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국제적 이슈 중 하나는 ‘중국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가’이다. 즉 한·중 관계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갈등보다 상생의 우호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선 중국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큐리티팩트는 이런 취지에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군대를 알아보는 [숨은 중국 알기]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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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9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신해혁명 110주년 기념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시 주석은 "대만 문제는 완전히 중국 내정으로 어떤 외부의 간섭도 용납할 수 없다. 그 누구도 중국 인민이 국가 주권과 영토보전을 수호하려는 확고한 결심과 의지, 강한 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사진=연합뉴스]

 

[시큐리티팩트=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중국은 6.25전쟁 참전이 당연하고 필요했다고 평가한다. 국가안보 관점에서 북한을 점령한 미국과 압록강을 경계로 직접 대치하는 상황은 허용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6.25전쟁이 없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입장이다. 그것은 전쟁을 통해 얻은 것도 있지만 잃은 것이 더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6.25전쟁이 없었더라면 많은 인명이 희생되지 않았을 것이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와도 적대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은 침략자로 인식돼 1979년 미국과 수교하기 이전까지 서방세계로부터 거의 고립돼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 대만을 해방시켰다면 오늘날과 같은 대만문제도 없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은 향후 자신들을 곤란하게 할 제2의 6.25전쟁 같은 무력충돌은 사전에 방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것이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에 강한 유감을 갖고 있었다. 1956년 9월, 중국공산당 8차 대회 참석을 위해 중국을 방문한 북한대표단 단장 최용건에게 마오쩌둥은 “나는 김일성에게 이 전쟁은 하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라고 질책한다.

 

이어서 펑더화이는 “6.25전쟁은 도대체 누가 일으킨 것이냐? 미 제국주의가 일으킨 것인가, 아니면 당신들이 일으킨 것인가?”라고 몰아붙였다. 이에 대해 대표단에 배석한 주중 북한대사 이주연은 “왜 이 문제를 제기하는지 모르겠다”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러면 중국 입장에서 6.25 전쟁 참전으로 잃은 것부터 알아보겠다.

 

첫째, 소위 대만해방 기회의 상실이다. 중국은 1949년 10월 1일 신중국을 선포했지만 대만으로 이전한 국민당은 건재했다. 중국공산당은 해·공군 전력이 미흡한 상태에서 푸지엔성(福建省) 일대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키고 대만해협을 건너 진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이 공산주의의 확산 저지를 위해 대만에 제7함대를 주둔시키자, 중국공산당은 대만해방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둘째, 서방국가들로부터 침략자로 인식돼 장기간 고립됐다. 미국이나 유럽은 마오쩌둥의 신중국에 대해 초기에는 적대적이지 않았다. 유엔에서도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장제스의 중화민국을 대신하여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돼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6.25 전쟁 참전으로 평화파괴자라는 프레임에 갇히면서 서방세계로부터 고립됐고, 결국 소련에 더욱 의존하게 됐다.

 

셋째, 많은 인명 손실이 발생했다. 중국 측의 공식 통계에 의하면, 병력 손실은 42만 6000명에 달하며 그 가운데 전사자만 11만 4000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연대장급 이상 지휘관도 200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넷째, 경제발전 지연이다. 중국공산당은 오랜 내전을 끝내고 경제발전에 전념하기 위해 국방비를 대폭 감축하기로 했다. 신중국 건국 다음 해인 1950년 국방예산은 정부예산의 43%를 차지했지만 1951년에는 30% 수준으로 대폭 낮추고자 했다. 하지만 6.25전쟁 참전이 장기화되면서 45.64%까지 증가했다. 중국이 6.25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면 개혁개방도 앞당겨졌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중국은 최근 ‘6.25전쟁을 언제 끝냈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주목하고 있다. 대다수 희생자는 초기작전이 아니라 유엔군의 반격과 고지전에서 발생했으며, 3년 가까이 전쟁이 지속되면서 경제적인 타격도 지대했다. 중국 화동사범대학 국제냉전사연구센터의 선쯔화(沈志華)에 의하면, 전쟁종료 시점을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37도선까지 밀고 내려온 3차 전역 직후, 즉 1951년도 초반으로 보고 있다.

 

1951년 1월 13일 유엔 총회 정치위원회는 6.25전쟁의 즉각적인 정전을 건의한 13개 국가의 제안을 통과시킨다. 국제적으로 전쟁의 장기화를 원하지 않아 미국이 ‘전쟁 계속’을 주장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한반도에서 ‘미군 축출’이라는 최초 목표에 집착해 이 제안을 거부함으로써 미국에게 ‘전쟁 계속’의 명분을 주었고 서방진영도 적대적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6.25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2년 6개월가량 지속됐고 승자도 패자도 없는 무승부로 정전협정이 체결된다. 이어서 미국은 대만에 군사원조를 증가하는 한편, 1955년에 미·대만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후속조치로 미군사령부와 육·해·공군을 배치했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압박은 점차 가중되는 상황이었다.

 

중국은 6.25전쟁에서 많은 희생과 대가를 치렀지만 얻은 것도 적지 않다. 중국은 약 1세기 동안 서방과 일본에 연속으로 패전하여 국토가 침략당하고 반식민지상태로 전락했지만 6.25전쟁 참전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첫째, 북한이라는 완충지역을 확보했고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상실한 영향력을 점차 회복하는 계기가 됐다.

 

둘째, 미국과 대등한 강대국의 위치에 올랐다. 중국은 세계 최강 미군과 33개월 간 전쟁을 치르며 끝까지 견디어 내었고 미국 대표와 동등한 입장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중국이 ‘미군은 북위 17도선을 넘지마라’고 경고했을 때, 미군은 중국과 무력충돌을 우려해서 작전에 신중했다고 한다.

 

셋째, 중공군 실전 경험 축적 및 현대화 추진의 계기가 됐다. 중공군은 6.25전쟁 기간 중 소련으로부터 대량의 현대식 무기를 지원받았고 미군과 2년 반 동안 전투를 하면서 유격전 수준의 군대가 해·공군과 화력이 결합된 현대전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후 미군을 모델로 군비증강 및 군사개혁을 시도하게 됐다.

 

최근 들어 우리는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6.25전쟁 참전을 정의의 전쟁이라고 미화하면서 중국이 얻은 점을 강조하고 있는 사항에 유념해야 한다. 이것은 한반도에서 더욱 공세적으로 나오겠다는 신호이다. 시진핑은 마오쩌둥이 이루지 못한 ‘한반도에서 미군 축출’이라는 과제를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임방순 인천대 외래교수 프로필 ▶ 미래문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  前 駐중국 한국대사관 육군무관, 대만 지휘참모대 졸업

 

김한경 총괄 에디터 겸 연구소장 기자 khopes58@securityfact.co.kr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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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중국 알기 (27)] 6.25 전쟁 참전을 통해 중국이 얻은 것과 잃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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