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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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8년 12월 18일(현지시간)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 개혁개방 40주년 기념식' 전경. 중국 개혁개방을 주도한 덩샤오핑은 1978년 12월 18일 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에서 개혁개방 노선을 천명했다. 이후 중국 경제는 경제특구를 설치하고 외자 유치에 나서는 등 문호를 개방하면서 40년간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155배 성장했고 8억명이 넘는 사람이 빈곤에서 탈출했다. [사진=연합뉴스]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중국인들은 “마오쩌둥은 산이고 덩샤오핑은 길이다”라고 말한다. 즉 청조 말기부터 시작된 약 100여 년의 혼란을 끝내는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마오쩌둥의 공적을 우뚝 솟은 산에 비유한 것이다. 반면 덩샤오핑은 경제적으로 인민들의 생활을 향상시켰고 정치적으로 마오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실용성을 평가하여 사통팔달로 통하는 길로 묘사했다.

 

덩샤오핑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중국은 어떠한 모습일까? 아마도 마오쩌둥의 시대가 오랫동안 계속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당시 강경 친마오의 4인방들은 영구혁명을 내세워 마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념 과잉의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고 낙후된 경제를 발전시킨 인물이 덩샤오핑인 것이다.

 

오늘은 덩샤오핑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주로 개인적인 특이 이력과 마오쩌둥과 차별되는 사항들이다. 덩은 1904년 쓰촨성(四川省)에서 태어났고, 부친은 덩원밍(鄧文明)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받아들였고, 서구식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1918년 14세 어린 아들 덩샤오핑을 시골 고향에서 4일 걸려야 도착하는 대도시 충칭(重慶)의 학교로 보냈고, 이어서 16세인 1920년 프랑스로 유학 보냈다.

 

반면 마오쩌둥은 1893년 후난성(湖南省)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부친은 아들이 고향에서 머물기를 원했다. 그러나 마오는 부친의 만류를 뿌리치고 베이징으로 상경했다. 마오는 관습과 기존체제에 반항적이고 주관이 강한 모습이었다.

 

덩의 프랑스 유학은 순탄하지 않았다. 학비와 생활비가 부족해 제대로 학업에 전념할 수 없었다. 파리의 르노 자동차 공장에서 일했고, 같은 유학생 저우언라이 밑에서 적광(赤光)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며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 저우언라이와 인연의 시작이었다. 중국 유학생들이 귀국할 때 덩은 1926년 소련으로 옮겨 중산대학에 다녔다. 당시 소련 공산당은 아시아 공산 혁명을 위해 동방대학을, 중국의 혁명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중산대학을 세웠다.

 

1927년 귀국한 덩샤오핑은 그 해 8월 7일 우한(武漢)에서 개최된 중국 공산당 비상대책회의에서 마오쩌둥을 처음 만나게 된다. 마오는 정식 참석자였고 덩은 회의록 작성자에 불과했다. 덩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과 장정을 함께 하며 국공내전에 참여했지만 처음에는 그렇게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국공내전이 끝나갈 무렵에는 중국 서남부 산악지대 해방을 담당한 제2야전군의 정치위원과 지방행정 책임자를 겸직하면서 능력을 발휘했고 1950년 10월 티베트 점령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적으로 마오쩌둥에게 발탁돼 중앙 정치무대로 진출했다. 그 후 군사 지휘관보다는 정치위원과 공산주의 이론가로서 활동했다. 

 

그러면 필자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덩샤오핑의 업적에 대해 살펴보겠다. 첫째 국내정치를 안정시켰다. 덩샤오핑은 문화혁명 때 주자파로 몰려 시골 트랙터 공장에 4년간 유폐됐고 자신의 장남 덩푸팡(鄧樸方)은 홍위병의 핍박으로 불구가 됐다. 그러나 덩은 마오와 문화혁명을 대상으로 하는 정치보복을 최소화했다. 한풀이와 보복의 차원을 넘어 통합과 발전의 관점에서 중국을 새롭게 출발시킨 것이다. 

 

마오 시대를 “공이 7이고 과가 3이다”라고 정리하고 더 이상 소모적인 과거사 논쟁에 휩싸이지 않게 했다. 무엇보다 인적청산 대신 제도를 개선해 나갔다. 1인 절대권력의 폐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구조를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했고, 권력투쟁의 원천인 권력의 승계도 지금의 지도부가 합의에 의해 차차기 지도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제도화했다. 이런 제도에 의해 탄생한 지도부가 바로 후진타오와 시진핑이었다. 

 

둘째, 마오는 자신의 이상과 이념에 중국을 꿰맞추려한 이상주의자였다. 반면 덩은 “고양이가 검은 색이든 흰색이든 관계없다.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현실주의자였다. 이념에서 벗어나 실용적인 개혁개방(경제개혁, 대외개방)을 추진하면서 덩샤오핑의 신념은 확고했다. “가난한 것은 공산주의가 아니다”, “먹을 것을 가진 자가 결국 모든 것을 갖는다“라며 경제적 현실을 이념보다 중시했다. 실질적인 것을 중시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중국 사회는 평등이라는 공산주의 교조적인 사상에서 벗어나 경쟁과 효율의 개념을 도입해 고속 발전하기 시작했다. 선부론(先富論)도 나왔다. 능력 있고 노력한 자가 먼저 부자가 되고 그 이익을 공유하며 이를 토대로 여러 명의 부자가 탄생하는 개념이다. 자본주의 개념을 받아들인 중국 경제체제를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라고 한다. 덩샤오핑은 억눌려져 있던 중국인의 부자 마인드를 깨워 인민들로 하여금 미친 듯이 돈을 벌게 했다.

 

셋째, 국제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시대 흐름에 적응했다. 마오쩌둥은 제3차 세계대전을 염두에 두고 소련 및 미국과 전쟁을 준비하는 ‘전쟁불가피론’자였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전쟁가피론’을 주장하며 국방비를 줄여 경제발전에 전념했다. 1979년 미국과 국교수립을 하면서 향후 100년간 맞서지 말 것을 주문했다. ‘도광양회’(韜光養晦) 즉 충분히 실력을 갖춘 후 나서라는 의미다. 중국은 이런 자세로 미국의 지원을 받아 고속 발전했다.

 

그리고 덩샤오핑은 한국과 수교를 결심했다.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한국을 냉전의 시각으로 보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한국과 수교한다면 얻게 될 국가이익으로 ① 경제적 협력이 가능하고, ⓶ 대만을 고립시킬 수 있으며, ③ 1989년 6.4 천안문 사태로 서방으로부터 고립당한 상황에서 탈피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았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흰 고양이였다. 문제는 침입자를 경고하고 완충해주는 검은 고양이인 ‘북한을 어떻게 설득하고 달래는가’였다.

 

덩샤오핑은 북한에 최대한 정성을 기울였다. 군사원조를 통해 북한의 안보불안감을 달랬고, 경제원조로 신뢰를 보였다. 그리고 지도급 인사들이 방문하여 김일성에게 직접 한중수교의 불가피성을 설득하면서 기존의 관계는 계속된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북한의 실망감을 해소시키지는 못했지만 북한에게 할 바를 다했다. 중국은 한국과 수교함으로써 한국과 북한에 모두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로 변모하여 한반도에서 전략적 우월을 점하게 됐다, 

 

넷째, 바다를 주목하고 해군력 증강을 강조했다. 덩샤오핑은 바다를 지키고 해양으로 진출하기 위해 항공모함 보유를 결심했다. 이를 실현시켜준 인물이 류화칭(刘华清)이었다 류화칭은 국공내전 시절 제2야전군 정치위원이던 덩샤오핑 휘하에 있었으며 1989년에는 덩샤오핑에 의해 중앙군사위 부주석에 발탁됐다.

 

류화칭은 “중국이 항모를 만들지 않으면 나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라고 항공모함 확보에 강한 집념을 보였다. 결국 류화칭은 덩샤오핑의 항공모함의 꿈을 실현하였다. 중국의 항모 명칭이 미국처럼 역대 대통령이나 해군제독이었다면 아마 1번함은 덩샤오핑함, 2번함은 류화칭함이 되었을 것이다.  

 

덩샤오핑은 1997년 2월 19일 93세로 사망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사망 직후 각막과 장기 일부는 해부학 연구용으로 기증됐으며, 그의 유해는 바다에 뿌려졌다. 중국인들은 남중국해가 덩샤오핑의 묘소라고 한다. 150㎝가 조금 넘는 작은 체구이지만 묘소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
 
이렇게 시대를 열어간 덩샤오핑에게도 과오는 있다. 첫째, 개혁개방에 뒤따르는 부정부패 문제를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쥐를 잘 잡았던 고양이가 이제는 주인집 부엌에 있는 생선에 손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정보와 권력을 쥐고 있는 혁명원로 자녀들과 친척들의 재산 축적 문제는 중국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덩샤오핑의 아들과 딸, 사위들도 홍콩을 중심으로 각종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데, 이들에게 돈벌이는 땅 집고 헤엄치기다.

 

둘째, 1989년 6.4 천안문 사태 시 이를 유혈 진압했다. 희생자 수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중국공산당은 덩샤오핑의 과오에 대해서 대체로 말을 하지 않는다. 부정부패 문제는 경제가 고속 발전하는 과정에서 어느 나라든 발생하는 보편적 문제라는 것이고, 천안문 사태 유혈진압도 국가의 질서를 위해 불가피했다는 생각이다.

 

덩샤오핑의 과오를 생각하니 “살아있는 동안 비난받지 않은 사람은 죽은 후에 비난받을 것이다”란 말이 떠오른다. 그래서 필자는 후세에 덩샤오핑의 공적과 과오가 어떻게 평가될지 궁금하다. 필자가 감히 먼저 평가해 본다면 그의 공적은 8이요 과오는 2이다.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김한경 총괄 에디터 겸 연구소장 기자 khopes58@securityfact.co.kr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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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중국 알기 (17)] 작은 거인 덩샤오핑, 마오쩌둥 시대 수습하고 새 시대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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