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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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조선족 자치주에 거주하는 조선족들이 한국적 풍습에 따라 한복을 입고 춤추며 회갑잔치를 하는 모습. [사진=중국 바이두 캡처]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중국에서 사업하는 한국인은 물론이고 백두산을 여행하는 한국인에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마 조선족일 것이다, 과거 백두산 여행은 연변조선족 자치주 연길에서 출발했고 이어서 해란강, 용정 등 이 일대에 산재한 일제 강점기 시절 항일 투쟁의 유적을 돌아보는 여행과 연계돼 있었다.

 

한국인들은 연길 시내의 한글 간판과, 한국말이 통하고 한복을 볼 수 있는 거리 풍경에 잃어버린 땅에 대한 어떤 그리움을 많이 느꼈을 게다. 그리고 사업가들은 조선족의 도움으로 먼저 진출한 일본 기업을 제치고 현지에 정착했다고 한다. 오늘은 조선족의 역사를 먼저 짚어본 후, 이어 이들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며 잠재력은 무엇인지 알아본다.

 

조선족의 역사는 임계순 한양대 명예 교수의 저서 ‘우리에게 다가온 조선족은 누구인가’에서  발췌해 인용했다. 조선인들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이주한 역사는 청조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조는 명을 멸망시키고 중원으로 천도하면서 1658년 무렵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지역을 봉금지대로 설정하고 조선인의 진입을 금지했다. 청조 발상지를 보호한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함경북도와 평안북도 일부 농민은 봉금령이 완화된 틈을 이용해 아침에 강을 건너 경작하고 저녁에 돌아오는 당일치기 경작을 하다가, 봄에 강을 건너 농사짓고 가을에 수확물과 함께 귀가하는 계절출가이민으로 발전했다. 후에는 아예 고향을 떠나 이 지역에 거주하며 경작하게 됐는데, 조선조정의 무능과 부패로 삶이 어려운데다 전염병과 자연재해로 흉년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자 조선의 애국지사들은 중국 만주지방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조선인의 이주는 대폭 증가했고, 일제의 식민 정책에 따른 토지조사사업으로 전답을 빼앗긴 많은 농민들도 이 지역으로 이주해 갔다. 당시 만주 일대를 통치하던 중화민국과 군벌은 재정 수입을 확충하고자 이주와 토지 개간을 묵인했다. 1920년까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이주한 조선인은 약 20만 명에 달한다.
 
1931년 이후 일제가 만주지역 전체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조선인들을 이 지역에 집단으로 이주시켰다. 이 시기의 이주자는 자유의사 보다는 일제의 정책에 의해 강제 이주된 경우가 많았다. 1936년에 만주지역 조선인은 총 85만 4천명으로 증대됐다. 국공내전 기간에 국민당은 소수민족을 강압적으로 동화시키는 정책이었지만, 공산당은 소수민족의 지지를 받고 환심을 사기 위해 개별 민족의 특성을 인정하고 해당언어 사용을 승인했다.

 

마오쩌둥은 1939년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조선족은 중국 국민으로 정착했다. 중국의 조선인이 조선족으로 변모되는 순간이었다. 토지개혁 시기에는 토지를 분배받아 경제적으로 기본 생활을 보장받았고, 정치적, 법적으로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보장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전통 문화를 보존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 조선족의 40%가 살고 있는 연변조선족 자치주가 중심이 되었다. 초등교육부터 고등교육까지 한국어 교과서로 공부했고 각 가정에서는 한국어로 대화를 했으며, 조선인 집단 거주지이기 때문에 사회생활도 한국어로 가능했다. 한국어를 바탕으로 집단거주하면서 전통문화가 자연스럽게 보존되면서 계승됐다.

 

한·중 수교 이후 조선족과 한국인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필자가 관찰한 바로는 첫 만남은 환호와 기대로 시작됐지만 곧 상호 실망과 경우에 따라서는 상호 저주로 바뀌어 갔다. 한국인들은 만주지방에서 전통문화를 만나는 기쁨을 맛보았고, 조선족은 부유한 한국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파탄이 일어났다.

 

한국인은 조선족이 말은 통하지만 사고방식이 다른 점에 당황했고, 조선족은 일부 한국인에 당한 사기 피해로 가정이 해체되는 사례를 보면서 한국인들을 전부 사기꾼으로 보는 것이었다. 실제로 필자가 베이징에 처음 갔을 때, 조선족은 우리를 ‘한국분’이라고 예의바르게 대했지만 3년 후 귀국할 무렵에는 ‘한국놈’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뭘 잘못해서 그들의 마음에 그렇게 큰 상처를 주었는지 반성해 보았다.

 

이제 우리는 조선족을 볼 때, 뜨거운 가슴과 함께 냉정한 눈이 필요하다. 첫째, 조선족을 한국말을 하는 중국인으로 보아야 한다. 앞으로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조선족은 중국에서 태어나 학교 다니고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그들의 조부모 또는 그 이상 선대 조상이 한국에서 왔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그들은 중국식 교육체계에 의해 중국사회에 필요한 교육을 받았고, 계속 중국에서 살아야 한다.

 

말이 통한다고 우리와 생각이 같고 정체성이 동일하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말만 통할 뿐 그 외에는 전부 다른 중국 국민인 것이다. 재미동포 3세 데이비드 김이나 일본에 귀화한 재일동포 4세 야마모또와 같다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조선족이 중국사회에서 우수한 소수민족이라고 인정받아가면서 조상의 고향인 한국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들은 한국인이 아니라 중국인이기 때문이다.

 

둘째, 필자가 주목하는 조선족의 잠재력은 이들이 갖고 있는 북한과 인적 네트워크이다. 조선족은 몇 단계만 건너가면 직·간접적으로 북한에 친척과 지인들이 있다. 그리고 이들은 북한방문과 소통에 제한이 없다. 이들이 북한 친척이나 지인에게 “한국이 모든 면에서 북한보다 월등하다. 한국은 살기 좋은 동네다. 사람들도 친절하고 인정도 많더라. 한국 주도로 통일돼야 한다”라고 그들이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얘기한다면, 북한 주민들은 이 말을 신뢰할 것이다.

 

그리고 북한이 급변사태 등 체제 변화의 순간에 도달했을 때, 한국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중국으로 갈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주저 없이 한국을 택할 것이다. 어느 북한 이탈주민은 북한 사회에서도 “민심은 천심이다”라고 말했다. 김정일이나 김정은이 아무리 자본주의 날라리 풍이니 반사회주의 반동사상이니 하며 단속해도 한류의 확산을 막지 못한다. 주민들의 삶의 터전인 장마당도 통제하기 어렵다.

 

조선족을 통해 북한주민을 움직일 수 있고, 북한 주민은 곧 북한의 변화를 주도할 수 있을 것이란 얘기다. 이런 나의 논리에 동의한다면 주위에서 만나는 조선족에게 정다운 말 한마디와 격려의 눈짓을 보내주기 바란다. 그런 작은 매려가 통일에 큰 기여를 할 것이다.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김한경 총괄 에디터 겸 연구소장 기자 khopes58@securityfact.co.kr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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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중국 알기 (20)] 중국의 ‘조선족’, 한국의 우월함 북한에 전파할 수 있는 통일 촉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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