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큐리티팩트=최석윤 기자] 현대 전장에서 승패를 가르는 요소는 더 이상 전차의 장갑 두께나 전투기의 속도만이 아니다. 적보다 먼저 보고, 먼저 판단하며, 먼저 연결하는 능력—즉 데이터 우위가 전쟁 양상을 바꾸고 있다.
이스라엘 하이파에 본사를 둔 엘빗 시스템즈(Elbit Systems)는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서 있는 대표적인 기업이다. 미사일이나 전투기를 직접 생산하는 기업이라기보다, 각종 무기 체계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는 '전장의 운영체제'를 만드는 회사에 가깝다.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 작전과 북부 레바논 국경 분쟁에서 보여준 정밀 타격 능력 뒤에는, 센서·전자전·지휘통제 체계를 통합하는 엘빗의 소프트웨어 생태계가 자리하고 있다는 평가가 군사 전문가들 사이에서 꾸준히 제기된다.
2025 회계연도 기준 엘빗 시스템즈의 매출은 약 60억 달러 수준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시장이 주목하는 지표는 매출보다 수주 잔고다.
엘빗이 확보한 미집행 계약 규모는 약 200억 달러에 달하며, 이는 향후 수년간 안정적인 생산과 연구개발 투자를 가능하게 하는 기반으로 평가된다.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전자전(EW)과 무인체계 투자를 확대하면서, 단순 화력보다 센서·통신·전장 관리 능력을 제공하는 기업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증가한 결과다.
한 유럽 방산 분석가는 "냉전 시기 방산 경쟁이 플랫폼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데이터를 통제하는 기업이 전장을 설계한다"고 평가했다.
△ 인지 전자전: 레이더보다 빠른 소프트웨어
엘빗의 자회사 엘리스라(Elisra)는 항공기 및 지상 플랫폼용 전자전 장비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 시스템은 단순 전파 교란을 넘어 적 레이더 신호 패턴을 실시간 분석하고 대응 방식을 자동 조정하는 '인지 전자전(Cognitive EW)' 개념을 적용한다.
이스라엘 공군 전투기와 각종 특수 임무기에서 운용되는 이러한 체계는 시리아 및 중동 지역 작전에서 반복적으로 실전 운용되며 성능이 검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유럽 국가들이 동일 계열 전자전 장비 도입을 검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헤르메스 900: 장기 체공 감시·정찰 플랫폼
엘빗의 대표 무인기 헤르메스(Hermes) 900은 감시·정찰(ISR) 임무에서 가장 널리 운용되는 'MALE급 UAV(중고도 장기체공 무인기)' 가운데 하나다.
이스라엘뿐 아니라 브라질, 스위스, 아제르바이잔 등 여러 국가에서 운용 중이며, 특히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과 중동 지역 작전에서 장시간 감시 능력이 입증됐다.
위성 통신 기반 운용을 통해 수백 km 떨어진 지휘부와 실시간 데이터를 공유할 수 있으며, 이는 현대 전장에서 타격 플랫폼과 정보 자산을 하나의 체계로 연결하는 핵심 요소로 평가된다.
△ 아이언 비전: '투명 전차'의 등장
엘빗의 아이언 비전(Iron Vision)은 전차 내부 승무원이 장갑 밖 상황을 360도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증강현실(AR) 헬멧 시스템이다.
이스라엘의 메르카바 전차에 적용된 이 기술은 도심전과 드론 위협 환경에서 특히 효과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가자지구 작전에서 전차 승무원의 상황 인식 능력을 크게 향상시켰다는 군 내부 평가도 공개된 바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전차를 플랫폼에서 센서 노드로 변화시키는 기술"로 본다.
△ 차세대 감시 플랫폼 '프론티어(Frontier)'
이 같은 전장 통합 개념은 엘빗이 공개한 차세대 감시 플랫폼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2025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국제 방산 전시회 DSEI 2025에서 인공지능 기반 국경 감시 체계 '프론티어(Frontier)'를 처음 공개했다.
프론티어는 육상·공중·해상 영역에 배치된 다양한 센서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통합해 실시간으로 위협을 탐지하고, 인공지능이 이를 자동으로 분류·평가하는 플랫폼이다. 단순 감시 장비를 넘어 대량의 데이터를 분석해 작전 수행에 필요한 정보만을 선별적으로 제공함으로써, 운영 인력의 판단 부담을 줄이고 대응 시간을 단축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엘빗은 이 시스템이 국경 침투, 무인기 접근, 해상 비대칭 위협 등 복합적인 현대 안보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설계됐다고 설명한다. 전문가들은 이를 “개별 센서를 운용하던 기존 감시 개념에서 벗어나, AI가 상황 인식을 주도하는 자동화된 경계 체계”로 평가하고 있다.
한국 방산업계 역시 엘빗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AS21 레드백(Redback) 보병전투차에는 엘빗 계열의 포탑 및 전자장비 기술이 적용됐으며, 이는 호주 LAND 400 사업 수주 경쟁력의 중요한 요소로 평가됐다.
또한 일부 항공·지상 플랫폼 개발 과정에서 이스라엘 기업들과의 센서 및 항전 장비 협력이 이뤄져 왔다. 다만 핵심 알고리즘과 소프트웨어 영역은 대부분 공급업체가 통제하는 구조여서, 기술 자립 문제는 여전히 한국 방산의 과제로 남아 있다.
전차, 전투기, 미사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현대 전장에서 그것들을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소프트웨어와 데이터 네트워크다.
엘빗 시스템즈는 포탄의 위력을 키우기보다, 전장의 정보를 먼저 확보하고 연결하는 능력에 집중해 왔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각국 군대가 추구하는 방향과도 맞닿아 있다.
방위산업의 중심축이 플랫폼에서 알고리즘으로 이동하는 지금, 엘빗의 경쟁력은 특정 무기 하나가 아니라 전장을 하나의 디지털 체계로 통합하는 능력에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배틀 프루븐(Battle Proven, 실전에서 검증된)'이라는 문구는 더 이상 마케팅 구호가 아니라, 실제 전장에서 축적된 데이터의 양을 의미하는 시대가 됐다.