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CSIS, 공식적으로 인정된 436개의 장마당 존재하며 종사인원 60만 명
대다수 북한사람들, 점차 자신의 생존을 국가 배급체계가 아닌 시장에 의존
돈주는 막대한 세금의 수입원이자 변화와 혁명에 저항하는 잠재적 위험계층
(송승종 전문기자)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북한의 ‘돈주’들은 김정은 경제회생의 핵심(North Korea’s ‘Money Masters’ Hold Keys to Kim’s Economic Revival)” 제하의 기사를 통해, 북한에서 날로 확장되는 시장의 네트워크가 김정은이 추진하는 경제회생의 “핵심 요소(vital cog)”이며, 북한은 ‘돈주’로 불리는 새로운 계급의 형성을 더 이상 무시하기 어렵다고 보도했다.
WSJ 기사가 출처로 밝힌 워싱턴 소재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의 보고서에 의하면, 갈수록 많은 공식·비공식 장마당이 재화, 식량, 의약품 등을 거래함에 따라, 북한에는 ‘돈주(donju; money masters)’로 알려진 중산층 및 부유층 상인 집단이 확대되고 있다.
금년 들어 ‘핵무력 완성’을 호언하며 ‘병진노선’에서 ‘경제건설’로 방향을 바꾼 김정은 입장에서 북한에서 한 때 배급체제에 의존했던 이들 중상주의적 상인계층의 부상, 그리고 비즈니스 정신으로 무장된 엘리트 계급이 향유하게 된 상대적인 경제적 풍요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인이 아닐 수 없다.
CSIS 보고서는 북한에는 공식적으로 인정된 436개의 장마당이 존재하는데, 이 숫자는 ‘고난의 행군’으로 무수한 인민들이 굶어 죽어가던 1990년대에는 ‘제로’였고, 10년 전에는 그 숫자가 절반에 불과했던 것과 대조를 이룬다. 한편, ‘데일리 NK’는 장마당 숫자를 387개에서 480개 사이로, 그리고 그에 종사하는 인원을 대략 60만 명 정도로 추산했다.
금년 봄부터 김정은은 특히 낙후된 지역에 위치한 공장, 농장 및 여타 경제관련 시설들을 현지 지도했는데, 노동신문 같은 관영매체는 그의 행보를 가리켜 “숭고한 애국의 대장정”으로 미화한다.
이처럼 관영언론의 초점이 경제 재건에 노력하는 김정은의 행보에 맞춰져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갈수록 북한에서 시장의 역할이 맡는 핵심적 역할이 부각되고 있다. 요컨대, 대다수 북한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생존을 국가 배급체계가 아니라 시장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마당으로 불리는 암시장은 1990년대 기근이 절정을 이루던 시절 국가통제의 범위를 벗어나 생겨난 이래, 소련 해체 이후 붕괴된 배급체계를 대체하는 새로운 북한사람들의 생존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장마당이 한반도 북녘 방방곡곡의 도심지와 시골에 정착되어 사회체계의 필수적 일부로 간주되자, 북한 정권은 이들에게 일종의 ‘세금’을 물려 연간 5,600만 불(610억원)을 거둬들일 수 있게 됐다. 결국, 장마당은 국제사회의 경제제재로 어려움을 겪는 북한 정권에게 비교적 안정된 수입원으로서 톡톡한 효자노릇을 하는 것이다.
북한에는 규모가 2,800평방피트(약 260평방미터)의 소규모에서 250,000평방피트(약 3,200평방미터)에 이르는 초대형 장마당들이 산재해 있다. 북한 정권이 연간 50만 불 이상을 거두는 대형 장마당은 평양, 원산, 함흥 등 6개소에 이르며, 그 중 가장 큰 원산 장마당은 매년 약 85만 불을 ‘세금’으로 바친다.
장마당들은 석탄, 해산물 및 여타 물자들의 수출산업과 관련된 정교한 공급망(supply chain)과 연계되어 있으며, 최근 들어 다시 조여지는 미국의 제재조치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타격을 받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북한의 현행 법률 하에서 상업적 이윤을 추구하는 개인 기업은 불법이지만, 국영기업과 연결된 민간업체들은 ‘돈주’들이 번창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제공한다.
어떤 돈주는 비스니스 창업과 확장, 주택건설 사업, 원자재 구매 등에 뒷돈을 내는 자금줄 역할을 맡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돈주는 국가의 경제적 이익에 부합된다. 반면, 이들은 보수적이 되어 ‘혁명,’ 또는 자신이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갉아먹는 인플레이션이나 재정 위기를 원치 않는다.
김정은에게 드리워지는 위험은 갈수록 영향력이 증대되는 개인 기업들이 결국에 가서는 정치적 통제를 완화할 준비가 되지 않은 북한 정권과 충돌하게 될 것이란 점이다.
북한은 이미 2009년 기습적으로 시행한 화폐개혁(기존 화폐가치를 100분의 1로 축소)으로 주민들의 엄청난 반발에 직면해, 부랴부랴 화폐개혁 책임자를 처형하며 불만을 달래는데 진땀 흘린 경험이 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돈주 계급이 급성장하자, 곳곳에 커피 전문점, 스시 레스토랑, 스파(spa) 등이 생겨나고 소비도 눈에 띠게 늘어났다.
부분적으로 삶의 질과 생활수준 향상에 정권의 정당성을 걸고 있는 김정은으로서는 돈주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제한적 자유, 즉 시장 활동 및 개발계획에 뒷돈대기 등을 허용하는 한편, 이들을 통제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경제발전 노선에 동참시켜야 하는 ‘미묘한 줄타기’를 벌여야 한다.
시장의 확산은 “잠재적 시민사회(latent civil society)”의 출현을 예고한다. 이들의 세력이 커지면 자기들의 삶에 타격을 주는 북한 정권의 정책 변화에 저항할 수도 있다. 최근 들어 관영매체들은 서구식 비즈니스를 비판하면서, 사회주의를 찬양하는 동시에 자본주의를 “돈이 전부”인 타락한 체제로 매도하는 기사로 지면을 채우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미국이 대북 경제제재로 북한 신흥 ‘돈주’계급이 성장하고, 이들이 중국식 또는 베트남식 개혁·개방으로 북한이 나가도록 촉구하는 것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다른 전문가들은 북한 내에서 사유기업 성장의 장려는 정권의 정당성을 훼손하고, 결국에는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하는 수단이 될 것으로 본다.
북한 정권 입장에서 ‘돈주’와 장마당의 부상은 막대한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는 확실한 수입원인 동시에, 변화와 혁명에 저항하는 잠재적 위험계층의 출현이라는 ‘양날의 칼’이다. 요컨대, 무시할 수 없는 신흥계급의 성장을 이제 막 착수한 ‘경제건설’ 노선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가 김정은 정권에게 새로운 도전과제로 대두된 셈이다.
대전대학교 군사학과 교수(美 미주리 주립대 국제정치학박사)
국가보훈처 자문위원
미래군사학회 부회장, 국제정치학회 이사
前 駐제네바 군축담당관 겸 국방무관: 국제군축회의 정부대표
前 駐이라크(바그다드) 다국적군사령부(MNF-I) 한국군 협조단장
前 駐유엔대표부 정무참사관 겸 군사담당관
前 국방부 정책실 미국정책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