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k200112.png▲ 1994년 말레이시아 평화유지군과 함께 보스니아 내전에 참전했던 K200 장갑차의 위용
 
(주)대우 이태용 지사장, 말레이시아 국방장관 한국 방문 주선 및 교류 주도

경쟁사의 로비와 제품 결함 소문 등 악조건 극복하고 최초로 42대 수출 성사

무전기·기관총 등 외산 부수장비 단기간 장착 어려움 극복하고 기일 내 선적

(시큐리티팩트=김한경 총괄 에디터)

1991년 3월 홍순영(前 외교통상부 장관) 당시 駐말레이지아 대사는 말레이시아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툰구 압둘 라만(Tunku Abdul Rahman)의 아들, (주)대우(현 대우인터내셔널)의 이태용 쿠알라룸프르 지사장 등과 골프 라운딩을 한다. 라운딩 도중에 툰구 압둘 라만의 아들은 이 지사장에게 “한국으로부터 장갑차를 수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비친다.

일주일 후 툰구 압둘 라만의 아들과 이태용 지사장은 다시 만났다. 그 자리에서 그는 “나와 (말레이시아)국방부장관은 어릴 때부터 친한 친구로 지냈다. 그 친구와 내가 한국을 방문하고 싶은데 주선해줄 수 있느냐?”고 말했고, 이 지사장은 “한국 본사에 연락해 방문 스케줄을 준비시키겠다”고 답했다.

당시 말레이시아 정부는 보스니아 내전에 평화유지군을 파병하기 위해 파병부대가 사용할 장갑차를 외국에서 구매할 생각이었고, 이미 미국 및 유럽 국가들과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방부장관이 한국을 방문하겠다는 것은 한국산 장갑차가 구매대상에 포함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4월 18일 말레이시아 국방부장관이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대우중공업 창원공장에서 K200 장갑차 생산라인을 둘러보고 주행 및 도하시범도 관람했다. 이어 장갑차에 탑승하여 시험장 트랙을 한 바퀴 돌고 나서는 “That’s it. I want to buy it!”이라고 말했다. 그는 옥포조선소도 방문했고, 군함은 물론 잠수함까지 건조한다는 설명에 무척 놀랐다고 한다.

양국 간 교섭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한·말레이시아 방산공동위원회가 5월 서울에서 열렸다. 또 10월에 한국 방산협력단이 말레이시아를 방문했고, 대우중공업 윤영석 사장이 말레이시아 수상을 만나 K200 장갑차 수출을 제의했다. 그 후 1년 반 동안 대우중공업 경영진이 교류한 말레이시아 군과 국방부 관련 인사들만 200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그러다가 1993년 7월 대우중공업은 갑자기 말레이시아로부터 K200 장갑차 오퍼(offer)를 제출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동안 별다른 진전이 없었기에 다소 의아해 하면서도 큰 기대 없이 오퍼를 넣었다. 그리고 약 1개월이 지난 8월 18일 말레이시아 각료회의에서 대우중공업의 장갑차 도입이 결정됐다.

그 이유는 말레이시아가 9월에 보스니아 평화유지군(PKF)으로 1,500여 명을 파병하기로 최종 결정됐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는 처음에 6종의 장갑차를 요구했다. 기본형 장갑차 외에 박격포탑재 장갑차, 구난용 장갑차, 구급용 장갑차, 지휘용 장갑차, 제설용 공병 장갑차 등이었다. 또한 최적의 가격과 계약 후 1개월 이내의 납품을 요구했다.

그런데 경쟁 업체의 개입으로 말레이시아 측의 구매의향서 발급이 늦춰지다가 9월 3일에야 “K200 장갑차 42대를 1993년 11월까지 긴급 구매한다”는 내용의 구매의향서가 발급됐다. 하지만 경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당시 경쟁사는 프랑스 GIAT사, 영국 ALVIS사, 터키 FMC사, 중국 NORINCO사 등이었다. 프랑스는 평화유지군 성격에 맞지 않았고, 중국은 저가이나 성능에 신뢰성이 없었다. 반면, 영국은 수상이 직접 나서서 영국장비를 먼저 사용하고 정산은 나중에 하는 방식을 제시했고, 터키는 대통령이 말레이시아 수상에게 장문의 친서를 보내기도 했다.

이 와중에 한국 장갑차가 결함이 있다는 소문까지 돌아 말레이시아 국방부장관이 담당관들에게 조사보고서 제출을 지시하는 일도 벌어졌다. 9월 18일자 말레이시아 신문들은 “영국 수상이 말레이시아를 방문해 장갑차 150대를 10년 간 무상 대여하기로 약속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수출 전선에 위기감이 높아지면서 한국군이 노력해 왔던 군사외교가 힘을 발휘했다. 1988년 한국군은 한·미 팀스프리트 훈련에 말레이시아 육군 군단장인 보르한 장군을 초청했고, 그는 당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던 K200 장갑차에 큰 감명을 받았다. 수출이 추진될 때 육군참모총장이던 보르한 장군은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수상에게 K200 구매를 강력히 건의했다. 駐말레이지아 이상구 대사 또한 적극적으로 지원에 나서 수출 전선의 장애물을 해결하는데 기여했다. 
 
국방부의 대우중공업에 대한 민원 처리도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10월 1일 접수한 민원을 1주일 만에 정책실무회의에 상정하고 계약서 서명, 장관 승인 등 일련의 행정 절차를 1개월 내에 완료했다. 이제 장갑차를 선적하기만 하면 될 상황에서 돌발 변수가 발생했다. 장갑차에 탑재되는 연막탄과 무전기 그리고 기관총에 관한 것이었다.

말레이시아 군이 선호한 연막탄 발사기는 독일 베크만(Wegmann)사의 76mm 연막탄 발사기였는데, 우여곡절 끝에 한국군의 66mm연막탄 발사기로 장착했다. 무전기는 영국 레이컬(Racal)사 또는 프랑스 톰슨(Thomson CSF)사 제품을 선호해 사전에 준비했지만 제 때 장착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가장 문제는 M60 기관총으로 미국 정부의 수출 동의가 필요했다. 통상 6개월 정도가 소요되는데, 관련 서류를 미국 측에 보냈지만 응답이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우중공업은 고민 끝에 한 때 자문 역할을 담당했던 미국인 컨설턴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장갑차 선적 예정일인 10월 31일 극적으로 미 국무부의 수출동의서를 받을 수 있었다.

드디어 1993년 11월 3일 마산항에서 K200 기본형 장갑차 32대, 박격포탑재 장갑차 4대, 구난용 장갑차 2대, 구급용 장갑차 2대, 지휘용 장갑차 2대 등 모두 42대를 실은 화물선 ‘다이아몬드 하이웨이’호가 수출을 축하하는 폭죽 속에 고동을 울리며 출항했다.

이렇게 힘든 과정을 극복하고 말레이시아로 수출된 K200 장갑차가 내전 중인 파병 현장에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1994년 2월 섭씨 영하 32도의 기온에서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해발 1,700m의 이그만(Igman) 산을 넘어 사라예보에 진입한 장갑차는 한국의 K200뿐이었다고 한다.

김한경200.png
 
시큐리티팩트 방산/사이버 총괄 에디터 겸 연구소장
광운대 방위사업학과 외래교수 (공학박사)
광운대 방위사업연구소 초빙연구위원
한국안보협업연구소 사이버안보센터장
한국방위산업학회/사이버군협회 이사
前 美 조지타운대 비즈니스스쿨 객원연구원
 
김한경 방산/사이버 총괄 에디터 겸 연구소장 기자 khopes58@securityfact.co.kr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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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무기 디테일] ⑭ 각본 없는 드라마, K200 장갑차 말레이시아 수출에 얽힌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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