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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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0월 20일 북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톈진(天津)시에 있는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와 그의 부인 덩잉차오(鄧潁超)의 기념관을 방문해 전시물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필자가 베이징 근무시절, 한반도 전문가인 한 연구원의 초대를 받아 어느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가 주문한 음식은 소고기를 다진 완자 즉 미트볼이었다. 메뉴판에는 ‘사자머리 완자’라고 적혀있었다. 평범하고 소박한 이 음식이 그 연구원의 설명을 듣게 되자 갑자기 달리 보였다.

 

그는 “이 음식은 저우언라이 총리가 평소 즐겨 드시던 음식입니다. 서거하시기 며칠 전 이 음식을 보고 말없이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라며 마치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를 이어간다. “저우 총리는 옆에 있던 주방장에게 ‘자네 그동안 수고 많았네. 앞으로 이 음식 언제 먹어보나’라는 말을 유언처럼 남겼다”고 소개했다. 

 

필자는 당시 사자머리 완자를 보면서 저우가 사망한지 30여년이 지났지만 그에 대한 중국인들의 그리움과 애정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중국인들은 “마오쩌둥은 중국을 세웠고(建起來), 덩샤오핑은 중국을 부유하게 했으며(富起來), 시진핑은 중국을 강하게 만들었다(强起來)”라고 평가한다. 다분히 국가주석인 시진핑을 부각시키기 위한 선전 차원의 말이다.

 

하지만 시진핑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퇴임 이후 가능할 것이다. 중국 속담에 “관에 뚜껑 덮은 후에야 평가할 수 있다(蓋棺論定)”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은 제대로 평가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들과 함께 했던 저우언라이는 마오 및 덩과 달리 자기 시대를 만들지 못했고 자신의 사상과 이론도 펼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저우가 없었다면 마오도 없었고 덩도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마오와 덩에 비해 손색없는 역할을 했다는 의미다. 저우는 비록 영원한 2인자였지만, 중국 공산혁명이라는 큰 역사의 무대에서 자기 역할을 다하고 박수 받으며 퇴장한 훌륭한 주연 중 한 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지금도 중국인들 마음속에 청렴하고 친밀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오늘은 영원한 2인자이자 중국 인민의 총리 저우언라이를 찾아가 보겠다. 그는 청나라 말기인 1898년 3월 5일 짱수성 화이안시(江蘇省 淮安市)에서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직후 5촌 아저씨의 양자로 입적됐지만 10살 무렵 고아가 돼 선양(瀋陽)에 있는 친척집에 머물렀다. 1913년 텐진(天津)의 난카이 중학교에 입학해 1917년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고학으로 도쿄 호세이(法政) 대학 부속전문학교에 이어 메이지(明治) 대학에 들어갔지만 학업을 포기하고 1919년 귀국한다. 이후 난카이 대학 재학 중 5.4 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그리고 1920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1921년 중국공산당 창당과 동시에 유럽지부 조직책을 맡았다. 그는 프랑스에서 4년간 머물다가 1924년 26세의 나이로 귀국한다.

 

일본과 프랑스 유학 경험을 통해 저우는 국제정세를 보는 안목을 넓혔다. 즉 나와 다른 세계를 보면서 타인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반면, 마오는 1949년 12월 신중국 건국 선포 직후 스탈린과 회담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한 것 외에는 외국 경험이 없다. 따라서 저우가 폭넓은 국제감각을 토대로 중국 국민당과 2차 국공합작 협상, 미국과 수교 협상, 월남전 평화협정 등 주요 협상을 맡으며 마오를 보좌했다.

 

저우는 난카이 대학 시절 두 가지 인연을 만난다. 하나는 평생 동지이자 반려자인 덩잉차오(鄧潁超)이다. 5.4 학생운동 과정에서 만나 평생을 같이했다. 비록 슬하에 자식은 없었지만 저우와 덩은 서로에게 충실했고 한눈팔지 않았다. 저우는 친척들에게 자애로웠지만 불법과 부정 그리고 특권은 용납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사생활은 조금도 흠이 없었다.

 

실제로 그는 조카 1명이 장학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장학금 지급을 중단시키고 자신의 월급에서 그 비용을 지불해주었다고 한다. 친척들 어느 누구도 총리와의 관계를 밝히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고, 친척들도 저우의 이러한 당부를 충실히 지켰다고 한다. 이들은 공산당 입당을 위한 신원확인 과정에서 저우와 친척임이 밝혀졌지만 어떠한 특혜도 없었다.

 

또 다른 인연은 연극부 동아리 활동이었다. 저우는 주로 여자 역할을 했다. 타인을 배려하는 섬세한 외교적 감각과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는 기질이 바로 여기서 함양됐다고 한다. 그래서 저우는 협상의 달인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저우는 공산당에 입당하고, 황푸군관학교가 설립되자 정치부 주임으로 부임한다. 이 때 교장인 장제스(蔣介石)와도 좋은 관계를 형성한다.

 

필자는 과문한 탓인지 저우언라이의 전 인생을 통틀어 저우를 인간적으로 싫어하거나 매도한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문화혁명 시절 4인방이 저우를 제거하기 위해 그의 반역 음모를 조작해 마오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의심이 많았던 마오조차도 “그가 그럴 리 없다”라며 한마디로 일축했다.

 

1927년 1차 국공합작 결렬 후 저우언라이는 마오 등과 함께 공산당 활동에 몰두한다. 이 때 저우는 마오보다 당내 서열이 높았다. 1935년 대장정 기간 중 공산당의 향후 투쟁방향을 결정하는 쮼이회의(遵義會議)에서 저우는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투쟁방식을 농촌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마오를 주목했다. 그는 마오를 홍군 지도자로 추대하여 관철시킨 다음 스스로 마오 휘하에 들어갔다.

 

저우는 공산당 내의 서열보다도 마오의 옳은 주장과 열정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누가 중국 공산혁명을 이끌어갈 적임자인가”라는 관점에서 인물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저우에게는 서열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저우가 없었다면 마오도 없었다는 말이 이때 처음으로 나왔다. 저우가 총리로서 급진적이며 이념적인 마오를 27년간 보좌한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저우는 프랑스 유학시절 덩샤오핑을 처음 만났다. 덩은 6년 프랑스 유학 후 이어 모스크바에 1년 체류한 다음 1927년 귀국하여 공산혁명 대열에 합류한다. 1974년부터 병세가 심해진 저우는 정상적인 총리 직책 수행이 어려워지자 덩샤오핑을 총리 직무대행으로 임명했다. 저우는 자신이 주창한 중국 근대화를 위한 4개 현대화 계획을 추진할 수 있는 인물로 덩을 눈여겨 봐두었던 것이다.

 

이같이 저우언라이의 기준은 “누가 중국을 발전시킬 수 있는 인재인가”였다. 그래서 1974년 12월 입원하고 있는 병실로 덩샤오핑을 불러 “당신이 나보다 낫소. 지난 1년간 총리로서 실적이 말해줍니다. 당신을 정식 총리로 건의하겠소”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병약한 몸을 이끌고 창사(長沙)에 머물고 있는 마오를 찾아가 진지하게 덩샤오핑을 추천한다.

 

4인방이 득세하던 상황이었지만 저우의 추천으로 덩은 중국군 총참모장과 부주석으로 내정됐고 이어 다시 좌천됐다가 1978년 복권하게 된다. 저우가 없었다면 덩샤오핑도 없다라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저우가 중국의 발전을 위해 자신이 구상한 개혁개방을 덩샤오핑이 실천해 줄 것으로 믿었고, 덩샤오핑은 훗날 그런 기대에 부응했다.

 

저우는 1976년 1월 8일 자신의 주치의 우제핑(吳介平)에게 “우 동지,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소, 여긴 별 일이 없으니 빨리 가서 다른 사람들을 돌보도록 하시오. 그들은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소”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덩샤오핑은 장례위원장이 되어 저우의 유언에 따라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정리한다. 시신을 화장해서 자기 손으로 중국 산천에 뿌리고 남긴 재산 약 1만위엔은 당에 기부했다.

 

1976년 1월 15일 그의 유해가 중국 산천에 뿌려지던 날, 유엔 본부는 반기(半旗)를 게양했다. 유엔에서 반기를 게양하는 관례는 그때까지 없었다. 몇몇 회원국 대사들이 “우리나라 대통령이 죽었을 때엔 유엔 깃발이 그냥 나부꼈는데 중국의 제2인자가 죽었다고 해서 유엔에서 반기를 올리고, 또 다른 나라 국기마저 다 내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따졌다.

 

이에 대해 당시 쿠르트 발트하임 유엔 사무총장은 이렇게 답변했다.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기 위한 것이고,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중국은 금은보화가 많은 나라인데 총리였던 저우언라이는 은행에 돈 한 푼이 없었다. 둘째, 중국은 인구가 10억이 넘지만 그는 평생 아내 한 사람만 사랑했고 자녀도 없다. 귀국의 지도자나 국가원수가 이 2가지 중 하나라도 해당되면 서거했을 때 반기를 게양하겠다”라고.

 

중국 텐안먼(天安門) 광장에 세워진 저우언라이의 추도비에는 “인민의 총리로 인민이 사랑하고, 인민의 총리로 인민을 사랑하고, 총리와 인민이 동고동락하며 인민과 총리의 마음이 이어졌다”라고 새겨져 있다. 필자는 여기에 “그는 마오쩌둥을 발탁하여 그 밑에서 평생 보좌했고, 덩샤오핑을 발탁하여 중국을 부유하게 만들었다”라고 추가하고 싶다.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김한경 총괄 에디터 겸 연구소장 기자 khopes58@securityfact.co.kr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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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중국 알기 (16)] 영원한 2인자 저우언라이,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발탁해 오늘의 중국 이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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