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큐리티팩트=최석윤 기자] 이란 외무장관 압바스 아라그치는 4일(현지 시각) 이란과 미국이 오만에서 핵 회담을 개최할 것이라고 밝혔다.
외교에서 장소는 배경이 아니라 메시지다. 특히 미국과 이란처럼 신뢰가 붕괴된 국가 간 협상에서는, 회담이 열리는 도시 자체가 협상의 성격을 규정한다. 이번 핵 협상이 애초 거론되던 튀르키예가 아니라 오만에서 열리게 된 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단순한 일정 조정이나 중립국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협상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그리고 어디까지는 가지 않겠다는 선을 명확히 긋는 신호에 가깝다.
튀르키예 이스탄불은 오랫동안 중동 외교의 교차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끝내 선택받지 못했다. 그 대신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오만이 다시 무대 위로 올라왔다. 이 변화는 현재 미·이란 핵 협상이 처한 위험한 지점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튀르키예는 최근 몇 년간 적극적인 중재 외교를 펼쳐왔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흑해 곡물 협정, 중동 분쟁에서의 조정 시도는 튀르키예 외교의 존재감을 키웠다. 이란과 서방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려는 노력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하지만 튀르키예 외교의 강점은 동시에 한계이기도 하다. 튀르키예는 협상을 보여주는 외교에 능하다. 정상회담, 공동 기자회견, 정치적 메시지가 빠르게 국내외로 확산된다. 문제는 지금의 미·이란 협상이 그런 공개성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라는 점이다.
미국은 이란의 핵 프로그램뿐 아니라 탄도미사일 개발, 역내 무장 대리세력 지원, 인권 문제까지 한꺼번에 압박하고 있다. 이란 역시 내부 시위 진압과 경제 위기 속에서 협상이 실패할 경우 감당해야 할 정치적 부담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공개 외교의 공간은 어느 쪽에도 안전하지 않다. 협상은 곧 정치적 시험대가 되고, 작은 후퇴도 '굴복'으로 해석될 수 있다.
결국 튀르키예는 너무 밝은 무대였다.
오만은 정반대의 외교를 해온 나라다. 존재감은 크지 않지만, 필요할 때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미·이란 간 비공식 접촉의 상당수는 오만을 통해 이뤄졌다. 2013년 이란 핵 합의(JCPOA)로 이어진 초기 비밀 회담이 무스카트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차례 확인된 바 있다.
오만의 강점은 중재 능력보다 신뢰 관리에 있다. 어느 쪽의 공개적 편도 들지 않고, 협상 내용을 정치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미국과 이란 모두에게 오만은 '속이지 않아도 되는 공간'에 가깝다. 외교적 성과를 과시하지 않아도 되고, 실패했을 때 책임을 전가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오만은 합의를 위한 무대라기보다, 위기를 봉합하는 임시 공간으로 선택돼 왔다.
이번 협상에서 오만이 선택된 진짜 이유는 협상에 대한 낙관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성공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조용한 장소를 택한 것이 아니라, 실패했을 때의 파장이 너무 크기 때문에 위험을 최소화하려는 선택이다.
최근 미 해군과 이란 무인기 사이의 충돌,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긴장은 양측이 이미 군사적 접점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협상은 '합의를 만들기 위한 외교'라기보다, 충돌을 관리하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
오만은 바로 그 장치 역할을 해온 국가다. 협상 자체보다, 협상이 깨졌을 때 상황이 폭발하지 않도록 완충하는 공간. 이번 회담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전문가들이 거론하는 실패 시나리오는 세 가지다.
첫째는 제재 강화다. 그러나 이란은 이미 장기간의 제재에 적응해 왔다. 추가 제재가 정책 전환을 이끌 가능성은 제한적이다.
둘째는 제한적 군사 충돌이다. 이는 가장 현실적인 시나리오다. 드론 격추, 해협에서의 우발적 충돌, 보복성 타격이 반복될 경우 긴장은 빠르게 고조될 수 있다.
셋째는 이란이 핵 개발의 임계선을 넘는 선택이다. 공식적인 핵무기 선언이 아니더라도, 전략적 모호성을 종료하고 '핵 보유 능력'을 기정사실화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이는 중동 전체의 군비 경쟁을 촉발할 가능성이 크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위험한 시나리오는 이 세 가지가 동시에 발생하지 않는 상태다. 합의 없이 현상 유지가 이어지고, 작은 군사적 사건들이 누적되는 상황이다.
전쟁은 선언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대부분은 통제되지 않은 사건들의 연쇄에서 시작된다. 오만이라는 완충지대에서조차 협상이 의미 있는 결과를 내지 못한다면, 그 다음 단계는 누구도 확실히 관리할 수 없다.
이번 미·이란 핵 협상은 성공을 장담하기 위해 열리는 자리가 아니다. 그렇다고 실패를 감당할 준비가 된 자리도 아니다. 목표는 합의가 아니라 붕괴 방지에 가깝다.
그래서 오만이었다.
그리고 그래서 이 협상은, 성공해서도 안 되고 실패해서도 안 되는 모순적인 외교의 형태를 띠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