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대령의 DMZ 종주기(10)] 파로호·426고지·406고지 등 전쟁 격전지 걸으며 군인의 삶 되돌아봐
봉오리에서 화천읍 거쳐 풍산리까지 26㎞ 종주…소대장 근무 당시 군 생활 회고하며 미사도 참석
이 글은 현역대령이 나이가 지긋한 아저씨 3명과 함께 배낭을 메고 DMZ를 따라 걸은 이야기다. 이들은 한 걷기 모임에서 만난 사이로 당시 전역을 앞둔 56세의 안철주 대령과 60대 1명, 70대 2명이다. 2013년 8월 파주 임진각을 출발하여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12일 동안 걸으면서 이들이 느낀 6·25 전쟁의 아픈 상처와 평화통일의 염원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와 따스한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시리즈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안철주 박사] 8월 25일, 종주 일곱째 날이다. 오늘은 대성산 인근의 승리회관을 출발하여 봉오리를 지나 율목교, 파포리, 상서면사무소, 파포삼거리를 거쳐 파포고개를 넘어 화천읍으로 향했다. 봉오리부터는 아스팔트 포장이 잘된 461지방도였다. 구만리의 파로호 전시관을 지나 풍산리에 있는 칠성부대 상승회관까지 약 26㎞를 걸었다.
이 지역은 6·25 전쟁 당시 파로호 전투, 426고지, 406고지 전투가 있었던 지역이다. 새벽 5시 10분, 선식과 우유로 아침을 먹고 평상시보다 좀 서둘러 오전 6시가 되기 전에 출발했다. 우연히도 단원 모두가 천주교 신자여서 어제 잠자리에 들기 전 내일은 일요일이니 미사에 참석하자고 의견 일치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10여분 정도 걸으니 8305부대 위병소가 보였다. 32년 전 필자가 연대장님께 전입신고를 했던 부대다. 그리고 어제 위문 왔던 선임하사 윤현준님을 처음 만난 곳이기도 하다. 부대 가까이에 있던 군 관사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 같았다. 그 당시 선임하사의 집은 군 관사였는데, 소대장 근무 시절 명절이나 생일 때 초대받아 식사 대접을 받은 기억이 났다.
어제 윤현준님께 그 이야기를 하니 정작 본인은 기억을 하지 못했다. 나에게는 낯선 환경에서 부대 음식만 먹다가 정성이 가득 담긴 따뜻한 음식을 대접받은 특별한 경험이어서 오래 기억에 남았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일상생활이었기 때문에 기억을 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지금과 비교하면 많은 것들이 열악했다. 병사들 내무반에는 벽돌과 진흙으로 만든 뻬치카라는 난방시설이 있었다. 석탄가루와 진흙을 섞어 만든 혼합물을 뻬치카에 태워 내무반을 따뜻하게 유지했다. 이를 전담 관리하는 ‘뻬당’(뻬치카 당번병)으로 책임감 있는 상병 또는 병장이 임명됐다. 뻬당은 밤새 뻬치카 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봐야 했지만 따뜻한 장소에 항상 있을 수 있어 병사들은 좋아했다.
그리고 장교들이 묵었던 독신자 숙소(BOQ)는 나무를 때서 난방을 했다. 저녁에 소대원이 방 바닥을 따뜻하게 데워 놓으면 온기를 느끼며 편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이른 새벽이 되면 방바닥의 온기는 사라지고 방안의 마실 물도 얼어 있었다. 당시는 목욕탕도 귀해 목욕을 하려면 인근 읍내에 나가야 했다. 근무가 없는 일요일에 가끔 나가 소주 한 잔을 곁들인 저녁식사를 하는 것이 당시 최고의 문화생활이었다.
봉오리 삼거리를 걸으면서 야외기동훈련, 연대전투단 훈련 등 타 지역에서 장기간 훈련을 하고 부대 복귀를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봉오리 지역을 행군하며 지나갈 때 길가의 지역 주민들로부터 따뜻한 격려도 받고 음료수도 나눠줘 마신 기억이 났다. 그때는 지역주민과 군의 관계가 상당히 인간적이었고 훈훈했던 것 같다.
4시간 20분 동안 조금 빠르게 걸었다. 율목교, 파포리, 상서면사무소, 파포삼거리를 지나 파포고개를 넘어 화천읍으로 향했다. 모두들 미사를 드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는지 쉬지도 않고 부지런히 걸어서 오전 11시에 시작하는 교중미사에 참석했다. 미사 후 성당 앞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휴식도 취하고, 친절한 교우님들이 주시는 달콤하고 향기로운 커피도 마셨다.
성당 근처에 있는 성원식당에서 여유롭게 점심을 먹고 오랫동안 편히 쉬었다. 자전거를 타고 자연을 만끽하는 사람들을 식당에서 만나 즐겁고 가벼운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들은 춘천을 출발하여 화천까지 왔고 평화의 댐까지 가는 중이라고 했다. 이어 구만리에 있는 파로호 전시관을 지나 풍산리에 있는 칠성부대 상승회관까지 걸어 이날 종주를 마쳤다.
6·25 전쟁 시 파로호, 426고지, 406고지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파로호는 1944년 5월에 화천댐이 건설되면서 만들어진 호수이며 건설 당시 이름은 ‘화천호’였으며, 상류에는 평화의 댐이 있다. 6·25전쟁 시 용문산 전투에서 6사단이 중공군 3개 사단의 공세를 막아낸 뒤 도망가는 중공군들을 파로호까지 추격하여 괴멸시켰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기념해 파로호(破虜湖, 오랑캐를 깨뜨린 호수)로 개명했고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파로호는 1945년 38선에 의해 북한령이 되었다가 휴전협정이 막바지에 이른 1953년 7월 20일에 금성천 및 화천댐 근처 425고지, 406고지 전투 결과 승리로 화천댐을 포함한 호수 전체가 우리 땅이 됐다. 그 결과 지금도 우리에게 풍부한 물과 전기를 공급하는데 기여하고 있으며 북에서 내려오는 물에 의한 홍수 피해를 조절할 수도 있게 됐다.
칠성전망대에서는 화천 북방 철책선 약 1.2㎞ 지점의 425고지와 406고지를 볼 수 있다. 그 지역에서는 6·25전쟁 막바지에 아주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1953년 7월 휴전을 앞두고 북한의 김일성은 “화천 발전소만은 넘겨줄 수 없다”며 탈환을 지시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화천 발전소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며 절대 사수 명령을 내리고 1953년 7월 19일 2군단 사령부를 직접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했다.
중공군은 1953년 7월 20∼22일 425고지를 계속 공격했다. 인해전술을 내세운 중공군의 공격에 아군은 백병전을 불사하며 싸워 고지를 지켰다. 그리고 7월 23∼24일 406고지의 3연대 6중대가 중공군의 마지막 공격을 격퇴하며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고지를 지켜낸 상태에서 휴전 협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규학 6중대장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규학 중대장은 전사하기 며칠 전 아내에게 애절한 사랑이 담긴 편지를 썼다. 그가 쓴 편지에는 “그리운 금원씨 날이 밝으면 어떤 임무가 주어질지 모르지만 이 밤 당신 꿈을 꾸리다”라는 애틋한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2020년 구순이 된 그의 아내 정금원 할머니는 남편이 전장에서 보낸 편지는 받았으나 오지 못한 남편을 아직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매일경제, 2020. 06.14, 정전 이틀 전 전사한 남편을 기다리는 구순의 아내)
이 편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참전할 수밖에 없었던 한 군인과 그와 함께 살아가는 가족의 애절함과 슬픔을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분들 때문에 현재 우리가 편안히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전역 이후 앞으로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할지 자문하게 됐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한반도를 갈망하며 칠성부대 상승회관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하루도 더운 날씨였지만 계획대로 무사히 종주를 마쳤고, 천주교 신자인 단원들이 함께 주일미사까지 드릴 수 있어서 행운이었고 은총을 받았다는 생각을 했다.
◀ 안철주 심리경영학 박사 프로필 ▶ 예비역 육군대령. 대한민국 걷기지도자로 100㎞ 걷기대회를 7회 완보한 ‘그랜드슬래머’이며, 스페인 순례길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완주한 걷기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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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벗이된지 등반한지
20년이 되었습니다
나이들면 갱년기를
이기려고 지금 이 시간까지
자연을벗삼아 걷고 있지요.
아마도 내가 걷는것을 모르고
지냈다면 지금 이 시간 내 자신이
무릎이 안 좋고 많은 고생이
있었을 것이다 너무 내 자신이
대견하여 自畵自讚(자화자찬)
하며 살고 있어요..
자연을 다니면서 산을 벗삼는
者 장수한다고 합니다.
인간은 첫 돐이 되면서
걷기 시작 입니다.
많이 걸으나 적게 걸으나
이 세상을 등 질때까지
걸어야 합니다
안개령님과 함께 역사 고난의
길을 걸으시는 분들께 크나큰
찬서를 보냅니다..
훌륭 하십니다
목표를 삼고 열심히 다니셨으니
그 때의 역사를 돌아보시고
두 다리도 강화 시키시고
백세인생의 기름길 입니다
홧팅^^ 최고 이 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