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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3)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구안보협업연구소장] 하지만 영관영어반에서 만난 선배중에는 광주 출신의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임을 부정하고 중국인 공산주의자로 행세를 한 정율성처럼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자도 있었다. 정율성이 북한과 중국에서 보였던 불손하고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이지만 화려한 작곡가로서의 삶처럼 그 선배도 생도시절부터 뛰어난 지혜와 지휘생도 활약으로 후배 생도들의 존경심을 받아왔고 필자에게는 목발 및 지팡이를 짚고 있다고 해서 DJ라는 별칭을 즐겨 불러 주었다. 또한 그는 명석한 지능으로 영어 수업도 우수한 성적을 계속 유지했다. 마치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지닌 정율성처럼 그의 모습은 수업시간에 뛰어난 영어 회화능력으로 교관들의 칭찬을 받아 학생장교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일과후 독신자 숙소에서도 타 선배들처럼 잦은 출타를 하거나 만취되는 일도 없이 착실한 학생장교로 돋보였고 필자는 친절하게 학업을 도와주는 그가 고맙고 존경스럽기까지 했고 대령으로 일차 진급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영관영어반 과정이 중반을 넘어 종반으로 접어들 무렵에 그는 매우 힘든 표정으로 정색을 하며 필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동생이 사업을 하는 데 급전이 필요하고 진행상 곧 회수 가능해 일주일 뒤면 갚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필자는 현금이 있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도와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필자도 교통사고 후에 많은 출혈이 있었고 저축한 돈도 별로 없어 죄송했다. 선배의 계속 독촉에 못이겨 현재 들고 있는 적금을 해약하면 요구한 금액의 반정도를 제공할 수 있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빨리 주면 바로 해결하고 일주일 뒤에 갚겠다고 다짐했다. 하는 수 없이 통장을 들고 은행을 찾아 적금을 해약한 후에 그 선배에게 전달했다. 물론 일주일 뒤에 갚는다고 해서 가족에게는 비밀로 했다. 그후 일주일이 지났지만 선배에게 갚아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일단 돈을 주고나니 빌려준 사람이 을이 되어 있었고, 그는 여유롭게 생활하며 빌린 돈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결국 교육 종료 직전에 그 선배에게 아직까지도 가족에게 말을 안했으니 빌린 돈을 갚아주어야 통장을 다시 만들 수 있다고 독촉했다. 그 선배는 다음주로 다시 미루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던졌는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생도시절부터 탁월한 모습으로 존경을 했던 인연은 악연으로 끝났다. 가짜 한국인 정율성처럼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그의 언행에 현혹된 필자가 부끄러웠고, 이후에는 잘 아는 지인들과의 관계에서 금전 문제가 생길 때에는 여유가 있어 대출이 아닌 무상으로 제공하거나 아니면 조심스럽게 거절하는 것이 돈도 잃지 않고 더구나 사람도 더 잃지 않는 길이라는 교훈을 영관영어반 교육과정에서 얻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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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2)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㉗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정율성이 6·25남침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 군가도 작곡했지만 인민군과 함께 서울에 내려와 점령군으로서 자유 대한민국을 유린하고 1·4 후퇴 때는 중공군과 함께 재차 서울에 내려와 조선궁정악보를 약탈해간 매국노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따라서 광주 출신이지만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인 공산당원으로 변절한 자를 추모하며 중국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추진했던 정율성 공원 조성사업은 동족상잔의 비국을 겪은 자유대한민국에서는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현재도 핵과 미사일 발사실험을 계속하는 북한의 군사도발을 막으려면 견고한 한미동맹이 절실한 실정이다. 필자가 다녔던 ‘영관영어반’ 과정에서도 북한의 재 남침에 대비해 합동참모본부의 주요부서에 근무하며 군사전략을 담당했던 용삼남(육사33기) 선배로부터 한미연합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용 선배는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목발을 짚고 재활치료에 전념했던 필자에게 용기를 심어주기도 했다. 그는 생도시절 럭비부 선수 생활을 했는데 운동중에 부상을 입어 척추가 심하게 손상되어 의사들이 판단할 때에도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상태였으나 강한 의지로 철저하게 운동을 하여 척추 주변 근육을 강화시킴으로써 전혀 불편함 없이 더 건강하게 보였다. 예를 들면 합참 근무시에 매일 새벽에 가장 일찍 출근하여 책상 및 의자 정리 및 청소를 한 뒤에 책상위에 올라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를 300개씩 하여 근육을 강화시켰다. 그가 원주에 있는 부대에 근무할 때에는 고속도로에서 시비를 걸던 조폭을 한방의 주먹으로 넉아웃시킬 정도로 강해졌다는 여담도 남겼다. 건강한 체력은 건전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창출하며 업무에 질도 고양시킬 수 있다. 건강의 이상을 극복하며 지칠줄 모르는 용 선배의 체력에 상관들은 힘든 업무도 쉽게 맡길 수 있었고 업무상 만나는 미군들과도 쉽게 친해져 한미 연합작전과 군사전략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게다가 일과후에는 독신자 숙소에서 우리의 전통악기인 대금을 연주하며 하루를 마감하여 건강상 어려운 위기를 적극 극복하는 강한 의지와 동시에 예술감까지 가진 문무를 겸비한 군인으로 끝없는 존경심을 불러 일으켜 앞으로의 군생활의 롤모델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할 정도였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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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1)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㉖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 10월2일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정율성 거리’에 세워져 있던 중국 음악가 ‘정율성 동상’이 기단에서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진 모습으로 발견됐다. 정율성은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중국에 귀화한 음악가로, 북한·중공군 군가를 작곡한 인물인데, 광주시가 기념사업을 추진해 논란을 불렀다. 정율성 동상은 중국 청년단체가 제작해 광주 지역 청년단체에 기증한 것으로 2008년 광주 남구 양림동에 조성된 정율성 거리 입구에 세워졌다. 광주 남부경찰서는 이날 재물손괴 혐의로 보수단체 회원 윤모(56)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은 전날(1일) 오후 정율성 흉상 목 부분에 밧줄을 묶고 2.5톤 승합차에 이를 연결한 뒤 쓰러뜨리는 모습이 담긴 CCTV를 확보했다. 정율성 흉상은 위의 사진처럼 약 1m 높이의 기단에서 완전히 분리된 채 기단 옆 땅바닥에 누운 모습으로 발견됐다. 윤씨는 범행 직후 한 유튜브 채널에서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 사업을 중단하라고 광주시에 요구했는데 이를 이를 수용하지 않아 강제로 (흉상을) 철거했다”고 밝혔다. 윤씨는 경찰에서 “내가 그랬다. 3일 오전에 경찰서로 가서 조사받겠다”며 범행을 시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북한의 연평도 포격 유족 대표인 고(故) 서정우 하사의 어머니 김오복 전 광주대성여고 교장은 2일 “공산주의자 정율성의 실체가 드러났는데도 광주시가 혈세 48억원을 들여 정율성 공원을 짓는다는 계획을 철회하지 않고 무조치로 일관하고 있다”며 “공원 철폐를 위한 릴레이 피켓 시위를 열겠다”고 밝혔다. 김오복 전 교장은 “북·중공의 군가를 짓는 등 한국 침략세력의 나팔수 역할을 한 정율성 논란이 갈수록 커지고 있지만 강기정 광주시장은 아무 중단 조치도 없이 정율성 공원조치를 강행하겠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율성 공원 문제 제기에 대해 철지난 이념몰이, 색깔론, 민간외교라는 억지 논리만 되뇌고 있다”면서 “지난 한 달여 동안 보훈단체들의 집회를 관제 데모로 깎아내리고 국가를 위해 희생한 호국영령과 보훈가족을 모독하고, 공산주의자 정율성 공원을 철폐하거나 대안을 만들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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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0)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㉕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최근 국방부장관으로 지명된 신원식 의원(육사 37기)은 레닌에게 선물받은 권총으로 독립군을 직접 사살한 소련군 장교인 홍범도의 동상 이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필자는 ‘영관영어반’ 과정에 다닐 즈음에는 홍범도의 존재 조차도 몰랐다. 청산리 대첩 이후인 1921년, 소련군 장교인 홍범도와 그 일당들에 의한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들은 몰살당하며 해체됐다는 사실도 최근에 알았다. 남북이 대치된 상황에서 소련군 복장의 공산주의자를 추모한다는 것은 광주에서 태어났지만 인민군과 중국인민군 군가와 마오쩌뚱 찬양가 등을 수십 곡 만들며 뼈속까지 어용 공산주의자인 정율성 작곡가의 추모공원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관생도를 포함한 건전한 국민들의 정체성과 대적관을 현혹시키는 잘못된 처사이다. 필자가 다니던 ‘영관영어반’ 과정에서도 확고한 대적관을 바탕으로 견고한 한미동맹을 위한 교육이 계속되었다. 이 교육을 통해 숙달한 영어회화 능력으로 북한의 군사도발에 대비한 한미연합작전 및 훈련에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을 마치면 다음 보직은 연합사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필자는 이미 다음 보직이 충북 충용부대로 정해져 있었고, 다른 교육생들은 연합사령부 또는 예하 부대 및 연합작전/훈련을 주로 시행하는 합동참모본부로 분류되었다. 마침 합참의 중요부서에서 근무했던 선배도 함께 교육을 받고 있어 북한의 군사도발에 대비한 한미연합작전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중 한명은 육사 33기 용삼남 중령이었다. 과거 승리부대에서 함께 근무했던 양태수, 나대일, 김형배 선배 등을 포함하여 많은 선배 동료들을 다시 만나는 해후의 시간도 만끽했으나 용 선배는 6개월 교육기간 중에 강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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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89)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㉔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75주년을 맞은 국군의 날은 6·25남침전쟁 당시 우리 육군의 38선 돌파를 기념하는 날이다. 추석 연휴 때문에 닷새 앞당겨 지난 26일 열린 올해 국군의 날 기념행사는 그동안 소홀히 했다가 10년 만에 대대적인 도심 시가행진으로 주목받았다. 유사시 북한 지휘부의 지하 벙커를 파괴할 고위력 현무 미사일과 한국형 사드로 불리는 장거리 지대공유도미사일, 엘샘(L-SAM) 같은 첨단무기가 대거 등장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날로 고도화하는 북한의 핵 위협에 강력히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거듭 강조하며, 우리 군의 태동 시점은 1945년 광복 이후라고 언급했다. 이어 윤 대통령은 “광복 후 제대로 된 무기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태동한 우리 군은 이제는 적에게는 두려움을 안겨 주고, 국민에게는 신뢰받는 세계 속의 강군으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이는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등 역사 논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국군의 뿌리를 독립군에서 찾았던 문재인 전 대통령의 인식을 사실상 반박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국군의 날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급격하게 무너진 북한군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동부전선의 우리 육군 3사단이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처음으로 38선을 돌파한 10월1일을 기념하는 뜻에서 1956년 제정됐다. 하지만 체제 경쟁이 끝나고 남북정상회담 등이 열린 2000년대 이후론 광복군 창설일인 9월17일로 바꾸자는 주장도 꾸준히 제기됐다. 우리나라가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한 헌법에 따라 군의 뿌리도 임시정부 군대인 광복군으로 정립하는 게 맞다고 민주당 등 일부는 주장하지만 확고한 대적관을 강조해온 현 정부는 선을 긋고 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싸웠던 광복군도 의미는 있지만, 지금 우리 군은 북한과 싸우는 군대라며 국군의 확고한 정체성을 강조했고, 여야의 인식 차는 국군의 날 메시지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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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88)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㉓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6개월 기간의 ‘영관영어반’ 과정이 중간정도 지나갈 즈음에 필자는 그동안에 미루어 왔던 석사학위 논문의 마무리에 쉴 틈이 없었다. 그렇지만 ‘영관영어반’ 과정에 입교시킨 것은 능력이 부족한 필자가 석사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유리한 여건을 만들어주신 신의 배려와 인도라 생각되어 감사할 뿐이었다. 최종 논문심사에서 ‘동서독 통일과정에서의 군통합에 관한 연구 –남북한 적용가능성을 중심으로’라는 필자의 논문을 검토하던 동국대학교 3명의 지도교수들은 신통하다는 표정으로 새로운 착안이라고 칭찬을 해주었다. 왜냐면 당시에는 독일통일에 관련한 자료와 논문은 많았지만 군사분야는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독일 통일 당시에 독일에서 군사과정을 다녔던 김영식 동기(전 1군사령관)가 제공해준 귀국보고서가 큰 바탕이 되었고, 다른 학생들은 논문들은 기존의 타 논문에서 인용하여 만들다 보니 필자의 논문보다 교수들이 참고할 사항이 많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심사중에 지도교수들은 논문 내용보다 내 신상에 더욱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목발을 짚고 있지만 육사37기로 박지만과 동기라고 하자 그들은 ”아마도 그 동기들은 똑똑한 사람이 많이 들어갔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동기생 전체를 칭찬해주어 동기회 품격이 격상되는 이미지에 일조한 기분이 들어 보람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입교한 영관영어반 과정은 주말부부 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됨과 동시에 이미 취임해 맹활약하는 동기생들을 만나 회포도 풀었지만 대대장 근무의 노하우를 전수받는 계기가 되었고, 영관영어반 수료증과 동국대학교 석사학위기를 받아 내실을 기하는 일거다득(一擧多得)의 결실을 얻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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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8)]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사고 직후 필자의 응급처치를 했던 대구 가야기독병원에서는 복부 수술로 파열된 비장을 제거하고 횡경막과 갈비를 치료하며 파쇄골절된 대퇴부에 골수핀을 삽입했다. 이 상태로 을지병원에 도착하자 전문의들은 필자의 깨진 골반을 고정을 위해 3차 골반수술을 하며 골반고정핀(Pelvis frame)을 박아 필자의 배앞에는 골반 뼈에서 연결된 고정핀이 불쑥 튀어 나왔고, 엉덩이에는 그네를 태워 침대 위에서 몸이 공중에 떠있는 모습이 된 상태로 두달 가까이 지냈다. 불행중 다행이도 같은 병실에 누워 치료받던 김종완 동기는 빠르게 회복되었지만 꼼짝 못하는 필자 옆에서 소중한 말동무가 되었다. 반면에 간병하는 필자의 가족은 침대 옆의 쪽침대에서 잠을 청하며 어렵고 힘든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어느날 오후 위문온 무적태풍부대 성당의 군종신부가 완쾌 기도를 한 뒤에 성체를 김종완 동기 부부에게 주며 덕담을 하고 있었다. 그 옆의 침대위에 누워서 골반고정핀(Pelvis frame)을 박고 엉덩이에는 그네받침으로 공중에 떠있는 상태로 이 모습을 지켜본던 필자는 군종신부에게 “육사 생도시절에 세례를 받았던 저에게도 성체를 달라”며 신의 가호를 바라는 마음으로 당연한 듯 말했다. 허나 그 신부는 개신교 세례는 안되고 성당에서 세례받으면 그때 주겠다며 미소를 지었다. 그날 이후부터 필자의 가족은 을지병원 인접에 위치한 명동성당 미사를 매일 참석하기 시작했다. 사실 하루종일 침대에서 꼼짝못하는 필자를 간병하기 위해 애쓰는 가족에겐 성당을 다녀오는 것이 24시간 간병하는 스트레스도 해소하며 가족들의 행복과 필자의 완쾌를 기도하는 소중한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다행히도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경상을 입고 사고 당일부터 우리들을 곁에서 도움을 주었던 이재준 동기는 퇴원하여 사고 발생 한달 뒤인 5월26일 대대장으로 취임했다. 이 반가운 소식은 을지병원에서 치료받지만 완전하게 회복될지를 의심하며 군생활 포기까지도 생각했던 필자에게 재활의 희망을 주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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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8)]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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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7)]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당시에 필자는 골반이 골절된 중환자로 침대에서 꼼짝 못하는 신세지만 생리적 현상은 어쩔 수 없었다. 대구에서 출발하여 서울 을지로에 있던 구 을지병원으로 이동하는 앰뷸런스 안에서도 할 수 없이 간병하는 가족의 도움으로 해결해야 했다. 그동안 최전방 전선의 오지에서 혹한과 엄동설한을 겪으며 많은 고생을 시켰는데, 이번 교통사고까지 애쓰는 가족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에 가슴이 저려왔다. 을지문덕 장군을 기리는 서울 을지로에 도착했다. 서울의 대표적인 상업·업무 지구인 을지로동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진흙으로 된 언덕길이었다. 먼 곳에서 보면 마치 구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 같다고 하여 구리고개, 줄여서 ‘구리개’라고 불렸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이후인 1946년에 '을지로'라는 새 이름이 생기는데, 이는 당시 중국 상인들이 구리개 일대를 조선말 무렵부터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중국 수(隋) 나라를 격파했던 을지문덕 장군의 성을 따서 '을지'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침대에 실려 을지병원에 들어서자 우선 사고 초기 입원하여 치료했던 대구의 병원보다는 규모가 훨씬 크고 전문화되어 있으며 왠지 친밀감도 느낄 수 있었다. 함께 교통사고를 당해 치료받던 김종완 동기의 용산고교 시절 절친인 을지병원 박준영 이사장의 따뜻하고 의리있는 배려에 감사하는 느낌이기도 했다. 게다가 박 이사장의 특별한 관심이 표현된 강조 지시로 치료를 맡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더욱 신경을 쓰는 모습도 보였다.(다음편 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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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7)]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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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6)]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⑨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사고 발생 일주일이 지나자 함께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 교육을 받던 동기들은 수료후 각자의 임지로 출발하여 대대장으로 취임했다. 그중 일부는 취임 일정에 여유가 있어 치료를 받던 병원으로 찾아와 위문과 격려를 하는 동기애도 보여주어 감사했다. 하지만 카풀제 세명의 동기들은 교통사고에 따른 부상으로 집에서 장거리인 대구 가야기독병원에서 장기간 치료를 받아야 할 운명이었다. 따라서 골반이 골절되어 침대에서 꼼짝못하고 누워있어야만 했던 필자의 머리속에는 만감이 교차됐다.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 근무하던 동기가 조언했던 것처럼 “바로 전역을 하게 될지? 또는 회복이 되더라도 정상적인 근무보다는 전문분야에서 군발전을 위해 나름대로 군생활을 할지?”라는 고민에 빠져있을 때, 긴급수술을 집도했던 담당 의사가 병실을 찾았다. 앞으로의 진로 고민에 빠져있던 필자는 담당 의사에게 “선생님, 제 몸이 이런 상태인데 정상으로 회복될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물론입니다. 하지만 재활치료에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힘을 내세요...”라며 희망적인 위로의 대답으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입원한지 2주차가 끝나갈 무렵 옆침대에 누워 치료를 받던 김종완 동기에게 예상치 못했던 의외의 연락이 왔다. 그의 용산고등학교 시절에 절친이었던 을지병원 박준영 이사장이 서울로 올라와서 자기 병원에서 치료를 해주겠다고 제안하며 앰뷸런스를 보내겠다고 했다. 박 이사장의 제안에 대구의 병원에서 치료중인 우리들은 모두 동의하며 너무도 감사했다. 아무 인척도 없는 대구보다는 근무하던 부대와 가깝고 친척들과 지인들이 있는 서울의 큰 병원에서 치료받는 것이 훨씬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이재준 동기는 보행이 가능한 상태이라 이동시에 가족들을 많이 도와줄 수 있었다. 우리는 대구에서 출발하여 서울 을지로에 있던 구 을지병원으로 이동하는 앰뷸런스 안에서 다시 태어나 덤인생을 살 수 있게 해준 신과 물심양면으로 전우애를 보여준 동기들께 감사드렸고 더불어 또하나의 생일을 정했다. 교통사고를 당했던 1994년 4월24일을 세명의 재탄생일로 정하고, 잔인한 4월도 우리에게는 축복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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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6)]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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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5)]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⑧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필자를 포함한 세명의 부상 동기들은 뜻하지않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큰 부상을 당하며 군생활에도 먹구름이 끼였으나 기대 이상의 관심과 배려 덕택에 군생활을 끝까지 할 수 있게 만들어 준 너무도 감사한 상관 및 지인들도 있었다. 사고발생 당일인 4월25일은 무적태풍부대 사단장 이취임식이었는데, 이임하는 이영대 사단장(학군 4기)은 아침에 출근해서 필자의 사고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茫然自失)했다고 한다. 故 이영대 사단장은 3년간의 작전보좌관으로 근무하면서 필자를 아껴주고 믿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직전에 근무했던 부대인 수방사령부에서도 참모장과 작전장교로 수방사가 필동에서 남태령으로 이전시에 현장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며 뜻이 서로 통했었다. 그는 청천벽력같은 교통사고 소식을 접하고 후임 사단장 박기준 장군(학군 5기)에게 뒤처리를 잘해줄 것은 신신당부했다. 그 덕분에 같은 부대에서 사단참모부 보좌관을 했던 김종완 동기와 필자는 그 두 사단장의 따뜻한 배려로 많은 혜택을 받으며 군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필자와 김종완 동기의 부상 정도가 너무 심해서 군병원에 입원하지 못하고 민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자 무사히 건강하게 회복되어 돌아오면 바로 대대장으로 취임할 수 있도록 입원 기간을 예하부대의 부대대장으로 보직을 조정하여 휴가처리가 되도록 조치를 해주었고, 해당 연대장이었던 정형진 장군도 흔쾌히 동의하여 안심하고 치료와 재활에 전념할 수 있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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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5)]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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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4)]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⑦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대구 가야기독병원에 헌병 수사관이 파견되어 사고조사를 하면서 무장한 복장의 헌병근무자가 중환자실 앞에 배치되자 병원 관계자들은 신기하면서도 놀라며 대단한 사람들이 입원한 것으로 생각하여 더욱 관심을 가지고 정성어린 진료에 임하게 됐다. 또한 청와대에서 경찰서장에게 전화를 걸어 철저하게 진상을 조사하여 처리하라는 통보를 하자 경찰 출신 가해자를 옹호하려던 담당 경찰은 태도를 바꾸어 정확하게 사고 처리를 하였고, 우려했던 것처럼 피해자와 가해자가 바뀔 수 있는 상황도 방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육군대학 숙소에서 출근 준비를 하던 동기는 사고발생 전화를 받고 학교본부에 보고한 뒤에 종합시험을 앞둔 수업도 마다한 채 현장까지 달려와 사고처리를 완벽하게 도와주었다. 사고로 부상을 당한 동기들의 가족에게는 동두천 부대의 인접에서 근무하던 팽준호와 양종수 동기가 소식을 전하며 바쁜 업무에도 불구하고 걱정과 불안에 떨던 가족들을 직접 태워 대구까지 내려오는 수고를 해주었다. 이렇듯 많은 동기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 모두를 포함한 적극적인 도움을 주었고, 그 덕분에 교통사고로 부상을 당한 세명의 동기들은 하나 둘씩 회복되며, 뜨거운 동기애에 감사함을 느끼게 만드는 축복의 시간이 되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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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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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4)]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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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3)]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94-1기 고급과정(대대장반)’ 교육종료 1주일을 앞두고 발생한 교통사고로 세명의 동기들은 마지막 종합시험도 치루지 못했다. 헌데 30년이 지난 최근에 육사 동기생들과의 회식자리에서 당시에 많은 동기생들이 피해를 입은 세명의 동기들을 돕기 위해 애를 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994년 4월25일 아침에 진해 육군대학 독신자 숙소에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월요일 새벽, 마지막주 교육을 앞두고 숙소에서 아침 준비를 하던 김태경 동기는 계속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방에서 나와 복도에 있던 전화 수화기를 들었는데 교통사고 소식이 최초로 육군대학에 전달되던 순간이었다. 김 동기는 각방의 문을 두드렸으나 아무도 없었고 마침 잠에 취해있던 김현수 동기를 깨워 소식을 전하며 학교본부에 보고를 한 뒤에 차를 몰고 대구 가야기독병원으로 향했다. 김태경 동기의 전언에 따르면 그날 아침에 유난히도 안개가 심해 운전도 몹시 힘들었고 추가 교통사고 위험도 있었다고 했다. 두명의 동기가 위험을 무릅쓰고 운전하여 대구 가야기독병원에 도착하자 피해자 세사람 모두는 중환자실 및 수술실에 있었고, 필자는 횡경막 및 비장 파열에 따른 심한 출혈로 생명이 경각에 달려 긴급 수술중이었다. 헌데 조사하던 경찰의 태도가 이상해 사고경위를 자세하게 따져 물었는데, 마침 가해자가 경찰출신으로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자 김현수 동기는 당시 청와대 국방비서관실의 행정관이었던 이문석 동기에게 편파적이 아니라 정확하게 조치하도록 경찰에 통보하는 도움을 청했다. 때마춰 지금은 해체된 11군단 헌병대에서 근무하던 승장래 동기는 헌병을 급하게 대구 가야기독병원으로 파견하여 사고 조사를 하면서 부상자들이 치료를 받던 중환자실 앞에 무장을 한 헌병까지 배치했다. 일단 안전하게 운전하여 정상적으로 대대장반 교육을 마쳐야 했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로 목숨의 경각까지 갔던 잔인한 4월의 아픔은 불행중 다행으로 많은 동기들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하나 둘씩 회복되며, 뜨거운 동기애를 느끼게 한 소중하고 감사한 추억을 만드는 축복으로 바뀌고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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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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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3)]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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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2)]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사고가 발생한 지 3일이 지나서 필자는 눈을 뜰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가족이 옆에서 간병하고 있었는데 천장, 벽 그리고 붕대를 칭칭 감은 필자의 몸까지 온통 하얀색이라 이미 저승에 와있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런데 주변을 인식하자마자 곧 또 의식을 잃었다. 당시 필자는 골반 및 치골은 전위골절, 대퇴부는 분쇄골절, 늑골8·9번 골절, 좌5족지 골절, 횡경막·비장 파열, 뇌진탕, 혈복흔 등으로 병명만 세어봐도 11가지인 중태 상태로 살아난 것이 기적이었다. 누가 흔드는 것 같은 느낌에 눈을 떠보니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 근무하던 백무화 동기였다. 육사에서 기초군사훈련을 같이 받았던 백 동기는 눈을 뜬 필자를 보고는 “희철아, 걱정하지마라! 너희들은 학교로 출근하다가 당한 교통사고라 공상처리가 가능하다. 내가 육본에 돌아가면 다시 확인해서 잘 처리하도록 할게...”하며 울컥 눈물을 쏟았다. 그의 위로는 이미 군생활은 못하고 전역해야 하지만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로 들렸는데 그 소리를 듣던 필자는 고맙다는 말도 못한 채 또 잠이 들며 의식을 잃었다. 며칠이 지나면서 의식이 점차 회복되었는데 옆을 돌아보니 김종완 동기도 붕대를 감고 누워 신음하고 있었다. 필자의 상태는 붕대에 칭칭 감겨있는 엉덩이와 다친 다리가 프레임 끈에 연결되어 침대 바닥에서 하늘로 둥둥 떠있었다. 그때 “희철아, 이제 정신이 좀 드냐?”라는 조수석에 앉아있던 이재준 동기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다행히도 그는 안전벨트를 철저하게 메고 있어 늑골에만 이상이 있었고 당시에는 비교적 많이 회복되어 걸어다닐 수 있는 상태였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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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2)]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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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1)]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훗날 필자의 교통사고 뒤처리를 위해 애를 썼던 육사 동기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커브길 중앙선을 넘어 진해로 내려가던 우리들이 탄 티코승용차를 정면충돌한 차는 다행히도 대형이 아닌 엑셀이라는 소형차였다. 운전을 했던 필자는 충돌사고로 의식을 잃은 채 찌그러진 차속에 끼여 갖혀있었고, 조수석의 이재준 동기는 갈비에 손상을 입었으나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사고발생 후 급하게 달려온 레카차와 구급차는 차속에 갇혀있는 필자를 문짝을 띁어내고야 빼어낼 수 있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이재준 동기는 사고조사 보고서를 작성하던 경찰에게 뒷좌석에 또 한명이 타고 있었다고 전했고, 충돌의 충격으로 뒷좌석 차문이 열리면서 우측 팔달천변으로 떨어졌던 김종완 동기를 찾았는데 그는 허리와 갈비 등에 손상을 입었으나 강한 정신력으로 팔달천변 가드레일 밑으로 기어나오자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그날 새벽 군부대의 헌병속보에는 진해 육군대학 대대장반 교육중인 중령진급자 예정자 3명이 대구 팔달천변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1명은 뇌사, 2명 중상이라는 내용으로 전파됐으며, 뇌사상태는 필자를 지칭하는 상황이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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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1)]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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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0)]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잠시 쉬었던 충북 영동 금강 휴게소를 벗어나자 고속도로는 칠흑같이 어두웠고 휴일을 마무리하는 심야이기 때문인지 얼마되지 않는 차량의 불빛만이 서로 교차하며 달리고 있었다. 조수석에서 잠깐 눈을 붙였던 이재준 동기는 운전하는 필자가 장거리 운전으로 졸까봐 계속 말을 걸어오며 도로주변을 살피고 있었고, 뒷좌석의 김종완 동기는 그때까지도 술이 덜 깨어 골아떨어져 있었다. 사실 동두천에서 진해 육군대학까지는 지도상으로 4시간 51분이 소요되었으나 중간에 휴식도 취하며 이동하면 5시간이 훌쩍 넘어버린다. 게다가 경차인 티코는 옆으로 대형차가 지나가면 따라서 요동을 치기도 했다. 그래도 차가 아담하게 이쁘고 연비가 좋아 운영비도 적게 들어 당시에는 많이 선호했다. 어느덧 대구로 접어들었는데 운전을 하던 필자는 구마고속도로 교차로에서 마산으로 들어가는 길을 놓쳐버렸다.할 수 없이 북대구 톨게이트로 들어가 팔달천변 국도를 타고 서대구 IC에서 구마고속도로로 진입해서 진해로 가야했다. 옆에 탔던 동기생의 핀잔을 들으며 톨게이트를 통과해 팔달천변 도로로 들어갔는데 심야라서 그런지 왕복 차량이 거의 없었다. 팔달천변 도로는 1방향 1차선으로서 왕복 교통이 분리대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2방향 도로였고, 우측 차단 가드레일 밑의 하천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좌로굽은 도로가 나오자 상대편에서 다가오는 차량의 불빛이 보였다. 헌데 앞에서 다가오던 차량불빛이 좌우로 흔들렸다. 그때 필자는 옆에 있던 동기에게 “재준아, 저 앞에 오는 차가 이상하다...”라고 말하는 순간, ‘꽝...!’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멈춰섰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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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40)]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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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9)]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동두천 아파트에 도착하니 이미 날은 저물어 깊은 밤이 되었고,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용히 대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서자 유치원생 아들 성화에 못 이겨 키우던 요크셔테리어 강아지가 얼굴까지 뛰어오르며 반겨주었다. 그 소리에 모두 일어나 아직 마지막 주가 남았지만 3개월간의 교육에 수고 많았다며 환영했다. 다음날인 일요일 저녁에는 카풀제 동기들은 월요일 수업을 위해 다시 진해로 내려가야 한다. 헌데 그동안 필자를 많이 아껴주고 믿어주었던 이영대 사단장(학군4기)과 새로 부임하는 박기준 (학군5기) 장군의 사단장 이취임식이 다음날인 월요일에 계획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임식을 앞둔 사단장의 일요일 일정이 너무 많아 인사도 못하고 저녁해가 저물 즈음에 그냥 진해로 출발했다. 이번 이동은 이재준 동기의 티코 승용차를 이용할 차례였는데 김종완 동기는 일요일 낮에 처부 요원들과 회식을 하여 음주 상태라 필자와 차주만이 운전을 도맡아야 했다. 석양 노을이 물들 때에 출발한 차는 충북 영동 금강 휴게소에서 잠시 멈추며 휴식을 취했고, 장거리를 달려왔던 차주와 필자는 운전을 교대했다. 김종완 동기는 과음한 탓에 도저히 운전할 수가 없었다. 한때 세상에서 제일 빠른 차는 독일의 아우토반을 달리던 벤츠였고 그다음에 빠른 차는 티코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티코가 작고 너무 가벼워 껌으로 벤츠에 붙여 놓으면 그대로 달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운전대를 잡아보니 좌우 폭도 좁고 마치 종이로 만든 모형 장난감 같은 기분이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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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39)] 교통사고의 위기로 알게된 찐한 전우애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