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2-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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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남침전쟁에 참전했으며 코만도작전 등 특수작전에 능한 호주군과 전쟁기념관에 게양된 참전국 국기 [사진제공=국방홍보원/김희철]

 

중공군, 철수하는 국군 6사단을 추격하며 가평을 점령

영연방 제27여단, 중공군 저지 위해 가평 북면 일대에 방어선을 편성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칼럼니스트] 중공군이 제 5차공세의 시작인 사창리 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의 방어선을 뚫고 남하해오자 영연방 제 27여단은 중공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가평의 북면 일대에 방어선을 편성했다. 중공군이 가평을 점령해서 서울과 춘천을 잇는 46번 국도를 따라 남하해오면 서부전선의 유엔군이 측면에서 협공을 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연방 제 27여단은 사창리에서 가평으로 이어지는 75번 도로 서쪽인 북면 이곡리의 677고지에 캐나다 대대를 배치했으며, 가평천과 화악천이 합류하는 도로 북동쪽 목동리의 504고지에 호주 대대를 배치했다. 그리고 여단에 배속된 미 전차 제72대대 1개 소대를 죽둔리에 배치하였고, 미들섹스 연대 제1대대로 구성된 영국군 1개 대대를 예비부대로 편성했다.


사창리를 돌파한 중공군 20군 예하 제118사단이 4월 23일 야간공격을 재개하자, 국군 제6사단은 경계부대인 미들섹스 대대와 함께 철수하여 가평 북쪽 가평천변에 배치되었다. 중공군은 호주대대의 배치 상황을 모르고 신속히 가평을 점령할 목적으로 종대대형을 유지한 채 도로와 계곡을 따라 내려 왔다.


우전방 75번 도로 북동쪽의 북면 목동리 504고지에 배치된 호주대대는 대대의 화력은 물론 지원된 전차 및 포병화력을 기습적으로 집중하여 적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은 4월 24일 01:00경 전방에 배치되었던 전차소대가 재보급을 위해 철수하자 즉시 2개 대대로 포위공격을 기도하였다. 반면 호주대대는 통신이 두절되어 전방중대와 연락은 물론 포병의 화력지원도 요청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후방의 대대지휘소와 박격포진지마저 피탈되어 최악의 상황에서 근접전투를 펼치게 되었다.


대대는 포위된 상황에서도 일부 진지가 피탈되면 즉시 역습으로 회복하면서 새벽까지 목동리 504고지의 방어진지를 사수(死守)하였다. 날이 밝아 아군의 항공폭격과 포병사격이 집중되자, 중공군은 공격을 중지하고 다수의 사체를 유기한 채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즉시 추격작전을 펼친 영연방 제 27여단 수색대는 죽둔리 부근에서 중공군 40명을 생포도 하였다.


전반적인 상황을 분석한 영연방 여단장은 적이 일시적으로 철수하였지만 이 지역에서 장시간 체류하면 오히려 피해만 증가할 것으로 판단하고, 호주대대를 미들섹스 대대 후방으로 철수토록 하였다. 대대의 철수를 지원하기 위하여 오전에 연료 보충과 장비 점검을 완료한 미 전차 소대가 복귀하여 화력으로 중공군의 추격을 저지하였고, 제16포병연대도 연막탄과 고폭탄을 사격하여 적의 시계를 차장하고 대대의 철수를 지원하였다.


호주대대가 미들섹스 대대 후방으로 철수하자, 75번 도로 서쪽인 북면 이곡리의 677고지에 배치된 캐나다 대대도 비록 고지위에 있었지만 인해전술로 밀고 올라오는 13배가 넘는 중공군을 상대로 싸운 말도 안되는 전투를 했다.


당시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참호까지 밀고 들어오며 고전하게 되자, 뉴질랜드군 포병대대에게 자신들의 머리 위로 곧바로 포격하는 ‘진내사격’을 할 것을 요청했다. 참호 안에서 싸우는 자신들보다 엄폐물 없이 노출된 중공군의 피해가 더 클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무전을 받은 뉴질랜드군 포병대대도 처음엔 놀라 선뜻 포격하지 못하다가 결국 아군 진지 머리 위로 진내사격을 해줬고 캐나다군의 의도대로 방어에 성공했다.


4월 25일 전투 후에 미군과 한 대화는 가히 상상도 못할 정도였다. 미군은 아예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가정하고는 들어온 통신이 적군의 것인 줄 알았다고 한다.


사실은 미군이 캐나다대대와 ANZAC군(호주군 뉴질랜드군)이 패배했을 것이라 지레짐작한 이유는 캐나다대대와 함께 가평을 사수하던 호주대대가 병력의 40%를 잃은 뒤 이미 후퇴를 해 실질적으로 전선을 지키던 보병 병력은 캐나다군 1개 대대의 450명이 전부였던 반해 중공군은 1개 사단 6000명이 밀고 내려오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캐나다대대는 방어에 성공했고, 10명 전사자에 23명 부상자를 낸 반면 중공군은 최소 1000명에서 최대 4000명 이하가 사상 됐을 것으로 추정됐다.


이 가평전투에서 중공군 제 20군 예하 118사단은 23일과 24일 양일 동안 비교적 기동이 용이한 75번 도로와 가평천 골짜기를 따라 진출하여 서울∼춘천 46번 도로의 차단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영연방 제 27여단의 강력한 저지작전과 포병의 화력지원에 많은 인명 피해를 입게 되자 25일 새벽 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따라서 중공군의 유엔군 전선 분할 기도는 완전히 좌절되고, 유엔군은 북한강 남쪽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얻게 되었다. 영연방 제27여단은 3일간의 혈전을 종료하고 25일 밤에 양평으로 철수하였고, 부대명칭도 영연방 제28여단으로 개칭하였다.


유엔군은 국군 6사단의 사창리가 돌파되면서 가평이 크게 위협을 받게 되었으나, 영연방 제 27여단 예하 호주 및 캐나다대대가 진내사격 등의 선전으로 가평을 사수(死守)하였고 중공군 제 5차공세의 전선분할 기도는 백지화 되었다.


7000여명 파병한 호주군, 코만도작전 등 특수작전에 능해

3번째 규모인 2만 7000명 파병한 캐나다, 자국 전쟁 역사상 가장 유명한 승리는 가평전투


호주는 6.25남침전쟁이 일어나자 그 즉시 한국에 파병을 결정했다. 1950년 6월29일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파병을 결정한 호주군은 1950년 7월 공군 제 77전투비행중대와 9월에는 호주 육군이 부산에 도착하여 참전했다. 육군, 해군, 공군 모든 분야에서 파병한 호주군은 총 1만 7천여명을 파견했다.


이는 미국 영국 캐나다에 이어 4번째 규모였다. 육군은 3개대대와 지원부대를 포함한 총 1만 657명(육군만 놓고 본다면 미국-영국-캐나다-터키에 이어 5번째 규모이지만 전체규모는 네번째임), 해군은 항공모함 1척, 호위함 4청 구축함 4척등 총 4500명, 공군은 1개 전투비행대대와 2개의 정비대대를 포함한 2000여명이 6.25남침전쟁에 참전하였다.


호주군은 연천 마량산전투, 평안남도 숙천 영유리전투, 평안북도 박천전투, 가평 목동리(죽둔리)전투를 용맹하게 치루었다. 이 중에서도 철수하는 국군 제 6사단을 엄호하면서 끝까지 목동리(죽둔리)를 사수(死守)하면서32명이 전사하고 3명 실종, 59명이 부상당했던 일명 ‘가평전투’가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특히 코만도작전이라는 특수작전에 능했던 호주군은 1950년~1957년까지 약 7년동안 우리나라에 주둔하였으며, 1만7000명의 병력 중 사망 339명 부상 1216명으로 1차세계대전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기록하였다.


한편, 캐나다 인구는 3600만명, 미국 인구는 3억2300만명, 한국 인구는 5000만명임에도 불구하고 캐나다는 한국전쟁때 미국-영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 캐나다 전체 군대 2분의 1을 한국으로 보낸 것이다.


1950년 6월30일, 캐나다 하원은 한국파병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여 청소년부터 2차 세계대전을 경험했던 예비역까지 포함된 2만 7천명의 캐나다 군인들이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6.25남침전쟁에 참전했다. 그리고 캐나다 전쟁 역사상 가장 유명한 승리는 ‘51년 4월23일 캐나다군 약 700명과 중국군 5,000여명이 싸운 가평 전투라고 한다.


가평 전투의 공로로 캐나다군과 호주군은 미국 트루만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았는데 이것은 캐나다군이 최초로 미국으로부터 수여 받은 표창이다. 당연히 대한민국 정부는 휴전 후 캐나다를 최우선 수교대상국으로 지정하였고 1963년에 수교를 맺었다.


현재 캐나다에 있는 모든 전쟁 기념물과 주 의사당에는 한국 전쟁 기록이 반드시 있다. 캐나다인들은 가평 전투를 잊지 않기 위해서 캐나다군의 위니펙 주둔지를 가평(Kapyeong Barrack)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하고 놀랍게도 캐나다 도로이름에도 가평(Kapyong Rd)이 들어가는 곳들이 다수 있기도 하다.


가평전투 후, 윈스턴 처칠은 '나에게 캐나다 병사와 미국의 기술력, 영국의 장교들이 주어졌다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캐나다군이 맹활약을 한 분야도 저격, 강습, 게릴라전 등의 소수의 병사들의 악과 깡으로 버텨야 하는 것들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동계전투는 전세계 최고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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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철의 전쟁사 (23)] 윈스턴 처칠, "캐나다 병사와 미국의 기술력, 영국의 장교들이면 세상을 지배"로 극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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