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큐리티팩트=김한경 기자] 불법드론의 위협으로부터 원자력발전소와 공항 등 중요시설을 시키기 위해 불법드론 발견부터 무력화, 사고조사까지 일련의 대응이 가능한 통합시스템 개발 사업이 본격 추진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범용드론 제품을 이용한 원자력시설, 공항 등 중요시설 위협 행위에 대비하기 위해 산업통상자원부, 경찰청과 함께 추진하는 '불법드론 지능형 대응기술 개발사업'(2021~2025년) 수행기관으로 한국원자력연구원(KAERI) 컨소시엄을 선정했다고 18일 밝혔다.
이 사업은 사생활 침해, 항공운행 방해 등 범용드론을 이용한 불법행위가 공공시설 테러 및 위해로 발전할 가능성에 대비해 불법드론 대응 통합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한 것으로, 과기정통부 180억원, 산업부 150억원, 경찰청 90억원 등 420억원이 투입된다.
KAERI 컨소시엄에는 한국항공우주연구원(KARI) 등 4개 공공연구기관과 대학, LIG넥스원 등 17개 안티드론 관련 기업과 수요기업 등 총 23개 기관이 참여할 예정이다.
컨소시엄은 불법드론의 탐지·식별·분석·무력화·사고조사 등 발견부터 사후처리까지 일괄로 대응 가능한 통합솔루션을 개발하고, 실제 원자력시설 및 공항에 구축해 실증할 계획이다.
특히 불법드론 대응 통합솔루션 구축을 위해 5년간 불법드론 침투 등 위협 시나리오를 도출하고 이에 대응하는 안티드론 원천기술 및 시스템 등을 개발해 실증한다.
이를 위해 탐지센서 및 무력화장비로 구성된 지상기반 시스템, 지상기반 시스템과 상호 연동·보완하는 상시순찰형 및 신속대응형(불법드론 직접 무력화) 드론캅 등 공중기반 시스템을 개발한다.
또 불법드론 식별 즉시 취약점을 분석해 최적의 무력화 방안을 도출하는 지능형 무력화 원천기술과 불법행위자를 규명하는 포렌식 기술도 확보할 예정이다.
재난안전통신망(PS-LTE)으로 연결된 지상기반·공중기반 시스템을 중요시설에 최적으로 배치하고, 지능형 무력화 원천기술과 포렌식 기술을 적용하기 위한 통합 운용시스템도 구축, 실증할 계획이다.
김봉수 과기정통부 기초원천연구정책관은 "KAERI 컨소시엄이 불법드론 대응을 위한 원천기술을 확보, 국내기술 기반의 안티드론 통합 솔루션을 마련함으로써 국내 중요시설의 안전을 도모하고 세계 시장도 선도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시큐리티팩트=김한경 기자] 방위사업청과 국방기술품질원은 12일부터 5월 21일까지 민·군 규격표준화사업 신규 연구과제 발굴을 위한 수요조사와 올해부터 추진할 2개의 연구과제 주관 연구기관을 공개 모집한다.
민·군 규격표준화사업은 ’99년부터 시작된 대표적인 범부처 협력사업의 하나로, 군사 부문과 비군사 부문 간의 기술협력 강화 및 공통 적용이 가능한 표준을 연구하여 국방규격의 KS규격 전환, 불필요한 규격 통폐합 등을 통해 산업 경쟁력과 국방력을 강화하는데 목적이 있다.
민·군 규격표준화사업을 통해 최근 3년간 약 794개 군수 품목 규격을 상용으로 전환하여 비용 절감 및 국방 분야 무기체계 성능 향상뿐만 아니라 민간산업의 성장에도 기여하고 있다.
수요조사는 4차 산업혁명 핵심기술, 소재·부품·장비 분야, 미래 친환경·안전 분야 등을 중점 추진하며 표준화 연구결과를 통해 국방 분야에 적극 활용하여 첨단 무기체계 구현과 산업 경쟁력 강화를 이끌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또한, 지난 3월 방위사업청 민·군규격실무위원회에서 확정된 연구과제인 ’장갑강 용접재료 방탄 시험 대체 규격 표준화‘ 및 ’국내 상용 내연기관 윤활유의 군 적용성 향상을 위한 민군규격 표준화 연구‘는 주관 연구기관 선정 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민간 표준 관련기관의 본 사업 참여 및 교류 확대를 통해 국방 표준 분야가 국제 표준에 부합하게 되면, 국내 방산제품이 국제시장에서의 상호 운용성·호환성·공통성이 높아져 글로벌 경쟁력이 향상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민·군 규격표준화사업의 수요조사와 주관 연구기관 공모 접수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공고일부터 국방기술품질원, 방위사업청 홈페이지와 국가과학기술지식정보서비스(NTIS)에서 확인 가능하다.
[시큐리티팩트=김한경 기자] 지난 9일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사천 공장에서 최초의 국산 전투기 KF-21 시제 1호기 출고식이 개최되었다. KF-21은 세계에서 8번째로 개발 중인 4.5세대 이상 첨단 초음속 전투기이다.
KF-21은 공군이 정한 차세대전투기(KF-X)의 고유 명칭으로, ‘21세기 첨단 항공 우주군으로의 도약을 위한 중추 전력’, ‘21세기 한반도를 수호할 국산 전투기’라는 뜻을 담고 있다.
출고식은 정부와 군 주요 직위자, 인도네시아 국방장관을 비롯한 인니 정부 대표단, KAI 등 방산업체 관계자, 그리고 각계 인사들이 참석해 KF-21 개발의 기틀을 마련한 것을 축하하고 발전된 국가 위상을 강조하는 행사로 진행되었다.
출고식은 과거부터 하늘을 향한 도전을 이어온 우리나라 항공산업 주역들의 투혼이 KF-21을 통해 부활함을 알린다는 주제로 구성했다.
한편 공군은 21세기 한반도를 수호할 KF-21의 통상 명칭을 공군의 상징으로 통용되는 ‘보라매’로 정했다. 보라매는 ‘미래 자주국방을 위해 힘차게 비상하는 한국형 전투기’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번에 출고되는 시제기는 지난 2015년부터 KAI가 주관하여 국내 방산업체들과 협력 속에 개발 중인 국산 전투기이다.
최신 능동 전자 주사(AESA) 레이다와 통합 전자전 체계 등 개발 난도가 높은 주요 항전장비를 국산화(양산 1호기 기준 65% 목표)하여 갖출 예정이며, 지속적으로 국산화가 가능한 부품을 추가로 발굴하여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시제기 출고는 그동안 도면으로만 존재했던 전투기를 실체화시키고 성능을 평가하는 단계로 진입한다는 점에서 개발과정의 의미 있는 성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KF-21 개발에 성공하게 되면 우리 공군은 훈련(훈련기)부터 영공수호(전투기)까지 국산 항공기로 자주국방의 한 축을 담당하고 세계 속의 강군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고, 세계에서 8번째로 4.5세대 이상 초음속 전투기를 개발한 국가가 되는 것이다.
또한, KF-21 개발을 통해 국내 항공기술의 국제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고, 해외 전투기 개발과 성능개량 사업에도 참여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여 미래 항공우주시장의 선진 대열에 동참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오늘 출고된 시제기는 앞으로 지상시험 등의 과정을 거쳐 오는 2022년 첫 비행을 실시하고, 이후 2026년까지 시험평가를 진행하여 체계개발을 완료할 예정이다.
[시큐리티팩트=김한경 기자] 육군과 서울대학교, 한국무인이동체연구조합이 드론봇 및 지능형 무인이동체 발전을 위해 손을 맞잡았다.
육군교육사령부(교육사) 드론봇전투발전센터는 지난 9일 서울대학교 지능형 무인이동체 연구센터, 한국무인이동체연구조합과 컨소시엄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번 협약을 계기로 3개 기관은 2027년까지 약 300억 원의 예산을 투자해 육군참모총장배 드론봇챌린지대회 개최, 무인이동체 혁신 인재 양성 사업과 연계한 교육 프로그램 운영 등에 힘을 모을 예정이다.
또한 지능형 무인이동체 공동연구 및 학술교류, 무인이동체 인재 양성, 드론봇 산업 발전을 위한 행사 개최 등 다양한 분야의 교류·협력도 강화할 방침이다.
이날 협약식에는 교육사 서정원(군무이사관) 드론봇전투발전센터장, 서울대학교 김규홍 지능형 무인이동체 연구센터장, 한국무인이동체연구조합 최명진 이사장 등 각 기관의 주요 관계관이 참석했다.
서 드론봇전투발전센터장은 “교육사는 지능형 무인이동체 분야를 선도하는 양 기관과 긴밀히 협력하여 드론봇전투체계 조기 전력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시큐리티팩트=김한경 기자] 허건영 前 합참 전력기획부장(예비역 육군소장, 육사 44기)이 8일 국방기술품질원 제24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허건영 신임 원장은 취임사에서 "국방기술품질원은 새로운 도전과 기회에 직면해 있다"며 "국방과학기술과 방위산업의 발전 속도를 반영한 미래 비전을 설계하고 마스터플랜을 마련하여 국방기술기획과 품질관리 분야의 선도자 역할을 수행해 나가자"고 강조했다.
허 신임 원장은 경남 거제 출신으로 마산중앙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항공병과로 임관했다. 군 복무 중 한미연합사 지식정보처장·지휘통제실장, 합참 화력항공전력과장, 육군항공작전사령관, 합참 전력기획부장 등을 지냈으며 올해 초 전역했다.
허 원장은 헬기 조종사로 육군항공작전사령관을 거친 후 임기제 진급자가 통상 전역하던 관례와는 달리 합참 전력기획부장에 보직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이날 취임식은 코로나19로 인해 부·센터장 등 최소 인원의 주요직위자들만 참석하고, 전 직원들은 영상을 통해 시청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방기술품질원은 국방기술기획, 군수품 품질관리 등의 업무를 총괄하고 있어 국내 방위산업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기관이며, 원장의 임기는 3년이다.
[시큐리티팩트=김한경 기자] 방위산업기술진흥연구소(이하 연구소)는 지난 1일 정부 시험평가 공신력 강화와 방위산업 중소벤처기업 지원을 위해 국내 민간 시험분석 전문기업인 에이치시티(HCT)와 상호협력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HCT는 민간·국방 분야의 전자파·안전성·환경시험 등에서 우수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연구소와 HCT는 향후 무기체계와 부품 등에 대한 시험평가, 시험표준에 대한 연구 및 시험평가 계획 수립, 고장 원인 분석 및 개선 등의 업무를 협력하고, 시험시설 및 기술정보를 교류할 예정이다.
방산 부품·장비를 개발하는 중소·벤처기업의 효과적인 시험분석·평가 지원을 위해 이번 MOU를 체결한 연구소 측은 "그간 국방 운용환경에서 어렵고 복잡하게만 여겨졌던 시험 업무와 시험 결과 결함 원인 분석 및 설계 개선 지원 등이 더욱 체계적으로 이뤄질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지난 1월 국방기술품질원 부설 기관으로 출범한 연구소는 국방연구개발 사업에 대한 기획·관리, 방위산업 육성과 수출지원, 국산화 품목 발굴 및 시험평가 지원 등의 업무를 수행한다.
허봉재 에이치시티 대표는 "이번 협약을 통해 우리 기업이 국가안보에 기여함은 물론 국내 방위산업 기술 발전과 중소기업의 국제경쟁력 향상을 위해 적극 협력할 수 있게 되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앞으로 초일류 글로벌 시험 평가기관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임영일 연구소장은 "우리 무기체계의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시험을 통한 부품의 신뢰성 확보가 매우 중요하다"며 "향후에도 지역 거점별로 경쟁력을 갖춘 시험 인증기관과 업무협약을 지속해서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시큐리티팩트=김한경 기자]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지난달 31일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항공우주기술연구센터 설립을 위한 업무협약(MOU)를 맺었다.
이날 협약식에는 안현호 KAI 사장과 이광형 KAIST 총장 등 주요 관계자가 참석했다.
이번 협약은 우주·미래 비행체 기술관련 연구개발과 사업화에 대한 것으로, 미래 먹거리 사업 발굴은 물론 핵심기술 선점 및 원천기술 확보에 기여하기 위함이다.
KAI는 KAIST와 협력을 통해 올해부터 2023년까지 위성 시스템 소프트웨어(SW), 우주·미래 비행체 기술개발 등의 공동 연구 과제를 단계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이를 위해 양 기관은 산학협력에 필요한‘KAI-KAIST 항공우주기술연구센터’를 KAIST 안보융합연구원에 설치하기로 했다.
향후 KAI-KAIST 항공우주기술연구센터를 중심으로 학술, 기술정보 및 인력 교류 등 긴밀한 협력 활동도 추진될 예정이다.
KAI는 미래 항공우주 시장에 대한 기술선점 경쟁이 본격화됨에 따라 이번 협약을 통해 향후 우주·미래 비행체 분야 연구의 시너지 창출과 함께 사업 다각화 등을 기대하고 있다.
안현호 사장은 “KAI가 확보한 비행체 관련 체계통합 핵심기술과 KAIST가 보유한 우주·미래 비행체와 위성 SW시스템 등 미래 신기술을 융합하여 한 단계 발전시켜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광형 총장은“KAIST가 보유한 다양한 미래 기술을 바탕으로 KAI가 추진하는 우주·미래 비행체 연구 뿐 아니라 국내 과학기술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KAI는 국내외 연구기관 및 업체와 협력을 통한 신사업 진출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달 3일에는 이스라엘 IAI와 유무인 복합운영체계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어 11일에는 차세대 훈련체계 기술로 주목받는 합성전장훈련체계(LVC) 시장에 진출했고, 14일에는 무인체계 기술획득 추진을 위해 엘빗(ELBIT)과 손잡았다.
[시큐리티팩트=김한경 기자] 방위사업청은 1일 방위사업의 전문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지난 1월 설립된 방위사업교육원이 4월부터 본격적으로 방위사업 교육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방위사업교육원은 방사청 직원 위주의 교육에서 군인, 방산업체까지 교육 대상을 확대하였으며, 교육과정도 사업관리 중심의 수준별 맞춤형으로 3단계로 구분하는 등 전면 개편했다.
또한, 코로나19 장기화에 대응하기 위하여 E-콘텐츠 제작을 확대하고, 학습효과 제고를 위해 온·오프라인 교육을 병합하는 블렌디드 교육 도입 등 교육방법 다각화에 노력 중이다.
아울러 국방대학교, 민간대학 방위사업학과 등 여타 방위사업 교육기관과 네트워크 구축을 통하여 콘텐츠 공유, 강사 교류 등 방위사업 교육의 효율성 제고를 위한 협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특히, 방사청 직원의 개인 성장 및 사업수행을 지원하는 컨설팅 제도를 도입하고, 교육과 인사관리를 유기적으로 연계할 수 있도록 성장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하여 객관적인 데이터에 기반한 우수 인재 양성에 주력하고 있다.
성장 DB란 정량적 DB(개인별 교육 이수과정, 결과 등)와 정성적 DB(성과, 업무 역량, 개인 성향 등)를 지속적으로 기록·축적하고 이를 활용하여 조직에서의 성장 경로를 추천·관리해주는 종합 인재 개발 시스템이다.
한경수 방위사업교육원장은 “방위사업 규모와 수가 계속 증가하고 있고, 사업성격도 최첨단 무기체계 개발로 진화하고 있어, 방위사업 종사자의 역량이 국가 안보의 핵심”이라며, “방위사업 전문교육기관으로서 인재 양성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시큐리티팩트=김한경 기자] LIG넥스원이 국방 및 민수분야의 핵심 과제로 부각되는 로봇산업 분야의 기술 저변을 넓히기 위해 국내 산·학·연과 협력에 나서고 있다.
LIG넥스원은 한국로봇산업진흥원(KIRIA)과 '착용로봇 기술발전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맺었다고 지난달 31일 밝혔다.
두 기관은 착용로봇 인증 및 시험평가 기술 공동개발, 제품 디자인 기획 및 기술지원에 관한 상호협력, 기술 자문, 기술자료 정보 공유 등 다양한 협력 활동을 추진한다.
현재 착용로봇은 고령화와 노동인구 감소, 근로환경 개선을 위해 산업 전반에 걸쳐 도입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실제로 LIG넥스원의 근력보조 웨어러블 로봇이 인천공항 작업 현장에 시범 도입되기도 했다.
LIG넥스원 관계자는 "로봇산업은 작업 환경 개선뿐만 아니라 국방 및 민수분야의 핵심 과제로도 부각되고 있다"며 "착용로봇 생태계 강화를 통해 로보틱스 분야 전반에 큰 성과를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시큐리티팩트=김한경 기자] 군이 '아파치급' 대형공격헬기를 해외 구매를 통해 추가로 도입하고, 해군의 기뢰제거용 소해헬기는 국내 연구개발로 확보하기로 했다.
방위사업청은 지난달 31일 화상으로 제134회 방위사업추진위원회를 열고 대형공격헬기 2차 사업의 획득방안을 국외 구매로 추진하는 사업추진기본전략을 심의·의결했다고 밝혔다.
대형공격헬기 2차 사업은 지상군의 공세적 종심 기동 작전 수행을 보장하고 병력 위주의 지상 전력에서 입체 고속 기동이 가능한 전력 구조로 전환하기 위한 사업으로서 오는 2022년부터 2028년까지 총사업비 약 3조1700억원을 투입한다.
추가 도입하는 헬기는 36대 가량으로 입찰 등의 절차를 거쳐 최종 선정될 예정이며, 아파치급 헬기로 확정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현존 최고 성능의 공격헬기로 평가받는 아파치 헬기는 북한군 전차와 공기부양정을 저지하는 임무 등을 수행한다.
방사청 관계자는 "물가 상승과 시설, 탄약 등 일부 장비의 추가 등으로 총사업비가 1차 사업 때보다 늘었다"고 설명했다. 군은 2012∼2021년간 약 1조9000억원을 투입한 대형공격헬기 1차 사업을 통해 아파치 가디언(AH-64E) 36대를 전력화한 바 있다.
방추위는 또 해상 교통로와 상륙 해안에 설치된 기뢰를 탐색·제거하는 소해헬기 사업을 국내 연구개발로 획득하는 사업추진기본전략도 심의·의결했다.
소해헬기 사업은 2022년부터 2030년까지 총사업비 8천500억원이 투입되며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제작한 해병대 상륙기동헬기 마린온을 기반으로 한 국내 개발이 예상된다.
아울러 GPS유도폭탄(2천lbs급)(4차) 구성품 중 유도키트의 획득 방식을 상업구매에서 대외군사판매(FMS)로 변경하는 구매계획 수정안을 심의·의결했다.
GPS유도폭탄(2천lbs급)(4차) 사업은 현재 공군에서 운용 중인 GPS유도폭탄의 부족 소요를 확보하는 사업으로 2000년부터 2027년까지 약 4천700억원이 투입된다.
이날 회의에서는 광개토-Ⅲ 배치-2(신형 이지스 구축함 건조) 후속함 건조계획안도 심의·의결됐다. 선도함은 지난달 착공 후 건조 중이며 군은 2028년까지 약 3조9200억원을 투입해 총 3척을 건조할 계획이다.
이 밖에 군이 운용 중인 K1E1 전차의 성능 개량을 위한 사업추진기본전략 수정안과 체계개발기본계획안, 대공·대함 위협으로부터 함정의 방어능력을 확보하는 근접방어무기체계-Ⅱ 사업의 체계개발기본계획안을 각각 심의·의결했다고 방사청은 덧붙였다.
[시큐리티팩트=김한경 기자] 육군 특전사용 차기 기관단총 관련 기밀이 유출된 정황이 포착돼 군사안보지원사령부(이하 안보사)가 수사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육군 특전사용 기관단총이 40년만에 교체가 추진되는 가운데 안보사는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방산업체 A사에서 임원으로 재직 중인 B씨 등을 수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30일 군 관계자 등에 따르면, A사는 지난해 6월 방위사업청이 육군 특수전사령부의 주력화기인 K1A 기관단총을 대체하기 위한 차기 기관단총 연구개발 관련 우선협상 대상 업체로 선정돼 사실상 계약 수주가 유력한 상황이었다.
안보사는 이 과정에서 예비역 중령인 임원 B씨가 차기 기관단총의 군 작전요구성능(ROC) 등 기밀을 사전에 입수한 정황을 포착해 수사를 벌이고 있다. 지난해 7월 이미 A사에 대한 압수수색도 실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안보사는 예비역 중령인 B씨가 기밀을 빼내는 과정에서 현역 장교들이 연루됐는지도 함께 수사 중이며, 수사가 마무리되면 B씨 및 관련자들을 군 검찰 및 민간 검찰에 송치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방사청 관계자는 "해당 업체가 우선협상 대상 업체로 선정된 건 관련 법령과 절차에 따른 것"이라면서도 "향후 수사 결과와 법원 판단 결과를 고려해 해당 사업을 잘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시큐리티팩트=김한경 기자] 한화시스템은 국내 독자기술로 개발돼 발사에 성공한 ‘차세대중형위성 1호’ 탑재체 개발에 참여했다고 23일 밝혔다.
한화시스템은 항공우주연구원 주관으로 개발한 차세대중형위성 1호 광학 탑재체의 카메라 제어부, 초점면 전자부 등 핵심부품을 개발해 국산화에 성공했다.
항공우주연구원은 500㎏ 중형급 위성을 만들기 위해 탑재체의 무게를 150㎏로 줄었는데, 한화시스템은 이 과정에서 탑재체 핵심부품의 소형화·경량화에 주력했다고 설명했다.
한화시스템은 차세대중형위성 1호 탑재체 개발 참여 외에도 본체와 탑재체 무게가 100㎏ 미만인 초소형 SAR(고성능 영상레이더) 위성 체계도 개발하고 있다고 밝혔다.
해상도 흑백 0.5m, 컬러 2.0m급 광학카메라 등이 탑재된 차세대중형위성 1호 개발에는 국내 항공우주기업들이 참여했으며, 앞으로 6개월간 초기운영 과정을 거칠 예정이다.
[시큐리티팩트=김한경 기자]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자사의 미국법인이 글로벌 항공기 엔진 제조사인 P&W로부터 최고의 파트너로 인정받는 '골드'(Gold) 등급을 획득했다고 11일 밝혔다.
이번 인증은 지난 12개월 동안 단 1건의 품질 문제없이 납기를 준수하고, 지속적인 품질 개선활동을 벌인 파트너사에 수여된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미국법인장인 유동완 전무는 "지속적인 무결점 품질과 완벽한 고객 지원을 위한 임직원의 헌신적 노력을 인정받아 기쁘다"며 "P&W의 전략적 파트너로 확실히 자리매김한 것은 물론 사업 확대를 위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P&W사는 최근 최첨단 항공기 엔진(PW-1100G-JM GTF)에 탑재되는 고압터빈 케이스 물량을 한화에어로스페이스에 확대 주문하기로 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지난 1979년 가스터빈 엔진 창정비 사업을 시작으로 항공기 엔진 사업에 진출해 올해까지 9천대 이상의 엔진을 누적 생산한 국내 유일의 가스터빈 엔진 제조기업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세계 3대 엔진 제조사인 P&W와 롤스로이스, GE로부터 부품 공급 관련 대형 수주를 따내 현재 수주 잔고가 약 24조원에 달한다.
[시큐리티팩트=김한경 기자]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이스라엘항공우주산업(IAI)과 유무인 복합운영체계(MUM-T, Manned-Unmanned -Teaming)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고 지난 4일 밝혔다.
협약의 주요 내용은 국산 소형 무장헬기(LAH)에 IAI가 개발한 무인기를 탑재해 유·무인 복합운영체계를 공동 시현하는 것으로, 두 기관은 구체적 방안을 마련해 연내 이를 시현할 계획이다.
KAI의 체계종합기술과 IAI의 무인체계 시스템 역량이 결합하면 LAH 헬기 임무 능력을 확대하는 새로운 개념의 방위체계가 구축될 것으로 두 기관은 기대했다.
한국 육군도 현재 유무인 복합체계 추진을 준비 중으로, 신속 시범 획득사업 등 조기 전력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LAH와 국내 개발한 무인항공기(UAV)를 연동하는 것으로 헬기에서 무인기를 조종 통제, 영상을 활용하는 방안이 유력시되고 있다.
향후에는 유인헬기 내부공간에 캐니스터(발사관) 발사형 드론을 탑재해 군집·자율비행하며 드론에 내장된 광학 추적기로 정보수집 및 목표지정, 타격까지 가능한 수준으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유무인 복합운영체계는 적은 인원과 비용으로도 전투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어 미래 성장성도 높을 것으로 KAI 측은 예상했다.
KAI는 유인 항공기와 무인기를 동시에 체계 개발할 수 있는 국내 유일한 기업으로서, IAI와 공동협력 분야를 찾아 협약을 체결하게 됐다. 그동안 KAI는 IAI와 2019년 G280 주익 생산, 2020년 G280 동체 생산 계약을 체결해 협력관계를 맺어왔다.
보아즈 레비 IAI 사장은 "KAI와의 전략적 협력은 한국의 항공 및 방위산업에 참여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며 양사의 긴밀한 협력을 강조했다.
안현호 KAI 사장은 "유무인 복합운영체계 기술을 축적해 제품 다각화와 신규 수요 창출을 통해 수출 사업화 발판을 마련할 것"이라며 "미래 산업분야의 기술 확보를 위해 글로벌 선진업체들과 협력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시큐리티팩트=김한경 기자]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자회사인 한국항공서비스㈜(이하 KAEMS)가 국내 LCC 항공기는 물론 정부기관의 헬기 정비까지 수행한다.
KAEMS는 지난달 22일 중앙119구조본부와 EC-225 정비 계약을 체결했고, 23일에는 티웨이항공과 제주항공의 민항기 21대의 정비 계약을 체결했다.
그동안 해외업체가 독점해 오던 EC-225 헬기정비를 국내업체가 맡은 것은 KAEMS가 처음이다. 헬기운영 기관과 원활한 소통은 물론 정비 비용 절감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KAEMS는 2019년 B737 기종에 대한 미국 연방항공청(FAA) 정비 인증을 받은 데 이어 올해 상반기 안에 A320 계열 항공기에 대한 인증도 확보할 계획이다.
또한, KAEMS는 현재 수행 중인 해병대와 경찰청의 수리온 정비는 물론 연내에 해양경찰청, 산림청 등과도 직접 계약을 통한 정비 물량을 지속적으로 확보할 계획이다.
KAEMS 고이근 상무는 “미국 FAA 정비인증 기종의 확대와 함께 태국에 정비인증(AMO)을 신청하여 심사 중”이라며 “2021년을 해외 정비물량 확보의 원년으로 삼을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최근 우리는 요소수 사태를 겪고 있다. 요소수를 중국에 약 98% 의존하고 있는 이 상황이 불안하다. 중국은 우리의 요소수 사태를 보면서, 한국은 다루기 쉬운 나라라고 판단할 것이다. 한국에는 요소수 같이 중국 의존도가 90% 이상인 폼목이 27개나 되고, 80% 이상인 품목도 1,850개나 된다고 한다.
중국의 한 지방언론은 ‘요소수 수출 제한을 약 1개월 전에 통보했는데, 한국만 유독 지금 왜 이 난리인가’라고 한국정부의 무능을 지적했다. 정부가 능력이 없어 엉뚱한데 정신이 팔려있으면 다루기가 매우 쉽다. 게다가 정치권마저 저자세를 취한다면 중국이 이런 나라를 대등한 상대로 존중해 줄지 의문이다. 중국을 탓하기 앞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요즈음 우리 학계나 사회 일각에서 ‘중국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이 일고 있다. 安美經中(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과 협력)이라는 모호한 개념에서 벗어나 급격하게 변화해 가는 국제정세 와중에 점차 우리에게 험악하게 다가오는 중국을 제대로 보고 대책을 모색해보자는 흐름이다. 필자도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여 간단하게 몇 마디 하려고 한다.
우선 중국이 한국을 어떻게 보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필자의 견해이다. 첫째, 중국 입장에서 한국은 전략적 요충이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이루기 위해서는 한국을 한미동맹에서 이탈시켜 중화 질서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 경우 중국이 얻는 이점은 ① 미·중 패권 경쟁에서 미국의 동맹을 이탈시킨 첫 사례로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체제보다 중국식 공산당 통치방식의 우월성을 입증할 수 있다. ② 미국의 대중 포위망을 뚫을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일부 정치권이 한미연합훈련 축소 및 중단 문제를 거론하는 등 한미동맹이 예전 같지 않다. 이 간격을 중국이 파고들면 주한미군 위상에도 변화가 있을 수 있다.
③ 한미동맹이 흔들리면 미일동맹도 틈이 생길 수 있다. 일본은 미일동맹을 안보의 기축으로 삼고 있지만 결코 중국과 적대적으로 되기를 원치 않는다. 일본 전 수상 스가(菅義偉)는 쿼드가 어느 특정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것에는 반대한다고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중국이 주는 경제적 이점이 계속 커진다면 일본의 고민 또한 커질 것이다.
둘째, 중국이 한국을 장악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정치권을 친중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필자가 중국 공산당 한국담당 책임자라면 정치권부터 조용히 접근하여 정치인들과 친분을 다진 다음, 한중관계 발전을 명분으로 중국에 더욱 우호적인 활동을 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이른바 ‘친중공정(親中工程)’이다. 물론 어느 나라든 다 하는 외교활동이기는 하다. 중국이 적극적이고 집요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런 중국에 우리는 맞받아쳐야 한다. 최근 ‘神은 멀리 있고 중국은 너무 가까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 정의롭고 공정한 절대자 神보다 고압적이고 험악한 중국이 우리에게 너무 가깝다는 의미인데, 여기서 神은 물론 미국은 아니다. 神보다 가까이 있는 중국과 함께 살아가는 문제가 우리의 고민이다, 필자는 북한이 중국을 대하는 태도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은 중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핵개발을 추진했다. 북한은 상황 변화에 따라 핵무기로 중국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도 북한의 핵탄두가 자신들을 향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 북한은 2015년 12월 모란봉 악단의 베이징 공연을 전격 취소하고 철수시킨 바 있다. 김정은은 2017년 11월 시진핑 특사 송타오(宋濤) 공산당 대외연락부장 면담을 거부했다.
중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아도 “너희들이 필요해서 우리한테 주는 거 아니냐. 싫으면 주지마라” 하고 오히려 큰소리이다. 이런 배경에는 북한에게는 미국과 언제든지 손잡을 수 있다는 비장의 카드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한은 중국에게 한목소리를 낸다. 그래서 북한에는 중국이 북한 내부를 분열시키거나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이다.
북한의 태도를 참고하여 필자는 다음 세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현재 우리 국민의 중국 비호감이 75%이다. 국민들은 중국의 의도와 행동을 알고 있다. 정치권이 국민들의 여망을 반영하여 중국을 상대해야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전 국민이 한 목소리로 들고 일어났던 그 모습이 필요한 시점이다. 물론 이 때에 중국은 한발 뒤로 물러났다.
둘째, 상호주의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사드 3불을 약속하라고 하면 중국에게 너희 미사일은 한반도를 겨냥해서는 안 된다고 해야 한다.
중국이 우리 대통령 특사를 시진핑 옆에 홍콩행정장관이 보고하는 자리에 앉혔다면, 우리는 중국 외교부장 왕이(王毅)도 그런 자리에 앉혀야 한다. 왕이 부장이 일부러 약속시간에 늦게 도착하면 우리 외교장관은 더 늦게 나타나서 그를 기다리게 해야 한다. 대통령 수행기자가 베이징에서 폭행당했다면 서울에 있는 중국 기자도 동일하게 폭행할 수 있어야 한다. 최소한 위협이라도 줘야 한다.
시진핑이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라고 발언했다면 우리는 만주지방과 베이징 외곽까지 우리 영토였다고 받아쳐야 한다. 상호주의를 통해서 한중관계는 정상화될 것이다. 큰 나라와 작은 나라의 관계가 아니다. 국가의 주권과 정체성, 민족의 자존심을 두고는 한 치의 양보도 있어서는 안 된다. 중국에 우호적으로 대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다음 정부의 결기를 기대한다.
셋째, 중국을 상대할 많은 전략적 수단을 개발해야 한다. 한미동맹도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 중 하나이며, 반도체를 포함한 첨단기술도 수단이 될 수 있다.
필자가 중국에 있을 때, 당시 한국대사관 고위인사는 “중국이 한국을 대할 때 우리 뒤에 있는 미국을 보고 대우해주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바로 무시당할 것”이라고 한 말이 요즘 새삼 떠오른다. 중국이 호주의 철광석과 석탄 수입을 중단하자 오히려 중국의 피해가 크다고 한다. 우리도 중국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첨단기술의 초격차를 유지해야 한다. 이것이 없다면 상호주의도 공허하다.
3년 전, 한·중 국제세미나에서 중국의 한반도 전문가와 편안히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필자는 그로부터 “너희 한민족은 정말 억세고 기가 세다. 왜 그런가”라는 질문을 받은 기억이 있다. 그가 말하는 한민족은 물론 북한과 우리를 함께 의미했을 것이며, 앞으로도 이런 질문을 계속 받고 싶다.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마무리한다. 그동안 관심을 가져주었던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새로이 충전해 더 좋은 내용으로 다시 만날 것을 약속드린다.
◀ 임방순 프로필 ▶ 인천대 외래교수,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인들이 환호하는 독일 통일의 장면을 보면서 통일된 한국이 바로 우리의 미래 모습일 것으로 생각했다. 통일한국 시대를 맞이하는 것이 이 시대 한민족의 최대 바램일 테지만 우리는 통일은 고사하고 남북한 대립과 갈등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필자는 ‘통일의 여신이 미소를 보이며 우리 옆을 지나갈 때, 우리는 그 여신을 잡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라는 어느 통일문제 전문가의 평가에 동의한다. ‘우리는 스스로 통일을 이룰 준비가 되어있는가’라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숨은 중국’을 들여다보았다.
한반도 분단 원인은 두 개의 자물쇠가 잠겨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민족 내부의 이념 갈등이라는 자물쇠, 다른 하나는 민족 외부의 강대국 간 대립이라는 자물쇠다. 한반도가 통일되기 위해서는 이 두 분단의 자물쇠를 풀 수 있는 두 개의 열쇠가 필요하다. 즉, 민족 내부의 이념 갈등을 푸는 열쇠와 민족 외부의 강대국 간 이해 조정이라는 열쇠이다.
오늘 이야기는 외부 열쇠 중 한 부분인 중국에 대한 것이다. 중국은 한반도 통일에 대해서는 원론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나, 통일과정 및 통일 이후 한국이 과연 자신들에게 유리한가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있다. 우선 한반도 통일과정이다. 이에 대한 중국의 공식적 입장은 1992년 8월 24일 채택된 ‘한중 수교 공동성명’에 나타나 있다.
이 성명 제5항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한반도가 조기에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이 한민족의 염원임을 존중하고, 한민족에 의해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을 지지한다”라고 언급함으로써 한반도의 자주적·평화적 통일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자주를 강조하는 이유는 통일과정에서 외세, 특히 미국의 개입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개입해 한반도가 통일된다면 미국은 한반도를 거점으로 중국에 위협을 가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리고 평화적 통일을 강조하는 이유는 통일 과정에서 중국의 이익이 침해받을 가능성을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중국은 한반도에서의 분쟁 혹은 불안정성의 격화는 일본의 군사적 역할 확대를 유도하고, 미·일 동맹을 강화하는 구실로 작용하며, 미국의 항구적인 동북아 주둔과 개입을 가능케 하는 명분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다음은 통일 후, 통일한국의 모습이다. 중국은 자국의 이익에 반하는 통일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 통일 후에는 미국을 위시한 해양세력이 한반도에서 현재의 한미동맹처럼 중국을 위협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중국은 ‘통일한국이 자국에 도움이 된다’라는 확신이 있을 때, 우리에게 협력할 것이다. 이러한 중국에 대해 다음 3가지 사항을 고려해 협의하고 합의를 해야 통일의 길로 나갈 수 있다.
첫째,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의 역할을 조정해야 한다. 한반도 통일에 대해 중국이 동의하거나 최소한 방해를 하지 않게 하려면 중국이 가장 민감하게 여기는 한미동맹 존속과 주한미군의 역할에 대한 조정이 필요하다. 중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통일을 이룬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현재 과도히 의존하고 있는 한미동맹의 성격을 점진적이고 쌍방 대등한 수준으로 조정해야 한다. 그 출발점은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이다. 이어서 남북통일 이후 주한미군은 한반도에 존속하되 그 임무는 중국 견제에서 벗어나 한반도 평화를 보장하고 유지하는 평화유지 기구로서 변화해야 할 것이며, 이때는 미군보다 UN군 입장이어야 한다.
이와 관련, 한미관계에 정통한 정경영 교수는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은 한반도 통일 후에도 계속 유지하되, 이 지역에서 평화체제를 관리하면서 전쟁을 방지하고 외세의 개입과 각축을 차단하는 역할로 변경되어야 할 것”이라며 그 이유로 “한반도 통일 후, 한미동맹 해체와 주한미군 철수는 동북아 지역의 힘의 공백을 초래하여 전쟁이 발생할 위험성이 커지고, 일본과 러시아 등 외세가 각축을 벌일 수 있다”라고 견해를 밝혔다. 둘째, 중국이 북한을 완충지역으로 삼았던 지정학적 이해를 고려해야 한다. 통일한국이 해양세력의 거점이 되면 한반도에 진출한 해양세력이 반드시 중국으로 향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중국은 잊지 않고 있어 군사개입 가능성이 높다. 과거 임진왜란, 청일전쟁, 6,25 전쟁 참전이 그 사례이며, 미래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재는 북한을 해양세력의 진입을 막아주는 완충지역으로 생각하고 있어, 중국에게 북한은 전략적 자산이다.
셋째, 통일한국은 중국에 우호적이어야 한다. 중국은 주변에 적대적인 통일국가의 출현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통일한국이 중국에 우호적일 것이라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이 세 가지 과제는 중국뿐만 아니라 미국의 전략적 이해와도 긴밀하다. 바로 이 지점이 우리가 한반도 통일과정에서 중국과 미국의 이해를 조절해 나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통일문제에서 중국을 바라보면 중국이 제일 중요한 것 같고, 미국만 쳐다보면 미국이 절대적 영향력을 쥐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우리에겐 양국이 모두 중요하며, 양국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되 미국과 협의 및 합의가 우선임을 잊어선 안 된다. 서독도 통일 과정에서 미국과 신뢰를 쌓았기 때문에 미국이 나서 영국이나 프랑스의 독일 통일 반대 의견을 무마시켰고 소련과 협상을 할 수 있었다. 우리도 다를 바 없다.
필자가 중국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로부터 “너의 나라 통일이 언제 가능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중국인 특유의 모호한 화법으로 답변을 대신했던 경험이 있다. 合久必分 分久必合(통일된지 오래되면 분열되고, 분열된지 오래되면 통일이 된다). 즉 시간이 지나면 통일이 되는데 아직 충분히 시간이 지나가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氷凍三尺 非一日之寒, 三尺氷解 非一日之暖(하루 추웠다고 빙하가 되는 것이 아니듯이 하루 따뜻했다고 빙하가 녹는 것은 아니다). 빙하를 녹이려 하는 우리의 노력이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반도 통일을 위한 국제정치 열쇠도 결국 우리의 열망과 노력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최근 중국은 러시아와 군사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사상 최고수준이라고 한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거의 매년 시행되는 육·해·공군의 연합훈련이 대표적이다. 육군은 올해 8월 9일부터 13일까지 중국의 닝샤후이족(寧夏回族)자치구 칭퉁샤(靑銅峽) 전술훈련기지에서 사상 최대의 ‘서부연합-2021 연합훈련’을 실시했다.
명칭은 연합훈련이었지만 과거에는 각각의 지휘체계와 장비로 단독 훈련을 실시한 이후, 훈련 경험과 성과를 공유하는 수준이었다. NATO와 같이 단일 지휘통제 체계와 무기, 장비가 하나로 통합된 연합훈련이 아닌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훈련은 중·러 양국군을 NATO와 같이 혼합 편성했고, 특히 연합지휘본부를 편성해 양국 언어로 지휘정보시스템을 공동 사용했다.
또한 초청을 받은 쪽인 러시아군이 작전회의에 참가해 훈련 전 과정을 함께 했으며, 연락체계를 구축해 필요시 수시로 임무조정 회의를 진행했다고 한다. 중국군 기관지 해방군보는 “이번 훈련에서 각종 데이터를 공유하고, 작전 규칙을 통일한 것은 향후 있을 수 있는 양국군의 연합작전에 기초를 수립하는 것이었다”라고 보도했다.
중국 해군은 2012년 4월 중국 산둥성 칭다오(靑島) 일대에서 ‘해상연합-2012’라는 이름으로 러시아와 연합훈련을 처음 실시한 후 최근까지 매년 1∼2회씩 대양에서 전투수행 능력을 배양하는 연합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연합지휘부를 편성해 공군 지원 하에 해상 및 공중에서 적 격멸, 잠수함 사고 구조훈련, 해군육전대(해병대)의 상륙훈련 등 훈련내용은 다양하다.
양국 해군의 연합훈련에서 주목할 사항은 첫째, 중국 해군이 지중해(2015년)와 발트해(2017년)까지 진출하는 등 활동 범위가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중국이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을 추진하면서 원양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의도가 있고, 러시아가 유럽에서 NATO군과 충돌 시 중국군의 지원 가능성을 과시한다는 점이다.
둘째, 동중국해 및 남중국해에서 연합훈련은 해당 지역에서 영토분쟁 발생 시 중·러 연합작전의 가능성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올해 중국과 러시아는 블라디보스토크 부근 해역에서 3일간 해상연합훈련을 하고 일본 쓰가루 해협을 통과한 후 일본 열도를 따라 남하하여 일본을 긴장시킨 바 있다.
중국과 러시아 공군도 2019년 7월과 2020년 12월, 한반도 부근에서 우리의 방공식별구역을 넘나들면서 연합훈련을 했다. 2020년 12월에는 러시아가 Tu-95MS 전략 폭격기, A-500 공중조기경보기(AEW&C)와 Su-35 전투기 등 15대와 중국은 H-6K 제트형 전략 폭격기 4대 등 총 19대가 참가해 동해의 독도 상공과 남해의 이어도 상공을 왕복했다. 러시아 Su-27 전투기가 중국 H-6K 폭격기를 호위하는 훈련도 했다.
이러한 중·러의 공중정찰 활동은 한·미·일 안보태세 또는 결속력을 시험하고, 양국의 군사협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러 국방부는 “비행 중 양국 군용기는 국제법 규정을 엄격히 준수했으며 타국 영공에 진입하지 않았다”고 발표하면서 “양군의 전략협력 수준 및 연합행동 능력을 높이며 전 세계의 전략적 안정을 위한 훈련”이라고 밝혔다. 이어 “양군의 연례협력계획에 포함된 프로젝트로 제삼자를 겨냥한 것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이외에도 중국은 러시아로부터 무기와 군사과학기술을 도입하고 있으며, 상하이 협력기구를 중심으로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관련 국가들과 다자안보협력도 강화하고 있다. 이렇게 양국이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이유는 ‘미국 견제’에 국익이 일치되기 때문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모두 미국으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다. 미국은 중국을 가장 위험한 도전 세력으로 규정하고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중국을 억제하고 있고, 러시아는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병합한 이후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제재를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과 러시아는 손잡고 함께 미국에 대항하고 있는 국면이다.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과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2019년 양국 수교 70주년 행사에서 중·러 관계를 ‘신시대 전면적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新时代中俄全面战略协作伙伴关系)로 격상하고, 최상의 관계임을 과시했다. 중·러의 군사 협력은 ‘미국 견제’라는 양국의 공동목표에 큰 변화가 없는 한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다.
우리에게 이 의미는 한반도 주변 공중과 해상에서 중·러의 공군기와 군함들을 더 자주 마주칠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중·러 양국은 이와 같은 군사협력은 물론이고 각종 국제정치 문제에서도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우리의 사드 배치 문제. 북한 핵 문제, 미국의 한국이나 일본에 중거리 미사일 배치 문제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미·중 패권 경쟁보다 잘 보이지 않는 다른 흐름을 간파해야 한다. 그 흐름은 중국이 러시아와 군사협력을 강화하고, 미국이 일본 및 NATO와 연계를 강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미·일·NATO 對 중·러 구도가 대립하는 첨단에 위치하고 있다는 현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전략적 모호성도 하나의 방법은 되겠지만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조선이 망해가던 시기인 1885년 영국이 거문도를 2년간 점령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이 의미를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조선은 국제정세가 변화하는 와중에서 결국 나라를 잃었다.
오늘날의 국제정세와 아태지역 정세는 조선 말기와 유사하다. 지금의 우리는 조선 말기와 다르다고 안심해서는 안 된다. 주변국의 국력이 우리보다 강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동중국해 정세 변화는 다음 3가지 이유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첫째,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를 대상으로 경쟁하는 중국과 일본의 모습은 청일전쟁을 연상케 한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전리품으로 대만과 그 부속도서를 할양받았고,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확대했으며 만주 진출의 기회도 잡았다. 패배한 중국은 한반도에서 물러났을 뿐만 아니라 중국내륙도 일본의 침략을 받았다. 이때처럼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 승자가 동북아의 패자가 될 것이고, 그 영향은 곧바로 한반도에 미칠 것이다.
둘째, 러일 전쟁 전후의 상황을 연상케 한다.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 문제는 일본과 중국 간 영토분쟁이지만, 미국도 개입돼 있다. 중국은 동중국해를 거쳐 태평양으로 진출하려고 한다. 궁극적으로 제1도련선 안쪽을 내해(內海)로 하고 제2도련선에서 제해권을 장악해 서태평양까지 자기 세력권으로 확장하려는 것이다. 미국은 이런 중국의 의도를 허용하지 않는다.
미국은 중국의 태평양 진출 시점이 곧 미국의 세기가 저물어 가는 신호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당시 패권국 영국이 일본과 1902년 영일동맹을 맺었던 모습과 유사하다. 그 결과 일본은 해양세력인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고 이어서 조선을 병탄했다. 다시 이 지역에는 조선 말기와 동일하게 미국은 물론이고 영국과 프랑스가 일본을 돕고 있다.
셋째, 동중국해 문제는 중국과 일본 양국이 외교적으로 타협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중국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해서는 빼앗긴 영토를 되찾아야 하고, 일본을 제압해야 한다. 중국이 ‘대만 해방’ 문제를 어떠한 방식으로 정리하고 나면, 그 다음 목표는 잃어버린 영토 댜오위다오가 될 것이다.
중국은 1872년 일본에 공식적으로 병합된 오키나와에 대해서도 이 지역이 과거 류쿠 왕국(琉球王國) 시대에는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공식적인 문제 제기는 아니지만 일부 중국인은 오키나와도 과거에 중국의 일부였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해서는 과거의 세력권을 회복해야 한다. 오키나와까지 염두에 두는 중국에게 ‘댜오위다오’만큼은 타협의 여지가 없다.
일본도 ‘센카쿠 열도’를 실효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고, 영토 문제에 타협의 여지를 남긴다면 국내적으로 거센 비판에 직면해 정권이 교체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또한 러시아와 한국에 대해서도 영토 문제에서 수세에 몰릴 것이다.
동중국해 영토 분쟁에서 미국의 입장이 중요하다. 미국은 센카쿠 열도가 미·일 안보조약 5조의 적용 대상이긴 하지만, 중·일 간 영토 분쟁 개입에는 신중한 입장이다. 미국은 1971년 오키나와 반환조약에 따라 센카쿠 열도를 이양할 때 일본의 주권(sovereignty)이 아닌 ‘시정권(administration)’만 인정했다.
그 때문에 미국은 센카쿠 열도에 대한 일본의 주권 주장에는 중립적이다. 따라서 “미국이 센카쿠 열도가 미·일 안보조약 적용 대상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실제로 군사력을 가동하려는 의도보다는 중국의 더 과격한 행동을 억제하려는 차원”이란 분석이 설득력이 있다.
중국이 댜오위다오를 되찾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부대는 ‘해군육전대’이다. 중국은 해군육전대 사령부를 창설하고 현재 2만명 수준에서 4만명 또는 최대 10만명까지 확대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해군육전대’는 대만 상륙작전을 위해 남해 함대 예하에 약 2개 여단 규모로 편성돼 있었는데, 남중국해 인공섬 방어문제와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 분쟁에 대비해 점차 증강되는 추세다.
상륙장비도 도크형 상륙함(LPD)과 헬기 탑재 강습상륙함(LHD)은 물론 기동상륙플랫폼(MLP)과 공기부양정(LCAC)에 이르기까지 미 해병대 수준에 육박하고 있다. 상륙 능력도 25,000t 급의 상륙함에 4척의 공기부양정, 4대의 대형수송헬기를 탑재하여 바다와 하늘에서 동시에 800여 명을 상륙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일본은 센카쿠 열도에서 중국과 무력충돌이 벌어지면, 중국군이 단시간 내에 센카쿠 열도를 점령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일본의 대책은 두 가지이다. 첫째, 탈취당하기 전에 신속하게 병력을 전개시켜 섬을 지켜내는 작전과, 둘째, 탈취 당했다면 즉시 탈환하는 작전을 시행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전담부대로 일본은 2018년 ‘수륙기동단’을 창설했다.
이 부대 창설 이전에도 일본은 2005년부터 미 해병대와 연합해 작전지역으로 신속히 전개하는 능력 숙달 및 섬 탈환 훈련을 하고 있었고 이제 자체 능력을 강화한 것이다. ‘수륙기동단’은 2100명 규모로 수직이착륙기 ‘오스프리’와 수륙양용차 ‘AAV7’ 등을 주요 장비로 갖추고 있다. 앞으로 ‘수륙기동단’ 대원 규모를 3000명 수준으로 늘리고 1개 연대는 오키나와에 배치할 계획으로 알려져 있다.
전문가들은 동중국해에서 중국과 일본의 무력 충돌은 양국의 전담부대인 중국의 ‘해군육전대’와 일본의 ‘수륙기동단’의 싸움으로 국한될 가능성이 크고 미국의 개입도 제한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중국이 댜오위다오 문제를 정리하고 나면 그 다음 목표는 한반도가 될 수도 있다. 일본은 또 어떤가. 일본은 독도가 자신들의 영토라는 주장을 더욱 크게 외치고 있다.
우리가 한 눈 파는 사이에 어느 날 갑자기 이어도는 중국의 ‘해군육전대’에 의해, 독도는 미국의 묵인아래 일본의 ‘수륙기동단’에 의해 점령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너무 지나친 것일까? 그러나 군사전략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최근 남중국해의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는 사건 2건이 있었다. 하나는 중국이 올해 8월 남중국해에 진입하는 모든 외국 선박의 신고를 의무화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을 위시하여 일본, 영국, 캐나다, 네덜란드, 뉴질랜드 등 6개국이 이 지역에서 항모 4척까지 동원하며 연합해상훈련을 한 것이다.
중국은 남중국해의 영유권을 확실히 하기 위한 조치를 계속하고 있고, 미국은 동맹국들과 연합해 이 지역에서 자유의 항행작전 등 훈련을 강화하고 있다. 그러니 갈등과 긴장이 고조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직접 이해 당사자인 동남아 국가들의 동향이 주목되고, 우리 또한 선택을 해야 하는 진실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
중국은 한나라 (AD 1~3세기) 시대부터 남중국해에서 어업을 해왔고 청동기가 출토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영유권의 근거로 삼고 있다. 남중국해 지역은 중국에게 전략적 가치가 크며, 특히 군사안보 측면에서 중국남부 지역을 보호하는 완충구역이며, 중국 해군이 태평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바시 해협(대만-필리핀 사이)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한국과 일본, 대만의 석유 수송로로 이 지역을 장악하면 미국의 동맹국 한국과 일본 그리고 대만에 압력을 가할 수 있다. 게다가, 자원의 보고여서 어업자원과 천연가스는 물론 구리, 알루미늄, 망간 등 각종 광물이 풍부하고, 석유 또한 최대 1,000억 배럴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은 1974년 베트남과 무력분쟁을 통해 남사군도를, 1988년 필리핀의 서사군도를 점령했다. 그 후 2013년부터 이 지역 7개의 작은 섬들을 인공적으로 확대해 군사시설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 중 메이지자오(美濟礁, 미스치프)에는 H-6J 전략폭격기 이착륙이 가능한 약 3㎞ 활주로와 격납고, 방공포, 레이다 시설과 전파교란 장치 등을 설치했고, 일부 지역에 전투기와 전폭기를 배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2012년 남중국해 서사군도에 있는 융싱도(永興島)에 싼사시(三沙市)를 개설하고 산하에 서사군도 일대를 관할하는 시사구(西沙區)와 남사군도를 관할하는 난사구(南沙區)를 설치했다. 이어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호텔·박물관·병원·은행 등 편의시설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또 크루즈 관광도 추진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는 2012년부터 자국민 여권에 남중국해와 대만을 표기하고 있다. 영유권을 기정사실화는 조치들이다. 중국이 미국에 대항하는 논리는 대략 세 가지다. 첫째는 미국이 남중국해와 관련 없는 역외세력이므로 간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둘째로 중국이 하와이나 캘리포니아 인근에서 군사작전을 하면 미국은 가만히 있겠냐는 것이며, 셋째로 남중국해는 중국의 주권이 미치는 영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은 중국이 국제법을 위반하고 남중국해를 내해(內海)화 하고 있으며 이 지역에 ’모래장성‘을 쌓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중국의 세력 확장을 억제하고 있다.
베트남과 필리핀 또한 영해를 침범당하고 섬을 점령당한 상태라서 중국의 일방적 조치에 강경한 입장이다. 이들 국가는 중국을 향해 석유시추선 철수, 자국 어선 침몰 및 강제 퇴거 조치 등에 계속 항의하고 있다. 또 미항모의 다낭항 입항을 받아들였고, 미군의 자국 배치에 합의하는 등 연대도 추진 중이다. 게다가 필리핀은 2016년 헤이그의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은 법적 근거가 없다’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아세안 10개 회원국은 남중국해 이슈에 내부적으로 분열돼 있다. 라오스, 캄보디아 및 미얀마는 중국에 동조하는 입장이고,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는 미국의 개입을 경계하고 있으며, 태국과 싱가포르는 대체로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아세안 국가들은 2018년 남중국해에서 우발적 군사충돌을 막기 위한 행동준칙(COC) 초안에 합의했다. COC는 2002년 채택한 남중국해 분쟁 당사국 행동선언(DOC)의 후속조치이다. 그렇지만 초안 내용이 공개되지 않았고, 협상시한도 명시돼 있지 않다. 이른바 아무 법적 근거도 없는 신사협정 초안에 불과한 것이다. 중국의 영향력이 강하게 반영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이 지역의 정세 변화는 우리에게도 중요하다. 첫째는 자원 수송로가 위협받기 때문이고, 둘째는 남중국해를 장악한 다음 향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와는 서해 EEZ와 이어도 문제가 있는데, 중국은 영토분쟁에서 양보한 사례가 거의 없다. 셋째는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과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사이에서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중국해 문제를 유의 깊게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외국군대는 언젠가 돌아가기 마련이다. 북한 땅에 들어 온 중공군은 1958년 10월 전부 철수했다. 김일성의 요청을 마오쩌둥이 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중국군대가 북한의 안보를 보장해 주는 측면보다 자신의 권력을 흔들 수 있다는 우려가 더 컸다.
실제로 북한 내부의 정치 동향과 동구 공산권의 사례를 볼 때, 김일성의 우려는 타당했다. 게다가 중국도 30만의 대병력을 북한에 계속 주둔시킬 필요가 없었다. 김일성의 철군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김일성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북한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오늘은 중공군 철수에 관한 이야기이다.
첫째, 우선 북한 내부 상황이다. 김일성이 비록 최고 권력자이지만 여러 정치파벌이 존재하고 있었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만주파는 동북항일연군 같은 부대 출신으로 결속력이 강했고 소련의 지지도 받았다. 그 다음은 중국공산당에 기반을 둔 연안파로 그들과 함께 항일전과 국공내전에 참가한 경력도 있다. 특히 김무정은 중공 팔로군 포병사령관을 역임했다. 하지만 그는 1951년 김일성에 의해 한직으로 좌천됐다가 다음해 병으로 사망했다.
소련파도 있었다. 소련에서 성장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지만 단일 정치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주로 개인별로 활동했다. 그리고 남한 지역에서 좌익 활동을 했던 남조선노동당(남로당)파가 있었는데 이들은 6.25 전쟁 중 1952년에 대부분 숙청당했고, 박헌영은 중국과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56년 김일성에 의해 처형당했다.
연안파와 소련파는 김일성 우상화와 중공업 위주의 정책을 비판했다. 소련에서 벌어지고 있는 스탈린 격하운동을 보면서 김일성 권력 강화를 견제해야 하고 주민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는 경공업도 발전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1956년 8월, 조선로동당 3기 2차 전원회의에서 이런 내용을 주장하며 김일성을 비판했다. 그리고 곧바로 중국이나 소련으로 도주했다.
김일성은 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도주한 연안파와 소련파 간부를 출당시키고 직위도 박탈했다. 이 사건이 ‘8월 전원회의 사건’ 또는 ‘8월 종파사건’이라고 한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비판한 연안파와 소련파 간부들을 종파분자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 대해 중국과 소련은 공동으로 압력을 행사한다.
중국공산당 8차 대회에 참석한 소련 미코얀 부수상과 중국 국방부장 펑더화이가 9월 북한에 가서 김일성에게 연안파와 소련파 간부들을 복당시키고 직위를 회복시킴과 동시에 김일성이 공개 사과할 것을 요구한다. 김일성은 이들 앞에서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만 시간을 끌면서 유야무야됐다. 이 사건으로 김일성은 외세 개입으로 자신의 권력이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고, 특히 연안파들이 자기에게 도전할 가능성을 더욱 경계하기 시작했다.
둘째, 중공군에 대한 인식 변화이다. 북한에 주둔한 중공군은 전쟁 직후에는 북한의 전후복구 사업에 참여해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북한이 전후복구기를 지나 경제발전기에 진입하자, 중공군은 주둔하는 것 말고는 역할이 없었다. 오히려 대민피해가 증가해 주민들의 반감이 날로 증가했다. 중국측 자료에 의하면, 중공군이 1954년부터 1956년 8월까지 북한주민은 물론이고 공무원을 구금·모욕한 사건은 355건에 이르고 이 과정에서 417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그 중 가장 심각한 사건은 사냥을 하려고 중공군 관할 구역에 들어간 북한 고위층인 남일, 방학세, 박정애 등을 구금한 것이었다. 이 외에도 북한주민을 수색, 체포, 심문하고 교통사고, 강간 및 폭행 등의 사건이 빈발했으며, 군사시설 건설 용도로 농경지를 무단 점유하고 묘지를 파헤치는 등 치외법권적 행동을 했다고 한다. 중공군의 횡포로 북한 주민의 분노가 증가하는 문제는 북한과 중국 모두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셋째, 동구권 상황이다. 1956년 10월 헝가리에서 반정부 운동이 발생하자 소련군은 탱크를 앞세워 진압하고 친소 정권을 수립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김일성은 외국 군대가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주권을 유린할 수 있다는 것을 현실로 목도한 것이다.
넷째, 중국의 상황이다. 중국은 북한 주둔 중공군을 배경으로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해도 큰 효과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소련이 동구 공산국가에 군대를 주둔시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이 북한에는 통하지 않았다. 김일성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은 중국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북한의 8월 전원회의 관련 중소 합동 대표단 파견 시 마오쩌둥은 미코얀에게 “이번 일은 당신에게 달려있다. 북한은 우리 말을 듣지 않는다”라고 영향력의 한계를 노출했다.
그리고 중국도 내부적으로 경제발전이 시급한 문제였다. 외국에 대병력을 주둔시킬 여유가 별로 없었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한국이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었지만 전쟁발발 가능성은 낮은 상태였다. 게다가 중공군이 철수함으로써 한국과 미국에 ‘미군도 철수하라’고 요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국은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즉각 압록강을 건너 올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러한 배경아래 김일성은 1957년 11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세계 공산당 대표대회에서 마오쩌둥에게 철군을 요청했고 마오쩌둥은 이를 수용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1년 전 북한에 가한 압력에 대해 “작년 9월 펑더화이가 조선에 갔던 일은 바람직하지 못했다. 모든 당은 과업 수행 중에 잘못과 결점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조선로동당에 반대하는 인물들을 이용할 생각이 없다”라고 자신의 과오를 언급했다고 한다.
일종의 사과일 수도 있고 유감 표명일 수 있지만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우려를 해소하고 좋은 관계를 맺고자 했다. 이 방법이 북한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김정은을 통하지 않고는 북한에 중국의 의도가 반영되지 않고 있다. 중국은 북한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김정은과의 관계를 더욱 중요시 할 것으로 보인다.
중공군은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1958년 3월부터 철수를 시작했고, 그 해 10월 모두 북한 땅을 떠났다. 그렇지만 중국은 언제라도 필요하면 다시 한반도로 건너 올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음은 당연한 사실이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중국은 6.25전쟁 참전이 당연하고 필요했다고 평가한다. 국가안보 관점에서 북한을 점령한 미국과 압록강을 경계로 직접 대치하는 상황은 허용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6.25전쟁이 없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입장이다. 그것은 전쟁을 통해 얻은 것도 있지만 잃은 것이 더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6.25전쟁이 없었더라면 많은 인명이 희생되지 않았을 것이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와도 적대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은 침략자로 인식돼 1979년 미국과 수교하기 이전까지 서방세계로부터 거의 고립돼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 대만을 해방시켰다면 오늘날과 같은 대만문제도 없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은 향후 자신들을 곤란하게 할 제2의 6.25전쟁 같은 무력충돌은 사전에 방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것이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에 강한 유감을 갖고 있었다. 1956년 9월, 중국공산당 8차 대회 참석을 위해 중국을 방문한 북한대표단 단장 최용건에게 마오쩌둥은 “나는 김일성에게 이 전쟁은 하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라고 질책한다.
이어서 펑더화이는 “6.25전쟁은 도대체 누가 일으킨 것이냐? 미 제국주의가 일으킨 것인가, 아니면 당신들이 일으킨 것인가?”라고 몰아붙였다. 이에 대해 대표단에 배석한 주중 북한대사 이주연은 “왜 이 문제를 제기하는지 모르겠다”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러면 중국 입장에서 6.25 전쟁 참전으로 잃은 것부터 알아보겠다.
첫째, 소위 대만해방 기회의 상실이다. 중국은 1949년 10월 1일 신중국을 선포했지만 대만으로 이전한 국민당은 건재했다. 중국공산당은 해·공군 전력이 미흡한 상태에서 푸지엔성(福建省) 일대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키고 대만해협을 건너 진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이 공산주의의 확산 저지를 위해 대만에 제7함대를 주둔시키자, 중국공산당은 대만해방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둘째, 서방국가들로부터 침략자로 인식돼 장기간 고립됐다. 미국이나 유럽은 마오쩌둥의 신중국에 대해 초기에는 적대적이지 않았다. 유엔에서도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장제스의 중화민국을 대신하여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돼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6.25 전쟁 참전으로 평화파괴자라는 프레임에 갇히면서 서방세계로부터 고립됐고, 결국 소련에 더욱 의존하게 됐다.
셋째, 많은 인명 손실이 발생했다. 중국 측의 공식 통계에 의하면, 병력 손실은 42만 6000명에 달하며 그 가운데 전사자만 11만 4000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연대장급 이상 지휘관도 200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넷째, 경제발전 지연이다. 중국공산당은 오랜 내전을 끝내고 경제발전에 전념하기 위해 국방비를 대폭 감축하기로 했다. 신중국 건국 다음 해인 1950년 국방예산은 정부예산의 43%를 차지했지만 1951년에는 30% 수준으로 대폭 낮추고자 했다. 하지만 6.25전쟁 참전이 장기화되면서 45.64%까지 증가했다. 중국이 6.25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면 개혁개방도 앞당겨졌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중국은 최근 ‘6.25전쟁을 언제 끝냈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주목하고 있다. 대다수 희생자는 초기작전이 아니라 유엔군의 반격과 고지전에서 발생했으며, 3년 가까이 전쟁이 지속되면서 경제적인 타격도 지대했다. 중국 화동사범대학 국제냉전사연구센터의 선쯔화(沈志華)에 의하면, 전쟁종료 시점을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37도선까지 밀고 내려온 3차 전역 직후, 즉 1951년도 초반으로 보고 있다.
1951년 1월 13일 유엔 총회 정치위원회는 6.25전쟁의 즉각적인 정전을 건의한 13개 국가의 제안을 통과시킨다. 국제적으로 전쟁의 장기화를 원하지 않아 미국이 ‘전쟁 계속’을 주장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한반도에서 ‘미군 축출’이라는 최초 목표에 집착해 이 제안을 거부함으로써 미국에게 ‘전쟁 계속’의 명분을 주었고 서방진영도 적대적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6.25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2년 6개월가량 지속됐고 승자도 패자도 없는 무승부로 정전협정이 체결된다. 이어서 미국은 대만에 군사원조를 증가하는 한편, 1955년에 미·대만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후속조치로 미군사령부와 육·해·공군을 배치했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압박은 점차 가중되는 상황이었다.
중국은 6.25전쟁에서 많은 희생과 대가를 치렀지만 얻은 것도 적지 않다. 중국은 약 1세기 동안 서방과 일본에 연속으로 패전하여 국토가 침략당하고 반식민지상태로 전락했지만 6.25전쟁 참전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첫째, 북한이라는 완충지역을 확보했고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상실한 영향력을 점차 회복하는 계기가 됐다.
둘째, 미국과 대등한 강대국의 위치에 올랐다. 중국은 세계 최강 미군과 33개월 간 전쟁을 치르며 끝까지 견디어 내었고 미국 대표와 동등한 입장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중국이 ‘미군은 북위 17도선을 넘지마라’고 경고했을 때, 미군은 중국과 무력충돌을 우려해서 작전에 신중했다고 한다.
셋째, 중공군 실전 경험 축적 및 현대화 추진의 계기가 됐다. 중공군은 6.25전쟁 기간 중 소련으로부터 대량의 현대식 무기를 지원받았고 미군과 2년 반 동안 전투를 하면서 유격전 수준의 군대가 해·공군과 화력이 결합된 현대전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후 미군을 모델로 군비증강 및 군사개혁을 시도하게 됐다.
최근 들어 우리는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6.25전쟁 참전을 정의의 전쟁이라고 미화하면서 중국이 얻은 점을 강조하고 있는 사항에 유념해야 한다. 이것은 한반도에서 더욱 공세적으로 나오겠다는 신호이다. 시진핑은 마오쩌둥이 이루지 못한 ‘한반도에서 미군 축출’이라는 과제를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필자는 60년대에 초등학교 다닐 때 “무찌르고 말테야 중공 오랑캐 ~ ♬” 라는 전시 동요를 자주 들었다. 그 때부터 중공군은 오랑캐 군대이고 인해전술을 주로 사용하는 형편없는 군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쟁사를 연구하면서 중공군은 그런 군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당혹스러웠다.
6.25 당시 중공군이 어떠했는지 그들이 수행한 5차례의 전역을 통해 알아보겠다. 중공군은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유엔군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평안남도 영원-덕천 일대에서 방어를 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유엔군과 한국군의 진출 속도가 너무 빨라 중공군이 설정한 방어선 도달 전에 통과할 것으로 보고 계획을 변경해 공격으로 전환했다.
1차 전역인 이 공격작전은 유엔군과 한국군을 청천강 너머 적유령 산맥 앞에서 저지시키는데 성공했다. 이후 중공군은 공격을 멈추고 적유령 산맥 일대에서 웅크리고 유엔군과 한국군이 계속 도로를 통해 북진하기를 기다렸다. 덫을 놓고 걸려들기만 기다리는 매복의 형국이었다. 또 1차 전역에서 생포한 포로를 풀어주면서 중공군은 소규모로 곧 철수할 것이라는 허위 정보까지 유포하는 미끼도 던졌다.
유엔군은 중공군과 교전이 있었지만 소규모의 중공군이 참전한 것으로 판단하여 계속 북진을 결심한다.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을 끝내고 집으로 가겠다는 성급한 마음이 냉정함을 가렸기 때문이다. 곧이어 중공군은 매복에 걸린 유엔군과 한국군을 유린하였고, 이것이 2차 전역이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전략적 후퇴를 하면서 평양을 내주고 38선 부근까지 철수했다.
중공군이 1, 2차 전역에서 보여준 전투력은 유엔군을 긴장시켰다. 첫째, 야간 이동능력이다. 중공군 제1진 약 25만 명은 압록강을 건너면서 유엔군의 항공정찰을 피하기 위해 야간에만 산길로 이동해 전선에 투입됐다. 이런 대규모 병력이 일주일 정도 노출되지 않고 이동한 것은 전사에도 드문 일이다.
둘째, 심리전이다, 중공군은 깊은 밤 무당 굿판 같이 꽹과리치고 피리불며 나타나는 등 귀기어린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 생소한 전투방식에 유엔군은 초기에 공포감으로 전의를 상실했다. 주민 선무에도 능해 중공군은 가급적 민가에서 숙영하지 않았다. 또한 서울 점령 시 환영인파 없이 적막한 거리를 보고 “너희들이 어떻게 하여 서울 시민들이 다 남쪽으로 내려갔나. 이게 해방인가”라며 북한군을 질책했다고 한다.
셋째, 자신들의 장점인 우회기동, 매복, 포위, 측후방 차단 등의 유격전법을 사용했다. 당시 중공군 부사령원 홍쉐쯔(洪學智)는 항미원조전쟁회억(抗美援朝戰爭回憶, 1991년)이라는 회고록을 발간했는데 ‘중국이 본 한국전쟁(홍인표 역)’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서 번역됐다. 이 책속에 미군 중대장 5명이 중공군의 전술과 전투력에 관해서 홍 부사령원과 나눈 대화가 나온다.
원문을 인용하면, 홍 부사령원이 먼저 “중공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허심탄회하게 말씀 좀 해보시오”하자, 어느 중대장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당신들 전술은 대단합니다. 나는 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지만 우리 작전은 포병화력 공격부터 시작해 비행기가 대량 폭격을 퍼부은 뒤 보병이 나중에 갑니다. 그런데 반해 중공군은 바로 우리 등 뒤로 접근해 배후를 강타하지 않습니까. 이런 전투는 처음 겪어봅니다.”
홍 부사령원은 “당신네들 전투는 밀어붙이는 것이고 우리는 지형을 이용해서 분할, 우회, 포위로 이루어지는 거죠.” 다른 중대장이 거들었다. “중공군의 그와 같은 전법은 끔찍했습니다. 그리고 당신네들 병사들은 용감합니다. 우리는 모두 중대 및 대대 단위로 움직이지요. 중공군은 어떻게 3~5명씩 작전을 벌일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옆의 중대장이 말을 이었다. “중공군들은 독립작전에 능합니다. 각개전투 능력은 우리가 당신들보다 못합니다.” 또 다른 중대장이 말했다. “전투는 낮에 하고 밤에는 쉬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신들은 밤에 공격해 오니 우리는 언제 기습을 받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형편입니다.” 홍 부사령원이 결론을 내린다. “무슨 방법을 쓰든 아군의 장점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고 당신네들을 이길 수만 있으면 좋다는 생각이오.”
중공군은 1930년대부터 20여 년간 국공내전과 항일전을 거치며 단련된 백전노병들로서 매복, 야간기습, 우회기동, 측후방 차단, 포위 등 유격전의 대가들이다. 중공군은 3차 전역을 전개해서 1950년 1월 서울을 점령했고 북위 37도선까지 진출했지만 유엔군은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남한강-횡성-강릉선까지 북진한다.
중공군은 유엔군의 반격에 대한 대응으로 4차 공세를 펼쳤지만 지평리 전투에서 패배함으로 한계를 노출했다. 유엔군은 강력한 화력을 바탕으로 중공군을 몰아부처 서울을 수복하고 38선 일대를 회복했다. 이후 중공군은 5차 전역을 펼쳤지만 일시적인 성공에 그쳤고, 1951년 6월 말부터 전선은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38선 일대에서 고지전으로 전환됐다.
유광종의 저서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에는 중공군에 대한 백 장군의 증언이 실려 있다. “중공군은 약한 군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싸움의 때를 가려 나설 줄 알았고, 적절한 시점을 선택해 물러설 줄도 알았다. 약한 상대를 고를 줄 알았고, 강한 상대를 피할 줄 알았으며, 상대가 가장 아파하는 곳을 골라 사정없이 때릴 줄 알았다. 화력이 강한 미군에게는 은폐와 엄호로 자신을 보호할 줄 알았고 전투력이 약한 국군에게는 사나운 맹수가 달려들 듯 덮쳤다.”
한국군을 덮친 대표적 사례가 5차 전역이 벌어진 1951년 5월 중순 현리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 3군단은 중공군에 의해 오마치 고개라는 보급로가 차단당하자 조직적인 작전활동을 포기하고 중장비를 파기한 뒤 분산하여 1400고지 방태산 등을 넘어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산을 넘어왔지만 이곳에는 중공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또 중공군에게 등을 보이며 1600고지 계방산 일대를 넘어가야 했다. 이 패배로 3군단은 해체됐다.
그렇지만 한국군이 중공군을 격멸시킨 빛나는 승리도 있었다. 중공군 5차 전역에서 우리 6사단이 용문산에서 중공군 1개 군단의 공격을 막아내고 화천 북방까지 추격하여 격멸시킨 파로호 전투이다. 파로호는 화천댐으로 생긴 인공호수인데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대승을 기념하여 ‘중공 오랑캐를 격파했다’는 의미로 파로호(破虜湖)로 바꾸었다. 주민들은 파로호의 물고기를 중공군 시신을 먹고 자랐다는 거부감 때문에 10년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는 패배의 교훈을 잊어서도 안 되지만 승리의 기억을 왜곡시켜서도 안 된다. 승리의 기억은 우리가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원천이다. 용문산과 파로호에서 중공군을 격멸시켰던 우리 앞 세대의 강한 의지를 오늘날에도 이어가야 할 것이다. 우리 앞에는 과거의 중공군이 아니라 새로운 상대 즉 ‘중국의 영향력’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 임방순 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6·25전쟁은 현재까지 진행형이다. 북한과 체제경쟁은 물론이고, 중국에 대해서도 우리는 공산침략을 막아낸 전쟁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정의의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최근 6·25전쟁 당시 중공군과 북한군의 영웅담을 담은 ‘1953 금성 대전투’란 중국 영화가 우리의 영상등급위원회를 통과해 배포 직전에 이르렀다가 없던 일이 됐다.
강한 반대 여론을 의식한 수입사가 판권 계약을 파기하고 사과문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우리가 6·25전쟁에 대한 중국의 논리와 시각을 거부하고 있지만, 향후 중국의 공세는 더욱 집요하고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우리 사회 일각에서 중국의 주장에 동조해 “UN군의 개입은 불법이고 중공군의 참전은 정의”라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오늘날에도 우리와 격전을 벌이고 있는 중국의 6·25전쟁 참전에 대해 4차례에 걸쳐 알아보겠다. 첫 번째는 중공군이 참전한 배경과 과정이고, 두 번째는 중공군의 주요전투와 전투력이다. 그들은 약한 군대가 아니었다. 세 번째는 중국이 얻은 것과 잃은 것들을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중공군 철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다.
서상문은 방대한 중국 자료를 토대로 “6·25전쟁 – 공산진영의 전쟁지도와 전투수행(상·하권)”을 저술했다. 2016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발간한 그의 저서에서 발췌 인용한 내용을 토대로 중국의 6·25전쟁 참전에 대한 4차례 시리즈를 기술하겠다.
마오쩌둥은 북한의 한반도 무력적화 계획에 반대했다. 1949년 4월 김일을 단장으로 하는 북한 대표단이 마오쩌둥을 예방하고 남침계획에 대한 그의 의도를 탐색했다. 하지만 그는 시기상조론을 주장했다. 당시 중국은 국공내전을 끝내가는 시점이어서 대만 해방, 티베트 복속, 체제안정, 경제회복 등 자신들의 국내 문제가 더욱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50년 5월 마오쩌둥은 김일성이 건넨 “남침 동의 요청‘에 경악했다. 김일성은 “스탈린이 남침 계획을 승인하였다. 중국 동지들의 동의를 받으라고 하였다”라고 일방통보를 했다. 마오쩌둥은 김일성과 회담을 중단하고 즉시 스탈린에게 확인했고 동일한 답변을 들었다. 당시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결심에 이의를 제기할 상황이 되지 못했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결정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마오쩌둥은 곧바로 정치국회의를 소집하여 북한의 무력남침 계획에 동의했다. 그런데 마오쩌둥은 김일성으로부터 6·25 전쟁 개전일도 통보받지 못했다. 서상문은 그의 저서에서 마오쩌둥의 러시아 통역 스쩌(師哲)의 회고를 인용하여 “마오쩌둥은 외국 통신사(프랑스 파리)의 보도를 보고 전쟁발발 사실을 알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대체로 북한은 개전 3일 차인 6월 28일 중국에 통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오쩌둥은 전쟁에서 소외돼 있었지만 미국이 예상보다 빠르게 6·25전쟁 참전을 결정하고 개전 10일 후인 7월 5일 오산 죽미령에 미군 대대급 기동타격대가 나타나자 고민하기 시작했다. 전쟁 1개월 후인 7월의 전황은 북한이 낙동강까지 진출해 곧 부산을 점령할 기세였지만 그는 불안했다. 미군이 참전한 이상 전세가 역전돼 UN군이 38선을 넘을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도달하면 반드시 중국 내륙으로 진입할 것으로 보고 있었다. 때마침 미국은 대만해협에 항공모함을 파견했는데 마오쩌둥은 이를 중국을 침략하려는 사전조치로 인식했다. 마오쩌둥은 7월 7일 4야전군 13병단 소속 3개 군단을 주력으로 약 25만 명 규모의 동북변방군을 창설하고 동북지역으로 이동시킨다. 미군과 전쟁을 대비한 조치였다.
서상문은 마오쩌둥이 9월 하순 경 이미 참전 결심을 굳히고 그 후 공산당 당·정·군 고위 간부들의 반대 의견을 설득해나갔다고 언급한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마오쩌둥은 10월 1일 심야회의에서 스탈린과 김일성의 파병 요청이 있었음을 밝히고 파병문제를 논의했으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참석자들은 원론적으로 군사 개입은 찬성하지만 즉각적인 참전은 신중해야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건국 1주년도 안된 상태에서 해외 파병은 마오쩌둥이 독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마오쩌둥은 이 문제를 두고 3일 밤낮으로 앉거나 서거나 하면서 심각하게 고심했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마오쩌둥은 10월 4일 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해 참전의 당위성에 대해 설득을 시도한다.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동북군구사령원 가오강(高崗) 등은 “미 제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할 것이다. 앉아서 당할 순 없다. 일본 제국주의가 40여 년 동안 점진적으로 진행했던 것과는 달리 미 제국주의는 4∼5년 내에 중국 동북지역으로 진출하려 할 것이다. 미국이 북한 전역을 점령해버리면 중국으로선 군대를 진입시킬 명분을 잃게 되고, 우리가 즉각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미국이 침략할 때까지 수수방관하면 중국혁명은 실패할 것이다”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4야전군 사령원 린뱌오(林彪) 등 반대파들은 “지금은 오랜 국공내전으로 폐허가 된 중국을 재건할 때이며, 참전해도 미군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몇 백만명에 불과한 북한을 구하려고 5억 인구의 중국을 뒤흔들어 놓는 것은 조금도 수지가 맞지 않다”라면서 “파병하지 않는 게 제일 좋지만 파병해야 한다면 출전은 하되 군대를 북한지역 북쪽에 주둔시킨 후 형세를 관망하며 싸우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라고 주장했다.
참전론자들은 중국의 안위를 위해 참전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같은 공산국가인 북한을 도와야 한다는 것은 그다음 문제이다. 이러한 중국의 논리는 明나라의 임진왜란 참전이나 淸나라의 청일전쟁 참전이나 모두 동일하다.
10월 5일 다시 정치국 확대회의가 개최됐다. 이 자리에서 펑더화이(彭德懷)는 마오쩌둥의 요청을 받고 참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덩샤오핑 등 참석자들은 점차 마오쩌둥의 의견에 동조해가면서 10월 6일 최종적으로 파병을 결정했다. 이어서 10월 8일 김일성에게 참전을 통보하고 10여일 후인 10월 19일 주력부대가 압록강을 넘어 6일 후인 25일 첫 전투를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사항이 있다. 중국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북한지역에 적대 또는 경쟁세력이 진입하는 것을 저지한다는 것이다. 소련의 공군 지원도 거부됐고 미군에 비해 해·공군 력이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위해 중국은 무력개입을 했다. 명분은 항미원조(抗美援朝)였지만 속마음은 ‘보가위국(保家衛國)’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북한에 급변사태 등 어떠한 상황이 발생하면 중국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개입할 것이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필자가 베이징시 외곽에 있는 명13능에 갔을 때, 13대 황제 신종(神宗) 묘 앞에 서있는 거대한 묘비의 뒷면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아무 글자가 없는 ‘무자비(無字碑)’였기 때문이다. 만력제(萬曆帝) 신종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해 조선 집권층으로부터 나라를 살려준 은인으로 숭상 받던 황제다.
명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조선 왕들은 창경궁 뒷전에 대보단(大報壇)을 지어놓고 만력제 신종과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 의종(毅宗)에 대해 제사를 지냈다. 왕만 그런 것이 아니다. 송시열 등 사대부들은 충북 속리산 자락에 만동묘(萬東廟)를 지어놓고 역시 만력제를 기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황제가 스스로 공적이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황제의 위치에서 그 흔한 자화자찬(自畵自讚)도 못했을까? 겸손한 것인지 아니면 공적이 없어 자화자찬한들 오히려 웃음거리만 된다는 진리를 일찍이 헤아렸을까? 만력제는 명나라 13대 황제로 그의 사후 20년 만에 명나라는 멸망했다. 오늘은 비석에 아무 글자가 없는 무자비(無字碑)에 대한 이야기이다.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는 ‘명나라는 만력제에 의해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만력제 재위기간은 48년(1572~1620년)이었다. 만력제는 재위기간 동안 거의 황제 역할을 하지 않았다. 10세의 어린 나이로 등극하여 초기 10년간은 대신 장거정(張居正)이 섭정하였고, 그 후 30여년간 황제 노릇이 싫다며 대전에 나오지 않았다.
이런 현상에 대해 ‘황제가 파업했다’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이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임진왜란 기간만 황제 노릇을 했다고 한다. ‘황제 파업’의 폐해는 지대했다. 중간계층 관리들은 물론이고 대신들조차도 황제를 본적이 없어 얼굴을 잊어버렸다고 하며, 관리 인사문서에 결재를 하지 않아 관리들이 공석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묘소를 만드는 데는 많은 예산을 쏟아 부었고 자녀들의 결혼 비용과 궁전 증축 등 국가예산을 축냈다. 이렇게 30여년을 보냈으니 무슨 공적이 있겠는가, 자화자찬하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그가 심혈을 기울여 약 20년 동안 조성한 그의 무덤은 훗날 발굴돼 지하궁전으로 불리며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유골은 문화혁명 기간 홍위병에게 불태워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중국에는 3대 무자비가 있다고 한다. 첫 번째 무자비는 중국 태산(泰山)의 꼭대기에 있다. 서한(西漢)의 한무제(漢武帝)가 제사를 지내기 위해 태산을 올랐다가 발아래 천지를 굽어보게 되었다. 그는 갑자기 ‘멸진(滅盡)’ 하고 소리쳤다. 대자연의 무한함 속에서 자신의 업적과 성취는 한 점 티끌에 불과하다는 것을 홀연히 깨닫고 자신도 모르게 외친 것이다. 그 후 한무제는 그 자리에 아무런 글자도 새기지 않은 무자비를 세우도록 했다.
두 번째 무자비는 중국의 산시성(山西省) 평원지대에 세워져 있다. 중국 역사상 총 564명의 황제 중 유일한 여자 황제인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비석이다. 서기 705년 81세의 여황제가 임종을 앞두고 놀랍게도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아주 또렷하게 자신을 황제(皇帝)가 아닌 당나라 고종(高宗)의 황후인 ‘측천대성황후’로 칭하도록 하라고 유언했다.
그리고 자신이 죽으면 고종의 묘에 합장하고 비석은 세우되 그 위에는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고 말했다. 그녀는 아마도 인간의 심정을 꿰뚫어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측천무후가 자신의 업적을 줄줄이 비석에 기록했다면 그 비석이 아직 남아있을까? 그녀는 자신의 모든 권세와 부귀영화는 죽음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는 진리를 깨달았던 것이다.
세 번째가 만력제의 무자비이다. 사실 명13능에서 영락제(永樂帝)를 제외한 12개 황제의 묘비는 모두 무자비라고 전해진다. 만력제 무자비가 특이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단지 만력제 무덤인 정릉(定陵)만 유일하게 발굴되고 내부가 대외 개방돼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명나라 시대에는 황제가 서거하면 다음 황제가 선대 황제의 공적을 묘비에 기록했다.
명나라가 난징(南京)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어찌된 일인지 이 과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권력자는 거대한 비석에 이름과 공적을 남기고, 일반 백성은 이름만 적혀있는 작은 비석 밑에 잠든다. 이 때 황제 등 국가 최고지도자들은 사후에 어떻게 평가받는지 관심이 지대하다고 한다.
그러나 내세울 업적이 없다면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명나라 만력제처럼 비석에 아무 공적도 적어놓지 않고 무자비로 남겨두는 것이다. 자화자찬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후세 사람들은 안다. 황제이든 최고 권력자이든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자화자찬한 기록과는 정반대라는 사실을 말이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언론보도에 의하면, 정부는 금년도 코로나19 재난지원금 지급을 위한 2차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면서 국방비 5629억원을 전용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감액 내역은 환차익·낙찰차액·연내 집행제한 예산 등으로 사업계획 변경과는 무관하다. 이번 추경에서 감액된 사업은 내년도 예산 편성과정에서 기획재정부와 협의해 반영할 예정이다"라고 설명했다.
지난해에도 2차 추경 때 1조 4758억원이 전용된 데 이어 3차 추경 때도 2978억원이 삭감된 바 있다. 국가 전체의 관점에서 예산 전용은 있을 수 있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분야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방부 설명대로 삭감되고 전용된 예산은 다음 해에 반영될 수 있다. 그러나 국방 관련자들은 ‘국방비 전용은 문제없다’라는 관점이 아니라 ‘큰 문제이다’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특히 국방비 전용으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 청나라가 국방비를 전용한 결과 청일전쟁에서 패배하여 몰락과 망국의 길로 들어선 최악의 사례를 들어보겠다. 청일전쟁이 발생하기 전에 중국 북양함대는 동양 최대였다. 북양함대는 1871년 산둥성 웨이하이시(山東省 威海市) 류공다오(劉公島)에서 창설돼 전성기에는 전함 25척, 보조함 50척, 수송선 30척, 인원 4천명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당시 서구열강에 이어 세계 9위의 해군력이었다.
북양함대의 기함인 '정원(定遠)함'은 독일제 최신예 7000톤급 철갑함으로 정작 독일정부마저 예산부족으로 구매하지 못한 전함이었다. 자매함 ‘진원(鎭遠)’도 동급 전함이었으며, 이들 전함은 멀리 있는 오랑캐를 평정(定遠)하고 진압(鎭遠)한다는 의미로 명명됐다. 당시 청나라는 서태후를 위해 베이징 서쪽에 인공호수까지 포함된 이화원이란 장대한 별장을 짓기 시작했다. 별장 공사에 수천만 냥의 비용이 들어가면서 해군 예산도 건설비용으로 전용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새로운 전함 도입은 고사하고 1891년부터는 탄약 구입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청일전쟁 발발 3년 전부터는 북양함대를 유지하는 것도 곤란했다. 전쟁 발발 3개월 전 영국은 청나라에게 순양함 2척을 사라고 권유했지만 서태후의 생일 축하 비용으로 써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순양함 2척은 일본이 구입해 주력으로 투입하게 된다. 이처럼 청나라는 국방비가 전용되는데 반해 일왕은 황실 예산 30만엔을 전함 건조에 보태라고 보냈다.
청일전쟁 개전 당시 함포 포탄은 문당 2-3발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화약통에는 모래나 콩만 잔뜩 채워져 있었다. 장부에 기재된 탄약의 재고숫자를 맞추기 위해 진흙으로 포탄을 빚었다고 한다. 가까스로 마련된 해군 예산조차도 서태후의 생일 뇌물로 전용되면서 화약을 구매할 예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위에서 국방비가 전용되니 밑에서도 국방비가 새어나가 결국 겉만 번지르르한 동양 최대였다.
이런 북양함대는 막상 전쟁이 발발하자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면서 전투다운 전투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뤼순(旅順)을 거쳐 웨이하이시로 철수했다. 결국 베이징으로 진출할 수 있는 웨이하이시에서 일본군에 항복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국가 지도자 리홍장(李鴻章)은 “싸우지 말고 후퇴해서 함정을 보존하라. 무슨 일이 있어도 배를 잃지 말아야 하며, 대양에서는 싸우지 말라”고 했다. 싸워서 이길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일본군은 북양함대 기함 정원함을 포함해 전함 5척을 침몰시키고 약 10척을 노획했다. 그 중 한 척은 자결한 북양함대 지휘관 정여창(鄭汝昌)의 군인정신에 대한 예를 표하며, 그의 시신을 수송하는데 사용하도록 돌려주었다고 한다. 북양함대의 말로는 청나라의 운명처럼 비극적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일본은 노획한 청나라 전함을 고철로 매각했고, 진원함은 일본 해군에 편입돼 러일전쟁에 투입됐다가 함포사격 표적이 되고 결국 고철로 처분됐다고 한다.
그 대금은 일본 해군병 학교 강당 신축비용으로 사용됐다. 진원함의 닻과 사슬, 포탄 등 유물은 도쿄 우에노 공원에 전시됐다가 중화민국 장개석 정부의 요청에 의해 반환됐는데, 공산 정권 수립 후, 베이징 군사혁명박물관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 원래의 위치 웨이하이시로 옮겨질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창설 당시의 원위치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기구한 운명이다.
청일전쟁 전 과정은 중국인에게는 수치스러운 사실이다. 하다못해 일선 병사들의 감투정신도 내세울게 없다. 기강이 무너지고 훈련도 되지 않아 포탄 소리에 정신을 잃고 숨기에 바빴으며, 심지어 전함조차도 전투대열에서 이탈해 도주했다고 한다. 중국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정여창 제독의 자결뿐이었다. 책임감이 넘치는 지휘관이라는 것인데, 지휘관이 음독 자결할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간 당시 정치권은 아무 말이 없다.
패전의 대가는 가혹했다. 스스로 싸울 의지가 없었던 청나라 군대는 나라를 지키기는커녕 서구 열강의 침략에 속수무책이었다. 서구 열강은 청나라의 군사력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알고 거침없이 밀고 들어와 유린했다. 청나라는 급속히 무너져 일본에게 조선의 지배권을 넘겨주고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 및 그 부속군도를 할양하는 한편, 은 2억 냥을 배상금으로 지불했다. 청의 3년간 국가예산에 해당하며, 당시 일본의 4년 치 세출예산 액수이다.
일본은 그 돈으로 군사력을 증강하여 10년 후 1904년 러시아와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중국은 패전의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청일전쟁 100주년을 맞이한 1985년에 웨이하이시에 ‘중국 갑오전쟁 박물관’을 세웠다. 패전 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중국인 특히 지도자들이 이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다짐할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다시는 국방비를 전용하지 않겠다”라는 결심일 것이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필자가 중국에 근무하던 시절 업무시간 이외에 개인적으로 만주지방에 자주 갔었다. 안시성, 봉황성 등 고구려 산성을 포함하여 고구려 및 발해 유적지를 다수 찾아보았다. 안시성이라고 추정되는 지역을 갈 때는 그 지역 주민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여야 한다는 조언에 따라 밀짚모자 쓰고 편안한 복장으로 주위를 살피며 다녔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베이징 부근의 지방도로를 가다가 高麗라는 지명을 만났다. 필자는 근거는 불명확하지만 ‘고구려 군대가 패주하는 당태종을 베이징 부근까지 몰아부쳤다’라는 어디선가 읽은 기억을 떠올리며 반가운 마음에 곧바로 읍사무소에 들러 지명의 유래에 대해 설명을 부탁했다. 그랬더니 “당신 같은 사람이 많이 와서 똑 같이 말한다. 이 지역은 당신네 고구려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으니 설명해줄 역사적 사실도 없다”라는 답을 들었다.
2002~2004년 당시 현지에서 볼 때에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에 산재한 한국 역사는 중국의 역사가 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에서는 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만리장성 이북지역은 자신들의 역사에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역사 교과서에서도 고구려와 발해를 한국사로 분류했고, 저우언라이 총리는 하나의 역사를 두 개로 해석해 적용한다는 ‘일사양용(一史兩用)’을 제시했다.
즉 고구려는 한국의 역사이자 동시에 중국의 역사라는 것이다. 또 다른 해석은 고구려 수도가 집안(集安)이었던 초기에는 중국의 역사이고, 평양으로 천도한 후기에는 한국의 역사라는 것이다. 아무튼 이때까지도 만주지역에 우리 역사의 흔적은 남아있었다. 그러나 중국이 2002년부터 중앙정부 차원에서 전개한 동북공정 이후에는 달라졌다. 오늘은 동북공정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동북공정은 중국이 시행한 여러 가지 공정 중 하나이다. 목적은 자신들이 선포한 영토 내에서 분리 독립의 움직임을 사전 차단하고 다민족 통일국가로서 중국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겠다는 것이다. 이 공정은 중국이 한·중 수교 이후 조선족 사회가 한국과 만나면서 시작된 동요에 대한 대처의 성격이 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조선족 사회는 한국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 동경이 어우러져서 한국쏠림 현상이 발생했다.
한국방문에 대한 열망을 포함하여 한국방송 청취 열풍도 일었다. 중국 당국은 이런 현상을 방관할 수 없었다. 잠시 동안이지만 한국방송 통제조치가 있었다고 들었다. 한국 관광객들이 백두산 천지에서 공공연히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앞세우고 단체 기념촬영을 하는 현상을 중국 당국은 심각하게 인식했다.
만주지방을 여행하는 한국인들이 “이 지역은 한국의 고토이고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는 우리 역사“라는 속마음을 밝힐 때, 중국 당국은 당혹했고 ”언젠가는 수복해야 한다“라는 다소 허황된 소리가 나올 때마다 중국은 기겁하면서 위기감도 느꼈다고 한다.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이 분리 독립을 주장하거나 한국과 연대를 추진한다면 이건 중국의 정체성과 안보에 큰 위협인 것이다.
조선족의 움직임에 자극을 받아 내몽골이나 티베트, 신장 위구르 등 변방의 주요 소수민족이 동일한 요구를 해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소수민족은 중국영토의 64%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이때 북한도 한몫 거들었다. 북한은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던 2002년에 고구려 고분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를 신청했다. 중국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일단 북한 단독 등재를 보류시키고 오히려 2003년 자기들이 단독으로 등재 신청을 했다.
이 때 남북한은 한마음으로 중국의 단독 등재를 저지시켰다. 결국 그 다음해인 2004년 고구려 유적은 북한과 중국 공동으로 등재하게 됐다. 북한의 5개 지역 고분 63기는 북한이 담당하고, 중국지역의 53개 유산은 중국이 관리하도록 결정된 것이다. 이 결정에 대해 반쪽이라도 지켜 다행인지, 아니면 반쪽을 잃어 애통한 것인지 의견이 분분했다.
이어서 북한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2007년 동북공정과 관련된 내용을 수록한 '고구려 이야기'를 발간했다. 그러나 이 책은 중국을 의식해 종전의 입장에서 많이 후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고구려 이야기’는 서문에서 ‘최근 사람들 속에 고구려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여…’라는 식으로 고구려사를 둘러싼 중국과의 갈등을 에둘러 표현했다.
반면, 북한 학계가 자랑스러운 역사로 다루어온 고구려의 대 수·당 전쟁 관련 대목은 대폭 축소시켰다. 동북공정이 본격화되기 이전인 2000년 북한 사회과학원이 출간한 ‘고구려사의 제(諸)문제’의 경우 대 수·당 전쟁을 ‘수나라의 침략을 반대한 투쟁’과 ‘당나라의 침략을 반대한 투쟁’으로 직설적으로 표기했으나, ‘고구려 이야기’에서는 살수와 안시성이라고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북한과 달리 우리 국민의 대응은 그야말로 거국적이었다. ‘고구려사를 지키자’라는 민족적인 명분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한 마음 한 목소리였다. 이러한 국민들의 일치된 외침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이 2006년 9월과 10월 당시 원자바오 총리와 후진타오 국가주석에게 시정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중국도 한국의 일치된 분노를 외면할 수 없어 2007년 ‘한·중 구두 양해사항’을 교환하고 동북공정의 논란을 종식시키기로 하였다.
양해사항의 요지는 ‘중국은 이러한 사태에 유념하고, 정치 문제화를 방지하며, 학술 교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었다. 동북공정이 1라운드였다면 2라운드는 최근의 문화공정이다, 우리가 2008년에 ‘강릉 단오제’를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하자, 중국인들은 단오가 왜 한국의 문화유산이냐고 이의를 제기했다. 이른바 문화공정이 촉발된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동북공정은 정부차원의 공식 정책이었지만 문화공정은 민간차원의 갈등이다. 그러나 중국의 체제상 순수 민간영역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최근 논란이 되었던 방송 프로그램을 보자. 중국은 2020년 신문과 방송에서 쓰촨(四川)지역의 파오차이(泡菜)를 김치의 표준이라고 주장했고, 한국의 방송 드라마에 중국풍이 일부 도입되는 등 예사롭지 않다.
중국이 비록 민간차원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전통문화를 중국문화의 일부로 여기겠다는 소위 문화공정을 시도하는 의도에 대해 전문가들의 시각은 다음과 같다. 최근 K-pop과 드라마 등 K-Culture가 전 세계로 전파되어 가면서 중국인들은 아시아 문화의 중심이 자국에서 한국으로 전환돼 간다는 위기감과 함께 아시아 문화는 전부 중국이 원류라는 과열된 애국심이 결합된 결과란 것이다.
중국은 1960년대에 고구려와 발해사를 한국사로 인정했으나, 40년 후인 2000년대에는 중국사로 규정했다. 그러면 지금부터 40년이 지난 후에는 고구려와 발해사가 어떻게 될까? 김치는 한국 음식으로 남아 있을까? 우리 전통문화는 온전히 유지되고 있을까? 걱정이 앞서며, 역사를 지키려는 거국적 노력과 함께 남북한 협력도 필요하다. 학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필자는 최근 중국의 한 연구소가 주최한 화상 세미나에 참석했다. 현 아태지역 정세에 대한 해외의 여론을 들어보겠다는 취지로서, 주제는 ‘아태지역 정세에 대한 전략적 대화’였다. 필자는 이 자리에서 “중국은 타국의 내정에 간섭한다는 오해를 피해야 한다”라고 발표하면서 2018년 출간된 ‘중국의 조용한 침공’이라는 책을 예로 들었다.
이 책은 중국이 자금력을 수단으로 호주의 각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례를 기술하고 있다. 필자는 “이 책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중국은 관련국가에서 큰 저항에 직면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중국 측 참석자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몽고 참석자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달라. 그리고 한국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는가?”라고 질문했다. 필자는 “한국은 쉽게 흔들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서 이런 사례는 없다”라고 답변했다.
필자는 중국 측 반응에 의문이 들어 중국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확인해 보았다. 중국은 “‘소리 없는 침입, 중국이 어떻게 호주를 괴뢰국가로 만들었는가’(无声的入侵:中国如何把澳大利亚变成木偶国, Silent Invasion : How China Is Turning Australia into a Puppet State)라는 반중서적이 2018년 2월 26일 호주에서 출간됐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이 책은 호주 정·재계, 학계, 언론에서 사실무근이라고 하는데다, 저자가 유명해지기 위해 악의적으로 조작했으며, 중국-호주관계를 악화시키고 있다”는 반응이었다. 게다가 저자인 ‘클라이브 해밀턴(Clive Hamilton)’은 책의 부제를 “중국이 어떻게 호주를 괴뢰국가로 만들었는가”라고 붙였다. 영향력 행사 정도가 아니라 ‘괴뢰국’ 수준으로 보았던 것이다.
다음은 한국어판의 일부 내용을 소개하겠다. 저자는 중국과 중공을 구분하고 있으며, 1장 ‘조용히 스며드는 영향력’에서는 “중공의 최종목표가 호주와 미국의 동맹을 깨트리고 호주를 속국으로 삼는 것이다. 호주가 주권을 빼앗기는 과정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만이 경제적 번영을 보장해줄 수 있다는 믿음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며 베이징의 괴롭힘에 맞서길 두려워했기 때문이다”고 기술하고 있다.
3장 ‘해외에 있는 중국인들’에서는 “중공은 이주 중국인을 활용해 호주 사회 전체를 중국의 가치에 공감하고 베이징이 수월하게 통제할 수 있도록 탈바꿈한다는 목표를 수립하였다. 장기적으로 한족(중국인)을 유권자 집단으로 동원해 중국을 지지하는 후보를 호주 의회와 고위 공직에 진출키고자 한다는 사실이 문서로 드러났다”고 밝히고 있다.
4장 ‘밀려들어오는 돈’에서는 “중공이 호주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정당에 기부하는 것이다. 이 방법이 효과가 있는 듯 중국계 호주인 일부가 호주 정치기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며, 그 수는 점점 늘고 있다. 이 추세대로 가면 베이징 대리인들이 정치를 장악해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중국이 호주 정치를 흔드는 중심지는 뉴사우스웨일스주 노동당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5장 ‘연구소부터 언론까지’에서는 “호주중국관계연구소의 세미나와 출판물은 중국 공산당 선전물들과 비슷하다. 이 연구소는 합법적인 연구기관이지만 호주에 영향력을 미치고자 베이징의 지원을 받는 위장된 선전집단”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2016년 5월 중공중앙선전부장 류치바오(劉奇葆)가 호주를 방문해 ‘호주의 주요언론사는 신화통신, 인민일보, 중국일보가 제공하는 기사를 싣고, 중국으로부터 거금을 받는다’라는 협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6장 ‘중국에 저당 잡힌 경제’에서는 “중국은 자원과 에너지, 식품산업은 물론 인프라를 겨냥해 전 세계에 수천억 달러를 내보내고 있다. 이런 투자금을 통해 경제를 개방시킨 뒤 점차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 전략의 기본이다. 중국은 미국으로부터 호주를 떼어내려고 한다. 굳이 떼어내지 않아도 이 캥거루는 먹을 게 많은 곳으로 뛰어갈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7장 ‘유혹 또는 강압’에서는 “중공이 세계로 영향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호주를 시험장으로 선택한 이유는 호주의 지정학적 위치, 중국과 밀접하게 연결된 화교,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는 다문화 정책 등 3가지”라고 주장한다. 호주를 서구 진영의 약한 고리로 판단했고, 중국 우월주의에 빠진 화교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며, 중국의 가치와 전통을 높인다는 핑계로 중공의 입장을 내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란 얘기다.
10장 ‘대학에 들어온 중국’에서는 “2016년을 기준으로 호주 대학이 중국 대학과 공식적으로 체결한 연구협력 계약이 1100여 건, 직원이나 학생 교류 협약도 수백 건이다. 이런 협약이 대학 행정부를 중국에 우호적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한다”고 설명한다.
11장 ‘문화전쟁’에서는 ① ‘부동산으로 몰려드는 차이나 머니’와 관련하여 2016년 외국인이 뉴사우스웨일주 신축주택의 25%, 빅토리아주 신규주택의 16%를 사들였는데, 이 중 80%가 중국인이라고 말한다. ⓶ ‘신(神)까지 포섭하라’에서 한 중국인 장로교회가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한 중국인 감리교회는 “위대한 나라로 떠오른 중국과 시진핑의 등장도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라고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고대 로마의 한 정치인은 공정한지 아닌지 타당한지 불합리한지는 서로 국력이 비슷할 때 하는 이야기라고 했다. 약소국 A가 강대국 B와 관계에서, 자국의 정책들이 B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좋은 정책이다. 그러나 균형을 잃어 자국에게는 손해가 되고 B에게 이익을 안겨주는 정책이라면 이는 보통 문제가 아니다. 호주의 경우처럼 예속되어 간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자국의 이런 현상을 지적한 클라이브 해밀턴의 문제 제기는 매우 용기 있는 행동이다. 그는 올해 4월 출간된 한국어판 서문에서도 우리나라에게 한 마디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다. “중국의 진정한 본질과 야망을 깨닫지 못하면, 한국도 위험하다”라고.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중국에서 사업하는 한국인은 물론이고 백두산을 여행하는 한국인에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마 조선족일 것이다, 과거 백두산 여행은 연변조선족 자치주 연길에서 출발했고 이어서 해란강, 용정 등 이 일대에 산재한 일제 강점기 시절 항일 투쟁의 유적을 돌아보는 여행과 연계돼 있었다.
한국인들은 연길 시내의 한글 간판과, 한국말이 통하고 한복을 볼 수 있는 거리 풍경에 잃어버린 땅에 대한 어떤 그리움을 많이 느꼈을 게다. 그리고 사업가들은 조선족의 도움으로 먼저 진출한 일본 기업을 제치고 현지에 정착했다고 한다. 오늘은 조선족의 역사를 먼저 짚어본 후, 이어 이들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며 잠재력은 무엇인지 알아본다.
조선족의 역사는 임계순 한양대 명예 교수의 저서 ‘우리에게 다가온 조선족은 누구인가’에서 발췌해 인용했다. 조선인들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이주한 역사는 청조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조는 명을 멸망시키고 중원으로 천도하면서 1658년 무렵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지역을 봉금지대로 설정하고 조선인의 진입을 금지했다. 청조 발상지를 보호한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함경북도와 평안북도 일부 농민은 봉금령이 완화된 틈을 이용해 아침에 강을 건너 경작하고 저녁에 돌아오는 당일치기 경작을 하다가, 봄에 강을 건너 농사짓고 가을에 수확물과 함께 귀가하는 계절출가이민으로 발전했다. 후에는 아예 고향을 떠나 이 지역에 거주하며 경작하게 됐는데, 조선조정의 무능과 부패로 삶이 어려운데다 전염병과 자연재해로 흉년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자 조선의 애국지사들은 중국 만주지방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조선인의 이주는 대폭 증가했고, 일제의 식민 정책에 따른 토지조사사업으로 전답을 빼앗긴 많은 농민들도 이 지역으로 이주해 갔다. 당시 만주 일대를 통치하던 중화민국과 군벌은 재정 수입을 확충하고자 이주와 토지 개간을 묵인했다. 1920년까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이주한 조선인은 약 20만 명에 달한다. 1931년 이후 일제가 만주지역 전체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조선인들을 이 지역에 집단으로 이주시켰다. 이 시기의 이주자는 자유의사 보다는 일제의 정책에 의해 강제 이주된 경우가 많았다. 1936년에 만주지역 조선인은 총 85만 4천명으로 증대됐다. 국공내전 기간에 국민당은 소수민족을 강압적으로 동화시키는 정책이었지만, 공산당은 소수민족의 지지를 받고 환심을 사기 위해 개별 민족의 특성을 인정하고 해당언어 사용을 승인했다.
마오쩌둥은 1939년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조선족은 중국 국민으로 정착했다. 중국의 조선인이 조선족으로 변모되는 순간이었다. 토지개혁 시기에는 토지를 분배받아 경제적으로 기본 생활을 보장받았고, 정치적, 법적으로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보장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전통 문화를 보존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 조선족의 40%가 살고 있는 연변조선족 자치주가 중심이 되었다. 초등교육부터 고등교육까지 한국어 교과서로 공부했고 각 가정에서는 한국어로 대화를 했으며, 조선인 집단 거주지이기 때문에 사회생활도 한국어로 가능했다. 한국어를 바탕으로 집단거주하면서 전통문화가 자연스럽게 보존되면서 계승됐다.
한·중 수교 이후 조선족과 한국인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필자가 관찰한 바로는 첫 만남은 환호와 기대로 시작됐지만 곧 상호 실망과 경우에 따라서는 상호 저주로 바뀌어 갔다. 한국인들은 만주지방에서 전통문화를 만나는 기쁨을 맛보았고, 조선족은 부유한 한국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파탄이 일어났다.
한국인은 조선족이 말은 통하지만 사고방식이 다른 점에 당황했고, 조선족은 일부 한국인에 당한 사기 피해로 가정이 해체되는 사례를 보면서 한국인들을 전부 사기꾼으로 보는 것이었다. 실제로 필자가 베이징에 처음 갔을 때, 조선족은 우리를 ‘한국분’이라고 예의바르게 대했지만 3년 후 귀국할 무렵에는 ‘한국놈’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뭘 잘못해서 그들의 마음에 그렇게 큰 상처를 주었는지 반성해 보았다.
이제 우리는 조선족을 볼 때, 뜨거운 가슴과 함께 냉정한 눈이 필요하다. 첫째, 조선족을 한국말을 하는 중국인으로 보아야 한다. 앞으로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조선족은 중국에서 태어나 학교 다니고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그들의 조부모 또는 그 이상 선대 조상이 한국에서 왔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그들은 중국식 교육체계에 의해 중국사회에 필요한 교육을 받았고, 계속 중국에서 살아야 한다.
말이 통한다고 우리와 생각이 같고 정체성이 동일하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말만 통할 뿐 그 외에는 전부 다른 중국 국민인 것이다. 재미동포 3세 데이비드 김이나 일본에 귀화한 재일동포 4세 야마모또와 같다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조선족이 중국사회에서 우수한 소수민족이라고 인정받아가면서 조상의 고향인 한국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들은 한국인이 아니라 중국인이기 때문이다.
둘째, 필자가 주목하는 조선족의 잠재력은 이들이 갖고 있는 북한과 인적 네트워크이다. 조선족은 몇 단계만 건너가면 직·간접적으로 북한에 친척과 지인들이 있다. 그리고 이들은 북한방문과 소통에 제한이 없다. 이들이 북한 친척이나 지인에게 “한국이 모든 면에서 북한보다 월등하다. 한국은 살기 좋은 동네다. 사람들도 친절하고 인정도 많더라. 한국 주도로 통일돼야 한다”라고 그들이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얘기한다면, 북한 주민들은 이 말을 신뢰할 것이다.
그리고 북한이 급변사태 등 체제 변화의 순간에 도달했을 때, 한국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중국으로 갈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주저 없이 한국을 택할 것이다. 어느 북한 이탈주민은 북한 사회에서도 “민심은 천심이다”라고 말했다. 김정일이나 김정은이 아무리 자본주의 날라리 풍이니 반사회주의 반동사상이니 하며 단속해도 한류의 확산을 막지 못한다. 주민들의 삶의 터전인 장마당도 통제하기 어렵다.
조선족을 통해 북한주민을 움직일 수 있고, 북한 주민은 곧 북한의 변화를 주도할 수 있을 것이란 얘기다. 이런 나의 논리에 동의한다면 주위에서 만나는 조선족에게 정다운 말 한마디와 격려의 눈짓을 보내주기 바란다. 그런 작은 매려가 통일에 큰 기여를 할 것이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북한과 중국을 동맹으로 묶어주는 것은 ‘중북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이후 중북 안보조약)이다. 지난 7월 11일은 조약 체결 60주년 기념일이면서 20년 단위의 유효기간이 자동 연장되는 시점이었다. “어느 일방의 폐기 요청이 없으면 자동 연장된다”라는 조약 7조에 따른 것이다. 중국과 북한은 상호 친서교환으로 60주년을 축하하면서 향후 2041년까지 유효기간을 자동 연장시켰다.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했을 때 중국에서 북한이 전략적 부담이라고 주장한 일부 학자들이 있었다. 북한을 비난하는 국제사회의 여론에 동참하자니 북한이 반발하고, 북한을 두둔하자니 책임 있는 대국으로서 위상에 손상이 갈 뿐만 아니라, 불량국가를 감싼다는 국제사회의 비판에 대응할 명분이 약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북 안보조약’을 폐기해야 된다고 주장했지만, 미·중 패권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이어서 이런 소수 의견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
북한 또한 아무리 중북관계가 악화된 경우라도 조약 폐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이 없었다. 이와 같이 중국과 북한은 모두 이 조약이 자국에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고 있다. 오늘은 ‘중북 안보조약’에 대한 이야기로서, 최명해의 ‘중국·북한 동맹관계-불편한 동거의 역사’라는 책에서 주요 개념을 발췌해 인용했음을 밝힌다.
최명해는 두 가지 의문점에서 출발하여 중북 안보조약을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조약이 왜 1961년에 체결됐는가’이고, 둘째는 ‘조약에 가상적이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조약의 특징인 소위 ‘자동개입 조항’에 대한 해석도 덧붙이고 있다.
첫째, 중북 안보조약이 체결된 1961년은 중국군이 북한에서 철수한 1958년 이후부터 3년이 경과한 시점이다. 이 기간은 북한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대응할 동맹체제가 형성되지 않은 안보 공백기였다. 북한은 중국 및 소련과 안보조약이 필요했다. 북한은 6.25전쟁 이전인 1949년부터 중국에게 동맹조약 체결을 요청했지만 중국은 미국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면서 북한의 요구를 거부해왔다.
그렇지만 중·소 분쟁이 점차 심각해지면서 북한이 소련 쪽으로 기울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중국을 움직였다. 중국 입장에서는 북한의 요구대로 미제의 침략에 함께 맞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북한이 소련과 손잡고 중국을 위협하는 상황을 사전 방지하는 것이 더욱 시급했다. 즉 북한의 행보를 통제할 필요를 느낀 것이다.
조약에는 중국과 북한의 요구가 모두 반영돼 있다. 북한의 요구는 ‘자동개입’ 조항으로 알려진 2조에 담겨있다. 이 조항은 “일방이 어떠한 한 개의 국가 또는 몇 개 국가들의 연합으로부터 무력 침공을 당해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 체약 상대방은 모든 힘을 다하여 지체 없이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라는 내용이다. 이 조항에 자동개입이란 표현은 없지만, 군사지원의 자동성과 즉응성을 밝히고 있다.
중국의 요구는 3조와 4조에 명시돼 있다. 3조는 “체약 쌍방은 체약 상대방을 반대하는 어떠한 동맹도 체결하지 않으며, 체약 상대방을 반대하는 어떠한 집단과 조직, 어떠한 행동에도 참가하지 않는다”로 소련과 협력하지 말라는 의미다. 4조는 “체약 쌍방은 양국의 공동 이익과 관련되는 일체 중요한 국제 문제들에 대하여 계속 협의한다”로 사전에 중국과 협의하라는 의미다. 6.25전쟁에 끌려들어간 경험 때문에 북한의 행보를 사전 통제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강대국이 약소국과 맺은 안보조약 중 자동개입과 관련해 이렇게 강한 표현은 드물다. 강대국은 약소국 문제로 행동이 제한받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은 소련과 먼저 조약을 체결하고 베이징에 온 김일성에게 ‘북소 안보조약’보다 더 확실한 약속을 해야 북한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북소 안보조약은 제1조에 “체약국은 ... 평화와 안전의 보장을 목적으로...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었을 경우, 지체 없이 군사적 및 기타원조를 제공한다”라고 평화와 안전의 보장이라는 전제조건을 붙이고 있다. 그래서 중국은 이런 전제조건 없이 무력침공을 당하면 자동개입이 되도록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북한이 먼저 공격하여 반격을 받을 경우는 제외한다”라고 자동개입에 관해 언급한 바 있다.
둘째, 조약에서 설정하고 있는 ‘가상적은 누구인가’이다. 동맹 형성의 전제조건은 공동 위협에 대한 공동 대응인데, 조약상에 가상적은 명시돼 있지 않다. 1950년 2월 14일 체결된 ‘중·소 우호협력조약’에도 “일본국 또는 일본과 침략행위에 있어서 연합하는 다른 국가”로 가상적을 명시했고, 소련이 동구권 국가와 체결한 조약에도 ‘히틀러주의의 침략자’로 명확하다. 중국이 미국을 가상적으로 명시한다면 미국과의 관계에 한계를 설정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최명해는 조약체결 형식에도 의문을 제시한다. 보통 강대국과 약소국 간의 안보조약은 강대국의 지도자가 약소국 수도에서 약소국에 대한 안보의지를 밝히며 체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조약은 베이징에서 체결됐다. 김일성이 소련과 이와 유사한 ‘북소 안보조약’을 1961년 7월 6일 체결한 다음 귀국길에 중국 베이징을 들러 7월 11일 저우언라이와 체결한 것이다. 평양에서 북한에 대한 안보지원 의지를 대내외에 선포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금년도 조약체결 60주년을 기념하면서 김정은과 시진핑 총서기가 주고받은 친서내용을 보면 이러한 관점이 명확하다. 김정은은 친서에서 적대세력의 도전과 방해 책동이 보다 악랄해지고 있다며 ‘적대세력’을 강조했다. 하지만 시진핑은 적대세력이라는 표현 없이 ‘전략적 의사소통’을 강화해 나가자고 제안했다.
친서 내용 속에 조약을 체결한 목적이 그대로 드러난다. 북한은 ‘적대세력에 대한 대응’이 목적이었다면 중국은 ‘전략적 의사소통’으로 북한의 행보를 사전 통제하려는 속셈이 담겨 있다. 역대 중북 정상회담에서 중국이 매번 ‘전략적 소통’을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연유가 있기 때문이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8월 30일, 종주를 시작한지 12일째 날이자 마지막 날이다. 오늘은 거진읍 반암리에 위치한 행운 민박에서 거진읍, 화진포, 대진리를 거쳐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까지 약 15㎞정도는 걷고 출입신고소부터 통일전망대까지는 차량으로 이동하는 여정이었다. 오늘 종주하는 지역에는 거진, 대진 등의 마을이 있고 유명한 관광지인 화진포가 있으며 6.25남침전쟁 시 격전지였던 월비산, 351고지 등이 있다.
지난 10일 동안 아침 식사를 담당했던 황금철 단원이 오늘은 사발면이 아니라 파도 썰어 넣고 달걀도 넣어 끓인 특별한 라면을 준비했다. 모두들 감사한 마음으로 맛있게 잘 먹고 6시경 민박집을 나섰다. 민박집 주인 아주머니는 텃밭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단원들 모두 아주머니가 베풀어준 친절함과 호의에 감사하며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특히 아주머니와 동갑인 박찬도 단원은 더 다정다감하게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아주머니께서는 “나에게 이렇게 따뜻하고 다정한 말을 해준 사람이 참으로 오랜만이다”라고 감격해 하셨다. 만나는 사람마다 진심어린 말로 힘과 용기와 편안함을 주시는 박찬도 다원이 존경스럽고 부러웠다. 우리는 바닷가 모래사장을 밟으며 여정을 시작했다.
DMZ 종주의 완주를 눈앞에 두고 있어서인지 대원들의 걷는 모습은 경쾌했다. 우리는 불가능 할 것 같았던 이번 도전의 마무리 지점에 와있었다. 거진 읍내를 통과하니 화진포 이정표가 보였다. 화진포 호수는 아주 오랜 옛날에는 바다였는데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모래로 바다와 격리돼 지금은 담수와 해수가 교차하는 천연 호수라고 한다.
면적은 약 72만평으로 여의도 넓이와 거의 비슷하고 호수 둘레는 10㎞가 넘는 산책길이 조성돼 있다. 이 호수와 바다 사이의 백사장이 화진포 해수욕장이며 울창한 소나무 숲이 유명하다. 호수 주위에는 고성군의 꽃으로 지정된 해당화가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방랑시인 김삿갓은 화진포의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 화진포의 8경을 읊었고, 그 중 3경이 平沙海棠(평사해당: 호수 주변 넓은 모래밭에 핀 붉은 해당화)이다.
이 호수는 바닷물이 들고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통로가 있고 호수 표면에는 담수가, 호수 깊은 곳엔 해수가 있어 민물고기뿐 아니라 바다고기도 살고 있다고 한다. 매년 여러 종류의 철새들이 찾아오고 다양한 생물들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닷가인데다 경치가 아름다워 산 중턱에는 광복 후 김일성 별장, 한국전쟁 후 이승만 별장, 이기붕 별장이 지어졌다.
대진항을 지나 통일안보공원 근처에 명파리 검문소가 있었다. 이 검문소는 민간인통제선 안쪽 지역을 출입하는 민간인을 검문하던 초소였다. 지금은 통행인들의 불편을 줄이기 위해 CCTV로 감시만 한다고 했다. 임무수행 중인 초병들이 CCTV로 우리를 확인하는 것 같더니 다가와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우리의 여정을 설명하며 현역 신분증도 보여 주었다. 초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해안가 경계 철조망을 따라 만들어진 순찰로를 걸었다.
대진항을 지나자 마차진 해변과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까지 700m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였다. 아침에 출발할 때 출입신고소까지 11㎞를 예상했는데 실제로 걸은 거리는 약 15㎞ 정도였다. 10시쯤 통일전망대 출입 신고를 마친 후 주차장에서 지인이 보낸 분을 만났다. 표정이 밝고 친절한 분이었는데, 그가 운전하는 차량으로 통일전망대까지 이동했다. 이동하는 길 서쪽 방향 5㎞ 지점에는 6.25전쟁 시 전투가 치열했던 월비산, 351고지 등이 있었다.
6.25전쟁 초기인 1951년 10월 중순부터 휴전 직전까지 7차례에 걸쳐 고지 쟁탈전이 있었다. 당시 1군단 예하 수도사단과 11사단 등은 월비산과 351고지 탈환을 위해 작전을 수행했다. 육·해·공군이 합동작전을 수행한 이 전투에서 해군은 지속적인 함포사격을 했고 공군은 총 1500여 회 출격해 적 핵심시설 및 진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휴전 협정 시 월비산과 351고지는 북한 땅이 됐다.
월비산과 351고지 전투 기념비는 통일전망대에 위치해 있었다. 이 기념비에는 “이 전투에서 호국의 신이 되신 전몰장병의 전공을 기리고자 1957년 7월 15일 제3군단에서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대진리에 전투기념비를 건립하고 관리해 오던 중 통일전망대가 설치돼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분들에게 민족분단의 아픔을 되새기고 조국 수호의 증표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그날의 격전지가 바라다 보이는 이곳으로 이전하였음. 1988. 12. 26”이라고 적혀 있었다.
통일전망대에 도착하니 해금강을 비롯하여 북한지역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고성군 홈페이지에는 분단 현실이 발아래 펼쳐있는 곳으로 분단의 아픔과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을 되새기고자 1984년에 통일전망대를 지었다고 설명돼 있다. 동해안 최북단인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호리 해발 70m 고지 위에 위치한 이 전망대에서는 16∼25㎞ 거리 떨어진 금강산을 볼 수 있으며, 해금강 대부분이 한눈에 보였다.
우리 넷은 함께 만세 삼창을 외쳤다. 우리 대한민국의 평화가 유지되기를 기원하며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지금은 갈 수 없지만 언젠가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그날을 기원하면서 감사기도를 올리고 성모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도 찍었다. 차량 지원을 나온 분이 사진을 찍어줘 오랜만에 단원 넷이 모두 나오는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1년 중에 해금강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날이 많지 않다는데, 오늘은 잘 보여서 우리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박찬도, 이창조 단원은 통일전망대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두 분은 2008년 4월 초에 이곳을 출발하여 5년여 동안 동해안, 남해안, 서해안을 돌고 돌아 4개월 전인 지난 2013년 4월에 임진각까지 도착해 ‘대한민국 U자 걷기’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걸어서 대한민국을 한 바퀴 돌아온 셈이다. 그 걷기에는 총 26명이 참여했고 필자도 2012년 서해안 구간 걷기에는 함께 했었다.
단원들 모두 이 곳에서 장시간 머물면서 아름다운 풍경도 보고 12일 간의 여정을 정리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갈 길이 멀었고, 차량 지원을 나온 분을 생각하니 지체 없이 출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돼 곧장 속초로 이동했다. 버스터미널 근처의 ‘아바이 마을 식당’에서 모둠 순대와 함흥냉면으로 식사하면서 지난 12일을 되돌아보고 기억에 남는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걷는 동안 내내 행복했다. 우리가 만난 사람들은 마음이 따뜻했고 지친 우리는 많은 도움을 받고 힘을 얻었다. 장거리를 잘 걸으려면 배낭의 무게를 줄여야 한다는 것과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면 고통스럽다는 것도 경험했다. 다리 근육의 힘은 걸을수록 강해진다는 것도 알았다. 물 한잔을 대접받으면서 감동했고, 아무리 좋은 비옷도 오랜 시간 비를 맞으면 속옷까지 젖는 것과 잠깐 쉬는 나무그늘이 얼마나 시원한 지도 경험했다.
우리는 고통을 겪는 상황에서도 “아는 것만큼 보인다. 내 주변 사람에게서 항상 배울 거리가 있다. 모든 사람이 다르고, 다름을 인정해야한다. 걸을수록 성취감이 커지고 자신감이 생긴다. 고통을 겪으며 선열들께 감사한다”라는 좋은 말도 나누었다. 또 “우리가 왜 걷는 거지?”라는 질문도 했고, “살아 있기 때문에, 건강하게 살기 위해, 삶의 의욕과 활기를 높이기 위해”라고 답했다. “가능하면 우리의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기면 좋겠다”라는 말도 했다.
이렇게 우리는 12일간의 대장정이었던 DMZ 종주를 마감했다. 함께했던 5670 단원들께 이 지면을 빌려 경의와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기도와 전화, 문자, 직접 방문 등으로 안전하고 건강하게 걸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모두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합니다. 그리고 DMZ 종주 완주를 축하합니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8월 29일, 종주를 시작한지 11일째 날이다. 오늘은 용대리의 설악산림 수련관을 출발하여 진부령 정상에 오른 후 진부리, 장신리를 거쳐 고성군 광산리, 대대리를 지나 거진항 근처 반암에 있는 행운 민박까지 걷는 여정이다. 5시경 기상하여 사발면, 선식, 우유 등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6시경 출발했다.
수련관 관리자에게 용대리 휴양림 입구까지 차를 태워 달라고 부탁했다. 최초 계획했던 오늘 여정은 이곳이 아닌 용대리 휴양림 숙박시설에서 금강산 건봉사 입구에 있는 민박집까지 약 28㎞였다. 그런데 숙소 위치가 변경돼 여기부터 걷게 되면 오늘 종주거리가 너무 길어져 무리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차를 타고 가면서 얘기를 나누다보니 짧은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다 왔다고 한다. 차에서 내리니 용대리 휴양림 입구가 아닌 진부령 정상이었다. 우리를 태워다준 관리자가 칠십 노구를 이끌고 걷는 단원들의 모습이 안쓰러워 걷는 거리를 줄여주려고 의도적으로 용대리 휴양림 입구를 지나쳐 정상까지 데려다 주는 호의를 베푼 것 같았다.
걸으려고 계획했던 길을 걷지 못하게 됐지만 그 분의 호의를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되돌아가는 것도 아닌 듯해 진부령 정상부터 걷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예약한 민박집까지 거리는 10여㎞ 정도에 불과했다. 불현듯 예약된 숙소를 변경하여 오늘 좀 더 걸으면 내일 부담이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예약을 취소하면 민박집에 피해를 줄 것 같아서 마음이 걸렸다. 그런데 참 묘한 상황이 전개됐다.
마침 예약된 민박집 주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근처의 신축건물 공사장에서 일하는 일꾼 여러 명이 오늘 방을 비우기로 했었는데 공사가 지연돼 숙박을 연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박집 주인은 난감해 하면서 대신에 다른 민박집을 좋은 조건으로 소개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내가 예약을 취소하고 싶었는데 오히려 다행이었다. 나는 인심 쓰는 것처럼 괜찮다고 답한 후, 소개해준 거진항 근처의 행운 민박으로 숙소를 새로 정했다.
진부령 정상 공간은 널찍했다. 이 공간에 세워진 향로봉지구 전투 전적비에는 “맹호 수도사단 용사들은 단기 4284년(1951년) 5월 7일부터 동년 6월 9일까지 89회에 달하는 ‘괴뢰 제5군단’의 반격을 격퇴하고 설악산과 향로봉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고성군에서 운영하는 진부령 미술관도 있었다. 어떤 전시물이 있을지 궁금했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라 문이 잠겨 있었다.
진부령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백두대간은 산은 산대로 계곡은 계곡대로 그 줄기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또 산봉우리를 따라 이어지는 능선도 아름다웠다. 진부령은 추가령, 대관령과 함께 영동과 영서를 잇는 3대 고갯길이다. 그중 진부령은 높이가 529m로 가장 낮은 고개다. 이러한 특성으로 영동지방에 눈이 많이 와도 진부령은 여간해서 통제되지 않았다고 한다. 옛날 보부상들이 넘던 오솔길이 1987년 왕복 2차선 도로로 확장 포장됐다.
꼬불꼬불한 진부령 길을 돌고 돌아 정상에서 약 십리 정도 내려오니 장신리 이정표가 보였다. 길가에는 커다란 돌에 ‘소똥령 마을’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마을 이름이 독특하여 근처 상점에서 잠깐 쉬며 주민으로부터 지명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장신리’라는 행정구역 명칭보다 ‘소똥령 마을’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면서 ‘소똥령 마을’로 불리게 된 두 가지 설을 들려주었다.
하나는 동쪽의 작은 고개라는 의미로 소동령(小東嶺)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된소리로 발음하다 보니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옛날 영동지역에서 인제군 원통으로 소를 팔러 가려면 이곳에서 쉬거나 하룻밤을 묵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러다 보니 길 여기저기에 쇠똥이 있었고 그런 모습을 보고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대다수 주민들은 ‘소똥령’이라는 명칭을 더 즐겨 쓰고 있다고 한다.
조금 더 내려오니 ‘건봉사’라는 사찰의 방향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였다. 건봉사는 고성군에 위치한 사찰로 금강산 줄기가 시작되는 건봉산 감로봉의 동남쪽 자락에 있어 ‘금강산 건봉사’로 불린다. 이 사찰은 신라 법흥왕 시절에 창건된 사찰로 약 1,500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6·25전쟁 시 폭격으로 수백 칸에 이르던 전각이 모두 폐허가 됐고 지금은 근래에 복원한 건물만 단출하게 서있다고 했다.
고성군 광산리를 지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친필 휘호가 새겨진 바위가 있었다. 휘호 내용은 ‘爲國盡忠’이었다. 안내판에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께서 6.25전쟁 당시 11사단을 지휘하는 사단장에게 ’조국을 위해 충성을 다하라‘는 뜻으로 친필을 하사했고 그 시기는 1951년 9월경이며 친필휘호의 바위 음각 시기는 하사 받은 해 봄이라고 적혀 있었다.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지면서 먹구름이 몰려들었고, 곧이어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아스팔트 도로임에도 불구하고 금방 도랑 같은 물길이 만들어 졌다. 비를 피할 곳도 없어 비를 맞으며 계속 걸었다. 마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쬘 때도 걷는 것처럼. 시원한 비를 맞으며 걷는 행운을 만났다고 생각하며 내리는 비를 즐기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대원들은 도로에 고여 있는 물도 아랑곳하지 않고 첨벙첨벙 걸으며 속도를 높여 걸었다. 우리는 모두 우비를 입고 두 시간도 넘게 걸었다. 비옷을 입을 때에는 겉옷이 젖을까 노심초사 했었는데 나중에는 속옷까지 모두 젖었다. 신체 모든 부위의 감각이 내리는 비의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사관학교 다닐 때 여름에 군사훈련을 받으며 이렇게 억수같이 내리는 비에 온몸을 적셨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맨몸으로 자연에 덩그러니 버려진 것 같은 상황을 경험하며 평상시 자각하지 못했던 느낌이 왔다. 그리고 우리가 더없이 약한 존재라는 사실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 ‘야지에서 비를 피할 방법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비를 맞고 걷고 있다’는 상황을 생각하면 불쌍하고 측은한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시원함, 홀가분함 등 좋은 느낌을 느끼며 걸었다.
우리는 모두 흠뻑 젖은 상태로 오후 2시경 행운 민박에 도착했다. 비가 계속 내렸기 때문에 점심은 우동, 짬뽕, 간짜장, 탕수육을 배달시켜 먹었다. 다행히 한 단원과 동갑인 함경도 출신의 주인 아주머니가 모든 세탁물을 가져오라고 하여 세탁기로 돌려주셨다. 비가 그친 후에는 빨래 줄을 가져와서 널 수 있도록 준비해 주셨다. 한참 동안 휴식을 취했고, 비가 그친 후 우리는 동네를 한 바퀴 돌며 바다 구경도 했다.
저녁은 해변 횟집에서 회 정식으로 먹었다. 푸른 바다를 보며 시작한 만찬이었는데 주변이 깜깜해질 때 끝났다. 참으로 오랜만에 편하고 여유롭게 앉아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일 약 10여 ㎞만 걸으면 여정을 마무리한다는 생각과 함께 DMZ 종주 기간에 있었던 일들로 떠올리며 편안한 마음으로 마지막 밤 잠자리에 들었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8월 28일, 종주를 시작한지 10일째다. 오늘은 원통리에 위치한 을지회관을 출발하여 한계리, 남교리를 거쳐 용대리의 설악산림 수련관까지 약 28㎞를 걸었다. 인제군 북면은 면사무소가 있는 원통리의 ‘원통’이란 이름이 더 유명하다. 북면은 동해안으로 접근하는 관문으로 진부령을 넘으면 고성군, 미시령을 넘으면 속초시, 한계령을 넘으면 양양군과 연결된다. 인제에는 향로봉, 서화계곡, 노전평 지구, 백담사, 만해 마을 등이 있다.
5시경에 컵라면과 어제 정전택님이 가져온 햇반, 김, 몇 가지 반찬을 곁들여 아침식사를 하고 6시경 숙소를 출발했다. 조금 걷다 보니 원통리 표지석이 보였다. 표지석에는 ‘원산으로 가는 통로’라는 의미로 원통이 정해졌고, 조선시대에 원통역(驛)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당시에는 대체로 30리마다 역(驛)을 운용했다. 역은 말을 이용해 국가 교통 및 통신 기능을 수행했던 곳이나, 근대적인 통신 제도와 교통수단의 출현으로 1896년에 사라졌다.
하천을 따라 백담사 입구 마을까지 약 5시간 정도 걸었다. 걷는 동안 정자문, 12선녀탕 계곡 입구, 용대초등학교, 백담사 입구를 지나 용대삼거리까지 걸었다. 용대리 지역은 상당히 넓어 도중에 길을 잘못 들어 고생도 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냇가 커다란 나무 그늘에서 더위를 피해 친구들과 어울리는 분들에게 매운탕과 소주도 몇 잔 대접받았다.
여기저기에 군락을 이루며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는 설화초(설악초)도 보였다. 식물에 관해 박식한 한 단원이 “이 꽃은 눈이 내린 것처럼 하얗고 잎 색깔도 눈꽃처럼 하얗게 변해 설화초로 불린다”고 설명했다. 설화초의 꽃말은 ‘환영과 축복’인데, 이곳에 오는 사람들을 환영하는 의미로 심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담사 입구 마을에서 깔끔한 중국집을 찾아 짜장면을 먹은 후 공기 좋은 휴양림 콘도에서 묵는다는 즐거움에 부지런히 걸어서 용대자연휴양림에 도착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안내 데스크에서 예약된 방을 찾았다. 그런데 안내 데스크 근무자는 예약자 명단에 내 이름이 없다고 했다. 예약했다던 지인의 이름도 없어서 순간 아주 당황스러웠다.
오늘 묵는 숙소가 예약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사전 답사를 하면서 숙소를 정하고 예약 했는데, 10일째 숙소는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남아있는 거리와 일자를 고려하니 용대리가 적절했다. 그러나 마땅한 숙소를 발견할 수 없어 고민하다가 휴양림에 숙박시설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당시 산림청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전화해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지인은 예약이 가능한지 알아보겠다고 했고, 며칠 후 수련관이 예약됐다는 연락과 함께 전화번호도 받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용대리 지역의 숙소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그런데 예약자 명부에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지인으로부터 받은 전화번호로 연락해 보니 예약된 숙소는 지금 우리가 있는 진부령 근처가 아니라 미시령 근처라고 했다.
이곳 사정을 잘 모르는 필자가 용대리라는 말만 듣고 이곳에 비슷한 시설이 2군데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예약된 숙소는 10㎞ 이상 떨어져 있었고, 대중교통도 없는 상황이었다. 미시령 근처 수련관을 관리하는 분께 우리의 상황을 설명하고 부탁을 드렸더니 고맙게도 차를 몰고 와주셨다. 덕분에 편하게 미시령 옛길 관광도 하며 오후 5시경 숙소인 설악산림 수련관에 도착했다. 콘도 형태로 시설을 갖춘 깔끔한 공간이었다.
우리가 오늘 걸은 인제군 일대는 6·25전쟁 시 향로봉 전투와 노전평 전투가 있었던 지역이다. 향로봉 전투는 맹호부대가 1951년 3월 7일부터 그해 7월 9일까지 중공군과 벌인 전투다. 중공군은 중동부지역의 요충인 인제를 확보하기 위해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부대를 증원하여 설악산과 향로봉 일대를 여러 차례 공격했다. 그러나 맹호부대는 이를 격퇴하고 설악산 및 향로봉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서화 계곡의 노전평 부근에서는 1951년 8월 초순부터 1953년 7월 휴전 성립 직전까지 장기간 고지 쟁탈전이 벌어졌다. 당시 8사단은 인제 서화리 축선과 인접한 고지군을 차지하기 위해 요충지인 노전평을 점령했다. 이 전투에서 8사단은 승리했지만 전사 90명, 부상 536명, 실종 17명 등 피해도 컸다. 노전평 전투에서 전사한 90명 중 한 명일 것으로 추측되는 전사자의 아내가 말한 사연이 문득 생각나 마음이 아팠다.
지난 2017년 10월 24일 뉴스1은 ‘66년 만에 가족 품으로 돌아오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6.25전쟁 중이던 1951년 8월 8사단 10연대 소속으로 노전평 전투에서 전사한 김창헌 일병(1924년생)의 부인 황용녀(94)씨 자택을 방문해 전사자 신분확인 통지서와 유해 수습 시 관을 덮었던 태극기 그리고 발굴된 인식표와 도장 등 유품을 전했다. 고인은 노전평 전투 중 적의 총탄을 맞은 것으로 추정되며 28세의 나이에 전사했다.
부인 황씨는 “남편이 자원입대 했을 때 임신 중이었고 남편도 임신한 사실을 알았다”며 “남편은 태중의 아이를 남자로 생각해 ‘김인석’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전쟁터로 떠났다”고 했다. 남편이 떠나고 10일 후 딸이 태어나자 황씨는 “남편이 소중하게 지어준 아이 이름을 바꿀 수 없어 그대로 쓰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보따리 장사와 노점상을 하며 홀로 딸을 키웠는데, 이제라도 남편의 유해를 찾아 만나볼 수 있어 너무 감격스럽다”며 눈물을 흘렸다.
딸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남기고 산화한 젊은이, 60여년을 홀로 살며 딸을 키워 할머니가 된 여인, 남편의 얼굴이 아닌 유해를 만나는 것으로라도 감격스러워하는 여인, 딸 바보였을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함은 물론 아버지 얼굴조차 모르는 딸…. 그 삶이 어떠했을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6·25전쟁 시 한국군 사망자(실종자 포함)는 60만 9천여명이라고 한다. 이 분들은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그리고 후손들에게 자유 대한민국을 남겨주기 위해 목숨을 바치셨다. 우리는 이분들에게 감사해야 하고 경의를 표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유족들에게 보답도 해야 한다. 하지만 천안함 전사자를 포함해 국토방위 임무를 수행하다 순국한 분들을 대하는 일부 위정자들의 모습과 태도에 안타까움과 함께 분노가 느껴진다.
숙소에 도착한 후 그동안 많이 가벼워진 배낭의 짐을 풀고 땀 냄새가 진동하는 옷부터 빨았다. 관리하는 분이 짤순이를 돌려 빨래의 물기를 빼 주셔서 저녁 햇볕에도 잘 말랐다. 숙소에서 가까운 봉평 메밀 막국수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음식점 건물은 노부부의 큰아들이 부모님을 위해 특별히 설계했다는데, 민박도 받는 방 내부는 깔끔했고 노래방기기도 있었다. 노래를 좋아하는 주인과 함께 어울려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오늘 숙소 변경 문제로 많이 당황했던 것을 생각하며 내일 묵을 숙소에 전화를 걸어 예약 상태를 다시 확인했다. 집을 떠나온 지 열흘이 지났고, 이제 종주 일정은 2일 남았다. 한 방에서 넷이 묵었지만, 설악산의 맑은 공기를 느끼며 편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8월 27일, 종주 9일째이다. 오늘은 양구군 남면 광치터널 근처의 컨테이너 숙소를 출발하여 광치령로를 따라 걸었다. 광치터널을 통과한 후 서호교를 건너 인제 읍내를 지난 다음, 합강리를 거쳐 인제군 원통면에 있는 을지회관까지 약 28㎞를 걸었다. 우리가 종주한 인제 지역에는 광치령, 인제지구 전투 전적지, 리빙스턴교 등이 있었다.
오늘 아침은 양구 휴게소 아주머니가 김치를 곁들여 끓여준 표고버섯 라면을 맛있게 먹었다. 우리들이 먼 길을 걸어왔고 아직 가야할 길이 상당하다는 것을 아는 아주머니는 먼 길 떠나는 자식에게 하듯이 밥을 수북이 담은 고봉밥 여러 그릇을 식탁에 갖다 놓으며 많이 먹으라고 권했다. 이에 감사한 마음을 담아 아주머니와 기념사진도 한 장 찍었다.
오전 6시가 되기 전에 출발했다. 구름이 약간 낀 날씨였다. 광치령로를 걸어 6시경 광치터널 입구에 도달했다. 터널을 지난 후에는 오르막길이 아니어서 걷기가 수월했다. 광치령의 표고는 약 800m이다. 양양 60㎞, 인제 12㎞라는 이정표도 보였다. 양구와 인제, 원통을 연결하는 광치령 인근에는 울창한 원시림이 조성돼 여러 개의 폭포와 계곡들이 있었다.
우리가 오늘 걸은 광치령 길은 잘 닦여진 왕복 2차선 아스팔트 도로였지만 광치령 옛길은 오솔길이었다고 한다. 이 길은 워낙 높고 험해서 보통 사람은 걸어서 넘을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이 길을 북한이 6·25전쟁을 준비하며 확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1994년에는 광치 터널이 준공돼 지금은 자동차로도 수월하게 넘을 수 있게 됐다.
필자가 1981년 초등군사반 교육 후 초임지 명령을 받았을 때 특히 중동부 전선의 백두산 부대와 을지 부대로 배치되는 동기들과 위로주를 마시던 기억이 났다. 그때 우리는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 할 것이라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옛날에는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라는 말도 있었는데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된 지금은 그런 말이 사라진 것 같다.
38선 이북에 위치한 인제군은 1945년 광복 이후 북한이 남침하여 6·25전쟁을 일으키기 전 까지는 북한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이 수복했다가 중공군의 개입 후에는 국군이 후퇴하여 북한에 편입되는 등 전쟁의 영향을 많이 받은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연합군은 1953년 5월 20일부터 반격작전을 전개했다.
홍천부터 진격해 소양강의 교량을 점령하면서 교두보를 확보했고, 이어 관대리와 인제를 탈환하고 6월 4일 원통리까지 북진했다. 이 전투로 중공군에게 빼앗겼던 인제와 현리 지역 등 중동부전선의 실지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고 산화한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1958년 합강리에 인제지구 전투 전적비가 건립됐고 1997년 인제군 남북리로 이전했다.
이 지역에는 합강리와 덕산리를 잇는 리빙스턴교가 있는데, 인제지구 전투와 관련한 아픈 사연이 있다. 당시 미2사단 포병연대에 소속돼 작전을 수행하던 리빙스턴 중령은 북방 2㎞ 지점에서 매복해 있던 적군의 기습을 받았다. 리빙스턴 중령은 덕산리에서 인북천을 건너 합강리로 후퇴하기 위해 도하를 시도했으나 폭우로 강물이 불어나 대다수 부대원들이 강을 건너지 못하고 적군의 총탄에 전사했다. 그도 중상을 입고 후송됐지만 끝내 세상을 떠났다.
야전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던 그는 ‘이 강에 다리가 놓여있었다면 이렇게 많은 부하들이 희생되지 않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을 말하고 미국에 있는 아내에게 ’사재를 털어서라도 인북천에 다리를 놓아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부인이 다리 건설에 필요한 기금을 희사해 1957년 12월 4일 길이 150m 폭 3.6m의 아이빔에 붉은 페인트를 칠한 목재 난간의 다리가 세워졌다. 이 다리는 리빙스턴 중령의 희생과 자유 수호를 기리는 상징물이 됐다.
아무런 생각 없이 내리쬐는 태양을 벗 삼아 맑은 공기를 마시며 즐겁게 걸었다. 가끔 꽃밭을 잘 가꾼 집도 보였다.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산과 계곡, 파란 하늘과 구름에 둘러싸인 산봉우리들은 아름다웠다. 산을 감싸고 흐르는 물줄기는 생명을 탄생시키고 산하를 기름지게 만들며 울창한 숲이 만드는 능선의 녹색 물결이 길을 걷는 우리들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준다.
우리 국토가 베풀어주는 편안함의 이치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스페인 까미노 길을 30여일 걸으며 만났던 넓고 끝없는 평원, 이집트에서 2년간 머물면서 경험했던 생명체가 존재할 것 같지 않은 황량한 사막이 떠오르며, 우리 국토는 ‘생명을 탄생시키고 편안함을 느끼게 만드는 녹색 산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설악을 품은 인제”라는 현수막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원통 읍내의 중국집에서 우동과 간짜장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많이 쉬었다가 일어났다. 을지회관으로 가는 도중 한사모 회원 중 특별한 인연이 있는 정전택님의 전화를 받았다.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 원통에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회관 입구에서 만나 반갑게 포옹했고, 그와의 인연이 시작된 과정이 떠올랐다.
필자는 2012년 4월 강원도 원주에서 열린 ‘100㎞ 걷기대회’에 처음 참가해 완보했다. 그 후 2017년까지 6년 연속 완보했고, 올해 다시 참가해 현재 7회를 완보했다. 100㎞ 완보는 엄청난 경험이었으며, ‘나는 100㎞ 완보 후 내 인생이 바뀌었다’라고 여러 사람들에게 얘기했다. 그리고 매년 주변의 지인들에게 함께 걷기를 권했고, 정전택님과는 그렇게 맺어진 인연이다.
그는 한사모 주말걷기 회원이었고, 매주 일요일 함께 걷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필자가 그랜드슬램 워커가 된 사실을 알게 됐다. 2013년 어느 날 그는 100㎞ 걷기에 도전한다고 선언했다. 나이를 고려해 부인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2014년 100㎞ 걷기대회에 참가해 거뜬히 완보했다. 그리고 그해 7월 ‘제주도 250㎞걷기 대회’와 9월 ‘군산 새만금방조제 66㎞ 걷기대회’에 참가해 여러 사람의 박수를 받으며 여유롭게 완보했다.
대한걷기연맹에서는 그에게 ‘2014년 그랜드슬램 워커’라는 타이틀을 부여했다. 그리고 그가 대한민국 최고령 그랜드슬램 워커라고 발표했다. 2014년 당시 그분의 나이는 77세였다. 정전택님은 “걷고자 하는 의지가 있고 충분히 준비하면 나이는 커다란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실천한 선구자였다.
정전택님과 우리들은 수다를 떨며 걷기와 관련한 여러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여기 걷고 있는 사람들이 몇 년 후에 다시 이 코스를 걸으면 좋겠다. 어쩌면 그때는 나이가 80이 넘은 사람도 있을 테니 그때는 ’6780 순례단‘이란 이름으로 걷자”라는 얘기도 했다. 어떤 분은 “젊은이들을 동참시키는 것도 의미가 있으니 40대가 포함된 4080단을 만들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현대인 중 적절한 운동 없이 건강 유지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면 아주 오랫동안 운동을 거의 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운동 부족으로 건강함을 잃어버리는 시대이기도하다. 그리고 건강을 얘기하면 건강관리를 말하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착각에서 벗어나 운동을 실천해야만 건강이 관리될 수 있다. 걷기는 모든 사람이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운동임이 분명하다. 남다르게 건강관리를 꾸준히 실천하고 있는 정전택님이 존경스럽다. 그리고 우리들이 가볍게 나눈 대화이지만 시간이 지난 다음에 어떤 형태로든 다시 한 번 더 이 길을 걸을 기회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저녁은 회관 식당에서 오리 백숙을 시켜 잘 먹었다. 정전택님은 다음날 우리가 먹을 햇반과 반찬, 포도주 팩 등을 가져오셨다. 걷기대회 경험이 많으셔서 그런지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맛있는 저녁도 사주셨다. 지면으로나마 다시 그 때의 감사했던 마음을 전한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8월 26일, 종주 8일째에 접어들었다. 오늘은 숙소인 상승회관을 출발하여 풍산리, 해산터널, 해산령 정상, 비수구미, 평화의 댐, 오천터널을 거쳐 광치터널 입구까지다. 종주 거리는 약 60㎞이나 실제 걸은 거리는 40여㎞ 정도이다. 오늘 걸은 양구 지역은 한반도 중동부 전선의 일부분이며 을지전망대, 펀치볼, 제4땅굴, 도솔산 등이 있다. 숙소를 출발해서 조금 걷다 보니 ‘평화로’에 들어섰다. 460번 지방도인데 ‘평화로’라는 이름을 붙인 것 같았다. 어떤 의도로 부여된 이름인지 모르겠으나 ‘평화’ 라는 단어의 의미를 생각하며 걸었다. 한참 걷다 보니 해산터널 입구였다. 해산터널은 해발 702m, 길이 1,986m로 터널 입구에 “최북단, 최고봉, 최장 터널”이란 팻말이 있었다. 터널 내부의 보행자 길은 아주 좁아 차량들이 지나갈 때 다소 불안했지만 기온은 낮아 시원했다.
터널을 통과한 후 ‘아흔아홉의 구비길’이라는 팻말이 보였다. 가는 길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조금 더 걸으니 해산령의 ‘해오름 휴게소’가 보였다. 휴게소 앞 안내도에는 “해산 전망대, 비목의 고장 화천을 찾아주신 여러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곳은 화천에서 평화의 댐으로 가는 아흔 아홉 구비의 중간 길목으로서 남과 북을 잇는 민족의 명산인 해산 절경을 한 눈에 전망 할 수 있는 쉼터입니다”란 설명이 있었다.
이어 비수구미(秘水九美: 신비로운 물이 빚은 아홉 가지 아름다운 경치)라고 적힌 팻말을 지나 여러 구비를 돌아 평화의 댐에 다다랐다. 이 댐은 북한의 수공(水攻)에 대비하고 홍수도 예방할 목적으로 1987년 2월 착공하여 1989년 1월 1단계 공사(높이 80m)를 완료했다. 2002년부터 2단계 공사(높이 125m)를 다시 시작해 2005년 10월 마무리됐다. 댐의 길이는 601m이며 최대 저수량은 26억 3천만 톤이라고 한다.
평화의 댐은 많은 국민들의 성금으로 만들어졌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할 수 없지만 나도 평화의 댐 건설에 성금을 낸 기억이 있다. 바로 가까이 DMZ가 있고 남북이 대치하는 현실을 생각할 때 온 국민이 평화를 갈구하고 있다는 의미를 담아 이 거대한 구조물에 평화의 댐이란 이름을 붙인 것으로 생각됐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댐 아래로 보이는 파로호는 평화로웠다.
평화의 댐 상류 쪽에는 비목 공원이 있었고, ‘비목’의 노랫말이 새겨진 기념비도 있었다. 이 가사는 정전(停戰)된 후 10여년이 지나 백암산에서 근무하던 한명희 작사가가 지었다. 그는 치열한 전투로 화약 연기 가득했을 백암산 깊은 계곡에서 수많은 돌무덤과 오래되어 이름도 알 수 없는 많은 목비(木碑)를 보았고, 달밤에 순찰을 돌 때 ‘이름 모르는 전사자들의 절규가 들리는 것 같았다’며 산화한 젊은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했다.
어쩌면 사람들은 평화의 의미도 제대로 모르면서 평화 타령을 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국가의 안위와 평화를 위해 생명을 담보로 헌신하는 사람들이 군인이란 점은 분명하며, 6·25전쟁의 포성은 잠시 멎었지만 아직도 전쟁은 진행 중이다. 더 이상 한반도에서 전쟁이 없도록 대비를 잘하고 모든 국민과 후손들이 평화롭게 삶을 영위하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걸었다.
오늘 종주한 양구 지역에는 을지전망대, 펀치볼, 제4땅굴, 도솔산 등이 있다. 을지전망대는 양구 북방 27㎞, 군사분계선으로부터 약 1㎞ 남쪽 지점에 있는 가칠봉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북한 전방지역을 보려는 국민들이 꼭 들리는 안보관광지로서 날씨가 좋을 때는 금강산 비로봉과 4개의 봉우리(차일봉, 월출봉, 미륵봉, 일출봉)도 볼 수 있다고 한다.
펀치볼은 해발 400∼500m의 고지대에 발달한 분지이다. 1950년 전쟁 당시 양구군에 있는 가칠봉에 오른 연합군 종군기자가 봉우리에서 내려다본 지형이 마치 화채 그릇(Punch Bowl)과 비슷하다고 해서 불리게 됐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제4땅굴은 양구 북방 26㎞지점 DMZ 안에서 발견됐는데, 군사분계선과 불과 1.2㎞ 떨어져 있다.
이 땅굴은 1990년 3월 발견되었고, 땅굴 출입구에는 기념비와 안보 교육관 그리고 군견 ’헌트’의 동상이 있다. 헌트는 땅굴 추적과정에서 북한군이 설치해 놓은 지뢰를 밟아 산화하면서 여러 장병들의 소중한 목숨을 살린 공로가 있다. 헌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육군 소위로 추서됐고, 땅굴 입구에 동상을 세워 그 공로를 기리고 있다.
양구와 인제 사이의 험준한 산악지역인 도솔산에서는 1951년 6월 4일부터 19일까지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미 해병대 1사단에 배속된 우리 해병대 제1연대는 4,200명의 북한군을 상대로 치열한 육박전과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 24개 고지를 하나씩 점령하면서 전진했다. 고지 하나를 점령했다가 빼앗기고 또 빼앗는 전투를 반복하며 24개 고지를 6월 19일까지 완전히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 아군도 7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북한군 2,263명을 사살하고 44명을 생포했다. 산악전 사상 유래가 없는 치열한 대공방전으로 한국군 해병대 5대 작전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그 뒤 해병대에서는 ‘도솔산의 노래’라는 군가를 제정하여 그날의 승리와 용전의 기백을 후배 해병들에게 널리 알리고 있다.
평화의 댐을 약 3㎞ 지나 ‘평화쉼터’란 식당에서 오후 2시경 제육볶음으로 점심을 먹었다. 식사 후 근처의 바람골에서 흐르는 물에 발도 담그고 폭포도 구경하며 푹 쉬었다. 식당 사장님은 2남 1녀를 홀로 키운 여장부인데, 평화의 댐 건설 시 공사장에서 식당을 운영한 것이 계기가 돼 이곳에 자리를 잡았으며, 지금은 음식점과 가게 그리고 민박까지 운영하고 있다.
우리가 종주하던 그 해에는 피서객들이 상당히 많이 찾아 바쁘게 일했다고 했다. 바쁠 때에는 양구 방산면에서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는 큰 아들과 역도 선수인 둘째 아들, 그리고 시집간 딸까지 나서서 일을 거들어 준다고 했다. 여기서 양구까지는 민가도 없고 걷기에 너무 멀어 택시를 불러 이동할 계획이었는데, 마침 사장님 사위가 와서 우리를 양구까지 태워주었다.
오늘 숙소는 광치터널 입구 근처에 있는 컨테이너 숙소다. 비록 컨테이너지만 감지덕지한 마음으로 저녁을 맞이했다. 우리는 익숙한 장소, 사람, 음식 등으로 둘러싸인 심리적 안전지대에서는 마음이 편안하다. 하지만 안전지대 밖으로 한 발짝만 내딛으면 불편하고 괴로우며 난처한 일과 마주친다. 때로는 이런 모험에서 숨겨진 보물을 만나는 즐거움과 행복도 있다.
오늘 숙소 인근 휴게소에서 만난 두 손이 없는 심마니 아저씨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도 우리에게는 숨겨진 보물 같았다. 삶의 행로는 마음속에 정해놓은 여정과 일치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굳이 마음속의 시나리오에 자신의 인생 여정을 억지로 맞추기 보다는 삶의 과정을 좋아하여 전념하다 보면 만족할 수 있고 행복해 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8월 25일, 종주 일곱째 날이다. 오늘은 대성산 인근의 승리회관을 출발하여 봉오리를 지나 율목교, 파포리, 상서면사무소, 파포삼거리를 거쳐 파포고개를 넘어 화천읍으로 향했다. 봉오리부터는 아스팔트 포장이 잘된 461지방도였다. 구만리의 파로호 전시관을 지나 풍산리에 있는 칠성부대 상승회관까지 약 26㎞를 걸었다.
이 지역은 6·25 전쟁 당시 파로호 전투, 426고지, 406고지 전투가 있었던 지역이다. 새벽 5시 10분, 선식과 우유로 아침을 먹고 평상시보다 좀 서둘러 오전 6시가 되기 전에 출발했다. 우연히도 단원 모두가 천주교 신자여서 어제 잠자리에 들기 전 내일은 일요일이니 미사에 참석하자고 의견 일치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10여분 정도 걸으니 8305부대 위병소가 보였다. 32년 전 필자가 연대장님께 전입신고를 했던 부대다. 그리고 어제 위문 왔던 선임하사 윤현준님을 처음 만난 곳이기도 하다. 부대 가까이에 있던 군 관사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 같았다. 그 당시 선임하사의 집은 군 관사였는데, 소대장 근무 시절 명절이나 생일 때 초대받아 식사 대접을 받은 기억이 났다.
어제 윤현준님께 그 이야기를 하니 정작 본인은 기억을 하지 못했다. 나에게는 낯선 환경에서 부대 음식만 먹다가 정성이 가득 담긴 따뜻한 음식을 대접받은 특별한 경험이어서 오래 기억에 남았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일상생활이었기 때문에 기억을 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지금과 비교하면 많은 것들이 열악했다. 병사들 내무반에는 벽돌과 진흙으로 만든 뻬치카라는 난방시설이 있었다. 석탄가루와 진흙을 섞어 만든 혼합물을 뻬치카에 태워 내무반을 따뜻하게 유지했다. 이를 전담 관리하는 ‘뻬당’(뻬치카 당번병)으로 책임감 있는 상병 또는 병장이 임명됐다. 뻬당은 밤새 뻬치카 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봐야 했지만 따뜻한 장소에 항상 있을 수 있어 병사들은 좋아했다.
그리고 장교들이 묵었던 독신자 숙소(BOQ)는 나무를 때서 난방을 했다. 저녁에 소대원이 방 바닥을 따뜻하게 데워 놓으면 온기를 느끼며 편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이른 새벽이 되면 방바닥의 온기는 사라지고 방안의 마실 물도 얼어 있었다. 당시는 목욕탕도 귀해 목욕을 하려면 인근 읍내에 나가야 했다. 근무가 없는 일요일에 가끔 나가 소주 한 잔을 곁들인 저녁식사를 하는 것이 당시 최고의 문화생활이었다.
봉오리 삼거리를 걸으면서 야외기동훈련, 연대전투단 훈련 등 타 지역에서 장기간 훈련을 하고 부대 복귀를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봉오리 지역을 행군하며 지나갈 때 길가의 지역 주민들로부터 따뜻한 격려도 받고 음료수도 나눠줘 마신 기억이 났다. 그때는 지역주민과 군의 관계가 상당히 인간적이었고 훈훈했던 것 같다.
4시간 20분 동안 조금 빠르게 걸었다. 율목교, 파포리, 상서면사무소, 파포삼거리를 지나 파포고개를 넘어 화천읍으로 향했다. 모두들 미사를 드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는지 쉬지도 않고 부지런히 걸어서 오전 11시에 시작하는 교중미사에 참석했다. 미사 후 성당 앞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휴식도 취하고, 친절한 교우님들이 주시는 달콤하고 향기로운 커피도 마셨다.
성당 근처에 있는 성원식당에서 여유롭게 점심을 먹고 오랫동안 편히 쉬었다. 자전거를 타고 자연을 만끽하는 사람들을 식당에서 만나 즐겁고 가벼운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들은 춘천을 출발하여 화천까지 왔고 평화의 댐까지 가는 중이라고 했다. 이어 구만리에 있는 파로호 전시관을 지나 풍산리에 있는 칠성부대 상승회관까지 걸어 이날 종주를 마쳤다.
6·25 전쟁 시 파로호, 426고지, 406고지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파로호는 1944년 5월에 화천댐이 건설되면서 만들어진 호수이며 건설 당시 이름은 ‘화천호’였으며, 상류에는 평화의 댐이 있다. 6·25전쟁 시 용문산 전투에서 6사단이 중공군 3개 사단의 공세를 막아낸 뒤 도망가는 중공군들을 파로호까지 추격하여 괴멸시켰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기념해 파로호(破虜湖, 오랑캐를 깨뜨린 호수)로 개명했고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파로호는 1945년 38선에 의해 북한령이 되었다가 휴전협정이 막바지에 이른 1953년 7월 20일에 금성천 및 화천댐 근처 425고지, 406고지 전투 결과 승리로 화천댐을 포함한 호수 전체가 우리 땅이 됐다. 그 결과 지금도 우리에게 풍부한 물과 전기를 공급하는데 기여하고 있으며 북에서 내려오는 물에 의한 홍수 피해를 조절할 수도 있게 됐다.
칠성전망대에서는 화천 북방 철책선 약 1.2㎞ 지점의 425고지와 406고지를 볼 수 있다. 그 지역에서는 6·25전쟁 막바지에 아주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1953년 7월 휴전을 앞두고 북한의 김일성은 “화천 발전소만은 넘겨줄 수 없다”며 탈환을 지시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화천 발전소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며 절대 사수 명령을 내리고 1953년 7월 19일 2군단 사령부를 직접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했다.
중공군은 1953년 7월 20∼22일 425고지를 계속 공격했다. 인해전술을 내세운 중공군의 공격에 아군은 백병전을 불사하며 싸워 고지를 지켰다. 그리고 7월 23∼24일 406고지의 3연대 6중대가 중공군의 마지막 공격을 격퇴하며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고지를 지켜낸 상태에서 휴전 협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규학 6중대장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규학 중대장은 전사하기 며칠 전 아내에게 애절한 사랑이 담긴 편지를 썼다. 그가 쓴 편지에는 “그리운 금원씨 날이 밝으면 어떤 임무가 주어질지 모르지만 이 밤 당신 꿈을 꾸리다”라는 애틋한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2020년 구순이 된 그의 아내 정금원 할머니는 남편이 전장에서 보낸 편지는 받았으나 오지 못한 남편을 아직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매일경제, 2020. 06.14, 정전 이틀 전 전사한 남편을 기다리는 구순의 아내)
이 편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참전할 수밖에 없었던 한 군인과 그와 함께 살아가는 가족의 애절함과 슬픔을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분들 때문에 현재 우리가 편안히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전역 이후 앞으로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할지 자문하게 됐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한반도를 갈망하며 칠성부대 상승회관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하루도 더운 날씨였지만 계획대로 무사히 종주를 마쳤고, 천주교 신자인 단원들이 함께 주일미사까지 드릴 수 있어서 행운이었고 은총을 받았다는 생각을 했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8월 24일, 종주를 시작한지 여섯째 날이다. 오늘은 육단리에 위치한 필승회관을 출발하여 사곡리를 지나 용암리에 있는 민통선 출입통제초소인 용암초소를 통과 후 DMZ 종주의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는 대성산 민통선 지역인 말고개, 중고개를 넘어 봉오리에 있는 승리회관까지 약 25㎞ 거리를 걸었다.
현재 한반도는 남한과 북한이 군사 분계선(MDL, Military Demarcayion Line) 또는 휴전선이라고 불리는 선으로 나누어져 있다. MDL로부터 남북으로 각각 2㎞ 지역에는 군사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비무장지대(DMZ)가 설정돼 있고, MDL 남쪽 5∼10㎞에 이르는 공간은 군사작전 등의 목적으로 민간인의 출입을 제한하는 민간인 통제구역이다. 이 지역을 구분하는 경계선을 민간인통제선(이하 민통선)이라고 부른다.
오늘 구간에는 단원 중 두 번째로 연장자인 이창조님이 49년 전인 1964년 7월에 37연대 6중대 1소대장으로 부임했던 부대가 있고, 필자가 32년 전인 1981년 7월에 50연대 2대대 통신소대장으로 부임한 부대가 위치하고 있어 종주단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지역이다.
필승회관을 출발하여 사곡리를 거처 용암초소로 향했다. 도로 좌우측 풍경은 30여년전 모습과 흡사했고, 승리 전망대 5㎞라는 이정표도 보였다. 15사단의 별칭인 승리부대가 떠올라 필자는 가슴이 뛰었다. 15사단은 6·25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전통 있는 부대이다. 1953년 강원도 고성군 351고지에 배치돼 북한군을 상대로 여러 번 승리했고,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는 부대’란 의미로 ‘승리 부대’라는 별칭을 하사했다고 한다.
민통선 지역은 민간인도 신분이 확인되면 차량에 탑승한 상태로 출입 및 통과가 가능하다. 하지만 배낭을 메고 걷기 위해서는 별도의 허가가 필요했다. 용암초소에서 출입 허가를 받은 후 말고개를 향해 걸었다. 우리가 걷고 있는 도로에서 DMZ까지 거리는 약 2-3㎞다. 길 좌측에는 삼천봉, 승리 전망대, 천불봉, 승암고개 등 많은 고지가 있고 길 우측에는 대성산이 있으며 그 사이에 재건촌이라는 마을이 있다.
재건촌 입구에는 커다란 기념비와 조그만 가게가 있었다. 우리는 가게 앞에 있는 파라솔에 앉아 시원한 음료도 마시고 지역 주민으로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도 들으며 휴식을 취했다. 이 기념비에는 1968년 8월 30일 민통선 북방 전략촌 건설계획과 유휴 농지 개발, 식량증산 목적으로 구호주택 50호에 50세대가 입주하여 농경지를 분배(1주택 2헥타르)받아 삶의 터를 마련한 마현 2리의 개척 역사가 기록돼 있었다.
기념비에는 또 “한국전쟁 참화로 지뢰가 뿌려진 황무지에서 우리들 아버지, 어머니는 목숨을 걸고 호미와 삽을 들었고 밤에는 총을 들고 삶의 희망을 지켜왔습니다. 척박한 땅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눈물과 땀을 뿌렸던 사람들은 마현 2리 역사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이고 그 역사를 거울삼아 후손들이 뿌리내리고 희망의 꽃을 피울 것입니다”라며 험난한 세월의 역경을 딛고 일어선 그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전하고자 비를 세웠다고 적혀 있었다.
재건촌을 출발하여 5번 국도를 따라 걷기 시작해 말고개 초입에 들어섰다. 말고개는 철원군 근남면과 화천군 상서면을 잇는 해발 690미터의 고개다. 보통 고개 이름에서 말이라는 단어는 큰 고개를 의미한다. 이곳 말고개 역시 고개가 크다는 의미로 붙여진 지명으로 짐작된다. 옛날 근무했던 시절에는 차량이 지나면 흙먼지를 일으키는 도로였으나 지금은 아스팔트로 포장돼 있다. 조금 걷다 보니 승암고개가 보였다.
승암고개는 6.25전쟁 당시 그리스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장소다. 1953년 7월 정전 협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중공군은 7월 20일부터 마현리 북쪽에 있는 승암고개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당시 미군에 배속된 그리스 왕립 헬레닉(Hellenic) 대대와 스파르타 대대는 정전 협정이 맺어지기 하루 전인 1953년 7월 26일까지 승암고개를 성공적으로 사수했다.
이 전투에서 그리스군은 총알이 떨어진 극한 상황에서 고대 스파르타 전사들의 후예답게 소총에 대검을 장착한 후 용맹스럽게 돌진하여 비록 19명이 전사했지만 육탄전으로 승암고개를 사수했다. 그 당시 그리스는 2차 세계대전으로 국토가 피폐해진데다 1949년까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간 내전이 벌어져 6·25전쟁 참전이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한다. 현재 그리스군의 6·25전쟁 참전기념비는 영동고속도로 여주휴게소에 있다.
좀 더 걷다 보니 필자가 근무했던 필승대대가 보이면서 1983년 대대에 근무할 때 발생했던 가슴 아픈 사건이 기억났다. 그 때도 비무장지대 안에는 GP가 운영되고 있었다. 당시 우리 부대는 DMZ 출입을 통제하는 통문에서 GP까지 차량이 통행할 도로를 만들고 있었다. 한 여름 어느 날 오후 나는 대대 상황실에서 근무 중 긴급한 상황을 보고받았다. “DMZ에서 지뢰가 폭발하여 다수 인원이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환자 수송을 위해 긴급 헬기를 요청하고 급하게 지프를 타고 현장으로 이동했다. 현장을 구체적으로 확인해보니 도로개설공사 현장에서 땅을 파던 불도저가 6·25전쟁 시 매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전차 지뢰의 뇌관을 눌러 터진 것으로 확인됐다. 지뢰 파편들이 공사현장 경계 작전을 수행하던 소대장과 병사들을 피범벅으로 만들어 의식을 잃은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들을 들것으로 옮기고 급하게 날아온 헬기에 실어 후송했다. 소대장은 나와 같은 중대에서 생활했던 아주 친한 육사 동기생이었다. 헬기에 실려 후송되는 동기생과 병사들의 모습을 보며 한동안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치료를 잘 받아서인지 인명 피해는 없었다. (애석하게도 그 동기생은 그 후 약 10여년이 지난 어느 날 헬기 추락사고로 운명했다.)
말고개는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과 화천군 상서면을 연결한다. 대성산 동쪽 사면은 마현리이며 남쪽 사면에서는 사동천이 발원하여 북한강으로 흘러 들어가고 북서쪽 사면에서는 한탄강의 지류인 남대천이 발원한다. 대성산은 6·25전쟁 초기 아주 치열하게 전투가 있었던 대표적인 지역이다. 국군은 1951년 6월 9일 대성산지역에서 공격을 시작하였고 대성산 1042고지와 신월동, 865고지를 탈환했다.
이후 1951년 6월 14일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면서 승암고개, 삼천봉, 비조봉 일대까지 진출하여 김화지역을 사수했다. 국군이 대성산을 사수함으로써 중공군의 공격로를 차단할 수 있었다. 대성산지구 전투에 대한 장병들의 전공을 높이고 넋을 추모하고자 15사단 8305부대와 화천군이 1983년 10월 1일 대성산지구 전적비를 세웠다.
우리 일행이 대성산 중턱의 말고개 정상에 거의 도착 할 때 어제 통화했던 옛 전우인 소대 선임하사의 전화를 받았다. ‘근처에 왔는데 정확한 위치가 어디냐’고 물어본다. 어제 전화를 받고 급하게 일정을 조정하여 이 근처에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말고개 정상 근처에서 감격적으로 해후했다. 32년 전 연대본부에서 대대까지 필자를 오토바이로 모시러 왔던 윤현준님이 멀리 일산에서 새벽에 출발해 4륜 차량을 끌고 위문을 온 것이다.
종주계획을 수립할 때 대성산 정상에도 올라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피로도와 시간 때문에 정상에 오르는 것을 계획에서 제외했다. 그런데 지금은 4륜 차량을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 부대와 협조한 후 4륜 차량을 타고 대성산 정상에 올라갔다. 눈앞에 전개되는 마현 1,2리 정착촌 마을, 비무장 지대 DMZ와 그 너머 북녘 땅 오성산도 볼 수 있었다.
정상에서 내려와 전적비 앞 잔디에 돗자리를 펴고 윤현준님이 준비해온 김밥과 떡, 막걸리로 점심 파티를 하며 회포를 풀었다. 우리의 이런 정경을 본 사람은 가끔 지나가는 차량에 탑승한 군인들 몇 명 뿐이었다. 마침 전적비 주변 환경 미화를 하던 병사들의 도움으로 우리 전체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점심 파티 후 우리는 필자가 32년 전에 근무했던 부대를 방문했다. 이미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서 옛날 건물은 전혀 볼 수 없었다. 사람 손이 닿는 것은 다 바뀐 것 같았다. 그렇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렸던 지형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함께 근무했던 끈끈한 전우애는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휴일 부대를 책임지고 있는 당직사령과 기념촬영도 했다.
군 전역을 약 1달 정도 앞둔 현 시점에서 뒤돌아보니 내가 초임지에서 윤현준님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는 가식이 없었고 소탈했으며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는 ‘군 생활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몸소 실천하며 소대장인 필자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고마운 사람이다.
군 생활을 하면서 출신이 다르다는 이유로, 또는 신분이 다르다는 이유로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문제가 된 경우를 여러 번 목격했다. 그러나 나는 부사관과 갈등이 전혀 없이 30여년 동안 생활해온 것 같다. 어쩌면 처음 부임지에서 그와 생활하면서 신분에 대한 벽이라는 것을 모르면서 인간적 만남을 바탕으로 군 생활을 시작한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4륜 차량의 기동력을 이용하여 중고개를 넘었다. 그리고 봉오리를 지나 49년 전 이창조 소위가 처음 부임하여 근무했던 부대도 잠깐 방문했다. 그 부대는 이외수 문학관이 있는 다목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숙소인 봉오리에 있는 필승회관에는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했다. 그리고 저녁은 윤현준님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DMZ 종주 엠블럼을 감사의 표시로 전했다.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함께 한 후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불원천리를 마다않고 달려와 격려해준 윤현준님께 이 지면을 빌려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오늘은 8월 23일, 종주 5일째다. 문혜리의 군 숙소인 승포회관을 출발하여 지경리, 김화, ‘저격능선 전투 전적비’, 와수리를 거쳐 육단리에 있는 필승회관까지 걸었다. 약 18㎞로 이번 종주 기간 중 하루에 걷는 거리가 가장 짧은 구간이다. 거리가 짧은 이유는 다음 날 걸어야 할 지역이 민간인 통제구역이어서 숙소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오전 6시 승포회관을 출발, 호국로라는 이정표를 보며 43번 국도를 따라 지경리, 학포리를 통과하여 김화로 향했다. 어제 한사모 회원님들의 격려 덕분인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더구나 천근같이 무거운 배낭들을 승포회관 관리관이 한사모 회장님이 당부한대로 오늘 숙소인 육단리 필승회관까지 옮겨 주기로 약속해 배낭 없이 나설 수 있었다.
길 가장자리와 부대 입구 등 여기저기에 백골이 그려진 모습을 보니 아마도 3사단 지역인 것 같았다. 잠자리 비행기가 일 열로 지나가는 모습도 보았고 ‘멸북’ ‘통일’이라는 구호가 적힌 도로 장벽도 통과했다. 점심은 종주 구간에 있는 철원반점에서 간짜장을 먹었고, 식사 후 식당 안방을 차지하고 잠시 쉬었다. 지경리를 지나고 쉬리공원에서 휴식한 후 조그마한 예쁜 다리를 건너 학포리를 거쳐 와수리에 도착했다.
학포리에는 ‘저격능선 전투’(Battle of Sniper Ridge)를 기념하는 전적비가 산등성이에 우뚝 솟아 있다. 이곳에서는 남대천 건너에 있는 저격능선을 볼 수 있다. 김화 북방 약 7㎞ 지점의 이 능선은 해발 고도가 580미터이고 능선 상부의 면적은 약 1㎢ 정도다. 오성산으로 접근할 수 있는 주요 지점이며 전선 고착 시 전방의 전초 진지를 차지하기 위해 중요한 지역이었다.
6·25전쟁 당시 이 능선에서 미군이 중공군 저격병들로부터 여러 번 저격을 받아 인명 피해를 입으면서 미군들이 저격 능선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유래가 전해진다. 그 후 1952년 10월 14일부터 42일간 저격 능선에서 중공군과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를 ‘저격능선 전투’라고 부르며 그 기념비가 있는 것이다.
국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김화-금성 간 도로망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휴전 회담에서 군사분계선 설정 시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저격능선 전투와 백마고지 전투는 6·25전쟁 최대 격전으로 평가된다.
와수리와 숙소가 있는 육단리를 지나며 발바닥에 문제가 생긴 단원의 치료약을 사려고 약국을 찾았다. 그런데 두 군데 모두 문이 닫혀있었다. 숙소에 도착한 후 필승회관 관리관과 상의하여 가까이 위치한 필승부대에 의료 지원을 요청했다. 대민지원을 나온 군의관은 그 단원의 발바닥을 정성껏 소독하며 아주 친절하게 치료했다.
발바닥이 악화된 이유가 며칠간의 여정이었다는 말을 들은 군의관은 한편 놀라면서도 환자의 나이가 70대 중반이라는 사실에 감탄하며 무리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고 돌아갔다. 아직 현역 대령 신분인 필자가 단장을 맡다보니 이런 일이 있을 때 군부대의 협조를 얻기 쉬운 장점도 있었다. 저녁은 필승회관에서 질 좋고 저렴한 삼겹살에 반주를 곁들여 배불리 먹었다. 단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아주 훌륭한 식사라며 흡족해했다. 군 복지시설을 사용해본 경험이 거의 없는 단원님들은 이번 종주 간에 군 복지시설을 이용할 기회를 가진 것이 아주 좋은 경험이라며 즐거워했다.
내일 종주할 코스에는 필자가 1981년 소위로 임관한 후 처음 부임했던 부대가 있다. 그 당시 필승부대로 불리는 사단 사령부에서 전입신고를 하고 연대를 거쳐 대대에 도착할 때까지 기억과 대대에서 근무했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특히 화천군 명월리에 위치한 사단 사령부를 출발하여 연대본부까지 이동할 때가 기억났다.
더불백 하나를 들고 덮개가 덮혀진 트럭 뒤편에 앉아서, 달리는 차량이 만들어내는 뿌연 흙 먼지를 바라보며 꽤 긴 시간을 이동했다. ‘얼마나 더 가야 하나’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던 긴장된 시간이었다. 연대 본부에서 5Km정도 떨어져 있는 대대까지 가는 길 좌우측 철조망에 붙어 있는 ‘미확인 지뢰지대’ 라고 씌어져있는 팻말은 신임 소위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대대에서 통신소대장으로 1년 정도 근무하며 전투진지가 있는 대성산을 수십 번도 더 올라가곤 했다. 당시 소대 선임하사가 불현 듯 생각나서 전화했다. “DMZ 종주 5일째로 내일 말고개, 중고개를 넘어 옛날 함께 근무했던 소대를 잠깐 방문하려고 한다”고 하자 반가워하면서 왜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는 핀잔도 들었다.
잠자리에 누우니 수많은 단어들과 수많은 정겨운 얼굴들이 떠올랐다. 육단리, 다목리, 삼거리, 대성산, 적근산, 삼천봉, 말고개, 중고개, 실내 고개, 수피령, 봉오리, 민촌……. 그리고 대성 산의 좋은 기운과 맑은 공기를 느끼면서 편하게 잠이 들었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종주 4일째인 8월 22일이다. 오늘은 연천군 신탄리 역 근처의 고대산 가든을 출발하여 철원군에 있는 백마고지 입구, 노동당사, 고석정을 지나 한탄 대교를 건너 철원군 문혜리에 있는 승포회관까지 약 32㎞를 걸었다.
오전 5시 10분에 어제 저녁 남겨둔 오리백숙과 찰밥으로 든든한 아침 식사를 했다. 신탄리 역에서 백마고지 역까지 걸어갈 수도 있었지만 기차를 이용해 보기로 했다. 기차 출발시간이 7시 46분이어서 커피도 한 잔 마신 후 여유롭게 숙소를 떠났다. 약 7분 만에 8㎞ 떨어진 백마고지 역까지 1,000원(경로 500원)의 요금만 내면 데려다 주는 기차가 신기했다.
백마고지 역부터 걷기 시작했다. 백마고지로 가는 길 입구의 월정리 초소에서 근무 중인 초병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단원들끼리 백마고지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걸었다. 백마고지(白馬高地)는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에 있는 야산이다. 백마가 누워 있는 형상처럼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6·25전쟁 휴전협정이 진행되는 가운데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백마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해발 395미터의 고지는 열흘 동안 주인이 스물네 번이나 바뀌었고 사상자도 14,000명에 달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9사단은 이때부터 백마부대라고 불리게 됐다.
백마고지와 관련 있는 ‘철의 삼각지대(Iron Triangle Zone)’라는 말은 6·25전쟁 당시 미 8군 사령관이던 제임스 밴플리트가 ‘적이 전선의 생명선으로 사수하려는 아이언 트라이앵글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한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철의 삼각지대는 철원, 평강, 김화를 잇는 축을 말하는데 중부전선의 핵심으로 철원평야가 그 가운데 위치한다. 월정리 입구 초소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 철원 학 저수지 옆을 걸었다. 길을 따라 좌우측에 설치된 철조망에는 빨강색 바탕에 노란색 글씨의 ‘미확인 지뢰’라는 경고판이 걸려 있고 대전차 장애물도 남아 있어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백마고지 입구를 지나 ‘금강산 가는 길’을 따라 약 30분 걸어가니 노동당사가 나왔다.
철원 지역은 8·15일 광복 후부터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북한 땅이었다. 노동당사는 1946년 초 철원군 노동당이 시공하여 그해 말 완공한 러시아식 건물이다. 노동당사는 공산치하에서 반공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잡혀와 고문과 무자비한 학살을 당했던 곳이어서 당사 뒤편에 설치된 방공호에서 사람의 유골과 실탄, 철사 줄 등이 발견되고 있다.
지금은 건물이 낡고 붕괴 위험이 있어 밖에서만 볼 수 있다. 건물 곳곳마다 6·25전쟁 당시 새겨진 총탄과 포탄 자국이 남아 있어 전쟁이 주는 상처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노동당사 앞에서 휴식 중에 재활용 쓰레기 분리 작업을 하는 분들이 잘 익은 수박과 시원한 캔 음료를 주었다. 그분들의 훈훈한 마음이 느껴져 잠시나마 목마름과 더위를 잊을 수 있었다.
정오쯤 동송읍을 향해 걷고 있었는데, 어제 발바닥에 문제가 생긴 단원 때문에 신발 구매를 부탁드렸던 지인이 보낸 일행과 만났다. 새 신발과 함께 치료약까지 덤으로 보내줘 너무 고마웠다. 이 지면을 빌어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동송읍 입구에서는 한사모 회장단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한밤의 사진편지를 사랑하는 모임’(약칭 한사모)은 매주 일요일 오후에 모여서 걷는 모임으로 남·여 회원 100여명의 평균 나이는 70이 넘는다. 당시 필자는 55세였는데, 100세 시대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할지 보여주는 선구자 같은 분들로 생각된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약 10여분을 함께 걸어 근사한 식당으로 갔다. 식사를 하고 있는데 폭염에 주의하라는 TV 방송이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런 상황인데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낮 시간에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걷고 있을 뿐 아니라 한 단원은 발바닥 때문에 절뚝거리며 걷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사모 회장님은 “자네는 현역 대령이고 나이도 젊지만 다른 사람들은 내일 모래 면 80살이 될 사람들인데 이렇게 강행군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하면서 안전을 신신당부하셨다. 그리고 “오늘만은 특별히 배낭을 숙소에 미리 갖다 놓겠다”며 우리들의 배낭을 자신의 차에 싣고 오늘 저녁 묵을 숙소를 향해 떠나셨다.
우리는 식당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배낭 없이 가볍게 한탄강을 바라보며 걸었다. 한탄강은 평균 하폭 약 60미터에 길이가 110㎞에 이르며, 강 유역이 현무암지대로서 다른 하천과 달리 깊이 20-30m의 협곡이 형성돼 있다. 굽이굽이마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천연의 비경을 갖고 있고 사시사철 맑은 물과 풍부한 수량으로 각종 민물고기의 서식처일 뿐만 아니라 철원 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젖줄이기도하다.
고석정은 한탄강 중류에 있는데 철원 8경의 하나로 정자와 그 일대의 현무암 계곡을 총칭한다. 강 중앙에 위치한 10미터 높이의 기암봉 동굴에는 임꺽정이 은신했었다고 전해진다. 승일교는 한탄강 중류 지점에 있는 폭 6m, 길이 120m의 다리로 이름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6·25전쟁 전에 김일성이 만들기 시작했으나 그 후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완성돼 이승만 대통령의 ‘승’자와 김일성의 ‘일’자를 합친 승일교란 얘기가 있고, 다른 하나는 6·25전쟁 당시 한탄강을 건너 북진하다가 전사한 박승일 대령을 기리기 위하여 명명했다는 얘기가 전해지는데, 현재는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
오늘은 기차도 타고 신발도 바꾸고 격려도 받은 특별한 날이었다. 멀리 서울에서 방문해 주신 한사모 함수곤 회장님과 박현자·김영신·윤정자 회원님께 특히 감사했다. 덕분에 좋은 음식 잘 먹고 잘 쉬었으며, 무거운 배낭을 숙소까지 운반해 주셔서 쉽게 걸었다. 그리고 숙소인 군 복지회관 근무자에게 다음 날 숙소(육단리 승리회관)까지 배낭 운반을 당부했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오늘 하루동안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여정에 관심을 갖는 분들의 우려도 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DMZ 종주는 지금 진행 중이고 기온, 나이, 피로도 축적 등을 포함해서 여러 난관이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나는 단장으로서 무사히 목적지까지 걸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되 새겼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오늘은 종주 3일째다. 연천 해돋이 펜션을 출발, 임진강 서측 둑을 따라 북삼교를 지나 아스팔트 도로인 지방도, 국도를 주로 걸어 신탄리역 근처의 고대산 가든까지 약 27Km 정도를 종주한다. 오늘 걷는 지역에는 필리핀 6.25전쟁 참전비, 제1땅굴, 필승교, 태풍 전망대 등이 위치하고 있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5시 10분쯤 식사하고 6시에 숙소였던 펜션을 출발했다. 옛날 고구려 군사들이 오르내리며 훈련했을 것으로 보이는 무등 보루에 오르기 위해 땀 흘리며 걸었다. 높지 않은 야산이지만 나무는 울창했고 길은 잘 단장돼 있었다. 보루에 올라 예나 지금이나 국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생각했다.
보루를 내려가 군부대를 지나 강 자락을 따라 걸었다. 북삼삼거리를 거쳐 북삼교를 건너 강변에 나 있는 평화누리 길을 한참 걸은 후 마을로 들어갔다. ‘장병 상회’ 앞 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면서 수박 아이스 바를 사먹고 있는데, 땀에 젖은 우리를 본 동네 아주머니가 냉수를 통째로 가져다주며 조금 더 가면 식당이 있다는 정보도 알려주었다.
아주머니가 알려준 ‘평화 식당’에서 점심으로 콩국수를 맛있게 먹었다. 넓은 방에서 식사하고 누워서 조금 쉬다가 나왔지만 오후 햇볕이 너무 강해 걷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몸 안의 모든 장기가 뜨거운 열기에 대응하기 위해서인지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한 걸음씩 옮기는 발은 천근짜리 신발을 신고 걷는 것처럼 무거웠다.
어쩌면 3일 동안 누적된 피로가 걷기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6·25 전쟁터에서 선배들이 겪었을 수많은 고난과 지금 전선에서 경계근무를 서는 후배들의 고통은 이것과는 비교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신탄리역 근처의 고대산 가든에서 여장을 푼 후 한방 오리백숙으로 저녁을 맛있게 먹고 빨래까지 마친 후 오늘 코스를 되돌아봤다. 오늘 코스에는 필리핀 참전기념비가 있었다. 6.25전쟁 당시 필리핀은 미국·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지상군을 파병한 나라로 7148명이 참전하여 112명이 전사했으며 299명이 부상당했고 16명이 실종됐다. 특히 1951년 4월 22일 경기도 율동전투에서 중공군 1개 대대를 격퇴해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냈다. 이 승리로 미 제3사단은 연천에서 철수할 수 있었고, 이를 기념하여 연천군은 1966년 4월 22일 필리핀 참전비를 건립했다.
지난해 9월 주한 필리핀 대사는 ‘6·25전쟁 참전 70주년 기념행사’에서 “필리핀은 다시 전쟁이 일어나도 한국의 형제들과 나란히 싸울 것”이라며 양국의 ‘형제애’를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많은 이들이 6·25전쟁을 잊힌 전쟁이라고 하지만 필리핀 젊은이들은 역사 시간에 배우면서 참전용사들의 용맹과 영웅적 활약을 잊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다.
오늘 걸으면서 필자는 평화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군 복무 동안 경험했던 여러 번의 긴장 상태와 직접 투입돼 임무를 수행했던 국지도발 작전도 상기하면서 후손들이 평화로운 상태에서 살게 되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또 한국이 6·25전쟁 참전국에 대한 지속적인 보은과 함께 그들의 번영과 참전용사 후손들까지 지원할 수 있기를 기원했다.
오늘 걸은 코스에서 조금 떨어져 있지만 이 지역에는 제1땅굴, 필승교, 태풍전망대 등이 있어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현장을 걷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제1땅굴은 DMZ 지하에 굴착된 북한의 남침용 땅굴로 7.4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된 지 2년 후인 1974년 연천군 고랑포에서 발견됐다. 이후 철원, 파주, 양구에서도 발견돼 전 전선에 걸쳐 북한의 남침용 땅굴이 존재한 사실이 드러났다.
필승교는 북한이 황강 댐 방류를 할 경우 방류 상황이 맨 처음 관측되는 지점으로 임진강 홍수를 조절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점이며, 한 때 무장간첩들이 침투했던 통로로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군사분계선에서 800m 떨어진 태풍전망대는 임진강과 북한의 농장, 댐 등을 볼 수 있고, 6.25전쟁 때 격전지였던 베티 고지, 노리 고지 등도 보인다.
오늘은 한 방에서 4명이 합숙을 하는데, 한 단원의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있는 것을 보았다. 필자는 군에서 장거리 행군을 하면서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 물집이 생기면 걸을 때 많은 불편함을 주고 특히 물집이 터졌을 때 느끼는 고통이 매우 크다는 것과 물집이 터진 상태에서 걷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 단원의 발바닥 상태가 마음에 걸렸다.
장거리 걷기를 하려면 발이 자유롭게 움직일 정도로 큰 신발을 착용해야 한다. 따라서 신발을 바꾸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민가가 거의 없는 지역이니 신발을 살 곳이 없었다. 그래서 내일 종주 코스에서 제일 가까운 부대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신발을 구매하여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새 신발을 신으면 트러블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에 대한 위험은 감수하며 신발을 바꿔보기로 했다.
이제 겨우 3일을 걸었지만 단원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지체 없이 걷기를 중단해야 한다. 어려운 선택의 시간이 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도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100㎞, 250㎞ 등 여러 번의 장거리 걷기를 하며 ‘인간이 갖고 있는 자가 치유 능력’을 경험했던 터라 ‘좋아질 거야’라는 믿음을 갖고 내일 전개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어렵게 잠을 청했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기상 알람을 4시 반에 맞추어 놓았지만 책임감과 긴장감 때문인지 알람이 울리기 전에 깨어났다. 아침은 전 회원들이 방바닥에 둘러앉아 컵라면과 오곡 가루를 물에 타서 마셨다. 하루 종일 걷는 운동량에 비해서 먹는 것이 너무 부실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은 황포돛배 마을을 출발하여 비룡대교를 건너 평화누리길을 따라서 구미교, 숭의전, 당포성, 주사절리, 임진교, 군남 홍수조절지 그리고 왕정리를 지나 무등리까지 걷는다. 총 거리는 약 35Km로 첫날 걸었던 24㎞보다 비교적 장거리이다. 중간에 마땅한 숙소가 없어 종주 코스를 이렇게 잡을 수밖에 없었다.
아침 6시에 출발했다. 안개가 끼어있는 날씨이지만 주변이 잠들어 있는 이른 시간에 활동하는 느낌은 왠지 좋다. 어둠이 걷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고, 밝아오는 햇살을 마중하는 것도 좋으며 대지의 힘을 두 발로 받아들이는 것 같은 느낌도 좋다. 4명이 숙박한 첫 숙소를 떠나는 것이어서 출발하기 전에 기념사진도 한 장 남겼다.
비룡대교를 건너 평화누리길로 접어들었다. 평화누리길은 임진강 뚝 그리고 임진강 물길 옆으로 걷는 소로가 연결되어 있는 길이다. 물길 옆 소로의 일부 지역은 장마철에 갑자기 비가 많이 내리면 도로 위로 물이 흐르듯이 강물이 넘어와 흐르는 곳도 있었다. 한 단원이 앞에서 길을 개척했는데 평화누리길 표지를 찾지 못해 되돌아오기도 했다. 어떤 곳에는 이정표가 거꾸로 매달려있어 이정표를 바로 세워 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잘못된 길로 들어섰고 1시간 정도 걷기 꾼들이 말하는 알바(다른 길로 헤매다가 계획된 길로 되돌아오는 행위)를 했다. 조기에 인지해 다행스러웠지만 다시 되돌아 올 때까지 시간과 체력을 허비하여 심리적으로도 상쾌하지 않았다. 나는 단원들에게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앞섰다. 오늘 걷는 코스가 장거리인데다 기온도 매우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무그늘에서 쉬거나 햇볕 쨍쨍 내리쬐는 강 뚝에서 쉬기도 하고 지나는 축대 옆에 만들어진 그늘에서 쉬기도 했다. 뚝 길가에 있는 밭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식물들이 무성했다. 밭에는 탐스런 호박도 보였다. 한 단원이 강 뚝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그 호박 참 먹음직스럽게 잘 자랐네’라고 혼자 말을 했다.
그때 바로 뚝 아래에서 ‘그 호박, 임자 있으니 따가지 말라’고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단원이 그 말을 듣고 ‘우리는 배낭이 무거워 호박을 주셔도 가져갈 수가 없다’라고 답했다. 그런 후 서로 얼굴을 보고 정황을 좀 더 이야기하며 오해가 풀렸다. ‘밤 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라는 속담이 생각났다.
연천지역은 오랜 한반도 역사의 발자취가 선명하게 아로새겨져 있는 곳이다. 70만 년 전인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있는가 하면 학곡리 고인돌처럼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있고 당포성, 호로고루, 은대리성, 무등리 보루 등 고구려 시대에 만들어진 성들도 있다. 또 신라 시대의 경순왕릉이 있고,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숭의전도 있다.
구석기 시대의 유물인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는 미국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다가 군에 입대하여 동두천에서 근무하던 미군 ‘그레그 보웬’ 에 의해 1978년 전곡리에서 발견됐다. 아슐 문화(Acheulean culture)는 인류의 선사시대인 전기 구석기 시대 석기를 만드는 고고학적 공법으로 약 백만년 전 인류의 주요한 석기 제작 기술이었다.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란 이름은 프랑스의 생뜨 아슐(St. Acheul) 유적지에서 주먹도끼가 많이 발견돼 붙여진 이름이다. 전곡리에서 이 주먹도끼가 발견된 것은 동아시아 지역 최초의 사건이어서 발견 당시 세계 고고학계가 많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전곡리 유적지에서는 여러 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6000점 이상의 석기가 출토됐다.
임진강 서안 무등리에 해발 100m 정도의 봉우리 2개가 남북으로 위치하고 있다. 나지막한 봉우리들이지만 주변에서는 가장 높다. 무등리 보루는 이 봉우리들에 구축된 성으로 남쪽 봉우리에 1보루, 북쪽 봉우리에 2보루가 있다. 동쪽으로는 임진강이 접해있고 강 건너편의 움직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군사적으로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1999년 홍수로 성벽 5∼6m가 노출되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조사에서 기와와 화살 촉, 탄화 곡물이 수집됐고 탄화 곡물의 연대측정 결과 6∼9세기 사이의 쌀과 좁쌀로 밝혀졌다. 또 약 1500여년 전으로 추정되는 장수의 갑옷도 발견돼 고구려 유적지로 추정하고 있다. <블로그 way & story: 산성과 읍성이야기>
숭의전은 태조가 고려 왕조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고려시대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들게 했던 곳으로 1399년 건물을 짓고 고려 8왕의 위패를 봉안했다. 이후 1425년에 이르러 이 중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 4위만 받들게 했다. 1451년에는 전대의 왕조를 예우하여 숭의전으로 명명했고 4왕과 더불어 고려조의 충신 16명을 제사지내게 했다.
오늘 걸으면서 연천이 한반도의 중심이라는 플래카드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도로를 지나는 군용차량과 일렬로 행군하는 장병들의 모습을 보며 전방지역임을 실감했다. 북일가든에서 점심을 먹고 왕정 파출소, 임진농협 왕산지점을 거쳐 임진강의 아름다운 전경이 보이는 숙소인 해돋이 팬션에 도착했다. 이미 옷과 신발은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오늘 걸은 거리가 약 24㎞ 정도이다. 이른 새벽 집을 출발해 임진각까지 왔고 임진각부터 숙소가 있는 감악산 펜션까지 장거리를 더운 날 걸어와서 인지 단원들 모두가 아주 힘들어 했다. 그래서 숙소 근처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 때 근처 가게의 아주머니가 우리들에게 걷는 사연을 물었다. 단원 한 명이 걷는 취지와 오늘 임진각부터 걸어왔다고 설명하면서 시원한 물을 좀 마시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커다란 양푼에 얼음물을 가득 갖다 주셨다.(아마도 냉장고에 있는 얼음을 다 꺼내 가져온 것 같았다). 시원한 물을 마시며 그 아주머니의 훈훈함을 듬뿍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이 종주 첫째 날이어서 원래 계획은 숙소에 도착하면 근처 음식점에서 단합을 다지는 의미로 성대한 식사를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숙소에 도착했을 때 모두들 지쳐서 음식점으로 이동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저녁식사는 숙소 주인이 권하는 중국집에서 음식을 배달 시켜 먹었다.
저녁식사 후 단원들의 발바닥 상태를 포함한 건강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문제는 없었지만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힘이 들었다고 말했다. 사실 제일 젊은 나에게도 오늘은 무척 힘든 하루였다. 출발 전에 우리들을 엄청 아끼고 사랑하는 주위의 여러분들로부터 진심 어린 우려의 말씀을 많이 들었다.
나이가 70이 넘은 사람들이 300㎞가 넘는 먼 거리를 12일 동안 장기간 걷는 것은 무리다. 또 만약에 어떤 사고가 발생하면 아주 복잡하고 심각한 문제라며 걱정을 하신 분도 있었다. 그렇지만 걷기로 했고, 이렇게 시작된 대장정의 첫날이 지나면서 화살은 시위를 떠나 목표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모두가 힘든 하루였지만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극복하고 완주하겠다는 의지와 소망을 서로 확인한 시간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걷기의 궁극적 목표가 건강 유지에 도움이 돼야 한다는 평상시 신념과 함께 고령인 단원들의 피로가 젊은이들과 다를 것이라 여겨져 “내일 단원들의 걷는 모습을 세밀히 지켜보며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목표 지점인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도착하기 전이라도 단원 중 누군가의 건강에 문제가 생길 것으로 판단되면 아무런 미련 없이 즉시 모든 일정을 중단하겠다”라는 종주 가이드라인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오늘 걸으면서 금년(2013년) 초 아내와 함께 약 40일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던 여정이 기억났다. 한겨울에 걸었기 때문에 길은 몹시 미끄러운데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겨울임에도 비가 자주 내렸다. 날씨가 추웠고 잠자리도 불편해 순례길 걷기를 시작한 것에 대한 후회가 앞서면서 계획대로 목적지까지 걸을 수 있을지 약간의 걱정도 됐다.
그러나 며칠을 걸으면서 환경에 적응됐고 처음의 후회와 걱정들은 사라졌다. 그리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그리고 추위와 불편함에도 즐거울 수 있었다. 그러자 자연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친절함과 훈훈함이 느껴지면서 행복했다. “그동안 내가 반복된 일상에 감각이 무디어져 이런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나 자신을 보호하려고 너무 두꺼운 옷을 입고 다녀서 주변 사람들의 훈훈함과 친절함을 느끼지 못했을 수 있었겠다”라고 생각했다. 특히 종착지가 가까워오면서 순례길에 머무는 것이 너무 좋고 곧 끝나는 것이 아쉬워 10㎞도 되지 않는 거리를 걷고 숙소를 정했던 기억도 났다. 순례길을 걸은 후 나는 “과거는 감사, 현재는 행복, 미래는 설레임”이란 문구를 염두에 두고 생활하고 있다.
오늘 DMZ 종주단의 첫날 걷기는 매우 힘들었다. 단원들의 힘들어하는 표정이 역력하여 걱정도 됐다. 그러나 평화누리길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과 인심 좋은 아주머니가 준비해준 얼음물이 시원함과 함께 훈훈한 정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번 DMZ 종주도 어려움은 있을 테지만 걷고 나면 좋은 기억으로 남을 거라고 막연한 상상을 해보았다.
그래서 마음의 눈을 활짝 열고 환경에 순응하면서 즐겁게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는데, 첫날 비록 힘은 들었지만 계획대로 잘 걸은 것처럼 마지막 날까지 모두 잘 걸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단원들은 모두 편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8월 19일 새벽 5시 30분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택시로 경의선 출발지인 공덕역으로 갔다. 6시 32분 문산행 첫 전철을 탔고, 전철 안에서 단원 전원이 합류했다. 그런데 전철로 이동 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허구 헌 날 내버려두고 우리가 출발하는 날 이렇게 비를 뿌리면 우리 걷기꾼들은 어찌 한 단 말입니까?” 이런 한탄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에 순응하면서 걸어야겠다”는 마음의 준비와 각오를 단단히 했다. 7시 40분경 문산역에서 택시를 타고 임진각으로 갔다. 임진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은 후, DMZ 종주단 4명은 330㎞ 대장정을 시작했다. 첫날 목표는 임진각을 출발하여 파주 적성에 있는 황포나루를 지나 감악산 펜션까지 약 24㎞였다.
임진각은 DMZ에서 남쪽으로 약 7K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남북분단의 비극적 현실을 상징하는 장소이다. 북녘 땅에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들이 고향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찾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DMZ는 국가가 자국의 영토임에도 국제법상 병력 및 군사시설을 주둔시키지 않을 의무가 있는 특정지역이나 구역을 의미한다.
한반도의 DMZ는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전쟁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의해 휴전됨으로서 생겨났다. 육상의 군사분계선인 MDL(Military Demarcation Line)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각각 2㎞씩 양국의 군대를 후퇴시키기로 약속하면서 만들어진 지역이다. 임진강 하구인 경기도 파주시 정동리부터 강원도 고성군 명호리까지다.
임진각은 분단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화해와 상생, 평화와 통일의 상징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임진각 주변에는 평화누리 공원이 조성돼 있다. 이 공원은 2005년 세계평화축전을 계기로 만들어졌으며 대형 잔디에 각종 볼거리와 작품들이 있다. “바람의 언덕” 아래로는 무지개 색으로 팔랑이는 바람개비가 많이 있다.
그 주위에는 자유의 다리, 평화의 종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고 6.25 전쟁 당시 각종 유물과 전쟁기념물도 있다. 망향의 노래비에는 1983년 ‘이산가족 찾기’의 배경 음악이었던 ‘잃어버린 30년’의 가사가 통일을 기다리며 서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그리웠던 삼십 년 세월 / 의지할 곳 없는 이 몸 서러워하며 그 얼마나 울었던가요 / 우리 형제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정 나누는데 /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 목 메이게 불러 봅니다 / 내일일까 모래일까 기다린 것이 눈물 맺힌 삼십 년 세월 / 고향 잃은 이 신세를 서러워하며 그 얼마나 울었던가요 / 우리 남매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못 다한 정 나누는데 /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 목 메이게 불러 봅니다.”
여정의 시작점이 있는 ‘평화누리길’이라는 도로 이름은 우리 DMZ 걷기꾼들이 염원하는 평화통일과 연관되어 있는 듯했고 이런 것들이 더해져서 어서 빨리 평화롭게 통일이 되기를 기원한다. ‘평화누리길’은 2010년 개장되었으며 총 189㎞의 길로 DMZ 접경지역인 김포시, 고양시, 파주시, 연천군 등 4개 시·군을 잇는 대한민국 최북단의 걷는 길이다.
우리는 파주 평화누리길 셋째 길에 위치하고 있는 임진각을 출발하여 마정리, 장산리를 지났다. 필자는 1980년대 중반 이 지역에서 중대장 근무를 했다. 이 지역에서 군 생활을 할 때 화창한 날 장산 전망대에 올라 북한의 송학산을 포함한 북녘 풍경과 임진강, 초평도 도습지를 한눈에 본 기억을 더듬었다.
이번 순례길에서는 그러한 정경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일정상 그곳을 지나쳐 화석정, 그리고 율곡리를 걸었다. 율곡리는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자 ‘십만양병설’로 유명한 율곡 선생의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그 중 대표적인 유적지로 ‘자운 서원’과 ‘화석정’이 있다.
서원은 조선시대에 유교의 성현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설립한 사설 교육 기관이다. 조선 중기 이후 정치적 혼란으로 여러 학자들이 지방에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게 됐으며, 이를 바탕으로 서원에서는 선배 유학자를 기리고 제사하는 사당의 기능까지 했다고 한다.
자운 서원은 1615년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됐고 이이의 위폐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화석정은 굽이쳐 흐르는 임진강의 절경을 한 눈에 감상 할 수 있는 정자로서 그가 벼슬에서 물러나 임진강을 벗하며 말년을 보냈다고 하며 지금은 이이 선생이 8세에 지었다는 ‘팔세부시(八歲賦詩)’라는 시가 걸려 있었다.
율곡리를 지나 좀 걷다 보니 전진교가 보인다. ‘천하무적 전진부대’에서 중대장을 할 때 수 없이 많이 통과했었던 다리이다. 전진교를 건너 초소에서 출입자 명부에 인적사항을 기록 할 때에는 어떤 돌발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긴장했었고 업무를 마치고 나올 때에는 별일 없음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곤 했던 기억이 난다.
두포 나들목을 지나 장파리의 리비교를 지난 후 황포돛배로 향한다. 리비교는 정전협정 직전 미군이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건설한 다리로 대전지구 전투에서 전사한 미 공병대 리비 중사의 이름을 붙였다. 황포돛배는 조선시대의 중요한 운송수단의 하나였고 우리가 가는 그곳은 임진강 황포돛배라는 지명이며 그곳에 가면 그 배를 탈 수도 있는 곳이다. (4편에 계속)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DMZ를 따라 함께 걷기로 한 ‘DMZ 종주팀’을 구성 후 몇 가지 사항을 결정했다. 먼저 출발지는 문산 임진각, 최종 도착지는 고성 통일 전망대로 정했다. 코스를 이렇게 정한 이유는 한반도의 허리를 걷는다는 상징적 의미뿐만 아니라 휴전선 가까이 위치해 있어 분단의 아픔을 체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DMZ 종주 출발일은 8월 19일, 기간은 12일로 정했다. 아주 더운 혹서기를 피해 걷기에 좋은 계절을 선택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내가 전역하는 날이 9월말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기간을 정했다. 그리고 별도의 지원 차량이나 인원 없이 오롯이 4명이 배낭에 필요한 짐을 휴대하고 걷기로 했다.
잠자는 장소는 종주 코스 주변의 민간 숙박시설을 이용하되 그런 시설이 없는 지역에서는 군 숙박시설을 협조해 이용하기로 했다. 아침 식사는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컵라면, 초코파이 또는 에너지 바 같은 것을 준비하고, 점심과 저녁식사는 그날 걷는 코스에서 만나는 음식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이렇게 기본적인 방향을 정한 이후 실제로 매일 걸어야 하는 구간을 확정하기 위해 2013년 6월 13일부터 3일간 차량을 이용해 종주 구간을 사전 답사했다. 전 코스를 12일로 구분하여 하루하루 걸어야 할 이동로를 직접 확인하고 묵을 숙소를 찾아 예약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구체적인 이동로를 판단할 때에는 지역 행정관서에서 만든 관광지도를 사용했다. 걷는 길이 자세히 표시돼 있지는 않았지만 국도와 지방도가 명확히 구분돼 있는데다 지역의 명소들과 숙박, 음식점 등 관광과 관련된 정보들이 모두 포함돼 있어 여러모로 유용했다.
경기도 지역은 미개통 구간이 여러 곳 있기는 했지만 걷기 전용도로인 ‘평화누리길’을 주로 택했고, 강원도 지역은 경기도처럼 걷기 전용도로가 아직 없기 때문에 국도 및 지방도를 걷기로 했다. 어떤 구간에는 음식점이 아예 없는 지역도 있었다. 이런 구간에서는 어쩔 수 없이 초코파이나 에너지 바 등으로 점심 요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민간 숙박시설이 없는 지역에서는 군에서 운용하는 숙박시설을 이용했다. 당시 나는 전역을 40여일 앞둔 현역이었기에 군 숙박시설을 협조하기에 유리했다. 군 숙박시설을 사용할 수 없었다면 걸어서 DMZ 종주를 할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민족을 분단한 휴전선 155마일(약 250㎞)이라고 말하지만 실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약 330㎞에 달했다.
결국 하루 걷는 코스는 가용한 숙박시설의 위치를 고려하여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이동거리를 좀 길거나 짧게 잡을 수밖에 없는 곳도 몇 군데 생겼다. 이동거리가 긴 곳은 걷기에 많은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걸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을 갖고 정할 수밖에 없었다. DMZ 종주단을 상징하는 표식도 만들어서 배낭 뒤에 부착했다.
30여년이 넘는 군 복무를 하면서 수많은 훈련계획을 수립했었지만, DMZ 종주 계획을 만들면서 더 많은 고민을 한 것 같다. 걷는 사람들의 나이와 체력 상태, 예측하기 어려운 기상 등 여러 변수가 많았음에도 DMZ 종주 계획은 완성됐다. 단원들은 계획을 공유하고 걷기에 대한 의기를 투합했다.
단장을 맡은 나는 모든 계획이 실행 과정에서는 계획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부딪히는 상황에 유연히 대응해야 한다는 사실도 단원들에게 상기시켰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어떠한 결정도 단장이 혼자서 할 수 있다는 확답도 받았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내가 배낭을 메고 군사분계선(DMZ)을 따라 걸을 것이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DMZ를 종주하자’는 제안을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주말걷기 모임에서 만난 한 회원이 “안 대령이 금년에 전역하는데, 전역 전에 DMZ 종주를 하면 남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다”면서 “혼자 걷기 어려우면 동행하겠다”라는 제안을 했다.
많은 땀을 흘렸고 청춘을 불살랐던 그 지역. 군 생활을 할 때는 늘 바쁘고 긴장해야 했는데 전역을 앞둔 지금 걷는다면 여유롭게 과거를 뒤돌아보는 시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함께 하겠다는 그 회원의 말이 DMZ 종주를 결정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DMZ 종주는 엄밀히 말하면 DMZ에 인접한 길을 걷는 것이다. 이 길은 대부분 군부대의 허가를 얻어야 통과할 수 있는 민간인통제선(이하 민통선) 이남지역이지만 일부 구간은 민통선 지역이 포함된다. 따라서 현역 신분이 아니면 군부대의 협조를 받기도 어렵고 그 지역을 정확히 알지 못해 걷기를 계획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나는 당시 현역이었고 특히 민통선 구간은 내가 과거에 근무했던 부대였다.
60, 70대 아저씨들이 12일 동안 무거운 배낭을 메고 더운 여름에 330㎞를 걷는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최초에 제안한 회원을 포함하여 동행자를 구하는 것, 이들의 나이가 많으니 각자 가족의 허락을 받아내는 것, 실제 걸을 수 있는 거리를 판단하는 것 등 여러 가지 고민이 있었다.
그런 고민 끝에 드디어 4명의 인원으로 ‘DMZ 종주팀’을 구성했다. 이후 차량으로 종주할 지역을 사전에 답사하고 지역별로 숙소를 미리 정하는 등 나름대로 치밀한 준비를 했다. 그리고 건강을 해치면 안 된다는 전제 하에 통일을 염원하면서 전 코스를 완주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그 여정이 벌써 8년 전의 일이 되었지만 걷는 동안 만난 우리의 산하는 매우 아름다웠다. 하지만 여기저기 전쟁의 아픈 상처가 남아있어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걸으면서 육체적 어려움을 겪는 상황마다 슬기롭고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하는 5670 아저씨들의 위대한 잠재력도 돋보였다.
아직까지 중장년층의 국토순례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는데다 DMZ 종주라는 특별한 지역을 종주한 것이었기에 우리의 경험을 글로 남기는 것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쪼록 연재되는 이 글이 이런저런 이유로 새로운 시도를 망설이는 중장년층에게 특히 도움이 되길 바란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시큐리티팩트=김한경 기자]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은 국가정보원 및 한국암호포럼과 함께 ‘2021년 대학 암호동아리 지원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고 16일 밝혔다.
지난 2016년 시작해 올해로 6회째인 ‘대학 암호동아리 지원 사업’은 국내에 재학 중인 대학생을 대상으로 암호기술 분야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고, 더 나아가 체계적인 암호 전문인력 양성을 목표로 운영되고 있다.
지난해 이 사업을 통해 지원받은 9개 대학 암호동아리는 국가 암호공모전 지원 및 입상, 국내·외 다양한 기관·학회에 암호관련 연구논문 발표, 차세대 암호기술 개발·시연 등 우수한 성과를 달성했다.
또한, 동아리 졸업생 38명 중 30명(약 79%)이 암호기술을 다루는 기업으로 취업하거나 암호전문 대학원으로 진학하는 등 정보보호 산업의 핵심인력으로 성장해 나가고 있다. 올해 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대학 암호동아리는 지난 2020년 최우수 동아리로 선정된 한성대 ‘Quantum Ant’를 포함해 12개로 전년 대비 3개 증가했다.
KISA와 한국암호포럼은 올해 선정된 동아리에 연구 활동비 각 300만원 지원을 비롯해, 포럼 주관 암호교육 및 워크숍 등에 무료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어 연말에 동아리 활동 결과를 평가하여 우수 및 최우수 동아리 각 1개 팀에게는 상장과 격려금을 지원하고, 최우수 동아리에게는 내년도 지원 사업에 참여하는 자격을 부여한다.
이원태 KISA 원장은 “앞으로 대학 암호동아리가 차세대 암호기술 발굴 및 확산에 필요한 전문 인재 양성소가 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시큐리티팩트=김한경 기자]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함께 ‘2021년도 우수 정보보호 기술(제품·서비스) 지정제도’ 공모 절차를 게시하며, 비대면 서비스·5G·AI·클라우드 등 혁신기술과 정보보호를 결합한 우수 기술을 심사해 지정한다고 지난 8일 밝혔다.
우수 정보보호 기술 지정제도는 정보보호산업진흥법 제18조에 따라 정부가 창업 7년 이하 정보보호 벤처기업의 우수한 제품과 서비스 및 기술을 지정하여 홍보·판로개척 등을 지원하는 제도로, 2018년부터 시행해 올해로 4년째를 맞이했다.
지난 3년간 국내 벤처기업 11개의 정보보호 기술이 우수기술로 지정되었으며, 지정 기술을 보유한 4개 기업은 약 142억 규모의 투자액 유치, 8개 기업은 69건의 EU·미국 등 주요국을 포함한 국내외 특허 및 지재권 출원, 2개 기업은 인니·미국 등 해외시장 진출 등의 성과를 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우수 정보보호 기술로 지정 시 ▲기술 홍보 등에 활용 가능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명의 지정서·지정마크·현판 ▲기술 전시 및 홍보영상 제작 지원 ▲과기정통부·KISA 지원 사업 참여 우대 등의 혜택이 제공되며, 특히 올해는 대상 사업이 AI 보안기술 및 클라우드 관련 지원 사업 등까지 확대됐다.
우수 정보보호 기술 지정 공모는 8일부터 4월 7일까지 진행되며, 참여를 희망하는 기업은 과기정통부 또는 KISA 홈페이지에서 기술·제품·서비스별 지정 신청서를 내려 받아 제출하면 된다. 관련한 설명회가 이달 26일 판교 정보보호 클러스터에서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준수하며 진행될 예정이다.
우수 기술에 대한 심사는 정보보호 산학연 전문가·변리사·벤처투자자 등으로 구성된 별도의 평가위원회에서 신규성, 독창성, 사업화 가능성 등을 중점적으로 평가해 지정기술을 최종 선정하게 된다.
최광희 KISA 정보보호산업본부장은 “역량 있는 정보보호 기업의 성장은 디지털 경제 시대를 대비하는 ‘K-사이버방역’ 체계 구축의 기반이 된다”며 “이번 공모에 물리보안·AI·비대면 등 디지털보안 혁신 기술을 보유한 기업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시큐리티팩트=김한경 기자]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은 국제수준의 안전보건경영시스템 체계 구축을 인정받아 안전보건경영시스템 국제표준(ISO45001) 인증을 획득했다고 26일 밝혔다.
ISO45001은 국제표준화기구(ISO)와 국제노동기구(ILO)가 2018년에 제정한 국제표준 안전보건경영시스템으로, 산업재해 예방과 쾌적한 작업환경 조성을 위해 안전과 보건 관리체계가 국제적 수준에 도달한 기관에 부여하는 국제 인증이다.
KISA는 그동안 모범적인 안전보건관리체계를 갖추기 위해 ▲안전보건경영방침 선언 ▲안전보건매뉴얼 수립 ▲안전관리 전담부서 신설 ▲직장 내 재해위험요인 분석 및 개선 등 안전한 근무환경 조성에 힘쓴 점을 인정받아 본 인증을 획득했다.
이원태 KISA 원장은 “이번 인증을 기반으로 KISA는 앞으로도 임직원과 국민 안전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 안전보건 경영을 지속적으로 실천하고 안전문화 확산과 정착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시큐리티팩트=김한경 기자] 이원태 신임 한국인터넷진흥원장이 11일 나주본원에서 개최된 취임식에서 한국인터넷진흥원을 세계 최고의 정보보호·디지털 분야 전문기관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이원태 원장은 언론계 출신으로 기자로 활동하다가 서강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한국인터넷윤리학회 및 한국인공지능법학회 부회장, 개인정보보호위원회 자문위원,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정책기획위원 등을 역임했다.
2017년부터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지능정보사회정책센터 연구위원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다양한 정책 연구와 경험을 통해 ICT 분야 전반에 대한 높은 전문성과 식견을 겸비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원장은 김석환 전임 원장이 지난해 11월 12일부로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KISA 임원추천위원회의 심사 추천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제청을 거쳐 임명됐으며, 앞으로 3년간 한국인터넷진흥원을 이끌어갈 예정이다.
이원태 원장은 온라인으로 진행된 이날 취임식에서 “4차 산업혁명을 완성하고 디지털 미래사회를 선도하기 위한 KISA의 역할을 강조하며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보안 패러다임 변화에 따른 디지털 안전망 구축 및 안전한 개인정보 활용과 보호 ▲디지털 국가 경쟁력 제고 ▲공공기관으로서의 사회적 가치 및 혁신 경영 실현 ▲투명한 경영문화 정착 등 경영계획도 제시했다.
그러면서 “인터넷진흥원을 정보보호·디지털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전문기관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ICT 분야 전문가다운 포부를 밝혔다.
한편,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은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디지털 미래사회를 선도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정보보호·디지털 전문기관’으로서 2009년 7월 한국정보보호진흥원, 한국인터넷진흥원, 정보통신국제협력진흥원이 통합돼 설립됐다.
(정리=김한경 총괄 에디터) 지난 8월 9일 국방부는 ‘국방사이버안보 역량 강화방안’을 국방개혁의 과제로 선정하고 본격 추진한다고 밝혔다. 반면 청와대는 사이버안보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할 사이버안보비서관 직위마저 없앴다. 이와 관련, 한국을 대표하는 사이버안보 전문가인 손영동 한양대 융합국방학과 교수를 만나 사이버안보에 관한 견해를 들어 보았다.
(정리=김한경 총괄 에디터) 지난 8월 9일 국방부는 ‘국방사이버안보 역량 강화방안’을 국방개혁의 과제로 선정하고 본격 추진한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한국을 대표하는 보안전문가이자 한 때 화이트해커로도 활동했던 ‘큐브피아’의 권석철 대표를 만나 사이버보안에 관한 의견을 들어 보았다.
▲ 육군본부 정보화기획실장으로 근무할 당시 간담회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변재선 장군의 모습
ICT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평화’속에서도 ‘사이버 전쟁’은 진행 중이다. 세계 각국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수시로 사이버전을 벌이고 있다. 특히 북한의 사이버공격 능력은 세계를 위협할 정도로 뛰어나 한국군의 경계 대상이다. 이에 시큐리티팩트는 사이버전문가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한국군 사이버전의 현주소와 향후 발전 방향에 대해 심층 보도한다. <편집자 주>
(정리=김한경 총괄 에디터)
- 장비를 구매하거나 사업화가 필요한 분야도 있을 텐데, 예산 반영의 어려움이나 제도상 보완할 내용은?
“예산은 ‘19~’23중기계획 대비 ‘20~’24중기계획이 70~80% 이상 증액되어야 사이버작전 임무수행 체계 구축이 가능하다. 따라서 예산이 적극 반영되도록 장관을 비롯한 군 수뇌부의 관심이 당연히 필요하다. 또 예산의 반영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일례로 백신 사업이나 일부 중요한 작전체계는 존재 자체를 비밀로 해야 해커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다. 이런 분야를 일반적인 “국방정보화” 사업과 차별화해서 은밀히 추진하도록 사이버작전사령부에 사업적인 권한과 융통성을 부여하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
또한 작전체계에서 예기치 못한 취약점이 발생할 경우 즉각적인 보완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 경우 국방부 예산 중 집행 잔액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면 “작전체계 보완 예비비” 개념으로 예산이 반영되고, 필요시 사이버작전사령부가 즉각 집행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또한 ICT 기술 발전 속도가 빨라 중기계획에 포함해 추진할 수 없는 사업은 사이버작전에 필요한 체계를 적시에 도입할 수 있도록 ‘신속 획득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용처를 명시하지 않는 예비비를 책정하거나 긴급 소요전력으로 별도 예산을 배정하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
- 국방망 해킹 사건이 발생했을 때 문제를 발견해 조치하고도 책임질 상황에 몰렸다고 들었다. 어떤 상황이었고, 문제의 본질은 무엇이었나?
“새로 도입한 장비를 시험하다가 우연히 국방망과 인터넷이 연결된 것을 발견했다. 00 데이터센터였는데, △△ 데이터센터도 확인해 보니 같은 상황이었다. 유추해 보면 최초 데이터센터 구축사업을 하면서 설계에 문제가 있었던 듯하다. 또한 네트워크 구축이 완료되면 별도 기관에서 보안측정을 하게 되고 매년 기관평가를 시행하는데 이 과정에서 식별됐어야 했다.
따라서 네트워크 설계의 문제라면 사업을 주관한 부서인 정보화기획관실이 잘못한 것이고, 보안측정에서 식별을 못한 것은 담당 기관 또한 역할을 제대로 못한 것이다. 게다가 비밀이 소통되지 않아야 하는 국방망에서 비밀이 해킹 당한 것은 비밀생산 및 관리 간 보안규정을 준수하지 않은 개인과 담당부서장에게도 책임이 있다.
이런 상황들이 문제를 발견한 사이버사령부에 마치 책임이 있는 모양새로 흘러갔다. 해킹 공격을 받았다고 하니까 사이버방어의 책임이 있는 사이버사령부가 문제가 있을 것이란 인식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임무 및 기능상 00 데이터센터 운용은 사이버사령부가 책임질 영역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책임을 떠넘길 수 없다보니 유야무야하다가 끝났다.”
- 그 때 식별된 문제가 아직도 근본적인 대책이 강구되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는데.
“일례로 백신의 경우만 보더라도 미군은 여러 개의 우수한 백신을 자체 개발하거나 구매해서 돌려쓴다. 그리고 군이 어떤 백신을 쓰는지 외부에 공표하지 않는다. 해커의 입장에서는 어떤 백신을 쓰는지 모르니 그만큼 어려움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적당한 가격의 상용 백신을 하나만 구입해 쓰고 외부에 그 사실이 공표되어 있다. 해커로서는 매우 쉬운 상황이 된다.
또 미군은 군이 사용하는 네트워크의 보안 취약점을 찾아서 포상하는 버그바운티 제도를 운영하면서 매년 취약점을 보완한다. 우리도 이런 노력을 해야 한다.”
- 사이버전에서 승리하려면 평소에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사이버전의 출발은 해킹으로 시작된다. 어떤 조직이든 해킹과 관련해 “3가지 영역”이 있다. 첫째, 조직에 필요한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DB 등으로 구성된 정보체계 분야가 있다. 둘째, 개인이 업무적으로 또는 사적으로 사용하는 단말기(PC, 태블릿, 휴대폰 등)와 SNS 활동의 영역이 있다. 셋째, 모든 조직은 자체 보안규정을 만들고 조직원들이 보안규정을 준수해야 하는 영역이 있다.
이 세 가지 영역 중에서 한 곳이라도 미흡하면 반드시 해킹을 당하게 된다. 조직의 관리자가 이 분야에 얼마나 리더십을 발휘하느냐에 따라 해킹 후 대응하는 모습도 3가지로 구분된다. ① 해킹을 당하고도 전혀 모르는 조직, ② 해킹을 당한 사실을 늦게 인식하는 조직, ③ 해킹을 당하면 빠르게 인식하는 조직 등 3가지 유형이다.
몇 년 전만 해도 해킹을 당하면 어느 정도 준비된 조직에서조차 발견하는 기간이 약 200일 정도 걸린다고 했다. 한국군 예하 조직의 CERT 능력은 어떤지 자문해 봐야 한다.
결국 해킹의 예방은 물론 해킹 시 피해를 최소화하고, 최대한 빨리 복구하려면 가장 중요한 요소가 각 조직의 리더십이다. 대응 조직을 잘 편성하고 임무수행 가능한 인원을 선발하며, 정보체계 및 정보보호체계를 최상의 상태로 설치하고 최신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관련 전문가의 평가를 경청하고 충분한 예산을 편성해줘야 한다.
그리고 보안부서는 조직원 개개인이 조직 내부는 물론 각자의 SNS 활동 영역까지 보안규정을 따르도록 만들어야 한다. 즉 개인별 사용 ICT 기기의 최신 버전 프로그램 설치, 백신 업데이트, 특수문자 포함 12자리 이상의 패스워드 사용 등 해킹 예방조치와 개인보안 준수 생활화를 수시로 교육하고 반드시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
- 마지막으로 사이버전과 관련하여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남·북의 전통적 안보 위협은 감소하고 있지만 사이버 분야의 위협은 더욱 증대되고 있다. 그럼에도 “왜 발전이 늦어지고 있을까”라는 의문을 모두들 갖게 된다. 그 이유는 사이버 작전이 일반적인 군사작전에 비해 적, 작전 공간, 작전 시기 등이 전혀 다름에도 전통 안보적 사고와 프레임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국가적으로 사이버안보 분야의 관련 직위에 사이버보안과 사이버작전 개념을 이해하는 관리자가 등용되어야 한다. 또한 각종 컨퍼런스 및 세미나에서 전문가들이 주장하는 문제점과 대응책에 귀 기울여 정책에 반영하는 노력이 지속돼야 한다. 사이버공간에서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키려면 정책결정자들이 이 분야에 눈과 귀를 활짝 열어야 한다.”
▲ 육군본부 정보화기획실장으로 근무할 당시 간담회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변재선 장군의 모습
ICT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평화’속에서도 ‘사이버 전쟁’은 진행 중이다. 세계 각국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수시로 사이버전을 벌이고 있다. 특히 북한의 사이버공격 능력은 세계를 위협할 정도로 뛰어나 한국군의 경계 대상이다. 이에 시큐리티팩트는 사이버전문가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한국군 사이버전의 현주소와 향후 발전 방향에 대해 심층 보도한다. <편집자 주>
(정리=김한경 총괄 에디터)
지난 9일 국방부는 ‘국방사이버안보 역량 강화방안’을 국방개혁의 과제로 선정하고 본격 추진한다고 밝혔다. 사이버사령부 임무와 기능을 개편하는 내용을 포함한 10대 실행과제도 정해 중점 관리하겠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국군사이버사령관을 역임한 변재선 장군(예비역 육군소장)을 만나 국방부가 발표한 사이버사령부 발전 방향에 대한 의견을 들어 보았다. 그는 포병 병과로서 작전 분야에도 능통하지만, 중령 시절 육군 C4I 개발단에서 실무자로 근무했고, 대령 시절 2작전사 및 육군본부 지휘통제체계과장을 거쳐 장군으로 진급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준장시절 육군 정보화기획처장으로 근무했고, 소장 진급 후 육군 정보화기획실장(18개월)과 국군사이버사령관(20개월)을 역임한 후 2017년 6월 전역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에서 전산학을 전공했고, 아주대에서 사이버보안·C4I 분야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오스트리아 국방대 및 서울대·카이스트 최고위 과정을 이수하는 등 군 경력에 다양한 학문적 배경이 어우러져 사이버전 분야의 최고 전문가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사이버사령관 재직 시 국방망이 해킹된 사실을 최초로 발견해 보완했음에도 오히려 책임 추궁을 당하는 상황이 벌어져 한 때 고초를 겪기도 했다. 사이버사령부 부대원들에게는 역대 사령관 중 가장 전문성이 뛰어나고 업무 발전을 위해 헌신한 지휘관으로 기억되고 있다.
- 국방부가 최초로 사이버안보에 대한 구상을 밝히면서 사이버사령부 개편을 발표했는데.
“사이버사령부가 9월 1일부터 사이버작전사령부로 개편되고 내년에 300여명 증편된다는 소식을 들어 매우 기쁘다. 2020년 이후에는 현재보다 규모가 2∼3배 확대되는 것으로 아는데, 사령관 재임 시 국회와 국방부를 오가면서 주장했던 내용이 이제라도 반영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 10대 실행과제를 정해 중점 관리하겠다고 하는데 잘 되리라 보는가?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이길 수 있는 분야가 ‘사이버전’이다. 이 분야가 처음으로 국방개혁 과제가 되어 출발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 과제별로 관련되는 부서 및 부대들이 있을 텐데 상호 의견을 충분히 나누면서 내실 있게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에도 유사하게 과제를 도출하고 추진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과제를 누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명확히 정하고 강력히 리더십을 발휘하는 주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리더십을 발휘할 전문 역량이 있으면 권한이 없고, 권한을 가진 사람은 전문성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내용도 몰라 리더십이 발휘되지 않는데 있다.
사이버 분야는 국방부, 합참, 사이버사령부는 물론, 각 군 및 각 작전사의 관련 부서들이 모두 해야 할 역할이 있다. 따라서 제대로 임무를 분장하고 각 부서 및 부대가 역할을 잘하도록 챙기는 리더십이 지속적으로 발휘되어야 한다.”
- 사이버사령부 개편 방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사이버작전사령부로 변경하고 합동부대로 지정한 것은 과거에 이미 되었어야 할 조치다. 내부 조직도 구체적으로 밝힐 수야 없겠지만 과거부터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들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잘 발전시키길 바라며 이제 조금씩 제 모습을 갖춰가는 것 같다.
사이버심리전 기능은 민사심리전 부서에서 수행하되, 유사시 사이버사령부 차원에서 의견을 내거나 지원할 요소가 있을 거다. 해당 부서와 유기적인 소통은 필요하리라 본다.”
- 사이버사령부 인력 운용에 애로가 많다고 하던데, 생각하는 대책이 있는가?
“장교와 부사관은 사령부와 여타 관련부서 간 순환 보직을 하도록 되어 있어 전문성을 기르는데 애로가 많다. 과거 기무사처럼 필요한 인력을 별도로 선발하고 장기간 운영이 가능한 제도를 만들면서 필요시 민간에서 탁월한 능력을 갖춘 인원을 특채하는 방법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
우수인력을 확보하려면 사기진작 대책도 필요하다. 현재 6급 10호봉 기준으로 군무원 연봉이 3,300만원인데, 유사 기관인 인터넷진흥원(KISA)·정보화진흥원(NIA)·데이터진흥원 등에 소속된 인원은 5,600∼6,400만원을 받는다.
고려대 사이버국방학과에서 배출한 장교들 또한 현재 ADD에서 연구 인력으로 3년간 근무 후 관련 부대(서)로 배치하게 되어 있는데 실효성 측면에서 재검토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연구부서에 근무하면서도 일정기간 공동 연구개발, 전투실험, 합동 취약점 평가 등 다양한 사이버작전 현장에 투입돼 경험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이렇게 ‘연구 활동’과 ‘현장의 생생한 실무’를 동시 경험하면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부가적으로 연구 활동 후 배치될 부대(서) 업무 중 자신에게 적합한 분야도 미리 찾을 수 있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다.”
- 사이버방호작전과 사이버방어작전은 어떤 차이가 있나? 또 사이버작전 수행 간 각 군과 사이버작전사령부의 역할은?
“모든 조직은 임무 수행을 위한 정보체계를 운용하고, 체계 보호를 위해 정보보호체계를 설치하며 컴퓨터침해사고대응팀(CERT)을 편성한다. 사이버방호작전은 모든 조직이 정보보호체계를 이용해 정보체계가 정상적으로 운용되도록 하는 탐지, 차단 및 대응, 방어체계 보완 등의 활동을 말한다.
사이버방어작전은 사이버 감시정찰로 위협을 판단하고, 피해 발생 시 공격 주체·무기·전술 등을 분석하며, 필요시 추적하는 활동을 말한다.
따라서 국방 영역에서 사이버방호작전은 각급 부대가 수행하고, 사이버작전사는 이를 지원하며, 국방 영역과 업무용 인터넷이 연결된 관심 영역에 대한 사이버방어작전은 사이버작전사령부에서 수행한다.” (하편에 계속)
(정리=김한경 총괄 에디터) 지난 9일 국방부는 ‘국방사이버안보 역량 강화방안’을 국방개혁의 과제로 선정하고 본격 추진한다고 밝혔다. 사이버사령부 임무와 기능을 개편하는 내용을 포함한 10대 실행과제도 정해 중점 관리하겠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사이버전 분야의 전문가인 이명환 사이버군협회장을 만나 이번에 국방부가 발표한 방안에 대한 의견을 들어 보았다.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총괄 에디터) 군 정보수사기관인 기무사령부의 시작은 1948년 조선경비대 육군정보국 정보처 특별조사과다. 6·25 전쟁 때인 1950년 10월 육군 특무부대로서 군내 공산 세력을 발본색원하는 ‘숙군(肅軍)’ 작업을 통해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조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