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큐리티팩트=최석윤 기자] 방위산업 지도에서 스웨덴은 독특한 위치에 서 있다. 인구 1000만 명 남짓한 이 나라는 지난 수 세기 동안 중립을 국가 전략의 핵심으로 삼으며,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독자적인 방산 생태계를 구축해왔다. 그리고 그 생태계의 정점에 사브(Saab)가 있다.
2024년 스웨덴의 나토(NATO) 가입은 이 기업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중립국의 방패였던 사브는 이제 나토 체제 안에서 가장 계산적인 칼날로 재정의되고 있다. 체급은 작지만, 전장이 요구하는 질문에는 누구보다 정확한 답을 내놓는 기업. 그것이 오늘날 사브의 얼굴이다.
사브의 위상은 숫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사브의 2024년 매출은 약 640억 크로나(SEK)에 달한다. 환율을 1SEK=160원으로 적용하면 약 10조 원을 웃도는 규모다. 시장에서는 2025년 매출이 700억 크로나에 근접할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방산 대기업들과 단순 비교하면 여전히 작은 수치다. 그러나 수주 구조는 전혀 다르다. 사브의 수주 잔고는 1500억 크로나를 훌쩍 넘긴 상태다. 우리 돈으로 약 24조 원 이상. 단기 계약보다 중·장기 플랫폼 중심 수주가 많다는 점에서, 이 숫자는 사브의 체력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보여준다. 나토 가입 이후 동유럽 국가들의 주문이 본격화되면서, 사브의 장부는 빠르게 두터워지고 있다.
4.5세대 전투기 '그리펜 /EF'. 출처=사브
생존성을 설계한 전투기, 그리펜
사브를 상징하는 플랫폼은 단연 'JAS 39 그리펜(Gripen)' 전투기다. 록히드마틴의 F-35가 스텔스와 네트워크 중심전에 모든 것을 건 반면, 사브는 다른 질문에서 출발했다.
"전쟁 첫날, 공군기지가 파괴되면 어떻게 싸울 것인가."
그리펜은 그 질문에 대한 실용적인 해답이다. 고속도로와 임시 활주로에서의 이착륙, 소수 정비 인력으로 가능한 신속한 재출격. 그리펜은 분산 운용을 전제로 설계된 전투기다. 정비와 재보급이 제한된 상황에서도 작전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은, 현대전에서 가장 현실적인 생존 능력으로 평가받는다.
최신형 '그리펜 E/F'는 공식적으로는 4.5세대 전투기에 속한다. 다만 AESA 레이더, 고도화된 전자전 시스템, 센서 융합 능력은 4.5세대 플랫폼의 한계를 극단까지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사브가 선택한 전략은 '기술 이전'이다. 사브는 전투기 소프트웨어 소스코드 접근 권한을 구매국에 제공한다. 이는 미국 방산기업들이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 영역이다. 브라질, 헝가리, 태국이 그리펜을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순한 무기 구매가 아니라, 하늘의 주권을 함께 넘겨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브 자회사 코쿰스(Kockums)가 개발한 'A26급 잠수함'
바다와 하늘을 동시에 읽는 기업
사브의 경쟁력은 공중 전력에만 머물지 않는다. 자회사 코쿰스(Kockums)가 개발한 'A26급 잠수함'은 비원자력 잠수함 가운데 최상위권으로 평가받는다. 공기불요추진(AIP) 시스템을 기반으로 한 정숙성은, 특히 연안과 협수로 환경에서 강점을 발휘한다. 발트해라는 좁고 복잡한 해역에서 단련된 사브의 잠수함 기술은, 오커스(AUKUS) 이후 재편되고 있는 글로벌 잠수함 시장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사브를 '플랫폼 제조사'에서 '전장의 설계자'로 끌어올린 결정적 계기는 공중조기경보통제기 '글로벌아이(GlobalEye)'다. 비즈니스 제트기에 '에리아이(Erieye) AESA 레이더'를 결합한 이 기체는 하늘·바다·지상을 동시에 감시한다. UAE는 이미 글로벌아이를 실전 배치했고, 스웨덴과 폴란드는 차기 조기경보기로 이 플랫폼을 선택했다. 미국산 대형 플랫폼보다 비용 부담은 낮지만, 탐지 범위와 데이터 처리 능력에서는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가 잇따른다. 사브는 전장을 지배하는 힘이 '보는 능력'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미카엘 요한슨의 선택, SW 중심 시스템 기업
사브를 이끄는 인물은 미카엘 요한슨(Micael Johansson) 회장이다. 그는 사브를 전통적인 방산 제조기업이 아닌, 소프트웨어 중심 시스템 기업으로 재정의했다. AI, 클라우드, 데이터 융합은 이제 사브 무기체계의 기본 언어가 됐다. 사브의 플랫폼들은 각각이 하나의 데이터 노드로 기능하며, 전장을 실시간으로 연결한다.
요한슨은 정치적으로도 분명한 선을 긋는다. 그는 "나토 표준은 따르되, 스웨덴 기술 자산은 포기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강조해왔다. 이 태도는 사브가 미국 방산 공급망에 흡수되지 않고, 독자적인 위치를 유지하게 하는 핵심 요인이다. 그의 시선은 이미 유·무인 복합 전력과 자율 무기 체계가 중심이 될 2040년대를 향하고 있다. 전쟁은 벌어지기 전에 설계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미카엘 요한슨(Micael Johansson) 회장. 사진=사브
K-방산이 마주한 사브라는 거울
한국 방산 기업들에게 사브는 교과서이자 경쟁자다. 과거 사브와 LIG넥스원의 레이더 분야 협력은 한국 전자전 기술 발전의 중요한 발판이 됐다. 현재 진행 중인 한국의 차기 조기경보기 사업에서도 글로벌아이는 유력 후보로 거론된다. 미국 독점을 견제하면서 기술 이전의 실익을 확보하려는 한국에게, 사브는 항상 전략적 선택지로 남아 있다.
동시에 사브는 이미 경쟁자이기도 하다. 폴란드와 루마니아 등 동유럽 시장에서 K2 전차와 K9 자주포, 그리고 사브의 그리펜과 칼 구스타프 무반동총은 같은 전장에서 경쟁하며 공존한다. 이 경쟁은 K-방산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진화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물량이 아니라, 핵심 기술과 플랫폼 유연성의 싸움이다.
미국과 중국 틈새, 기술로 지켜낸 주권
미국과 중국이라는 거대 패권이 방산 질서를 재편하는 시대다. 그러나 사브는 다른 길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독자적인 기술과 명확한 전략이 있다면, 작은 국가도 스스로 안보를 설계할 수 있다.
그리펜의 날개와 잠수함의 정숙성은 단순한 무기 성능을 넘어선다. 그것은 외부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선택의 결과다. 2026년 현재, 세계 방산 지도는 빠르게 흔들리고 있다. 이 거대한 재편 속에서 사브는 규모가 아니라 방향으로 살아남은 기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