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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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은 12월4일 평양에서 줄행랑으로 전투력을 보존, 재반격 작전 발판 마련…

[시큐리트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중공군의 1차공세(’50.10.26~11.8)와 2차공세(’50.11.25~12.24)에서 호된 희생을 치룬 유엔군과 국군은 결국 ‘50년 12월4일 평양에서 도망치듯 철수했다.

‘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반격을 개시한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북진에 나서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고, 뒤이어 압록강 유역의 초산까지 나아갔다.

하지만 김일성 정권의 지원 요청을 받은 중국 공산당 정부는 펑더화이를 총사령관으로 중국인민지원군을 창설해 10월19일 대규모 병력을 한반도로 파병했다. 중국군은 압록강을 건너 산줄기를 타고 은밀히 이동해 10월26일부터 본격적으로 국군과 유엔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1월24일 국군과 유엔군은 청천강을 건너 X-mas총공세에 나서 압록강을 향해 진격했으나 중국군의 반격을 받았다. 특히 11월26일 국군 제 2군단이 담당하던 대동강 상류의 덕천·영원 지역이 중국군에 돌파되면서 배후에서 협공을 당할 위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자 서부전선의 지휘를 담당한 미 제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모든 부대를 청천강 이남 지역으로 철수시켜 평안남도 숙천과 순천을 잇는 지역에 새롭게 방어선을 편성했다.

그러나 미 제 2사단이 군우리에서 중국군에 포위되어 큰 피해를 입는 등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국군의 공격이 계속되었다. 미 제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평양 방어를 고수하다가는 중국군에 포위되어 유엔군 주력이 섬멸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고, 평양 방어를 포기하고 38선 이남 지역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12월4일부터 본격적인 평양 철수가 시작되었다. 철수 과정에서 미 제 8군은 평양의 산업시설과 군수물자 등을 모두 파괴했으며, 부상병이나 포로 등은 진남포에서 선박으로 38선 이남 지역으로 옮겼다. 그리고 38선까지의 도로에 국군 제 2사단과 5사단을 배치해 경비를 맡게 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피난민들이 함께 남하했다. 동부전선을 담당한 미 제 10군단도 흥남에 집결해서 12월 15일부터 배를 타고 38선 이남 지역으로 철수했다.

이로써 중공군의 제2차공세가 끝난 12월24일경, 유엔군과 공산군은 다시 전쟁 이전과 마찬가지로 ‘임진강-춘천-양양’을 잇는 38선 지역에서 1방어선을 구축하여 대치하게 되었다.

■ 워커 미 8군 사령관 교통사고로 순직, 미 육군 참모차장 리지웨이 중장이 임명

다시 12월31일 중공군의 제3차 신정공세가 시작되었다. 특이한 것은 이번 공세부터 전력을 회복한 북한군 2사단과 5사단이 화천 방면에서 공격에 가담했다. 중공군은 언제나 약체로 평가받은 국군을 공격하여 돌파한 다음 우회기동, 포위해서 섬멸하는 작전을 구사했고 이번에도 최소 3배의 병력으로 한국군만 집요하게 공격했는데 그 방법은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서부 전선에서는 국군 1사단과 6사단이 순식간에 와해되었고 6사단 옆에 배치된 미 24사단도 곤경에 빠지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20만명 이상의 중공군들이 골짜기와 들판을 가득 메웠고, 이러한 강력한 인해전술 공세로 1월4일 겨우 되찾은 서울이 다시 내어주었다. 일부 공산군은 수원 일대까지 남하하기도 했다.

결국 유엔군은 2방어선인 수원-양평-주문진선에서도 밀려, 평택-제천-삼척에 이르는 선까지 철수하여 3방어선을 형성함으로 1월24일 중공군의 3차 공세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위의 ‘중공군 제 3차공세(’50.12.24~’51.1.8)상황도’처럼, 전력을 보충한 북한군 10사단은 단양을 돌파해 안동까지 위협을 가한 후 다시 태백산맥을 이용하여 북으로 도주하는 사례도 있었다.

북한군의 불법 남침으로 대한민국이 위태롭던 낙동강 전선에서 전세를 역전시켰던 미 워커 미 8군 사령관이 중공군 3차 공세가 시작되기 전인 12월23일 의정부 부근에서 교통사고로 순직하자 미 육군 참모차장 리지웨이 중장이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리지웨이 사령관은 제 2차 세계대전시 유럽 전선에서 독일군을 전율케했던 공수여단 및 사단장으로 앞가슴에 2개의 수류탄을 매단 채 한국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는 중공군의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기세를 멈추는 것 보다 아군의 전투력 보존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옅보고 있었다.

위의 ‘중공군 공세기간과 주요전투 현황’표 처럼, 중공군의 공격이 1~2주 계속된 후에는 더 이상의 지속적인 공격을 못하는 것은 신장된 보급선으로 미흡한 화력과 부족한 탄약과 식량 등 전투근무지원이 취약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찾아냈다.

■ ‘칸카르데쉬(피로 맺어진 형제)’인 터어키군, 군우리·금량장 전투에서 용맹성 과시

유엔군은 12월4일 평양에서 도망치듯 다음해인 1월24일, 평택-제천 -삼척의 3방어선까지 철수하여 전투력을 보존했고 재편성과 휴식 그리고 실전 같은 훈련을 하였다. 특히 중공군의 취약점을 분석하고 우세한 화력과 기동력, 제공 및 제해권 확보를 배경으로 협조된 기동전을 수행할 훈련까지 완료하였다.

이러한 줄행랑으로 전투력을 보존하고 전투훈련까지 한 결과, 제대로 싸울 준비가 다되었다고 판단한 리지웨이 중장은 취임한지 한달 째이며 중공군의 3차공세가 멈춘 다음날인 1월25일부터 유엔군의 재반격을 위한 위력수색 작전을 시작하였다.

먼저 월프하운드(Wolfhound)작전과 썬더볼트(Thuderbolt)작전으로 서측에서 미 1, 9군단의 25사단과 1기병사단을 주공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1월30일 반월-수원-금량장-이천선까지 전진하였는데 예상대로 적의 저항은 비교적 경미했다.

특히 미국,영국, 캐나다에 이어 4번째로 많은 1만5천명의 대규모 병력을 지원해 전사800여명, 부상 2,200여명의 큰 희생을 치룬 터어키군(한국인을 ‘칸카르데쉬:피로 맺어진 형제’라고 부른다)이 중공군 2차공세시 군우리 전투와 이번 금량장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용맹성을 과시했다. 결국 미 1,9군단은 2월10일 인천-김포일대와 남한산성-양평일대까지 진출했다.

또 라운드엎(Round Up)작전은 중앙지역에서 흥남철수의 알몬드장군이 지휘하는 미 10군단과 국군 3군단이 홍천을 양익포위하기 위해 2월5일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적이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악착 같은 지연전을 기도했고, 10일 항공정찰 결과 미 10군단 정면으로 대규모 중공군이 집결하는 것을 식별하고 진출을 중지하였다.

이후 중공군은 전력을 보충한 뒤 제 4차공세(’51.2.11~18)를 시작했으나, 유엔군은 지평리전투(“[김희철의 전쟁사](3) 유엔군의 '자유전사' 프랑스 몽클레어 장군과 미국 프리만, 크롬베즈 대령”참조)에서 효과적인 사주방어 및 기동전 등 성공적으로 저지·격퇴시켰다. 그리고 계속 공격하여 3월15일 서울을 재탈환하고 4월22일 재반격작전의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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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 (21)] 중공군의 허를 찌른 월프하운드(Wolfhound)작전과 썬더볼트(Thuderbolt)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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