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큐리티팩트=최석윤 기자] 전쟁은 더 이상 전장에서만 결정되지 않는다. 미사일을 얼마나 많이 보유했는지, 전투기를 몇 대 배치했는지는 전쟁의 일부일 뿐이다. 진짜 승부는 전쟁이 길어졌을 때 드러난다. 무기가 소모된 이후에도 그것을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속도는 어느 쪽이 더 빠른가. 미·중 군비 경쟁의 진짜 전선은 국경선이 아니라 공장, 정확히는 반도체 제조라인이다.
전 세계가 반도체를 이야기하지만, 이를 대규모로, 안정적으로 양산할 수 있는 국가는 손에 꼽힌다. 한국, 대만, 미국, 중국. 이 네 나라가 사실상 글로벌 반도체 제조 역량의 대부분을 쥐고 있다. 나머지 국가는 설계·장비·소재·후공정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을 뿐, 전쟁을 지속시키는 ‘양산 능력’의 주체는 아니다.
2일(현지 시각) 유로아시아뉴스는 최근 분석에서 이 변화를 ‘군비 경쟁의 성격 전환’으로 규정했다. 미·중 군비 경쟁은 무기 증강 경쟁이 아니라 반도체 제조 능력을 둘러싼 공급망 경쟁으로 성격이 바뀌고 있다. 해당 기사의 분석을 출발점으로, 반도체를 실제로 생산할 수 있는 국가들의 위치와 의미를 짚는다.
유럽연합(EU)은 반도체 장비와 연구에서 강점을 갖고 있고, 일본은 소재·부품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지역에는 글로벌 군사·산업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 대규모 파운드리 클러스터가 존재하지 않는다. 인도와 동남아 역시 후공정이나 조립 단계에서는 역할이 커지고 있지만, 첨단·중간 공정을 안정적으로 양산하는 단계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반도체 산업에서 ‘설계’와 ‘제조’의 간극은 크다. 설계는 국경을 넘나들 수 있지만, 제조는 그렇지 않다. 수십조 원이 투입되는 공장, 장기간 축적된 숙련 인력, 실패를 감당할 수 있는 금융·정책 환경이 동시에 필요하다. 이 조건을 충족한 국가는 결과적으로 네 곳만 남았다.
첨단 반도체 공장 하나를 짓는 데 드는 비용은 대략 20조 원대 중후반에 달한다. 설비를 들여오고 수율을 안정화하기까지 최소 수년이 걸린다. 수율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손실은 수조 원 단위로 발생한다. 무엇보다 핵심은 사람이다. 공정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인력을 길러내는 데는 최소 7~10년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반도체 제조는 단순한 산업 정책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실패를 감내할 수 있는 국가 재정, 장기 전략, 정치적 인내가 필요하다. 이 진입 장벽이 반도체 제조국을 극단적으로 제한해왔다.
이 네 제조국은 동일한 경쟁자가 아니다. 각자 전쟁에서 맡는 역할도 다르다.
대만은 초미세 공정 파운드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인공지능(AI), 고성능 연산, 지휘통제 체계에 필수적인 최첨단 칩의 대부분이 대만에서 생산된다. 대만은 단순한 생산국이 아니라, 현대 전쟁의 ‘두뇌’를 공급하는 국가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와 중간 공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데이터 저장, 센서 운용, 네트워크 유지에 필요한 부품의 상당 부분이 한국에서 나온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메모리와 범용 반도체의 중요성은 커진다.
미국은 제조 비중은 줄었지만, 설계·장비·시스템 통합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전장 체계를 설계하고, 무기와 정보를 통합하는 능력은 여전히 미국의 강점이다.
중국은 최첨단 공정에서는 제약을 받고 있지만, 레거시 반도체 대량 생산 능력을 빠르게 확대해왔다. 이는 소모전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중국의 전략은 ‘가장 앞선 기술’보다 ‘전쟁을 끝까지 버틸 수 있는 구조’에 가깝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 현실을 명확히 보여줬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가장 먼저 문제가 된 것은 무기 자체보다 이를 구성하는 전자부품과 생산 재개 속도였다. 미 국방부 역시 고강도 분쟁 시 재고량보다 생산 회복 능력이 전쟁 지속성을 좌우한다고 분석해왔다.
현대 무기는 반도체 소모품 위에 세워져 있다. 드론, 정밀유도탄, 레이더, 통신 장비, 지휘통제 시스템 모두 반도체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반도체는 전략 자산이 아니라 생존 자원이 된다.
대만은 이 구조의 핵심에 있다. 세계에서 가장 대체하기 어려운 생산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대만 침공은 단순한 지역 분쟁이 아니다. 글로벌 군사 시스템과 산업 생태계를 동시에 흔드는 충격을 가져올 수 있다.
이 때문에 이른바 ‘실리콘 실드’는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물리적 현실에 가깝다. 대만의 반도체 생산이 멈출 경우, 그 여파는 미중을 넘어 전 세계 군사·경제 체계로 확산된다.
중국은 제재 속에서 레거시 반도체와 자국 공급망 강화에 집중해왔다. 민군 융합 전략을 통해 평시 산업을 전시 군수 체제로 전환할 수 있는 구조를 구축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이는 기술 격차를 단기간에 좁히기보다는, 전쟁 지속 능력을 확보하려는 접근이다.
미국은 동맹국의 제조 역량에 의존하는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취약하다. 공급망이 끊길 경우, 군사적 우위 역시 흔들릴 수 있다.
이 구조에서 한국은 대만 다음으로 중요한 제조국이다. 동시에 미중 모두에게 필수적인 존재다. 이는 기회이자 부담이다. 한국 반도체는 더 이상 단순한 수출 품목이 아니라, 지정학적 균형의 일부가 되었다.
한국은 관전자가 아니다. 이 경쟁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미중 군비 경쟁의 승자는 가장 강한 무기를 가진 나라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전쟁이 길어졌을 때, 반도체를 끊기지 않고 만들어낼 수 있는 나라가 마지막에 남는다. 적어도 지금의 미·중 경쟁에서는, 전장의 바깥에서 승부가 갈리고 있다. 이 경쟁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문제는 어느 쪽이 더 오래 버티느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