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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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 주연의 “포화속으로”라는 영화포스터와 6.25 남침전쟁 당시 불암산에 은거하며 유격전을 펼쳤던 육사생도들과 사병들의 ‘불암산 호랑이 은거 제1동굴’ 사진 [사진제공=김희철]

20일 시진핑이 평양 방문했지만, 69년전인 ‘50년 겨울엔 중공군이 한반도 침범

‘6·25남침전쟁’시 유격전 펼친 '불암산호랑이', 최후의 한 명까지 목숨던져

가수 진미령의 친부 고(故) 김동석 대령은 '물쥐대장', 북한군 후방 교란

대한민국 지킨 '숨은 영웅들' 기려야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69년전인 1950년 겨울, 중공군이 한반도를 침공하여 ‘흥남철수’, ‘1.4후퇴’ 등 동족상잔의 비극은 더욱 심화되었다. 20일에는 미·중 무역 전쟁이 한창인 가운데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중국의 최고지도자로는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 이후 14년 만에 북한 국빈 방문했다.

이번 시진핑 주석의 방북은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난 이후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이 교착 상태인 상황에서 이뤄져, 북미대화 재개의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됐다.

중공군이 추가 침공까지 한 ‘6·25 남침전쟁’으로 완전히 초토화되었던 대한민국은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절약과 근면으로 오늘날의 경제 10대 강국으로 발전을 이뤄냈다.

(사)월드피스 자유연합 이사장 안재철은 오랜 시간 연구하여 6·25남침전쟁 때 대한민국을 도운 나라가 67개국임을 밝혀내고 2010년 9월 3일 영국 기네스북 본사로부터 기네스북 등재 인증서를 받았다. “이기록은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단일연합군으로 지원한 세계기록”이고 앞으로도 이 기록은 깨질 수가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국가적 절명 위기에서 구해준 해외지원국에 대한 감사와 보은도 중요하지만 국내에 보이지 않는 희생을 통해 나라를 지켜낸 숨겨졌던 애국자분들에게도 감사하고 기억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는 명확히 부여되어 있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된 지 하루 뒤인 ‘50년 6월 29일 수원에 모인 200여명의 학생들은 국방부 정훈국의 후원으로 “비상학도대”를 발족시켰다. 이들은 소총1정과 실탄만을 지급받아 국군혼성부대에 수십명씩 편입시켜 한강 방어선에 투입됐다.

7월말에는 대구에서 87명의 학생들이 자진입대하여 김석원 장군 휘하의 부대로 편성되어 포항에서 북한군의 4차례 파상공격을 막아내는 전과를 올렸고 이 전투는 60년 뒤에 가수 겸 배우인 탑 주연의 “포화속으로”라는 영화로 재연되었다.

전쟁이 발발하면서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전투에 참여한 학도병이 최소 2만여명이며 전사자도 7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또한 육군본부가 2004년 펴낸 “학도의용군” 책자에 따르면 전쟁 중 전투참전과 치안활동, 가두선전에 참가한 학생들을 27만5200명으로 집계됐지만, 중앙학도호국단은 전투참가 학생 2만7700여명 중 전사자 1394명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문교부 통계에는 학도의용군 5만여명중 7000명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같은 기록 부실로 학도병들은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다되어도 전공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학도의용군도 군인이라고도 할 수 없었던 “불암산 호랑이”라는 전설같은 역사도 있었다.

6월25일 새벽 북한의 불법남침이 개시되었을 때 태릉의 육군사관학교에는 생도1기(10기)와 2기(종합1·2기)가 13대1의 경쟁을 거쳐 1949년7월15일 생도 제 1기 338명으로 입교했었고, 생도 2기는 4년제 정규과정을 목표로 28대1의 경쟁을 거쳐 1950년 6월 1일 334명이 정식 입교하여 교육을 받고 있었다.

전쟁발발 당일 제1기생 262명은 임관을 20일 남겨놓고 있었다. 북한의 기습남침이 시작되자 육사와 보병학교 교도대대가 문산 축선에 투입됐다. 뒤이어 오후1시 쯤 사관생도들을 포천축선으로 투입하라는 채병덕 총참모장의 명령이 하달됐다.

학교장 이준식 준장은 생도대대를 편성하고 오후 8시쯤 징발된 차량을 이용해 포천시 내촌면의 303고지(부평리)에 배치했다. 생도대대의 우측에는 전투경찰대대가 배치됐다. 생도대대는 치열한 백병전 끝에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을 물리쳤지만 전황 악화에 따라 큰 피해를 입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생도대대는 태릉으로 철수해 포천에서 철수해온 제9연대의 잔여병력과 함께 불암산 일대에 배치됐다. 27일 밤이 깊어지면서 전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학교장은 생도들이 적진에 고립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보고를 받고 철수를 명령했다.
 
대부분의 생도는 28일 아침 망우리고개를 거쳐 광나루 방향으로 철수해 한강을 건넜다. 그 시기에 철수명령을 받지 못했거나 받았다 하더라도 서울을 쉽사리 적에게 내줄 수 없다는 사명 의식에 불타는 사관생도들이 있었다.

제1기생 김동원 생도는 후방으로 철수하여 몸을 숨겨 살아나가는 방법 대신 목숨을 걸고 불암산 일대에서 유격 활동을 감행하기로 하고 동료 생도들의 뜻을 모았다. 강원기·김봉교·박금천·박인기·이장관·조영달·전희택·홍명집·한효준 등 제1기생 10명과 제9연대 김만석 중사 등 부사관 2명, 병사 5명 등 총 20명의 대원이 모였다.

전 대원의 투표로 최초 유격활동을 제안했던 김동원 생도를 유격대장으로 선출했다. 조영달 생도를 제1조장, 박인기 생도를 제2조장, 김만석 중사를 제3조장으로 각각 선출했다. 암호명은 ‘불암산호랑이’로 했다.

불암산 석천암의 김한구 주지스님의 안내로 인근에 산재한 3개의 자연동굴을 은거지로 활용하기로 했다. 준비를 갖춘 유격대의 정보책으로 임명된 홍명집 생도는 믿을 만한 주민과 접촉해 북한군의 동향에 관한 정보를 입수해 공격할 목표를 선정했다.

불암산호랑이의 첫 번째 공격은 7월 11일 새벽 퇴계원에 있는 북한군 보급소 기습이었다. 이 작전에서 유격대는 보급품을 불태우고 3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김봉교·박인기 생도와 제2기생 1명 등 3명이 희생되고, 한효준 생도가 부상했다.

두 번째 공격은 7월 31일 새벽 창동역 부근에 있는 북한군 수송부대와 보안소 기습이었다. 대원들은 수류탄과 화염병을 사용해 보급차량과 사무실 등을 습격하는 데 성공했지만 퇴각 도중 김만석 중사가 전사했다.

8월 15일 밤에 이뤄진 세 번째 공격의 대상은 생도들의 모교였던 육사였다. 당시 북한군은 육사를 의용군 훈련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유격대는 의용군으로 끌려온 학생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대담한 공격을 시행해 북한군 50여 명을 사살했다. 그러나 유격대장 김동원 생도 등 6명이 희생되었다.

유격대의 마지막 전투는 북으로 끌려가는 마을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9월 21일 밤 진접읍 내곡리에서 적의 수송대를 기습한 것이었다. 그때 100여명이나 되는 많은 주민을 구출했으나, 6월 29일부터 9월 21일까지 불암산을 중심으로 80일 동안 활약했던 유격대원 전원이 계급과 군번도 없이 9.28수복을 앞두고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쓰러진 유격대원 중에서 강원기 생도가 다음날 구사일생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구출돼 군 병원으로 후송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도 역시 부상 후유증으로 ‘51년 7월 10일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강원기 생도의 생존 시 증언으로 ‘불암산호랑이 유격대’의 활약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석천암 김한구 주지 스님의 손자 김만홍 씨도 당시 유격대에 식사와 물을 제공했다는 사실 등을 증언했다.

그러나 불암산 유격대에 대한 정부차원의 선양사업과 무공훈장수여는 현재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번 기회에 실제로 전투에 참가한 학도병 2만7700여명과 고립무원(孤立無援) 구천에 떠돌고 계신 ‘불암산호랑이’를 포함한 7000여명의 고귀한 영혼을 기리는 선양사업을 거국적이고 최우선적으로 시행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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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9년 사망한 김동석 대령이 생전에 친딸인 가수 진미령(본명 김미령)과 즐거운 시간을 갖고 있는 모습과 그 무수한 공적으로 한국군 사상 가장 많이 받았다는 훈장과 기념패들. [사진제공=진미령, 김희철]

휴전선 동쪽이 고성까지 올라간 이유, 김동석의 ‘HID36지구대’ 활약 덕분

가수 진미령의 부친인 김동석은 한국군 사상 최다 훈장 수여자

미국에서 출판된 “My Father's War"의 저자 황성씨는 6·25남침전쟁 당시 HID(Headquarters Intelligence Detachment)36지구대원이었던 황하용씨의 아들이다.

이 책에서 작가의 아버지가 활동했던 동해 영흥만은 남북첩보전의 최대 격전 지역이었고 북한인민군은 영흥만 도서에 있는 첩보부대를 타격하기 위해 하루에 300여발씩 밤낮으로 포격을 가했고, 그 중에서도 특히 지휘소가 있는 여도에 포격이 집중되었다고 말했다.

황하용씨는 “당시에는 전쟁이 끝나면 영웅이 된다. 부대에 들어가면 입을 것, 먹을 것, 잘 곳을 제공해준다. 고향에 돌려보내준다, 가족을 찾아주겠다”는 말에 HID의 부대원이 된 것이라고 기술했다.

그 부대의 지휘관인 김동석 대령은 전쟁을 전후해서 160번이나 낙하산을 타고 북에 침투했었다. 그는 북한지역 첩보활동을 위해 인민군 경력이 있거나 영흥만을 거쳐 내려오는 피난민 중에 판단이 빠른 자 등 똑똑해 보이는 북한 출신들을 HID로 차출하여 편성하였다. 황하용씨도 이들 중 한명이었다.

HID36지구대 첩보부대원들은 야간에 은밀히 북한군 후방으로 침투하여 게릴라, 기습, 암살, 첩보, 납치, 주요시설 폭파 등 각종 임무를 수행했다. 밤이면 물에서 올라와 첩보활동을 펼치고 해가 뜨면 사라지는 36지구대 첩보원들의 활동방식 때문에 북한 인민군들은 이들을 ‘물쥐’라고 불렀고 김동석 대령은 ‘물쥐 대장’이 되었다.

백범 김구선생의 경호원을 역임했던 김동석 대령은 육사 8기로 ‘6·25남침전쟁’이 터졌을 때 중위로 중대장이었으나 전쟁기간 중 박성철이 지휘한 북한군 15사단을 낙동강전선 안강-기계전투에서 궤멸시켜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명예를 안기는 등 두 차례나 특진해 소령을 달고 육군첩보부대 HID36지구대장으로 부임하였다.

앞서 조선 애국의용대 대장을 지내던 1945년 해방직후에는 일본 관동군 소속이었던 박정희 중위가 소련군에게 체포됐다가 탈출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 밖에 무수한 공적으로 한국군사상 가장 많은 37개 훈장을 받았고 주한 미군으로부터 전쟁영웅 칭호를 받은 김동석 대령은 정전 직후인 1954년 2월 적진에 잠입하여 강원도 통천부근에서 매복 중, 인민군 17사단장 이영희를 납치해 귀순시킨 뒤, 일본의 미군기지로 보내 정보를 캐내도록 하는 전과도 올렸던 참군인 이었다.

목숨을 걸고 국가를 지킨 전쟁영웅을 대하는 미국과 한국정부의 태도는 극과 극이다. 미국은 끝까지 찾아내 업적을 기리지만 한국은 그 평가와 업적발굴에 인색하다.

양양의 호국사찰 '영혈사'의 HID호국영령 천도제가 유일한 위안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설악산 기슭인 양양에 위치한 호국사찰 ‘영혈사’에서 조국을 위해 산화한 HID36지구대의 호국영령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매년 호국영령 천도제를 봉행한다는 것이다. 또한 최근 국군정보사령부내의 박물관에 김동석 대령의 유품을 모아 전시하며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는 소식에 약간의 위안을 갖기도 한다.

그동안 북파공작활동에 얽힌 비밀들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어왔던 김동석 대령은 작고 전인 2005년에 자신의 회고록을 발간했는데, “적진에 들어가지도 적 지휘관을 암살하지도 않았던 가짜 HID들이 설쳐, 진짜 HID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고 회고록 “This man"의 출판 동기를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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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본부 정책실장(2011년 소장진급), 청와대 국가안보실 위기관리비서관(2013년 전역), 군인공제회 관리부문 부이사장(2014~‘17년), 현재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국열린사이버대학 교수

주요 저서 : 충북지역전사(우리문화사, 2000), 비겁한 평화는 없다(알에이치코리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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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이야기](1) '불암산 호랑이'와 '물쥐 대장' 김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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