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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5] 혹한기훈련과 연대전투단훈련으로 호국충절의 고장임을 증명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고향이 같은 충청북도인 사단장과 군수는 보자마자 너무도 반갑게 인사를 했다. 충북 괴산군 청안면 출신인 사단장은 충북 청원군 북이면 출신의 군수와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사단장은 청원군수를 만나자마자 군의회 의장과 함께 훈련장을 방문해서 비행장 방어시에 야간 침투하는 적들을 격멸하기 위해 필요한 탐조등 35셋트(630만원 상당)을 구매하여 기부해준 것과 지난번 낭성면 예비군 무기고 신축 예산(약 2000만원) 지원, 그리고 사단에서 필요한 모래를 미호천에서 채취하도록 승인해준 것에 대해 감사함을 표했고, 분위기는 상승고도를 탔다. 덕분에 훈련상황실에서의 현황보고는 부드럽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 두사람은 훈련상황실에서 나와 훈련장 텐트 현장을 함께 순시했다. 모두 시간에 쫒기는 중요 직책이었으나 그들은 할 이야기가 남았는지 현장 순시를 함께하다가 대대장 텐트로 다시 들어가 못다한 환담을 지속했다. 다음날 사단 상황실의 아침 상황보고에서 사단장은 청원대대의 훈련 현장지도시 중대장과 병 1인 다역화와 간부화 훈련 백브리핑에 대한 칭찬의 훈시를 쏟아내며 타부대도 참고해서 훈련에 임하라고 강조했다. 또한 발표한 병사는 포상휴가조치하라고 지시했다는 소문도 들렸고, 얼마뒤에 현장지도 결과가 공문으로 각 부대로 하달되어 대대원들의 사기가 최고로 고조되는 영광도 얻었다. 사단장의 동계 혹한기 훈련 현장지도 결과가 각 부대로 하달되자 연대 및 사단 실무자들과 타 부대장들은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사단이 들썩들썩하냐?”고 의문의 전화를 필자에게 계속 날려보냈다. 육본으로 전출간 전임 사단 공병대장과 수방사에서 함께 근무했던 장연석(육사35기) 선배도 소식을 들었다며 축하 전화를 주었다. 과거 최전방 대성산 기슭의 중대장 시절에는 혹한과 폭설 속에서 얼음집을 지어 숙영하며 적응훈련을 했었지만, 향토사단 후방지역인 충청북도는 전방만큼 기온이 떨어지지 않아 제대로 혹한기 훈련을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사단장의 극찬으로 이번 혹한기 훈련도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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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19] 재활치료의 위기를 호기로 만드는 비법⑲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연구소장] 병자년 새해가 되었지만 필자는 아직도 목발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대대장 취임은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만약 이대로 취임하면 ‘절름발이 대대장 또는 DJ 대대장’이라는 별명이 계속 따라 붙을 것 같았다. 또한 활동에 많은 제약을 주어 불편하게 만드는 골반쪽의 상단 고정핀을 제거하자는 통합병원 군의관(이진우 대위)의 진단에 따라 새해 초부터 재차 병원에 입원했다. 통합병원 도착 다음날 바로 2시간 동안의 수술을 통해 상단핀을 제거하고 다시 2주간의 회복 기간을 가졌다. 이미 3개월 전에 같은 병원에 입원했던 환자였기 때문인지 만나는 간호장교와 군의관들도 모두 반기며(?) 인사를 해와 병원 생활을 불편없이 익숙하게 할 수 있었고, 짧은 입원 기간이기 때문에 주변의 선후배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며 가족에게도 면회오지 않도록 당부했다. 하지만 회복 및 재활치료의 무료한 시간이 계속되자 재활위기를 호기로 만를려는 생각을 감출 수가 없었다. 보름간의 골반쪽의 상단 고정핀을 제거 수술치료, 입원 기간에 병실에 앉아 필자는 동국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인 ‘동서독 통일과정에서의 군통합에 관한 연구– 남북한 적용가능성을 중심으로’에서 예비군분야를 발췌하여 정리한 ‘조국통일을 대비한 예비군제도 비전’이라는 원고를 작성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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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14] 재활치료의 위기를 호기로 만드는 비법⑭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필자는 유난히도 ‘37’이라는 숫자와 많은 인연을 갖고있다. 육사 37기로 임관했고, 또 37사단의 대대장 자원으로 부임했으며, 전입후에 자만과 교만에 빠져 과신하며 지팡이를 던져버리고 무리하게 다니다가 불융합에 의한 대퇴부 재골절로 다시 수술을 받고 37일동안 입원했다. 바로 전해 4월에 발생한 대형교통사고로 인한 병원치료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했을 때 주변 선배들이 재활 치료 기간이 많이 남아있어 바로 대대장 취임은 어려우니 차라리 6개월간의 ‘군사영어반’에 입교하여 교육을 받으며 재활치료를 한후에 대대장으로 취임하라는 제안에 따라 본의 아니게 영어교육을 받는 혜택을 누렸었다. 이번에도 퇴원을 앞두고 회복할 수 있는 재활치료 시간이 필요했는데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생각해낸 군수관리학교 8주간의 ‘군수기능통합관리과정 제95-4기’ 교육이 종합행정학교 군사영어반에 이어 최후의 피난처가 되었다. 또한 작전직능의 장교가 군수분야까지 섭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당시에 장교들이 전 직능의 임무를 다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한다는 취지에 따라 잠시동안 공통 주특기로 바뀌었지만, 제95-4기과정에 참석한 학생장교들은 대부분이 군수직능 중령급 장교들로 이미 군수참모 직책을 경험했거나 곧 참모로 부임할 자원들이었다. 따라서 작전직능으로 군수분야 문외한(門外漢)인 필자는 수업을 따라가기가 매우 힘들었고 함께 교육받는 선배들과 수호천사 라파엘이었던 동기 이00중령의 도움이 없었다면 무의미하며 고통스럽고 어려운 시간이 될 수도 있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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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3)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구안보협업연구소장] 하지만 영관영어반에서 만난 선배중에는 광주 출신의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임을 부정하고 중국인 공산주의자로 행세를 한 정율성처럼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자도 있었다. 정율성이 북한과 중국에서 보였던 불손하고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이지만 화려한 작곡가로서의 삶처럼 그 선배도 생도시절부터 뛰어난 지혜와 지휘생도 활약으로 후배 생도들의 존경심을 받아왔고 필자에게는 목발 및 지팡이를 짚고 있다고 해서 DJ라는 별칭을 즐겨 불러 주었다. 또한 그는 명석한 지능으로 영어 수업도 우수한 성적을 계속 유지했다. 마치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지닌 정율성처럼 그의 모습은 수업시간에 뛰어난 영어 회화능력으로 교관들의 칭찬을 받아 학생장교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일과후 독신자 숙소에서도 타 선배들처럼 잦은 출타를 하거나 만취되는 일도 없이 착실한 학생장교로 돋보였고 필자는 친절하게 학업을 도와주는 그가 고맙고 존경스럽기까지 했고 대령으로 일차 진급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영관영어반 과정이 중반을 넘어 종반으로 접어들 무렵에 그는 매우 힘든 표정으로 정색을 하며 필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동생이 사업을 하는 데 급전이 필요하고 진행상 곧 회수 가능해 일주일 뒤면 갚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필자는 현금이 있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도와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필자도 교통사고 후에 많은 출혈이 있었고 저축한 돈도 별로 없어 죄송했다. 선배의 계속 독촉에 못이겨 현재 들고 있는 적금을 해약하면 요구한 금액의 반정도를 제공할 수 있다고 했더니 그거라도 빨리 주면 바로 해결하고 일주일 뒤에 갚겠다고 다짐했다. 하는 수 없이 통장을 들고 은행을 찾아 적금을 해약한 후에 그 선배에게 전달했다. 물론 일주일 뒤에 갚는다고 해서 가족에게는 비밀로 했다. 그후 일주일이 지났지만 선배에게 갚아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일단 돈을 주고나니 빌려준 사람이 을이 되어 있었고, 그는 여유롭게 생활하며 빌린 돈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결국 교육 종료 직전에 그 선배에게 아직까지도 가족에게 말을 안했으니 빌린 돈을 갚아주어야 통장을 다시 만들 수 있다고 독촉했다. 그 선배는 다음주로 다시 미루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던졌는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생도시절부터 탁월한 모습으로 존경을 했던 인연은 악연으로 끝났다. 가짜 한국인 정율성처럼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그의 언행에 현혹된 필자가 부끄러웠고, 이후에는 잘 아는 지인들과의 관계에서 금전 문제가 생길 때에는 여유가 있어 대출이 아닌 무상으로 제공하거나 아니면 조심스럽게 거절하는 것이 돈도 잃지 않고 더구나 사람도 더 잃지 않는 길이라는 교훈을 영관영어반 교육과정에서 얻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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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2)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㉗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정율성이 6·25남침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 군가도 작곡했지만 인민군과 함께 서울에 내려와 점령군으로서 자유 대한민국을 유린하고 1·4 후퇴 때는 중공군과 함께 재차 서울에 내려와 조선궁정악보를 약탈해간 매국노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따라서 광주 출신이지만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인 공산당원으로 변절한 자를 추모하며 중국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추진했던 정율성 공원 조성사업은 동족상잔의 비국을 겪은 자유대한민국에서는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현재도 핵과 미사일 발사실험을 계속하는 북한의 군사도발을 막으려면 견고한 한미동맹이 절실한 실정이다. 필자가 다녔던 ‘영관영어반’ 과정에서도 북한의 재 남침에 대비해 합동참모본부의 주요부서에 근무하며 군사전략을 담당했던 용삼남(육사33기) 선배로부터 한미연합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용 선배는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목발을 짚고 재활치료에 전념했던 필자에게 용기를 심어주기도 했다. 그는 생도시절 럭비부 선수 생활을 했는데 운동중에 부상을 입어 척추가 심하게 손상되어 의사들이 판단할 때에도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상태였으나 강한 의지로 철저하게 운동을 하여 척추 주변 근육을 강화시킴으로써 전혀 불편함 없이 더 건강하게 보였다. 예를 들면 합참 근무시에 매일 새벽에 가장 일찍 출근하여 책상 및 의자 정리 및 청소를 한 뒤에 책상위에 올라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를 300개씩 하여 근육을 강화시켰다. 그가 원주에 있는 부대에 근무할 때에는 고속도로에서 시비를 걸던 조폭을 한방의 주먹으로 넉아웃시킬 정도로 강해졌다는 여담도 남겼다. 건강한 체력은 건전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창출하며 업무에 질도 고양시킬 수 있다. 건강의 이상을 극복하며 지칠줄 모르는 용 선배의 체력에 상관들은 힘든 업무도 쉽게 맡길 수 있었고 업무상 만나는 미군들과도 쉽게 친해져 한미 연합작전과 군사전략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게다가 일과후에는 독신자 숙소에서 우리의 전통악기인 대금을 연주하며 하루를 마감하여 건강상 어려운 위기를 적극 극복하는 강한 의지와 동시에 예술감까지 가진 문무를 겸비한 군인으로 끝없는 존경심을 불러 일으켜 앞으로의 군생활의 롤모델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할 정도였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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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391) 교통사고 위기극복의 여정㉖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난 10월2일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정율성 거리’에 세워져 있던 중국 음악가 ‘정율성 동상’이 기단에서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진 모습으로 발견됐다. 정율성은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중국에 귀화한 음악가로, 북한·중공군 군가를 작곡한 인물인데, 광주시가 기념사업을 추진해 논란을 불렀다. 정율성 동상은 중국 청년단체가 제작해 광주 지역 청년단체에 기증한 것으로 2008년 광주 남구 양림동에 조성된 정율성 거리 입구에 세워졌다. 광주 남부경찰서는 이날 재물손괴 혐의로 보수단체 회원 윤모(56)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은 전날(1일) 오후 정율성 흉상 목 부분에 밧줄을 묶고 2.5톤 승합차에 이를 연결한 뒤 쓰러뜨리는 모습이 담긴 CCTV를 확보했다. 정율성 흉상은 위의 사진처럼 약 1m 높이의 기단에서 완전히 분리된 채 기단 옆 땅바닥에 누운 모습으로 발견됐다. 윤씨는 범행 직후 한 유튜브 채널에서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 사업을 중단하라고 광주시에 요구했는데 이를 이를 수용하지 않아 강제로 (흉상을) 철거했다”고 밝혔다. 윤씨는 경찰에서 “내가 그랬다. 3일 오전에 경찰서로 가서 조사받겠다”며 범행을 시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북한의 연평도 포격 유족 대표인 고(故) 서정우 하사의 어머니 김오복 전 광주대성여고 교장은 2일 “공산주의자 정율성의 실체가 드러났는데도 광주시가 혈세 48억원을 들여 정율성 공원을 짓는다는 계획을 철회하지 않고 무조치로 일관하고 있다”며 “공원 철폐를 위한 릴레이 피켓 시위를 열겠다”고 밝혔다. 김오복 전 교장은 “북·중공의 군가를 짓는 등 한국 침략세력의 나팔수 역할을 한 정율성 논란이 갈수록 커지고 있지만 강기정 광주시장은 아무 중단 조치도 없이 정율성 공원조치를 강행하겠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율성 공원 문제 제기에 대해 철지난 이념몰이, 색깔론, 민간외교라는 억지 논리만 되뇌고 있다”면서 “지난 한 달여 동안 보훈단체들의 집회를 관제 데모로 깎아내리고 국가를 위해 희생한 호국영령과 보훈가족을 모독하고, 공산주의자 정율성 공원을 철폐하거나 대안을 만들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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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67] 파란만장(波瀾萬丈)했던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⑧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하고 우리 군의 대침투작전에서 여러가지 보완점이 식별되었는데 필자가 분석하기에는 전략커뮤니케이션(Strategic Communication)의 부재가 가장 큰 문제였다. 당시에 언론에서는 작전상황을 실시간으로 보도했다. 덕분에 모두 소탕되었지만 잔존한 핵심 정찰조는 북한으로부터 아군 작전상황을 실시간 접수하여 손쉽게 아군 작전지역을 이탈하며 장기간 저항을 할 수 있었다. 만약 군과 언론이 협조하여 보안을 유지하며 역정보를 흘리는 등 전략커뮤니케이션을 잘 운영했으면 작전을 조기에 종료할 수도 있었다. 이밖에도 작전 중 전장군기 문란, 특히 매복지에서 적에게 노출과 아군 오인 방지하면서 식사, 식수 및 탄약 보급을 하는 군수지원, 아군에 대한 수하 미흡 및 오인사격, 민간인 출입 통제의 소홀함과 병력 이송시 헬기 레펠 경험이 부족하여 낙상으로 인한 부상자를 여럿 낸 경우처럼 아군의 전반적인 훈련 부족이 결정적인 문제였다. 또한 전투복용 포제 계급장색의 변경을 이전부터 미군의 저시인성 계급장을 참고로 검토했지만 군에서는 필요성도 실감하지 못했고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번 작전에서 아군이 시계가 어두운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총상으로 인한 피해가 컸던 원인이 밝은 색의 계급장 때문이었고 늦게나마 현재처럼 바뀌었다. 그리고 군의 잘못은 아니지만, 장난이나 거짓·오인 신고도 군 작전을 어렵게 했다. 9월20일 새벽 5시 경북 봉화에서는 무장공비가 나타났다는 신고가 접수돼 군경이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벌였지만 보상금을 노린 허위신고였다. 이후 각 경찰서에는 하루에도 수십 건씩의 간첩 관련 신고가 잇따랐으나 대부분 신빙성이 없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내부에선 대북 강경파가 득세했고, 보수 언론들은 이를 앞장서서 부추겼다. 이에 따라 김영삼 정부는 대북경협을 동결하고 경수로 부지 인수와 서비스 의정서의 서명을 유보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시 경수로 지원도 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정치적 관점에서 정부는 같은 시기 막 시작되고 있었던 4자 회담과 관련해서도 북한이 4자 회담 설명회에 참석한다 해도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북측 역시 경수로 지원은 제네바 합의 사항으로, 이를 파기할 시 '핵 동결 약속' 역시 파기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이런 식으로 남북이 강경대치로 나가자 미국이 중재에 나섰다. 미국 정부는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강경책을 누그러뜨리는 한편, 북에 대해서는 공식적 사과는 아니더라도 '유감'이라도 밝히도록 종용했다. 이에 따라 북한은 12월29일 조선중앙통신과 평양방송을 통해 영어와 한국어로 '유감'이라며 사과 같지도 않은 사과를 했는데, 재야사학자 임영태에 따르면 이 메세지는 한국보다 미국을 향한 간접적 메세지라고 보았다. 군부대도 개편되는 진통을 겪었다. 사건 당시 해당 해안지역을 책임지던 부대는 68동원사단이었는데 8시에 출근해서 6시에 칼퇴근하면서 흔히들 파라다이스 사단이라고 하는 별명이 있었으나 이 사건 후 해당 지휘관들은 보직해임되었다. 해안경계 사각지대의 문제점, 수색작전의 미비점 보강을 위해 1998년 11월30일 부로 상비사단인 23보병사단이 창설되면서 기존 동원사단인 68사단은 해체되었다. 최근에는 23보병사단도 23경비여단이 창설되면서 해체되었다. 현재는 해군력이 보강되어 연안함대인 1함대에서 충분히 해안경계를 커버 가능하며, 2014년부터 강원도에서 철거 계획을 밝혔고 동해안 철책은 철거 되었다. 그러나 작전 상 철거가 불가한 곳들에는 계속 설치되어 있다. 사건이 발생한 시기가 오면 사건을 잊지않기 위해 강원도 지역 예하부대는 침투사건을 재현하는 실전적 민관군 통합훈련인 ‘Remember 9.18’을 매년 실시한다. 특수부대가 대항군을 맡고, 이들이 목표한 지점까지 이동하기 전에 발견, 차단선을 구축, 봉쇄하는 훈련이다. 한편 필자가 작전보좌관 시절에 사단장으로 모셨던 이재관 대장(육사 21기)이 작전중이던 10월에 27대 1군사령관으로 취임해 작전을 종결시켰다. 이 사령관은 온화한 성품이지만 업무에 있어서는 자신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꼼꼼한 스타일로 군사령관 재임시 예하 전방초소(GP)를 모두 둘러보는 진기록을 남기며 문제점 해결을 위해 노력하여 실전적 민관군 통합훈련을 강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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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67] 파란만장(波瀾萬丈)했던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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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66] 파란만장(波瀾萬丈)했던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⑦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안타깝게도 작전 종결 직전인 1996년11월 5일 오영안 준장(당시 대령)이 전사한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서 인제지구 기동타격대장으로 출동한 서형원 소령도 전투중 무장공비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에 따른 대침투 작전간에 전사한 12명의 전우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오영안 준장(제3군단 303기무부대장, 3사4기), 서형원 소령(제3군단 제703특공연대 정보참모, 학군24기), 홍동진 대위(68사단소속, 10월10일 강릉, 학사21기), 이병희 상사(제3공수특전여단소속, 9월21일 강릉), 이동찬 하사(제702특공연대소속, 11월5일 홍천), 강민성 병장(12사단51연대 수색중대 소속, 11월5일 인제), 강정영 병장(11사단13연대 소속, 9월22일 강릉), 김대영 병장(27사단78연대 소속, 9월25일 강릉), 최태웅 병장(36사단소속, 11월4일 홍천), 한대성 병장(12사단소속, 9월 29일 인제), 송관종 상병(2사단노도부대 31연대 2대대 7중대 소속, 9월21일 강릉), 표종욱 상병(2사단노도부대 소속, 10월22일 양구)’ 이밖에 경찰·예비군 2명과 민간인 4명이 희생되었는데 민간인 안상영(50세, 남)은 9월23일 출입금지 지시를 어기고 매봉산에서 송이버섯 채취 중 공비로 오인해 쏜 국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김용수(45세, 남), 이영모(54세, 남), 정우교(67세, 여)도 10월8일 오대산에서 송이버섯을 채취하던 중에 남성 2명은 공비의 총에 맞아 살해됐고 할머니는 둔기류로 머리를 맞은 뒤 목이 졸려 숨졌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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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66] 파란만장(波瀾萬丈)했던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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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65] 파란만장(波瀾萬丈)했던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⑥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필자 대대의 책임지역인 충북 청원군 현도면 매봉리에서 1949년 8월19일 출생한 고(故) 오영안 장군은 1969년 2월10일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를 졸업(4회)하고, 육군 3사관학교에 입학하여 4기 출신으로 1971년 7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육군산악부대 기무부대장(대령)으로 대침투 작전중에 11월5일 인제군 용대리 연화동 계곡에서 침투한 무장공비의 총탄에 맞아 48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1996년 11월 국군 기무사령부 주체로, 장군(준장) 특진 및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하고 고인의 기념탑과 추모관을 건립했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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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65] 파란만장(波瀾萬丈)했던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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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64] 파란만장(波瀾萬丈)했던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⑤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강원도를 담당한 36사단을 비롯한 인근 육군 보병사단과 해당 지역 동원예비군은 물론 최정예 특수전 전력인 특전사 병력도 상당수 투입되었다. 필자의 부대는 강원도와 인접한 단양, 제천지역만 좀 더 강화된 경계태세를 유지하며 확전에 대비했다. 해군 역시 1함대와 해군작전사령부에서 함정 23척 지원은 물론 지상전력으로 제1해병사단에서 출동한 수색대 및 보병 병력을 동원했으며 해군 특수전전단 병력도 진해 및 동해에서 급파해 동원했다. 공군에서는 18전투비행단과 공군작전사령부에서 항공기 76소티 지원 등이 있었다. 일일 지상작전 투입병력 평균 4만 3000여명, 연인원 총 150만명에 달하는 육·해·공 대규모 작전이 전개되었고, 경찰청도 전투경찰들로 구성된 타격대와 기동대 등을 대거 투입하였으며 파출소 근무 경찰관도 기동복을 입고 M16 소총을 휴대했다. 이 때 이광수 체포조 등 일부 경찰들이 M1 카빈소총으로 무장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경찰청은 급히 경찰 내 K2 소총들을 긁어모아 강원지방경찰청 산하에 급히 뿌려서 교체해 주었고, 이로써 본의 아니게 강원청은 전국 지방청들 중 K2소총 보유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 되었다. 이후 9월18일~30일에 걸쳐 차단선을 구축하였고, 곧이어 남은 북측 공비들에 대한 아군의 수색 및 섬멸 작전이 전개됐다. 9월19일. 칠성산 일대에서 주민 신고로 출동한 특전사 3여단 병력이 적 3명과 접촉하였다. 공비들은 투항유도에 불응하였고, 전원 사살되었다. 이날 16시경에는 괘방산 오이골 110m 고지 일대에서 X사단 병력과 교전하여 일병 박정운이 적 1명 사살. 해당 공비는 신원 미상의 3명의 정찰조원 중 정찰조장이었다. 이후 무장공비침투 49일째인 11월5일 6시48분 경, 정보분석조와 합동신문조가 교전 현장 일대에 도착하여 작전을 토의하던 중 직접 현장으로 올라가기로 결정을 내린다. 이때 부하 장교가 위험하다며 말렸지만 3군단 기무부대장 오영안 대령은 강행하여 올라갔다. 현장을 살피던 도중 기무부대장이 적의 예상도주로를 향해 불을 비춘 순간 그곳에 숨어있던 적의 저격으로 오 대령을 포함한 간부와 병사들이 사상당한다. 몇 분 뒤 부상을 당한 병력 후송을 위해 이동 중이던 의무 병이 무장공비 사격으로 부상을 당하였으며, 이를 구출하기 위해 추가로 이동하던 정보장교(서형원대위)가 전사. 이로써 기무대장 오 대령을 포함한 아군 전사 2명, 부상 8명의 피해가 발생했다. 같은 날 7시~9시 경, 특공연대가 퇴로를 차단하고 압박 작전을 펼쳤으나 안개속에서 계속된 적의 조준 사격으로 아군 피해 누적. 1명 전사, 6명 부상으로 이날 교전 중 총 3명이 전사하고 14명이 부상당했다. 이후 10시 경, 아군의 압박작전 속에 특전사 3여단의 장선용 상사가 배후에서 접근하여 마지막 무장공비인 정찰조원 2명을 사살시킴으로써 길었던 대투침작전은 개시 49일만에 종료됐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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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64] 파란만장(波瀾萬丈)했던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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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63] 파란만장(波瀾萬丈)했던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침투 첫날인 9월18일 16시40분, 강릉시 강동면에서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 2명이 정찰국 해상처 소속 안내조원인 이광수를 체포하였다. 비슷한 시각인 17시에는 68사단 수색대대의 항공 수색 및 정찰 중 북한의 전투공작원인 정찰조가 살해(처형)한 공비의 시신 11구를 발견했다. 그날 16시30분 경, 거동수상자를 발견했다는 농부 홍성은씨 부부의 신고로 강릉경찰서 강동파출소에서 근무하던 최우영 경장과 전호구 경장이 M1카빈소총으로 무장하고 출동했다. 파출소에서 고작 2km 떨어진 거리였다. 최우영 경장과 전호구 경장이 신고자의 남편인 농장 주인과 대화 중이던 이광수에게 접근하여 M1카빈소총을 조준하며 “꼼짝 마,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라고 말하자 이광수는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려고 했다. 이때 최우영 경장이 달려들어 이광수의 손을 내리쳐 이광수가 권총을 떨어트리면서 일촉즉발의 순간에 이광수는 제압되었고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생포자가 되었다. 신고 과정에서 농부 부부의 재치와 용기가 대단했는데, 남편이 이광수에게 다가가서 "송이버섯 따러 오셨냐?"며 동네 주민으로 인식하는 척하고 친근하게 접근하여 잡담을 하면서 시간을 끄는 사이 부인이 전화로 경찰을 불렀다. 체포된 이광수는 조사 중 무엇을 먹고 싶냐는 물음에 "광어회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광어회는 최고급 음식으로 이광수 자신은 잠수기지에서 직접 여름철 해상훈련 도중 산소통, 작살 등으로 광어를 잡았기에 먹을 기회가 많았다고 하지만 '못 사는' 남한에 광어회나 있겠느냐는 심정에서 그렇게 대답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광수의 생각과 다르게 당시 대한민국은 광어양식이 80년대부터 시작돼 90년대 들어서는 대량 생산이 가능한 수준이 되어 광어회는 대중적인 음식으로 자리잡은 상태였다. 조사관들이 광어회를 바로 가져다 주자 이광수는 그제서야 조사에 적극적으로 응했다고 한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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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63] 파란만장(波瀾萬丈)했던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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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62] 파란만장(波瀾萬丈)했던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이들 중 가장 핵심적인 대남침투요원은 정찰조원들로서 잠수함 기간요원들은 물론이고 안내조를 비롯한 전투공비들은 작전을 시작한지 빠른 시간내에 진압이 되었지만 정작 제일 중요한 정찰조원 3명 중에서 초기에 사살된 1명을 제외한 나머지 2명은 한 달 반 동안이나 잡히지 않았으며 우리 측 전사자들은 주로 이들로 인해 발생했다. 그들이 소지하고 있던 카메라에서 해당 지역의 군단사령부나 비행장 그리고 도로 같은 주요시설을 촬영한 사진이 나온 점으로 볼 때, 앞으로의 전쟁을 위하여 한국군의 군사시설들과 지리 따위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생포된 이광수의 증언에 따르면 10월7일 김영삼 대통령이 춘천에서 개막된 전국체전 개막식에서 연설하기로 예정인 김영삼 대통령을 저격할 목적도 있었다고 전해졌다. 아군 피해는 전사 12명(장교3, 부사관2, 병7명으로, 아군의 오인 사격으로 희생된 68사단 홍동진 대위 포함), 부상 27명에 경찰·예비군 2명과 민간인 4명이 희생되었다. 그런데 희생자 중에 전면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령 계급의 장교가 전사한 것도 대간첩작전치고는 큰 손실이었고 민관군 통합작전 태세에도 많은 문제점이 도출됐다. 조기 포위망 구축과 소탕에 실패하여 작전기간과 범위가 확대되는 바람에 임업과 관광업이 주 산업이었던 강원도 지역민들의 생계 활동이 위축되어서 이로 인해 강원도민들이 입은 정신적 그리고 경제적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강원도 동해안 일대의 관광객이 감소하고, 농림 및 어업 손실이 있었으며, 야간 통행금지 실시로 인한 요식·접객업소 매출액 감소, 대중교통수단 승객 감소 등으로 인한 피해액이 약 2천5백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됐다. 시군별로 피해액을 보자면 강릉시가 6백67억여 원으로 가장 많고 속초시와 인제군이 각 4백74억여 원, 동해시 3백40억여 원, 고성군 90억여 원, 양양군 76억여 원, 삼척시 57억여 원 등으로 집계됐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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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62] 파란만장(波瀾萬丈)했던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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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61] 파란만장(波瀾萬丈)했던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②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북한인민무력부 정찰국직속 정찰조 3명과 정찰국 해상처의 안내조 및 전투공작원(무장공비), 그리고 잠수함 승조원 등 총 26명으로 상어급 잠수함으로 침투하였다.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해상으로 침투 무장공비는 총 26명이라는 설과 25명이라는 설이 분분했으나 나중에 북한에서 발표한 선전물에 전사자로 분류된 것이 확인되어 26명이 맞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 중 1명(이광수)이 생포됐다. 이광수는 잠수함 탑승자가 26명이었으며 그들 중 김영일이라는 30세 상위가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다른 25명과 달리 김영일의 유류품은 발견되지 않았고 그의 도주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귀순한 이광수와 발견되지 않은 김영일을 제외한 24명의 시신은 12월30일 북측으로 송환되었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른 뒤, 북한에서 '강릉의 자폭영웅들'이라며 이들을 영웅화한 선전 기념물을 공개했는데 이 사망자 명단에 김영일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즉 북한 당국에서는 전사자로 선전한 김영일을 제외한 대부분은 조국해방전쟁참전렬사묘에 안장되었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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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61] 파란만장(波瀾萬丈)했던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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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60] 파란만장(波瀾萬丈)했던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①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대대가 사단의 전반기 최우수부대로 선정되고 군사령관이 지시한 예비군 훈련장 시범식 견학행사를 마무리하자 필자는 초임장교로 최초 부임할 때부터 그동안 잘 가르쳐주신 당시 지휘관 선배들께 일일이 전화를 걸어 모두가 잘 이끌어준 덕택이라고 감사올리며 함께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사단에서는 상급부대 지침에 의해 부여된 민관군 통합 ‘화생방 방호태세 훈련 시범’을 사단의 전반기 최우수부인 대대가 맡아서 시행하라는 임무가 하달됐다. 계속된 추가 업무로 또 고생하는 대대원들에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민관군 통합 시범이라 바로 청원군수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했는데, 대대에서 보인 예비군 훈련장 시범식 견학행사에서 많은 장성급 지휘관을 만나며 보람을 느꼈었는지 흔쾌히 함께하겠다며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또 대성공이었다. 민관군 통합 ‘화생방 방호태세 훈련 시범’을 주관한 사단장과 참석한 연대장, 군단 감찰참모 및 청원군수를 비롯한 기관장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흐뭇한 격려와 칭찬을 보내며 잘마무리가 되었다. 연이은 검열과 시범으로 파란만장(波瀾萬丈)했던 8월이 가고 달이 바뀐 1996년 9월18일 새벽에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해상에서 당시 68사단 초병과 택시기사 이진규가 50m 해상에서 좌초된 북한 잠수함을 발견하면서 대대적인 소탕작전이 시작된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했다. 강원도 1군 지역은 무장공비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작전에 돌입하였고, 그날 오후에 북한의 지령에 따라 잠수함 좌초책임을 물어 사살한 것으로 추정되는 승조원 11명의 시체를 발견하였으며, 충북지역인 사단도 경계태세를 강화하였다. 후 11월5일 인제군 연화동에서 특전사 장선용 상사가 마지막으로 정찰조 2명을 사살하여 도주한 잔당들 13명을 교전 끝에 소탕하며 작전을 최종 종결할 때까지 총 49일간 이어졌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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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60] 파란만장(波瀾萬丈)했던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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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59] 19개의 별이 대대를 방문하게 만든 예비군 훈련장④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예비군 훈련장 시범식 견학을 모두 마치자 첫날 행사를 주관한 군단장도 필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수고했다고 격려해주었다. 그때까지 기다리며 함께 했던 방위협의회 의장 변종석 청원군수는 군단장에게 “우리 청원군에 이렇게 많은 장군님들이 오신 것은 처음이며 영광입니다”라고 감사를 표하면서 청원군 마크가 새겨진 선물용 축구공을 참석한 장군 모두에게 전달하며 민관군 통합작전에 기여하자고 다짐하는 보람찬 행사가 됐다. 큰 성과였다. 대대를 방문한 2군 예하 사단장, 연대장, 대대장 및 관련 참모들은 찬사와 함께 질투의 따가운 시선이 필자에게 쇄도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날에도 2차 시범식 견학 행사를 하면서 전투지휘검열에 따른 군사령관의 지시사항은 완수했으나 대대원들의 노고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시범식 견학을 완료한 다음달인 9월에 육군본부의 예비군 훈련 불시 점검이 있었는데, 그 결과로 대대가 교육훈련의 획기적인 ‘질’적 수준 향상시킨 것으로 평가되어 육군 교육보 8호(‘96.10.10)에 게재되었으며 필자는 교육사령관 표창을 받았다. 이런 영광을 얻고 보람도 느끼며 사기도 높혀졌지만 반면에 예비군 훈련장 견학 범위가 전군으로 확대되어 1,3군, 수방사, 해병대까지의 예비군 관련 참모들도 대대를 1년 내내 찾아와 견학하며 자문 및 자료을 요구하는 덕택에 대대원들의 고생이 더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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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59] 19개의 별이 대대를 방문하게 만든 예비군 훈련장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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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58] 19개의 별이 대대를 방문하게 만든 예비군 훈련장③
-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드디어 8월7일 오후에 첫 시범식 견학이 시작됐다. 9군단장 안성용 중장(육사23기)을 위시해 각 사단장 등 장군 9명(별 19개)을 포함한 100여명이 동시에 대대 예비군 훈련장을 견학 방문했다. 2군사령관 조성태 대장의 지시에 의해 예하 장군들과 연대장, 대대장 및 관련 참모들이 대거 청주시 강서동의 협소한 대대본부에 들이닥치자, 예비군 중대장을 포함한 대대원들은 긴장을 하면서도 영광스런 행사에 눈빛을 반짝이며 손님을 맞이했다. 시범식 견학은 정성어린 훈련 준비로 강도 높은 예비군 교육훈련을 실시하여 “정성어린 준비가 훈련을 몇 배 힘들게 했다”는 예비군들의 반응이 나오도록하라는 조성태 군사령관의 지시사항과 시범 배경을 시작으로 과제별 공통 준비사항과 추가 준비사항을 설명하고 실제 훈련장을 확인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이때 무료한 대기와 시간 낭비를 방지하기 위한 순환식 교장 배치 및 조편성과 지역 특성에 부합된 대공사격술 교장과 동굴 및 폐광산 정찰 과제 개발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또한 순환식 교장의 이동로에 보도블럭 및 석분깔기, 계단에 안전로프 설치 그리고 애향심 고취와 흥미유발 위한 이동로 상에 섬뛰기, 샌드백, 타잔 그네타기 및 간판들은 삼림욕장같이 소나무 숲이 우거진 예비군 훈련장의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시각과 관심을 유도했다. 또한 원거리이며 다수인 예하 예비군 부대에 신속 정확한 상황전파와 의사소통을 위해 152전화사서함 시스템을 활용하고 있음을 추가로 소개했고, 지역 군수와 기관장 및 방위협의회 임원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준비하여 향토애 고취 내용에 고마우며 앞으로 적극 지원하겠다”는 반응을 설명할 때에는 박수도 터져 나왔다.(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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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458] 19개의 별이 대대를 방문하게 만든 예비군 훈련장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