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중국 알기 (23)] 청일전쟁 패전과 청나라 몰락 자초한 국방비 전용
북양함대에 필요한 해군 전함 도입 예산 서태후 별장 건설과 생일 축하 비용으로 사용해 패전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언론보도에 의하면, 정부는 금년도 코로나19 재난지원금 지급을 위한 2차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면서 국방비 5629억원을 전용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감액 내역은 환차익·낙찰차액·연내 집행제한 예산 등으로 사업계획 변경과는 무관하다. 이번 추경에서 감액된 사업은 내년도 예산 편성과정에서 기획재정부와 협의해 반영할 예정이다"라고 설명했다.
지난해에도 2차 추경 때 1조 4758억원이 전용된 데 이어 3차 추경 때도 2978억원이 삭감된 바 있다. 국가 전체의 관점에서 예산 전용은 있을 수 있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분야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방부 설명대로 삭감되고 전용된 예산은 다음 해에 반영될 수 있다. 그러나 국방 관련자들은 ‘국방비 전용은 문제없다’라는 관점이 아니라 ‘큰 문제이다’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특히 국방비 전용으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 청나라가 국방비를 전용한 결과 청일전쟁에서 패배하여 몰락과 망국의 길로 들어선 최악의 사례를 들어보겠다. 청일전쟁이 발생하기 전에 중국 북양함대는 동양 최대였다. 북양함대는 1871년 산둥성 웨이하이시(山東省 威海市) 류공다오(劉公島)에서 창설돼 전성기에는 전함 25척, 보조함 50척, 수송선 30척, 인원 4천명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당시 서구열강에 이어 세계 9위의 해군력이었다.
북양함대의 기함인 '정원(定遠)함'은 독일제 최신예 7000톤급 철갑함으로 정작 독일정부마저 예산부족으로 구매하지 못한 전함이었다. 자매함 ‘진원(鎭遠)’도 동급 전함이었으며, 이들 전함은 멀리 있는 오랑캐를 평정(定遠)하고 진압(鎭遠)한다는 의미로 명명됐다. 당시 청나라는 서태후를 위해 베이징 서쪽에 인공호수까지 포함된 이화원이란 장대한 별장을 짓기 시작했다. 별장 공사에 수천만 냥의 비용이 들어가면서 해군 예산도 건설비용으로 전용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새로운 전함 도입은 고사하고 1891년부터는 탄약 구입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청일전쟁 발발 3년 전부터는 북양함대를 유지하는 것도 곤란했다. 전쟁 발발 3개월 전 영국은 청나라에게 순양함 2척을 사라고 권유했지만 서태후의 생일 축하 비용으로 써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순양함 2척은 일본이 구입해 주력으로 투입하게 된다. 이처럼 청나라는 국방비가 전용되는데 반해 일왕은 황실 예산 30만엔을 전함 건조에 보태라고 보냈다.
청일전쟁 개전 당시 함포 포탄은 문당 2-3발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화약통에는 모래나 콩만 잔뜩 채워져 있었다. 장부에 기재된 탄약의 재고숫자를 맞추기 위해 진흙으로 포탄을 빚었다고 한다. 가까스로 마련된 해군 예산조차도 서태후의 생일 뇌물로 전용되면서 화약을 구매할 예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위에서 국방비가 전용되니 밑에서도 국방비가 새어나가 결국 겉만 번지르르한 동양 최대였다.
이런 북양함대는 막상 전쟁이 발발하자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면서 전투다운 전투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뤼순(旅順)을 거쳐 웨이하이시로 철수했다. 결국 베이징으로 진출할 수 있는 웨이하이시에서 일본군에 항복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국가 지도자 리홍장(李鴻章)은 “싸우지 말고 후퇴해서 함정을 보존하라. 무슨 일이 있어도 배를 잃지 말아야 하며, 대양에서는 싸우지 말라”고 했다. 싸워서 이길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일본군은 북양함대 기함 정원함을 포함해 전함 5척을 침몰시키고 약 10척을 노획했다. 그 중 한 척은 자결한 북양함대 지휘관 정여창(鄭汝昌)의 군인정신에 대한 예를 표하며, 그의 시신을 수송하는데 사용하도록 돌려주었다고 한다. 북양함대의 말로는 청나라의 운명처럼 비극적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일본은 노획한 청나라 전함을 고철로 매각했고, 진원함은 일본 해군에 편입돼 러일전쟁에 투입됐다가 함포사격 표적이 되고 결국 고철로 처분됐다고 한다.
그 대금은 일본 해군병 학교 강당 신축비용으로 사용됐다. 진원함의 닻과 사슬, 포탄 등 유물은 도쿄 우에노 공원에 전시됐다가 중화민국 장개석 정부의 요청에 의해 반환됐는데, 공산 정권 수립 후, 베이징 군사혁명박물관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 원래의 위치 웨이하이시로 옮겨질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창설 당시의 원위치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기구한 운명이다.
청일전쟁 전 과정은 중국인에게는 수치스러운 사실이다. 하다못해 일선 병사들의 감투정신도 내세울게 없다. 기강이 무너지고 훈련도 되지 않아 포탄 소리에 정신을 잃고 숨기에 바빴으며, 심지어 전함조차도 전투대열에서 이탈해 도주했다고 한다. 중국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정여창 제독의 자결뿐이었다. 책임감이 넘치는 지휘관이라는 것인데, 지휘관이 음독 자결할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간 당시 정치권은 아무 말이 없다.
패전의 대가는 가혹했다. 스스로 싸울 의지가 없었던 청나라 군대는 나라를 지키기는커녕 서구 열강의 침략에 속수무책이었다. 서구 열강은 청나라의 군사력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알고 거침없이 밀고 들어와 유린했다. 청나라는 급속히 무너져 일본에게 조선의 지배권을 넘겨주고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 및 그 부속군도를 할양하는 한편, 은 2억 냥을 배상금으로 지불했다. 청의 3년간 국가예산에 해당하며, 당시 일본의 4년 치 세출예산 액수이다.
일본은 그 돈으로 군사력을 증강하여 10년 후 1904년 러시아와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중국은 패전의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청일전쟁 100주년을 맞이한 1985년에 웨이하이시에 ‘중국 갑오전쟁 박물관’을 세웠다. 패전 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중국인 특히 지도자들이 이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다짐할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다시는 국방비를 전용하지 않겠다”라는 결심일 것이다.
◀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