통학교 졸업후 영변농업학교를 다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히로시마 다카다(高田)중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했다. 1941년 만주국 건국대학에 입학했으나 1944년 1월 봉천의 보병학교와 1945년 초랴오양의 예비사관학교에 다시 입교하여 그해 7월 견습사관으로 임관했다가 곧 해방을 맞았다. 8.15 광복된 후 10월이 되어서야 고향 창성으로 귀환한 그는 북한 체제에 불만을 품고 월남하여 1946년 3월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군사영어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949년 대한민국 육군 제1보병사단 12연대장으로 부임했다. 6.25남침전쟁때에 국방부 관리국 국장, 3군단 부군단장 임무를 수행한 그는 1952년부터 1년간 주한 미국 대사관 부무관을 지냈다.이후 사단장을 거쳐 1960년 포천에 있는 6군단장 시절 4.19혁명을 맞았다. 당시 상부에서 “전차를 출동시키라”고 명령을 받았으나 강 장군은 “탱크로 학생들을 깔아뭉개버리겠다는 얘기냐?”며 단호히 거부했다. 이후 제15대 육군사관학교장으로 부임했으나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났을 때 그는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혁명 지지 시위 동원에 반대하였고, 곧 ‘반혁명 장성 1호’로 체포되어서, 서울형무소에 100여 일간 수감된 후에 육군중장으로 예편한 참군인이었다. 이후 군부의 권유를 받아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62년 뉴멕시코 주립대학교에서 공부하여 1963년 USC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공산주의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채용되었다. 미국에서 한국문제연구소도 설립하였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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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78)]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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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77)]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매년 연말이 되면 대통령, 국회의원, 기업체 회장들을 비롯하여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전방 각 부대를 위문한다. 모두들 바쁘고 중요한 직책이다 보니 서울에서 근접한 GOP부대를 선호하여 가깝고 교통이 편리한 문산축선의 천하 제1사단은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는 현상이 종종 벌어진다. 특히 선거철을 앞두고는 표의 향방이 중요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한표라도 더 얻을 수 있도록 군에서 가장 많은 장교를 양성하는 ROTC출신 지휘관 부대를 찾게 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1992년 말 대통령 선거시에 필자가 근무했던 무적태풍부대의 사단장이 덕망이 높은 이영대 장군(학군4기)이기 때문에 다소 교통이 불편하더라도 각 당의 후보들이었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후보와 적십자 총재인 강영훈 장군까지 부대를 방문하게 되었다. 당시 사회를 좌지우지하던 권력의 실세이자 많은 국민으로부터 추앙을 받는 정치 지도자들을 한꺼번에 만나는 영광의 순간이자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비교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부대 방문자 중 총리를 역임한 강영훈 장군은 ‘벽창호’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이 말은 평안북도 벽동군과 창성군 사람 중에서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로, 강 장군의 고향이 바로 평북 창성군으로 압록강과 접한 국경지역의 교통 중심지였다. ‘벽창호’의 고향답게 창성군과 벽동군에서 기르는 한우도 예로부터 힘이 좋고 동시에 말 안 듣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강 총리의 회고록 제목에 나온 ‘벽창우’는 여기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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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77)] 정당 대통령 후보들의 연말 부대방문 애피소드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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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76)] 장성 150여명을 배출한 ROTC(학군단) 파워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편 필자가 근무했던 무적태풍부대 사단장 이영대 소장(학군4기)은 고려대 학군단 출신으로 전후방 각지에서 근무할 때 매우 성실하며 훌륭한 인품을 지녔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는 위의 사진자료처럼 간부 교육을 통해 지휘여건 변화에 따른 성공비결을 강조했는데 현재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에도 의식 구조면에서 황금만능주의와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며 이기주의가 팽배하여 희생적 단체정신이 미약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부대관리면에서 지휘 성공요소를 의욕고치를 위한 동기부여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여 성취감을 느낄 수 있도록 교육을 하고, 본인부터 인정있고 어려움을 헤아려 주며, 고생과 위험을 같이 하는 지휘관으로 솔선수범했다. 그리고 ‘업무수행지침’을 손수 작성하여 간부들에게 나누어 주고 “상하 골육지정으로 철석같이 단결하여 교육훈련 질적 개혁의 꾸준한 추진과 좋은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자며 말보다는 행동으로 실천하는 긍정적이고 실천적인 생활을 하자”고 강조했다. 또한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업무를 수행하며, “내가 근무하는 기간에 전쟁이 일어난다(적이 온다)”는 각오로 대비하는 전투적 사고를 견지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지휘철학은 결국 교육훈련을 통해 강한 전투부대 육성에 결정적 요소가 되었고 사단장 재임 기간인 1992년 말 대통령 선거시에 각 당의 후보들이었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후보와 적십자 총재인 강영훈 장군까지 학군단 출신인 이영대 장군의 부대를 방문하게 되었다. 결국 그 여세를 몰아 다음해에는 사단장 3대에 걸쳐 대통령 부대표창을 연속 받는 성과를 일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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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76)] 장성 150여명을 배출한 ROTC(학군단) 파워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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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75)] 장성 150여명을 배출한 ROTC(학군단) 파워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필자가 무적태풍부대의 작전보좌관으로 근무하던 시절에 기동훈련 및 전투지휘검열 등 주요 훈련 및 검열이 성공적으로 마치면 통상 사단에서는 고생한 참모 및 실무자들을 위해 격려 만찬을 했다. 이때도 학군장교 출신의 예비역들이 군의 현역에 남아있는 동료들에게 지원과 위문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체험할 수 있었다. 당시 사단장 이영대 소장(학군4기)은 격려행사를 할 때에 학군장교 후배이자 가장 인기 사회자였던 뽀빠이 이상용(학군5기)와 소설 ‘인간시장’ 작가 김홍신(학군9기) 등이 자리를 함께하여 부대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며 행사를 빛냈다. 이러한 학군장교 출신들의 저력은 해당 지휘관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게 만들었고 국가 및 사회 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군의 현역에 남았는 학군장교들이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부대를 발전시키는 데 전념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군 서열 1위인 합참의장과 육군참모총장 및 군사령관 등 8명의 대장과 16명의 중장을 포함하여 약 150명의 학군장교들이 장성으로 진급하며 군발전을 위해 활약하게 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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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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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75)] 장성 150여명을 배출한 ROTC(학군단) 파워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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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74)] 장성 150여명을 배출한 ROTC(학군단) 파워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육사, 3사, 학사 등 장교양성과정 중 가장 많은 약 23만명의 장교를 배출한 학군장교 출신 예비역들은 사회 각 곳에서 국가 발전을 위해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우수자원들은 국회의원, 기업체 사장 등 사회 지도층이 되어 봉사하며 이들은 군의 현역에 남아있는 후배 동료들에게 지원과 위문을 아끼지 않는다. 게다가 단기 자원들이 2년간 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할 때에는 각 사업체에서 강한 책임감과 리더십을 견지하며 건전하고 국가관이 투철한 이들을 채용하기 위해 취업박람회 등에서 채용전쟁이 벌어진다. 필자가 장교 임관 초임지인 승리부대에서 GP장(소대장)직을 수행할 때 당시 연대장도 학군 1기인 박세환 대령이었다. 박 대령은 고려대학교 출신으로 전후방 각지에서 맹활약하여 능력과 인품을 인정받아 학군장교 최초의 대장이 되어 2군사령관을 역임했고, 전역 후에는 국회의원 및 재향군인회장으로 국가와 군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연대장 시절에 고려대 출신 동문들의 엄청난 지원과 위문을 받아 GOP철책에 배치된 각 소대에 매달 밀가루 한포씩을 매월 제공해 수제비와 붙임개를 만들어 먹도록하여 GOP 경계근무의 피로에 쌓인 부대원의 사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를 정도로 고양된 적도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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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74)] 장성 150여명을 배출한 ROTC(학군단) 파워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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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73)] 장성 150여명을 배출한 ROTC(학군단) 파워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현재 군에서 가장 많은 장교를 양성하는 ROTC(Reserve Officers' Training Corps)는 군 내부에서는 학군 또는 학군단으로 불리고, 교육과정 중에 있는 장교후보생에게는 공식적으로 '학군사관후보생'이라고 호칭된다. ROTC는 대학 재학생 중에서 우수자를 선발하여, 2년간의 군사훈련을 실시함으로써 대학의 전공학문 완성과 더불어 소정의 군사지식과 실무능력 등 문무를 겸비한 장교를 양성하여 활용할 수 있는 효율성이 매우 높은 제도로서 미국의 ROTC 제도를 모델로 하여 시행되었다. 나무위키와 ‘대한민국ROTC중앙회’ 자료에 따른면 대한민국 국군의 최초 학군단은 1959년 한국해양대학교에 창설된 해군 제1001학생군사교육단이다. 2년 뒤인 1961년 육군이 18개 학군단을 창설하였으며, 2011년말 육군기준으로 101(서울대학교)부터 218(성신여자대학교)까지 전국에 110개 학군단으로 확대되어, 매년 임관하는 학군장교의 수는 약 4,000명 정도로 현재까지 약 23만명의 장교를 배출했다. 그동안 학군1기 박세환(고려대) 등 5명의 2작전사령관, 2기 김진호(고려대)21기 박한기(서울시립대) 2명의 합참의장, 23기 남영신(동아대) 육군참모총장 등 8명의 대장과 3기 임재문(건국대) 기무사령관 등 16명의 중장을 포함하여 약 150명의 학군장교들이 장성대열에 합류했다. 학군단 상징인 마크의 외곽테두리는 조국수호의 방패를, 백색은 백의민족의 평화 애호 정신을, 청색은 청년 대학생을, 별은 육군을, 칼과 펜은 진리 탐구와 유사시 국가 수호를 담당하는 고국 학생으로서 문무를 겸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음편 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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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73)] 장성 150여명을 배출한 ROTC(학군단) 파워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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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72)] 겨울을 앞당기는 희비애환(喜悲哀歡)의 진급심사 시즌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을지훈련이 끝나고 함께 고생했던 작전장교는 소령으로 진급하여 다음 보직으로 영전했고 후임 작전장교로 육사후배 백창진 대위(육사40기)가 전입을 왔다. 필자도 을지훈련시 부르튼 입술이 터져서 부어오르는 먹지 위장크림효과로 사단장 및 참모 등 상급자들에게 각인되며 인정받아 심사 대상자가 되는 다음해에 진급하는 영광을 얻었다. 또한 사단기동훈련이 끝나고 진급시즌 막바지인 11월에 이르자 사단에서 그렇게도 갈망했던 강수명 작전참모(육사31기)가 드디어 진급하여 병과의 장인 대령반열에 올랐다. 사실 대령 진급은 사단급 부대에서 매우 힘든 사례였다. 통상 대대장과 사단참모 보직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군단급 이상의 부대에서 중요 보직을 수행해야 진급 대상자가 될 수 있었다. 아니면 군단급 이상의 부대에서 주요보직을 마치고 필수 보직인 사단 작전참모로 근무하면 간혹의 진급하는 기회를 주어지기도 했는데 당시 참모는 후자의 사례였다. 강수명 대령 진급 예정자는 작전참모 보직을 정보참모 임무를 수행하던 김형배 중령(육사34기)에게 인계하고 65동원사단 연대장으로 영전했다. 이후 장군으로 진급하는 그는 육군대학 교수부장직을 역임하고 전역하여 평택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한편 새로 부임한 백창진 대위는 탁월하게 작전 장교 임무를 수행해 필자와 같은 해에 소령으로 진급했다. 그는 그해 12월2일, 신임 작전참모인 김형재 중령에게 업무보고를 준비하여 능력을 인정받으며 작전처 총괄 선임장교로 활발하게 임무를 수행했는데 김 중령으로부터 무서운 후배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탁월을 넘어 출중했다. 희비애환(喜悲哀歡)을 느끼는 인생과 진급은 ‘운7기3(運七技三)’이지만 어떻게 보면 본인의 능력과 업적을 우선 쌓고,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 폐결핵이 만연하던 1928년, 포도상구균 배양중에 실수로 오염된 푸른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발견하여 최초의 항생제 개발에 성공한 영국의 플레밍 박사는 “행운은 준비된 자에게만 온다”는 말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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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272)] 겨울을 앞당기는 희비애환(喜悲哀歡)의 진급심사 시즌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