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큐리티팩트=최석윤 기자] 2026년 1월, 베이징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중관춘(中關村)의 밤은 예년보다 더욱 짙은 긴장감으로 가득하다. 미국의 첨단 GPU 수출 통제가 최고조에 달하며 엔비디아의 최신 칩인 'B200(블랙웰)'의 중국 유입이 완전히 차단된 지 2년. 당시 서구권의 많은 분석가는 중국 AI 산업이 거대한 '하드웨어의 벽'에 막혀 석기시대로 회귀할 것이라 내다봤다. 하지만 2026년 현재, 대륙이 내놓은 대답은 정체가 아닌 '우회와 최적화'였다.
오늘날 베이징 도심을 누비는 바이두 자율주행 택시 'Apollo Go'는 서구의 예상을 비웃듯 수조 건의 실제 주행 데이터를 먹어치우며 샌프란시스코의 복잡한 도로 위를 매끄럽게 흐른다. 01.AI의 거대언어모델(LLM) 'Yi-Lightning'은 저사양 국산 칩만으로도 GPT-5급의 추론 성능을 뽑아내며 글로벌 시장을 놀라게 하고 있다. 이 불가능해 보이던 '하드웨어 제약 극복'의 시나리오 뒤에는 애플,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이라는 양대 강국의 기술 심장을 모두 들여다본 유일한 거인, 01.AI의 리카이푸(Kai-Fu Lee) 회장이 서 있다.
리카이푸는 단순히 성공한 기업가가 아니다. 그는 중국 IT 산업의 발단부터 현재 전성기까지를 모두 설계하고 지켜본 산증인이다. 1990년대 초 애플에서 음성 인식의 초석을 닦았고, MS 아시아 연구소(MSRA)를 세워 현재 중국 테크계를 이끄는 핵심 인재들을 길러냈다. 이후 구글 차이나의 수장을 지내며 그가 내린 결론은 명확했다. "혁신의 씨앗은 서구에서 나오지만, 그 열매를 가장 대규모로 수확할 '데이터의 옥토'는 중국이다."
2009년 그가 설립한 '시노베이션 벤처스(Sinovation Ventures)'는 단순한 투자사를 넘어 중국 기술 스타트업의 '사관학교'가 되었다. 그는 미국식 '우아한 혁신'에 매몰되지 않고, 중국 특유 '치열한 실행력'을 비즈니스 모델로 이식했다. 그가 키워낸 수많은 유니콘 기업들이 현재 중국 AI 생태계의 골격을 이루고 있으며, 업계는 그를 여전히 '선생님' 혹은 '대부(Godfather)'라 부르며 그의 입을 주목한다.
리카이푸의 철학은 명쾌하다. "기술의 가치는 발명 그 자체보다, 그것이 사회 시스템에 어떻게 구현(Implementation)되느냐에 있다." 2026년 현재, 이 말은 실리콘밸리가 직면한 가장 현실적인 화두가 되었다.
샘 올트먼이 범용인공지능(AGI)이라는 철학적 고지에 수조 달러를 쏟아부을 때, 리카이푸는 'AI의 전기화(Electrification)'를 밀어붙였다. 그는 AI를 거창한 담론이 아닌, 공장 불량률을 줄이고 물류망을 최적화하며 14억 인구의 의료 데이터를 분석하는 '실용적 도구'로 정의했다.
그의 전략은 지정학적 위기 속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고성능 칩을 구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소프트웨어 최적화'라는 카드를 꺼냈다. "칩이 부족하면 코드로 메운다"는 그의 계산은 적중했다. 01.AI는 지식 증류(Distillation)와 양자화 기술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고가의 H100 없이도 동급의 성능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전 세계 중저가 AI 시장을 소리 없이 잠식하는 중국발 '초고효율 AI'의 서막이었다.
2023년 설립된 '01.AI'는 불과 8개월 만에 유니콘 반열에 오르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2026년 현재, 이 회사는 폐쇄형 모델에 대항하는 '오픈소스 AI' 진영의 실질적인 맹주로 군림하고 있다.
01.AI의 성공 비결은 리카이푸 특유의 '애자일(Agile) 방식'이다. 애자일은 "일단 실행해보고, 깨지면서 배우고, 빛의 속도로 수정한다"는 철학이다. 변화가 극심한 AI 시대에는 이 '민첩함'이 곧 생존 전략이 된 것이다. 그는 제재가 시작되자마자 팀을 소집해 선언했다. "우리는 환경을 탓하지 않는다. 주어진 자원 안에서 최상의 코드를 짠다." 실제로 01.AI는 '딥시크(DeepSeek)' 쇼크라 불리는 중국발 알고리즘 혁명과 궤를 같이하며, 미국의 1/10 비용으로 동급 성능을 내는 데 주력했다. 이는 전 세계 신흥국들이 비싼 미국 AI 대신 리카이푸의 오픈소스 모델을 선택하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리카이푸가 쥐고 있는 또 다른 강력한 무기는 서구권이 가질 수 없는 '데이터 환경'이다. 2026년, 서구권 AI 기업들이 저작권 소송과 데이터 고갈로 신음할 때, 리카이푸는 중국 특유의 방대한 데이터 생태계를 AI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그는 이를 '데이터 연금술'이라 부른다. 14억 인구의 모바일 결제, 의료 기록, 실시간 교통 데이터는 만리장성 안에서 안전하게 정제되어 지능형 사회 인프라로 재탄생한다. 리카이푸는 서구 비판에 대해 냉정하게 답한다. "실제 사용자와 수조 번의 상호작용이야말로 AI를 가장 실용적이고 안전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 그의 시선은 이제 개별 기업을 넘어, 국가 전체를 하나의 지능형 유기체로 연결하는 '디지털 중국' 프로젝트를 향하고 있다.
리카이푸의 부상은 한국 산업계에도 샘 올트먼보다 훨씬 직접적인 위협이자 기회다. 그는 한국을 "최고 IT 인프라와 독자적 AI 생태계(네이버, 카카오)를 가진 드문 국가"라고 치켜세우면서도, 지정학적 샌드위치 상황에 놓인 한국의 딜레마를 정확히 꿰뚫고 있다.
실제로 2026년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고난도 줄타기를 이어가고 있다. 리카이푸는 미국 규제를 우회하면서도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맞춤형 AI 메모리(HBM)' 설계를 제안하며 한국 기업들에게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낸다. 그는 기술 주권이 없는 국가는 결국 거대 제국의 부품 공급처로 전락할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리카이푸는 늘 이렇게 말해왔다.
"혁신은 연구소에서 시작되지만, 승리는 시장의 발바닥에서 결정된다."
그는 스스로를 혁명가가 아닌 '적응자(Adaptor)'로 정의한다. 제재라는 거대한 암벽을 만났을 때, 그는 암벽을 부수는 대신 그 틈새로 흐르는 물줄기가 되어 바다로 나아갔다.
리카이푸가 설계한 중국 AI는 더 이상 미국의 '카피캣'이 아니다. 그것은 결이 전혀 다른, '자원 제약형 진화'의 결과물이다. 2026년, 세계는 두 개의 지능으로 나뉘었다. 샘 올트먼의 '하늘 위 지능'과 리카이푸의 '땅 위 지능'이다.
누군가는 이를 통제의 수단이라 비판하지만, 리카이푸는 그 지능으로 수억 명의 일상을 더 효율적으로 재구성하고 있음을 실적으로 증명한다. 리카이푸가 설계한 이 거대한 실험의 끝이 낙원일지 파멸일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만든 '대륙의 지능'이 이미 만리장성을 넘어 전 세계 실물 경제의 모세혈관으로 스며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과연 누가 더 인류의 현실에 가까운 지능을 설계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