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5-1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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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 화백의 첫사랑과 막내 누이를 그린 그림앞에서 표정을 짓는 생전의 김기창 화백 모습과 필자에게 선물한 작품인 소싸움 그림 접시 [사진=운보의 집/김희철]

 

[시큐리티팩트=김희철 컬럼니스트] 1913년 서울에서 태어난 운보 김기창 화백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장티푸스로 청각을 잃었지만, 불굴의 의지와 자기혁신으로 ‘청록산수’ ‘바보산수’ 등 한국화의 독보적 경지를 개척하며 20세기 한국의 대표적 화가로 활동했다. 


어린 시절인 초등학교 때 청각을 잃은 운보의 고통은 육체적인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에 활동했던 데 따른 친일시비,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남침전쟁이 갈라놓은 형제간 이산 등 우리 현대사의 아픔, 그것의 현장 집합체이었다.  


이런 역경을 그 특유의 바보스럽고 천진한 웃음으로, 때론 야생마 같은 광기로 털어버리며, 자기보다 어려운 이들에 대한 사랑과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 화가로 뿐만 아니라 운보 생애의 위대함이었다. 


운보는 1930년 이당 김은호 문하에 든 지 6개월 만에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입상하며 천재성을 인정받은 이래 ‘청록산수’와 1980년대 말 봉걸레로 그린 초대형 추상화 ‘심상예술’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세계를 보여왔다.  


천주교로 개종한 운보 김기창 화백은 ‘최후의 만찬’ 등 예수님의 일대기를 특이하게도 화풍뿐만 아니라 외모나 복장, 배경을 모두 조선조의 것으로 바꿔 그려서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의 이 같은 예술적 성취의 뒤안에는 역시 탁월한 한국화가였던 부인 박래현(1976년 작고)의 동지애(同志愛)적 내조가 있었다.  


또한 운보는 30만 청각 장애인들에게 희망의 빛이었고, 대부였다. 그는 1980년 한국농아복지회를 설립, 목공 도예 등 기술을 가르치고 취업을 알선했으며 해외에서 열리는 청각장애인 스포츠대회 등에 참가비를 부담하기도 했었다. 


역경을 예술로 승화시킨 김 화백의 ‘운보의 집’을 방문한 동기들 뿐 만 아니라, 생도 시절 훈육관이었으며 인접 사단장으로 근무하던 선 장군이 전화로 부탁하여 안내했던 그의 지인(대학시절 그림 전공자)들 모두도 김 화백의 특유의 바보스럽고 천진한 웃음, 때론 야생마 같은 광기가 표출되는 심오한 그림과 주변 풍광에 감탄하였다.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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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군인 사용설명서(504] 누가 뭐래도 우리는 소중한 친구들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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