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19.png▲ 미군훈련사진 (출처:미8군 플리커)

(안보팩트=최영진 / 칼럼니스트, 중앙대 교수)


문재인 정부의 강력한 국방개혁 표방, 국방부 주요 보직의 민간인 배치 등 눈길

문재인 정부는 강력한 국방개혁을 표방하고 나섰다. 송영무 국방부 장관은 국방개혁의 목표를 “공룡같은 군대를 표범처럼 날렵한 군대로 만들겠다.”고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국방부 주요 보직에 민간인을 배치하면서 국방개혁을 추진할 인적 동력도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방개혁이 쉽게 추진될 수 있을거라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현 정부의 개혁의지를 믿지 않아서가 아니다. 우리 군이 달라져야 한다는데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어떤 방향으로, 어떤 방식으로 추진되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생각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의 ‘국방개혁 307계획’이 입법화에 실패했던 것도 부정적 판단의 근거가 된다. 대통령직속 국방선진화추진위원회를 만들고 국방부에 국방개혁실을 만들어 실장에 민간인을 보직하면서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상급지휘구조개편과 같은 예민한 문제에 걸려 결국 입법화 단계에 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보수정부였던 이었던 이명박 정부에서도 각 군(軍)과 국회의 반대를 넘어서지 못했던 것이다.


1986년 미국의 국방개혁, 합참의장의 권한과 역할 강화해 '강한 미군' 탄생시켜 

국방개혁의 성공적 추진을 위해 다른 나라의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그 대표적 사례가 1986년 미국에서 입법화에 성공한 ‘골드워터-니콜스 국방부 재조직법(Goldwater–Nichols Department of Defense Reorganization Act)’이다. 이법은 1947년 미국에서 국방부와 합동참모부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던 국가안보법 이후 성공적인 개혁법안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의 국방개혁 목표가 합동참모부의 강화를 통한 합동성 강화라는 목표를 우리와 공유하기 있기 때문에 간단히 골드워터-니콜스법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서는 무엇보다 합참의장의 권한과 역할 강화을 대폭 강화시켰다. 합참의장은 합동참모회의(의장ㆍ3군 참모총장ㆍ해병대사령관)의 대표자로서 군사적 지휘권은 없으나, 대통령 및 국방장관에 대해 최고위 군사자문 역할을 수행토록 했다. 합참의장은 통합군사령부의 소요계획 및 예산 등에 관해 국방장관의 자문 역할을 하며, 군의 합동운용을 위한 정책·훈련·교육계획을 수립토록 함은 물론 장관급 장교 임명 시 대통령·국방장관에게 당해 장교 능력 평가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이와 같은 합참의장의 역할 강화를 뒷받침하기 위해 합참부의장(합참차장) 직위를 신설했다. 부의장(차장)은 합참의장과는 다른 군 소속이어야 하며, 대통령이 상원의 건의 및 동의 후 임명하게 했다.

합동참모의 역할도 강화시켰다. 합동참모의 자질 및 독립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합동특기제도 신설, △합동참모 보직의 구체적 수와 보직 명시, △합동근무를 장성 진급을 위한 필수보직으로 명시(합동부서에 근무하지 않으면 장군이 될 수 없음), △합동 보직에 대한 근무 기간 연장(장성 최소 3년· 장교 최소 3년 반), △합동교육소요의 구체화 △기타 보직에 비례하는 합동근무 보직의 진급비율(다른 직위 장교보다 합동직위에 근무한 장교의 진급율이 적어도 같도록) 등을 명시했다.

현장지휘관인 통합군사령관의 권한과 책임도 확대되었다. 통합군사령관에게 구성군 사령관의 임명 및 해임 권한을 부여해 예하부대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통합군사령관에게 부대 운용 예산 편성 시 합참의장에 대한 건의할 수 있게 하여 자원 할당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합참의장의 권한 강화로 문민통제가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장치도 마련했다. 각 군 장관 및 정책·획득 부차관은 예비역 임용 전역 후 10년이 경과해야 보임할 수 있도로 했고, 국방 서열상 1~4위(국방장관, 부장관, 각군 장관, 정책·획득 부차관)는 민간인을, 5~6위(합참의장, 각군 총장)는 군인을 임용하도록 함으로써 문민우위 체제를 유지토록 했다.

이러한 조치가 제대로 추진될 수 있는 진단시스템도 갖추었다. 국방성이 의회에 제출하는 보고서의 규모는 3분의 1로 축소하되, 대통령은 국가정책과 국방정책을 통합하는 국가안보전략에 대한 상세보고서를 매년 의회에 제출해야 하며, 국방장관은 군 구조와 임무 간의 관계에 대한 보고서를 매년 의회에 제출토록 했다. 미 의회는 이러한 정기보고를 통해 국방조직 진단을 제도화하는 시스템을 갖춘 것이다. 

이처럼 미 의회는 골드워터-니콜스법을 통해 합참의장의 역할을 대폭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통합군사령관의 권한 및 책임을 강화해 전투 중심의 군대를 만들고자 했다. 이러한 미국의 국방개혁은 우리 군이 추진하고 있는 국방개혁의 기본방향과 일치하기 때문에 시사하는 점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와 미국의 사정은 너무 다르기 때문에 같은 목표를 추구한다고 해도 개혁의 내용과 방법은 다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문제의식은 공유하되 구체적 실행방법은 한국적 상황에 대한 깊은 고민과 충분한 논의를 통해 설정해야 할 것이다.

또 달리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입법화 과정이다. 새로운 변화는 기존 질서와 제도로부터 저항을 받게 마련이다.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국방개혁의 주 대상이었던 국방부와 각 군으로부터 격렬한 반대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법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다행스럽게 입법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저서가 출판되었다. 입법화 과정에서 실무책임자였던 제민스 로쳐(James R. Locher III)가 2002년에 발간한 『포토맥 강에서의 승리(Victory on the Potomac: The Goldwater-Nichols Act Unifies the Pentagon. Texas A&M University Military History Series)』는 골드워너-니콜스법이 어떤 과정을 통해 입법화에 성공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보고서다.


베트남 전쟁 패배 이후 위기의 미군지휘체계, 개혁 통해 '걸프전' 승리의 토대 닦아

1980년 미군은 최악의 상황에 놓여있었다. 베트남 전쟁의 트라우마가 깊게 드려우진 상황에서 이란 인질 구출작전이 실패함으로써 미국의 체면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1982년에는 베이루트의 폭탄테러로 241명의 미 해병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진상조사에 나섰던 미 의회조사단은 경악했다. 제대로 된 대비는 물론 사후수습도 엉망이었다. 지휘체계는 분산되어 있었고 전체적으로 관리할 전략기획이 부재했다. 한마디로 합참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었다. 1983년 그레나다 침공에서도 이런 문제가 불거지면서 국방개혁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국방구조개혁의 첫 번째 신호탄을 쏘아올린 이는 당시 합참의장이었던 존스(D. Johns) 장군이었다. 1982년 3월 미 하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나선 그는 합참의 의사결정과정의 문제를 조심스럽게 제기했다. ‘위원회’ 방식으로 운영되는 합참으로는 신속하고 효율적인 의사결정이 어렵다는 지적이었다. 보다 일관된 지휘권의 통합이 절실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 군의 분파주의 극복할 수 있는 특단의 방안이 필요했다. 합동성을 강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당시만 해도 국방조직 개혁법안이 입법화에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창군 이래 각 군은 부대운용과 작전에 있어 독자성을 누려왔고,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세계 최강의 군 조직이 반대한다면,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특히 당시 와인버거(C. Weinberger) 국방부 장관이 부정적이었다. 자신이 잘 관리하고 있는데 무슨 문제냐는 반응이었다. 국방예산 삭감을 위한 꼼수라는 의혹도 갖고 있었다. 그는 레이건 대통령도과 친밀했기 때문에 백악관의 반대도 예상되었다.

초기 미 의회도 부정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국방안보문제에 주도권을 갖고 있는 상원은 보수적인 공화당이 지배하고 있었다. 상원의원 대부분이 장교로 복무한 경험이 있었고, 개인적으로 각 군과 친밀한 커넥션을 갖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방부와 군부의 저항을 이겨내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그럼에도 국방개혁을 염원하는 의회 지도자들과 그 보좌진은 4년하고도 241일간의 고투 끝에 ‘골드워터-니콜스법안’을 통과시키는 역사적 결실을 거두게 된다. 존 메이어 전 합참의원을 비롯한 많은 군사전문가들은 걸프전의 승리를 비롯한 1990년대 이후 미군의 빛나는 성취가 가능했던 것은 이 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미 국방부와 합참조직을 만들어낸 1947년 국가안보법 이후 최대 성과를 인정받고 있는 것도 이처럼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법안 찬성측과 반대측이 벌였던 치열한 공방전을 요약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법안 내용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미국과 한국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법안의 입법화과정에서 우리가 배울 교훈을 결코 적지 않다.

무엇보다 군 내부의 개혁적 지도자의 존재이다. 합참조직의 문제를 가장 먼저 제기한 사람은 존스 합참의장이었다. 지휘체계를 일원화하고 합참의장과 통합군사령관의 권능을 강화하자는 주장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각 군의 독자성과 분파성을 약해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군의 출신의 존슨은 합참의장 4년을 포함 모두 8년간 합참에서 지냈다. 누구보다도 합참의 현실을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청문회에서 자기 의견을 개진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보다 체계화 논문을 발표해서 공감을 이끌어냈다. 가장 강력한 저항 거점인 해군에서도 의미있는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태평양함대 사령관이 크로우(B. Crowe) 제독이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220척의 함정과 8백여 대의 항공기, 55개의 기지에 22만 명의 병력을 관장하는 해군 최고의 지휘관이 나선 것이다.

군부 일각의 문제제기를 수용한 의회지도자의 초당적 협력이 개혁의 원동력

이러한 군부 일각의 문제제기를 받아 준 것은 백악관이 아니라 미 의회였다. 하원 군사위원회 니콜스(W. Nicols) 위원장이 먼저 나섰다. 1982년과 83년의 법안상정은 니콜스 의원의 공이다. 이러한 노력이 상원의 무관심과 지능적인 저항에 실패하자, 상원 군사위원회 위원장을 등장한 골드워터(B. Goldwater) 공화당 상원의원이 나섰다. 그는 상원으로서 마지막 임기를 남기고 있었지만, 국방개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마지막 과업을 생각하고 깃발을 들었다. 그는 처음부터 이 문제는 초당적 협력을 통해야만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의 파트너로 함께 한 이가 넌(S. Nunn) 민주당 상원의원이었다. 이들은 1985년 1월부터 대통령의 재가가 떨어진 그날까지 함께 했다. 그들이 만들어낸 초당적 협력은 지난 50년간 미국 의회를 보여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 법이 미 의회 군사위원회가 통과시킨 가장 중요한 법안으로 평가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58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국방개혁은 반쪽짜리 성공이었다. 의회가 주도할 때 더 성과가 좋았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법안 입법화의 가장 어려운 시간은 1986년 2월부터 시작된 상원 군사위원회의 법안축조심사과정이었다. 반대측을 대표했던 공화당의 워너(J. Warner) 의원은 13개의 수정안을 내며 공세에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회의를 주관하던 골드워터 의원은 대화와 타협의 원칙을 고수했다. 골드워터와 넌 의원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충분한 토론을 보장하기로 마음먹었다. 찬반의 입장은 분명했지만 상대편의 발언권을 제한하는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가능한 당파적 입장에서 벗어나려 했다. 반대의견을 충분히 토론하게 했고, 그 결과 오히려 찬성측의 주장이 설득력있게 보였다. 저자는 워너의 수정안을 토론하는 과정에서 법안은 더욱 정교해지고 완벽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대측의 전략은 군사위원회에서 10대9 정도로 지더라도 전체회의에서 뒤엎을 수 있을 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사위원회의 공개투표 결과는 19대0으로 압도적 찬성이었다. 찬성측도 놀라운 결과였다. 물론 몇 개의 타협책으로 반대측 의원을 설득한 점도 있지만,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만장일치의 결과는 대화와 토론을 통해 합의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빛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국회에서의 합의야 말로 이 법의 성공적인 실행에 결정적인 조건이라는 점에 더욱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우리 기억해야 또 하나의 성공요인은 보좌진이다. 이 책의 저자를 비롯하여 리차드 핀(Richard Finn), 제프리 스미스(Jeffry Smith), 아치 배럿(Archie Barrett)과 같은 보좌관들이 수행한 역할이다. 골드워트와 넌 의원이 지휘관이라면 이들은 탁월한 전사들이었다. 조사보고서와 법안을 실제 작성한 것은 이들이었다. 이들 없었다면 청문회나 법안축조심의 과정에서 효과적인 대응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제임스 로쳐은 미 육사 출신으로 미 상원 군사위원회 보좌관(staffer)으로 입법화 작업의 실무책임을 맡았다. 반대진영에서 이 법안을 ‘로쳐 법안’으로 부를 정도로 그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반대측에서 이들을 실제적인 공격 목표로 삼았던 것도 이들이 담당한 역할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4년 241일의 고투끝에 이루어진 미군 상층 지휘구조 개편, 개혁적 군 지도자들이 산파 역할

1986년 10월1일 레이건 대통령의 재가가 떨어졌다. 말 그대로 4년하고 241일간의 고투가 성공적으로 끝난 것이다. 상층지휘구조개편에만 이 정도의 시간이 걸린 것이다. 빛나는 성취를 이룩한 인간의 의지와 노력, 그 열정에 경외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미국의 국방개혁은 상층지휘구조개편에 주력했기 때문에 우리가 추구하는 국방개혁보다 제한적인 목표를 추구했지만, 거의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의회지도부의 일관적 개혁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결의가 있었기에 보좌진 또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 더욱 중요한 것은 군의 문제를 직시하고 변화를 추구했던 개혁적 군 지도자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존스 합참의장의 문제제기가 없었다면 의원들은 무엇이 문제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해군 내부의 문제를 솔직하게 얘기해줄 수 있는 크로우 제독과 같은 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멋진 일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


최영진 중앙대 교수 기자 @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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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미국의 국방개혁은 어떻게 성공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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