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헬싱키에서 정상 회담 중인 트럼프와 푸틴의 모습. 영국 가디언(Guardian)지의 웹사이트 동영상 화면 캡처.
미 정보기관의 특수정보수집부, 단독회담도 거의 유사하게 대화내용 포착 가능
대화내용 공개 거부한 트럼프, 푸틴의 협박에서 자유롭지 않아 안보 위험 상황
‘적법성’ 갖춘 대통령일지는 몰라도 정권 탄생의 ‘정당성’은 분명히 문제 있어
(시큐리티팩트=송승종 전문기자)
지난 16일 헬싱키에서 열린 트럼프-푸틴 정상회담의 후유증이 만만치 않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타임(Time)지 최근호는 표지에 트럼프와 푸틴의 얼굴을 합성한 사진을 실으면서 그 사진이 헬싱키에서 열린 두 정상의 회동에서 벌어진 “미국 외교정책의 특별한 순간”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별한 순간이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미루어 짐작컨대 “푸틴을 믿느냐? 미국 정보기관을 믿느냐?”는 질문에 트럼프가 푸틴의 손을 들어준 사건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적대국(또는 경쟁국)의 지도자를 정보기관보다 더 신뢰한다는, 한심하다 못해 수치스러운 답변은 세인의 조롱거리인 동시에 미국인들의 굴욕으로 남게 될 것이다.
트럼프는 미국 정보기관을 믿지 않을지 모르나, 정보기관은 트럼프가 헬싱키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폴리티코(Politico)’에 의하면, 통역만을 대동한 상태에서 트럼프와 푸틴의 1대1 단독회담이 벌어져 네 사람 외에는 이 자리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아무도 모를 것처럼 보이지만, 가공할 수준의 정보수집 능력을 보유한 미국 정보기관은 완벽하지는 않아도, 거의 유사하게 대화내용을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활동을 수행하는 조직은 국가안전국(National Securit Agency: NSA)과 중앙정보국(CIA) 산하의 ‘특수정보수집부(Special Collection Service: SCS)’이다. 이들은 초특급비밀(ultra-top secret)만을 다루는 특수조직으로 얼마 전까지는 그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베일에 가려졌었다.
그러나 NSA-CIA에서 일하던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Snowden)이 2013년 NSA 기밀문서를 대량으로 유출시킨 사건을 계기로 세상에 그 모습이 드러났다. 이들의 정보수집 대상은 우방국과 적대국을 가리지 않는다. 이번 헬싱키 정상회담에서 푸틴 대통령의 회담준비 움직임, 회담장에서의 언행 등을 비롯한 모든 일거수일투족은 당연히 NSA의 최우선적 정보수집 대상이었을 것이다.
정보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SCS의 역량은 2시간 동안 벌어진 헬싱키 정상회담에서 발언한 푸틴의 대화내용을 충분히 “판독(readout)”할 수 있고, 회담 이후에 푸틴이 기자회견 등에서 실제 회담장에서 발언한 내용과 다르게 말하는지 여부까지도 식별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의 한계는 발언내용의 전부를 ‘글자 그대로(word-by-word)’ 100%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정보기관이 이처럼 완벽한 대화내용을 포착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푸틴과 러시아가 회담 이후에 취할 수 있는 행동에 상응하는 대책이나 대안들을 정책결정자인 트럼프와 백악관 및 행정부에게 건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정보기관의 기본적 책무이기도 하다.
그런데 헬싱키 정상회담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실은 트럼프 대통령이 대화내용 공개를 한사코 거부한다는 점이다. 미국이 적대국(또는 경쟁국) 대통령과 1대1로 회담한 것이 트럼프가 처음은 아니다. 과거에 레이건 대통령도 1987년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통역만을 대동한 단독회담을 가졌다. 하지만 회담 후에 레이건은 상세한 대화록을 제공했다. 그런데 트럼프는 왜 한사코 푸틴과의 회담내용 공개를 거부하는 것일까?
그는 회담 이후에 언론매체들이 여러 문제점을 지적하자, “나는 회담장에서 푸틴에게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양국의 미래 이익을 위한 방안을 협의했을 뿐”이라며 이런 언론들을 가리켜 “가짜뉴스(Fake News)”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그처럼 실속 있고 자랑스러운 회담이었다면 트럼프는 왜 한사코 회담내용 공개를 거부하는 것일까?
신기하게도 트럼프는 자신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미국 정보기관이 대화내용의 ‘전모(a full picture)’를 파악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다. 반면 러시아는 푸틴과 트럼프의 발언내용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트럼프가 회담장에서 발언했던 것과 다른 내용을 언급하면, 즉시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즉, 거짓말)을 알게 될 것이고, 이는 트럼프의 약점으로 남게 될 것이다. “수틀리면 폭로할거야!”라는 협박으로부터 트럼프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며, 이는 국가안보에 위험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설령 NSA-CIA가 어렵사리 대화내용의 전모를 파악했더라도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트럼프가 “왜 대통령의 대화내용을 도청했느냐”고 길길이 뛰면서 “정보기관이 불법행위를 저질렀다”고 불벼락을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난관 속에서 정보기관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대통령이 “듣고 싶어 하는 정보만” 보고하는 것이다. 역사에서는 이를 가리켜 “정보의 실패”라고 부른다. 정보기관이 이런 행위를 반복하면, 국가적 재앙을 자초하게 되며, 對이라크 침략전쟁의 빌미가 된 허위 정보가 대표적 사례이다.
‘애틀랜틱(The Atlantic)’은 최근 “트럼프의 정통성 위기(Trump’s Crisis of Legitimacy)”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이 기사의 서두에서 러시아의 2016년 미 대선개입 의혹과 관련하여 공화당 하원의장인 폴 라이언(Paul Ryan)이 언급한 기상천외한 발언을 소개했다. 그는 다른 공화당 지도자들과 더불어 “러시아는 미국 대선에 개입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평소부터 한사코 러시아가 미국 대선에 개입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또 헬싱키 정상회담이 끝난 후에도 “푸틴 대통령이 그러는데 그런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러시아가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다.”는 투로 온몸을 던지며 필사적으로 러시아-푸틴 감싸기에 목을 매었다.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라이언 하원의장이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을 확신하면서도, 선거결과에 “아무런 실질적 영향(no material effect)”도 미치지 않았다며 단서를 달았다는 점이다. 트럼프의 ‘괴벨스(히틀러의 심복이자 선전선동의 대가)’로 불릴 정도의 심복인 트레이 가우디(Trey Gowdy) 공화당 의원 같은 사람도 이렇게 큰 소리 쳤다. “러시아가 2016년 미국 대선에 개입했지만, 선거결과를 ‘불법화(delegitimizing)’시킬 정도는 아니었다”고.
대체 이건 또 무슨 궤변인가? 도둑놈이 남의 집에 숨어들어가 도둑질을 했지만, “심각한 재산상의 피해를 입히지 않았으므로 도둑질이 아니다.”라는 말인가? 미 공화당 지도부가 “진실과의 대면”을 한사코 거부하면서 이런 식의 유치한 말장난으로 세월을 허송하는 바람에, 어느덧 미국 내에서는 바닥민심에 거대한 변화가 발생할 수 있는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바야흐로 연말이 되기 전에 “민주당의 거대한 물결”이 미 대륙을 휩쓸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런 예측도 나오기 시작한다.
러시아의 2016년 미국 대선 개입은 미국 법률을 위반한 불법 행위이고, 미국인들의 개인적 신상정보를 절취하여 피해를 입힌 범법 행위이며, 미국의 정당(political party)으로부터 훔쳐낸 비밀정보를 누설한 도발 행위(미국의 입장에서)이다. 그런데도 왜 트럼프는 이러한 러시아의 불법적인 범법 행위와 도발 행위를 필사적으로 감싸려는 것일까?
미국의 현행 헌법과 법률의 어느 조항을 보아도, 설령 러시아가 미국 대선에 개입한 정황이 명명백백히 밝혀지더라도 미국 대통령의 당선 결과가 뒤집히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누가 뭐래도 트럼프는 ‘합법적’으로 당선된 대통령이다. 하지만 정당성(legitimacy)과 적법성(legality)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는 ‘적법성’을 갖춘 대통령일지는 몰라도 정권 탄생의 ‘정당성’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어 보인다.
퀴니피악 대학(Quinnipiac Univerisity)이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절반 이상(51%)은 “러시아가 트럼프에게 불리한(compromising) 정보를 갖고 있다”고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 푸틴 앞에서 잔뜩 주눅이 들어 어깨가 축 늘어진 트럼프의 초라한 몸짓(body language)이 그걸 뒷받침해 주는 것 같다.
정권의 정당성이 의심스러운 지도자는 ‘오버’하게 되어 있다. 약점을 숨기기 위한 과잉 행동에 나선다는 말이다.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느닷없이 요란하게 벌어지는 미·중 무역전쟁의 배경에 부쩍 의심이 가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대전대학교 군사학과 교수 (美 미주리 주립대 국제정치학 박사)
국가보훈처 자문위원
미래군사학회 부회장, 국제정치학회 이사
前 駐제네바 군축담당관 겸 국방무관: 국제군축회의 정부대표
前 駐이라크(바그다드) 다국적군사령부(MNF-I) 한국군 협조단장
前 駐유엔대표부 정무참사관 겸 군사담당관
前 국방부 정책실 미국정책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