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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54) 회자정리(會者定離)와 굼벵이의 '구르는 재주' 발견
    ‘생자필멸(生者必滅),거자필반(去者必返),회자정리(會者定離)’는 세상사의 진리 사단 구원투수로 칭찬받았지만 전출간 친구의 빈자리는 허전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부재자 투표가 끝나고 정상적인 부대운용으로 돌아오자 사단에서는 GOP교대 준비 지시가 하달되었고 연대는 GOP투입전 교육을 시작했다. 필자가 속한 대대는 예비로 지원임무가 하달되었고, 신원조회가 통과된 일부 간부 및 병사들은 GOP투입부대의 인원보충을 위해 전출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인접 10중대장으로 근무하던 동기 고(故) 한황진 대위([김희철의 직업군인 이야기](35) ‘호국보훈의 길에도 통하는 미스트롯을 키운 힘’ 참조)는 GOP투입 대대로 떠났다. 생자필멸(生者必滅, 산 사람은 반드시 죽고), 거자필반(去者必返, 떠나간 사람은 반드시 돌아오며), 회자정리(會者定離, 만나면 헤어지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정한 이치이다)라는 명언처럼 “모든 것이 무상함을 뜻한다”는 법화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부재자 투표로 늦어진 GOP투입준비 때문에 공식적인 환송회식도 못하고 그를 아쉽게 떠나 보내야 했다. 승리부대 전입동기로 2년전 GP장 시절부터 정도 많이 들었는데…, 적과 대치하는 GOP중대에서 건강하게 근무 잘하고 기회가 되면 침투하는 간첩을 잡아 영웅이 되길 진심으로 기원했다. 그가 떠난 지 일주일이 되자 다른 대대는 GOP투입 준비에 바쁘게 보내고 있었지만 필자가 속한 대대도 전투준비 및 부대관리에 대한 사단 감찰검열이 있어 정신이 없었다. 다행이도 새롭게 보강된 대대작전장교 지동수 소령(전 사단교육장교)이 치밀하고 깐깐하게 준비했고, 대대장의 명확한 지도가 있어 수감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감찰참모가 검열결과 강평시 구원투수로 부임해 나름의 역할을 한 작전장교와 보직 해임된 중대에서 몸부림을 쳤던 필자를 칭찬해주어서 보람을 느꼈으나, 왠지 GOP투입부대로 전출 가버린 인접 중대장 동기생의 빈자리가 너무도 허전했다. ‘상호 현상태보존' 원칙을 안지킨 막사는 폐허 수준 문제병사 전입 많아 180명으로 늘어난 중대원 관리에 난감 드디어 GOP부대 교대가 이루어졌다. 중대는 대성산 전방에 위치해 유격장을 담당했던 부대에서 예비임무인 적근산 후사면의 좁고 깊은 골짜기 지역으로 이동했다. 부대교대는 많은 에피소드를 낳는다. 상급 부대에서는 부대교대 원칙인 ‘상호 현상태 보존 후 인원만 이동’을 강조했다. 이것은 노후 된 막사 생활을 위해 시설을 보강하고 소소하게 설치했던 편의시설과 부착물들을 그대로 남겨놓아 불필요한 예산 낭비를 방지하자는 지침이었다. 그러나 교대전에 지휘관들은 사전 협조회의에서 이 원칙을 준수하기로 상호 약속하지만 부대원들은 새롭게 이전한 부대에서 편리하게 사용하기 위해 모두 떼어갔다. 따라서 상호교대 후에 지휘관들은 교대전 좋은 관계에서 교대후에는 서로 불편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당시에도 부대 이동후 인수한 막사에 들어서니 거의 폐허 수준이었다. 이른 봄의 문턱에서 기온은 약간 올라 낮 양지녁에는 따사하지만 밤이 되면 전방 골짜기의 삭풍은 막사안에서도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중대원들은 1~2년 뒤에 또 이동할 막사이지만 내 집으로 생각하고 정리를 시작했다. 마치 신축 건물에 입주한 것처럼 모든 것을 새롭게 보강해야 했다. 전방의 봄은 오히려 겨울보다 더 춥다. 그래서 창문에 바람 막는 문풍지도 붙이고 당시 유일한 보온 수단이었던 페치카도 보수하는 등 분주하게 편의시설을 보강했다. 그러던 중 부대원이 하나 둘 씩 늘어났는데, 그 이유는 GOP투입은 하였지만 추후 신원조회가 불분명하거나 사고뭉치로 판단된 병사들이 GOP에 적응을 못하고 예비인 필자의 중대로 전입오기 때문이었다. 지난 사단의 감찰검열 이후 연대에서는 부적격이나 GOP근무에 회의를 품은 병사들까지 타 중대도 있는데 모두 필자의 중대로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소대장과 선임하사관들은 전입 면담부터 이러한 문제사병 관리에 짜증을 내고 있었고, 연대에서 중대장인 필자를 믿고 맡기는 것도 좋지만 이런 전입자를 포함한 중대원이 180명까지 늘어나자 시설도 부족하고 신상 등의 부대관리에도 부담감이 늘어나 난감할 지경이었다. 폭우로 전방 GOP철책 150m가 전도되어 경계에 취약점 발생 GOP근무 '부적격 병사'가 맹활약해 공사기간 단축에 기여 부적격 병사는 '구르는 재주' 가진 굼벵이 어느덧 여름이 되어 폭우가 일주일 동안 쏟아지자 점입가경(漸入佳境)으로 더 중차대한 임무가 부여되었다. 퇴근 후 관사에서 모처럼의 휴일을 즐기던 일요일 밤에 군용 전화벨이 힘차게 울렸다. 중대 막사는 관사에서 약 3분 거리로 인접해 있어 전화가 뜸했는데 그것도 밤에 걸려온 전화라 급박한 위급상황이 발생했는지 걱정이 되었다. “나 연대장인데, 9중대장 지금 쉬고 있지?”하며 연대장이 대대장도 아닌 중대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그동안의 폭우로 전방 GOP철책이 대규모로 전도되어 다음날 아침에 중대원들을 인솔하여 GOP 철책복구를 위해 투입하라는 지시였다. 필자는 연대장 통화가 끝나고 바로 대대장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대대장도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소대장들을 비상소집 시키고 중대로 들어갔다. GOP 철책 공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원이었다. 중대원의 3분의 1이 새로이 전입 온 GOP 근무 부적격자로 실제 투입가능한 인원을 선발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특히 보안부대 담당관은 부적격자들을 모두 제외한 인원들만 투입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어쩔 수 없이 투입지역에서 근무하다 전입 온 병사와 면담을 했다. 보안부대 담당관의 이야기처럼 그가 변심해서 월북이라도 하면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하지만 이 병사를 제외하고 투입할 때에는 그는 중대원들에게 왕따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다행히도 그 병사는 자신을 꼭 데리고 가달라고 건의했다. 그 지형도 잘 알고 있으며 동기들도 많이 있어 이번 공사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간청했다. 소대장들도 그 병사가 중대 전입 후 생활을 잘했다며 포함시키는 것에 동의했다. 결국 “중대장이 직접 관리하면서 불미스런 일이 발생하면 내가 책임지겠다”라고 보안부대 담당관을 강력히 설득하여 투입인원에 포함시켰다. 밤새 공사도구를 점검하여 부족분은 연대에 건의하고 GOP 지역에서는 3인조 행동을 하는 원칙준수를 위해 조편성도 마쳤다. 잠시 눈을 붙인 후 아침에 연대에서 지원 나온 트럭을 타고 출발했다. 공사지역에 도착에서 숙영준비부터 했다. 마침 그 지역은 필자가 DMZ 에서GP 장으로 근무했던 곳으로 작전시 늘 다니던 익숙한 지형이었다. 그곳은 위의 좌측 사진 같이 경사진 곳으로 GOP 철책 150미터 정도가 폭우에 쓸려 내려가 흔적도 없었고, GOP중대에서 경계병을 촘촘히 배치해 놓은 상태였다. 숙영지 편성 중에 공사용 철책들이 도착했다. 현장지도 나온 연대장은 “최대한 빨리 철책을 설치하는데, 2주내에 완료하라”고 강조했다. 아마도 전도된 GOP철책 지역으로 간첩이 침투하거나 변심한 인원들이 월북하기에 용이하다는 취약점이 있기 때문에 불안했던 것 같다. 중대원을 2개 팀으로 편성해서 양쪽에서 동시에 시작하기로 했고 철책설치조, 시멘트비빔조, 운반조, 기타 지원조로 편성했다. 물론 GOP중대의 경계병 외에 일단 유사시를 대비하여 실탄을 휴대한 상태로 자체 경계조도 배치했다. 쏜 화살처럼 일주일이 금방 지나가고 있었다. 소대장은 공사기간 단축을 위해 야간 작업을 건의했다. 보안부대 담당관이 "야간 작업은 병력관리에 특히 위험하다"고 의견을 제시했지만 주간작업만 하는 것은 연대장의 조기 공사완료 지침을 해소하기에는 안일한 조치 같아 야간 작업을 감행했다. 곳곳에 횃불을 만들어 대낮같이 밝힌 상태에서 중대원들은 참으로 열심히 임무를 수행했고 필자는 중대원들이 자랑스러웠다. 특히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는 속담처럼 GOP근무 부적격자로 낙인찍혀 중대에 전입왔던 그 병사가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자신이 근무했던 GOP 소대에서 근무용 간식인 라면과 빵 그리고 추가로 필요한 도구 등을 확보해 중대원들에게 나눠주며 그 누구보다도 동분서주 바쁘게 뛰어다녀 중대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처음에 연대장이 2주로 공사 기간을 한정했던 것 보다 4일을 단축시킨 10일 만에 완료되었다. “남아(男兒)는 자신을 믿고 인정해주는 사람을 위해 충성을 다한다”는 말처럼 굼벵이(?)까지 포함된 중대원들이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정확히 129m, 43칸의 철책설치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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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53) 정치적 중립 고민속에서 체험한 '기쁨', 겨울아이와 선거혁명
    군인의 정치적 중립을 배워왔던 필자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지시… 부대별로 민정당 지지도 확인해 해당 지휘관의 지휘능력 평가에 반영 민병돈 장군의 정치적 중립, 수년 후 반전되는 재평가 받아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2014년 내부 고발자들이 모였던 ‘한국공익신고지원센터’를 만든 이지문씨는 1992년 백마부대에서 중위로 복무하다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의 군대 내 부정 선거를 폭로했다. 당시 부재자투표 때 민주자유당 후보를 찍으라고 상관이 병사들에게 요구한 사실을 폭로한 것이다. 이씨는 이후 군에서 징계를 받고 파면됐으나 소송을 제기해 파면은 취소됐고 중위로 전역했다. 하지만 군입대 전 삼성그룹에 채용되기로 한 일은 취소됐다. 1996년부터는 민주당 소속 서울시의원을 지냈고, 이후에는 공익제보자 모임, 호루라기재단 등에서 시민사회운동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요즈음 군부대에서는 이지문 중위가 군생활을 할 때처럼 부정선거를 전혀 생각조차 못하며 철저하게 공정한 선거가 이뤄지고 있다. 몇 년 전 군장성 출신이 모 지역구 선거에 나와 당선했는데 지역별 선거결과를 분석하면서 부대 및 군 관사지역의 지지도가 오히려 낮았다며 안타까워한 것이 그 증거이기도 했다. 필자가 중대장을 시작한지 한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군부대는 동계가 되면 각 제대별로 간부교육을 한다. 1985년 1월 사단 간부교육 중에 교육받던 지휘관들에게 갑자기 자대로 복귀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선후배를 만나 부대지휘의 정보를 교환하고 회포도 풀 수 있었던 교육이 조기에 종료되어 아쉽지만 자대로 복귀했다. 복귀하자 마자 연대장이 전체 지휘관 회의를 직접 소집했다. 갑자기 간부교육 중 복귀 지시가 하달됐고 또 연대장이 회의를 소집하자 지휘관들은 특별한 사건이 있는가 의아해했다. 당시는 제 5공화국으로 다음달인 2월12일, 제 12대 국회의원 276명을 뽑는 선거가 있어 마을마다 선거운동 분위기에 요란하게 들떠 있었다. 연대장은 평소와 달리 웃는 얼굴로 차를 권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현직 대통령이 나라 사랑하는 지도력을 발휘한 결실로 경제가 급성장하고 ’88 올림픽’도 유치했다며 정부의 시책을 홍보하면서 좌익 및 진보세력들에 의한 정치적 혼란 상황을 언급했다. 이러한 난국에 우리 군인들도 동참하여 나라가 바로 갈 수 있도록 적극적인 행동으로 정부를 도와야 한다며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당인 민정당을 지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 당황했던 것은 연대장이 부대별로 지지도를 확인해서 해당 지휘관의 지휘능력 평가에 반영하겠다는 말이었다. 그의 곁에 있던 보안사령부에서 파견된 보안반장은 부재자 투표용지를 보이며 각개 병사들이 투표한 것을 모두 확인하겠다고 말한 것은 군인의 정치적 중립을 배워왔던 필자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회의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해서 대대장실에 중대장들은 다시 모였다. 대대장도 연대장의 지시에 난감한 표정으로 “각 부대별로 평가를 한다니 중대장들은 조심하되 적극적으로 임해…..”라고 말을 더듬으며 대대를 담당하는 보안부대 중사의 표정을 살폈다. 중대 행정반으로 돌아와서 소대장을 집합시켰다. 필자는 무슨 말부터 해야 할 지 몰랐지만 연대장과 똑같이 정부시책을 홍보하고 이 부재자 투표 결과가 대대장 평가까지 좌우하게 된다는 언급을 하며 소대장들의 협조를 부탁했다. 이후 전 중대원을 집합시켜 정부시책을 홍보하면서 좌익 및 진보세력들에 의한 정치적 혼란 상황을 언급했다. 이러한 난국에 국회의원 선거에서 올바르게 잘 판단해서 투표를 잘하자고 당부했다. 행정반에 투표소가 설치되고 각 개인의 투표용지가 도착했다. 그러면 필자는 중대장실에 해당 병사를 불러 차를 한잔 주면서 어디를 찍을 것인가를 확인 후 투표소로 보냈다. 필자는 지시사항을 시행하면서도 이것이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군인의 역할은 아닌데 하는 죄책감을 느꼈다. 헌데 문제가 생겼다. 소대 군종병을 맡고 있는 전진호 일병이 중대장실에 들어와 차를 한잔 마시면서 절대 집권당을 찍지 않겠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현 정부를 지지하지 않고 무소속에 목사님 출신이 있어 그 분을 찍겠다”고 자신의 의지를 강하게 표출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전일병과 이야기를 하면서 초라해지는 내모습을 느꼈고 소신있게 자신의 신념을 주장하는 전 일병(현재 서울 성북동 00교회목사)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때 선임 소대장 김중위가 중대장실로 들어왔다. “중대장님 지금 뭐하세요..? 군인은 명(命)에 살고 명(命)에 죽는 것인데…”하며 “지금부터는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중대장님은 나가세요..”라며 필자를 밀어내고 전 중대원 면담을 자처했다. 김중위는 중대에서 1년 넘게 근무하여 필자보다 중대 병사들을 더 많이 알고 친하게 지내고 있었고, 내키지 않았던 암울한 수렁에서 나를 건져주었다. 이와 관련해서 특전사령관과 육사교장을 역임하였던 민병돈 장군(육사15기, 하나회)이 당시 인접 제 20사단장으로 근무를 하였는데, 그 부대도 필자가 겪은 상황에 처해있을 때 사단장이 나서서 참군인의 모습을 보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민장군은 상부로부터 선거를 도우라는 지시를 받고 당시 예하 여단장들에게 정부시책을 홍보하되 투표과정에서 일체의 선거법 위반행위가 있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나를 믿고 따르면 모든 책임은 사단장이 지겠다고 했다. 결국 투표 결과 다른 부대보다 여당 지지율이 떨어졌고 통상 20사단장을 마치면 영전하던 당시의 사례에서 벗어나 준장 보직인 육본 정보참모부 차장으로 좌천되었고 사단보안부대장도 한직으로 밀려났다. 이후 1987년 6.29선언이 있었고 민주화 과정을 거치며 민장군의 정치적 중립을 유지한 처신은 반전되는 재평가를 받아 오히려 중장으로 진급해 특전사령관으로 임명 되었다. 물론 당시의 사단보안부대장과 사단장 지시를 수명한 여단장들도 한직에서 요직으로 발탁되었다. 그 밖에도 이런 참군인이 여러분 있는 걸로 알고 있다. 훗날 민장군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필자도 그때 거부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는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중대는 선임 소대장 김중위의 도움으로 절대적인 지지율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타 부대와 비슷한 결과로 평가되어 대대장에게 면은 세웠다. 통신장교가 꺼낸 '아내의 생일선물'은 이종용의 '겨울 아이' 그해 겨울에 태어난 '겨울아이'는 바로 12대 국회의원 선거혁명 잡초는 밟아도 또 밟아도 다시 살아나, 철저한 감시필요 중대 소대장은 학군장교인 김태정 중위, 우광호 소위와 학사장교인 변상훈 소위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대장 부임 후 엄동설한 속에서도 치루었던 지휘관 교대 FTX(작계시행훈련)와 애끓는 고민을 하며 난감했던 부재자투표가 끝나고 격려차원에서 육단리 셋방으로 저녁초대를 했다. 1월말 눈 내리는 대성산 기슭 육단리의 조그마하고 비좁은 단칸방 셋집에 소대장들과 통신장교인 현준(김중위 동기)이 들어가니 서로 어깨를 부딪히며 끼워 앉아야 했다. 그동안 훈련과 임무수행 중의 애피소드 회상으로 한 층 분위기가 고조되었지만 3시간 넘게 올라간 눈 덮힌 대성산 진지에서 혹한을 견디며 사고없이 부대를 지휘했던 것과 이번 투표에 있었던 소대장들의 노고에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아내가 저녁상을 내오자 자리는 더 좁아졌다. 소주 한잔을 기우려는 순간 늦게 온 통신장교가 “잠깐..”하며 기다리라고 했다. 부시럭 거리며 벗어 놓은 옷사이에서 케익을 꺼내왔다. 아내와 필자는 당황했다. 촛불을 켜고 누가 시작했는지도 모르게 당시 유행했던 가수 이종용의 ‘겨울아이’가 흘러 나왔다. 신혼인 아내는 소대장들이 준비한 자신의 생일 케익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필자도 잠시 잊고 있었는데 소대장들이 기억을 하고 기습적으로 우리 부부를 감동시켰다. 사람들은 참으로 간단하고 작은 것에 쉽게 감동을 받는다. 그때 군인 가족의 애환 속에서 아내는 작은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 그해 겨울에 태어난 겨울아이가 또 있었다. 바로 제 1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로 말 그대로 선거혁명 이었다. 그렇게도 치밀하게 정권이 개입했지만 집권당인 민정당은 35.2% 득표로 148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창당한지 200일도 채 안되는 신민당이 29.3%득표에 67석으로 제 1야당이 되었고, 야당 역할을 잘 못했던 기존의 민한당은 35석을 확보했으나 곧 해체되어 통합된 신민당이 103석으로 증가하여 국민들의 민의가 확실하게 반영될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는 집권당의 불신과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선거혁명 이었고 이것은 바로 이어진 6.29선언과 제5공화국 종말을 앞당기는 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부정선거와 부패 등은 잡초와 같은 존재이다. 이후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시에도 이지문 중위의 폭로로 일부이지만 집권당 정부의 선거 개입이 또 드러났다. 현재도 장담할 수 없다. 이제는 과거처럼 군에서의 일방적인 선거개입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고도로 지능화된 일반사회가 더 문제이다. 필자도 경험 했지만 유도식 여론조사와 언론의 편파 방송으로 민의를 호도하고 있는 일부 상황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필자가 중대장 시절 제 12대 국회의원 선거시 그렇게도 집요하게 개입하며 부정한 투표를 유도했던 결과가 오히려 선거혁명을 이뤄낸 것처럼 국민들이 올바르고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 또한 지금도 맹활약하고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이지문씨의 한국공익신고지원센터, 호루라기재단 등처럼 시민사회에서 공정하고 정확한 두 눈을 크게 뜨고 철저하게 감시해야 한다. 잡초는 밟아도 또 밟아도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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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0-01-15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52) 전방오지 산짐승과 눈싸움 그리고 셋방살이 오강의 추억…
    고등군사반(OAC) 과정 수료 후 이사도 못한 채, 한달 가까이 영내 근무 별빛에 반사된 산짐승의 눈빛 보다 사람의 인광이 더 강해 옛날 혼수였던 ‘오강’, 전방 오지에서는 필수 생활용품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유난히도 삭풍이 몰아치며 추웠던 1984년 겨울 날씨 속에 필자는 전임자 해임 덕분에 보병학교 고등군사반(OAC) 과정을 끝내고도 이사를 못한 채, 한달 가까이 퇴근도 못하고 급하게 취임한 중대장실에서 지냈다. 기혼자에게 관사는 제공되지만 비어있는 관사가 없어서 보다 못한 장모님이 최전방 오지 육단리 도로가 셋방을 구해 아내의 이사를 도와 주셨다. 물론 필자는 이사 당일 나가보지도 못했다. 그때 백운계곡을 지나 광덕산 카라멜고개를 넘어 사창리를 거쳐 실내고개와 수피령을 지나왔는데 이사짐 트럭 차장 밖으로 보이는 아슬아슬한 계곡에 가슴을 졸이며 펑펑 우셨다고 했다. 군인 가족의 애환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부대 임무에 빠져 가정을 소홀히 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일과를 끝내고 자정이 다되어 퇴근하려고 하니 당직사령이 2시간 가까이 걷는 것이 안타까웠는지 퇴근차를 내주어 민간인통제초소까지 태워주었다. 민통초소에서도 육단리 셋방까지는 약 50분 정도를 걸어가야 했다. 태워준 운전병에게 조심해서 복귀하라 당부하고 밤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미 자정이 넘어 인적은 끊어진 상태였다. 육단리 셋방은 전에 차가 다니는 도로에서 가게를 하던 집이라 문을 열면 차들이 다녔고 화장실(재래식 변소)을 갈려면 차도로 나와 주인집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가야했다. 아내가 그립고도 안타까운 마음에 발길을 재촉했다. 육단리에 갈려면 하오재길 두개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 등 뒤에 보이던 민통초소 불빛이 사라지고 겨울 삭풍과 함께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고 하늘의 별빛이 비포장도로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첫번째 고개를 올라가는데 갑자기 고개 언덕에서 두줄기 라이트가 비추었다. “이 시간에 차들은 모두 끊어졌는데 무슨 차가 올까?’하며 계속 올라갔다. 순간 갑자기 서치라이트 불빛이 사라졌다. 50미터, 40미터 점점 최초 불빛 장소로 다가가는데 라이트는 없었다. 점점 긴장감에 휩싸이며 등에 식은 땀이 베었다. 그때 또 두줄기 라이트가 필자를 비추었다. 잠깐 멈출려는 순간 라이트가 움찔했다. 산짐승 이었다. 덩치로 보면 송아지 만했고 새까맣게 보이는 것이 사나운 맹수임에는 틀림없었고 도로 한복판에 비스듬이 앉아, 별빛보다 더 밝은 라이트를 내게 보내며 쏘아보고 있었다. 마침 내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도로 옆에도 제설작업을 해서 깨끗하여 몽둥이로 쓸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멈칫하다가 필자도 눈에 힘을 주었다. 산짐승과 눈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더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보속을 유지하며 그 산짐승 정면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15미터, 10미터…… 두 눈에 더욱 힘을 주었다. 5미터즈음 다가가자 그 산짐승이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도로 옆으로 내려갔다. 등에는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산짐승이 있던 자리를 통과해 고개를 넘을 때까지 긴장을 늦을 수는 없었다.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지 귀에 촉각을 세우고 두번째 고개를 넘자 육단리 마을 불빛이 보였다. 마을 불빛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한 겨울 모진 바람과 추위는 어디론가 도망가고 온몸은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고, 눈에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아프기 까지 했다. ‘별빛에 반사된 산짐승의 눈빛 보다 사람의 인광이 더 세구나’하는 것을 깨달으며 차도와 붙어있는 셋방의 문을 두드리니 아내가 잠결에 나오며 반가워 했다. 아내는 나를 보자마자 “잠깐만 따라와”하며 문을 닫고 나왔다. 주인집 대문을 열고 화장실로 가면서 나보고 지키고 있으라고 했다. 용변이 마려웠는데 무서워서 나가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방에 들어오자 머리맡 베게 옆에 가위가 놓여있었다. “이게 뭐야?”하고 묻자 웃으며 슬그머니 치웠다. 잠을 자는 셋방의 방문을 열면 바로 도로이기 때문에 만약을 위해 가위를 곁에 놓고 자고 있었다. “아무리 퇴근이 늦어 한시간을 자더라도 집에 꼭 들어와야 겠구나”하는 다짐을 하면서도 왠지 가슴이 뭉클하게 저리어 왔다. 다음주 절친이자 인접 중대장인 한황진 대위가 집들이를 오면서 고맙게도 ‘오강’을 사가지고 왔다. 아내는 창피한 것도 잊은 채 너무도 좋아했다. 전방 오지에서 ‘오강’은 필수 생활용품이라는 것을 뼈져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끝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0-01-07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51) 분노로 떨리는 손끝에서 떨어지는 낙담의 담뱃재…
    해임통지도 못 받았던 전임 중대장은 결혼 휴가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1984년 12월 18일 유난히도 살을 애는 듯한 삭풍이 몰아치는 겨울 날씨 속에서 전임자 없는 중대장 취임식을 했다. 왠지 출발부터 썩 개운하지 않았다. 마치 소대장 시절에도 갑자기 대대장이 호출하여 명을 받고 지휘문제로 전 소대장이 해임된 GP장으로 급하게 취임했던 기억([김희철의 직업군인 이야기] (30) GOP부대의 ‘노루’ 트라우마와 GP의 '배신자들' 참조)이 떠올랐다. 필자는 문제가 있는 부대, 전 지휘자가 해임된 부대 위주로만 취임하는 전담 지휘관이 된 기분이었다. 취임식 후 며칠이 지났을 때, 부임한지 6개월 밖에 안되었지만 해임통지도 못 받았던 전임 중대장은 결혼 휴가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했다. 필자보다 임관이 5년 빠른 삼사출신 군선배였다. 그는 휴가전에 자신이 근무하던 자리에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중대를 지휘하는 필자를 보면서 얼마나 당황했을까? 필자의 경례를 받는 둥 마는 둥…… 아무런 말도 없이 중대 행정반 난로 옆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는 상기된 얼굴로 분노에 떨면서 한 모금 빨고는 부들부들 떠는 손이 내려올 때에 맞추어 낙담에 찬 담뱃재도 힘 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때 대대 본부에서 전임자를 호출했다. 그는 타대대 참모장교로 보직이 결정되었고 그렇게 쓸쓸하게 떠났다. ■ 영하 28도의 혹한 속에 지휘관 교대 FTX 실시 필자가 부임한 중대는 대성산 서측 방어진지를 담당하는 임무가 부여되어 있었다. 대대에서 새로 부임한 작전장교가 중대장 교체 후 FTX (작전계획 시행훈련) 계획을 수립했다. 하필이면 훈련 일정이 그해 가장 추운 날씨로 기온이 영하28도까지 내려가는 기간 이었다. 전 중대장이 보직 해임된 중대라 간부 및 병사들도 사기는 침체되어 있었지만 혹한을 고려하여 조정해 달라는 말조차도 못할 정도였다. 필자도 갓 취임한 직후이라 부여된 훈련임무를 그대로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주둔지에서 비상경보가 발령되고 중대원들은 완전군장을 꾸리며 생활관을 정리한 후 연병장에 집합했다. 그 와중에 동작이 느리고 요령을 피우는 병사들을 소대장은 심하게 혼을 내고있었다. ■ 병사를 친자식처럼 아끼는 행보관, ‘이런 부대에 왜 사고가?’하는 의구심 마침 중대 인사계(행정보급관) 박무열 원사는 그 모습을 보며 병사를 감싸고 있었고 인사계보다 어리지만 상관 장교인 소대장은 매우 화가 나 있었다. “소대장님, 때리지 마세요…! 아직 잘 모르고, 서툴러서 그래요….. 이해해 주세요…..”하는 박 행보관의 모습에서 병사들을 자식같이 아끼는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모시던 직속상관인 중대장이 보직 해임되는 안타까움도 있었겠지만 부대의 어머니로서 역할을 잘 하고 있었고, 사위가 타부대에 근무하는 대위였다고 했다. ‘시졸여애자 고 가여지구사(視卒如愛子 故 可與之俱死)’의 의미인 “장수가 병사들을 사랑하는 아들 돌보듯 한다면 가히 생사를 같이할 수 있다”는 손자병법 지형편을 확인하게 하는 순간이었다. 필자는 병사를 친자식 같이 아끼는 행보관의 모습에서 ‘이런 부대가 왜 사고가 많았지..?’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촉각을 다투는 시간이라 동계군장 상태만 확인하고 진지로 출발시켰다. ■ FTX 훈련 중 심야의 대대장 현장 방문, 고생해놓고도 당혹 진지 투입로는 그동안 계속된 제설작업으로 눈은 치워져 있었지만 북향이라 빙판이었다. 3시간 가까이 군장을 맨 상태에서 제설도구를 추가로 휴대하고 대성산 진지로 올라갔다. 영하 20도가 넘는 추위였지만 등과 이마에는 땀이 흘렀고 진지에 도착하니 쌓인 눈이 교통호를 메워 허벅지까지 빠지는 상태라 바로 제설작업을 했다. 필자는 통신병과 함께 각 소대진지를 둘러보았다. 눈이 많이 쌓인 곳은 키를 넘어 터널을 만들어 통과했고 각 소대진지를 다니니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그래서 소대장들의 작전계획 설명을 간단히 보고받고는 중대원들의 야영준비가 걱정되어 분침호와 산병호(콘크리트로 만든 진지) 안의 정리 상태위주로 확인했다. 중대 OP로 돌아오니 행보관이 도착해 있었다. 5/4톤 통차를 타고 빙판 투입로로 저녁을 추진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게도 교통사고 위험이 상존하는 것이었지만 그때는 병사들의 끼니를 해결하는 방법이 그것 밖에 없었다. 등에는 순찰로 땀이 흥건했지만 손과 발은 얼어 있었다. 특히 눈속을 헤메이다 보니 젖은 전투화는 완전히 얼어 있었다. 신발은 벗어 발을 말리며 식은 국으로 저녁식사를 했는데 얼어붙은 밥알도 맛은 있었다. 행보관이 복귀하고 야간 전투 준비를 했다. 야간에는 추진조를 운용하기 때문에 소규모 병사들이 분리되어 배치된다. 필자는 다시 통신병을 데리고 야간진지를 확인하기 위해 중대 OP방커를 나왔다. 몇시간이 흘렀다. 야간진지 확인을 위한 산악 이동간 발의 열로 얼었던 젖은 군화는 다시 녹았고 등에는 또 땀이 흘렀다. 하지만 얼굴과 장갑낀 손에 부딪히는 대성산 삭풍은 코밑에 고드름을 만들었고 손은 꽁꽁 얼었다. 순찰 및 확인을 마치고 다시 중대 OP 벙커로 돌아오자 피로가 엄습했다. 그때 통신병이 옆 소대 전화기가 불통이라고 보고했다. 각소대의 인원장비 이상유무를 확인하고 취침에 들려다가 걱정이 앞섰다. 책임감이 강한 통신병은 단선이 난 것 같다며 전선과 전화기를 들고 확인하러 출발했다. 필자는 너무도 피곤하여 침낭속에 몸을 담았다. 그 때 중대 OP 문이 열리며 누가 들어왔다. 호롱불 속에 비춘 모습을 보니 대대장(예비역 소장 양치규, 육사29기)이었다. 그는 엄동설한 속에 작계시행 FTX중인 중대가 걱정되어 직접 현장확인을 온 것이었다. 침낭 속에 잠시 몸을 담았던 필자와 통신병은 급하게 옷을 추리며 일어났고 대대장은 한심한 듯 바라만 보았다. “9중대장, 인원 장비는 이상 없나..?”라고 질문하며 추위 속에 병력관리 잘하라고 당부하고 떠났다. 하지만 대대장은 "지휘관은 마지막 까지 부하들을 확인해야한다..."는 무언의 교훈을 주는 여운을 남겼다. 아찔한 순간이었고 통신병 진희선 병장(현 서울시 부시장)은 “대대장님 화 나신 것은 아닌가요?”하며 걱정을 하였다. 이미 각 소대진지를 모두 확인하고 필자의 위치로 복귀해 쉬는 중이었지만, 제대로 훈련상황 보고도 못 드렸고 이완된 모습을 보였기에 필자도 첫 훈련에 실망을 드린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되었다.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20-01-03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50) 중대장 생활의 희비쌍곡선, 시작은 '박격포' 사고난 중대에서
    배치부대 미정으로 가족을 광주 백일아파트에 두고 먼저 사단사령부로 전입 새로운 곳 원했으나, 과거 근무했던 연대의 안전사고가 잦은 중대로 전임 중대장은 병사의 항문 파열 사고로 보직 해임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1984년 12월 고등군사반(OAC)과정이 끝나자 당시의 방침에 따라 다시 대성산으로 원대복귀하게 되었다. 내려오는 눈썹을 부릅뜨며 야전교범과 치열하게 싸워왔던 24주 기간의 고등군사반(OAC)과정을 수료했다. 비록 우수한 성적으로 흰장갑을 끼고 상장을 받는 등수안에는 못 들었지만 불행 중 다행스럽게도 간신히(?) 상층에 포함되는 성적으로 만족해야 했었다. 배치부대가 정해지지 않아 가족을 광주 상무대 백일아파트에 두고 먼저 대성산 사단사령부로 갔다. 사단에 도착하자 인사처 보임장교는 각 연대의 중대장 현황을 분석하여 육사 출신이 가장 적은 인접 연대로 보직을 고려하고 있었다. 필자도 소대장 및 대대교육장교로 같은 연대에서 약 3년을 근무해서 가능하다면 새로운 연대에서 새롭게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 6개월간 떠나 있다가 원대복귀하니 지형도 잘알고 사단 실무자들도 안면이 있어 생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소통이 되어 좋았다. 이런 것이 아마도 육군본부에서 중대장은 이미 근무한 지역 부대로 원대복귀 하도록 방침을 정한 이유이기도 했었다. 사단본부 각 사무실을 돌며 인접 연대로 보직을 받게 되었다고 복귀 인사를 하며 지인과 담화를 나눌 때 인사처에서 사단장 전입신고 시간이 되었다고 연락을 받았다. 사단장실 앞에 고등군사반(OAC)과정을 마친 동료들과 새롭게 전입오는 장교들이 신고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보임장교가 읽어주는 사단장 신고문에 필자가 가야할 연대가 바뀌어 당황했다. 인사참모가 최초 배치부대를 사단장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고등군사반(OAC) 입교전에 근무했던 연대로 조정되었다고 말했다. 필자는 2대대에서 소대장과 GP장, 1대대에서 교육장교로 근무를 했는데, 같은 연대 3대대 9중대장으로 보직이 바뀌어 있었다. 현재 중대장은 현재 결혼휴가 중이었으나 보직해임 되었다. 그 이유는 얼마전에 박격포 훈련탄에 병사가 항문을 맞아 파열되는 등 안전사고가 잦은 중대였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사단교육장교로 근무하다 소령으로 진급한 장교도 대대작전장교로 같이 보직되는 조치가 취해졌다. 당시에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랐었지만 대대장은 육사 선배였고 인접 10중대장은 GP장 근무시에 대대장의 치열한 선의경쟁(善意競爭) 유도에 걸려 우정이 더욱 돈독하게 된 동기생 한황진 대위(육사37기. 직업군인 사용설명서(35)’ 호국보훈의 길에도 통하는 미스트롯을 키운 힘’편 참조)였고 이 것은 희비 쌍곡선의 시작이 되었다. 연대에 육사 출신 중대장은 통상 1~3명 있는데, 하필 배치되는 대대에 동기생이 인접 중대장 근무를 하고 있어 평점 등에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등 불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GP장 근무시에 치열한 선의경쟁을 했던 절친이 먼저 고등군사반(OAC) 교육을 우수하게 마치고 근무하고 있는 부대라 더욱 난감했다. 사단장 신고시에도 안전사고에 대해 언급하며 사단장은 부대관리 철저를 당부하였다. 이어 연대장 신고를 위해 다목리에 있는 연대본부로 향했다. 때마침 연대는 연말 지휘관 회의를 소집하여 1년동안 근무 결과를 평가하여 선봉 및 각분야 우수중대 표창 등 결산을 하고 있었다. 또한 내년 GOP투입을 위해 철저히 준비하여 침투하는 적을 잡자는 것을 다짐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보직하는 3대대는 GOP가 아닌 후방예비로 정해져 있었다. 회의 후 만찬에서 6개월만에 다시 선배들과 동료들을 만나 자연스럽게 해후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 자리에서 연대의 모참모는 필자에게 “내년 선봉중대는 자네가 될 거야”하며 우스개 소리로 격려도 해주었다. 그러나 GOP연대에서 예비대대의 중대가 선봉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어 기대하지는 않았다. 회의 및 만찬이후 당연히 필자와 한황진 대위는 마을로 내려가 한잔을 더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필자는 한대위에게 핀잔을 주었다. “똑바로 근무를 잘하지! 인접 중대에서 안전사고 발생으로 타 연대로 가게 될 나를 니가 있는 대대로 배치하게 만드냐..?”며 소주를 주고 받으니 만취가 되었다. 자정이 다가오자 한대위는 비틀거리는 필자를 부축하여 연대내에 있는 독신자 숙소로 이동했다. 횡설수설하며 오솔길을 걸어 숙소에 거의 도달했는데 밤길에 누가 지나가며 “조심해서 다녀라..!”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사람을 향해 한대위는 ‘충성..!’하고 구호를 붙였다. 모질게 전투력 강화에 전념하여 ‘아비규환’이라는 별명으로 호칭되었고, 회의와 만찬을 주관했던 연대장(예비역 중장 이규환, 육사21기) 이었다. 우린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하며 급하게 숙소로 들어가 원대복귀 첫날을 보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19-12-23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9) ‘위·아래 막고 물 퍼내기’ 낚시식 학습방법, 교관 의도를 낚다
    ▲ 초급간부 양성과정인 육군보병학교 마크인 ‘”나를 따르라!”와 고등군사반(OAC) 과정에서 제병협동훈련하는 모습 [사진제공=국방부/동영상 캡처] 고등군사반(OAC) 과정에서 ‘새벽별 보기’식으로 공부해도 성적 안올라 '고추가루'에 의존에서 교관의 농담까지 암기하는 공부법으로 전환 교관의 의도에 맞는 답안 작성, 성적도 상층으로 진입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어린 시절에 시냇가에서 고기 잡을 때 물웅덩이를 발견하면 상류쪽에 흙을 쌓아 물을 막고 하류 쪽마저 막은 후에 물을 모두 퍼내면 물이 빠진 웅덩이에서 물고기를 쉽게 건져 올릴 수 있었다. 소위임관시에 교육받는 초등군사반(OBC) 성적은 중위 진급은 거의 가능하게 하지만, 장차 진급 심사시에 그렇게 중요하게 평가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위로 진급하면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할 고등군사반(OAC)과정은 영관장교 진급 심사시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고등군사반(OAC) 259기 과정에 입교한 동기생 16명을 포함한 20여명의 육사 출신들과 삼사, 학군, 단기사관 출신 104명의 장교들은 대입시험시 ‘4당 5락’이라는 유행어처럼 밤잠을 줄여가며 새벽별 보기식 학습을 하고 있었다. 필자가 근무했던 승리부대는 최전방 산골 오지의 산악부대라 아무래도 후방 부대들 보다는 이러한 과정에 대한 정보가 늦었다. 물론 게으르고 부족한 탓이겠지만 총 24주간 과정의 1/3이 지날 즈음에도 성적은 저조했다. 고등군사반(OAC) 입교전에 대대장과 주변 선배들도, 더구나 오랜 군생활을 이미 경험하셨던 장인도 모두가 1등을 목표로 제시해 주었으나 당시 필자의 상황은 1등은 커녕 1/3수준인 ‘상층’에도 못 들어갈 위험에 놓여있었다. 입교전인 신혼초에 연대의 장용성 군종목사님이 필자 혼자 육사에서 세례 받은 것은 진정한 종교인으로 살 준비가 된 것이 아니라며, 우리 부부를 함께 부대 목욕탕 물에 담그면서 침례세례를 주시고 성경 ‘이사야서 41장 10절’을 명심하며 신앙 생활을 하라고 제시해 주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느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라는 성경 귀절을 되씹으며 다시 용기를 내어 밤잠을 설치며 졸린 눈을 부릅뜨고 새벽까지 학습을 계속했다. 그래도 성적이 상승하는 변화가 없자, 그때까지 믿었던 선배들의 공부했던 자료인 일명 '고추가루'만을 중심으로 삼았던 그동안의 학습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무식한 전법으로 “막고 푸는 방법”을 택했다. 그 날 교관이 강의하며 강조했던 교리는 조사까지 그리고 농담까지도 모두 기록하며 모두 암기하기로 했다. 단지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라고 한 성귀만을 믿었다. 웅덩이의 위와 아래를 막고 물을 퍼내어 물고기를 잡는 낚시 방법이었다. 선배들의 고추가루를 기초해서 채곡 채곡 쌓아가며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머리 속에 꽉꽉 눌러서 마구 쑤셔 넣기식” 학습으로 전환했다. 물론 이방법은 학습하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다음 시험부터 달라졌다. 단지 혼자서 교범을 읽고 숙지하는 것은 나름의 지식을 배양할 수 있었으나 가르치는 교관의 의도를 읽을 수는 없었다. 막고 푸는 식으로 강의 및 토의시 한마디씩 던지는 교관의 모든 발언에는 교범의 행간에 숨어있는 교리를 깨닫게 해 주었다. 수업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었던 농담은 당시 교리를 암기하는 중요한 연상도구가 되었고 이러한 것들은 시험 평가시 강의시 교관이 이야기했던 토시까지도 적어낼 수 있었다. 교육 역시 인간이 가르치고 그 사람이 평가하는 법이다. 따라서 가르치는 교관의 의도에 맞춰서 공부한 시험 답안지는 해당 교관이 요구한 답을 쓸 수 밖에 없었다. 성적은 한단계씩 올라갔고 동료들과 소주잔을 기울일 때에도 대화 속에서 해당 교관의 수준과 의도에 대해서 정보를 공유하게 되었다. 어느덧 과정 종반에 접어들어 전술과목 및 제병협동(보병, 포병, 기갑, 항공, 공병 등 제 병과 통합)작전 등을 배울 때에는 드디어 성적이 상층에 포함 되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19-12-05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8) 고등군사반의 추억, 치열한 경쟁 속 소주잔의 행복
    고등군사반(OAC) 입교를 앞두고 치열하게 입교 시험 준비하는 대위들 선배들의 공부자료 지칭하는 '고추가루' 확보해야? [뉴스투데이=김희철 칼럼니스트] 軍에서는 장교로 임관할 때 초등군사반(OBC), 대위 진급하면 고등군사반(OAC), 소령 진급하면 육(해공)군대학 등의 보수교육을 필수로 이수하게 되어있다. 물론 중령, 대령, 장군으로 진급해도 직책에 맞춰서 대대장반, 연대장반, 장군반 교육을 받는다. 이 같은 육(해/공)군대학까지의 교육은 필수과정으로 졸업성적은 진급 및 보직을 검토할 때에 우수하고 능력있는 간부라고 평가받는 결정적인 고려요소가 된다. 필자의 경우, 대대장이 '입교시험' 성적이 졸업성적을 좌우한다며 부대에서의 야근을 불허하며 정시 퇴근해서 입교시험 준비에 전념하도록 배려를 해주었다. 입교 시험은 고등군사반(OAC) 교육후 중대장직 수행을 위한 것이다. 중대급부터 대대 및 연대 전술 교범과 전술 전략의 기본이 되는 ‘작전요무령’을 숙독해야 했다. 장교 임관 후 야전에서 3년 가까이 책과 거리를 두다가 다시 책상에 앉아있기는 무척 힘이 들었다. 또한, 이미 고등군사반(OAC) 교육을 수료하고 현지에서 중대장 근무를 하는 선배들의 시험 준비했던 자료(일명 '고추가루')들을 확보하는 것도 전쟁이었다. 그 선배가 몇등으로 졸업했나를 참고하여 가능하면 우수한 성적을 올린 선배의 고추가루를 얻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軍 보수교육과정의 졸업 성적은 향후 승진의 중요 변수 입교 대상자의 상관과 가족은 '대입 수험생'처럼 뒷바라지 군사교육과정의 졸업성적이 상중하에서 ‘상(대략 1/3수준)’에 포함되어야 진급 심사시 그나마 경쟁 대상이 된다. 필자도 과거 진급심사위원으로 몇번 참여를 했지만 진급 공석은 적은데 진급 대상자가 너무 많아 우수한 사람을 선발하기 보다는 결격 사유를 찾아 제외시키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진급심사시 대상자가 상점, 평점, 근무실적 등이 동일할 때에는 결국 군사학교 성적의 우열로 당락이 결정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도 본인도 현재의 행복과 만족에 안주하기 보다는 시간과 노력을 쪼개는 희생을 감수했다. 신혼 초, 군인은 적과 잘 싸우고 근무만 잘하면 승승장구하는 줄로만 알았던 필자의 아내는 때늦은 고등군사반 입시수능(?) 준비에 몰두하는 필자를 뒷바라지하면서 훗날 아들들의 진짜 대입 수능준비를 대비한 예행 연습을 미리 했다고 할 수 있다. ‘고등군사반(OAC) 259기’로 육군보병학교에 입교 아내의 행복, 쥐 나오던 관사에서 9평 '백일 아파트'로 이사 드디어 대성산 기슭에서 천연자연의 신선한 공기와 동료 부하들의 땀냄새가 어우러져 신혼을 시작한지 1년 만에 전라도 광주의 상무대로 첫 이사를 했다.쓰러져가는 부대관사에서 교육생 부부들을 위해 준비된 ‘백일아파트’로 입주하게 되었다. 비록 9평밖에 안되는 연탄 아궁이 아파트이지만 쥐가 왔다갔다하는 산간벽지의 낡은 관사 보다는 너무도 좋았고 아내는 “시집 잘 왔네”하며 너스레도 떨었다. 총각장교들은 보병학교인 ‘상무대’ 인근 화정동에 자취방을 마련했다. 자취방 구하는 것도 전쟁이었다. 현재 노량진의 고시 학원가처럼 자취방 주인들은 6개월마다 입교하는 학생장교들을 대상으로 하숙 영업을 하고 있었다. 화정동에 가면 ‘고등군사반(OAC) 1등을 배출’라는 프랭카드가 걸려있는 하숙집도 있었다. 그곳은 역시 출신을 떠나 치열한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우수한 성적을 얻으려는 장교들의 피튀기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하지만 좋은 것도 있었다. 사관학교 졸업 후 3년만에 만나는 동기생들과 선배들과의 해후였다. 그동안 야전에서 경험한 짜릿하고 아슬아슬한 위기 극복상황과 보람차고 즐거운 성공 사례들을 주고 받으면서 기울이는 소주 한잔은 치열한 경쟁을 잠시 잊게 하는 청량제였다. 입교시험 성적에 실망, 끝없는 '경쟁사회'에 회의감 들기도... 학교장에게 입교 신고를 하고 조편성이 끝난 뒤에 그동안 준비했던 입교시험을 치루었다. 시험준비 자료인 고추가루를 전해준 선배들의 조언은 입교 성적이 과정 끝까지 지속된다는 것이었다. 1주일 즈음 지난 뒤에 개인의 성적표가 교실 사물함에 꽂혀 있었다. 실망이었다. 꼴찌는 아니지만 1/3선에는 미달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 어떤 동료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입학 기수를 잘 선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속한 기수는 육사 출신들이 대거 입교하는 시기라 너무 치열하여 목표한 성적을 올리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그동안 대대장님의 배려와 가족의 뒷바라지에 미안할 뿐이다. 인생을 이렇게 피튀기면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회의 감도 들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강의를 더 집중하고 마지막까지 더 치열하게 책과 실습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다짐만 할 뿐이었다. 한편 이런 경쟁이 없이도 행복해 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는 없는지 안타까웠다. 부부동반으로 최근 여행한 북유럽은 '평등한 행복' 누려 소주잔 기울이며 치열하게 경쟁했던 고등군사반 교육과정은 '한국인의 행복' 치열한 경쟁 속 '자기 몫'에 만족하는 태도가 행복의 길... 얼마전 필자의 부부는 북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에서 웅장한 자연과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문화유산들을 관광하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헌데 현지 한국인 여성 가이드가 어느 도심에서 안내 중에 버스 창밖을 바라보며 현재 한국의 치열한 입시 및 취업 경쟁에 대해 한마디를 던졌다. “본인은 대사관 직원으로 이곳에 파견 나왔다가 결국 귀국하지 않고 정착하게 되었다”며 “한국과 이곳이 다른 점은 너무도 많은데 넓은 영토에 비해 적은 국민들로 천연자연이 풍부해 국민소득이 높은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보장제도가 최상인 복지 국가라는 것이다”라고 했다. 하면서 “방금 창밖에 환경미화원이 거리 청소를 하는데 옆에 왠 청년이 도와주고 있는 모습을 보셨지요?”하며 “누구 일까요?”라고 반문을 했다. 북유럽은 세금이 수익의 40~60%로 과중하지만 국민들은 전여 개의치 않고 있다며 많이 버는 사람이 세금을 많이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적게 버는 사람이나 실업자는 오히려 보조금을 받고 있으며, 국민들에게 돌아가는 그밖의 복지혜택도 많다고 했다. 가이드는 "직업에 귀천이 없어 창밖의 환경미화원은 자기 일에 만족하며 아들도 부끄러움 없이 힘든 아버지를 도와주는 모습"이라며 "계급의 고하에 따른 차별이 없이 평등하게 행복을 추구하는 살기 좋은 복지국가"라고 설명했다. 가이드는 더불어 본인의 자식이 대학 입시와 취업 경쟁의 지옥에서 해방되어 행복하다며 미소를 띄웠다. 헌데 그녀는 버스에서 내릴 즈음에 의미 있는 한마디를 더 던졌다. “이 나라에서 한국으로 유학가는 청년이 많이 있는데, 한국에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고 한국에 정착하는 유학생이 늘어나고 있다”며 '도전을 좋아하는 청년들'이라고 했다. 왜냐면 한국은 치열한 경쟁사회이지만 밤새도록 상점을 열어 편리하며, 여의도 광장에서 통닭과 자장면을 시켜 먹을 수 있는 서비스는 북유럽에서는 상상도 못하기 때문이라며 한국도 경쟁이 치열하지만 좋은 점도 있는 아이러니라고 덧붙였다. 가이드의 말을 들으며 경쟁에서 승리해 승진을 추구하는 한국인의 삶과 주어진 현재에 만족하는 행복을 누리는 북유럽인의 삶중 어느 쪽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고등군사반 교육과정은 치열한 경쟁의 연속이었지만 오랜만에 선배 동료들을 만나 회포를 풀 수 있는 행복(幸福)도 있고, 목표한 성적을 한 단계씩 올려가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무한정 평등하지만 무미건조한 북유럽 복지 사회가 그렇게 부럽게 다가오진 않았다. 비록 경쟁은 치열하지만 마음을 비워 복(福)을 받으면 행복(幸福)하다. 왜냐면 “복(福)이라는 글자에는 한사람(ㅡ)이 먹을 수 있는(ㅁ) 밭(田)이 있어 베풀(示) 수 있으면 행복하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19-12-01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7) 부대 민방공 대피훈련이 관사지역 대피소동이 된 '웃지못할 사연'
    민방위훈련은 1972년 '민방공·소방의 날'이 시초 대대교육장교 시절, 열외 병사 및 간부들로 고민 오토바이 뒷좌석에 최루탄을 달고 주둔지를 돌며 훈련 유도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신혼 초, 대성산 기슭의 쓰러져가는 부대관사에서 살림을 시작한 우리 부부는 쥐가 왔다갔다하는 산간벽지 방 속에서 한 겨울 연탄 아궁이 열로 방바닥 아랫목은 시꺼멓게 탔지만 이불 밖의 기온은 영하로 입김이 서렸던 추억을 갖고 있다. 현재 민방위훈련은 연간 총 5회 실시하나 국민들의 무관심으로 유명무실화 되어 있지만, 필자가 대대교육장교로 근무하던 시절인 1980년대에는 매월 15일이 되면 전부대 및 주민들이 민방공훈련을 했다. 그때 어느 달 15일에도 어김없이 민방공훈련 시간이 다가왔다. 이때 핵심은 전 부대원들이 방독면을 착용하고 적항공기 침공에 대비해 중대 및 소대별로 대공화망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또한 화재 발생 상황을 조성하여 대피 및 물자 운반, 화재진압 등 소방훈련까지 한다. 헌데 일부 간부 및 병사들이 바쁘다는 핑계로 훈련을 열외하는 경우가 있어 고민하다가 방법을 생각해 냈다. 방독면을 강제로 쓰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노후된 관사에서 한 겨울 추위를 잊게 했던 연탄 운반용 집게에 최류(CS)탄을 결합하여 오토바이 뒤에 달고 부대 주둔지를 한 바퀴 돌면 최류 가스 때문에 간부 및 병사들은 자동으로 방독면을 쓰고 훈련에 참가하도록 만들었다. 효과적인 훈련이 되었고 몰래 숨어 훈련 시간만 피해보려고 했던 장병들은 최류가스를 마시면 급하게 방독면을 찾아 착용했다. 또 하나의 소득이 있었다. 아마 군생활동안 요령을 피웠던 예비역들은 기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방독면의 정화기 마개를 열어놓아 착용시 답답함을 모면 하려고 했던 일부 병사들이 방독면을 착용했어도 최류가스가 그대로 들어오는 '재난'을 겪게 됐다. 그들은 호들갑을 떨면서 마개를 닫았다. 결국 자동으로 방독면 관리 상태도 확인하는 성과도 거두었다. 제대로 훈련을 하려면 각 중대 막사마다 최류가스탄을 터뜨려야 했는데 오토바이를 이용하니 적은 양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최류탄을 결합했던 연탄집게 사용하자 관사에 '최류가스 소동' 국민의 무관심과 경제논리로 소홀해지는 최근 새태 안타까워 그날 부대의 민방공훈련은 연탄 집게에 최류탄을 결합한 오토바이 운용 덕분에 방독면 관리도 확인하고 열외 없이 주둔지 내 전 병력이 제대로 훈련을 하게 되었다는 칭찬도 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했다. 훈련이 끝나고 다음 일정에 바쁘게 업무를 하고있는데 관사 지역에서 급한 전화가 왔다. 필자의 가족이 최류(CS)탄을 결합하여 오토바이 뒤에 달고 부대 주둔지를 휘저었던 연탄 집게를 이용하여 아궁 속 연탄을 갈자, 달구어진 집게에서 최류(CS)가 나와 집안은 물론 관사지역에 퍼져 군인 가족들이 비상이 걸린 것이다. 필자는 놀라 관사에 들어가 가족들에게 사과를 했고 필자의 가족은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원망의 하소연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날은 민과 군이 제대로 통합훈련을 하게 되었던 셈이다. 동시에 부대 민방공 대피훈련이 관사지역 대피소동이 된 웃지못할 사연을 낳게 하는 추억도 남겼다. 사실 우리나라 민방위업무 및 민방공훈련은 6·25전쟁 직후인 1951년 국방부 계엄사령부에 민방공총본부가 창설되면서부터 국민과 함께 해왔다. 민방위훈련은 1972년 최초 “민방공·소방의 날” 훈련이 실시된 이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실시되고 있다. 이러한 꾸준한 민방위활동이 유사시에 큰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은 그동안에 있었던 수많은 전쟁에서 증명된 사실이다 얼마전까지도 우리 국민들은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리면 시민들은 민방위 대원의 안내에 따라 가까운 지하대피소, 지하보도 등 안전한 장소로 대피했다. 또한 운행 중인 차량의 경우 긴급차량 비상차로 확보를 위해 도로 오른쪽에 정차한 후 시동을 끄고 라디오 실황방송을 청취하며 대기했다. 이후 경계경보가 발령되면 시민들은 대피소에서 나와 경계태세를 유지하면서 통행하고, 경보해제 발령 후에는 정상 활동으로 복귀하고 차량 역시 차량통제 해제방송에 따라 행동하면 훈련이 종료된다. 다만 병원, 지하철, 철도, 고속화도로, 항공기, 선박 등은 훈련에서 제외되었다 작금에는 국민들의 무관심과 단순한 경제 논리에 의해 민방공훈련은 소홀하게 되는 실정이다. 앞으로는 이 제도가 제대로 부할해서 유사시를 대비한 훈련을 함으로서 국민들의 안보의식 고취시키며 이를 통해 실제 상황발생시 국민의 생명과 재산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기회가 되길 기대해본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 소통시대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
    2019-11-12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6) 삶은 시간의 흐름 속에 선택의 연속……..?
    ▲ 지난 호국훈련 중 공중강습작전을 전개하고 있는 UH-60 기동헬기 [사진제공=국방부] 啐啄同時(줄탁동시)란 놓쳐서는 안 될 좋은 시기를 선택함을 비유 결혼 날자를 택해 청첩장도 돌렸는데 상급부대훈련이 변경되어 난감한 처지됨 결혼도 B(birth)와 D(death) 사이에 있는 C(choice)인 인생의 선택 중 중요한 하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啐啄同時(줄탁동시)란 병아리 우는 소리를 啐, 깨뜨리는 것을 啄이라 하는데, 어미 닭이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려는 순간 주둥이로 탁 쪼아 깨뜨려서 쉽게 나오게 한다는 의미로 놓쳐서는 안 될 좋은 시기를 비유한 사자성어이다. 엄동설한의 추위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따사한 봄이 되어 꽃이 피자 언제 삭풍을 몰아쳤냐고 되물으며 모습을 감추었다. 그 화사한 봄날에 인접 GP장의 여동생을 처음 만났다. 다시 옷깃을 여미는 가을이 되자 그 만남은 열매를 맺어 결혼식을 올리는 날짜를 잡았다. 평범한 시민들은 길일을 찾아 혼인 날짜를 정하지만 군인들은 길일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상급부대 훈련, 검열 등의 고려요소를 참고하여 가능한 날을 선정해야 한다. 필자는 대대교육장교 근무시절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연대 전투단 훈련 겸 평가일과 대대 전슬흔련 평가를 모두 마치고 여유있게 결혼 날짜를 선택했다. . 그러나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에 있는 C(choice)라고 이야기 한다. 선택을 잘 못하면 걷잡을 수 없는 시련을 만나게 된다. ‘군단 동계작전준비 시범’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연대 전투단(RCT)훈련을 받은 뒤에 대대 전술훈련 평가(ATT)가 계획 되어 있었는데 상급부대 일정이 변경되어 연대 전투단(RCT)훈련이 대대 전술훈련 평가(ATT) 시기로 연기되어 뒤로 미루어진 대대훈련평가와 결혼 날짜가 중복 되었다. 결혼식을 한달 앞두고 이미 청첩장을 모두 발송했는데 난감했다. 고민에 말도 못하고 있는데 송영근 대대장이 호출했다. “교육장교, 니 결혼이 상급부대 일정 변경으로 대대 전술훈련 평가(ATT)와 중복되어 고민이지…..?” 하며 미소를 지었다. 아픈 곳을 콕 찌르는 질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어서 대대장은 “송영근이 육군 중위 한명 없다고 대대 전술훈련 평가(ATT)를 못 받을 것 같으냐?”라며 “개의치 말고 계획대로 결혼하고 휴가까지 충분하게 갔다 와라”하자 필자가 계획하고 협조한 ‘항공정찰과 연막작전’은 누가하냐고 반문했으나 막무가내로 기간에 맞추어 출발하라며 지시임을 강조했다. 대대장실을 나오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본인의 대대장 근무를 평가받는 훈련을 앞두고 부하들을 배려하는 도량에 감동의 연속이었다. 생도시절 훈육관으로 인연도 맺었지만 직속 상관으로 모시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다음주 있는 대대전술훈련 평가 전인 토요일 결혼식을 앞두고 목요일까지 훈련 준비를 한 뒤에 야간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인생에 한번 밖에 없는 결혼식도 소속된 부대훈련평가의 부담을 안고 치루게 되었다. 인생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가장 최선을 선택하는 것이다. 최선의 해결방법은 필자 본인이 선택해야 했다. ▲ 필자의 결혼식 사진 [사진제공=김희철] 서울에 도착한 야밤에 처갓집 대문을 두드려 한밤자고 새벽에 다시 고향집에 내려가 부모님께 인사드린 후, 바로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때마침 다른 동기도 결혼 날짜가 중복되어 걱정했는데 성남 행정학교에서 교육받던 동기들이 많이 찾아와 풍성하고 행복한 인생 출발 행사가 되었다. 제주도 신혼여행도 간단히 마치고 월요일 밤에 부대에 도착하니 이미 전부대원은 주둔지 준비태세 평가를 마치고 야외 훈련장으로 나가 부대는 텅 비어 있었다. 복장을 준비하여 다음날 새벽에 훈련장 상황실 텐트에 도착하니 작전장교는 너무도 반가워하며 맞아 주었다. 상황실 텐트애서 필자가 떠드는 소리를 들은 송 대대장이 지휘관 텐트로 호출을 했다. 들어가자 대대장은 화를 내며 본인의 평가를 위해 부하의 인륜지 대사인 결혼을 망치게 만들었다는 소리를 듣게 되어 민망하다며 꾸중을 했지만 입가에 숨은 미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필자는 결혼식은 성황리에 잘 끝냈고 제주도 신혼여행도 다녀와서 행사는 잘 치루었다고 말씀드리고 바로 항공 정찰 시간이 되어 사단 항공대로 출발해야 된다며 급하게 대대장 텐트를 빠져나와 짚차에 올랐다. 항공대로 이동하는 짚차의 스치는 바람도 미소 짖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항공대에는 지금은 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는 O-2기가 있었다. 고정익 항공기를 타고 공격 대기중인 적지역을 정찰하며 집결해 있는 적군의 위치도 파악하고 좌표를 불러주며 화력 요청한 뒤 부대로 복귀했다. 곧 통제관실에서 대항군의 항의를 접수했다고 한다. 항공기가 적군의 상공을 날자 사전 항공기 사용을 협조 안했다며 본인들이 요청 못한 것을 오히려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해 필자가 한달전에 요청한 항공정찰 중 한건을 상대방에게 양보하는 것으로 마루리 했다. 공격간에는 대대원이 도로를 횡단하게 되어 사전에 사단화학대와 협조한 연막통을 도로에 피워 아군의 위치도 기만하면서 은폐 기동을 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정신없이 작전항공장교의 임무를 수행하다 보니 어느덧 대대전술훈련평가(ATT)도 막을 내렸다. 이번 훈련에서 사전에 철저히 준비하여 꼭 필요한 시기에 항공정찰과 연막을 활용한 것과 대대장의 창의적인 전술 능력이 돋보이는 훈련이었다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 장수는 부하의 입장에서 배려하여 지휘해야 한다. 또한 적시에 어미 닭이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려는 순간 주둥이로 탁 쪼아 깨뜨려서 쉽게 나오게 한다는 의미의 啐啄同時(줄탁동시)가 선택의 연속인 인생에서 중요한 교훈임을 깨닫게 하는 순간이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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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06
  • [직업군인사용설명서](45) YTT(yesterday, today, tomorrow)에도 통하는 별보고 영어하는 능력
    ▲ 좌측 KM180 도로대화구 폭파킷(Cratering Demolition Kit) 등을 이용해 도로를 폭파한 우측장면 [사진제공=국방부] 대성산 계곡 2천평 하늘엔 은하수 등 수 많은 별들이 수고했다고 격려….. ‘군단 동계작전준비 시범’을 창의적으로 준비하여 성공적 개최 어제, 오늘, 내일도 통하는 별보고 영어하는 근무는 성공의 지름길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인생에 있어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것은 성공의 첩경이다. 필자가 초급장교로 대대교육장교로 근무할 때 사관생도시절 훈육관 송영근 중령(전 기무사령관/국회의원)을 지휘관으로 모시며 군생활의 기본을 다졌다. 당시 대대장은 영어에도 능통하여 연합사에서 고위 방문객이 오면 사단에서는 당연히 대대작전지역으로 안내하여 작전계획과 전투준비를 설명하게 유도했다. 가을이 다가오자 군단에서 동계작전준비 시범을 보이라는 지시가 사단으로 떨어졌고 자연스레 필자가 소속된 송영근 대대가 그 책임을 맡았다. 사실 겨울이 다가오면 전방 부대원들은 몹시도 바빠진다. 당시에는 생활관 창문이 허술해 비닐을 구입하여 문풍지를 발라 혹한의 추위에 대비하고 난방용 베치카에 사용할 조개탄 등 석탄도 창고에 쌓아 저장해야 한다. 또한 눈이 내리면 도로 개통을 위해 산에서 싸리를 채취해 빗자루를 만들고 넉가래도 추가로 제작한다. 특히 격오지는 차량 진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겨울내내 먹을 식량과 유류도 미리 공급받아 비축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만약 동계에 북한군이 침투하거나 남침전쟁을 재발하면 막아낼 수 있도록 경계진지에 보온 발판을 준비하고 주요 접근로에 지뢰공(겨울에 땅이 얼기 때문에 미리 구멍을 파놓고 짚이나 병으로 채워 놓는 것)을 중대별로 수백개씩 설치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특히 도로에 큰 웅덩이가 패어 있다면 자동차는 물론 전차나 장갑차 등도 계속 앞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다. 비행장의 활주로에 패어 있다면 항공기는 당연히 이·착륙할 수 없다. 이처럼 도로나 비행장 등을 이용하려는 적의 기동을 ‘차단’하거나 ‘거부’하기 위해 폭약(폭탄)으로 만든 웅덩이를 대화구(大火口, 분화구, Crater)라 하며 이를 설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동계작전 준비였다. 그날도 대대장과 작전장교와 함께 실물을 준비하는 것을 포함하여 어떻게 효율적으로 많은 인원들에게 설명을 할 것인가에 대해 토의를 했다. 어느덧 자정이 넘어 다음날 일과도 고려해 일단 퇴근하기로 했다. 피곤함이 양어깨를 짓누르지만 부대 옆에 있는 관사를 향해 같이 걸어나오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대성산 계곡 2천평 하늘엔 은하수 같이 셀 수 없는 많은 별들이 수고했다고 격려하는 것 같았다. ▲ 좌측 동계에 근무중인 GOP 초소와 보급로상에서 넉가래와 빗자루(필자근무시에는 싸리빗자루)로 제설 작업하는 모습[사진제공=국방부] 일단 시범준비를 하여 대대장은 사단장께 계획보고를 했고 잘 준비했다는 칭찬을 들었으나 왠지 배가 고팠다. 사단보고를 마치고 다시 얼굴을 맞대고 고민을 했다. 보다 창의적인 무언가가 필요했다. 결국 ‘도로대화구 설치킷’을 준비하기로 했다. 도로대화구를 설치하면 전선이 도로에 노출되어 장갑차들이 통과하면 절단되어 기능을 발휘 못할 수도 있었다. 여기에 착안하여 철파이프를 준비하여 사전에 전선을 넣고 매설하면 절단을 방지할 수 있었다. 시범당일 많은 인원들이 모였다. 인접 사단장을 비롯해 모든 지휘관 참모들이 두눈을 반짝거리면서 지켜보았다. 지금은 대형스크린이 있어 빔으로 쏘면 충분히 볼수 있었으나 당시에는 돌림판을 이용하여 전지 3장을 붙여 큰 글씨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준비했다. 대대장의 브리핑을 하면 화면을 돌려 다음화면이 나오게 하고 현화면을 설명하는 동안 뒤에서 설명이 끝난 자료를 제거하고 새판이 나오도록 해야하는 일은 필자의 몫 이었다. 브리핑이 끝나고 전시물을 관람할 때에는 정말 흐뭇했다. 매년 연중행사로 반복되는 시범이 아니라 동계작전 및 전투준비를 고민하고 ‘도로대화구 설치킷’을 최초로 창안하여 제시한 것이 대히트였다. 인접 지휘관들은 부하들에게 시범과 똑같이 동계작전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는 모습에서 밤하늘 별을 보면서 치밀하게 준비했던 보람을 느낄 수 있었고 보다 창의적으로 착안하는 송영근 대대장의 혼신의 노력에 존경심을 같게 했다. YTT(yesterday, today, tomorrow)어제, 오늘, 내일도 통하는 별보고 근무하며 최선을 다하는 자세와 영어도 잘하는 능력은 성공의 지름길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겸임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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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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