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5-13 (화)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34] ‘김정일 얼굴이 그려진 샌드백’과 동굴 수색을 추가한 예비군교장 사열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과목별 교장간에 이동코스가 긴 곳은 예비군들이 지루하고 짜증을 낼 수도 있어 중간에 섬 건너뛰기를 설치하여 흥미를 유발시키고, 다른 코스에는 김정일 얼굴을 그려 넣은 샌드백을 주먹으로 한 대 치고 지나가며 스트레스를 풀 수 있도록 착안했다 또한 급경사를 오르는 구간에는 ‘유머가 그려진 간판’을 설치하여 지나가면서 미소를 띄울 수 있도록도 만들었다. 그리고 사로에 설치한 북한군 모습의 표적들을 군데 군데 설치하여 이곳이 훈련장임을 느끼게 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렇게 준비하여 그동안 칭찬을 들었으나 반면에 “기존에 설치된 교장 위치가 지그제그로 되어 혼선을 빚는 역행군 이동이라 생각되니 순환식으로 바꿔라”는 사전 지도방문한 부연대장의 지적도 있었다. 이에 사열을 며칠 앞두고 휴일을 반납하며 예비군 중대장들과 함께 추가 작업하여 완벽한 순환식 훈련장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었다.
    • 오피니언
    2024.07.03 09:56
  • [김희철의 CrisisM]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6·25전쟁 이야기’ 독후감 시상식과 북콘서트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독후감 공모전 시상식을 마치고 대상을 받은 최지효 학생은 소감 발표에서 “이책을 통해 나라가 어떻게 지켜졌는 지를 분명히 알게 되면서 나라사랑 마음이 깊어졌으며, 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나라를 빛내는 역할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초등부 금상인 김세진 학생은 심사위원 및 참석자들을 일일이 호명하며 본인을 뽑아준 것에 감사드린다고 말해 행사장을 웃음바다로 만들며, “저의 꿈도 장차 국방과학연구원으로 자유를 수호하는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당선 소감을 발표했다. 이날 1부는 국민의례에 이어 김병관 한미안보연구회 회장의 환영사, 현인택 전 통일부 장관과 김재창 명예회장의 축사에 이어 공모전 시상식으로 축제분위기가 이어졌고, 2부에서는 테너 지명훈과 싱어송라이터 이유진의 축가와 ‘할들육(할아버지가 들려주는 6·25전쟁 이야기)’관련 퀴즈로 시작된 작가 장삼열 박사의 북콘서트가 진행됐다. (다음편 계속)
    • 오피니언
    2024.07.02 10:10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33] ‘김정일 얼굴이 그려진 샌드백’과 동굴 수색을 추가한 예비군교장 사열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마침 대대 예비군 교장에는 현역들의 간이 실거리 사격장에 표적을 설치하는 지점의 연결된 교통호와 감적호(표적을 확인하기 위한 대피호)가 있어 동굴 및 폐광 수색정찰 훈련장을 설치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실거리 사격장의 표적을 설치하는 곳의 교통호에 옥산면 중대장이 협조해온 레일과 침목을 설치하였고, 표적 확인 후 실제 사격간에 대피하는 감적호를 약간 개조하여 폐광을 만들었다. 또한 주변 수색지역에 무인포스트도 설치해 흥미를 유발시켰다. 이렇게 준비했지만 “어느 곳, 어느 처지에 다다르더라도 주관을 잃지 않고 자신의 주인이 되라”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는 말처럼 필자가 예비군이라면 이 교장에서 훈련받는 느낌이 어떨까(?)하는 생각과 고민을 하면서 타부대와 비교해서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기에는 무엇인가 2% 부족함을 느꼈다. 그래서 부대대장과 머리를 맞대고 상의한 결과 추가 간판과 섬 건너뛰기, 샌드백 등 보조물들과 블록 및 폐타이어를 이용한 계단식 강의장 좌석을 설치하는 등의 정성어린 훈련준비를 가미했다. (다음편 계속)
    • 오피니언
    2024.07.01 09:06
  • [김희철의 CrisisM]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6·25전쟁 이야기’ 독후감 시상식과 북콘서트①
    [시큐리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한미안보연구회는 지난 15일 오후 2시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이병형홀에서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6·25전쟁 이야기’ 독후감 공모전 시상식과 작가 장삼열 한미안보연구회 사무총장의 북콘서트를 개최했다. 이번 행사에는 통일부 장관을 지낸 현인택 동아일보사 부설 화정평화재단 이사장, 김병관 한미안보연구회 회장(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김재창 명예회장(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예비역 대장), 김인철 한국전쟁기념재단 이사장 등 많은 안보 전문가들과 시상자 가족 등 약 200여 명이 참가해 성황을 이뤘다. 독후감 공모전에는 초등학생부터 80세 노인까지와 유엔군 참전용사 후손들을 포함해 120여명이 응모했다. 공정한 심사를 통해 선발된 우수자 시상식에서 국방부 장관상인 대상은 100만원의 포상금과 함께 한미고교 최지효 학생, 초등부는 김세진 학생 등 4명, 중고등부도 4명, 일반부는 78세의 이인수 어르신과 대학생 등 3명, 장병부에서도 35사단 김성인 중령 등 4명이 수상했다. 특히 일반부에서 78세 이인수 어르신이, 유엔군 참전용사의 후손인 튀르키예,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등 국적의 유학생들 5명이 특별상을 수상받은 것과 수상자들의 독후감을 행사장 복도에 게시해 독후감 공모전 시상식과 북콘서트 의미의 가치를 높여주었다. (다음편 계속)
    • 오피니언
    2024.06.28 09:13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32] ‘김정일 얼굴이 그려진 샌드백’과 동굴 수색을 추가한 예비군교장 사열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사실 대대장으로 갓 부임하여 군사령부 전술토의를 준비하면서도 교장사열을 준비하는 인접 대대를 수시로 방문하였고, 이미 사단장 사열을 받고 칭찬을 들었던 타부대의 장점들을 모두 가져와 적용하기로 했다. 심지어는 그동안 책임지고 사열 준비했던 부대대장에게 잘되어 있는 부대를 직접 찾아가 참고하라고도 지시했었다. 그중 타부대에서 극찬을 받았던 대공사격술 교장에 각별히 착안하여 좀 더 발전시키도록 준비했다. 예비군들이 실감나게 리드를 적용해 화망을 구성할 수 있도록 공중으로 연결된 줄에 추를 달아 모형 비행기가 빠르게 내려가도록 만들어 효과를 극대화했다. 타부대의 장점을 베치마킹하여 해당 부대에 맞게 추가 발전시키는 것이 창의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헌데 교장을 보수하는 예산은 턱없이 부족했고, 모든 장비와 설치물은 해당 교관이 준비하기 위해서는 책임 지역내의 주요 업체와 기관장들의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한 실정이었다. 따라서 이 모든 것들은 과목별 담당 교관인 예비군 중대장들이 책임지역내의 주요 기관장들과 관계가 좋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고민 끝에 새롭게 창안한 것은 수색정찰 과목에 동굴 수색을 추가한 교장 준비이다. 이는 충북지역에는 자연동굴과 폐광들이 산재해 있어 침투한 무장공비들이 동굴에 은신하는 것을 색출하고 거부하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이때 부대대장의 뚝심이 발휘되었다. 부대대장은 책임지역내에 청주역이 있는 옥산면 중대장에게 과감하게도 철로 레일과 폐침목을 협조하라고 강권했다. 난처한 표정을 지었던 예비군 중대장은 결국 레일과 폐침목을 협조해 준비했고, 필자의 대대는 동굴 및 폐광 수색정찰 예비군 훈련장을 전군에서 최초로 설치한 부대가 되었다. 이는 예비군교장 사열시에 처음으로 새롭게 조성한 동굴 및 폐광 수색정찰 훈련장을 확인하며 필자의 설명을 듣던 사단장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띄우게 만들었다. (다음편 계속)
    • 오피니언
    2024.06.27 14:05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31] ‘김정일 얼굴이 그려진 샌드백’과 동굴 수색을 추가한 예비군교장 사열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군사령관 조성태 대장의 군사전략 구상을 구현했던 공군비행장 방어 전술토의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연초에 향토사단 부대들의 가장 중요한 업무인 예비군교장 사열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동안 먼저 시행한 인접 대대들의 사단장 사열은 해당 부대의 열정을 다한 노력 결과 매번 사딘징의 칭찬이 계속되었고, 상급부대 지시에 의해 타부대들은 사열한 부대를 방문하여 잘된 사항들을 벤치마킹하기에 바빴다. 특히 예년에 없었던 대공사격술 교장은 인접연대의 사단장 사열시 공중으로 이동하는 표적에 대해 리드를 적용한 대공사격술 훈련을 체험할 수 있도록 착안해 준비한 것은 당시에 대히트였다. 다행히도 청원대대에 부임전에 경기도 일산 부근에서 예비군 관리대대장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는 부대대장 이완목 소령(3사14기)이 지팡이를 짚고 있는 필자를 대신해서 현장을 발로 뛰며 공휴일에도 직접 교장에 나와 확인하여 예하 23명의 예비군 중대장들도 동참하며 교장의 보수 및 정비작업을 함께해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다. 헌데 전술토의 다음날 교장을 지도 방문한 부연대장은 과목별 교장은 잘되어 있는데 단계별로 이동하며 훈련을 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각 교장이 지그재그식으로 배치되어 혼선이 생긴다며 사열을 앞두고 시간이 부족하지만 완벽하게 순환식으로 조정 배치하면 금상첨화(錦上添花)라는 개선책을 제시했다. 그동안 애써 준비했던 부대대장 이 소령도 “2%가 부족한 데 지금 바로 시정하자”고 건의했다. 필자의 생각도 같았다. 바로 4일 뒤인 월요일에 사단장의 교장사열이라 어쩔 수가 없이 전 교장을 순환식으로 재배치 조정 작업에 즉시 투입해야만 했다. 그동안 군사령부 전술토의에 집중했던 대대장이 현장을 확인하고 사열을 완벽하게 준비하기 위해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예비군 중대장들을 소집했다. 휴일 이틀 동안 교장에서 간판을 옮기고 좌석을 다시 배치해 조정하는 등 부연대장의 지적을 급하게 개선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그 결과 공군기지 방어 전술토의 성공적 개최에 이어 기대 이상의 점입가경(漸入佳境)이 되는 성과를 얻었다.(다음편 계속)
    • 오피니언
    2024.06.26 14:56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30] 독불장군 경호실장과 고독한 황태자의 신경전④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그러나 박지만에게 또 한번 시련이 찾아왔다. 생도 3학년 시절인 1979년 10월26일에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에 맞아 서거했기 때문이다. 박지만은 1981년에 학사학위를 취득하며 육사를 졸업하며 방공포병병과 소위로 임관한 후 대구에 있는 방공포병학교에서 초급장교 군사반 교육(OBC)를 받았다. 장교생활은 당시 수도권의 빌딩 방공포 진지에 배치되어 시작했다. 하지만 복무 중에 교통사고를 당했고, 이 후유증으로 의무복무만 마치고 1986년에 육군 대위로 예편하였다. 이후 육영재단 이사를 지냈으며, 1991년에는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과 친했던 박태준의 주선으로 삼양산업을 인수하였다. 삼양산업은 2000년 코스닥에 상장하면서 상호를 이지(EG)로 변경하였으며, 회장인 박지만은 회사를 내실있게 성장시키며 잘 경영하고 있다. 2004년 12월, 16세 연하의 변호사 서향희와 결혼했다.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진행된 결혼식의 주례는 소망교회의 곽선희 원로목사가 맡았으며 결혼식은 하객들을 최소화 한채 조촐하게 치러졌다. 현재 슬하에 4남을 두고 있다. “삶! 모두가 가야할 길이라면 차라리 나만의 길을 걷고 싶다. 화랑대! 너와의 영원한 우정담을 흩어져 나뒹구는 저 낙엽속에 적어 아주 먼 훗날 추억속에 노래하면 아니될까....” 육사 졸업앨범에 박지만이 남겨 놓은 글이다. 하지만 그와 고교 동기이자 절친이었던 전 기무사령관 고(故) 이재수 장군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여파로 검찰의 수사를 받다가 군의 명예를 지키면서도 자신 때문에 선후배들이 어려워질 것을 우려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 장군의 장례식장을 끝까지 지켰던 박지만의 슬픔을 가중시켰다. 하지만 ‘차라리 나만의 길을 걷고 싶다’고 남긴 글처럼 비운의 고독한 황태자 박지만은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많은 시련과 아픔을 겪었지만 주변의 모든 유혹을 뿌리친 채 지금도 꼿꼿하게 모범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는 자랑스런 동기생이다.
    • 오피니언
    2024.06.25 14:03
  • [김희철의 CrisisM] 제암리 3.1운동 순국선열 6위, 105년 만에 국립묘지에 안장(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올해 3월 유족대표(장손 김연목)와 협의하여 국립묘지 이장을 결정했다. 이는 그동안 국립묘지 이장에 대한 유족 간 의견 일치가 되지 않았으나, 합동 묘소를 국가관리묘역으로 지정하는 절차를 협의하던 중 유족의 의견 일치가 이뤄지며 성사됐다. 이에 따라 국가보훈부는 6월7일 오전, 묘소를 개장해 유골을 수습한 후 함백산 메모리얼 파크에서 화장한 다음 유해를 임시 안치했다. 이후 화성시와 함께 6월8~9일 동안 화성시 독립운동기념관 내에 고주리 순국선열에 대한 추모 제단을 설치하고 시민들이 헌화와 추모의 글을 남길 수 있도록 추모 기간도 운영했다. 추모 기간이 끝나고 6월10일, 화성시 독립운동기념관에서 국가보훈부 장관, 화성시장, 광복회원, 학생 등이 참석한 가운데 고주리 순국선열 합동 봉송식을 거행하고 영현 6위를 국방부 의장병이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운구하여 독립유공자 제7묘역에 안장했다.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은 “고주리 여섯 선열의 희생과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그 숭고한 정신을 영원히 기억하고 계승하기 위해, 늦었지만 유족분들의 뜻에 따라 국립대전현충원으로 모실 수 있게 되어 너무 뜻깊고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가보훈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신 고주리 순국선열들께서 민족의 성역인 국립묘지에서 영면에 드실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모시겠다”라고 밝혔다.
    • 오피니언
    2024.06.24 10:30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29] 독불장군 경호실장과 고독한 황태자의 신경전③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나무위키에 따르면 박지만이 1977년에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육사 37기로 입교한 동기는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뜻이 아니라 고교 3학년 시절 담임 선생님의 권유와 함께 박지만 자신의 의지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박지만의 본래의 목표는 서울대 진학이었으나 고교 1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방황하며 성적이 하락했기 때문에 진로를 변경했다고 한다. 또한 육사에 입학하게 되면 더 이상 경호원들에게 둘려쌓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이를 통해 속박된 청와대의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도 전해진다. 허나 차지철 경호실장과의 갈등은 1978년 생도 2학년 시절, 하계군사훈련시에도 야기되었다. 지금은 이전했지만 그 당시 한여름에 원주 부사관학교에서 동기생 전체가 군사교육을 받았는데 불시 방문한 박 대통령에게 박 생도는 고생하는 동기생들을 고려하여 대통령이 직접 격려 회식을 베풀어 줄 것을 건의했다. 이때 차지철 경호실장은 일정에 없는 계획이라며 반대했다. 허나 박 대통령은 경호실장의 건의를 묵살하고 동기생을 배려하는 아들의 모습을 기특하게 생각하며 전 생도들에게 파티를 베풀어 사기를 고양시켰고 지금도 동기들은 대통령의 격려만찬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때 1군사령관 정승화 장군과 부사관학교장은 급작스런 파티를 준비하느라 고생을 했고, 경호실장 차지철은 박 생도를 더욱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사사건건 사소한 것까지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부자 관계를 이간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박지만 생도는 3학년 시절의 유격훈련과 4학년 때 공수훈련 등 모든 훈련을 동기들과 함께 똑같이 받으며 견고한 인내심으로 견디어내면서도 자신 때문에 더 고생하는 동기생들을 위해 보이지 않게 노력을 많이 했다는 후문도 있었다.(다음편 계속)
    • 오피니언
    2024.06.21 08:38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28] 독불장군 경호실장과 고독한 황태자의 신경전②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5.16 군사혁명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가신(家臣) 역할을 계속해온 차지철은 1974년부터는 경호실장으로 가장 근접에서 박 대통령을 보좌하며 각종 월권을 행사하여 주변의 원성을 샀는데, 가장 많은 피해를 본 사람은 김영삼 등의 정치인들이 아니라 1977년에 육사에 입교한 바로 비운의 고독한 황태자 박지만 생도였다. 박 대통령의 눈과 귀가 되어 주변을 차단하며 모든 보고를 독점했던 차지철은 육사생도 박지만의 활동도 수시로 대통령께 보고했다. 특이한 것은 박 대통령의 신임을 얻기 위해 잘하고 있는 것보다는 약간의 일탈을 주로 보고해 대통령의 아들로 혜택을 받기보다는 더욱 외로워지고 힘들었다고 한다. 간단한 실제 사례로 외출시에 친분이 있었던 사회 친구들을 만나 밤새 스트레스를 풀고 나면, 차지철 실장은 바로 그 사실을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박 생도와 만난 다음날 당시 재벌 및 고위 직책의 자제들 10명을 바로 특전사로 입대시켰다. 이런한 조치로 비운의 황태자는 친구들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으며, 심지어 박 대통령에게 죽도로 맞는 드라마까지 방영되었는데 같은 방의 동기생은 그날 등과 엉덩이에 시퍼렇게 멍이 든 것을 확인할 정도로 그는 더욱 힘들고 고독해질 수 밖에 없었다. 박지만과 절친이었던 한 동기생의 전언에 따르면 생도시절 박지만 생도는 모든 훈련에 열외하지 않고 똑같이 참여하며 상당히 인내심도 강하게 평범한 생도 생활을 했는데, 과거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 이강석(1953년 10월, 서울대 법대 법학과를 중퇴하고 1954년 육군사관학교로 재입학)을 비교하며 뭇 선배들이 많이 괴롭혔다고 했다. 박 생도를 보호하려는 훈육관들이 자정 넘어 퇴근하면 이후 심야에 상급 생도들은 주변의 동기들과 함께 수시로 불러내 얼차려를 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사례 등으로 육사 37기들은 유별나게도 덩달아 많이 힘들게 생도생활을 했으며 덕분에 1년 후배들은 오히려 편했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 (다음편 계속)
    • 오피니언
    2024.06.20 09:59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27] 독불장군 경호실장과 고독한 황태자의 신경전①
    [김희철의 직업군인이야기(214)] 5·16 가신(家臣) 차지철과 고독한 황태자(상) : 2024.05.20 19:13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차지철은 1934년 11월, 경기도 이천에서 아버지 차수찬의 3남 3녀 중 차남으로 출생하였고 한때 경기도 파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고, 이후 서울로 이사하여 서울에서 성장하였고 1953년에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육군사관학교 13기에 지원하였으나 낙방하였고, 1954년 7월에 육군 갑종장교 포병 간부후보생을 통해 육군 소위로 임관한 뒤, 보·포병 병과를 학습하였으며 의외로 미국에서 육군포병학교를 수료하였다. 1959년에 육군 공수특전단에 배치되었다가 1960년에 미국으로 가서 조지아주 포트베닝의 레인저스쿨도 수료하였다. 이듬해인 1961년 공수특전단 예하 중대장의 신분으로 박정희가 주축을 구성한 5.16 군사정변에 적극 가담했다. 쿠데타의 성공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전속부관으로 발탁되며 최고회의 의장 경호실 차장이 되었고, 1962년 3월, 육군 소령 진급에 이어 1962년 5월31일, 육군 중령 특진하여 석 달 뒤인 1962년 8월에 전역했다. 그 해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하자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고, 한양대학교에서 1966년에 석사 학위를, 1970년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이어서 계속 공화당 국회의원직을 유지했다. 그 후에는 국회 외무국방위원장까지 지내며 국회에서 나름대로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차지철은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후보에 출마하였지만 결국 낙선되었으며, 2년 뒤인 1974년에는 영부인 육영수 저격사건으로 자진 사퇴한 박종규의 후임으로 제3대 대통령 경호실장이 되었다. 이후 대통령 경호를 명분으로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는 각종 월권을 행사하여 주변의 원성을 샀다. 1976년에 이철승을 매수해서 신민당을 어용야당화 시키려는 공작을 했으나 신민당 총재가 이철승이 아닌 김영삼이 선출되자 이철승과 같이 조직폭력배 서방파 두목인 김태촌을 시켜 김영삼을 기습했다. 이에 김영삼은 3층 창문으로 뛰어내려 부상을 당하면서 도망친 뒤 맞불작전으로 본인도 조직폭력배를 고용하여 이철승을 공격하는 신민당 각목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1979년 10·26사건 현장에 있었던 경호실장 차지철은 김재규의 총격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운명을 달리한 박 대통령의 5·16가신(家臣)이었다. (다음편 계속)
    • 오피니언
    2024.06.19 10:03
  • [김희철의 CrisisM] 제암리 3.1운동 순국선열 6위, 105년 만에 국립묘지에 안장(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국가보훈부는 1919년 경기도 화성 발안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한 뒤, 화성 고주리에서 일제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되어 순국한 독립유공자 김흥열 지사(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일가 6위의 유해를 순국 105년 만에 국립묘지로 이장했다. 국립묘지 이장 순국선열은 김흥열 지사를 비롯해 동생 김성열, 김세열, 그리고 조카 김흥복, 김주남, 김주업 지사 등 6위(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로, 모두 천도교인들이다. 김흥열은 1919년 4월5일 향남면 발안 장날을 이용하여 안상용, 안진순, 안봉순, 김덕용, 강태성 등과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으며, 동생과 조카 등 온 가족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만세운동에는 1천여 명이 참여했으며, 일본 경찰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순사부장이 돌에 맞아 사망한 것을 계기로 일본 경찰과 헌병대가 대량으로 증파된 후 보복적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군중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연행하여 고문을 가했다. 특히, 4월15일 일본군 20여 명이 제암리에 도착 후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하였고, 출입문과 창문을 잠근 채 집중사격을 가했다. 이에 23명이 현장에서 죽임을 당했고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교회에 불을 질렀다. 일제 군경은 제암리 사건 후, 근처의 고주리로 이동하여 김주업의 결혼식을 위해 모였던 김흥열 등 일가족 6명을 칼로 죽이고 시체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통정대부(정3품)를 지냈던 김흥열의 아버지와 김주업의 새신부까지 죽게 되는 등 멸문의 위기에 처해졌다. 이같은 일제의 만행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분노를 사게 하여, 4월17일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F. W. Schofield)는 현장으로 달려가 사진을 찍어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에 보냈다. 또한 일부 양식있는 일본인들조차 분격케 하여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와 ‘저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 등은 학살사진과 목격자의 증언까지 곁들여 상세히 보도하였다. 이후 고주리 주민들은 불태워진 김흥열 일가 6위의 유해를 수습하여 현재 위치한 팔탄면 공설묘지에 안장하였으며, 그간 유족과 천도교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매년 4월15일 추모제를 거행해 왔다. (하편 계속)
    • 오피니언
    2024.06.18 09:07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26] 대대장 취임후 첫 히트작인 군사령부 전술토의(하)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조성태(육사20기) 대장은 창군이래 대표적인 정책 및 전략통 장교로 평가받으며 대령 시절에는 이 분야 요직인 육군본부 전략기획과장으로 2차 율곡계획 작성에 참여하며 군사력 건설, 기획 분야의 전문가로 활동했다. 다만 하나회 출신들에 밀려 대령, 준장, 소장 진급은 2차에 걸쳐서야 이루어졌다. 연대장 시절에는 자신의 부대에서 지뢰 사고로 장병 5명이 부상을 당해 하마터면 군 생활을 불명예스럽게 끝낼 뻔하기도 했다. 이후 그의 재능을 눈여겨 봤던 이종구 육군참모총장이 국방장관에 임명되면서 1991년 국방부 정책기획관으로 발탁되었다. 1992년에는 중장 진급과 함께 제1군단장이 되었고, 군단장 재임 1년만에 이전에도 그랬듯 빠르게 국방부 참모로 발탁되어 1993년부터 중장 보직 중 정책통이 맡는 국방부 국방정책실장 직을 역임하고, 1995년에는 대장으로 진급하여 제2군사령관으로 재직한 후 이듬해 전역했다. 군복을 벗은 후 잠시 국방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활동하다가, 율곡사업 시절 상관이었던 임동원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의 추천으로 1999년 김대중 정부의 2번째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 9월에 제주도에서 북한 김일철 인민부력부장과 사상 첫 남북 국방장관회담을 개최했다. 1999년 6월 제1연평해전에서의 성공적 대응으로 군 내외의 찬사를 받았고, 당시 개발이 막 끝난 K-9 자주포를 연평도, 백령도의 해병 부대에 가장 먼저 배치시켰다. 덕분에 2010년 11월23일 벌어진 북한과의연평도 포격전당시 해병대가 반격을 할 수 있었다. 이때 필자는 사단작전참모를 마치고 합동참모본부 민사심리전 참모부의 실무자로 전군 최초로 사이버 심리작전을 시행하는 대북심리작전 개선 계획을 보고하여 조성태 장관의 ‘절대동의’를 받어내는 성과를 달성하며 다시 만났다. 장관직을 떠난 후인 2004년~2007년에는 열린우리당의 공천으로 제17대 국회의 국방위 소속 비례대표로 활동했다. 그러나 당시노무현 정부의 전작권 전환 추진에 반대했고, 2007 남북정상회담을 전후로 공론화된 북방한계선(NLL) 의제화 여부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공직 생활이었다. 2021년 8월14일 향년 79세로 사망하여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 오피니언
    2024.06.17 10:37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25] 대대장 취임후 첫 히트작인 군사령부 전술토의(중)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그 와중에 대전에 위치한 BCTP단으로 열흘 동안 파견되어 사단 BCTP(전투지휘훈련) 워게임요원으로 사단이 우수평가를 받는데 기여했다. 복귀하자마자 다시 연대본부로 합류하여 ‘공군기지 방어 전술토의’ 준비를 했다. 사실은 연대 참모들이 중심이 되어 연대장을 보좌하며 준비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연대 참모들보다 하루라도 더 많이 작전분야에 근무했고 책임지역내에 비행장 경계를 담당하는 예하부대 대대장이었던 필자의 도움이 필요했었다. 결국 상급부대에 준비된 토의 계획의 보고와 실제 전술토의 전날은 연대본부에서 밤을 꼬박 새웠다. 사단장과 군사령부에 성공적으로 계획보고를 마친 연대장은 탁월한 지휘기법의 소유자였다. 연대장은 함께 며칠밤을 설쳐가면서 준비했던 까닭에 필자는 인정받음을 느끼게 했다. 또 칭찬을 아끼지 않는 연대장의 믿음에 송구스럽기까지 했고 더욱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들었다. BCTP(전투지휘훈련) 워게임요원 파견의 피로도 가시전에 투입되어 연대장이 발표하며 진행하는 전술토의의 리허설까지 했으나, 2군사령관의 일정상 몇 번이나 연기되어 짜증과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그러나 대성공이었다. 공군 비행단장은 전술토의(3월22일)를 통해 개전초기 북한군의 공격양상을 재평가하고 공군의 자체 병력만으로 기지방어가 어렵다는 것을 확신하며 군사령관의 지침에 따라 육군부대의 지원받는 실질적인 합동작전을 수용했다. 또한 후방지역에서 전략적인 작전 수행에 기여하기 위해서 육군부대는 다소 위험이 잔존하더라도 우선적으로 공군기지 방어에 전투력을 집중하여 북한의 초전 공격에 대비하며 우리의 공군력을 보존시켜야 됨을 확실하게 인식했다. 이로써 창군이래 전통을 이어오는 대표적인 전략가로 평가받는 제2군사령관 조성태(육사20기) 대장의 구상이 구현되어 육군 및 공군의 작전 계획을 변경했고, 한반도 내의 전 공군기지에 적용하도록 대통령 훈령도 수정하는 계기가 되었다.(다음편 계속)
    • 오피니언
    2024.06.14 11:25
  • [직업군인 사용설명서(424] 대대장 취임후 첫 히트작인 군사령부 전술토의(상)
    [시큐리티팩트=김희철 한국안보협업연구소장] 지휘관은 일단 취임식에서 부대기를 인수한 그 순간부터 부대의 성패를 모두 책임진다. 부임초 시간을 쪼개어 예하 23개 예비군 중대를 방문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항간에 혹자는 대대장직을 마칠 때까지 예하부대를 한번씩이라도 모두 방문하면 성공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헌데 대대장으로 취임했지만 예하부대를 방문하며 업무 파악에 주력하기보다는 BCTP(전투지휘훈련) 워게임요원 파견, 군사령부 ‘공군기지방어 전술토의’ 준비 등 당면한 추가임무들이 폭주해 기본 업무도 하기 어려운 상태가 됐다. 연초에는 일년 동안 진행할 예비군 교육을 위한 예비군 교장 사열 준비가 가장 중요한 임무였지만, 대대 책임지역내에 있는 공군전투비행장에서 다음달 군사령부 전술토의가 계획되어 연대장(신현정 대령, 삼사9기)과 거의 매일 토의준비에 시간을 보냈다. 다행인 것은 예비군 관리대대장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이완목 부대대장이 주관이 되어 착실하게 부대내에서 교장을 정비하며 사단장의 예비군 교장 사열 준비를 하였고, 반면에 임관후 줄곧 작전분야에서 근무한 필자는 대대가 아니라 연대본부에 들어가 연대장이 발표하고 진행할 전술토의 준비에 매진했다. 사단장과 연대장도 상급부대장인 군사령관이 임석하여 진행할 공군기지 방어 전술토의가 훨씬 더 중요해 모든 관심은 상급부대의 전술토의준비에 집중되었다. 특히 군사령관은 토의 장소를 비행장 안에서 공군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하도록 강조하여 책임 대대장인 필자는 비행단장을 직접 만나 협조도 구했다. 대대장 취임후 거의 한달 가까이 연대장과 매일 접하며 군사령관이 요구하는 전투비행단 방어지침에 따라 어떻게 준비해서 토의를 진행해야 효과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상의했는데 필자와 마찬가지로 연대장도 작전직능으로 서로 공감하면서 잘 소통이 되었다. 하지만 기본 임무인 연초 예비군 교장 사열 준비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대대보다 먼저 시행한 타부대의 사단장 사열에서 성공적인 평가를 받은 인접 대대를 틈틈이 방문해 벤치마킹하면서 대대내에서 교장사열 준비를 주관하는 부대대장에게 보다 창의적이고 효율적이며 재미있는 교장을 만들도록 지침을 하달하며 분주하게 보냈다. (다음편 계속)
    • 오피니언
    2024.06.13 09:38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